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미로노비치 키로프

Сергей Миронович Киров
소련 러시아 1886–1934 ✕ 암살

그의 죽음이 대숙청의 총성이 되었다

1926년 레닌그라드 부임 첫해, 키로프는 공장을 돌며 180회 넘는 노동자 집회 연설을 했다. 연단 없이 작업복 차림으로 노동자들과 직접 호흡한 유일한 정치국원이었다.

레닌그라드 당을 이끌며 공업화를 진두지휘한 정치국원. 공장 연설로 노동자의 신임을 얻었으나, 1934년 12월 스몰니에서 총격당했다. 그의 죽음은 '12월 1일법'과 함께 대숙청의 신호탄이 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26년, 레닌그라드를 맡은 조직가

우르줌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고아원에서 자란 세르게이 키로프는 톰스크의 기술학교 시절 혁명 운동에 뛰어들었고, 캅카스에서 지하 활동과 신문 일을 하며 단련됐다. 내전기에는 아스트라한 방어전을 조직했고, 캅카스 소비에트 권력 수립의 핵심 인물로 활동한 뒤 아제르바이잔 당 조직을 이끌었다.

1926년 당은 지노비예프 반대파의 근거지였던 레닌그라드로 그를 보냈다. 키로프는 공장을 일일이 돌며 노동자 집회에서 연설하는 방식으로 당 조직을 다시 세웠고, 특유의 소탈하고 힘 있는 연설로 레닌그라드 노동자들 사이에서 실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의 지도 아래 레닌그라드는 1차 5개년 계획기 소련 공업화의 핵심 기지로 재편됐다.

1934년 초 제17차 당대회, 이른바 「승리자들의 대회」에서 키로프는 가장 긴 박수를 받은 연사 중 한 사람이었다. 대회 직후 그는 당 중앙위원회 서기로 선출됐고, 스탈린 지도부의 가장 가까운 동료 중 한 사람으로 꼽혔다.

1934년 12월 1일, 스몰니의 총성

1934년 12월 1일 오후, 레닌그라드 당 본부인 스몰니 3층 복도에서 레오니트 니콜라예프가 키로프의 뒤통수에 권총을 발사했다. 니콜라예프는 당에서 제명됐다가 복당한 실직 상태의 당원으로, 개인적 원한과 좌절을 키워 온 인물이었다. 키로프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이 암살을 스탈린이 사주했다는 설은 흐루쇼프 시대 이래 오랫동안 유포됐다. 그러나 소련 문서고가 열린 뒤의 연구, 특히 레노의 전면적 사건 재검토와 흘레브뉴크, 코트킨의 연구는 스탈린이 암살을 지시했다는 증거가 문서고 어디에도 없으며, 니콜라예프가 단독으로 범행했다는 결론을 일관되게 내린다. 소련 시기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걸쳐 구성된 여러 조사위원회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이 오래된 소문은 이제 근거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암살의 실제 결과는 무거웠다. 사건 당일 저녁 테러 사건의 수사와 재판을 극단적으로 단축하는 12월 1일 법이 공포됐고,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도덕적 책임」을 물어 체포되면서 옛 반대파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됐다. 키로프의 죽음은 그가 결코 원하지 않았을 방식으로, 대숙청으로 가는 길목의 사건이 됐다. 그의 유해는 크렘린 벽에 안장됐고, 뱌트카 시가 키로프 시로 개칭된 것을 비롯해 수많은 거리, 공장, 발레단이 그의 이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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