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그라드의 조직가, 대숙청의 구실이 된 암살
1926년 레닌그라드 부임 첫해, 키로프는 공장을 돌며 180회 넘는 노동자 집회에서 연설했다.
1904년 톰스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1905년 혁명에 참여한 혁명가이자 소련 정치인이다. 1921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로 바쿠 유전 재건을 이끌었고, 1926년 레닌그라드 당을 맡아 1930년 정치국원이 되었다. 내전기에는 아스트라한 방어를 지휘하며 반볼셰비키 봉기를 대규모 사살로 진압했고, 1933년에는 레닌그라드주 '트로이카' 위원으로 반혁명 사건의 사형 판결권을 가졌다. 1934년 12월 1일 레닌그라드 스몰니에서 레오니트 니콜라예프에게 총격당해 사망했고, 그 죽음은 대숙청의 구실이 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21 사회운동·조직 · 소련 · 당 서기국 · 조직인사
경력 연표
- 1909–17블라디캅카스에서 언론·지하활동
- 1921–26아제르바이잔 당 제1서기, 바쿠 유전 재건
- 1926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 지노비예프의 기반 인수
- 1930정치국원
- 1934.12.1스몰니에서 니콜라예프에게 피살, 같은 날 신속 처형령 발효
소련 정치국
- 후보위원 1926.07–1930.07
- 정위원 1930.07–1934.12
1934.12 암살
관련 역사 사건
- 1905–19071905년 혁명전투대를 이끈 혁명가1905년 시위에 참여해 체포됐고, 출옥 뒤 전투대를 이끌었다.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아스트라한 군사행정부 사령관1919년 아스트라한 방어를 조직해 볼가 하류를 지켰고, 1920년 붉은 군대의 바쿠 진입과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화를 이끌었다.
- 1922.12소련의 결성아제르바이잔 당 제1서기로 자캅카스 연방·소련 결성에 참여
- 1923–1927레닌 사후 권력투쟁과 좌익 반대파레닌그라드에서 지노비예프 세력을 밀어낸 당 조직가1926년 당은 그를 지노비예프 반대파의 근거지였던 레닌그라드로 보내 당 조직을 다시 세우게 했다.
- 1928–1937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
- 1937–1938대숙청대숙청의 방아쇠가 된 죽음1934년 그의 암살이 대숙청의 구실이 되었고, 이후의 재판들이 그의 죽음을 명분으로 삼았다.
1886~1917년, 지하 활동가의 시기
세르게이 미로노비치 코스트리코프는 1886년 3월 27일(구력 3월 15일) 뱟카주 우르줌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그의 출생 직전 페름주에서 뱟카주로 옮겨 왔고, 앞선 네 아이는 유아기에 죽었다. 1894년 아버지는 일자리를 찾아 나선 뒤 행방이 끊겼고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면서 세르게이와 누이들은 고아가 됐다. 누이들은 할머니가 맡았고, 그는 1897년까지 미성년 고아 보호 시설에서 자라며 우르줌 교구학교와 시립학교를 마쳤다.
1901년 가을 그는 카잔으로 가 하급 기계기술 학교에 들어갔고, 1904년 졸업생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1등 상을 받았다. 같은 해 톰스크시 관청의 제도사로 일하며 톰스크 공과대학 예비과정을 다녔고, 1904년 11월 톰스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당시 당명은 '세르주'였다.
1905년 시위에 참여해 체포됐고, 출옥 뒤 전투대를 이끌었다. 1905년 7월 톰스크시 당 회의에서 톰스크 당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고, 그해 10월에는 대형 철도역인 타이가에서 파업을 조직했다. 1906년 7월 불법 인쇄기를 보관한 혐의로 체포돼 톰스크 요새에서 1년 반을 복역했다. 감옥 도서관은 형편이 괜찮아 당대의 합법 출판물을 거의 다 볼 수 있었지만, 그가 훗날 회고했듯 사형 선고가 잇따랐고 독방동에서는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들의 이별 소리가 밤마다 들려왔다. 그는 '감옥이 자유로운 신분의 지하 전사일 때보다 공부하기에는 훨씬 편했다'고 적었다. 1908년부터 직업적 혁명가가 되어 이르쿠츠크와 노보니콜라옙스크에서 활동했다.
1909년 블라디캅카스에 도착해 북캅카스 신문 테레크에 기고했고, 이 무렵부터 '세르게이 미로노프'라는 필명을 썼다. 연극에 참여하고 등산도 했는데, 1910년 8월 9일 잉구시인 안내인 야니 부주르타노프와 함께 카즈베크를 올랐으며 한 달 뒤 그 기록을 테레크에 실었고 1911년 7월 31일에는 엘브루스를 올랐다. 이곳에서 훗날 아내가 되는 마리야 리보브나 마르쿠스를 만났다. 1912년 4월 테레크에 실린 글 「길 건너편」이 처음으로 'S. 키로프' 서명을 달았고, 이 필명이 그가 역사에 남은 이름이 됐다.
그는 1911년 8월 11일 블라디캅카스에서 톰스크 지하 인쇄기 사건으로 체포돼 톰스크로 압송됐으나, 1912년 3월 16일 법정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06년 그를 체포했던 경찰서장이 법정에서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1912년 4월 블라디캅카스로 돌아왔다. 다만 스파르타쿠스 교육재단은 그가 1915년 다시 체포되어 1년간 구금된 뒤 캅카스로 갔고 1917년 3월 이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고 서술해, 러시아어 자료의 1911~1912년 연도와 맞지 않는다. 이는 해소되지 않은 이설로 병기한다.
소련 공식 역사 서술은 그가 1917년 이전부터 확신에 찬 레닌주의자였다고 보았으나, 근년의 연구는 이를 반박한다. 그는 처음에는 멘셰비키에 공감하고 임시정부를 지지했으며 이를 글에서 공개적으로 밝혔고, 1917년 10월 혁명 뒤에야 볼셰비키 쪽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1917년 12월 블라디캅카스에서 반혁명 봉기가 일어났을 때 그는 타르스카야 거리(현 차골로바 거리) 32호의 오세티야인 가투오프 가족 집에 숨어 지냈다.
1926년, 레닌그라드를 맡은 조직가
우르줌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고아원에서 자란 세르게이 키로프는 톰스크의 기술학교 시절 혁명 운동에 뛰어들었고, 캅카스에서 지하 활동과 신문 일을 하며 단련됐다. 내전기에는 아스트라한 방어전을 조직했고, 캅카스 소비에트 권력 수립의 핵심 인물로 활동한 뒤 아제르바이잔 당 조직을 이끌었다.
1926년 당은 지노비예프 반대파의 근거지였던 레닌그라드로 그를 보냈다. 키로프는 공장을 일일이 돌며 노동자 집회에서 연설하는 방식으로 당 조직을 다시 세웠고, 특유의 소탈하고 힘 있는 연설로 레닌그라드 노동자들 사이에서 실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의 지도 아래 레닌그라드는 1차 5개년 계획기 소련 공업화의 핵심 기지로 재편됐다.
1934년 초 제17차 당대회, 이른바 「승리자들의 대회」에서 키로프는 가장 긴 박수를 받은 연사 중 한 사람이었다. 대회 직후 그는 당 중앙위원회 서기로 선출됐고, 스탈린 지도부의 가장 가까운 동료 중 한 사람으로 꼽혔다.
1934년 12월 1일, 스몰니의 총성
1934년 12월 1일 오후, 레닌그라드 당 본부인 스몰니 3층 복도에서 레오니트 니콜라예프가 키로프의 뒤통수에 권총을 발사했다. 니콜라예프는 당에서 제명됐다가 복당한 실직 상태의 당원으로, 개인적 원한과 좌절을 키워 온 인물이었다. 키로프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이 암살을 스탈린이 사주했다는 설은 흐루쇼프 시대 이래 오랫동안 유포됐다. 그러나 소련 문서고가 열린 뒤의 연구, 특히 레노의 전면적 사건 재검토와 흘레브뉴크, 코트킨의 연구는 스탈린이 암살을 지시했다는 증거가 문서고 어디에도 없으며, 니콜라예프가 단독으로 범행했다는 결론을 일관되게 내린다. 소련 시기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걸쳐 구성된 여러 조사위원회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이 오래된 소문은 이제 근거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암살의 실제 결과는 무거웠다. 사건 당일 저녁 테러 사건의 수사와 재판을 극단적으로 단축하는 12월 1일 법이 공포됐고,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도덕적 책임」을 물어 체포되면서 옛 반대파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됐다. 키로프의 죽음은 그가 결코 원하지 않았을 방식으로, 대숙청으로 가는 길목의 사건이 됐다. 그의 유해는 크렘린 벽에 안장됐고, 뱌트카 시가 키로프 시로 개칭된 것을 비롯해 수많은 거리, 공장, 발레단이 그의 이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