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Russian Social Democratic Labour Party
러시아 제국의 마르크스주의 조직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1898년 3월 민스크에서 창당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다. 당 강령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에 기초했고, 농업 국가인 러시아에서도 혁명적 주체는 약 300만 명 규모의 산업 노동계급이라고 보았다. 당명과 선언만 남긴 제1차 대회 직후 탄압으로 수년간 응집된 조직으로 기능하지 못했으며, 1903년 제2차 대회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갈라졌다. 1912년 분열과 1917년 10월 혁명, 1918년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으로의 개칭까지를 당의 시기로 본다.
상세
창당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РСДРП)은 1898년 3월 민스크에서 열린 지하 대회에서 창립되었다. 대회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대회를 주선한 유대인 노동총동맹(분드), 키예프의 『라보차야 가제타』 조직이 함께 소집했고 대의원 9명이 참석했다. 대회는 당명을 채택하고 3인 중앙위원회(스테판 라드첸코, 보리스 아이델만/아르카디 크레메르)를 선출했으며 선언을 발표했으나 강령과 규약은 마련하지 못했다. 선언은 라드첸코의 요청으로 표트르 스트루베가 작성했다.
창당 직후의 탄압은 즉각적이었다. 대회가 끝난 뒤 한 달 안에 대의원 9명 가운데 5명이 오흐라나에 체포되었고, 이어진 경찰 탄압의 물결로 당은 수년 동안 응집된 조직으로 기능하지 못했다. 당 강령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에 엄격히 기초했으며, 농업 국가인 러시아에서도 진정한 혁명적 역량은 산업 노동계급(당시 약 300만 명, 인구의 약 3퍼센트)에 있다고 보았다.
대회와 분열
1903년 제2차 대회는 7월 17일부터 8월 10일까지 열렸다. 벨기에 경찰의 주목 때문에 회의는 브뤼셀에서 런던으로 옮겨졌고(브뤼셀에서 13회 세션), 의제는 강령, 규약, 중앙 기관 선출이었다. 대회는 부르주아 혁명 국면의 즉각적 프롤레타리아 과제를 담은 '최소 강령'과 사회주의 혁명 및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목표로 하는 '최대 강령'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그러나 11월 17일 이스크라 편집국 구성 투표를 계기로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다수파)와 율리 마르토프가 이끄는 멘셰비키(소수파)로 갈라졌다. 이름과 달리 멘셰비키가 실제로 더 큰 분파였고, 레닌의 분파는 1917년 혁명까지 소수로 남았다.
분열의 핵심 쟁점은 당원의 정의였다. 마르토프는 당 강령을 받아들이고 당 조직 가운데 하나의 지도 아래 물질적으로 그리고 정규적 협력으로 지지하는 이들을 당원으로 보자는 폭넓은 정의를 제안해 처음에는 28대 23으로 우세했다. 레닌은 당 조직 가운데 하나에 직접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엄격한 정의를 제안했다. 이어 분드와 경제파 대의원들이 퇴장하면서 레닌의 정의가 다수를 차지했고, 여기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라는 이름이 나왔다.
1905년 혁명기와 그 이후 당은 합법과 비합법 영역을 오가며 신문을 발행하고 노동조합에 침투하고 산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선전했다. 재통합 시도와 추가 분열이 뒤따랐다. 1906년 스톡홀름 제4차 대회는 멘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한 가운데 분파를 형식적으로 통합했고, 1907년 런던 제5차 대회는 볼셰비키의 우위를 굳혔다. 1909년 보그다노프의 전진파가 볼셰비키에서 갈라졌고, 1908년 말부터 멘셰비키는 플레하노프가 이끄는 '당내파'와 '청산파'로 나뉘었다. 1912년 레닌의 볼셰비키 그룹은 프라하에서 회의를 열어 청산파·최후통첩파·회수파를 제명했고, 이로써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이 따로 서고 멘셰비키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멘셰비키)으로 남았다.
1917년과 해산
1917년 2월 혁명 뒤 일부 멘셰비키는 임시정부와의 협력을 지지했고, 볼셰비키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내세우며 이에 반대했다. 볼셰비키가 10월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 당은 사실상 해산되었고, 1918년 볼셰비키 정당은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으로, 뒤에 소련공산당으로 개칭했다.
시기 구분의 쟁점
이 항목의 종료 연도에는 사료상 차이가 있다. 한쪽 기록은 당이 1912년에 '해산'되었다고 적어 그해의 형식적 분열을 종료점으로 삼는 반면, 다른 기록은 1917년 10월 권력 장악 이후의 사실상 해산과 1918년 3월 볼셰비키 정당의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개칭을 종료점으로 둔다. 따라서 1912년 분열설과 1917~1918년 해산·개칭설은 어느 하나로 확정할 수 없는 병존하는 연대기라야 한다.
예와 호칭
대회 연대기는 구체적 사례를 제공한다. 제2차 대회는 1903년 7월 17일부터 8월 10일까지였고, 제4차(통일) 대회는 1906년 스톡홀름에서 57개 지방 조직과 폴란드-리투아니아, 분드, 라트비아, 우크라이나, 핀란드 사회민주주의 조직을 대표하는 112명의 표결 대의원이 참석했다. 제5차 대회는 1907년 런던에서 14만 7천 명 이상의 당원을 대표하는 336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 당원들은 러시아어 머리글자 S와 D를 딴 '에스데크'(단수 '에스데크')로 통칭되었다.
구분과 관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1883년에 결성된 노동해방단보다 뒤에 나왔고, 인민주의 혁명적 전통(뒤에 사회혁명당으로 이어짐)에 맞서 창당되었다. 인민주의자들이 농촌 공동체(미르)가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뛸 수 있다고 본 데 반해, 당은 러시아가 도시 프롤레타리아를 가진 부르주아 사회를 발전시킨 뒤에야 사회주의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전략 차이도 여기서 갈렸다. 볼셰비키는 농민의 지지를 받은 노동자만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과제를 수행할 수 있고 그것이 독일·프랑스·영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자극할 것이라고 보았으며, 멘셰비키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에서 계몽된 동맹을 찾았다. 양쪽 모두 러시아에서 다가오는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성격을 띤다는 데는 동의했다.
국제적으로 당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맹했다. 조직적으로는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노동해방단, 유대인 노동총동맹을 통합했으며, 제4차 대회에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사회민주주의와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영토 조직으로 가입했고 분드와 우크라이나 사회민주노동당, 핀란드 노동당도 대표를 보냈다. 분드는 유대인 프롤레타리아의 유일한 대표를 자처하며 연맹적 결합을 요구했으나 1903년 대회에서 자당 대의원 5명만이 이 제안에 찬성해 부결되었고, 이후 당에서 탈퇴했다. 그 이탈은 레닌 지지자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데 일조했다. 마르크스주의 사학에서는 제2차 대회를 원칙적 마르크스주의와 기회주의를 가른 전환점으로 보고, 그것이 제1차 세계대전을 둘러싼 제2인터내셔널의 분열을 예고했다고 평가한다. 1903년의 분열 뒤에는 1912년 프라하 회의가 이어져 볼셰비키의 승리를 굳히고 멘셰비키-청산파를 당에서 밀어냈다. 당의 계보로 보면 선행 조직은 노동해방단(1883)이고, 분파에서 전진파(1909), 당내파 멘셰비키, 청산파가 갈라져 나왔으며, 후신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과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멘셰비키)이다. 볼셰비키 조직은 1918년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으로 개칭되었다.
관련 용어
출처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manifesto of the 1898 founding congress
- 위키백과 (영문) founding, congresses and factional development
-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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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