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예브게니 그네딘, 『미궁에서 나오는 길』

인물예브게니 그네딘, 안드레이 사하로프, 막심 리트비노프, 라브렌티 베리야, 보그단 코불로프, 블라디미르 데카노조프, 니콜라이 예조프, 이오시프 스탈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게오르기 아스타호프, 드미트리 불라토프, 게오르기 치체린, 다비트 랴자노프, 알렉산드르 파르부스, 바츨라프 보롭스키, 표트르 보이코프, 로만 루덴코, 야코프 말리크, 미하일 칼리닌, 세르게이 키로프, 니콜라이 부하린, 일리야 에렌부르크,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알렉산드르 게르첸, 알렉산드르 블로크,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블라디미르 레닌, 막심 고리키, 니콜라이 네크라소프,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 비사리온 벨린스키, 미하일 바쿠닌, 레프 톨스토이,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아돌프 히틀러 용어굴라크, 내무인민위원부(NKVD), 대숙청, 신경제정책(네프), 군사합의회의 사건대숙청, 베리야의 몰락

서문

1977년 암스테르담의 게르첸 재단은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그네딘의 회고록 『파국과 두 번째 탄생』을 펴냈다. 알 수 없는, 아마도 우연한 사정으로 이 책에는 지은이 원고의 마지막 장들이 실리지 않았는데, 그것은 원고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지은이는 발표되지 않은 이 장들을 보완하고 발전시켜 독립된 작품으로 만들었고, 거기에 『미궁에서 나오는 길』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나는 그네딘의 두 책이 우리 시대의 근본 문제에 관심을 가진 독자의 마음을 끌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그네딘은 회고록에서 자기 삶을 그려 보인다. 그 삶은 아무리 남다르다 해도 그의 세대가 겪은 운명을 비추고 있다. 출발점의 그네딘은 신념으로 혁명가였고 삶에서는 이상주의자였으며, 막대한 해외 유산을 털끝만 한 망설임도 없이 소비에트 국가에 내놓은 사람이었다. 그는 소련 대외정책의 이름난 일꾼이었고, 리트비노프의 가장 중요한 보좌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39년 그네딘은 체포되어 베리야의 집무실에서, 이어서 수하놉카 특별체제 감옥에서 구타를 당했지만, 남도 자신도 거짓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다. 그 뒤로 두 해 동안의 지극히 엄격한 격리, 판에 박힌 무법의 재판, 수용소의 일반 노역, 유형이 이어졌고, 스탈린이 죽은 뒤에는 복권이 찾아왔다(아직도 영향력이 있던 몰로토프의 개입으로 늦어진 복권이었고, 스탈린 탄압의 다른 모든 복권된 희생자들처럼 스탈린 이후의 국가에서 사람을 다소 이등 시민으로, 상처받기 쉬운 처지로 남겨 두는 복권이었다). 그다음은 문필과 언론 일을 하며 보낸 세월, 그리고 변변찮은 연금이었다. 이것이 지은이가 많은 세부와 함께, 때로는 충격적인 세부와 함께 들려주는 운명의 바깥 테두리다. 이 테두리 안에는 치열한 내면의 삶이 들어 있다. 그 내면의 삶이 루뱐카에서, 그리고 수하놉카 특별체제 감옥에서 보낸 가장 끔찍한 나날에 그네딘을 지탱해 주었다(이 감옥과 관련해 그네딘은 스탈린이 즐겨 쓰던 불길한 속담이자 지령, “뱀은 뱀이고, 감옥은 감옥이다”를 떠올린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지은이의 고통스러운 회의와 모색이다. 그것은 윤리적·철학적·정치적·사회경제적인 회의와 모색이었고, 그와 비슷한 운명을 겪은 다른 많은 사람과 달리 국가를 위해 한창 일하던 때에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은이가 마침내 새롭고 철학적으로 깊으며 인간적인 바탕 위에서 얻은 마음의 평형이다. 그러나 지금도 그네딘은 이렇게 쓴다. “내 세계관의 위기는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실제로 이 책에는 (다행스럽게도!) 최종적인 해결이 없고 보편적인 해답도 없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선과 악의 경계를 찾으려는 열정적인 탐구, 그리고 수단과 목적을 뒤바꾼 것에 대한 단죄다. 그 뒤바꿈이 우리나라를 가까운 과거의 참상으로, 그리고 현재 온 세계에 불길한 관료주의적 정체로 이끌었다. 그러면서도 우리 현실의 온갖 부정적인 면을 똑똑히 아는 그네딘의 입장에는 고통으로 얻어 낸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낙관이 두드러진다.

이 책에는 생각이 많고, 지은이의 깊은 견해와 관찰이 많다. 나는 지은이의 사상 체계를 요약하지 않겠다. 그것은 내 생각과 꼭 같지 않고, 나는 그것을 왜곡할까 두렵다. 다만 몇 구절을 골라 인용하겠다.

“(솔제니친의) 거짓으로 살지 말라는 호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을 구별해야 한다는 생각 그 자체다.” 이 생각에는 솔제니친도, 그리고 그에게 호의적인 많은 반대자들도 이의를 달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스탈린의 지배 아래 있던 당 관료 집단의 역사적 범죄는 네프를 청산한 것, 다시 말해 혼합경제의 조건에서 나라가 순조롭게 발전할 전제를 없애 버린 것이었다.”

“반쯤 농업국인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생각은 농민에 대한 대량 탄압의 근거가 되었다.”

“나는 상기시키고자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도, 개인의 운명에서도, 저 풍요롭고 혁명적이며 혁신적인 정신은 없앨 수 없다. 그 정신은 동시에 비극의 정신이기도 하다.”

맥락에서 떼어 놓고 보면 이 마지막 인용문은 그 아름다운 모호함 때문에 내게 얼마간 속으로 경계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책 전체의 맥락은 그네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혁명적 폭력도, 정치적 모험주의와 냉소주의도 아니고, 바로 사회와 삶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혁신의 정신, 그런 의미에서 혁명적인 정신임을 보여 준다.

그네딘의 회고록은 정신적으로 먼 길을 걸어 변화해 온 사람의 감정 어린 고백이다. 그 안에서 시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곱사등이의 눈」: “내 혹은 나의 의무… 오직 지난날 잃은 것의 아픔만이 눈 속에 그리움으로 비친다”. 「곱사등이의 두 번째 탄생」—책 제목도 여기서 나온 것일까?—: “길에서 나 자신을 잃지 않는 것, 가슴속에 타오르는 나의 의무가 내게 지우는 것은 그것뿐”).

이 책의 중심에 놓인 알레고리적 형상은 미궁이다. 그것은 불행한 사람들이 고통받으며 출구를 찾지 못하는 감옥의 복도일 뿐 아니라, 비극적으로 헤매는 사유의 형상이자 “역사의 아이러니”의 구현이다. 그네딘에게 수백만을 죽게 했고, 새롭고 더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꿈 자체를 죽이고 있으며, 온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시대의 미궁은 수단의 변질과 그에 뒤따르는 목적의 바꿔치기로 만들어진다. 혁명적 이상주의 대신 테러가 나타난다(수단의 바꿔치기). 위대한 꿈 대신 사리를 탐하는 관료주의가 찾아온다(목적의 바꿔치기). 그네딘의 이 기본 윤리 명제는 논란의 여지가 없고 깊다. 맨 처음의 목적들을 어떻게 보든, 곧 그것을 고결한 유토피아로 여기든, 인류 앞에 놓인 문제의 본질을 꿰뚫은 천재적 통찰로 여기든, 위험한 미망으로 여기든 그렇다.

그네딘이 주목하는 중심은 그의 세대(“붉은” 쪽이든 “흰” 쪽이든) 사람이 지닌 성격, 곧 (회고록에서 빌려 쓴 게르첸의 표현대로) “시대적 성격”에 대한 사회학적·심리학적 분석이다. 그 성격은 인류의 거대한 문제에 사심 없이 헌신하는 한편, “미궁”으로 이끄는 변질의 가능성도 품고 있다.

나의 짧은 소개로도 그네딘을 사로잡은 문제들이 지닌 보편적 인간적 의의, 그리고 그가 들려주는 운명의 남다름과 동시에 전형성이 드러났기를 바란다.

그네딘의 회고록을 완전한 형태로 러시아어와 외국어로 출판하는 일은 내게 중요한 일로 보인다. 1978년 11월 29일

모스크바
안드레이 사하로프

지은이의 말

1977년 암스테르담의 게르첸 재단은 나의 회고록 『파국과 두 번째 탄생』을 펴냈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게르첸 재단의 운영자들에게 깊이 감사한다.

그 책에는 나의 『수기』 가운데 막심 막시모비치 리트비노프가 인민위원 자리에서 해임된 일, 외국 특파원 전보에 대한 검열이 폐지된 일, 1939년 5월 내가 체포된 경위를 다룬 부분이 실렸다.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에 대해 내게서 거짓 진술을 받아 내려다 헛수고로 끝난 수사의 첫해 이야기도 담겼다.

출판사가 『수기』의 마지막 부분을 가지고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어쨌든 그 부분은 발표되지 않았고, 독자는 수사가 어떻게 끝났는지, “재판”이 어떠했고 판결이 어떠했는지, 지은이의 그 뒤 운명은 어떠했는지 모른 채 남았다. 지은이가 “두 번째 탄생”이라는 그토록 큰 개념으로 무엇을 뜻했는지도 분명치 않게 남았다. 『수기』의 마지막 부분은 바로 이것을 다룬다. 그것은 수사의 둘째 해, 그리고 1940년 6월부터 1941년 7월까지 비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내가 곰곰이 생각하고 겪은 것에 대한 이야기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야기의 테두리가 넓어지고, 1920년대에 형성된 지은이의 세계관이 어떻게 바뀌었는지가 더 뚜렷이 드러난다. “두 번째 탄생”을 말하며 이 개념을 책 제목에 넣었을 때 내가 염두에 둔 것이 바로 이 가치의 재평가였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수기』의 마지막 장들 가운데 발표되지 않은 판본을 보완했다. 독자가 이 부분을 미궁에서, 기만과 자기기만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모델”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여 주었으면 한다.

감옥의 막다른 골목에서

생각이 행동이 되다

“뱀은 뱀이고, 감옥은 감옥이다.” 이 동방의 속담을 즐겨 되뇌던 사람은 다름 아닌 스탈린이었다. 그는 감옥이란 독사와 같아서 그 본질부터 사람을 파멸시키는 것이라고 기꺼이 일깨우곤 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감옥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스탈린의 이 독기 어린 말은 감방에서 한 전직 당 일꾼이 내게 들려주었다. 독재자의 입에서 이 경구는 지령의 의미를 띠었다. 스탈린의 말이 뜻하는 바는, 당국은 잔혹해야 하고, 감옥은 고문실이어야 하며, 감옥과 수용소에 갇혀 지내는 일은 고통스러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하놉카 특별체제 감옥은 스탈린의 잔혹한 요구를 베리야가 치밀하게 궁리해서 교묘하게 실현한 것이었다. 나는 1940년 6월부터 13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다. 수하놉카 감옥에는 분명 두 가지 용도가 있었다. 도시 바깥 외진 곳에 자리 잡은, 고문과 총살을 위한 고문실이라는 용도, 그리고 무법의 희생자들을 “보존 처리”하기 위한, 격리되고 비밀에 부쳐진 감금 장소라는 용도였다.

수하놉카 감옥에는 온갖 “기술”이 쓰이는 지하실과 감방이 있었고(이야기로 들어서 안다), 옛날식으로 두들겨 패는 텅 빈 교회가 있었다(내 경우). 때로 피의자는 수사관들 말마따나 그에 걸맞은 “처리”를 받으려고 잠깐만 수하놉카로 실려 왔다. 어떤 때는 겁을 주려고 수감자에게 수하놉카를 보여 주기만 하고 다시 보통 감옥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고문실을 고문에도 쓰고, 그 뒤 바로 그 수하놉카에서 엄격한 격리를 계속하는 데도 쓰는 일이 잦았다. 내게 일어난 일이 바로 그랬다. 수하놉카 감옥에 실려 온 수감자를 곧바로 엄격한 체제 아래 한 달씩, 때로는 한 해씩, 아니 그 이상씩 두는 일도 있었다.

내가 아는 수하놉카 수감자들의 이름을 대 보겠다. 게오르기 아스타호프(소련 외교관, 나와 친분이 두터웠다). 무르만스크 주당위원회 서기를 지낸 예르밀 보보첸코(나는 수용소에서 그를 만났는데, 당 기구 사람이자 모략꾼으로, 수용소에서 좀스러운 투기꾼이자 밀고자가 되었다). 이름난 경제 일꾼이자 키로프의 벗이던 칭기스 일드림(수하놉카에서 나의 첫 감방 동료)[1]. 바쿠에서 온 기술자 도로질로프(잠깐 내 감방 동료였던 호감 가는 사람). 동방에서 소련 영사를 지낸 아프레소프. 푸틸로프 공장에서 일하던 기술자이자 발명가 바실리예프(그는 수하놉카에서도 빵으로 기계 모형을 만들었다). 성을 알지 못하는 바쿠 사람 몇.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을 지낸 불라토프. NKVD 요원 크레이닌(뒤에 이야기할 밀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조프. 이것은 내가 알게 된 이름을 늘어놓은 것일 뿐이어서, 이 목록으로 당시 수하놉카 수감자들의 구성과 면모를 가늠할 수는 없다.

피의자들은 여러 이유로 엄격한 격리를 위해 특별체제 감옥에 보내졌다. 그 가운데 하나는 피의자가 아직 위증자로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예조프가 그런 역할을 했다. 이 전직 사형집행인은 체포된 뒤 새 사형집행인들이 거짓 혐의를 꾸며 내는 것을 도왔다. 예조프는 바로 수하놉카 감옥의 대질신문에서 거칠고 냉소적인 태도로 거짓 진술을 했고, 그 진술이 아직 꺾이지 않은 사람들을 파멸시켰다.)

사건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수하놉카 감옥에 가두었다(내 경우). “보존 처리” 자체가 고문이었다. 그 목적은, 보존 처리된 사건을 마무리 짓기로 결정할 때가 오면 그 불행한 사람이 현실에서 극도로 떨어져 있도록, 나아가 벌어지는 일에 제대로 반응하는 능력을, 하물며 저항하는 능력을 아예 잃어버리도록 하는 데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늘어진 사건에 대해 윗선이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때, 수감자를 (바로 그 윗선이 알고 있는 가운데) 특별체제 감옥으로 보냈다. 그 이유는 다른 수사 감옥에서는 어느 정도 의미가 있던 규칙과 기한이 이 감옥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물론 “수사”의 지휘자들은 무고한 사람의 운명에 관심이 없었다. 살아남으면 그의 행운이고, 살아남지 못해도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수하놉카의 표준 감방에서는(“표준이 아닌” 감방도 있었다. 지하 감방과 “성당” 감방이다) 당시 다른 많은 감옥처럼 천장에서 물이 새거나 벽이 얼어붙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깨끗하고 반듯하게 지어진 새장이었다. 그 안에 갇힌 새는 날아오르려 하지도 않고 그저 날개를 펴기만 해도 창살에 부딪혔다. 침상은 낮 동안 벽에 나사로 고정해 두었고, 그 탓에 이 새장에는 사람 사는 곳의 흉내조차 남지 않았다. 게다가 바닥에 나사로 박아 둔 물건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기가 힘들어서, 무언가에 한 겹 더 갇히고 묶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밤에 침상을 내려놓아도 수감자가 편히 지낼 수 없는 감방에 들어간 적도 있다. 그곳의 침상은 옆벽에서 내려와 걸상에 걸치는 것이 아니라 문이 있는 앞쪽 벽에서 내려와 옆벽을 따라 비스듬히 매달렸다. 그래서 몸을 기울인 채로 자야 했는데, 그것도 머리 쪽이 아래로 기울어 있었다.

수하놉카에서 간수들의 뱀 같은 악의는 고립과 비좁음이라는 고문으로, 집요한 감시로 드러났다. 내가 알아챌 수 있었던 바로는 간수 한 사람이 감방 셋을 맡았다. 감시창은 거의 1분이 멀다 하고 열렸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자물쇠가 덜컹거리고 간수가 들어와 수감자와 감방을 두루 훑어보았다.

열세 달 내내 산책은 없었다. 열세 달 동안 나는 갇혀 지냈다. 다만 목욕탕은 마당에 있었다. 그러나 구타의 상처가 아물기 전에는 고대하던 목욕도 고통이었다. 좁은 골방에서 나를 샤워기 아래 세우면 물줄기가 상처투성이 몸을 후려쳤다. 그래도 감방 밖으로 나가는 것은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여름이면 나는 취할 듯 향기로운 공기를 황홀하게, 게걸스럽게 들이마셨다. “어둠 속에서 나를 서둘러 마당 너머로 데려가던 그때부터 아찔한 쑥 냄새는 삶의 냄새가 되었다.” 그러나 겨울에는 살을 에는 차가운 공기가 감방의 탁한 공기에 익은 폐를 태웠다.

“보존 처리된” 수감자들은 신문에 불려 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구타가 있고 두 달쯤 뒤에 고르부노프 소위가 나를 불렀는데, 아마 그저 나를 한번 보려는 것이었던 듯하다. 다시 몇 달 뒤, 한겨울에는 핀주르 대위가 나를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대위는 내 사건에 대해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고, 나도 기억하는 한 묻지 않았다. 그것은 깊은 밤의 일이었다. 아마 나는 질문해 봐야 소용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고문이 닥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오랜 고립 끝에 그저 무기력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번은 수사관 가르부조프가 나를 불러 온건한 대화를 시작하더니, 감옥에서 두 해를 보낸 내가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이나 하는지 떠보려 했다. 그때 나는 독일이 서부에서 공세를 펼칠 경우의 두 가지 시나리오를 내놓아 그를 놀라게 했다(그 공세가 이미 있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지 못했다). 소위는 나의 예측 하나를 두고 “그게 바로 맞는 얘기요!” 하고 외치는 바람에 엉겁결에 실제 사태의 흐름을 내게 알려 준 셈이 되었다. 가르부조프와의 마지막 만남은 이미 늦봄인 1941년, 재판을 얼마 앞둔 때였다(물론 나는 그런 줄 몰랐다). 이번에는 수사관이 뜻밖에 내게 거칠게 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한마디 던진 것을 두고 고함을 질렀는데, 옆방의 동료들이 그가 나를 얼마나 무섭게 다루는지 들어 주기를 노린 것이 분명했다. 나는 소위에게, 당신이 나에게 거칠게 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이런 일로 내가 당신을 더 존중하게 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입을 다물고 나와 헤어졌다. 아마 그는 내가 살아남는다 해도 우리가 다시는 만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수감자가 몇 달씩 신문에 불려 나가지 않는 것은 이 “신문”이 보통 어떤 것이었는지를 생각하면 오히려 한숨 돌리는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엄격한 고립 속에서 수사관과의 접촉마저 끊기면 수감자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자기 존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혀 가늠하지 못하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아니 비극적이게도 수사관과의 만남은 수감자에게 세상과 닿는 한 방식이었다. 신문이 없다는 것은 삶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왔다는 느낌을 더욱 날카롭게 했다.

열세 달 동안 나에게는 (칭기스 일드림과의 만남을 빼면) 감방 동료가 셋 있었는데, 그중 둘은 밀정이었다.

고문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쿠 시 소비에트의 통계원이던 자가 내 감방에 들어왔다(그 작자의 성은 잊어버렸다). 이 동료는 진술을 하는 것이 현명하고 이롭다는 것을 내게 보여 주어야 했다. 그는 낮에도 침상에 누울 권리가 있었고, 책(고리키)도 받았으며, 앞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굴라크의 회계와 통계를 어떻게 정비할지에 관한 보고서를 수사관에게 제출하고 자기 일솜씨를 바치겠다고 나서서, 편한 일자리를 얻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 열성적인 통계원이 내 감방에 있는 동안 나에게 허락된 공간은 2~3제곱미터로 줄어들었다. 나는 우리 새장에서 그의 쪽으로 넘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예 움직일 수가 없었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어쨌든 말상대이기는 했으니까) 그의 침상 가장자리에 걸터앉기라도 하면 간수가 당장 내 걸상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했다. 한번은 내가 그 말을 따르지 않자 감옥 소장이 왔다. 그는 나를 징벌방에 보내겠다고 위협했고, 내 잘못 때문에 옆 사람의 침상까지 접어 버릴 것이라며 나를 겁주었다.

통계원이 내 감방에 잠깐 머문 데에도 쓸모는 있었다. 그는 성냥개비로 바늘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자신은 그런 바늘을 능숙하게 다루어 간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간수는 특권을 누리는 내 옆 사람에게 지적을 할 수 없었지만, 나에게는 몇 번이고 “당신은 무엇으로 바느질하는 거요?” 하고 물었다.

통계원은 내가 수사관에게 신문을 받으며 그를 깔보는 투로 이야기한 바로 그날 감방에서 치워졌다. 그가 사라진 것이 나는 반가웠다.

겨울에 또 다른 잠깐의 감방 동료인 기사 도로질로프가 “아무 데도 아닌 곳”으로 끌려갔을 때 나는 울적해졌다. 도로질로프는 처음에 석유 산업 종사자들의 큰 무리와 함께 바쿠의 감옥에 갇혔다. 그러고 나서 모스크바로, 수하노보로 압송되었다. 그도 나처럼 신문에 불려 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그는 타고나기를 활동적이고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유머 감각도 없지 않았다. 그는 우리 처지를 나보다 냉정하게 판단했고, 최악을 두려워했으며, 낙담과 두려움까지 힘겹게, 얼마간은 내 도움을 받아 이겨 냈다.

감방 동료와의 교류는 매번 짧은 삽화로 끝났다. 그다음에는 완전한 고립감이 더 깊어졌다. 우수에 젖어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곤 했다. “아침저녁으로 누구와 몇 마디라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따금 나는 걸상에 올라서서 팔로 몸을 끌어 올려 안쪽 창틀과 바깥쪽 창틀의 반쯤 열린 환기창 사이 틈으로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저 멀리 숲속에서 사람들이 빗속을 바삐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생각했다. 저들은 일상의 일에 매여 있으면서 자기들이 얼마나 행복한지조차 모르는구나. 1941년 7월 재판을 받은 뒤 부티르카로 옮겨졌을 때, 나는 감옥을 살펴보고 싶어서 감방 청소를 하러 가겠다고 나섰다(이미 감옥 소개가 시작된 때였다). 아직 철제 침상들이 놓여 있고 체스 말과 책 더미가 나뒹구는 빈 감방에 들어서면서, 얼마 전까지 수하놉카의 수인이었던 나는 쓰라린 아이러니와 함께, 그러나 부러움도 품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여기서 살았었구나!”

수하놉카 감옥에는 보통 깊고 짓누르는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나 이따금 그 정적을 무시무시한 비명이 깨뜨렸다. 매 맞은 수난자를 복도로 질질 끌고 가거나, 공포로 미쳐 버린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한동안 옆 감방에 정신이 나간 사람이 갇혀 있었다. 그는 똑같은 말을 단조롭게, 큰 소리로 외쳐 댔다. 한번은 간수들이 날뛰는 내 이웃에게 매달려 있는 틈을 타 나는 환기창 사이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봄이었다. 감옥 별채의 창 아래에서 어느 운 나쁜 유치원 교사가 아이들을 체조시키려고 줄 세워 놓고 있었다. 나는 한 해 넘게 보지 못한 아이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고, 바로 곁 벽 너머에서는 미쳐 버린 나의 불행의 동료가 울부짖고 있었다. “내 형을 불러 주시오!”

* * *

삶이 어떻게 “절망의 저편”에서 시작되는지는 앞으로 다시 써야 할 것이다. 나는 형리들에게 굴복하라는 유혹도, 자살의 유혹도 물리쳤을 때 그 상태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것은 삶으로 돌아오는 첫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가능성을 나는 감옥에서 빼앗기고 있었다. 수하놉카의 감방은 극단적인 형태의 고립, 곧 “감각 고립”의 영향이 수감자에게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그 영향이 내 정신에 나타난 것은 수하놉카 생활의 끝 무렵이 아니라(그때 나는 이미 치열한 내면의 삶을 살고 있었다) 첫 시기였다. 생각으로는 이미 절망의 산마루를 넘었지만, 실제로는 육체의 고통으로 쇠약해지고 책도 산책도 빼앗긴 채, 나는 푸른 감옥의 죽은 듯한 정적 속에서 허깨비 같은 존재로 가라앉았다.

보고 듣는 인상을 빼앗기고, 정신의 양식은 말할 것도 없이 빼앗긴 채 나는 때때로 나 자신이 아니게 되었다. 1940년 가을 수하놉카 감방에서 숨 막히는 공허를 이겨 내려고 내가 기댄 허울뿐인 방법들을 적어도 지금 나는 그렇게 평가한다. 나는 “파리 길들이기”를 시작했다.

앞의 책에서 고문을 묘사하고 “고문을 곁들인 수사”가 벌어지던 그 시기의 내 흔들림을 털어놓았을 때처럼, 나는 지금 다시 속에서 저항감과 거북함을 느낀다. 그러나 투옥과 수용소 생활의 불쾌한 측면과 그 후유증을 말하지 않는다면 내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진실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굴복하지 않았는지를 이야기하고 인격을 구해 낸 조건을 말하고 있으니, 그런 이야기가 교훈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수인의 나약함과 혼란까지 말할 때이다.

그러니까 나는 “파리를 길들였다”. 쉽게 말하면 나는 수많은 파리 가운데 한 마리를 골라 날개를 떼어 내고, 그것이 어떻게 뛰어다니는지, 바스락 소리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우물”, 곧 물에 적신 종잇조각을 어떻게 찾아내는지 지켜보았다. 덧붙이자면, 이 일에 무슨 학대 성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놀이가 낯설고 싫었으며, 잔인한 사냥 본능과도 거리가 멀다. 어쩌면 바로 수하놉카 독방에서 내가 “파리 길들이기”를 해롭지 않은 순수한 실험으로 여겼다는 것이 “정상에서 벗어났다”는 징후였는지도 모른다.

서른다섯 해가 지난 지금도 나는 “파리 길들이기”의 세세한 부분을 기억 속에서 되살릴 수 있다. 이는 이 기이한 놀이가 수감자의 정신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말해 준다. 그 자신이 날개 떨어진 파리와 닮아 있었다. 그는 바로 그렇게 길들여지고 있었다. 살아 있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아주 작은 바스락 소리에도 얼어붙도록.

내 “파리 놀이”가 끝날 무렵, 나는 퇴락을 피하려면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동안 나는 산책과 책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따지며 망설였다. 나는 올바른 결정을 내려 책을 달라고 요구하며 단식을 선언했다. 바로 다음 날 감옥 소장이 나타났다. 그는 내가 발바닥을 맞을 때 “양말을 벗기자”고 했던 바로 그 간수였다. 언젠가 나는 감옥 소장과 충돌한 적이 있었다. 감방에 들어온 그가 위협조로 말을 하자, 나는 막말을 들으려고 당신을 부른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나가라고 요구했다. 수감자가 감옥 소장을 감방에서 “쫓아낸” 드문 경우였다. 어찌 되었든 나는 오래 굶을 필요가 없었고, 곧 감방으로 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마음씨 고운 간수 하나가 내 주문을 들어 주고는 헤겔의 저작, 알렉산드르 블로크와 게르첸의 책을 한 권 또 한 권 꼬박꼬박 가져다주었다. 나는 키가 작고 머리가 불그스름하며 주근깨 박힌 얼굴에 슬픈 빛을 띤 그 나이 지긋한 사람을 고마운 마음으로 떠올린다.

흥미롭게도, 나는 블로크나 게르첸의 책에서, 그것도 어느 작품에서 무엇을 얻었는지는 지금도 기억하지만, 감옥에서 헤겔이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지는(물론 지식 말고)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깊이 사유하는 사람인 내 벗 미하일 야코블레비치 게프테르는 나의 이 관찰을 두고, 헤겔의 거대하고 자기 안에 닫힌 체계에는 들어가는 입구는 많지만 거기서 삶으로 나가는 실제 출구는 없다고 말했다. 재치 있는 지적이다. 다른 이유는 제쳐 두더라도, 바로 감옥에서 나는 책 속에서 “출구”를, 존재와 목적이라는 근본 물음에 대한 실효 있는 답을 열렬히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그것도 내가 고른 책을 읽을 수 있게 되고 철학과 시 작품을 곰곰이 되새기게 되었을 때, 비로소 “절망의 저편”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때 나는 서정 일기에 마음속으로 적어 두는 일도 다시 시작했다.

내가 여기서 “감옥의 일상”이라고 할 때, 그것은 퇴화를 부를 만큼 무기력하게 연명하는 일만이 아니라, 생각이 해내야 하는 고된 “일상의 노동”, 곧 출구를 찾는 일도 뜻한다. 헛된 출구조차 위안이 되었다. 특히 그것이 어딘가 깊은 곳이나 높은 곳을 들여다볼 길을 열어 주는 듯이 보일 때는 더욱 그랬다.

앞서 말한, 나보다 젊은 세대에 속하는 그 벗은 감옥에서 했던 사색에 관한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내가 그리는 그런 조건에서는 생각이 행동이 되었다고 말했다. 옳은 말이다. 생각은 행동이 되었다. 고립 속에서 생각이 삶의 내용이 되었고, 창조의 형식이자 감방 안에서 움직이는 형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이를 수 있는 목표를 향한 즐거운 움직임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감옥에서는 어느 곳에서보다도 생각이 비극적 충돌의 표현이 된다.

삶은 희극이면서 동시에 비극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은 잘 알려져 있다. 날마다의 걱정, 살림살이의 다툼, 하찮은 이해관계는 희극의 장면들이다. 그러나 이루지 못한 소망, 운명에 무자비하게 짓밟힌 희망, 헤아릴 수 없는 실수가 점점 커지는 고통과 죽음과 어우러지면 삶은 비극이 된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자기 존엄을 지키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에, 비극적인 상황에서 행동할 때도 이따금 희극적 인물이 되고 만다. (“내면세계”에서 정신성을 앗아 가는 “외부 세계”의 부산스러움에 벨린스키는 큰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바쿠닌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그러했는데, 그는 일상생활의 성가시고 괴로운 자잘한 일들을 “푼돈”이라고 불렀다.)

내가 이런 생각을 떠올린 것은, 그 빛에 비추어 보면 감옥살이에서 생각이 어째서 삶의 비극을 순수한 형태로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는지, 어째서 비극적 행동이 될 수 있는지가 더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지나온 삶의 길을 곱씹을 때 떠오르는 숙명적인 문제를 감옥살이에서만 깨닫게 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감옥에서, 아니 대체로 강요된 고독 속에서는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실수는 되돌릴 수 없으며, 희망은 헛되고, 죽음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어쩌면 사형 집행인의 모습으로 다가와 있다는 것을 유달리 또렷하게 깨닫는다. 그러나 바로 같은 조건에서 완전히 고립된 수감자가 누리는 독특한 이점이 마음의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 그는 공포 속에서까지 고통받지만, 그 대신 한동안은 “덧없이 흘러가는 삶”의 일상적 걱정에서, 자잘한 살림살이의 짐에서, 그리고 본질에서는 비극인 것을 형식에서는 희극으로 바꾸어 버릴 수 있는 부산스러움에서 풀려나 있다.

그러니 감옥의 고독 속에서 사람은 자기 신경을 다스릴 수만 있다면 때때로 순수하고 숭고한 비극의 수준에서 사유할 수 있다. 다만 고독 속에서 사색에 잠기다 보면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어떤 추상적인 개념에 빠져들 수도 있는데, 그 뒤에는 사람이 닿을 수 있는 현실이 숨어 있다. 비밀 감옥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불멸에 대한 갈망이 바로 그러했다.

내가 신앙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도스토옙스키 소설 속 러시아 수도사가 말했듯 “신비로운 다른 세계들과 닿아 있다는 느낌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그런 일은 없었다. 안타깝게도. 감옥에 있는 사람은 일상의 북새통 속에서보다 존재의 신비에 더 가까이 닿아 있는데도 말이다.

독방 감금 속에서 영혼을 괴롭히던 불멸에 대한 열렬한 의지는, 삶의 모든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그리워하는 마음의 표현이었고, 동시에 지성의 유희이자 고문실에서의 방어 반응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감옥에서 불멸에 대한 꿈을 말로 표현하려 했던 내 시도는 막다른 골목에서 나갈 길을 찾는 한 형식이었다.

세 편의 주요한 기록이 「불멸에 대한 갈망」이라는 연작에 들어갔다. 첫째 시는 「나는 모든 것」, 둘째는 「너는 혼자가 아니다」, 셋째는 「우리는 세계」다. 첫째 시에는 젊은 시절에 쓴 내 시를 가져다 썼는데, 그 시는 “나는 빛살. 나는 비. 나는 모든 것을 안다. 모든 것을 원한다!”라는 외침으로 시작해서 “그러나 탐욕스럽고 말 없는 채로 나는 엄숙히 죽으리라. 정말 나는 죽는가? 정말 모든 것을 잊는가?”라는 말로 끝났다. 둘째 시의 첫머리는, 이제 와서 깨달은 것이지만, 젊은 시절의 전혀 다른 짧은 시에 대한 무의식적인 대구였다. 나는 언젠가 아직 오데사에 있을 때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네 벽을 나는 열어젖히리라, 아래 세상의 어둠은 돌아보지 않으리라, 세계의 유희에 사로잡혀 높이 날아오르리라.” 감옥에서의 기록은 이렇다. “…네 벽이 가두어 버리면 영혼은 침묵하고 시인은 귀가 먹으며, 세계는 없다.” 마음속으로 고독을 넘어선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대지는 순순히 나를 싣고 돌며, 하늘은 공기 같은 다정함으로 내 눈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다시 절망이다. “그래도 나는 혼자다… 나는 되풀이될 수 없는 존재이니. 불타는 고통 속에 나는 타 버리리라, 아무도 ‘우리가 불탄다’고 외치지 않으리라.” 나는 내 생각이 영원히 살아남는 데서 구원을 찾았다. “나는 바란다… 굶주린 내 생각으로 다른 이들의 존재를 채워 주기를, 민중의 기억 속에 살며 나의 불멸을 알기를. 영원을 가로질러 손을 뻗어 먼 훗날의 손자에게 말하기를. ‘너는 혼자가 아니다!’” 마음속으로 적은 셋째 기록은 길었고 범신론적이었다. “나의 낮은 반짝인다. 나의 밤은 밝다. 내게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바람은 나의 아들, 대지는 나의 딸, 아비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이 기록들을 옮기는 것은, 세계에서 고립된 채 펼쳐지는 생각의 유희가 영원한 이념에 닿아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은자들이 얻고자 한 것이 바로 그것 아닌가. 세계와 하나가 되려던 그 충동이 있고 나서 여러 해 뒤에, 나는 콘라트 아카데미 회원의 책에서 중국 논저 「서명(西銘)」의 구절을 읽었다. “하늘은 나의 아버지다. 땅은 나의 어머니다. 모든 사람은 형제다. 모든 사물은 나의 벗이다.” 그러나 내가 왜 중국 현인들을 본떠야 하겠는가? 러시아 수도사도 세계를 “온전한, 온 세상을 품는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일렀다. 유대 차디크들의 철학을 끌어올 수도 있으리라.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비극과 지고의 기쁨이 있다…

이렇게 하여, “뱀은 뱀이고, 감옥은 감옥이다”라는 불길한 말로 시작해 상당 부분을 특별체제 감옥에 갇혀 지내는 일의 위험한 면에 바친 감옥의 막다른 골목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숭고한 비극과 온 인류의 기쁨에 관한 사색으로 마무리한다.

이런 이야기의 흐름은 수하놉카 감옥에 오래 갇혀 있는 동안 내 마음의 세계가 걸어간 발전을 반영한다. 간수들은 “특별”이라는 수식어가 자기들이 부여한 그 불길한 뜻과 다른 의미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아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독방에서 품었던 내 몽상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특별한 상태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간수들이 노린 퇴화의 상태가 아니라, 반대로 막다른 골목에서 나갈 길을 찾는 상태다. 물론 불멸에 대한 꿈은 끔찍한 현실에서 도피하는 한 형식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바로 그 현실에서 달아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현실에서 숨을 수 없었던 것은 감옥이 나라의 일부였기 때문이다(이에 대해서는 이미 쓴 바 있다). 인격을 파멸시키는 생존 조건을 갖춘 수하놉카 감옥은 그 본질에서 그 나라와 그 시대에 전형적인 것이었다. 그 시대의 반인간적인 체제가 이 감옥을 낳지 않았다면, 이런 비정상적인 조건은 현실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독방에서 한 내 사색은 감옥의 막다른 골목에서 나갈 길을 찾는 일이었을 뿐 아니라, 기만과 자기기만의 거대한 미궁에서 나갈 길을 찾는 일이었다.

수단과 목적의 미궁에서

감방에서 나는 푸시킨의 시를 되뇌곤 했다. “…슬픔에 짓눌린 머릿속에 무거운 상념이 넘치도록 밀려들고, 추억은 말없이 내 앞에 그 긴 두루마리를 펼친다.” 나는 그 시를 맺는 용기 있는 구절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슬픈 줄들을 나는 지우지 않는다.” 그러나 감옥의 몽상에 잠긴 나는, 말하자면 펄럭이며 흔들리는 두루마리를 멈춰 세우고, 과거를 새겨 둔 한 줄을 들여다보고는… 고쳐 쓰곤 했다. 그것이 놀이로 끝나지 않았다면 위험한 주술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 삶의 길에서 실현되지 않은 갈림길들을 떠올리면서, 길의 방향은 바꿀 수 있어도 그 결말은 바꿀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내가 독방에서 지어낸 소설 「여러 갈래의 삶」의 뜻은, 주인공인 소련 인텔리겐치아가 걸을 수 있었던 삶의 길의 모든 갈래가 결국에는 그 갈래들을 짜 맞춘 바로 그 감방에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그 소설에서 저지른 잘못도 보인다. 나는 주인공에게 새로운 길과 생활 방식을 고를 가능성을 열어 주었지만, 소설 주인공의 세계관은 그대로 남겨 두었다. 내 주인공은 언제나 사회를 이롭게 개조하는 시대가 왔으며 러시아가 인류의 삶에 중대한 역사적 변화의 첫걸음을 내디뎠다는 확신을 버리지 않았다. 어떤 추상적인 이념, 어떤 사회 운동, 따라서 어떤 반드시 이뤄야 할 목적에 이렇게 매달리면, 수단도 그 목적에 종속시키게 된다. 그리고 그런 “수단”이 한 사람의 삶 전체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사회의 삶에서 목적이 바꿔치기되면 수단도 가치를 잃고, 그러면 한 인간의 삶이 가치를 잃을 수 있다.

나는 이 문제도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나 「여러 갈래의 삶」을 지을 때 나를 주로 사로잡은 생각은, 여러 “위격(位格)”의 나 자신뿐 아니라 여러 위격의 내 세대, 내 또래 많은 이들이 자의적 폭력과 탄압의 희생자가 될 운명이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1940년 감옥 독방에서 내가 지어낸 내 삶의 몇몇 “갈래”를 간략히 적어 보겠다.

내가 처음으로 갈림길에 선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1917년 여름이었다. 혁명의 봄이었다. 그리고 나는 완전히 혼자였다. 얼마 뒤 나는 페트로그라드에서 이름난 마르크스주의 학자 다비트 랴자노프의 편지를 받았다. 그는 1917년에 볼셰비키에 합류했는데, 오래전에는 내 아버지 파르부스와 친구였고, 그의 아내 안나 리보브나는 내 어머니와 친구였다. 랴자노프 부부는 나를 페트로그라드로 불러 자기 집에서 함께 살자고 했다. 나는 랴자노프 부부의 따뜻한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아버지의 옛 친구들의 보호 아래 “파르부스의 아들”로서 삶을 시작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데사를 떠나기 전에 홀로 설 힘을 얻고 싶다고 그들에게 썼던 것 같다.

훗날 나는 수도를 보고 혁명적 사건의 한복판에 설 기회를 놓친 것을 두고 여러 번 자신을 탓했다. 1917년 여름과 가을을 페트로그라드에서 지냈다면, 아마 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젊은 나이에 이미 볼셰비키가 되었을 것이고, 10월 혁명 뒤에는 실제보다 몇 해 일찍 국가 기구, 아마 십중팔구 외교 기구의 일꾼이 되었을 것이다. 이 갈래의 본보기가 된 것은 오래된 혁명가 집안에서 자란 내 동갑내기이자 동료였던 기르시펠트의 삶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외교 분야에서 활동했고, 나보다 두 주 먼저 체포되었다.

랴자노프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 이론 연구에 몸담고, 그가 세운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랬다면 1931년 멘셰비키 재판을 준비하던 때 나는 랴자노프와 그의 동료들과 함께 탄압을 받았을 것이다. 그때는 아직 수하놉카 감옥이 없었으니 그곳에 가 보지는 않았겠지만, 실제보다 더 일찍(그리고 더 긴 형기로) “수용소 군도”의 주민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감옥에서 나는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에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선택이 눈앞에 바로 놓였던 내 삶의 전환점들도 곰곰이 되짚었다. 오데사에서 소비에트 권력이 들어선 첫 몇 달 동안 나는 젊은 공산주의자들과(나중에는 지하 활동가들과도) 가까이 지냈고, 친구들은 내가 왜 당에 들어가지 않는지 의아해했다. 그러나 나는 확신에 찬 볼셰비키가 아니었고,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1920년대 초에는 내가 다니던 공과대학과 연이 있던 페트로그라드 공산주의자들이 당원이 되라고 끈질기게 권했다. 나는 이번에도 그 걸음을 내딛지 않았다(이에 대해서는 이미 나온 책에서 썼다).

훗날 나는 “인텔리겐치아다운 우유부단함”을 두고 자신을 꾸짖었고, 입당 신청서를 냈을 때는 왜 진작 그러지 않았는지 해명해야 했다.

(나는 1931년 《이즈베스티야》 편집국에서 일하던 때 당원 후보가 되었고, 1939년 체포될 때까지 줄곧 후보, 곧 완전한 권리를 갖지 못한 당원으로 남아 있었다. 1955년 모스크바로 돌아온 뒤 나는 당원 자격을 회복받았다. 이런 행보에는 완전한 복권과 모든 거짓 혐의의 철회를 위한 나의 싸움의 논리가 작용했다. 1956년에 나는 이미 다시 당과 국가의 종이 될 마음은 없었지만, 그때만 해도 아직 기만과 자기기만의 미궁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유로 나오지는 못한 상태였다.)

1940년 감옥에서 생각에 잠기다가 나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만약 내가 완전한 권리를 가진 “고참” 당원이었다면, 실제보다 훨씬 일찍 탄압을 받았으리라는 것이다. 당이 사실상 분열되어 있던 시절에 내가 정식 공산당원이었다면 당내 토론에 참여했을 것이고, “총노선”의 지지자로 남아 있었다 하더라도 조만간 어차피 교리에서 벗어난 것, 곧 “편향”으로 선언될 견해를 밝혔을 것이다. 1930년대 후반에 열성적인 “비판 집회 주동자”들과 적발꾼들은 힘과 시간을 아끼지 않고 옛 당 문서고를 뒤져, 새로운 조건에서 터무니없으면서도 악의에 찬 고발에 써먹을 수 있는 당 회의 의사록과 발언 기록을 찾아냈다. 외무인민위원부에서 이런 식으로 박해를 조직하는 것은 당시엔 아직 젊은 출세주의자였다가 나중에 대사가 된 자들, 이를테면 코스틸료프, 아르카디예프, 말리크 같은 자들이 즐겨 쓰던 수법이었다(다 기억할 수도 없고 다 이름을 댈 수도 없다. 1930년대 말의 “새 간부”들은 모두 정직한 사람들을 박해하면서 출세했다).

여러 사례 가운데 하나로, 기억에 남은 바인시테인의 일을 들어 보겠다. 그는 예전에 정치 망명자였고 소비에트 정권 초기부터 외무인민위원부의 중요한 일꾼이었다. 1938년 그는 떠들썩한 집회에서 고발을 당했다. 1920년대에 (낡은 의사록에서 드러난 바에 따르면) 그가 당시엔 아직 당원이던 반대파들이 연설한 집회에서 사회를 보았다(발언한 것이 아니다)는 것이었다. 바인시테인은 그날 레닌그라드에서 출장을 와서 동지들을 보러 인민위원부에 들렀을 뿐이고, 동료들이 우정의 표시로 집회 사회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이튿날 모스크바를 떠났고, 그 뒤로 중앙 기구의 당 생활에 다시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날조된 “반대파 연루” 폭로는 바인시테인을 당에서 제명하려는 준비 작업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는 체포되었고 1955년에야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내 삶의 여러 갈래를 짜 맞추면서 나는 두 줄의 사실을 맞대어 보았다. 하나는 1930년대의 비판 집회와 박해였고, 다른 하나는 내가 외무인민위원부의 비당원 직원이던 1920년대에 한 몇몇 발언과 견해였다.

외무인민위원부 정치 부서들의 이른바 당 그룹이 연 공개 집회의 토론이 기억난다(1925년 이전은 아니고, 아마 1926년 초였을 것이다). 1970~80년대의 독자에게는 내 이야기가 믿기지 않을 것이다. 공개 당 집회에서 사회주의 아래서도 군대가 존재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논의되었던 것이다. 토론 참가자들이 정치적으로 미숙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외무인민위원부에는 내전과 볼셰비키 지하 활동에 참여했던 이들이나 1917년 이전의 정치 망명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오늘날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이 토론은 몇 가지 사정으로 설명된다. 그 무렵에는 모든 당원이(하물며 비당원 지식인들은 더욱이) 한 나라에서 따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생각을 믿게 된 사람들조차 사회주의가 가까운 미래의 일이라고는 전혀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사회주의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흐릿했다. 유토피아주의에 가까웠고, 어쨌든 곧 선포될 공식 해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우리 집회에서는 사회주의 아래서는 상비군이 없으리라는 견해가 다수였다. 나도 그런 취지로 발언했다. 가장 냉정했던 이는 제정 러시아의 관리 출신으로 마르크스도 레닌도 읽지 않은 의전국장 플로린스키였다. 여러 견해가 나왔는데도 플로린스키는 앞선 연사들 모두에게 동의한다고 말하더니, “육해군 지원 자원협회”에 가입하라고 호소했다. 회비는 자기, 플로린스키가 받는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외무인민위원부의 한 집회에서 — 방금 말한 집회와 구성이 거의 같았다 — 나는 불온한 발언을 했다가 집중포화를 맞았다. 아마 1927년 이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로서는 새로웠던 사회주의 경쟁(또는 돌격 노동)의 구호가 논의되고 있었다. 나는 기업에서 펼쳐지고 있는 사회주의 경쟁의 경험을 소비에트 관청으로 옮겨 올 수는 없다고 말했다. 노동생산성의 구체적 지표가 없으면 경쟁은 대상이 없는 것이 된다는 것이었다. 훗날과는 달랐던 그 시절의 기풍을 잘 보여 주는 일이다. 사회주의 경쟁에 대한 나의 비판은 집회에서 날카로운 반박을 불렀을 뿐이었다. 나를 “비판 집회”에 세우지도 않았고, 내가 잘못을 인정해야 할 일도 없었다…

같은 무렵에 나눈 대화 하나가 기억에 남아 있는데, 그 대화는 내게 익숙한 많은 관념을 새로 생각해 보게 했다. 한번은 이름난 외교관이자 나를 아껴 주던 보리스 예피모비치 시테인을 만났다. 그는 비공개 당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아마 집회에서 벌어진 토론의 인상이 남아 있었던지, 시테인은 짓궂게 내게 물었다. “당신 생각에 우리 공업은 사회주의적이오, 자본주의적이오?”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제는 사회주의 아래서 군대가 존재할 것인가를 두고 벌인 논쟁만큼이나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때 나의 대답이다. 내 기억으로는, 잉여가치가 창출되고 수취된다면 그런 공업은 사회주의적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시테인은 소비에트 공업이 사회주의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지금은 잘 알려진 논거들을 되풀이했다. 보리스 예피모비치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말라고 다정하게 내게 일러 주었다.

완전한 사회주의 아래서 군대가 맡을 역할이나 사회주의 경쟁의 의의를 두고 집회나 사적인 대화에서 의견을 주고받은 것은 목가적인 일화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들은 당시 형성되고 있던 “총노선”의 지지자들과 반대파 사이의 뜨거운 사상 논쟁과 정치 투쟁을 간접적으로 비추었을 뿐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의 흐름이 보여 주었듯이, 1920년대의 당내 토론 역시 훗날 스탈린이 반대파에게 가한 피의 학살에 비하면 “목가”였다.

나는 감방에서 스스로에게 말했다. 1920년대에 내가 정식 당원이었다면, 틀림없이 집회에서 열렬히 발언했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나다운, 정전(正典)에서 벗어난 내 나름의 의견을 말하는 버릇은 훗날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1930년대 후반에 나는 1920년대에 말하고 행한 것에 대해 해명해야 했을 것이다. 그 결과 나는 실제보다 더 일찍 수하놉카 감옥의 감방에 들어갔을 것이다. 물론, 이제 덧붙이자면, 이 “갈래”에서라면 나는 복권 뒤 고참 당원으로서 특별 연금을 받았을 것이다. 소련 외무부 지도부는 사실상 불법적으로 그 연금을 내게 거부했다…

감옥 독방에서 내 소설 「여러 갈래의 삶」을 짓는 것은 꽤 흥미진진한 놀이였고, 나는 숱한 대안을 하나하나 짚어 보았다. 그 가운데 여기서는 “줄거리”가 다른 것들과 다른 것 하나만 더 들겠다.

1919~1920년 겨울, 백군 치하의 오데사에서 비합법으로 살던 나는 잡다한 학생 사회에서 쌓은 인맥, 특히 볼셰비키 지하 활동가들과의 연줄을 이용해, 내 인척 집에 숨어 있던 저명한 볼셰비키에게 해외 여권을 구해 주었다. 오데사에는 백색 테러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내 지인은 콘스탄티노폴로 가는 기선을 타고 오데사를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그는 함께 외국으로 가자고 나를 설득했다. 그에게는 큰돈이 있었고, 해외 여권 한 장을 더 “사는” 데 돈을 빌려줄 용의도 있었다. 어쩌면 내가 파르부스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서, 독일에 가면 이름난 백만장자의 아들이 자기와 함께 왔다는 사정을 이용할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볼셰비키에게는 모험가 기질이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떠나기를 단호히 거절했다. 나는 러시아를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1940년 수하놉카 감옥에서, 나는 1919년에 외국으로 빠져나갔다면 내 삶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그려 보려 했다. 아버지와의 만남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처음에는 부유한 삶의 혜택에 끌렸다 하더라도, 혁명적 이상주의 때문에 나는 아버지와 가까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 갈래를 끝까지 생각해 보고 나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러시아에서 자란 젊은이는 독일에 가면 독일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았으리라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노동운동에서 비켜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받아들인 혁명 이념이 자본주의 나라에서의 내 행동을 규정했을 것이다. 훗날 나는 반파시즘 투쟁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히틀러 일당이 권력을 잡은 뒤에는 많은 반파시스트들이 겪은 운명이 나를 덮쳤을 것이다. 파시스트 사형집행인들의 손에 죽거나, 소련으로 숨어 들어와 스탈린의 사형집행인들의 제물이 되거나.

감옥에서 이 “삶의 갈래”를 지으면서, 나는 아마도 1930년대가 되기 전에 이미 코민테른에 내 운명을 맡기고 소련으로 돌아왔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감옥에서 지어낸 내 삶의 “갈래”들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이었다. 외국에 있던 젊은 혁명가들이나 러시아 애국자들이 소련 입국을 얻어 내려 하거나 해외 소비에트 기관에 일하러 들어갈 때, 그들은 대개 “기관”의 해외 요원들과 상대하게 되었고 영영 그들과 얽혀 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숙명적이고 빠져나갈 길 없는 예속이다. 테러 시기에 그런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먼저 체포되었고 풀려나지 못했다. 그런 운명은 나를 비켜 갔다.

독방에서 내 삶의 실현되지 않은 대안들을 짜 맞추고 과거를 곱씹으면서, 나는 때로는 위안을 얻으려 했지만, 때로는 수사와 기소가 수사관들이 지어낸 괴물 같은 “갈래” 위에 세워져 있다는 생각에 소스라쳤다. 그 갈래는 내 삶의 실제 흐름과도, 놓쳐 버린 그 대안들과도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그러니 내가 고안한 놀이는 내게 미약한 위안밖에 되지 못했다.

* * *

내가 쓰고 있는 그 시절, 그 조건에서는 머리로 하는 놀이였던 것이, 그것을 회상하는 지금은 진지하게 숙고할 가치가 있다.

“숙명적인 물음들”은 거듭거듭 답을 요구한다. 그 물음들에 적지 않은 답이 주어졌지만, 그래도 그것들은 유령처럼 소비에트 사회의 역사가와 회고록 저자를 따라다닌다. 이런 물음이 그렇다. 어떻게 해서 “혁명이 제 아들들을 삼켰는가?” 이 전통적인 문제에는 뒷면도 있다. 왜 “아들들”은 때로 스스로 그 물리지 않는 아가리 속으로 기어 들어갔는가?

두 줄의 문제가 생겨난다. 한 줄에는 이런 물음이 있다. 제 종들을 말살한 그 국가는 대체 어떤 국가인가? 다른 줄에는 이런 물음이 있다. 전제적 국가에 충직한 그 종들은 대체 어떤 종류의 인간들인가? 대중에게 호소하던 국가가 어떻게 해서 엄청난 수의 주민을 학살하게 되었는가? 한때 이념을 품은 민주주의 혁명가였던 이들이 어떻게 해서 그런 국가의 종이 되었는가? 좀 더 현재의 상황도 있다. 국가가 대량 테러에 기대지 않으면서도 주민을 위협하고, 거짓으로 그들을 옭아매고, 갖가지 방법으로 나라 안의 사상을 질식시키며, 정직하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린다. 이 사회는 대체 무엇이며, 그 종들은 어떤 자들인가?

물론 나는 회고록에서 이 문제들을 모두 다룰 생각은 없다. 다만 개인과 사회 사이의 상호 연관과 상호 작용을 상기시켜 둘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내 이야기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존재인가”를 탐구함으로써 “그들을 둘러싼 삶의 조건”을 알아낼 수 있다는 잘 알려진 진리를 보여 주는 한 예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이 “조건”에도 손을 대지만, 내 관심의 중심에 있는 것은 나 자신과 내 동시대인들의 심리이며, 따라서 우리 세대를 사로잡고 괴롭혔던 물음들과 그 세대가 저지른 잘못들이다.

하지만 일은 1920년대 세대에서 끝나지 않는다. 내가 여기서 던지는 물음들은 1980년대에 삶을 꾸려 가는 세대에게도 답을 요구할 것이다. 세기말의 젊고 활동적인 사람들은 1940년에 한 수감자를 뒤흔들었고 1970년대 말에 쓰인 회고록에 정리된 물음들에 답하면서 저마다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1940년대에 수하놉카 감옥에서 신음하던 사람이라면, 사십 년이 지난 뒤에도 바깥에서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이 스탈린의 감옥에 갇힌 수감자들을 괴롭히던 것과 비슷한 의심과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음이 드러나리라는 생각을 고삐 풀린 비관주의의 발로로 여겼을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유비이자 끔찍한 전망이다.

그런데도 이 생각을 물리치기는 어렵다. 이로운 사회 변화에 대한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 자신이 봉사해 온 사회 체제에 대한 쓰라린 환멸과 그 체제의 괴물 같은 이면 앞에서 느낀 공포, 갖가지 탄압을 받게 된 가족의 고난, 이것이 오래전 극비 감옥의 수감자가 견디고 살아 넘겨야 했던 파국이자 그 짐이며 그 여파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도 적지 않은 무고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이 소련의 감옥과 수용소에서 그와 비슷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 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에 소련 땅에 사는 사람들이 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앞에 놓였던 것과 비슷한 물음에 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을 때, 내가 염두에 둔 것은 주로 사회적 비극이었다. 우리 후손들은 단지 개인의 파국이 아니라 역사적 규모의 파국, 곧 숱한 환상을 불어넣고 여러 세대의 삶을 일그러뜨린 체제의 도덕적·물질적 위기가 낳은 파국을 감당해 내야 할 것이다.

나는 과거와 미래의 파국에 대해 말했다. 이 개념은 출간된 『수기』 부분의 제목에도 들어 있지만,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여기서 말해 두고 싶은 것은, 내가 어떤 순간적인 파국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 생활의 전환을 몇 분 만에 주위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지형을 바꾸어 놓는 지진 같은 재난에 견주는 것은 아마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소련 사회의 삶에서, 그리하여 우리 세대의 삶에서 일어난 변화를 나는 바닷가 벼랑의 땅밀림에 견주고 싶다. 그것은 오래 이어지고, 차츰차츰 눈에 띄게 되다가, 마침내 사람과 집을 벼랑 아래로 휩쓸어 가는 붕괴로 끝난다.

땅밀림과 붕괴는 잇달아 일어났고, 서로 다른 층위에서, 서로 다른 때에 벌어졌다. 그러니 사람들의 운명도 저마다 다르게 펼쳐졌고, 현실을 대하는 태도도 같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남들보다 오래 정상적인 조건 속에 머물렀다. 그들은 심지어 벼랑 꼭대기에서 탁 트인 바다를 즐길 수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붕괴의 위협을 알아차리고 벼랑 끝에서 달아났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미끄러져 내리는 땅을 다지려고 온 힘을 다했다. 그러는 사이 가까운 곳에서는 이미 붕괴가 굉음을 내고 있었고, 또 다른 어딘가에서는 악당과 약탈자들이 반쯤 무너진 집에서 값진 것들을 털어 가고 있었다.

사회주의 지지자는 땅속 진동이 이미 땅을 뒤흔들고 무너뜨리고 있을 때에도 삶의 탁 트인 넓이를 누리고 있었다. 그는 10월 혁명 자체가 역사적 파국이었다고 여기던 소비에트 권력의 적대자들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네프가 시작되면서 새 국가의 땅이 흔들리자, 그는 땅밀림을 멈출 수 있다고, 아니 사회의 토대를 더 단단히 할 수도 있다고 믿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나중에 그는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구호를 무너진 집 대신 새 집을 지으라는 부름으로 받아들였다(“나는 안다, 도시가 서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정원이 꽃피리라는 것을…”). 더 나중에야 도시가 늪 위에 세워지고 있으며, 사회주의 건설의 이름으로 정원과 숲이 베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기만과 자기기만의 장막 때문에 소비에트 권력의 지지자들은 일이 붕괴로 그치지 않고 악당들이 무너진 집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있다는 것, 곧 스스로 일하던 농민층이 절멸되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마침내 1930년대 후반에 대량 테러가 터졌다. 그것은 사회의 토대를 뒤흔든 또 한 번의 파괴적인 붕괴나 다름없었다. 그때 내 집도 쪼개졌다. 한쪽은 심연 위에 매달렸고, 다른 한쪽은 벼랑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이제 와서 눈에 장막을 쓴 채 역사의 길과 갈림길을 지나왔다고 고백하는 이 사회주의 지지자는 대체 누구였는가? 이런 물음에는 갖가지 단선적인 답이 돌아올 수 있다. 너무 늦게 정신을 차린 순진한 사람, 자기를 변호하려 애쓰는 범죄의 공범, 방향을 잃어버린 역사적 사업의 참여자…

나라와 우리 세대가 걸어온 길이 화제에 오르면, 증오나 환멸, 남의 불행을 고소해하는 마음, 또는 거꾸로 떨쳐 내지 못한 환상이나 환상을 퍼뜨리려는 욕망이 불어넣은 이런 판단을 숱하게 들을 수 있다. 나는 여기서 그런 감정적 판단과 논쟁을 벌이고 싶지도 않고 벌여서도 안 된다. 나는 사회의 변질과 나 자신의 변화를 될 수 있는 한 객관적으로 증언하는 데에 내 과제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지면에서 말하는 “사회주의 지지자”는 『수기』의 지은이이기는 하지만 일부만 그러하며, 그 한 사람만도 아니다.

생각을 좇다 보니 이 생각들이 싹튼 감방에서 멀리 벗어나고 말았다. 나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사실 나는 여전히 “파국과 두 번째 탄생”이라는 전체 주제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다.

* * *

열다섯 해 전 『수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프롤로그」[2]에서 아무 망설임 없이 소비에트 국가에 막대한 유산을 내준 한 젊은이의 행동을 설명하려 했다. 그때 나는 “시대적 성격”이라는 개념을 썼다. 아마도 나는 그 형상을 게르첸에게서 빌려 왔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 와서 보니 게르첸의 글 「다시 바자로프에 대하여」의 여백에 내가 “시대적 성격”이라고 적어 둔 것이 있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나는 내 책에서 일정한 자리를 차지한 이 개념을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다. 앞으로도 이 개념을 쓸 생각이므로, 여기서 몇 가지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가장 널리 퍼진 생각은, 게르첸도 그렇게 보았듯이, 어떤 세대나 사회 집단의 사람들이 자의식과 행동에서 대개 문학에서 받아들인 어떤 “역사적 성격”을 본보기로 삼았다는 것이다[3]. 바이런적인 인물들, 체르니솁스키의 주인공들, 독일 낭만주의자들 따위가 그런 본보기였다. 나는 회고록의 머리말에서, 내 세계관을 빚어낸 것은 사상 생활의 두 강한 흐름, 곧 혁명적 사회주의 이념과 인도주의적 러시아 문학이었다고 말했다. 이로써 여러 역사적 성격으로 구현된 “영향의 장”이 드러난 셈이다.

그러나 내 행동에 이따금 “시대적 성격”이라고 불리는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을 때, 내가 염두에 둔 것은 이런 영향들의 일부일 뿐이었다. 역사의 전환기에는 결코 “역사적”이지 않은 인물들의 행동도 사회 변화, 나아가 세계적 사건들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고 설명했을 때, 내가 뜻한 것은 역사적 성격을 본보기로 삼는 일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이런 현상은 사람들이 한 나라의 어느 한구석에서만이 아니라 넓은, 심지어 세계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있는 사회 생활의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여러 세대가 그런 조건 속에서 자랐다. 평생을 세계와 사회와 개인의 운명에서 무르익어 가는 또는 이미 일어난 전환의 표지 아래 살아온 우리 세대 사람들에게서 “시대적 성격”이 형성되었다. 게다가 내가 속했던 환경에서는 사회 변화나 그저 국제적인 사건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늘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색채가 입혀졌다. 바로 그 덕분에 “시대적 성격”, 또는 이렇게 불러도 좋다면 일정한 행동의 정형이 만들어졌다.

나는 이런 가설이 쓸모 있다고 본다. 곧 역사적 인물이나 문학 속 주인공을 알게 모르게 그저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시대 자체가, “시대의 음악”이 불어넣은 관념과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의 행동에는 비슷한 메커니즘이 있다는 가설이다.

나는 나와 가까운 이 시대적 성격을 미화하고 싶지 않다. 강력한 사회적 요인의 작용으로 결정되는 그 고유한 행동 메커니즘은 저마다 다르게 작동하며, 그 효율도 결코 같지 않았다. 개인의 운명이 저마다 다르게 펼쳐졌으니 말이다. 혁명 초기의 여러 “시대적 성격”에서 그 지배적 특징을 가려내려 한다면, 정치적으로 서로 맞선 진영에 속했던 사람들에게서도 그것들이 서로 공명한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이 두 정치 진영의 대표자들 모두에게서 분노와 격분을 살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겠다. 몸을 돌보지 않고 싸우며 러시아의 혁명적 갱신에서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들과, 러시아를 혁명에서 구하려고 목숨을 건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시대적” 특징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한 사람이 길의 어느 단계에서는 깨끗한 마음으로 한쪽 편에서 싸우다가, 삶의 다른 시기에는 자신이 다른 이념에 봉사해야 한다는 결론에 진심으로 이를 수도 있었다. 두 경우 모두 그런 사람은 자신의 “시대적 성격”과 추상적 이념에 봉사하려는 각오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소련 사회의 가장 다양한 층위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적 일을(그들에게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녔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자기 삶 전체를 어떤 더 높은 추상적 가치와 먼 목표를 위한 투쟁과 결부시켰다. 일반 원칙이 옳다는 것을 무조건 승인하고, 그 원칙과 거대한 계획의 이름으로 희생을 바치고 희생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을 광신적으로 인정하는 것, 이것이 혁명 초기에 형성된 심리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그러나 평화적 건설의 시기에도, 마야콥스키가 자기 노래의 목을 스스로 밟았다고 말했을 때, 그는 자기 삶을, 깊이 생각해서든 기계적으로든, 사회가 어떤 더 높은 목표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 바꾸어 버린 여러 세대 사람들의 세계 인식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마야콥스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기서 내 이야기는 수단과 목적의 미궁 입구에 이르렀다. 감방에 있으면서 내가 출구를 찾던 바로 그 미궁이다. “내 소설의 주인공들”의 운명이 어떻게 펼쳐졌든, 그들의 삶과 심리에는 사회 진화의 흔적이 새겨졌다. 그 진화 과정에서, 역사의 아이러니 또는 (헤겔이 말한) “세계 이성의 간지” 때문에, 수단의 변질과 목적의 바꿔치기가 일어났다. 그래서 미궁 속을 헤매야 했던 것이다.

사회 발전의 과정은 성격 발전의 역학도 결정했다. 이제 (유전적 소인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시대적 성격”이 고정된 값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야 할 때다. 행동의 메커니즘은 새로운 수단과 목적에 맞추어 조정되어야 했다. 사회 생활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관성은 그 뒤로도 오래 작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위대한 이념에 대한 자유로운 봉사가 아니라 국가의 필요를 채우는 복무였다. 더 나중에는 사리사욕을 좇는 순응이 드러났다. 그것은 “시대적 성격”이 퇴화한 결과이기도 했고, 전혀 새로운 인물들이 무대에 올라선 탓이기도 했다.

감히 말하자면, 체제가 진화해 감에 따라 사람들은 더 나빠졌다. 이 과정을 가늠할 보편타당한 척도는 없으며, 거기서부터 셈을 시작할 수 있는 기준도 없다. 그러나 모형에 기댈 수는 있다. 나라의 축소판인 스탈린의 “교정노동수용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망가지고 퇴화했는지 보여 주는 예들이 바로 그것이다.

(수용소에 원칙을 지키며 자기 얼굴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다는 뜻으로 내 말을 받아들여서는 결코 안 된다. 선량한 사람은 많았다. 때로는 선량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 사이에 연대가 맺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수용소 밖에도 좋은 사람은 많았다. 내가 부정적인 예를 들고 해로운 경향을 짚는 것은, 전제적 체제 아래서 인간의 성격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눈에 보이게 보여 주는 모형으로 삼기 위해서다. 수용소 체제는 그 전제적 체제가 가장 응축되어 드러난 모습이다.)

수용소에서는 수감자 누구나 어느 정도는, 자기 삶의 어느 한 면에서는 나쁜 쪽으로 변해 갔다. 영혼이 텅 빈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예전에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아니더라도, 본래 남에게 자기 뜻을 강요하려는 기질이 있는 사람은 비록 가장 낮은 계단에서일망정 수용소의 지휘자 노릇을 기꺼이 맡았다. 반대로 온순하고 의지가 약한 사람은 수용소에서 더 빨리 무너졌고, 정상적인 조건에서라면 결코 허락하지 않았을 만큼 남에게 휘둘리는 것을 받아들였다. 수용소에 오기 전에는 오로지 조심성 때문에 정직한 처신의 규칙을 지키던 사람이 뻔뻔한 날강도이자 뇌물꾼으로 바뀌었다. 악한 사람은 자기 악의를 마음껏 풀어놓았고, 겁 많은 사람은 걸레가 되었다. 아첨꾼들이야 말할 것도 없이 “졸개”와 밀고자가 되었다.

일반화할 재료를 가장 많이 주는 것은 아마도 수용소 환경에서 관찰된, 얼핏 정반대로 보이는 두 가지 특성과 성향의 결합일 것이다. 명령하려는 태세와 복종하려는 태세가 그것이다. 자기에게 다스리도록 맡겨진 사람들을 기꺼이 부려 먹던 수용소 사람은, 똑같은 열성으로 더 강한 자에게, 더구나 직책상의 상관에게는 더더욱 아무 조건 없이 맹목적으로 복종했다.

나는 이런 현상을 수용소에서, 때로는 유형지에서도 여러 번 보았다. 그런데 이 모형의 의미는 수용소 경험의 테두리를 훨씬 넘어선다. “수용소 군도” 깊숙한 곳에서 이런 관찰을 하던 무렵, 나는 “본토”로 돌아온 뒤 내 관찰을 일반화해 놓은 문헌을 접하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권위주의적 성격”이라는 개념이 그것인데, 이 성격은 오늘날의 조건에서 파시즘으로 발전할 잠재적 가능성을 품고 있다(독일 철학자 아도르노). 이 개념에는 중요한 확장 해석도 주어졌다. 전체주의 체제의 조건에서 “권위주의적 성격”은 명령하려는 열정과 복종하려는 태세를 동시에 지닌다는 것이다(미국 역사가 로버트 터커).

이것은 사회학 이론의 영역으로 빠져나간 곁가지가 아니다. 서술의 일관성을 지키려면, 나는 이 나쁜 이중성을 내가 회고록에서 묘사했던 성격의 뒤를 이은 “시대적 성격”의 한 특징으로서 말해 두어야 했다. 나 자신도 어떤 변화를 겪었고, 그것을 이미 감방에서 스스로 깨달았기에 더욱 이 이야기를 해야 했다.

내가 제시한 모형은 특정한 특징들을 응축한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 의미를 지니는 구조이지만, 사회적 조건과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고려하기 전까지는 추상으로 남는다. 그 조건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해로운 변화의 중요한 한 측면은, 고통 속에서 얻고 깊이 생각해 다듬은 세계관이 선포된 경직된 이데올로기로 바뀐다는 데 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성격을 나쁜 쪽으로 변하게 하는 데 이바지한다. 내 동년배들의 운명은 광신, 혁명 구호에 대한 집착이 열매 없는 무사무욕을 낳을 수도, 무자비한 잔혹을 낳을 수도 있음을 증언한다. 이데올로기가 시민들에게 앞뒤 돌아보지 않는 규율을 요구하고 증오와 공포를 심는다면, 무사무욕은 드문 것이 되고 마음의 무딤, 나아가 잔혹이 점점 더 흔한 특징이 된다.

이 책 첫머리에서 그려 보인 “시대적 성격”에서 내 서술이 얼마나 멀리 와 버렸는가! 그런데도 나는 논의를 한 걸음 더, 그것도 중요한 한 걸음을 더 내디뎌야 한다. 추상적 이념, 멀고 불분명한 목적에 대한 헌신과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에 대한 태도 사이의 관계를 말해야 하는 것이다. 목적이 집요하게 선포될수록, 사람들의 의식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생각에 더 쉽게 길들었다. 이 논리는 소비에트 사회의 삶에서 이른바 “노골적으로” 여러 번 내세워졌다. 이것은 아직 네차예프주의(нечаевщина)는 아니었지만(탄압을 집행한 자들의 심리는 건드리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라스콜니코프의 심리 같은 것이 얼마간 있었다. 선한 목적이 나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하는 것은 막다른 골목으로 이끄는 기만의 초기 형태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기만과 자기기만의 다음 단계는, 국가의 충직한 종들과 소시민 대중까지도 나라를 다스리는 데 비도덕적이고 불법적인 수단이 쓰이는 것을 감수했을 뿐 아니라, 체제가 추구하고 국가가 나아가던 목적 그 자체가 바뀐 것을 차츰 자기 자신에게 감추는 법을,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을 이미 이루어진 일로 받아들이는 법을 익혔을 때 찾아왔다.

* * *

앞서 말한 것을 뒷받침하려면, 다소 추상적으로 그려 보인 과정들에 역사적 내용을 채워 넣어 보아야 한다. 역사가나 사회학자의 역할을 자처하지 않으므로, 사회 발전의 개별 단계를 자세히 조명하는 데까지 들어가지는 않겠다.

회고록의 지은이로서 나는, 사건의 목격자이자 참여자였던 사람이 젊은 날의 환상에서 벗어나 지난날을 돌아볼 때 그의 앞에 어떤 전체 그림이 펼쳐지는지를 말하고 싶다.

나는 그 전체 그림에서 차례로 바뀌어 가는 장면 몇 개를 골라낸다. 장면은 저마다 다르지만 미궁은 언제나 같은 미궁이다. 그러나 그 미궁이 언제나 출구 없이 음울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내 인상을 꽤 뜻밖의 연상을 빌려 설명해 보겠다.

소년 시절 나는 오데사의 해변 공원(Приморский парк)에 설치된 놀이 시설을 좋아했다. 난간으로 나뉜 길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엇갈리는 미궁이었다. 콧수염을 기른 사업가들, 날렵한 선원들, 곱게 차려입은 정열적인 남국 여인들, 골똘한 표정의 젊은이들이 서두르며, 아니 달리기까지 하며 이리저리 엇갈려 다니다 서로 부딪쳤지만 미궁에서 나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미궁은 탁 트인 마당에 만들어져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난간 밑으로 기어 빠져나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궁을 찾은 사람들은 놀이의 규칙을 지켰다. 그들은 끈질기게 헤맸고, 마음을 졸였고, 신경을 곤두세우기까지 했다. 그들은 출구로, 목적지로 가는 단 하나의 올바른 길을 찾아내야 했던 것이다...

오데사 공원의 미궁에 대한 이 떨쳐지지 않는 연상은, 네프 시기의 논쟁과 문제들을 곰곰이 생각하던 중에 떠올랐다. 나는 이 시기를 결코 이상화하지 않는다. 그때가 힘겨운 모색의 시대였음을 나는 기억한다. 내가 “혁명은 계속된다”고 위협하듯 읊조리며 거닐던 도시에 끼어 있던 네프의 찌꺼기를 기억하고, 국가 통제를 시장의 자생성과 결합하는 어려운 문제들이 떠오른다. 환멸에 빠진 혁명적 낭만주의자들의 쓰라린 회의와, 폭넓게 사고하는 사람들의 희망도 기억한다. 그러나 이 모든 숙고와 모색과 행동은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정해 놓은 엄격한 틀에 종속되어 있었다. 비유하자면, 아무도 “놀이의 규칙”을 깨뜨리고 난간을 걷어 내어 미궁을 없애 버리려 하지 않았다. 모든 노력은 그 테두리 안에서 자유로 나가는 데 쏠려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공식 소비에트 역사가들이 입을 다무는 다른 것도 기억한다. 네프 시기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레닌의 해로운 구상들이, 그리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점진적으로 재검토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막다른 골목에 빠진 전시 공산주의의 방법들이 청산되어 가고 있었다. 다시 말해 수단과 목적이 조심스럽게 더 나은 쪽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지금 외국 역사가들은 혼합경제의 조건에서 나라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계획을 옹호한 부하린의 이론과 연설을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서방 역사가들도, 내가 아는 한, 당시 신문과 잡지들이, 특히 《이즈베스티야》가 이런 생각을 얼마나 열심히 선전했는지, 경공업을 발전시키고 상업의 자유를 넓히며 농민에게 경제적 자유를 주겠다고 얼마나 약속했는지를 충분히 분명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아직 스탈린에게 매여 있지 않던 칼리닌이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했고, 큰 집회들에서도 같은 말이 되풀이되었다. 나는 1925년 제3차 소비에트 대회의 분위기를 기억한다. 나는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대회 회의에 참석했다. 나와 내 친구에게는 대회가 농민에게 새로운 전망을 약속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우리는 대회 대의원 몇 사람, 교양 있는 농민들과 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 만족하십니까?” 우리가 물었다. 대답은 좀 뜻밖이었다. “두고 봐야지요... 기다려 봅시다...”

농민들이 조심스러워하고 심지어 불신하며, 소비에트 권력의 정책에서 목적과 수단이 한결같을지 의심한 것은 옳았다. 나라가 미궁의 새로운 “네프” 갈래 길을 충분히 멀리 걸어가기도 전에,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당의 총노선”을 따라 완전한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라는 떠밀림이 주어졌다.

증명에 들어가지는 않고(여기서는 그것이 적절하지 않다) 이렇게 말해 두겠다. 스탈린의 우두머리 아래 당 관료 집단이 저지른 역사적 범죄는 네프의 청산, 곧 혼합경제의 조건에서, 국가 계획과 농민 경영의 진보적 발전 아래 나라가 순조롭게 발전할 전제들을 파괴한 것이었다.

“따로 떼어 낸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생각이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모든 학문의 명제에 어긋났다는 점을 상기해 두는 것이 유익하다. 사회주의에 대한 예전의 관념(누군가 주장하듯 그렇게 불길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대신에 좁은 해석이 들어섰다. 경제와 나라의 삶 전체를 국가화하는 여러 형태가 사회주의적이라고 선언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유토피아적이기는 했어도 미래의 “자유의 왕국” 대신에, 리바이어선, 곧 전제 국가가 사회주의의 화신이 되었다. 레닌 연구소 앞의 자유의 오벨리스크가 돌고루키 공의 기마상으로 바뀐 상징적인 일이 저절로 떠오른다...

그렇다고 해서 “내 소설의 주인공들”이 새로운 입장으로 옮겨 가면서 그저 원칙 없이 행동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여러 기회에, 우리가 국민경제의 계획화를 사회 앞에 넓은 전망을 열어 주는 혁신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더구나 과제가 나라의 급속한 공업화에 있다면, 계획의 원리가 시장의 자생성을 밀어내야 함은 더더욱 당연했다. 이리하여 중앙집권화와 대규모 건설의 결합이 지배적 이념이 되었다. 이런 관념이 농업 발전의 길에 대한 견해의 변화를 미리 결정지은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농업 역시 대규모가 되어야 했다. 아직 당원이 아니던 나는 모스크바 소콜니키 구의 후원 단체가 맡긴 일로 중앙흑토주에서 집단화를 위한 선전 활동에 참여했는데, 그때 나는 농업에 현대 기술을 들여올 때가 무르익었으며 그러려면 경영 규모를 키워야 한다고, 다시 말해 콜호스를 만들어야 한다고 끈질기게 역설했다. 그리고 이 말을 진심으로 한 사람은, 얼마 전 네프 시기에 소비에트 대회에서 농민들에게 “만족하십니까?” 하고 묻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말을 한 것은 “쿨라크 청산” 바로 전야였다...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구호가 한동안 사회적 고양의 원천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이념은 대중에게 성공적으로 불어넣어졌다. 5개년 계획의 구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른 5개년 계획 자체가 달성되지 못했을 때에도 인기를 잃지 않았다. 새 길을 따라가는 움직임에는 환상과 신기루가 따라다녔다. 우랄의 산악 지대에 이미 산업의 거인이 우뚝 서 있고 사막에서는 갓 깐 레일 위로 열차가 내달리는 것이 우리 눈앞에 어른거릴 때, 계획은 실현과 거리가 멀었다.

한편 반(半)농업국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이념은 농민에 대한 대량 탄압의 근거가 되었다. 인민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은 기근으로 이끄는 정책, 그리고 수용소에서만이 아닌 노예 노동과 결합되었다. 민주적 체제를 건설하는 도구라고 선언된 국가권력은 독재를, 특히 독재자의 전제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무법과 테러의 도구가 되었다.

과학적 근거도 없고 경험으로 검증되지도 않은 가설은 실현되는 과정에서 거대한 거짓과 모험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대중적 정신병과 도덕적 예속의 원천이 되었고, 스스로 생각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조차 그 예속을 피하지 못했다.

그래도 계획이 다 이루어지지는 않더라도 강력한 국가가 세워져 국제 반동, 무엇보다 파시즘에 맞서는 주된 힘이 되리라는 희망에는 커다란 유혹이 숨어 있었다. 그래서 대외 정책은 이를테면 미궁의 어둠에서 나가는 길을 가리키는 아리아드네의 실 같은 것이었다.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지배 체제에 충성하고 그 곁을 지킨 것도 여기에 기대고 있었다. 직업으로나 신념으로나 전쟁의 위험과 파시즘의 몽매주의에 맞선 싸움에 몸을 바친 외교관과 언론인들은 특히 그러했다.

여기서 소비에트 국가의 대외 정책사에 얽힌 기억을 들추어낼 생각은 없다. 그러나 목적과 수단이 뒤바뀌는 과정을 밝히려면 대외 정책과 국내 정책이 숙명적으로 얽혀 있었다는 점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상호 의존은 시기마다 달랐다.

1917년 직후에는 10월 혁명의 지지자든 반대자든 — 한쪽은 희망에 차서, 다른 쪽은 공포에 질려 — 소비에트 정부의 대외 정책과 국내 정책을 똑같이 세계 혁명을 내다본 도구로 보았다. 대학생 시절 나는 신문에서 외무인민위원부의 아주 긴 폭로 각서들을 읽었다. 간섭 전쟁 동안에도, 그리고 그 뒤에도, 여러 분쟁과 국제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소비에트 외교 문서의 쓰임새는 대개 “부르주아 외교의 비밀”을 들추어내고, 혁명 구호를 외치며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전투적 연대에 호소하는 데로 모아졌다. 젊은 시절 나는 그런 수사를 좋아했다.

1923년(독일 혁명 봉기들이 분쇄된 해) 이후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보았고, 역사의 지평선에서 “세계의 불길”이 비추던 빛이 꺼져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라 안에서는 아직 네프가 평화로운 삶을 약속하고 있었다. 신문에서는 장황한 혁명적 선언들 대신, 외국 열강이 소비에트 정부의 합법성과 권력을 승인했다는 짧지만 인상적인 소식들이 실렸다. 만평가들은 외무인민위원 G. V. 치체린의 집무실 문 앞에 줄지어 선 외국 외교관들을 그렸다. 평화 공존 원칙이 의미를 얻은 것은 그때에 와서였다. 그전, 1922년(제노바 회의)까지는 (소련 공식 역사학의 주장과 달리) 그런 말은 입에도 오르지 않았다. 물론 국내 정치에 반향을 일으킨 큰 대외 분쟁들이 일어났고, 그것도 드물지 않았다. 외국 열강의 압력에 맞서 떠들썩한 시위가 열렸는데, 참가자들은 진심으로 분개했고 진심으로 정부를 지지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의미심장한 점이 있다. 예전에 국제 문제를 다루던 직업 덕분에 나는 그 시절 어떤 분쟁들이 벌어졌고, 소련 쪽은 어떻게 반응했으며, 그와 관련해 어떤 우려와 희망이 생겨났는지를 많은 사람보다 잘 기억한다. 보롭스키 암살, 바르샤바 주재 대사 보이코프 암살, 런던의 아르코스 습격, 베이징 사건, 중국 군벌의 동청철도(КВЖД) 점거를 기억한다. 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데도, 그럼에도 내 기억에는 — 1930년대 초까지는 — 소련에 대한 직접 공격의 심각한 위협 때문에 우리가 날카로운 불안을 느꼈던 상황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1930년대 초를 언급한 것도 사실 구색을 맞추려는 것에 가깝다.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를 점령했고, 한동안은 분쟁이 번질 위협이 현실로 보였던 것이다.

이름난 “숨 돌리기”는 실제로는 192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물론 대략적인 시기 구분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시기에 선전 술책의 결과로 “자본주의 포위”와 그 “음모”가 국내 정책의 변함없는 불길한 배경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 당내 투쟁에서 영향력 있는 각 진영은 외부 위협을 부풀리거나, 상대 진영이 국제 정세를 잘못 판단한다고 비난함으로써 자기 노선을 뒷받침하려 했다. 이것은 틀림없이 국내 정책이 대외 정책에 영향을 미친 한 모습이었다. 당내 논쟁은 여러 번 국제 무대에서 소련이 취하는 입장이나 유럽 노동운동 문제에 대한 입장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훨씬 더 뚜렷하고 피부에 와닿았던 것은 국내 정치의 조치와 모험이 소비에트 국가의 국제 관계에 미친 영향, 때로는 그야말로 파괴적인 영향이었다. 냉소적인 재판극 하나하나가 소련의 국제적 지위에 해로운 결과를 낳았다. 몇몇 일화를 기억에서 되살려 본다. 1925년 독일 대학생 세 명의 재판은 독일과의 관계를 크게 꼬이게 했고, 1928년의 샤흐티 재판도 같은 구실을 했다. 메트로비커스 사의 재판은 영국과의 날카로운 분쟁을 불렀고, 1930년의 산업당 사건은 프랑스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그리고 이 모든 불법 행위는 소련의 대외 관계 전반에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다.

이 영역에서도 수단과 목적은 뒤틀려 갔다. 그 옛날 나는 이런저런 일로 국제 정세가 꼬이는 것을 걱정하면서도, 내가 지지하던 정책을 펴는 정부가 나를 당혹스럽게 한 사건들에 조금도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스탈린 정부는 국내 정치의 목적을 위해 주민들이 제국주의의 공격을 언제나 눈앞의 위협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대외적 위험은 머리 위에 드리운 먹구름, 다가오는 뇌우처럼 느껴져야 했고, 그 때문에 모든 경제 사업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즈베스티야》 사옥에서 열린 모임이 생각난다. 연사는 5개년 계획의 속도와 악명 높은 선동 구호 “5개년 계획을 4년 안에”를 정당화하면서, 소비에트 인민은 전사들의 부대처럼 포화가 쏟아지는 구간을 빠르게 행군해 지나간 뒤 적이 다가올 수 없는 사회주의 공업국의 고지에 자리를 굳혀야 한다고 역설했다.

오랜 세월 동안 바깥의 위협을 들먹이는 것은 스탈린 지도부가 국내 정치의 목적을 이루는 편리한 수단이었다. 그렇게 경계심을 높이자는 호소에 힘이 실렸고, 소련 국경에서 노리며 나라 안으로 첩자를 들여보내는 얼굴 없는 적에 대한 증오가 부추겨졌다. 1930년대의 테러 이전에도 이런 논법은, 말하자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성격을 띠었다. 특히 “쿨라크를 계급으로서 청산하는 것에 기초한 전면적 집단화” 시기에 그러했다. 한 계급 전체가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자, 선전에서 불안을 자아내는 대외 구호와 공격적인 국내 호소를 한데 묶기가 더 쉬워졌다.

1930년대 후반에 대외적 위협은 현실이 되었다. 히틀러 독일이 침략해 올 가능성은 소련에게도, 온 인류에게도 실감 나는 위험이었다. 이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소비에트 나라에는 다시 없을 비극이 닥쳤다. 애국자들과 반파시스트들의 가장 선한 의도가 말하자면 안팎이 뒤집힌 것이다. 위험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인민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열망은 독재 체제에게 국내 테러를 강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 무렵 스탈린의 나라 지도부가 좇던 목적은 반파시스트 세력의 결집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 알다시피, 국가의 방위력을 허물어뜨린 국내 테러의 시대는 1939년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조약 체결로 끝을 맺었다.

1930년대 말에 테러의 희생자, 곧 수용소에서 죽어 간 사람들의 수가 최고에 이르고 고문당해 죽고 처형된 사람도 엄청나게 많았는데, 바로 그때 스탈린 정부와 히틀러 정부 사이에 세계를 나누어 갖는 동맹이 맺어졌다. 이 결탁은 2년 뒤 전쟁이 시작되자,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탓에 다시 수십만의 목숨을 나라에 치르게 했다.

1930년대 말에는 국내 정책과 대외 정책 양쪽에서 수단과 목적의 변질이 무서운 통일을 이루었다. 추악한 수단들이 원숭이 같은 몸짓으로 서로 자리를 바꾸고, 어느새 불길한 목적이 사람을 발톱으로 움켜쥔다.

콘크리트 벽이 숙명의 미궁을 둘러쌌고, 그 벽들은 맞붙어 미궁의 복도 위로 내리누르는 천장을 이루었다. 그 깊은 곳에서는 식인귀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의 막다른 골목, 식인귀 망나니가 무섭도록 가까이 있는 곳, 그것이 비밀 특별체제 감옥인 수하놉카의 감방들이었다. 그곳 수감자들은 절망을 가까스로 이겨 냈다. 나도 단번에 이겨 내지는 못했다. “절망의 저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수단과 목적의 미궁에서 나가는 길을 찾는 일이 가능해졌다.

절망의 저편

곱사등이의 두 번째 탄생

사람들이 일상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삶은 수천 가지 꾀를 써서 그들의 눈을 삶 스스로 떠안긴 문제들로부터, 숙명적인 물음에 답해야 하는 필연으로부터 돌려놓는다. 쇼펜하우어가 썼던 것처럼, 비극적 갈등이 희극적 상황으로 바꿔치기된다. 이것은 전혀 우습지 않다. 고골의 희극 『검찰관』은 무섭다. 지배하고 있으나 이미 수명을 다해 가는 체제가 거짓으로 주민의 환멸과 불안을 잠재우려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박해하며, 영혼을 황폐하게 하고, 노예 심리를 심어 놓는 상황에서 나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 또한 무서웠고 지금도 무섭다.

그러나 삶에서 뜯겨 나왔거나 꾸밈없는 노예의 삶을 선고받아, 가차 없는 현실과 “피할 수 없는 모욕”(네크라소프)에서 달아날 수 없는 사람의 운명은 그보다 더 무섭다. 그때 환멸은 절망으로 넘어간다.

가장 위험한 것은 희망을 잃는 것이다. 그러면 생각과 감정이 메말라 가고, 낙담은 냉소로 넘어간다.

그런 위험은 당연히 내가 이야기하는 극한 상황들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바로 내가 겪은 경험, 역사가 나와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벌인 “극한의 실험”이야말로 나를 이런 결론으로 이끈다. 둔감한 절망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다.

오히려 고통은, 절망조차도 정화가 될 수 있다. 때로는 영혼을 얼어붙게 하는 엄격한 사고의 논리가 불길한 결론을 내리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추론이다. 교활한 이성적 비관주의에서 벗어나야 하고, 또 벗어날 수 있다. 그때 절망을 이겨 내고, 그때 생각도 “구원을 향한” 것이 된다. 그러나 적대적인 힘을 도저히 이겨 낼 수 없다는 느낌이 마음의 평정을 앗아 가는 일도 있다. 사람은 살을 에는 찬바람에 쓰러지고 눈보라에 눈이 머는 나그네처럼 밀려드는 절망과 씨름해야 한다. (수용소와 유형지에서 나는 이것을 자주 겪어야 했다.) 그러나 두려움과 절망의 돌풍이 생각과 살려는 의지, 삶에 대한 믿음을 꺼뜨리지 않았다면 사람은 길을 계속 간다.

요 몇 해 동안 겪은 일을 곰곰이 되새기다 보니, 나는 자연스레 문학에서 내 경험과 거기서 얻은 결론에 메아리치는 대목들을 알아보게 된다. 방금 한 말은 다름 아닌… 페트라르카를 끌어와 뒷받침할 수 있다. 페트라르카의 철학적 대화 가운데 하나(제2대화)에서 그는 벗에게 하소연한다. “… 운명이 온 군세를 이끌고 내게 덮쳐 오면… 그때 사방에서 짓눌리고 이토록 쌓인 불행에 소스라치게 놀라 나는 신음하고, 그때 무거운 슬픔이 일어난다.” 지혜로운 벗은 반박한다. “네 모든 불행의 원인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 생각은 지난날 수많은 사람을 파멸시켰고 앞으로도 많은 사람을 파멸시킬 것이다. 너는 네가 불행하다고 여기고 있다.”

페트라르카의 예언은 우리 시대에 들어맞았다. 수용소와 감옥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은 데에는 스스로를 불행한 사형수라고 여겼던 탓도 있었다.

출구 없는 절망은 파국이다. 그러나 바로 그곳, 감옥과 수용소에서 나는 구원의 비밀을 깨달았다. 내게 열린 것은 이것이었다. 삶은 절망의 저편에서 다시 시작된다.

나는 여기서 내 것이 아닌 표현을 빌려 쓴다. 사르트르의 희곡 『파리 떼』에서 주인공 오레스테스는 이렇게 외친다. “인간의 삶은 절망의 저편에서 시작된다.” 사르트르가 이 말에 담은 뜻이 내가 담는 뜻과 꼭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이 말을 머릿속 사변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운명과 맞서 싸우던 때 내게 닥친 시련 속에서, 인류의 오랜 경험과 함께 현대의 경험이 내게 열린 듯했다고 말할 수 있다. 파시즘 체제와 스탈린 체제의 수용소에서도, 히틀러의 게토에서도 테러의 희생자들은 절망을 이겨 내야 했다. 갇혀 있지는 않았으나 나라의 시련을 함께 겪은 사람들도 절망을 이겨 낼 길을 찾아 헤맸다.

현대의 경험과 먼 옛날의 경험이 서로 메아리치는 독특한 문학적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서독 작가 노사크는 1960년대 초에 쓴 장편소설 『동생』에서 전후 사회의 모습을 그렸다. 바로 얼마 전까지 지배하던 이데올로기는 파산했고 미래는 불투명하다. 이런 조건에서 거대한 “황량한 공간”이 사람들을 갈라놓고, 그 안에 “인간적 주도성의 작은 섬들”이 여기저기 겨우 남아 있을 뿐이라고 작가는 쓴다. 이런 분위기 속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노사크는 200년 전 스웨덴의 신비가 스베덴보리의 사색으로 보여 준다.

위기를 겪으며 이념이 사라진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제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자기 삶을 다시 평가하는 수감자의 내면세계 사이에는 무언가 공통된 것이 있다. 그래서 나도 그 독일 작가를 따라 스베덴보리의 생각을 옮겨 보겠다. 그대로 인용하지는 않지만 뜻은 정확히 전한다. 아직 구원의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 황량한 땅에 놓여 눈길이 온통 절망의 광경에 붙박이게 하라. 그리고 그곳에 머무는 동안 슬픔이 절망의 꼭대기에 이르게 하라. 그때 그들 앞에 단 하나의 구원 가능성이 열린다. 선과 악을 가려낼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선과 악을 가려내는 능력!

구원하는 은총에 대한 신비가의 관념은 내게 낯설다. 다만 극도로 혹독한 조건에서 내 내면세계를 침해받지 않게 지키려 애쓰는 동안 나는 드높은 정신적 고양의 상태도 겪었다. 이 상태를 설명하자면 쇼펜하우어의 말을 되풀이하고 싶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비가들이 은총이니 거듭남(두 번째 탄생!)이니 부르는 것이 실은 의지의 자유가 직접 드러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가 그린 마음의 혼란과 정신의 진화 과정이 내게는 이해되고 가깝게 느껴진다.

내게는 비밀 고문 감옥의 감방이 황야였다. 그곳에서 나는 절망의 극한을 겪었지만, 마음의 구원도 얻었다.

절망의 극한은 자살이다. 자살을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인에게나 무신론자에게나 똑같이 무거운 죄다. 인간의 길이 끝나는 것을 새로운 존재로 옮겨 가는 일이나 우주적 존재 속으로 녹아드는 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현자들은 행복하다. 나는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자살, 곧 삶을 포기하는 일을 인격과 세계를 정당화할 유일한 근거를 버리는, 감당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포기로 받아들인다. 자기를 없앤다는 생각은 고통스럽고, 자살이 세계 전체를 없애는 일이라는 생각은 무섭다...

8년을 보낸 수용소에서(그 전에는 감옥에서 2년을 보냈다) 나는 한 번도 자살을 생각한 적이 없다. 하루하루가 삶을 위한 싸움의 날이었다. 그런 싸움을 치르면서 어떻게 삶을 버릴 생각을 하겠는가? 그리고 목표가 있었다. 시련에서 상하지 않고 빠져나가는 것. 희망도 살아 있었다. 기운이 온전할 때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리라는 희망. 그 뒤 7년간 이어진 “영구” 유형 중에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는 병적인 느낌이 자주 나를 지배했다. 의식이 이 느낌에 중독되었고, 쉰 고개를 넘긴 사람에게 그 느낌은 특히 날카로웠다. 유형지에서 자살 충동이 이따금 광적인 형태를 띤 것은 말 그대로의 중독이 없었다면 아마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몹시 해로운 작업장에서 일하며 온종일 황화나트륨과 다른 화학 물질의 증기를 마셨고, 그 오염된 공기 속에서 고된 일을 했다(한동안은 날마다 큰 망치로 덩어리 황화나트륨을 반 톤 가까이 깨뜨렸는데, 그것도 내 “할당량”의 일부일 뿐이었고 나는 할당량을 넘겨 채웠다). 때때로 죽음이 오기도 전에 삶이 이미 끝났다는 생각이 들 때면, 가장 위험한 정신 상태가 나를 사로잡았다. 곰곰이 따져 본(또는 아직 따져 보고 있는) 자살 결심이 아니라, 생각 없이 자살로 끌려가는 충동이었다. 카라간다와 발하시 사이의 황량한 땅에 있는 악차타우 마을에서 유형 생활을 할 때 그런 위협이 나를 덮쳤다. 두 가지 자살 방법이 나를 끌어당겼고, 그 계획을 실행할 수 있다는 생각을 떨쳐 내기가 어려울 때가 있었다. 벽이 얼어붙고 관이 얼어 가는 선광장에서 음울한 야간 근무를 서며 기계의 핸들을 돌리다가, 나는 여러 번 상상했다. 교대 시간, 바로 공장 구내가 사람들로 가득 차고 감독관 노릇을 하는 상관들이 나타나는 그 순간에, “상부 분급기”라는 기계가 돌아가는 그 까마득한 높이에서 내가 아래로 몸을 던지는 모습을... 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했던 것은 버려진 수갱에 몸을 던지고 싶다는 무거운 충동이었을 것이다(나는 벌써 그런 수갱 하나를 점찍어 두었다). 나는 눈으로 가득 찬, 빠져나올 수 없는 깊디깊은 구덩이로 떨어질 것이고, 봄이 되어 눈이 녹아야 비로소 내 시신이 발견될 것이었다...

그 괴로운 나날에도 둘레의 현실 속에서, 특히 책에서 해독제를 찾을 수 있었다. 일 자체도, 몸을 갉아먹기는 했지만 한동안은 내게 만족을 주었다. 희유금속 광석을 선광하는 기술은 기술적 숙련과 함께 물리 법칙에 대한 이해까지 요구했다. 나는 전문 서적을 찾아 읽었고 흥미를 가지고 일했다. (나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나처럼 카자흐스탄으로 유형된 알렉세이 에이스네르도 선광에 열중했다.) 처음에는 유형 온 에스토니아 여자와 함께, 나중에는 자유 고용된 카자흐인 노동자들과 함께, 공정이 자주 말썽을 부리는 조건에서도 나는 새 금속을 계획 이상으로 뽑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수석 기사로 일하던 광산관리국 총책임자의 아내가 다른 작업반에 생산량을 부풀려 올려 주는 것을 눈감아 주고 있었고, 어쩌면 그것이 우리 작업반의 몫에서 나갔을지도 몰랐다. 나는 단둘이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그 여자를 추궁했다(나는 법원 판결로 시민권을 잃은 유형수였으니까). 그러고 나서 나는 훨씬 더 해롭지만 상관들에게서 독립할 수 있는 일로 옮겨 갔다.

“영구” 유형 중의 파멸적인 절망을 이겨 내기는 어려웠다. 나를 구한 것은 아내였다. 아내는 중앙 카자흐스탄까지 나를 찾아와 오래 머물곤 했다(한 번은 거의 1년을). 우리는 그곳에서 행복한 날들을 보냈다. 그곳 노동자 막사에서 나는 아내의 권유로 펜을 들었고, 우리는 함께 꽤 괜찮은 중편소설을 썼다. 그 이야기의 무대 가운데 하나는 바로 내가 일하던 그 공장이었고, 홀로 살던 시절 내가 몸을 던질까 생각하던 그 상부 분급기 근처이기도 했다. 딸도 나를 찾아왔다. 딸과 나는 언덕들을 즐겁게 산책했고, 그 운명의 수갱 옆도 지나갔다. 평범하고 텅 빈 구덩이였다(여름이었다).

참으로 삶은 절망의 저편에서 꽃피었다!

1950년대에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기 훨씬 전에, 나는 홀로 선과 악을 가려내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 “배움”은 1940년 수하놉카 고문 감옥에서 시작되었다.

수사 감옥에 갇힌 지 2년째 되던 해, 특별체제 감옥에서 다시 고문을 받게 되었을 때, 무죄를 끝까지 주장해도 석방을 얻어 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고문을 견뎌 내고 거짓 진술을 하지 않았는데도 새로운 고통이 나를 기다린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바로 그때 마음의 파국이 나를 덮쳤다.

“슬픔이 절망의 꼭대기에 이르렀다.” 나는 자살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운명의 목소리가 울린 것처럼 느껴졌지만, 이제 와서 보면 그것은 여러 해 뒤 유형지에서 나를 짓누른 상태보다는 덜 위험한 상태였다. 수감자가 거의 끊임없이 감시받는 수하놉카 감방에서는 자살하기가 어려웠다는 점만이 문제가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수하놉카에서 나는 억누를 수 없는 자살 충동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자살에 대해 따져 보고 있었을 뿐이다. 일종의 인격 분열이 일어났다. 그것은 눈길이 온통 절망의 광경에 붙박인 수감자와, 젊은 시절부터 도덕적 가치를 믿어 왔고 무엇보다 본능적이고 숙명론적인 낙관주의가 몸에 밴 인간 사이의 결투였다. 삶을 떠난다는 무서운 생각과 싸우면서 내가 그 생각들을 대화 형식의 시로 표현하고 「인간과 자살자의 대화」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괜한 일이 아니었다. (페트라르카의 대화편에 대해서는 물론 그때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그때 이미 물리친 자살자의 논거는 단순했다. 중상의 희생자, “나병 환자”에게는 살아갈 의미가 없다, 그의 삶은 값어치를 잃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 나는 비참한 제비를 물리쳤다,
영원한 어둠 속에 숨으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죽어 가는 자에게 하늘의 구원은 없고,
자살한 자에게 땅의 용서는 없다.
무거운 상실은 헤아릴 수 없지만,
희망과 꿈을 쏘지는 마라!
죽음에게 문을 여는 자는
허무에서 허무로 떠날 뿐.
삶을 위한 싸움이 짐스럽고
거짓의 뻔뻔함이 아무렇지 않은 자,
그는 무서운 동맹의 희생자다,
희생자와 사형집행인의 동맹!

마지막 네 행에 내가 수사관들에게 굴복하지 않을 때 따른 삶의 자세의 핵심이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 자세가 수하놉카에서 자살이라는 무서운 유혹을 물리치게 도와주었다. 수용소에서 내 처신의 노선도 그러했다.

수용소에서 “사형집행인들과의 동맹”을 맺지 않겠다는 결의는 온갖 간수가 내게 불러일으키던 오래된 혐오와 맞물려 있었다. 간수에 대한 증오는 젊은 시절, 아니 어린 시절부터 위대한 러시아 문학과, 실러 같은 독일 작가들의 영향으로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혁명가들의 위업과 헌병들의 비열함을 두고 오가던 숱한 이야기도 영향을 주었다. 수용소에서 나는 수감자들 가운데 일부가 다른 수감자들을 부리는 것을 보고 놀랐다. 오랫동안 나는 수용소의 모든 상관을, 감시원이나 보초뿐 아니라 작업 현장의 지휘자까지도 간수로, 노예 감독으로 여겼다. 나도 그 노예들 가운데 하나였다. 평범한 노동자였을 때만이 아니라 말단 작업반장이나 이따금 작업장 십장을 맡았을 때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많은 지식인들처럼 나도 일꾼들과 고생과 걱정을 함께 나누었다. 노동자일 때든 작업반장일 때든 나는 늘 상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실적 부풀리기 때문에도, 대드는 말 때문에도 독방에 갇혀야 했다.

나는 고통받고, 병들고, 죽어 가다가도 살아남았다. 물론 튼튼한 건강과 혹독하고 가혹한 환경에 수용소식으로 적응하는 능력을 얻지 못했다면, 숲에서, 들에서, 제재소에서, 화차 적재 작업에서 날마다 여러 해 동안 이어진 수용소 노동을 견뎌 내지 못했을 것이다. 간수들과의 동맹을 경계했기에 나는 사무실 자리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덕분에 혹시 일반 작업으로 보내지지 않을까 하는, 끊임없이 사람을 지치게 하는 전전긍긍과 정신을 갉아먹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이미 수용소 위계의 가장 밑바닥에 있었고, 그것은 아무리 고되고 위험해도 내게 평온과 독립을 주었다. 수용소 생활이 거의 끝나 갈 무렵에야 나는 작업 현장의 노동자 신세를 벗어났지만, 그때도 사무실에서 일하지는 않았다.

나는 힘닿는 데까지 “희생자와 사형집행인의 결탁”을 피하고 절망을 이겨 낸 이 이야기가 무슨 “교훈”처럼 받아들여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어느 누구의 개인적 운명도 다른 사람의 본보기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감옥과 수용소에서, 아니 전제 체제 아래에서라면 감옥 밖에서도 희생자와 사형집행인의 결탁은 파멸을 부르는 악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그런 비참한 거래가 드러나게 또 숨어서 얼마나 여러 모양으로 이루어지는지 일깨울 때, 나는 결코 인간의 약함에 낙인을 찍는 사람 노릇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게는 그런 자리에 설 자격이 없고, 그런 자리는 내 마음에도 들지 않는다. 『파국과 두 번째 탄생』에서 나는 나 자신이 하마터면 꺾일 뻔했던 일을 이야기했다. 다른 수감자들의 운명을, 그리고 진술 속에 나를 겨냥한 중상을 담았던 이들을 이야기하면서도 나는 아무도 단죄하지 않았다. 사형집행인들에게 맞서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갖가지 상황에서 덫에 걸리기가 얼마나 쉬운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 “진술”이라는 것이 날조였을 수도 있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 내가 다른 이야기, 곧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하려 했다고 해서, 의인(그것도 겉으로만 의인인 자들)을 죄인과 맞세운 것은 결코 아니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거짓으로 살지 말라”[4]는 “절망의 저편”에 선 사람이 새로운 무서운 위험에, 어쩌면 조국과의 이별에 대비하며 내놓은 설교였다. 이 설교는 그때까지 일상의 타성에 파묻혀 있던 사람들의 영혼을 뒤흔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강하고 노여운 설교라도 극단적인 요구를 절대화하면, 사람들에게 실제로 지킬 수 있는 행동 규칙을 알려 주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다. 내 생각에 거짓으로 살지 말라는 호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을 가려야 한다는 생각 자체다. 바로 거기에 구원의 조건이 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절대적인 행동 규칙이 아니라 바로 그런 조건을 밝히는 일이다.

감옥에 갇혀서도, 그리고 감옥 밖에서 전횡의 압제를 받으면서도 시련을 견뎌 내는 사람은 자기에게 소중한 도덕적·사회적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그 가치가 서로 아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거리낌 없이 인정한다. 물론 꼭 서로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신에 대한 믿음, 인간 정신의 힘에 대한 확신, 사랑, 조국, 혁명, 과학적 진리, 예술…… 한 사람의 삶에서도 이 개념들은 저마다 때로는 더 가깝고 때로는 덜 가까울 수 있으며, 하물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짓되거나 관습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성스러운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되풀이하거니와 나는 보편적인 도덕 규칙을 설교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증언한다. 끔찍한 세계에서 폭력배와, 날뛰는 악의와, 낯 두꺼운 거짓과 정면으로 마주친 사람에게는 도덕적 가치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이 그를 구한다.

* * *

과거의 미망을 이야기하고, 그토록 이르기 어려운 내면의 자유로 가는 길이 어떻게 열리는지 이야기하면서, 나는 서술하는 바로 그 과정에서 미궁을 빠져나갈 길을 찾고 있다. 이 단계에서 나는 한 가지 모순을 넘어서야 할 처지에 놓였다. 나는 방금, 사람은 자기에게 소중한 도덕적·사회적 가치에 충실하면 시련을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야기 내내 추상적 관념, 먼 목표, 반박할 수 없는 원칙에 매달리는 것이 낳는 부정적 결과를 끈질기게 지적해 오지 않았던가. 이 두 주장을 어떻게 양립시킬 것인가? 나는 이 물음에 이미 답했다고 생각한다. 먼, 곧 추상적인 목표의 이름으로 희생을 바치라는 요구를 비판했을 때, 자기 노래의 목을 밟았다는 마야콥스키의 말을 상기시켰을 때,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는 모습을 그려 보였을 때 말이다. 반면에 전횡의 압제 아래에서 구원의 조건을 이야기할 때 내가 염두에 둔 것은 그 반대, 곧 내면의 자유, 자기에게 소중한 가치에 대한 인간의 헌신, 그가 자유롭게 “자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능력이었다.

돌이켜 보면 감옥에서 나는 내가 고른 길이 옳았는지 의심에 시달렸지만, 그때도 나를 사로잡고 있던 혁명적 이념의 정당성만은 의심하지 않았다. 혁명적 행동이 과연 이로운가 하는 의심은 이미 무르익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그때 이미 소비에트 국가의 역사적 역할에 의문을 품었다. 체포되기 훨씬 전부터 나는, 동시대의 다른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우리가 의식 있는 삶을 시작하던 무렵 꿈꾸고 지향하던 것과는 다르게 살고 있으며, 사회도 우리가 보고 싶어 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는 불안한 생각이었다. 그래도 그것은 여전히 자기기만의 한 형태였다. 사람은 자기가 지배적인 관념과 시대에 순응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사회 발전의 산물로 남아 있었다.

감옥에서도 나는 “시대의 산물”이기를 그치지 않았다. 나는 관료 체제에 몸담았던 것을 자책했다. 그러나 관료적 경직성에 나는 혁명적 혁신을 맞세웠다. 명령하고 제 뜻을 강요하기를 즐기면서 동시에 맹목적으로 복종할 태세가 된 관료형 인간(“권위주의적 성격”), 이 볼품없는 인간형이 관료 기구의 산물일 뿐 아니라 광신적인 혁명적 행동에 참여하는 데서도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나는 관료화의 비밀을 밝혀내면 창조적인 혁명적 기운을 되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도 나는 이 딜레마를 풀지 못하고 있다. 내 세계관의 위기는 아직 완전히 극복되지 않았다.

사실 나는 혁명적 성격을 옹호하고 싶은 쪽이다. 쉬운 일은 아니며, 서방에서 날뛰는 짐승 같은 극단주의자들, 인도에 반하는 진짜 범죄자들이 스스로 “혁명가”라고 내세우는 것을 생각하면 내 안에서 거부감이 일기도 한다.

내가 긍정적인 뜻으로 해석하는 성격은 증오의 정신에 물들어 있지 않으며, 광신적인 편협함과 교조적인 옹졸함이 없어야 한다. 나는 인류의 역사에서도, 개인의 운명에서도 저 풍요로운 혁명적·혁신적 정신, 동시에 비극의 정신이기도 한 그 정신을 없앨 수 없다는 점을 일깨우고자 한다. 세계의 역사와 문학에는 이 생각을 뚜렷이 뒷받침하는 예가 넘쳐 난다.

여러 이유로 소비에트 사회에서는 혁명적 성격, 이상주의자, 혁명적 낭만주의자가 존중받지 못한다. 찬미받기도 하고 조롱받기도 했으며, 풍요롭기도 하고 파멸적이기도 하며, 별을 향해 치솟으면서도 땅의 수렁에 빠져드는 그런 성격 말이다. 오늘날 소비에트 사회에서 경직된 국가 체제를 거부하는 열정적인 젊은이들은 분노와 비난으로, 체제를 지키는 자기만족에 빠진 수호자들은 악의 어린 빈정거림으로 그를 대한다. 혁명을 부정하는 것은 폭력에 반대하는 고결한 사람들이기도 하고, 국가 권력의 폭력에 기대는 탐욕스러운 관료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러시아가 혁명의 길에 들어섬으로써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는 희망이 일어났던 시절, 여러 해 동안 우리나라에서 반역의 기운은 대중적인 현상이었다. 그런 “세계시민주의적” 염원과는 별개로, 그 시절에는 사회의 여러 계층에서, 특히 노동자들 사이에서, 그러나 농민들 사이에서도 혁명적 성격이 형성되었다. 토지를 공정하게 재분배하리라는 오랜 기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때였다. 정의에 대한 꿈이 혁명성과 결합했다. (세르게이 잘리긴의 소설에 나오는 농민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 나는 이렇게 논거와 반론을 차분히 엮어 가며 따져 본다. 그러나 내가 쓰고 있는 그 무렵, 독방에서 나는 온종일 이 모든 문제에 사로잡혀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했다. 감옥에서 사회의 비극은 개인의 비극이 되었다. 물론 고문실 밖에서도 그런 일은 있다. 내 세대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안다. 언젠가 나는 니체의 말 한 대목을 마음에 새겨 둔 적이 있는데, 그 뜻은 역사 전체를 개인이 몸소 살아 낸 것으로, 개인이 겪은 고통의 결과로 받아들일 때에만 진리가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내가 “절망의 저편”에 이르렀을 때가 그러했다. 나는 유난히 어둡고 위험한 상황에서 겪은 일을 쓰고 있으며, 그것이 진리가 드러날 수 있는 “실존적 한계 상황”이었다고 말할 자격이 있다. 그래서 나는 “두 번째 탄생” 같은 개념을 감히 쓰기로 했다.

이런 상태는 전환기인 소년기에도, 장년기에도 찾아온다. 사람이 자기 삶을 새로 곱씹으며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다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는 단순한 물음을 던질 때다. (레프 톨스토이는 이 물음을 말하자면 우주적 규모로 던졌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물음은 과거에도 닿지만 무엇보다 현재, 지금 흘러가는 삶에 관한 것이다. “그다음”은 흐릿한 미래다. 그런데 감옥에 갇힌 사람은 과거에게 묻는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그리고 “그다음”, 바로 그 “그다음”은 감옥에서 이미 와 버렸다. 이 물음들이 내 앞에 놓였을 때 내 주의를 사로잡은 것은 무엇보다 추상적인 사회 문제나 철학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는 개인의 삶, 인간의 개인적 존재, 그의 개인적인 도덕적 책임에 관한 물음이었다.

나는 가까운 과거에 내가 보인 마음의 닫힘을 거듭거듭 자책했다. 지적인 규율의 이름으로, 평가와 결정의 냉철함을 위해, 사회에 대한 의무를 다할 태세의 이름으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감상을, 때로는 약함으로 여겨졌던 것을, 세계를 시적으로 받아들이는 감수성을 버렸던 것을 말이다.

여러 해가 지나 전혀 다른 환경에서 그때 내가 겪은 마음 상태를 되살려 내기란 불가능하다. 그 무렵 서정 일기에 적은 것을 옮겨 보겠다.

그때 감옥 감방에서 나는 1930년대에 쓴 「곱사등이의 눈」이라는 시를 떠올렸다. 나는 감옥에서 이 시에 담긴 정서를 물리치고 머릿속 일기에 한 대목을 적었는데, 그것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풀려난 뒤 종이에 옮겨 적었다.

그러니까 내가 활동적인 삶을 살던 시절, 국제 문제 기자이자 선전가이며 지나치게 열성적인 사회 활동가이기까지 했던 시절, 나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곱사등이의 눈

찌푸린 이마 아래 눈 속에
불안한 기억이 있고,
국경의 푯말처럼 솟아 있다
가 보지 못한 먼 거리가.
피할 수 없는 작별이
기억 위에 혹처럼 얹혔다.
나 자신과 헤어지며,
내 엄격함에 스스로 감동하여,
행진하는 사람들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걸어갈 채비가 되어 있다.
정당한 혹이 맞춤하게 얹혀 있다
무엇에든 길든 등에.
내 의무가 내 혹이다. 그것은 필요하고 중요하며,
자연이 몸소 내게 준 것이다.
벗들이여, 웃지 말고 믿어 다오.
약함과 모욕으로부터
내 혹은 죽는 날까지 나를
든든한 방패로 지켜 주리라.
그런데 의무에 충실한 기억은
끈질기게 나를 지켜보고,
메마른 불길이 나를 태운다
혹의 뼈 상자 속에서.
불은 더 세지고 혹은 더 무거워지며,
곱사등이의 고집은 자란다,
도시의 눈보라를 마주하고
쉬지도 자지도 않고 걸어가려는.
그리고 오직 지난날 잃은 것의 아픔만이
눈 속에 그리움으로 비친다.

이 시구를 나는 《이즈베스티야》 편집국에서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며 텅 빈 모스크바 거리에서 되뇌곤 했다. 그곳에서 나는 신이 나서, 아니 열을 올려 외신부가 맡은 다음 호 지면을 꾸렸고, 때로는 사설을 쓰기도 했다. 일과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채워야 할 다음 날을 시작하면서, 그 사람들 중에는 “미친 듯이 행진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나는 이따금 주문처럼 되뇌었다. “내 의무가 내 혹이다.” 사는 것은 흥미로웠지만, “나 자신과 헤어지며” 살아야 했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는 “곱사등이”의 고백을, 그의 하소연을 들었다. 나는 곱사등이의 푸념에 귀 기울이고, “지난날 잃은 것의 아픔”이 비친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바로 그때 나는 나 자신과 새로이 만났다.

바깥에 있을 때 나는 내 혹이 곧 반박할 수 없는 내 의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러나 감옥에서 나는 내가 예전에 이해했던 그 의무가 실은 나를 땅으로 짓누르던 혹이었음을 씁쓸하게 깨달았다. 감옥이라는 황야에서 선과 악을 가리는 법을 배운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개인적인 것을 사회적인 것에 복종시키려는” 태도를 새롭게 평가하게 되었다(덧붙이자면 이것은 놀랍게도 소련 선전가들과 히틀러의 선전가들이 똑같이 쓰던 공식이다).

사회에 대한 의무는 그 자체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개념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개인이 더는 자기 길을 고를 수 없고, 바람직한 사회 변혁에 제 뜻으로 참여할 수도 없게 되었을 때, 그 의무는 짐이 된다. 혁명적 낭만주의자는 “자기 자신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고, 관료적 직무와 자기기만의 그물에 걸려들었다.

국가의 충직한 종이던 시절 나를 이끌던 교조들을 내던지고, 안으로, 내 마음속으로 뚫고 들어가려는 열망에 사로잡힌 채, 나는 감옥에서 상상 속 서정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곱사등이의 두 번째 탄생

나는 새로운 탄생을 꿈꾼다,
숨은 더 자유롭고, 삶은 더 대담하다,
펴지는 내 뼈들이
무섭게 우두둑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곱사등이였다, 나는
다정함을 영혼의 은밀한 곳에 감춰야 했다,
밧줄로 삶에 묶여 있었고,
그 올가미로 나 자신을 조였다.
이제 몸을 곧게 펼 때가 왔다,
등이 아니라 생각을 펼 때가.
내 감옥은 아직 비좁지만,
영혼은 벌써 길을 나섰다.
내 혹은 지어낸 무게일 뿐!
길에서 나 자신을 잃지 말 것,
그것이 가슴속에 타오르는
내 의무가 나에게 지우는 전부다.
고통으로 슬기로워진 시인,
냉철한 투사의 상속자……
그는 내게 얼마나 소중한가, 새로 태어난
아버지를 닮지 않은 아들은.

이상하지만 의미심장한 일이다. 삶을 사랑하고 망나니들의 위협에도 고개를 들고 맞설 줄 알았던 사람이, 바깥세상에서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는 정신적으로 곱사등이라고 느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감옥에서 두들겨 맞고 독방에 내몰린 뒤에 혹에서 벗어나 몸을 펴고, 영혼의 갱신을 향해 일어섰다.

나는 추상적이고 먼 목표를 위해 소박한 인간적 감정 속에, 그리고 가까운 이들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데에 깃든 온기와 복을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났다. 동시에 나는 세계를 직접적으로, 시적으로 받아들이는 감각을 되찾아 갔다. 그렇다고 나 자신을 사회와 사회생활에서 떼어 낸 것은 아니었다.

나는 말하자면 “지상의 도성”과 “천상의 도성”을 아우를 길을 찾고 있었다. 절망을 이겨 내는 것, 정신적 부활을 꿈꾸는 것, 불멸을 애타게 갈망하는 것 — 이 모든 것에는 흔히 종교적 의식의 몫으로 돌리는 요소들이 있다. 믿는 사람의 내면세계와, 삶의 비극적 측면과 존재와 목적의 영원한 물음을 창조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사이에는 닮은 데, 공통된 특징이 있다. 토마스 만은 언젠가 종교적 개념들을 “도덕적·세계적 영혼의 영역”으로 “심리적으로 옮겨 놓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한 적이 있다(1936년 10월 7일 카를 케레니에게 보낸 편지).

감옥에서 내적 해방을 찾던 나는 철학자들에게서가 아니라(신학자들에게서는 더더욱 아니라) 시에서, 알렉산드르 블로크를 읽는 데서 버팀목을 얻었다. 참된 시인이 다 그렇듯 블로크는 “삶의 스승”이 아니다. 또 나는 알렉산드르 블로크가 20세기 초의 시인들 가운데 이 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와 가장 잘 공명하는 시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물론 그가 이 시대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내 이야기에 그의 이름이 자주 나오는 것은 생각에 잠긴 시간마다 그가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감옥 감방에서 나는 알렉산드르 블로크의 평론과 시를 열중해서 읽었는데, 그 시들이 늘 절망으로 가득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연작 「얌브」 전체가 그렇다. 두 번째 탄생을 꿈꿀 때면 나는 블로크의 이 사행시를 되뇌었다.

“지상의 마음은 또다시 식어 가지만,
나는 가슴으로 그 추위를 맞이한다,
사람 없는 곳에서도 나는 사람들을 향한
보답받지 못한 사랑을 간직한다.”

그러나 미래의 예고처럼 울리는 시행도 있었다.

“경멸은 분노로 무르익고,
분노의 무르익음은 곧 반란이다.”

(이 마지막 두 행을 나는 《노비 미르》 1968년 제10호에 실은 글에서 인용했다. 그런데 1974년 프랑스 신문 《르 몽드》는 3월 22일 A. T. 트바르돕스키 시절의 잡지 《노비 미르》를 다룬 기사를 실으면서 위의 시행을 제사(題辭)로 앞세웠다. 다만 편집진은 그 시행을 내 것으로 돌렸고, 내가 글에서 알렉산드르 블로크의 시를 인용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물론 내게 영향을 준 것은 여기 옮긴 시의 몇 구절이나 인용문이 아니라 블로크의 서정시, 특히 「얌브」에 비친 내면세계 전체였다. 시의 음악에 귀 기울이고 거기 새겨진 형상들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 그런 줄도 모르고 — 시에 비친 영혼의 움직임을 받아들였고, “새로운 탄생”을 꿈꾸던 그 무렵 그 움직임에 응답했다. 이 모든 것이 내게 더 분명해진 것은 이제, 블로크가 1911년 안드레이 벨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겪은 “인간화의 삼부작”을 어떻게 풀이했는지 알게 된 뒤였다. “……순간의 지나치게 눈부신 빛에서 — 지나갈 수 없는…… 늪 많은 숲을 거쳐…… 절망으로, 저주로, ‘응보’로, 그리고…… ‘사회적’ 인간, 세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예술가의 탄생으로……”

그런데 수하놉카 감옥에서 내게 일어난 변모에는 또 하나의 측면이 있었다. 그것은 지성의 영역도, 아마 감정의 영역도 아닌, 오히려 본능의 영역에 속했다. 감옥에서의 정신적 전환은 속박에서 벗어나 몸을 곧게 펴고자 하는 자연발생적이고 유기적인 욕구의 표출이기도 했다. 이것 역시 나는 이제야, 요 몇 해 사이에야 분명히 깨달았다.

카뮈의 소설 『전락』에는 중세 감옥에 갇힌 죄수 이야기가 나온다. 천장이 낮고 너무 좁아서 사람이 누워도 몸을 뻗을 수 없는 독방이다. 수하놉카의 독방은 중세 독방의 현대판이었다. “죄수는 움직일 수 없는 판결에 따라 날마다 웅크린 채 앉아 있어야 했고, 굳어 버린 자기 몸이 곧 자기의 유죄이며 무죄란 몸을 쭉 펴는 기쁨이라는 것을 차츰 깨달아 갔다……” “무죄가 어떤 곱사등이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카뮈에게도 곱사등이의 형상이 나온다니!..

놀라운 것은, 독방에 갇힌 죄수의 감각을 그린 카뮈의 묘사가 감옥 밖에서 비대해진 책임감, 죄의식 콤플렉스, 잘못 이해한 의무의 짐에 눌려 “곱사등이”가 된 사람의 상태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나는 그 두 가지를 다 겪었다. 수하놉카의 감옥에서 몸을 곧게 펴려는 순전히 생리적인 욕구가 정신적 자유에 대한 갈망과, 새로 생겨난 인간의 의무와 삶의 의미에 대한 생각과 하나로 어우러졌다. 그렇게 해서 “곱사등이의 두 번째 탄생”이 가능해졌다.

정신적 갱신의 기쁨은 한순간의 충동도, 우연도 아니었다. 사회로 돌아가기 열여섯 해 전에 감옥에서 내 삶의 새 시기가 시작되었다. 빗나간 일도, 덧쌓인 것도 많았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세계를 받아들이는 내 방식은 그때도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리고 1941년에 내가 겪은 이 진화는 가장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의미에서 나를 구해 주었다. 재판을 통한 처단의 위협이 머리 위에 드리웠을 무렵, 나는 정신적으로 단단해져 있었다.

이제 재판과 수사의 대서사시가 어떻게 끝났는지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그 서사시의 시작은 『파국과 두 번째 탄생』의 줄거리 뼈대가 되었다. 이 글들은 바로 그 책의 마지막 장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줄거리”만이 아니다. 정신적 부활을 겪은 사람의 머리 위로 무자비한 국가의 망치가 내리쳤다는 것, 이것은 우리 시대의 무서운 상징이다.

터널에서 터널로, 빛을 향해

재판. 수용소. 유형. 나라.

모스크바의 감옥들에서 지낸 나날은 1941년 여름에 끝났다. 그때 “감옥과 나라”라는 주제는 내게 전쟁의 비극적인 빛 속에서 다가왔다.

1941년 5월, 나는 한 해를 보낸 2층 독방에서 갑자기 1층 감방으로 옮겨졌다. 거기에는 다른 수감자가 먼저 와 있었다. 새 이웃은 밀정 표도르 크레이닌이었다. 나는 이 책에서 다른 수상쩍은 인물들의 성은 밝히지 않았고, 어떤 만남들은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확실한 근거 없이 행여 누군가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표도르 크레이닌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한다. 그를 감방에서 지켜보았을 뿐 아니라 같은 수용소(우스티븜라그)에도 있었는데, 거기서 그의 탓으로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내가 이미 유형지에 있을 때, 예전에 같은 수용소에 있던 사람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그는 카라간다를 지나는 길이었고, 어떤 경로로인지 — 아마 NKVD에서였을 것이다 — 내 주소를 얻었다. 그것부터가 수상했다. 크레이닌의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어쩌면 공범이었을까?)이 보낸 꽤 이상한 그 편지에서, 나는 크레이닌이 유형지에서도 밀고장을 쓰고 날조된 “사건”을 꾸미는 일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윗선의 주문대로 움직였을 뿐 아니라, 보아하니 앞으로 있을 수사에 쓸 각본까지 스스로 지어내기도 했다.

각기 다른 때에 내 곁에 심어진 두 밀정(바쿠에서 온 통계원과 F. 크레이닌)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무엇보다 판에 박힌 수법이다. 둘 다 나를 겁주려 애썼고 요구받은 진술을 하라고 대놓고 권했다. 둘 다 몰골이 망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들에게는 특권이 있었다. 이발기로 머리를 깎이지 않았던 것이다. 빗질하지 않은 헝클어진 머리칼이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크레이닌의 장광설은 때로 히스테리에 가까웠다. 그는 병적으로 들뜬 상태여서, 공포에 질려 총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지난날의 편안했던 생활을 끝없이 회고하기도 했다.

크레이닌은 체포되기 전에 NKVD에서 “문화를 담당하던” 부서에 있었던 듯하다. 그는 그에 걸맞게 훈련되어 있었다. 문학 지식과 음악적 소양을 자랑했고, 영화 음악을 나지막이 흥얼거렸으며, 『안나 카레니나』의 몇 대목을 외워 읊었다. 그러면서도 예술에 대해 속물적인 생각을 지닌, 교양 없는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실수를 저질렀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이 밀정에게서 나는 그와 그의 동료들이 소련 인민예술가인 어느 여배우의 살롱에 스스럼없이 드나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크레이닌은 허풍쟁이였지만, 나는 그가 흥에 겨워 직무상의 비밀 몇 가지를 흘렸다는 인상을 받았다.

크레이닌이 수하놉카 감방에서 나와 함께 지낸 한 달 동안, 그는 몇 차례 수사관에게 불려 갔고 돌아올 때마다 점점 더 불안해했다. 크레이닌은 감옥의 소개(疏開)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수사관에게서 들었는지도 모르지만, 대놓고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감옥 안의 소음과 움직임을 총살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얼마 뒤 우리는 간수들이 방독면 가방을 메고 다니기 시작한 것을 알아챘다. 크레이닌은 곧바로 전쟁이 일어났다고 단언했지만, 우리가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는 말하지 못했다.

전쟁 소식을 크레이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들었다면 나는 아마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크레이닌이 — 대개 뻔한 지어낸 이야기로 — 하도 끈질기게 나를 겁주었기 때문에, 나는 전쟁 이야기도 그의 공상으로 여겼다. 나는 그저 감옥 근처에서 군사 훈련이 벌어지고 있고 감옥 직원들이 거기에 참여하는 것뿐이라고 대꾸했다.

수하놉카 감옥의 소개는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착수되었다. 나중에 수용소에서 발트 공화국 주민들을 만나고서 알게 된 일이지만, 그들은 1941년 5월 무렵, 그러니까 모스크바 근교 감옥에서 수감자 소개가 시작된 바로 그 무렵에 체포되어 수용소로 실려 갔다. 이 모든 조치는 틀림없이 스탈린의 재가를 받아 시행되었다. 그는 히틀러의 침략에 맞선 방어를 위한 결단성 있는 조치를 범죄적인 태만으로 미루었지만, 그 대신 국내 정치 탄압에서만큼은 “기습 공격”에 대비해 새로운 주도성과 수완을 발휘했다.

날마다 우리는 감방 문이 쾅쾅 닫히고 수감자들이 어딘지 모를 곳으로 끌려가는 소리에 귀를 곤두세웠다. 내 이웃은 밤낮으로 늘 안절부절못했다. 나에게도 수하놉카에서 그때까지 “보존 처리”되어 있던 피의자들의 “청산”에 정말로 착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싹텄다. 그러나 바로 밀정이 내게 공포를 불어넣으려 애썼기 때문에 나는 공황에 빠지지 않았다. 어느 날 새벽 이웃이 나를 깨웠다. “이제 우리 차례요, 우리를 총살하러 끌어낼 거요.” 나는 그때 내가 한 대답을 기억하지만, 크레이닌이 나중에 수용소에서 비꼬는 논평을 곁들여 그 이야기를 퍼뜨리지 않았다면 여기에 옮길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나를 깨웠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총살 전에 나를 깨울 권한을 위임받지 않았소. 그건 그 일을 맡은 사람들이 할 거요.”

마침내 1941년 7월 7일, 감방에 감옥 소장이 나타났다(구타가 벌어질 때 그 자리에 있었고, 내가 내 감방에서 “쫓아낸” 바로 그 사람이다). 감옥 소장은 우리 각자에게 줄 기소장 사본을 가져왔다. 그는 사본을 두고 가지 않고, 읽게 한 다음 피고인이 그 내용을 숙지했다는 데 서명만 하게 했다.

기소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그 문서는 한 장, 아니면 한 장 반쯤 되었다(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나의 가공의 “범죄 활동”에 관한 거짓 진술 몇 가지가 언급되어 있었고, 이를 근거로 가장 무서운 조항, 곧 제58조 1-a항, 다시 말해 반역죄로 기소가 이루어져 있었다. 무성의하게 써낸 형식적 답변 같은 문서에 들어 있는 무시무시한 결론이었다.

내용이 거짓이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이 문서에는 형식상의 명백한 결함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정상적인 조건이었다면 그 결함 때문에 아무런 법적 효력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1941년 7월 감방에서 내게 보여 준 “기소장”의 날짜는 1940년 4월로 되어 있었다. 그것이 승인된 뒤로 한 해가 넘게 흘렀던 것이다. 기소장은 심문이 다시 시작되기 전에 레포르토보에서 작성되었고, 수사 종결 절차도 밟지 않은 채 내게 제시되었다. 이 새로운 단계와 “물리적 작용”의 결과는 어디에도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기소장에는 내가 레포르토보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고 적혀 있었지만, 나는 이미 한 해째 수하놉카에 있었다(1940~1941년 겨울에 아내가 내 소식을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에서도 레포르토보라고 했다). 끝으로 나는 기소장에 적힌 사건 번호가, 첫 번째와 두 번째 “수사 종결” 때 내게 제시된 수사 기록에 적힌 번호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

전체적으로 보아, 아무런 증거로도 뒷받침되지 않은 채 사무원이 의미를 죽이는 관용적 언어로 써서 무시무시하고 근거 없는 결론의 뜻을 흐려 놓은 그 기소장은, 영혼 없는 관료적 작문의 산물이었다. 이런 특징이 스탈린 테러 시기의 모든 문서에 공통된 것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완전한 무법과 테러가 문제인 마당에 문서의 문체나 세부의 거짓 따위는 특별히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판결이 미리 정해져 있었다면, 내가 열거한 위조의 사례들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뒤에서 보듯이, 사건의 형식적 측면은 어느 정도 의미가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나는 질문을 하나 던지겠다. 만약 판결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다면 바로 관료적 위조가 무법의, 극단적인 경우에는 살인의 주된 도구가 된다. 이것은 역사적 관심사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스탈린의 유산”, 사회가 아직 떨쳐 내지 못한 유전병의 문제다. 무법이란 복잡한 체계이며, 결코 개별적인 자의와 잔혹 행위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 체계는 끊임없이, 때로는 눈에 띄지 않게 적법성을 무시하도록 돕는 갈래 많은 상호 연관 위에 세워진다. 탄압의 집행자인 기구조차 크고 작은 악당들로만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어쩌면 가장 위험한 것은 바로 이 점일지 모른다. 자의를 묵인하고 적법성을 어기고 정의를 업신여기는 자들은 대개 얼굴 없는 관리들, 제 일을 하면서 법이나 도덕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명령이나 관료 카스트의 연대 책임에 따르도록 길들여진 냉소가들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마법의 주문도 있다. “국가의 최고 이익”을 내세우는 것이다.

1941년 7월 내게 제시된, 한 인간을 처형으로 몰아넣는 그 문서는 아마 탄압의 조직자 자신도, 사형 집행인도 아닌, 탄압 기구 안의 잘 훈련된 관리가 작성했을 것이다. 어쩌면 나의 보잘것없는 수사관 가르부조프가 썼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전혀 엉뚱한 사람이 썼을지도 모른다. 자기가 지어낸 종이가 누구에게, 어떤 조건에서 제시될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말이다...

“기소장”을 주의 깊게 읽고 나서, 나는 감옥장이 요구한 대로 거기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나는 문서에 “기소장”의 결함들을 열거하는 글을 적어 넣고, 이것은 법적 효력이 없다고 덧붙였다. 감옥장은 자기가 상대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내 돌출 행동에 그는 놀라지 않았다. 그는 문서를 주머니에 넣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이 종이는 내가 갖고 있겠소.

감옥장이 다녀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송병들이 우리를 데리러 왔다. 넋이 나간 크레이닌과 함께 나는 마당으로 끌려 나갔다. 어쩌면 곧 감옥이 아니라 목숨과 작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감옥 건물 출구 바로 옆에 잎이 무성한, 가지 많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던 것이 기억난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눈여겨볼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우리는 “검은 까마귀”(죄수 호송차—옮긴이)에 태워졌다. 차는 이미 꽉 차 있었고, 우리는 차 안을 나눈 칸막이 감방들 사이의 좁은 통로에 자리하게 되었다.

사형수는 수하놉카 감옥에서 밖으로 실어 내지 않는다고, 바로 그곳에서 형을 집행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죄수 호송차에 오르자 나는 기운을 좀 차렸다. 그렇긴 해도 바로 그 크레이닌이 나중에 한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나는 좀 이상하게 행동했다. “검은 까마귀”의 어두운 통로에서 그에게 몸을 기울이고 나는 이렇게 속삭였다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영화 「파리의 지붕 밑」에 나오는 왈츠 가락 좀 생각나게 해 주시오...”

우리는 내게 이미 낯익은 레포르토보 감옥으로 실려 갔다. 그러나 나는 낯선 유형의 감방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창문이 없었다. 이것이 나를 긴장시켰다. 레포르토보의 창 없는 감방에는 총살 직전의 사형수들을 가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혼자서 오래 추측에 잠겨 있을 필요는 없었다. 감방 안으로 두 사람이 더 떠밀려 들어왔다. 한 사람은 조용하고 겁에 질린 농학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의 옛 동료 V. V.였다. 그는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 동안 세 번째로 내 삶의 비극적인 시간에 내 곁에 있게 된 것이다.

수하놉카의 고문실에서 열세 달을 보낸 뒤였으니, 말 상대가 생긴 것이 나는 물론 기뻤다. 사실 농학자는 말수가 적었고, 나와 V. V.가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아챈 뒤로는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우리 둘 다 외국을 드나든 전직 외교관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그 감방 동료는 마침내 진짜 간첩들을 보게 되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V. V.는 나와 달리 독일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미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내게 그 소식을 전했다. 전쟁 이야기를 할 때 그의 눈은 빛났고, 초췌한 얼굴에는 내게 익숙한 표정이 떠올랐다. 강렬한 인상을 즐기는 이 사람은 상대를 깜짝 놀라게 해 놓고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 지켜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곧 그의 눈빛은 흐려졌고, 그는 영양실조로 숨진 수용소에서의 모습 그대로 내 기억에 영원히 남았다.

이렇게 해서 반역죄로 기소되고 독일과 내통한 죄가 있다는 나는, 독일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바로 그 무렵에 최고재판소 군사합의회의 앞에 서게 되었다. 이런 때에 환상으로 나 자신을 달랠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야말로 말하고, 되도록 냉정하고 가차 없이 설명했다. 그러나 그때도 나는 나의 죽음, 그것도 폭력에 의한 죽음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기 장례식은 상상 속에 그려 볼 수 있어도 처형은 그릴 수 없다. 재판 전날 레포르토보 감방에서 나는 사형 판결이 내려진 뒤 내가 어떻게 처리될지 생각할 수가 없었다(아니면 생각하기가 두려웠다). 그러나 가족에 대한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어째서인지 나는 내가 처단된 뒤 아내가 탄압받으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내 생각은 다른 데 붙들려 있었다. 가공의 파괴 분자를 사냥하고 전문가들을 몰아세우던 시절, 총살된 기술자와 경제 관리자들의 명단이 신문에 실리곤 하던 일이 떠올랐다. 전쟁 중에 발표되는 “정체가 폭로되어” 총살된 “독일 간첩” 명단에서 아내와 딸이 내 성까지 읽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몸서리쳤다. 가족이 겪을 슬픔에 대한 괴로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그 슬픔의 원인이 나의 죽음이리라는 것을 나는 잠시 잊은 듯했다. 상상력의 무서운 장난이 한동안 처형에 대한 공포를 밀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들은 다시 나를 덮쳐 왔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더 이상 곱씹고 있을 수만은 없었고, 무엇이든 해야 했다. 얼굴 없는 운명과 싸우는 데 마지막 힘을 쏟고 싶은 마음이 깨어났다.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내 사건은 다른 많은 사건과 다르다. 재판부가 이것을 외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나는 당직 간수에게 종이를 요구했고, 늦은 시각인데도 그것을 받았다. 군사합의회의 앞으로 쓴 진정서에서 나는 내가 나의 무죄를 지켜 냈다는 것을 간략히 밝히고, 내 사건과 기소장에서 저질러진 위법 사항들을 열거했다.

아침에 우리는 한 사람씩 감방에서 끌려 나갔다. 그 무렵 레포르토보 감옥에서는 부티르카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 위원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저마다 “최고재판소 군사합의회의”라고 불렸다. 그렇게 해서 여러 사건에 대한 판결이 동시에 내려졌다. 나는 곧바로 재판에 끌려가지 않고 지하실의 대기 칸에 들어갔다. 레포르토보 지하실에 대해서는 수감자들 사이에 확고한 견해가 있었다. 사형이 정해진 사람들을 그곳에 두고, 바로 그곳에서 죽인다는 것이었다. 지하실에서 나의 첫 이웃은 중앙아시아 어느 공화국의 나이 지긋한 간부였다. 그는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몇 시간 뒤 나는 지하실에서 위층으로 끌려가 꽤 넓은 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군복 차림의 세 사람이 긴 탁자 앞에(내게는 단 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버티고 앉아 있었다. 내 양옆에 호송병들이 섰다. “재판관들”은 방금 어떤 사건의 “심리”를 마친 듯했고, 곧바로 나를 다루기 시작했다. 재판장 칸디빈은 분명히 자기 이름을 밝혔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그의 성을 알 리가 없었다. 판결문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재판 전에도 후에도 나는 그 성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는 뿔테 안경을 쓴 뚱뚱한 중년 남자였다. 얼굴 표정은 거칠지도 음험하지도 않았다. 법률가 관리의 음울한 얼굴이었다. 재판장이(아니면 서기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게 익숙한 “기소장”을 읽었다. 판결 선고에 앞서 짧게 진술하라고 했다. 나는 내가 무죄라는 것, 유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 중상자들과의 대질 신문을 요구했으나 헛일이었다는 것을 말했다. 재판장과 재판관들은 익숙한 무관심으로 듣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한 해 동안 수하놉카에 있었다는 것, 거기서도 거짓 진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이어 기소장의 결함들을 열거하자, 칸디빈은 안경을 벗고 재판관 하나에게 몸을 기울여 무언가를 속삭여 물었다. 그 젊은 사람은 아마 NKVD 수사부의 대표였을 것이다. 그는 재판장에게 속삭이며 무언가를 설명했다. 그러자 칸디빈은 뜻밖에도 판결 선고를 연기하고 재판을 휴정한다고 선언했다.

휴정은 오래, 꼬박 하루 동안 이어졌다. 판결 선고를 앞둔 7월의 밤을 나는 지하실의 대기 칸에서 보냈다. 사형수들의 지하실에서?

나에게는 다음 질문의 답을 괴롭게 찾을 시간이 충분했다. 내가 재판에서 기소 내용을 반박했기 때문에 죽음을 면한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군사합의회의 법정에서 내가 “물리적 작용”(나는 “고문”이라는 말은 피했다)을 견뎌 냈다는 것, 그리고 기소장이 법적 효력이 없다는 것을 모두가 들리게 밝히기로 작정함으로써 스스로 파멸을 부른 것인가? 재판 절차란 순전한 형식일 뿐이고, 재판부는 사건 종결 때 윗선이 승인한 결정을 형식에 맞춰 처리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법정에서 감옥이나 수사관 집무실에서 벌어진 일을 폭로하려 한 사람들을 탄압 기구가 얼마나 잔혹하게 처단하는지에 대해, 나는 꽤 믿을 만한 이야기들을 들은 터였다. 그런데도 직관은 내게 기적이 일어났다고 속삭였다. 나는 죽음의 기계 속에 모래알 하나를 던져 넣는 데 성공했고, 기계는 헛돌기 시작했다. 나의 진술은 재판장에게 뜻밖이었고, 어떤 게임의 규칙, 관료적 규칙이 내 사건에서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아니면 더 단순하게, 가장 가혹한 조건에서도 무법에 대한 굳건한 저항, 인간이 제 권리를 지키는 일은 언제나 완전히 가망 없는 일만은 아닌 것일까?

그 비극적인 밤에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다행히 내 옆자리 사람은 말이 많고 기운을 잃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가 레벤톤이라고 자기 성을 댔을 때, 나는 우리가 이미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1917년 2월 혁명 초기에 그와 나는 둘 다 대학생으로서 오데사의 경찰서, 곧 항만 경찰서를 점거하는 일에 함께 나섰다. 내 삶에서 그것은 한 토막 일화였지만, 그에게는 직업 활동의 시작이었다. 그는 법학부 학생이었고 혁명 첫날부터 사법 기관의 일에 뛰어들었다. 레벤톤을 만났을 때 나는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레벤톤은 검찰에서 날조된 “산업당” 사건 피고인들의 사건을 맡았던 사람이다. 말하자면 사법 날조에 적극 가담했던 사람이 탄압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재판이 끝난 뒤 레벤톤과 나는 같은 수용소로 가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나와 만난 뒤 레포르토보에서 리트비노프의 비서였던 나자로프와 같은 방에 있었다고 들려주었다. (1939년 5월에 나는 나자로프가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업무용 전화로 막심 막시모비치에게 알렸었다.) 레벤톤의 말에 따르면, 나자로프는 내가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했고 판결 선고가 미뤄졌다는 이야기를 그에게서 듣고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나자로프는 최고형(그때는 20년이었던 것 같다)을 선고받았고, 아마도 재판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생을 마쳤을 것이다.

(나중에 레벤톤을 파멸시킨 것도 바로 그 크레이닌이었다. 우리가 수용소로 실려 온 지 얼마 안 되어, 아마 이미 1941년 10월이었던 것 같은데, 크레이닌의 밀고로 레벤톤을 비롯한 몇 사람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퍼졌다. 그들은 막사에서 전선의 형세에 관해 조심성 없이 말을 했던 것이다. 레벤톤과 다른 수감자 몇 사람은 어딘가로 끌려갔고, 그 뒤로 나는 그들에 관해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1941년 7월 9일, 나는 다시 지하실에서 끌려 나와 법정으로 갔다. 이제 나는 1939년 5월 체포되기 한 시간 전처럼 사는 것이 흥미롭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즐겁게 하지도 않았고, 내부 감옥에서 밤중에 신문에 불려 갈 때처럼 역겹고 걷잡을 수 없는 떨림에 떨지도 않았으며, 수하놉카에서 고문을 받은 뒤처럼 자살하려는 자와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고, 불멸에 관한 시를 속으로 읊지도 않았다. 이제 마음속에서는 모든 것이 잠잠해졌고, 팽팽한 기다림의 정적이 자리 잡았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나는 기다렸다. 그저 기다리기만 했다.

같은 법정, 붉은 나사(羅紗)를 덮은 커다란 탁자 뒤에 바로 그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바로 그 칸디빈이 아무런 서두도 없이 판결을 낭독했다. 법정의 결정은 나에게서 반역죄 혐의를 거두었고, 제58조 1-a항의 적용을 취소했다. 이 구원의 말을 읽고 나서 칸디빈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내가 방금 들은 말의 뜻을 헤아렸는지, 내가 살아남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들었는지 확인하려는 듯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어서 이미 귀에 익은 억지 혐의들이 간략하게 되풀이되었다. 판결은 이러했다. 외무인민위원부 안의 반소비에트 조직 활동에 가담한 혐의로, 제17조(공범), 제58조 6항(간첩), 제58조 8항(테러), 제58조 11항(조직)에 따라 수용소 10년. 그 밖에 시민권 박탈.

판결 낭독이 끝나자 호송병들이 나를 데리고 나갈 채비를 했지만, 나는 그 짧은 틈을 타 재판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중상모략을 하던 자들조차 나를 테러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하지 않았고 수사관들도 그런 혐의를 내게 제기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이 조항으로도 유죄 판결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칸디빈은 내게 설명을 해 주어도 괜찮다고 여겼다. (물론 그는 내가 아무 죄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테러에도 종사한 조직의 활동에 가담한 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라고 “해명”했다(어떤 테러를? 어디서? 언제? 이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다...). 그러니까, 하고 재판장은 말을 이었다, 판결에 테러 조항도 인용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재판장의 설명으로 만족해야 했다. 재판장은 아마 내가 “정상이 아니다”라고 여겼을 것이다. 법정의 결정 덕분에 마지막 순간에 처형을 면한 사람이, 전시의 수많은 졸속 판결들보다 오히려 조금 덜 가혹하기까지 한 판에 박힌 판결의 문구를 두고 법정과 입씨름을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판결이 선고되었다는 것은 내가 수사 감옥에 머무는 기간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감옥과 수용소의 컨베이어가 곧바로 나를 집어 올렸고, 나는 그 뒤로도 열네 해를 그 손아귀에 있었다.

* * *

이제 잔혹한 수사의 경과는 더 이상 내 이야기의 밑그림이 되지 않는다. 고문실은 이제 내 성찰의 직접적인 배경이 아니다. 테두리가 차츰 넓어진다. 독방은 커다란 이송 감방의 크기로 넓어진다. 감방은 철로 위를 내달리는 죄수 호송 열차 칸으로 바뀐다. 감옥의 벽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가시철조망, 타이가 속의 높은 울타리, 보초가 선 망루가 들어선다. 수용소는 점점 자라나 숲과 마을과 도시를 삼킨다. 그다음에는 수용소의 장벽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넘을 수 없는 차단선으로 바뀐다. 관할 경비소의 그물이 “영구 유형”에 묶인 사람을 지킨다. 이렇게 내 성찰의 배경은 바뀌지만, 주제는 여전히 같다. 수단과 목적의 미궁, 감옥과 나라, 감옥 안의 인격, 감옥 안에서 그리고 나라 안에서 인간이 지니는 내적 자유...

1941년 7월, 강요된 고독이 끝났다. 새로운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물음들이 생겨났다. 내적 자유가 절망에서 구해 줄 수 있을까? 희생자와 사형집행인의 저주받은 결속을 물리치고, 그것에 선한 이념들의 결속을 맞세울 수 있을까? (여기서 “선한”이란 동정심 많고 마음이 여리다는 뜻이 아니라, 선을, 정의를 지향한다는 뜻이다.) 그런 가능성은 쉽게 열리지 않았지만, 수용소의 야만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완전히 닫혀 있지는 않았다.

법정을 나서자마자 나는 곧바로 사람들 속에, 같은 운명, 곧 수용소가 기다리는 온갖 사람들 속에 놓였다. 감옥의 컨베이어는 쉼 없이 돌아갔다. 바로 그날 우리는 레포르토보의 감방에서 부티르카 감옥의 꽉 찬 감방으로 옮겨졌다. 감방 문은 수시로 열렸고, 방금 재판의 컨베이어를 거친 새 수감자가 들어왔다.

사람들과의 만남은 내게 더없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두 해 동안 나는 얼마나 자주 이 만남을 꿈꾸었던가! 몇 번이나 나는 이제 곧 이송 감옥에서 사람들을 만나게 되리라고 잘못 짐작하기도 했다. 마침내 그 일이 일어났다. 새 얼굴 하나하나가 궁금했고, 이야기 상대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 기뻤으며,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반가웠다. 주위 사람들은 활기에 차 있었고 기꺼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토록 많은 호감 가는 얼굴들을 한꺼번에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오랜 고통을 견뎌 내고 이제 막 자기 삶에 전환점이 왔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나는 고통이 살아온 경험이 저마다 다른 온갖 사람들을 고귀하게 만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활기찬 대화와 동정 어린 물음, 심지어 농담까지 오가던 그 시간은 장차 강제노동수가 될 사람들의 삶에서 잠깐 스쳐 간 일화에 지나지 않았다. 1941년 여름 부티르카 이송 감옥을 거쳐 간 사람들 가운데 살아남은 이는 많지 않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도 우연히 찾아온 밝은 순간들보다는 수용소와 유형지에서 겪은 무겁고 어두운 시련을 더 잘 기억한다.

1941년 여름 부티르카에서 수감자들 사이의 거리낌 없는 대화는 곧 잦아들었다. 사람들은 전쟁에 관한 소문을 귓속말로 주고받았다. 앞으로 있을 이송에 관한 단편적인 소식도 귓속말로 나누었다. 소문과 추측은 날이 갈수록 더 어둡고 더 불길해졌다.

여름이 끝나 갈 무렵, 우리는 밤중에 급히 개조한 트럭에 실려 역으로 향했다. 나는 우리가 사도보예 환상도로를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고, 텅 빈 거리가 온통 어둠에 잠겨 있는 데 놀랐다. 그날 밤 우리는 죄수 호송 열차 칸에 실렸고, 아침에 틈새로 내다보니 열차 칸은 쿠르스크역 승강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나는 두 해 넘게 거리의 사람들을 보지 못했는데, 모스크바 사람들의 옷차림이 눈에 띄게 달라진 것 같았다.

이런 순전히 겉으로 드러난, 어쩌면 우연한 인상들은 더 깊은 체험의 메아리였다. 나는 동포들의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금 그들이 무엇을 가장 걱정하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감옥 안의 우리는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전쟁의 첫 몇 달이 주민들의 삶과 수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전쟁이 어떤 어려움과 궁핍을 가져왔는지 알지 못했다. 우리는 전쟁이 온 나라를 덮쳤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고, 머지않아 우리 감옥 위로 전쟁의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저녁 무렵 우리는 바퀴 달린 감옥 안에 갇힌 채 공습의 무시무시한 몇 시간을 견뎌야 했다. 역은 텅 비었다. 사람들은 방공호로 몸을 피하려고 흩어져 달아났다. 근처에는 열차가 한 편성도 없었다. 선로 위에는 죄수 칸 하나만 외로이 서 있었다. 호송병들은 폭격이 다가오면 뛰어내릴 채비를 하고 열차 칸 승강대로 나가 있었다. 갇혀 있는 우리는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 어딘가 가까이 있는 고사포의 일제 사격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곧 우리는 불길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것을 보았다. 저마다 폭탄과 화재로 피해를 입은 곳이 바로 자기 가족이 사는 동네일 것만 같았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며 가족을 생각했다. 폭탄이 열차 칸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우리 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출입문은 밖에서 잠겨 있었고, 창에는 쇠창살이 쳐 있었으며, 칸마다 복도와 쇠창살로 막혀 있어 안에서는 열 수가 없었다.

공습 해제 신호가 울리고 눈앞의 위험이 지나간 뒤에도 우리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우리는 말없이 계속 앉아 있었다. 우리는 살아남았지만, 감옥에서 나와서도 우리가 사회로부터 얼마나 철저히 떨어져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모든 이와 함께 적에 맞서 싸우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고, 우리는 모두가 함께 겪는 위험조차 나눌 수 없었다. 우리는 삶에서도 죽음에서도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버림받은 자들이었다. 며칠 뒤 열차가 코텔니치역에 섰을 때 우리는 다시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열차는 측선이 아니라 역 승강장 옆에 서 있었다. 우리 열차 칸 앞에 군중이 모여들었다. 아마도 열차 칸에 간첩들을 싣고 간다는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군중은 우리 칸 창문 아래에서 날뛰었고, 금방이라도 칸 안으로 뛰어들어 우리를 갈가리 찢어 놓을 기세였다.

두 해쯤 뒤에, 모스크바에서 함께 이송되어 온 사람 하나가 수용소에서 내게 물었다. 코텔니치역에서 열차 칸 바로 곁에 서서 가짜 “파시즘의 앞잡이”인 우리에게 보복하겠다고 위협하던 그 여자의 생김새를 기억하느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나는 날뛰던 군중의 맨 앞줄에 흥분한, 겉보기에 교양 있어 보이는 여자가 서 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오, — 내 이야기 상대가 말했다. — 어제 그 여자를 이웃 수용소 분소에서 만났소. 얼마 전에 잡혀 왔다는데, 수용소에 들어오자 그때 열차 칸에 있던 사람들도 자기와 똑같이 죄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더군...”

앞서 이야기한 코텔니치역 사건은, 대량 테러를 조직한 자들이 인민 사이에 불화의 씨를 뿌리고, 주민의 일부 계층이 아니라 인민 대중을 탄압의 희생자들에게 등 돌리게 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던 일로서 내가 아는 유일한 일화다. 아니다! 가시철조망은 인민을 서로 낯설고 서로 맞서는 두 부분으로 갈라놓지 못했다.

* * *

소비에트 사회는 수직으로 갈라져 있지 않다. 나라에 위에서 아래까지 수백만 명을 아우르는 거대한 단일 정당이 존재하는데도 그렇다. 대체로 어떤 층위에서도, 어떤 조직에서도, 당원들은 당원이라는 자격으로 나라의 다른 주민들과 맞서 있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다. 물론 “공산주의자와 비당원의 블록” 같은 것은 없다. 이제 개별 당원에 대한 태도는 위계 속 그들의 자리에 따라 정해지고, 당 전체에 대한 태도는 곧 국가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다. 당 기구는 오래전부터 국가 기구를 통제하거나, 국가 기구로 보완된다.[5]

당에서도 모든 층위, 곧 결정이 내려지는 상층과 순전히 집행만 하는 하층이 국가의 해당 층위와 서로 맞물려 있다. 내가 자주 언급해 온 인물인 “국가의 충직한 종”은 대개 당의 종이기도 하다. 그리고 국가의 난맥상을 걱정하거나 불의한 처사에 분노하는 자유사상가 애국자는 그 책임을 국가기구와 당기구에 똑같이 묻는다. 내가 이 고찰을 해 오면서 국가에 대한 태도와 당에 대한 태도를 비교하거나, 하물며 맞세워야 할 일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소비에트 국가에서는 수평적인 분화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나는 방금 국가기구와 당기구에서 서로 맞물리는 층위들을 이야기했다. 이 나라에는 특권을 누리는 지배 계층이 있다. 이 계층은 스스로를 특권 카스트로 자각하게 되었다. 그 존재는 국가 생활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눈에 띈다. 카스트는 다시 여러 집단으로 이루어진다. 이와 관련해 떠오르는 것은 스탈린 치하에서 민간 기구에도 군대처럼 칭호와 관등, 계급, 제복과 휘장이 도입되었다는 사실이다. 완결된 위계 체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나는 때때로 스탈린 체제가 이미 역사적 변질을 불러왔고, 그것이 진정한 카스트 국가의 형성으로 나타났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여기서 나는 소비에트 국가에서 위계 체계가 형성되어 가는 오늘날의 단계를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 내 이야기는 그보다 앞선 단계, 곧 일반 행정기구의 활동이 언제나 탄압 기구의 활동과 얽히고설켜 있었고 사회의 맨 밑바닥 층에 수용소 수감자와 유형수라는 거대한 무리가 덧붙어 있던 단계에 관한 것이다.

물론 수용소 수감자들은 사회의 최하층 카스트조차 아니었으며 아예 사회에서 떼어 내어진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게다가 그들은 멸종할 운명에, 어쨌든 퇴화할 운명에 놓인 사람들이었다. 대체로 수용소 수감자는 겉모습만으로도 이 나라의 다른 주민들과 구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용소 체계는 전체로서도, 그 개별 부분에서도 헤아릴 수 없는 끈, 곧 경제적·조직적 끈으로 나라의 삶과 이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수용소의 노예들은 사실상 사회 바깥 어딘가에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유달리 시달리고 짓밟힌 최하층 카스트로서 사회의 일부를 이루었다. 예컨대 수용소 수감자들이 생산 현장에서, 유형수들이 생산 현장과 일상에서 “자유로운” 주민들과 마주칠 때 사람들이 그들을 미덥지 않게 또는 적대적으로 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범죄자로 분류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사회의 계층 분화가 사회심리에 스며들어 자기보다 더 예속된 사람들에게는 오만하게, 특권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비굴하게 구는 태도를 낳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수용소 체계는 극단적인 무권리와 잔혹한 자의라는 형태로 그 해로운 기운을 사회 전체에 퍼뜨렸다. 같은 기업에서 일반 노동자와 수용소 일꾼들이 나란히 일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것은 생산 관리의 전반적인 방식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나는 유형지에서 현지의 생산 책임자들과 우리를 찾아온 주(州)와 부처의 간부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관리 방법을 보나, 자유로운 전문가들을 포함한 부하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나, 유형수만이 아닌 노동자들을 부리는 방식을 보나, 모든 면에서 그들이 수용소 체계에서 쓰이던 방식 말고는 다른 생산 관리 방식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관리자들은 때로 업무에 꽤 밝았지만, 법도 자기 권리도 아는 정말로 자유로운 사람들의 집단을 이끄는 법은 도무지 알지 못했고, 그럴 능력도 없었을 것이다.

유형지에서는 “콘틴겐트”라는 말이 완전히 공식적으로 통용되었다. 마을 거리에 새 유형수들이 나타나면 광산관리국에서는 “새 콘틴겐트가 도착했다”고 말했다. 그에 상응하는 등급을 받은 어느 기사의 아내는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경비대장에게 이렇게 물었다. “새 콘틴겐트 가운데 가정부로 쓸 만한 여자가 없나요? 하지만 젊은 여자는 보내지 마세요. 우리 남편 아시잖아요.”

때로는 유형수의 가족까지 “콘틴겐트”에 넣었다. 한번은 경비대 병사들이 유형수 막사를 돌고 있을 때, 그곳에 잠시 머물던 모스크바 여자가 자신은 모스크바 주민이라며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상관없어요, 여기 있는 사람은 다 우리 사람이니까.” 경비대장이 대답했다. 이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1951년과 1952년에는 마을에 사는 유형수 가족들을 그곳에 영영 묶어 두리라는 말이 심각하게 오갔다. 그렇게 해서 진정한 카스트 사회가 형성될 수도 있었다.

복권되기 얼마 전 기본건설과에서 계획 담당자로 일할 때, 나는 업무 서류에도 “콘틴겐트”라는 말이 늘 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말은 노동력과 기술직 인원 구성에 관한 통계 보고에만 쓰인 것이 아니었다. 부처로 올려 보내는 보고서와 결산서에서는 계획 미달이나 결함이 생산 현장에 “특별 콘틴겐트”가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이유로 정당화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거짓 핑계가 아니라 실제 상황을 거칠고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짓이었고, 유형수 기사와 기술자, 노동자에 대한 중상이었다. “콘틴겐트”야말로 생산의 모든 부문에서 주도적인 힘이었다. 유형수 기사들은 작업을 재편하고 수많은 혁신을 들여왔으며, 유형수 노동자들은 광석 채굴에서 기록을 세우고 공장에서 계획을 초과 달성했고, 유형수 의사와 간호사들은 의료를 제대로 갖추어 놓았다. 클럽의 아마추어 공연 활동조차 유형수들 덕분에 활기를 띠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콘틴겐트”, 곧 최하층 카스트로 남았다. 이 카스트 안에도 여러 범주가 있었다. 범주는 무엇보다도 감옥과 수용소의 신상 기록으로 정해졌다. 생산 활동에서 거둔 성과는 위계 속 한 사람의 위치에 아주 가끔,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반영되었다. 열다섯 해 가까이 내가 최하층 카스트에 속한다는 사실은 모든 초소와 모든 경비대에서 던지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결정되었다. “조항? 형기?” — “58조, 10년.”

수용소 형기가 끝나 갈 무렵인 1948년에 딱 한 번, 수용소 분소(“셀랸카”, 우솔라그)의 소장 콘체프 대위가 내 사건 판결문에 직접 적용된 조항이 하나도 없고 내가 “공범”으로만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대위는 (내가 단호히 거절했는데도) 나에게 수용소 소속 국영농장의 식당 관리를 맡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작전 체카 부서”가 분소장의 지시를 취소했다. 수용소에 있는 동안 이런 일은 여러 번 있었다. 어느 정도 숙련이 필요한 일이나, 상부가 예외적으로 정직한 사람을 필요로 하는 일이 나에게 맡겨지면, 곧 나를 일반 작업으로 되돌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수용소 고위 행정부, 특히 “경계 전문가들”에게 평판이 나빴다.

콘체프는 (단둘이 있을 때) 우솔라그 소장 타라슈크 대령과 나눈 대화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콘체프가 왜 나에게 관심을 보였는지 설명하면서 내가 공범 혐의만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말하자, 대령은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 생각해 보시오, 대위. 누가 당신을 칼로 찌르려 하는데, 그네딘은 당신 팔만 붙잡고 있을 뿐이라고 칩시다. 그렇다고 그자가 덜 위험하단 말이오?

물론 이런 설명이 있은 뒤로 나는 들일로 보내져야 마땅했다.

* * *

스탈린의 테러가 한창일 때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수용소 분소 가운데 한 곳의 소장은 내 사건 판결문을 읽어 보고 내가 아무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감히 말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죽은 뒤에도 소련 검찰총장 루덴코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1953년에 나는 카자흐스탄에서, 아내는 모스크바에서 여러 정부 기관에 청원서를 보내, 내 사건을 자세히 설명하고 판결이 취소되어야 한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해에 나는 내 청원서 가운데 단 한 통에 대해서만 답을 받았다. 그런데 그 답이라니! 독재자가 죽고 베리야, 코불로프, 데카노조프(셋 모두 내 체포와 수사와 유죄 판결을 조직한 자들이었다)가 단죄된 뒤였는데도, 나는 군검찰총국에서 1953년 10월 10일 자 편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귀하가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은 검찰이 검토하였으며, 그 결과 판결을 취소하거나 변경할 근거가 없음이 확인되었습니다.” 편지에는 군검찰총국 부국장 차데예프 대령이 서명했다. 아마 대령은 새로운 상황에서 이 거짓 형식적 답변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될까 봐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 그렇게 해도 된다는 승인을 받고 — 의미심장한 문장을 덧붙였다. “판결 재심을 청원한 귀하의 진정은 소련 검찰총장이 직접 검토하였으며 기각되었습니다.”

이 법무 대령은 매우 높은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내 사건에서 그는 위로부터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관리의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나는 기꺼이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1953년 가을에 베리야를 대신해 내 운명을 결정한 자는 누구였던가? 편지의 문면으로 보면, 거기에 대놓고 쓰여 있는 대로 그것은 지금까지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검찰총장 루덴코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누군가의 뜻을 집행한 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누구의 뜻인가? 바로 이것이다. 스탈린 시대의 가장 나쁜 시절처럼 뻔뻔한 이유를 단 복권 거부는 내가 몰로토프에게 보낸 청원서에 대한 답이었다. 검찰의 편지에 그 점이 정확히 적혀 있었다. 아내가 상담한 변호사는, 우리가 여러 기관에 동시에 청원하기는 했지만 몰로토프에게 청원한 것은 실수였다고 말했다. 몰로토프에게 청원해서는 안 되었다. 1953년에 검찰총장에게 내 복권을 거부하라고 제안할 수 있는 사람이 아직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몰로토프는 남의 뜻을 집행하는 자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니면 독재자의 그림자가 몰로토프와 루덴코에게 새로운 무법을 저지르도록 축복을 내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군검찰총국의 이 뻔뻔한 편지는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스탈린이 죽은 뒤에 생겨난 희망은 헛된 것이었단 말인가? 나라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단 말인가? 나는 다시 절망에 가까워졌다.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마지막으로 그랬다. 내가 받은 검찰 편지의 성격으로 보아, 예전과 마찬가지로 검찰과 다투는 일은 가망이 없고 위험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바로 그 루덴코에게 날 선 어조로 쓴 청원서를 보냈다. 나는 더는 사건 자체를 건드리지 않고, 거부 사유가 거짓이라는 것을 조목조목 입증했다. 사건을 검토했다는 주장은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1953년 12월 1일 자의 이 단호한 편지에 나는 답을 받지 못했다.

아내가 쉬지 않고 정력적으로 애쓰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소련공산당 20차 대회까지,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답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1954년부터 아내는 내 복권을 쉬지 않고 요구했다. 일리야 에렌부르크가 아내의 청원을 지지해 주었다. 아내는 꾸준히 군검찰총국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이미 군에서 새로운 “흐루쇼프 사람들”이 와 있었다. 때로는 집무실에서 아내에게 동정을 표하기도 했는데, 물론 에둘러서였다. 이를테면 한번은 검찰 접수실 실장이 또다시 내 아내를 맞으면서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말했다.

— 글쎄, 내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직접 보시다시피……! — 그러면서 대령은 검찰 수사부의 막다른 벽을 마주한 창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다가 마침내 군검찰총국과 최고재판소를 드나들고 중앙위원회 접수실을 찾아다닌 지 한 해 반 만에, 아내가 최고재판소의 젊은 직원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 날이 왔다.

— 모퉁이를 돌면 전신국이 있어요. 여기 사건 번호가 있으니, 남편께 판결이 취소되었다고 전보를 치세요!

문턱에서

1955년 10월 나는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새로운 삶을 향해 행복하게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은 가족과 벗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1956년 봄에는 온 나라가 새로운 삶의 문턱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것은 수단과 목적의 새로운 미궁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수기』 작업을 마무리하는 지금, 열 해 넘게 여러 때에 걸쳐 써 온 쓰라린 소견 가운데 많은 것이 여전히 절실한 현실 문제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무겁다. 이미 1970년대 초에 (『파국과 두 번째 탄생』에서) 국가가 아직 벗어나지 못한 스탈린 유산의 짐에 관해 밝힌 생각이 그렇다. 게다가 1970년대 말에 이르러 이 짓누르는 짐은 더욱 뚜렷하게 느껴지게 되었다. 수단과 목적을 뒤바꾸는 일은 체계로 굳어졌다. 무법 행위와 냉소적인 재판식 보복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피 흘리는 상처로 남아 있다.

어쩌면 게르첸의 말이 오늘날의 문제로 들릴지도 모른다.

“현상 유지 말고는 다른 목적이 없는 보수주의는 반동과 마찬가지로 파괴적이다. 그것은 낡은 질서를 분노의 뜨거운 불길이 아니라 노쇠의 뭉근한 불로 무너뜨린다.”[6]

나라면 보수주의라는 말에 “관료적”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이겠다……

내 책과 이 마지막 글들은 형식으로 보면 감옥과 수용소에서 겪고 곱씹은 것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내 『수기』는 고백이다. 『수기』는 내 삶과 나라의 삶의 여러 시기에 걸친 문제와 희망을, 그러나 또한 잘못과 환상을 이야기한다. 나는 오늘의 관점에서 사건들을 평가했지만, 동시에 내가 쓰고 있는 그 시절 나와 내 또래들이 지녔던 견해를 있는 그대로 비추려고 애썼다.

나라와 사람들의 변화를 되도록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분석하려 한 내 노력, 그리고 그 끔찍한 시절에도 내가 환상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했다는 고백은 오늘날 세상 물정에 밝은 몇몇 독자에게서 비판적인, 심지어 빈정대는 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나는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이 비판에 대한 내 대답은 내 책 전체다.

어쨌든 지배 이데올로기의 참모습과 국가 통치 형태에 관한 자기기만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 더 많아진다면 나는 기쁘겠다. 그것은 나라가 수단과 목적의 미궁에서 나오는 길을 찾으리라는 징표다.

많은 것이 불안을 불러일으키지만, 어떤 것들은 희망을 품게 한다. 아직 그 전제와 결과가 분명치 않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어떤 과정이 나타나고 있다. 한편으로는 국가와 국가기구가,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변해 가고 있다. 1977년 헌법에 기댄 당-국가 기구는 점점 더 경화(硬化)의 징후를 띠어 가는 반면, 사회는 서서히 되살아나 다원적으로 되어 간다. 아직 무르익지 않은 정치적 다원주의의 싹도 보이지만, 내가 무엇보다 염두에 두는 것은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과 세계관의 다양성이다. 공개성이 없는 가운데 일어나는 사회의 술렁임이 속물적인 타성, 곧 윗사람에게 순종하는 타성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사상적·정신적 다양성은, 아직 숨은 형태로나마, 미궁에서 나오는 길을 찾으려는 몸부림의 표현이다.

이런 조건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자의와 불의에 맞서는 개인의 저항이다. 본질적으로 이것이 내 책의 주제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조건, 절망을 이겨 내는 일, 정신적 갱신의 길에 관해 이 책에서 밝힌 생각들은 오늘에도 들어맞는다.

사회는 머지않은 미래에 틀림없이 새로운 역사적 고비를 넘어야 할 것이다. 조심스러운 낙관의 근거는, 사회 속에서 정신적 에너지와 참된 문화적 가치를 쌓아 가는 깊은 과정이 제 길을 뚫고 있다는 데 있다. 앞으로 닥칠 파국적 변화가 개인과 사회의 부활로 끝맺을 수 있도록 그 전제가 차츰차츰 마련되고 있다.

저 문턱 너머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나는 헤아릴 수 있을까?… 1978년 6월

주석

  1. 『파국과 두 번째 탄생』을 보라. ↩
  2. 『파국과 두 번째 탄생』(Катастрофа и второе рождение), 암스테르담, 1977. ↩
  3. 이 문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리디야 긴즈부르크의 책 『심리 산문에 대하여』(О психологической прозе) 덕분이다. ↩
  4. 1974년 2월 12일 자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공개서한. ↩
  5. 1977년 헌법이 여기 서술한 사태를 공식화하기 전인 1975년에 쓴 글이다(1978년). ↩
  6. 알렉산드르 게르첸, 「러시아 혁명 사상의 발전에 관하여」, 『저작집』, 1956년판, 제3권, 565쪽(А.И. Герцен. О развитии революционных идей в Росси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