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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놉카 고문실

인물이오시프 스탈린, 니콜라이 예조프, 라브렌티 베리야, 빅토르 아바쿠모프, 폴리나 젬추지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미하일 칼리닌,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니키타 흐루쇼프 용어굴라크, 내무인민위원부(NKVD), 국가보안부(MGB), 대숙청 사건대숙청

역사의 안개 장막 속에서 굴라크라는 이름의 저주받은 군도에 딸린 새 섬들이 하나씩 떠오르고 있다. 끝없는 시베리아 타이가 속에 묻힌 섬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없었을 것 같은 가까운 섬들도 있다. 그런데도…

모스크바 근교 비드노예시 근처에 있던 수하놉카 비밀 특수 감옥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탄압을 받은 외무인민위원부 직원 예브게니 그네딘이 지난해 『노비 미르』 7호에 실은 회고록에서 조금 읽을 수 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수용소 군도』에서 그 존재를 언급했다. 그게 전부다. 이 감옥은 스탈린 시대에 수천 명을 가두고 고문한 장소 가운데 가장 수수께끼에 싸인 곳으로 남아 있다. 이를테면 레포르토보 엄중 감옥이나 루뱐카의 소련 내무인민위원부(NKVD) 내부 감옥과 달리, 이 감옥이 있다는 것은 동네 주민들조차 짐작하지 못했다. 이곳에 비밀 군수 공장이 있다는 말이 돌았다. 수감자들은 “빵”, “우유”라고 적힌 차에 실려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감옥은 이렇게 생겨났다. 이 자리에는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차르 때 예카테리나 수도원이 세워졌고, 모스크바의 이름난 성직자들이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혁명 뒤 수도원은 문을 닫았고, 건물은 건축가 휴양소로 넘어갔다.

1937년에 이르자 레포르토보 감옥은 떠맡은 부담을 더는 감당하지 못하게 된 듯하다. 멀지 않으면서도 도시 밖에 있고, 철저히 비밀을 지킬 수 있는 분소가 필요해졌다. 수하노보 마을 근처의 옛 수도원보다 나은 곳은 찾지 못했다. 미하일 칼리닌의 지시로 수도원 주변 땅과 건물이 NKVD로 넘어갔다. 그 대신 NKVD 돈으로 건축가 휴양소 직원들의 집을 지어 주었고, 건축가들은 그 뒤로 볼콘스키 가문의 옛 영지에서 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국가보안부(MGB) 중위 출신 표트르 말체프는 1939년부터 1953년 감옥이 없어질 때까지 수하놉카에서 간수로 일했다. 솔롭키 특수 목적 감옥에서 이곳으로 전근해 왔다. 직무에 헌신한 공로로 훈장 두 개와 포상 무기를 받았다.

— 모스크바 가까이로 옮겨 와서 기뻤습니까? — 내가 말체프에게 묻는다.

— 어디서 임무를 수행하든 저한테는 상관없었습니다. 그런데 수하놉카 근무는 솔롭키보다 훨씬 힘들었어요. 듣기로는 여기에는 특히 위험한 국사범들이 갇혀 있었습니다. 솔롭키 수감자들은 그보다 단순했고요. 수하놉카 간수의 가장 큰 임무는 수감자가 자살하지 못하게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감옥은 미결 구치소였거든요. 루뱐카에서 온 수사관 예닐곱 명이 여기서 동시에 신문을 했습니다. 신문은 주로 밤에 했어요. 2주 넘게 우리 감옥에 머문 수감자는 드물었습니다. 피의자에게서 진술을 받아 내는 공식 기한이 그렇게 정해져 있었으니까요.

— 그럼 수하놉카에는 한 번에 몇 명이나 갇혀 있을 수 있었습니까?

— 150명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탈옥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겠군요.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감옥은 70명이 지켰고, 바깥쪽은 특수 중대가 경비했어요. 근무에 들어가면 감옥 당직 책임자에게서 지시를 받았습니다. 내 구역 수감자 가운데 누구는 자도 되고 누구는 안 되는지를요. 나는 보통 감방 여덟에서 열 개를 맡았는데, 1분 반이나 2분마다 처음 감방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게 짜여 있었습니다. 감방에 소리 없이 다가가도록 바닥이 부드러운 특수 장화를 신었고요.

수감자들은 가로세로 1.5미터에 2미터인 옛 수도사 독방에 갇혔다. 그 가운데는 여자들도 있었다. 말체프의 증언에 따르면 몰로토프의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도 그 하나였다. 그녀는 감방이 아니라 수사관 집무실에 바로 갇혀 있었다. “우리 간수들조차 그녀가 있는 곳을 들여다보는 창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무슨 일에도 익숙해진 이 중위조차 특별했다고 말하는 수감자가 또 하나 있었다. 그는 그 사람과 마주친 일을 이렇게 회상한다.

— 근무 전에(1939년 여름쯤이었습니다) 특별 지시를 받았어요. 지금 수감자 하나를 신문하러 데려갈 텐데, 단단히 붙잡고 바짝 신경 쓰라는 겁니다. 그런 지시는 처음이라 의아했지요. 우리는 언제나 바짝 긴장해 있었으니까요. 감방에 들어가 보니 죄수복을 입은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가 내 앞에 있었습니다. 수운 인민위원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그래, 우리가 놀랄 처지는 아니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왜소하고 풀이 죽어 있었거든요. 우리는 그 사람 초상화를 거의 신처럼 떠받들었는데 말입니다. 우리 수하놉카 감옥을 세운 사람이 바로 니콜라이 이바노비치라는 것도 자랑으로 여겼고요.[1]

예조프는 라브렌티 파블로비치 베리야가 직접 신문했습니다. 베리야는 우리 감옥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밤에 오곤 했습니다. 예조프는 우리 감옥에 몇 달 있다가 다 죽어 가는 몰골로 실려 나갔습니다.[2] 라브렌티 파블로비치는 그 뒤에도 계속 왔고요.

수하놉카에는 크렘린과 바로 연결된 전화가 놓인 베리야 전용 집무실이 꾸며져 있었다. 주인은 필요하면 여기서 잠을 잤고, 이곳에서 수사관들과 감옥 지휘부를 불러 늘 회의를 했다. 전쟁 뒤에는 국가보안부 장관 빅토르 아바쿠모프도 이곳에 자주 드나들었다.

독일과 전쟁이 시작되자 수하놉카는 소개되었다. 그러다 1942년 말쯤부터 체포된 군인들을 이곳에 가두기 시작했다. 말체프는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NKVD 내무군 특수 목적 사단 소속으로 되어 있었다.

전선이 모스크바에서 꽤 멀리 밀려나자 수하놉카는 다시 “맡은 사명의 수행”에 나섰다. 표트르 말체프는 간수 일을 계속하면서 전쟁 뒤 “이념 일꾼이 되기로” 하고 소련공산당 모스크바시위원회 부설 마르크스-레닌주의 대학에서 3년 동안 통신 과정을 밟았다. 그러나 끝내 당 일꾼이 되지는 못했다. 흐루쇼프 때 이미 문화 분야, 곧 타간카 감옥의 클럽장으로 직장 생활을 마쳤다.

역시 비드노예의 이웃 동네에 사는 야코프 표도로비치 세로프는 수하놉카 감옥의 당 조직 비서로 일하며 감옥 인원의 훈련을 지휘했다. 그는 국가보안부 당 협의회 대의원 위임장을 기념으로 내게 주었다. 세로프는 이 협의회에 늘 참석했다. 아바쿠모프, 미로노프를 비롯한 탄압 기구 지도자들을 개인적으로 알았다.

— 우리는 인민 앞에 진 무서운 의무를 다했습니다. 우리가 겪은 일이란… 저는 당 비서로서 보드카 한 잔 때문에도 직원들을 호되게 나무랐어요. 그런데 스탈린이 죽자 우리 모두 하나같이 지독하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긴장이 풀렸다고나 할까요… 생각해 보세요. 그 오랜 세월을 힘과 공포와 적에 대한 증오의 한계에서 버텼으니! 늘 경계해야 했습니다. 그래, 생각나는군요. 우리 정치 부소장이 몇 번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 사람이 변질되고 있다는 게 느껴졌어요. 의무보다 살림살이 이야기를 점점 더 많이 하더란 말입니다. 그게 영 거슬렸습니다. 우리 부부는 가난하게 살았거든요. 그래서 그가 한 말을 보고했습니다.

— 그러니까 감옥 정치 부소장이 어떤 해로운 선동을 하는지 알려야 할 곳에 알리는 것이 당신의 의무라고 여겼다는 겁니까?

— 아니, 뭐, 대체로는 누가 물어보길래 정직하게 말한 겁니다. 재판은 내가 한 게 아니라 군사재판소가 했고요. 모두 법대로였습니다. 우리 감옥에서는 불법이 허용되지 않았어요. 권력이 합법적이었으니까요. 우리는 그 권력을 지켰고요. 지금이야 물론 탄압받았다는 사람들이 이제 와서 목소리를 내고 억울해하지요. 예전에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다시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이제 위에서 글라스노스트를 내려 주니 우리를 온갖 욕으로 부릅니다. 사형집행인이니 뭐니. 하지만 말씀드리자면, 전쟁 때 우리 감옥 수감자들은 블린을 먹었고 우리 직원들은 비트 잎사귀 멀건 국을 먹었습니다.

세로프는 피의자들에게 물리적 압박이 가해졌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야코프 표도로비치의 표현을 빌리면 신문실에서 “큰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수감자들에 대해서는 어떤 인상이 남아 있을까?

— 여기 갇힌 사람들은 교양 있고 똑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소란을 피우지 않았어요. 형사범들과는 달랐지요. 그놈들은 간수 머리에 변기통을 뒤집어씌울 수도 있었으니까요.

사람들은 수하놉카에서도 존엄과 사람의 모습을 지키려고 애썼다. 그런데 이곳에서 나가는 길은 둘뿐이었다. 총살 아니면 강제 노동. 말체프도 세로프도 수감자가 풀려난 경우를 한 번도 기억하지 못했다.

수하놉카 감옥에서 대량 학살이 있었는가? 내가 만난 두 사람은 이를 부정했다. 하기야 그들은 블린에 대해서도, 법을 지킨 데 대해서도 자기 의견을 말했다.

안타깝게도 지금 살아 있는 수하놉카 수감자는 한 명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이 고문실의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던 중에 퇴역 내무부(MVD) 중령 유리 니콜라예비치 보고몰로프를 만났다. 그는 올봄까지 노동조합회관 관리 책임자로 일했다. 그는 1958년 여름, 이미 감옥이 아니게 된 옛 수하놉카 감옥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그의 이야기는 이렇다.

“나는 모스크바의 내무부 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주로 교관들로 이루어진 일행에 끼어 ‘베리야의 개인 감옥’으로 견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흔히 그렇게 불렸지요. 감옥 안은 탄압 시기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고 들었습니다. 도착해 보니 두꺼운 수도원 담장 모서리마다 나무 망루가 서 있었습니다. 주변은 탁 트인 빈터였고요. 이 감옥에서 오랫동안 잡역을 한 사람이 우리를 안내했습니다.

지하실로 내려갔습니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암흑’ 징벌방 여섯 칸이 있었어요. ‘안내인’ 말로는 수감자들이 이곳에서 며칠씩 지냈다고 합니다. 축축하고 추워서 놀랐는데, 내 생각엔 하루면 얼어 죽을 것 같았습니다.

지하실에서 승강기가 2층으로 이어졌고, 그곳에 베리야의 집무실이 있었습니다. 올라가 보았지요. 베리야 집무실 입구는 벽장처럼 꾸며져 있었습니다. 집무실 바닥은 쪽모이 마루였고 벽에는 참나무 판자를 댔습니다. 초록 나사천을 씌운 책상이 있었고요.

가장 끔찍한 것은 그다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처형 장소로 안내되었어요. 잡역부 출신 안내인이 수도원 성당의 십자가들 사이로 솟은 그을린 굴뚝을 가리켰습니다. ‘이 굴뚝으로 날아간 반혁명 놈들이 몇백은 됩니다.’

성당 안에서 우리가 본 광경은 이랬습니다. 바닥에는 주철판이 깔려 있었습니다. 입구 맞은편에 쇠문이 달린 화덕이 있었고, 그 옆에 바퀴 달린 쇠 들것이 놓여 있었어요.

성당 네 모퉁이에 사람 키만큼 높고 휘어진 방탄 방패가 서 있고, 눈높이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는 것은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알고 보니 희생자를 성당 안, 정확히는 화장로가 있는 쪽으로 데려와서 네 방향에서 나강 권총으로 쏘았던 겁니다. 대개 그 사람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조차 알아차릴 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조수들이 시체를 들것에 올려 중유로 때는 화덕에 넣었습니다. 살해는 화장로 연기가 근처 주민들 눈에 띄지 않는 밤에만 했습니다.

그때 나는 완전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몇 베르스타 떨어진 곳에 자기 나라 사람들을 위한 진짜 강제수용소가 있었다니. 나는 신자였던 적이 없지만, 십자가조차 떼지 않고 성당에 살인 시설을 차렸다는 것은 신성모독의 극치로 보였습니다.”

어쩌면 탄압 시기의 문서고에 걸린 금지가 완전히 풀릴 날이 올 것이고, 그러면 수하놉카에 관해 지금 아는 사실도 더 정확해질 것이다. 아니면 반대일 수도 있고… 그 무서운 스탈린식 의식을 치르면서 문서를 어떤 식으로 꾸몄는지 누가 알겠는가? 거기 적힌 숫자와 사실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사람들의 기억이야말로 가장 믿을 만한 증언이다.

어떤 기적인지 수하놉카 안에는 1930~1950년대에 수감자들을 둘러쌌던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수도원 건물들은 모스크바주 집행위원회 내무총국 교육 센터 소유다. 성당은 창고로 쓰인다. 감옥 건물 두 동은 기숙사로 개조되고 있다.

— 베리야 집무실에 가 보시겠어요? — 젊은 건설 노동자들이 되묻는다. — 가시죠, 거긴 우리 탈의실이에요.

참나무 판자 벽에는 여러 자세를 취한 여자들 사진이 붙어 있다. 그래도 쪽모이 마루는 아직 튼튼하다. 베리야가 쉬던 구석에서 검은 고양이가 자고 있다.

역시 수감자들이 갇혀 지내다 고문으로 죽어 간 셋째 감옥 건물에서는 시끌벅적한 소리와 즐거운 말소리가 들린다. 이곳에 스무 가구가 산다. 복도에는 대야와 그릇 따위, 유모차가 놓여 있다…

몇십 년 전 죄 없는 사람들을 고문한 곳에서 즐거워하고 다투고 잔치를 벌이고 잠자는 것은 이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의 처지는 간단히 설명된다.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세로프와 말체프 같은 이들이 사는 번듯한 요즘 아파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스탈린 탄압 희생자 기념관을 세우자는 글과 말이 많다. 모금도 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이 고귀한 일에 제 몫을 보태고 싶어 한다. 그런데 내 생각은 이렇다. 모은 돈으로 지금 수하놉카 감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집을 지어 주고, 수도원 터를 탄압 희생자 기념물로 만드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남아 있는 것, 그것도 거의 모든 것이 남아 있는 이곳이야말로 민중의 슬픔을 기리는 비통한 기념물이다.

지금의 연구자들이라면 수하놉카 고문실의 모습을 최대한 정확하게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감옥에서 일한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다. 어쩌면 수하놉카의 지옥을 거치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곳에서는 공사가 한창이다. 기억이 허물어지고 있다.

알렉산드르 안닌

주석

  1. 옮긴이 주: 옛 수도원 건물은 1937년 칼리닌의 지시로 NKVD에 넘어가 천천히 감옥으로 개조되고 있었고, 그 무렵 예조프가 이곳에 고위 정치범을 가둘 특수 감옥을 두자는 생각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을 특별 체제 감옥으로 급히 개조한 것은 베리야다. 예조프가 사임을 청한 1938년 11월 23일, 베리야는 몰로토프에게 이 건물에 국가보안총국 직속 “특별 격리 감옥”을 갖추겠다는 서한을 보냈고, 12월 초부터 공사를 서둘러 1938년 말에서 1939년 1월 사이에 감옥이 문을 열었다. 예조프 자신은 이듬해 4월 이 감옥의 수감자가 되었다. 감옥이 문을 열 무렵인 1939년 1월 10일에는 스탈린이 중앙위원회 명의의 암호 전보로 NKVD의 고문 승인 방침을 재확인했다(흐루쇼프 비밀보고에 인용). 「Горькая память „Сухановки“」(Маленькие истории, 2016); 마르크 얀선·니키타 페트로프, 『스탈린의 충성스러운 사형집행인 니콜라이 예조프』(2002) 8장. ↩
  2. 옮긴이 주: 예조프는 1939년 4월 체포된 뒤 재판 때까지 주로 수하놉카에 갇혀 있었다. 1940년 1월 9일 대엽성 폐렴에 걸려 병세가 나빠지자 베리야가 스탈린에게 보고한 대로 1월 13일 부티르카 감옥 병원으로 옮겨졌고, 2월 1일에는 다시 수하놉카의 베리야 집무실로 불려 갔다. 이튿날 군사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2월 초 총살되었다. 간수가 기억하는 “다 죽어 가는 몰골”로 실려 나간 일은 이 병원 이송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마르크 얀선·니키타 페트로프, 『스탈린의 충성스러운 사형집행인 니콜라이 예조프』(후버 연구소 출판부, 2002) 8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