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파업, 당, 노동조합
인물로자 룩셈부르크,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쿠르트 아이스너, 미하일 바쿠닌, 프리드리히 엥겔스, 카를 마르크스, 게오르기 가폰, 니콜라이 2세, 표트르 스트루베 용어대중파업, 총파업, 아나키즘, 독일 사회민주당 (SPD), 경제주의, 피의 일요일, 10월 선언, 소비에트,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수정주의, 폴란드왕국·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 사건1905년 혁명 학습사회주의의 분기 · 8장 대중파업은 당이 골라 쓰는 무기일까?
I
대중파업 문제에 관한 국제 사회주의의 지금까지의 저술과 발언은 거의 모두 러시아 혁명 이전, 곧 이 투쟁 수단을 가장 큰 규모로 시험한 최초의 역사적 실험 이전의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이 낡아 버린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들의 견해는 본질적으로, 1873년 스페인에서 바쿠닌주의자들이 벌인 혁명 만들기를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쓴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같은 입장에 서 있다.
총파업은 바쿠닌주의 강령에서 사회혁명을 개시하는 데 쓰이는 지렛대다. 어느 화창한 아침, 한 나라 또는 온 세계의 모든 업종의 모든 노동자가 일손을 놓고, 그렇게 해서 길어야 네 주 안에 유산계급이 굴복하든지 아니면 노동자를 공격하든지 하도록 만든다. 그러면 노동자들은 자신을 방어할 권리를 얻고, 이 기회에 낡은 사회 전체를 뒤엎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 제안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그리고 그들을 뒤따라 벨기에 사회주의자들이 1848년 이래 이 애마를 실컷 타고 다녔는데, 그 말은 본래 영국 혈통이다. 1837년 공황에 뒤이어 영국 노동자들 사이에서 차티즘이 빠르고 격렬하게 발전하던 시기에, 이미 1839년에 「신성한 달」, 곧 전국적 규모의 작업 중지가 설교되었고(엥겔스,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 제2판, 234쪽 참조), 그것이 큰 호응을 얻어 1842년 7월에 북부 잉글랜드의 공장 노동자들이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 했다. 1873년 9월 1일 제네바의 동맹파 대회에서도 총파업은 큰 역할을 했다. 다만 그러려면 노동계급의 완전한 조직과 두둑한 금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걸림돌이 있다. 한편으로 정부들은, 특히 정치적 기권으로 정부를 부추겨 준다면 더더욱, 노동자의 조직도 금고도 결코 그 정도까지 자라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이 이상적인 조직과 이 거대한 예비 기금을 마련하기 훨씬 전에 정치적 사건들과 지배계급의 횡포가 노동자의 해방을 이루어 낼 것이다. 그런데 만일 프롤레타리아트가 그것들을 갖추게 된다면, 목표에 이르기 위해 총파업이라는 우회로가 필요 없을 것이다.[1]
여기에 그 뒤 수십 년 동안 대중파업에 대한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태도를 결정한 논증이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나키스트의 총파업 이론, 곧 노동계급의 일상적 정치투쟁과 대립하여 사회혁명을 개시하는 수단으로서의 총파업 이론을 겨냥한 것이고, 다음과 같은 단순한 딜레마로 요약된다.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아직 강력한 조직과 금고를 갖추지 못했다면 총파업을 해낼 수 없고, 이미 충분히 강력하게 조직되어 있다면 총파업이 필요 없다. 물론 이 논증은 매우 단순하고 언뜻 보아 반박할 수 없을 만큼 그럴듯해서, 4반세기 동안 근대 노동운동에 아나키스트의 망상에 맞서는 논리적 무기로서, 그리고 정치투쟁이라는 생각을 노동자층의 가장 넓은 범위에 퍼뜨리는 보조 수단으로서 훌륭하게 봉사했다. 지난 25년 동안 모든 근대 국가에서 노동운동이 이룬 거대한 진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바쿠닌주의에 맞서 옹호한 정치투쟁 전술의 가장 빛나는 증거다. 그리고 오늘날의 힘을 지니고 국제 노동운동 전체의 전위라는 지위에 선 독일 사회민주당은 결코 적지 않은 정도로 이 전술을 일관되고 강력하게 적용한 직접적 산물이다.
그런데 러시아 혁명이 위의 논증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게 만들었다. 러시아 혁명은 계급투쟁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대중파업이라는 관념을, 그리고 아래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총파업이라는 관념까지도 웅대하게 실현했고, 그럼으로써 노동운동의 발전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물론 이로부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권고한 정치투쟁 전술이나 그들이 아나키즘에 가한 비판이 틀렸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거꾸로, 마르크스·엥겔스 전술의 바탕에 있었고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금까지의 실천에도 바탕이 되었던 바로 그 사고방식, 그 방법이 이제 러시아 혁명에서 계급투쟁의 전혀 새로운 계기와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 낸 것이다. 대중파업이라는 실례를 처음으로 역사적으로 시험한 바로 그 러시아 혁명은 아나키즘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는커녕 바로 아나키즘의 역사적 청산을 뜻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독일 사회민주당의 강력한 발전이 이 사상 조류에 선고한 쓸쓸한 처지는, 어느 정도는 의회주의 시대가 배타적으로 지배하고 오래 지속된 탓으로 설명될 수도 있었다. 전적으로 「들고일어나기」와 「직접행동」에 맞추어진, 가장 노골적인 쇠스랑의 의미에서 「혁명적인」 조류는 의회주의적 일상의 무풍 속에서는 일시적으로 시들어 있다가, 직접적이고 공공연한 투쟁의 시기가 돌아오면, 곧 거리의 혁명이 일어나면 그때 비로소 되살아나 그 내적 힘을 펼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러시아는 아나키즘의 영웅적 행위를 위한 실험장이 되기에 꼭 알맞아 보였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적 권리를 전혀 갖지 못하고 조직도 극히 약한 나라, 매우 다양하고 어지럽게 엇갈리는 이해관계를 지닌 여러 인민층이 뒤섞인 나라, 인민 대중의 교육 수준은 낮은 대신 지배 체제의 폭력 행사는 극도로 야만적인 나라. 이 모든 것이 아나키즘을 비록 단명할지라도 갑작스러운 세력으로 끌어올리기에 안성맞춤인 듯했다. 게다가 러시아는 아나키즘의 역사적 탄생지였다. 그러나 바쿠닌의 조국은 그의 교의의 무덤이 될 운명이었다. 러시아에서 아나키스트들은 대중파업 운동의 선두에 서지 않았고 지금도 서 있지 않다. 혁명적 행동의 정치적 지도 전체와 대중파업의 지도 역시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이 「부르주아 정당」이라며 격렬히 공격하는 사회민주주의 조직들의 손에, 또는 일부는 테러리즘 정당인 「사회혁명당」처럼 사회민주주의의 영향을 다소 받으며 그것에 가까워지고 있는 사회주의 조직들의 손에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아나키스트들은 러시아 혁명에서 진지한 정치 조류로서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어려운 사정, 곧 여러 민족이 뒤섞인 노동자, 소경영의 압도적 분산, 매우 낮은 수준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안고 있는 리투아니아의 한 작은 도시 비아위스토크에서만, 일고여덟 개의 서로 다른 혁명 그룹 가운데 덜 자란 「아나키스트」 한 줌이 있어 노동자들의 혼란과 착란을 힘껏 부추기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모스크바와 아마 두세 도시에서도 이런 부류의 한 줌이 눈에 띈다. 그런데 이 몇몇 「혁명적」 그룹을 제외하면, 지금 러시아 혁명에서 아나키즘이 실제로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아나키즘은 비열한 도둑과 약탈자의 간판이 되었다. 혁명이 침체하고 일시적으로 수세에 몰리는 시기마다 흐린 물결처럼 솟아오르는 개인에 대한 숱한 절도와 약탈의 상당 부분이 「아나르코코뮤니즘」이라는 상호 아래 저질러진다. 러시아 혁명에서 아나키즘은 싸우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론이 아니라, 혁명이라는 전함 뒤를 상어 떼처럼 우글거리며 따라다니는 반혁명적 룸펜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적 간판이 되었다. 그리고 이로써 아나키즘의 역사적 이력은 아마 끝났을 것이다.
다른 한편 러시아에서 대중파업은 노동계급의 정치투쟁, 특히 의회주의를 우회하여 극적인 일격으로 단번에 사회혁명으로 뛰어드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일상적 정치투쟁, 특히 의회주의의 조건을 비로소 만들어 내는 수단으로서 실현되었다. 대중파업이 가장 중요한 무기로 쓰이는 러시아의 혁명투쟁은 근로 인민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트가 바로 그 정치적 권리와 조건을 얻으려고 벌이는 것이다. 그 권리와 조건이 노동계급의 해방투쟁에서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처음으로 입증했고, 인터내셔널 안에서 아나키즘에 맞서 온 힘을 다해 옹호했다. 이렇게 하여 마르크스 사회주의의 학설 전체가 서 있는 반석인 역사적 변증법은, 대중파업이라는 관념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얽혀 있던 아나키즘이 오늘날 대중파업의 실천 자체와 대립하게 되고, 거꾸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 활동에 대립하는 것으로 공격받던 대중파업이 오늘날 정치적 권리를 위한 정치투쟁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나타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러시아 혁명이 대중파업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낡은 입장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도록 요구한다면, 거기서 일반적 방법과 관점이 새로운 형태로 승리를 거두는 것도 다시 마르크스주의일 뿐이다. 모어의 연인은 모어의 손에서만 죽을 수 있다.[옮긴이 1]
II
러시아의 사건들에서 대중파업 문제에 대해 나오는 첫 번째 수정은 문제의 일반적 파악 방식에 관한 것이다. 지금까지 독일에서 베른슈타인, 아이스너 등과 같은 「대중파업 시도」의 열렬한 지지자들도, 노동조합 진영에서 이를테면 뵈멜부르크가 대표하는 그런 시도의 완강한 반대자들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견해, 그것도 아나키스트의 견해에 서 있다. 겉보기의 양극은 서로를 배척할 뿐 아니라 언제나 그렇듯이 서로를 전제하고 보완하기도 한다. 아나키스트의 사고방식에서 「대붕괴」, 곧 사회혁명에 직접 거는 투기는 외적이고 비본질적인 특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서 본질적인 것은 대중파업을, 나아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모든 조건을 추상적이고 비역사적으로 고찰하는 태도 전체다. 아나키스트에게 그의 「혁명적」 투기의 물질적 전제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두 가지뿐이다. 먼저 푸른 허공, 그리고 인류를 오늘날의 자본주의라는 눈물의 골짜기에서 구해 내려는 선의와 용기다. 푸른 허공 속의 추론에서 이미 60년 전에, 대중파업이 더 나은 사회적 저세상으로 도약하는 가장 짧고 가장 확실하며 가장 쉬운 수단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같은 푸른 허공 속의 투기에서 최근에는, 노동조합 투쟁이야말로 유일한 「대중의 직접행동」이고 따라서 유일한 혁명적 투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것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생디카티스트」의 최신 변덕이다. 아나키즘에게 언제나 치명적이었던 것은, 푸른 허공에서 즉석으로 꾸며 낸 투쟁 방법이 주인 없이 셈한 계산, 곧 순전한 유토피아였다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경멸받는 나쁜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그 나쁜 현실 속에서 대개 혁명적 투기로부터 어느새 반동을 위한 실제적 도우미 노릇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오늘날 같은 추상적이고 비역사적인 고찰 방식에 서 있는 것은, 가까운 시일에 독일에서 집행부 결의로 대중파업을 특정한 달력 날짜에 잡으려는 사람들과, 쾰른 노동조합 대회 참가자들처럼 「선전」을 금지함으로써 대중파업 문제를 세상에서 없애 버리려는 사람들이다. 두 방향은 대중파업이 그저 기술적인 투쟁 수단이어서 마음대로, 최선의 지식과 양심에 따라 「결의」하거나 「금지」할 수 있다는 순전히 아나키스트적인 공통의 관념에서 출발한다. 「만일의 경우를 위해」 접어서 주머니에 넣어 두거나, 결의에 따라 펴서 쓸 수 있는 일종의 주머니칼처럼 말이다. 물론 바로 대중파업의 반대자들이야말로, 허공에 떠서 냉엄한 현실과 그 가능성·불가능성을 한사코 고려하려 하지 않는 「혁명 낭만주의자들」과 달리 오늘날 독일 상황의 역사적 토대와 물질적 조건을 고려한다는 공로를 내세운다. 「사실과 숫자, 숫자와 사실!」 그들은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에 나오는 그래드그라인드 씨처럼 외친다. 노동조합의 대중파업 반대자들이 「역사적 토대」와 「물질적 조건」이라고 할 때 뜻하는 것은 두 가지 계기다.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약함, 다른 한편으로 프로이센·독일 군국주의의 힘. 불충분한 노동자 조직과 금고 잔액, 그리고 위압적인 프로이센의 총검, 이것이 이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주어진 경우에 자신들의 실천 정치를 세우는 「사실과 숫자」다. 물론 노동조합 금고도 프로이센의 총검도 의심할 바 없이 아주 물질적이고 또 아주 역사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그 위에 세운 견해는 마르크스가 말하는 의미의 역사적 유물론이 아니라 푸트카머가 말하는 의미의 경찰적 유물론이다. 자본주의 경찰국가의 대표자들도 계산을 많이 한다. 그것도 오로지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그때그때의 실제 힘과 총검의 물질적 힘만을 따진다. 그리고 이 두 숫자 열을 비교하는 셈에서 언제나 다음과 같은 안심되는 결론을 끌어낸다. 혁명적 노동운동은 몇몇 선동가와 부추기는 자들이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옥과 총검으로 이 달갑지 않은 「일시적 현상」을 다스리기에 충분한 수단을 가지고 있다.
계급의식을 지닌 독일 노동자들은, 근대 노동운동 전체가 한 줌의 양심 없는 「선동가와 부추기는 자들」이 인위적으로, 제멋대로 만들어 낸 산물이라는 경찰 이론의 우스꽝스러움을 오래전에 깨달았다.
그런데 몇몇 착실한 동지가 자원 야경대를 꾸려 독일 노동자들에게 몇몇 「혁명 낭만주의자」의 위험한 소행과 그들의 「대중파업 선전」을 경고할 때, 또는 반대편에서 당 집행부와 노동조합 총위원회 사이의 무슨 「비밀」 약정 때문에 독일에서 대중파업이 터질 기회를 빼앗겼다고 믿는 사람들이 눈물 섞인 분노 캠페인을 벌일 때 드러나는 것도 정확히 같은 견해다. 만일 혁명 낭만주의자들의 불붙이는 「선전」이나 당 지도부의 비밀 또는 공개 결의에 달린 일이었다면, 러시아에서는 지금까지 진지한 대중파업이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이미 1905년 3월 『작센 노동자 신문』에서 강조했듯이, 러시아에서만큼 대중파업을 「선전」하거나 「토론」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나라는 없었다. 그리고 러시아 당 집행부가 정말로 자발적으로 대중파업을 선포하려 한 결의와 약정의 몇 안 되는 사례들, 이를테면 올해 8월 두마 해산 뒤의 마지막 시도 같은 것은 거의 완전히 실패했다. 그러므로 러시아 혁명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대중파업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허공에 대고 「결의」되지 않으며, 「선전」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어떤 순간에 사회적 관계로부터 역사적 필연성을 가지고 생겨나는 역사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대중파업의 가능성이나 불가능성, 유익함이나 해로움에 관한 추상적 사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현 단계에서 대중파업이 자라 나오는 계기와 사회적 관계를 탐구함으로써만, 다시 말해 바람직한 것의 관점에서 대중파업을 주관적으로 평가함으로써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것의 관점에서 대중파업의 원천을 객관적으로 연구함으로써만 파악할 수 있고 또 토론할 수 있다.
추상적 논리 분석의 자유로운 허공에서는 대중파업의 절대적 불가능성과 확실한 패배도, 완전한 가능성과 의심할 바 없는 승리도 정확히 같은 힘으로 증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두 경우 모두 논증의 가치는 같다. 곧 아무 가치도 없다. 그래서 특히 대중파업 「선전」에 대한 공포, 이 범죄의 장본인으로 지목된 이들에게 정식으로 파문을 선고하기까지 한 그 공포는 우스꽝스러운 착각의 산물일 뿐이다. 대중파업을 추상적 투쟁 수단으로 「선전」하는 것은 「혁명」을 선전하는 것과 똑같이 불가능하다. 「혁명」도 「대중파업」도 그 자체로는 계급투쟁의 외적 형태를 뜻할 뿐인 개념이고, 아주 특정한 정치 상황과 관련될 때에만 의미와 내용을 갖는다.
만일 누군가 대중파업 일반을 프롤레타리아 행동의 하나로서 정식 선동의 대상으로 삼아, 이 「관념」을 들고 행상하며 노동자들을 차츰 그것으로 끌어들이려 한다면, 그것은 누군가 혁명이나 바리케이드 투쟁이라는 관념을 특별한 선동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쓸데없을 뿐 아니라 따분하고 싱거운 일일 것이다. 대중파업이 지금 독일과 국제 노동자들의 생생한 관심의 한가운데에 서게 된 것은, 그것이 새로운 투쟁 형태이고 그 자체로 계급관계와 계급투쟁의 조건에서 깊은 내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확실한 징후이기 때문이다. 독일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완강한 저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토록 뜨거운 관심으로 새 문제에 눈을 돌린다는 것은 그들의 건강한 혁명적 본능과 생기 있는 지성을 증언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이 관심, 이 고귀한 지적 갈증과 혁명적 행동 의욕에 부응하는 길은 대중파업의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에 관한 추상적인 머리 체조로 그들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 혁명의 전개, 이 혁명의 국제적 의의, 서유럽에서 계급 대립의 첨예화, 독일 계급투쟁의 앞으로의 정치적 전망, 다가올 투쟁에서 대중의 역할과 과제를 그들에게 분명히 밝혀 주는 것이다. 오직 이런 형태로만 대중파업에 관한 토론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신적 시야를 넓히고, 계급의식을 날카롭게 하며, 사고방식을 깊게 하고, 실행력을 단련하는 데 이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 서면, 문제를 다룰 때 예나 결의안의 문구를 정확히 지키지 않는다며 「혁명 낭만주의」의 반대자들이 벌이는 형사재판도 그 우스꽝스러움을 온전히 드러낸다. 「실천 정치가들」이 그나마 이 결의안에 만족하는 것은, 그것이 대중파업을 주로 보통선거권의 운명과 엮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기서 두 가지를 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첫째, 대중파업에는 순전히 방어적인 성격이 유지된다. 둘째, 대중파업 자체가 의회주의에 종속되어 의회주의의 단순한 부속물로 바뀐다. 그러나 이 점에서 예나 결의안의 참된 핵심은, 독일의 현재 상황에서 지배적 반동이 제국의회 선거권을 습격한다면 그것이 십중팔구 폭풍 같은 정치투쟁 시기의 시작이자 신호가 될 것이고, 그 시기에 독일에서 대중파업이 투쟁 수단으로 처음 쓰이게 될 것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현상이자 문제로서 대중파업이 지니는 사회적 사정거리와 역사적 활동 공간을 당대회 결의안의 문구로 좁히고 인위적으로 경계 지으려는 것은, 그 근시안에서 쾰른 노동조합 대회의 저 토론 금지와 맞먹는 일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예나 당대회 결의안에서, 러시아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국제적 조건에 가져온 깊은 전환을 공식적으로 인지했고, 혁명적으로 발전할 능력, 다가오는 계급투쟁 국면의 새로운 요구에 적응할 능력을 보여 주었다. 바로 여기에 예나 결의안의 의의가 있다. 독일에서 대중파업을 실제로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러시아에서 그랬듯이 역사가 결정할 것이다. 그 역사 속에서 사회민주당은 자신의 결의와 함께 물론 중요한 요인이지만, 많은 요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III
지금 독일의 토론에서 대개 떠올리는 대중파업은 아주 명료하고 단순하게 생각된, 윤곽이 뚜렷한 개별 현상이다. 이야기되는 것은 오로지 정치적 대중파업뿐이다. 그때 생각하는 것은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일회적이고 웅장한 파업이다. 그것은 최고로 중대한 정치적 계기 때문에, 그것도 당과 노동조합 기관들이 미리 제때 서로 합의한 데 따라 시작되고, 규율의 정신으로 최대한 질서 있게 수행되며, 지도 기관들이 제때 내리는 구호에 따라 더더욱 깔끔한 질서 속에 중단된다. 이때 지원금, 비용, 희생의 조정, 한마디로 대중파업의 물질적 대차대조표 전체가 미리 정확히 정해진다.
그런데 이 이론적 도식을 러시아에서 5년 전부터 나타나고 있는 실제 대중파업과 비교해 보면, 독일 토론의 중심에 있는 관념에 들어맞는 것은 지금까지 일어난 수많은 대중파업 가운데 거의 하나도 없으며, 다른 한편 러시아의 대중파업은 아주 다양한 변종을 보여 주어서 「그」 대중파업, 추상적이고 도식적인 대중파업을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대중파업의 모든 계기와 성격이 제국의 도시와 지방마다 다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일반적 성격이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여러 번 바뀌었다. 러시아의 대중파업은 일정한 역사를 거쳐 왔고 지금도 계속 거치고 있다. 그러므로 러시아의 대중파업을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그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러시아 혁명의 지금의, 말하자면 공식적인 시기는 1905년 1월 22일 페테르부르크 프롤레타리아트의 봉기, 곧 끔찍한 학살로 끝난 20만 노동자의 차르 궁전 행진에서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전적으로 옳다. 잘 알려져 있듯이 페테르부르크의 피비린내 나는 학살은 첫 번째 거대한 대중파업 연쇄가 터지는 신호였다. 그 연쇄는 며칠 만에 러시아 전역을 휩쓸었고, 혁명의 돌격 함성을 페테르부르크에서 제국의 구석구석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넓은 층으로 실어 날랐다. 그러나 1월 22일의 페테르부르크 봉기도 그 전에 1905년 1월 차르 수도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사로잡은 대중파업의 극점에 지나지 않았다. 이 페테르부르크 1월 대중파업은 의심할 바 없이 그 직전인 1904년 12월 캅카스의 바쿠에서 터져 한동안 러시아 전체를 긴장시킨 거대한 총파업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일어났다. 그런데 바쿠의 12월 사건은 그 자체로, 1903년과 1904년에 주기적인 지진처럼 남러시아 전체를 뒤흔든 거대한 대중파업들의 마지막이자 힘찬 여파에 다름 아니었고, 그 대중파업들의 서막은 1902년 3월 (캅카스의) 바투미 대중파업이었다. 지금의 혁명적 분출이 이어지는 사슬에서 이 첫 대중파업 운동은 1896년과 1897년 페테르부르크 섬유 노동자들의 대총파업과 겨우 4~5년 떨어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운동이 겉으로는 몇 해 동안의 외견상의 정체와 경직된 반동으로 지금의 혁명과 갈라져 있는 듯 보이지만,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오늘날의 계급의식과 혁명적 에너지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겪은 내적 정치 발전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금의 대중투쟁 시기의 역사를 저 페테르부르크 총파업들에서 시작할 것이다. 그것들은 이미 뒷날 대중파업의 모든 주요 계기를 맹아로 품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대중파업 문제에 중요하다.
처음에 1896년 페테르부르크 총파업은 순전히 경제적인 부분적 임금투쟁으로 나타난다. 그 원인은 페테르부르크 방적공과 방직공의 견딜 수 없는 노동조건이었다. 13시간, 14시간, 15시간의 노동시간, 비참한 도급 임금, 그리고 고용주가 부리는 온갖 비열한 횡포의 견본집 전체. 그러나 섬유 노동자들은 이 처지를 오랫동안 참고 견뎠다. 그러다 겉보기에 사소한 사정 하나가 잔을 넘치게 했다. 1896년 5월, 혁명가들이 두려워 두 해 동안 미루어 온 지금의 차르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이 열렸는데, 이 기회에 페테르부르크의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에게 사흘간의 강제 휴가를 지움으로써 애국적 열성을 증명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그 사흘치 임금은 주지 않으려 했다. 이에 격분한 섬유 노동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카테린고프 공원에서 가장 깨어 있는 노동자 300명가량이 협의한 끝에 파업을 결의하고 요구를 정식화했다. 1. 대관식 기간 임금 지급, 2. 10시간 반 노동, 3. 도급 임금 인상. 이것이 5월 24일의 일이었다. 일주일 뒤 모든 직물 공장과 방적 공장이 멈추었고 4만 명의 노동자가 총파업에 들어갔다. 오늘날 혁명기의 거대한 대중파업에 견주면 이 사건은 하찮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의 정치적 결빙 속에서 총파업은 전대미문의 일이었고, 그 자체로 작은 규모의 온전한 혁명이었다. 물론 가장 잔인한 박해가 시작되어 1,000명가량의 노동자가 체포되어 고향으로 추방되었고, 총파업은 진압되었다.
이미 여기서 우리는 뒷날 대중파업의 모든 근본 특징을 본다. 운동의 직접적 계기는 아주 우연한, 아니 부차적인 것이었고, 그 폭발은 자연발생적이었다. 그러나 운동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여러 해 동안 벌인 선동의 열매가 드러났고, 총파업이 진행되는 동안 사회민주주의 선동가들이 운동의 선두에 서서 그것을 지도하고 활발한 혁명적 선동에 이용했다. 또 파업은 겉으로는 단순한 경제적 임금투쟁이었지만, 정부의 태도와 사회민주주의의 선동이 그것을 일급의 정치적 현상으로 만들었다. 끝으로 파업은 진압되었고 노동자들은 「패배」를 겪었다. 그러나 이미 이듬해인 1897년 1월에 페테르부르크 섬유 노동자들은 다시 총파업을 벌였고, 이번에는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러시아 전역에 11시간 반 노동일을 법으로 도입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결과가 있었다. 조직도 파업 기금도 전혀 없이 시작된 1896년의 저 첫 총파업 이후로 러시아 본토에서 집약적인 노동조합 투쟁이 시작되었고, 그것은 곧 페테르부르크에서 나머지 지방으로 번져 사회민주주의의 선동과 조직에 전혀 새로운 전망을 열었으며, 그럼으로써 뒤이은 시기의 외견상의 묘지 같은 고요 속에서 보이지 않는 두더지의 작업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준비했다.
1902년 3월 캅카스 파업의 폭발도 겉으로는 1896년의 것과 마찬가지로 우연했고, 전혀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순전히 경제적이고 부분적인 계기에서 생겨났다. 그것은 러시아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앞서 일어났고 그 전쟁과 더불어 시작되는 혁명적 동요의 가장 강력한 요인이었던 심각한 산업·상업 공황과 관련되어 있다. 공황은 엄청난 실업을 낳았고 실업은 프롤레타리아 대중 속에서 선동을 키웠다. 그래서 정부는 노동계급을 진정시키려고 「남아도는 일손」을 호송해 각자의 고향으로 실어 보내는 일에 착수했다. 바로 그런 조치가 석유 노동자 400명가량에게 적용되려 하자 바투미에서 대중적 항의가 일어났고, 그것은 시위, 체포, 학살, 마침내 정치 재판으로 이어졌다. 그 재판에서 순전히 경제적이고 부분적인 일이 갑자기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사건이 되었다. 완전히 「성과 없이」 끝나 진압된 바투미 파업의 메아리는 니즈니노브고로드, 사라토프, 그 밖의 도시에서 일어난 일련의 혁명적 노동자 대중 시위였다. 곧 혁명운동의 전반적 물결을 힘차게 밀어 올린 것이다.
이미 1902년 11월에 첫 번째 진정 혁명적인 반향이 돈강 연안 로스토프의 총파업이라는 모습으로 뒤따른다. 이 운동의 계기는 블라디캅카스 철도 공작창의 임금 분쟁이었다. 경영진이 임금을 깎으려 하자 사회민주당 돈 위원회가 9시간 노동, 임금 개선, 벌금 폐지, 미움받는 기술자 해고 등의 요구를 내걸고 파업을 호소하는 격문을 냈다. 모든 철도 공작창이 파업에 들어갔다. 곧 다른 모든 직종이 합류했고, 갑자기 로스토프에는 전례 없는 상태가 펼쳐졌다. 모든 영업 활동이 멈추고, 그 대신 날마다 1만 5,000명에서 2만 명의 노동자가 모이는 거대한 야외 집회가 열렸다. 때로는 카자크 경비선에 둘러싸인 채였다. 거기서 처음으로 사회민주주의 대중 연설가들이 공공연히 나서서 사회주의와 정치적 자유에 관해 불붙는 연설을 했고 그것이 엄청난 열광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혁명적 격문이 수만 부씩 뿌려졌다. 경직된 절대주의 러시아 한가운데서 로스토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처음으로 집회의 권리와 말할 자유를 돌격으로 쟁취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학살 없이는 끝나지 않았다. 블라디캅카스 철도 공작창의 임금 분쟁은 며칠 만에 정치적 총파업과 혁명적 시가전으로 자라났다. 그 여운으로 같은 철도선의 티호레츠크역에서 곧바로 또 한 번 총파업이 일어났다. 여기서도 학살과 재판이 뒤따랐고, 티호레츠크도 한 일화로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혁명 계기들의 사슬에 마찬가지로 엮여 들어갔다.
1903년 봄은 진압된 로스토프와 티호레츠크 파업에 답한다. 5월, 6월, 7월에 남러시아 전체가 불길에 휩싸인다. 바쿠, 티플리스, 바투미, 옐리사베트그라드, 오데사, 키예프, 니콜라예프, 예카테리노슬라프가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총파업에 들어간다. 그러나 여기서도 운동은 어떤 미리 짠 계획에 따라 하나의 중심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그것은 개별 지점들에서, 저마다 다른 계기로, 다른 형태로 흘러 모인다. 시작은 바쿠였다. 거기서는 여러 개별 공장과 업종의 부분적 임금투쟁이 마침내 총파업으로 흘러들었다. 티플리스에서는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하던 상업 사무원 2,000명이 파업을 시작한다. 그들은 7월 4일 저녁 8시에 모두 가게를 떠나 시내를 행진하며 가게 주인들에게 문을 닫으라고 요구한다. 승리는 완전했다. 상업 사무원들은 8시부터 8시까지의 노동시간을 쟁취했고, 곧바로 모든 공장, 작업장, 사무실이 그들에게 합류했다. 신문이 나오지 않고, 전차는 군대의 보호 아래서만 다닐 수 있다. 옐리사베트그라드에서는 7월 10일에 모든 공장에서 순전히 경제적인 요구를 내건 파업이 시작된다. 요구는 대부분 받아들여지고 7월 14일에 파업이 끝난다. 그러나 두 주 뒤 파업이 다시 터진다. 이번에는 제빵공이 구호를 내고, 석공, 소목장, 염색공, 제분 노동자가 뒤따르고, 마침내 다시 모든 공장 노동자가 뒤따른다. 오데사에서는 운동이 임금투쟁으로 시작되는데, 여기에는 정부 요원들이 저 유명한 헌병 주바토프의 강령에 따라 세운 「합법」 노동자 협회가 휘말려 들었다. 역사적 변증법은 다시 한번 그 깜찍하고 짓궂은 장난을 칠 기회를 잡았다. 앞선 시기의 경제투쟁들, 그 가운데서도 1896년 페테르부르크 대총파업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를 이른바 「경제주의」의 과장으로 이끌었고, 그럼으로써 노동자들 사이에 주바토프의 선동적 책동을 위한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얼마 뒤 거대한 혁명의 흐름은 거짓 깃발을 단 이 작은 배를 뒤집어, 하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선단의 맨 앞에서 헤엄치도록 만들었다. 주바토프 협회들은 1904년 봄 오데사 대총파업의, 그리고 1905년 1월 페테르부르크 총파업의 구호를 냈다. 정부가 진심으로 노동자에게 우호적이고 순전히 경제적인 투쟁에 공감한다는 망상에 젖어 있던 오데사 노동자들은 갑자기 그것을 실제로 시험해 보려 했고, 주바토프식 「노동자 협회」에 한 공장에서 아주 소박한 요구를 내건 파업을 선언하라고 강요했다. 그러자 고용주는 그들을 그냥 길거리로 내쫓았고, 그들이 협회 지도자에게 약속받은 관헌의 보호를 요구하자 그 양반은 사라져 버리고 노동자들은 거센 동요 속에 남겨졌다. 곧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선두에 섰고 파업 운동은 다른 공장들로 번졌다. 7월 1일에는 철도 노동자 2,500명이 파업하고, 7월 4일에는 항만 노동자들이 임금을 80코페이카에서 2루블로 올리고 노동시간을 30분 줄이라며 파업에 들어간다. 7월 6일에는 선원들이 운동에 합류한다. 7월 13일에는 전차 종업원들의 파업이 시작된다. 이제 모든 파업 참가자 7,000~8,000명의 집회가 열린다. 행렬이 꾸려져 공장에서 공장으로 옮겨 다니며 눈사태처럼 불어나, 이미 4만~5만 명의 군중이 되어 항구로 가서 거기서 모든 작업을 멈추게 한다. 곧 시 전체에 총파업이 펼쳐진다. 키예프에서는 7월 21일 철도 공작창에서 파업이 시작된다. 여기서도 직접적 계기는 비참한 노동조건이고 임금 요구가 제기된다. 이튿날 주물 공장들이 그 본을 따른다. 그러고 나서 7월 23일 총파업의 신호가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밤사이 철도 노동자 대표 두 사람이 체포되었다. 파업 참가자들은 곧바로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기차를 도시 밖으로 내보내지 않기로 결의한다. 역에서 모든 파업 참가자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선로 위에 앉는다. 사람 머리의 바다다. 일제 사격을 하겠다는 위협이 나온다. 그러자 노동자들은 가슴을 드러내며 외친다. 「쏴라!」 무방비로 앉아 있는 군중에게 일제 사격이 가해지고,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해 30~40구의 시체가 그 자리에 남는다. 이 소식에 같은 날 키예프 전체가 파업에 일어선다. 군중은 살해된 이들의 시체를 높이 들어 대중 행렬을 지어 메고 다닌다. 집회, 연설, 체포, 여기저기의 시가전. 키예프는 혁명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운동은 곧 끝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인쇄공들은 노동시간 1시간 단축과 1루블 임금 인상을 얻었고, 한 효모 공장에서는 8시간 노동제가 도입되었다. 철도 공작창은 내무부 결정으로 폐쇄되었고, 다른 업종들은 자기 요구를 위해 부분 파업을 계속했다. 니콜라예프에서는 오데사, 바쿠, 바투미, 티플리스의 소식에 직접 영향을 받아 총파업이 터진다. 군대가 기동 훈련을 위해 시를 떠날 시점까지 운동의 폭발을 미루려 한 사회민주당 위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대중은 붙잡혀 있지 않았다. 한 공장이 시작했고, 파업 참가자들이 작업장에서 작업장으로 옮겨 다녔으며, 군대의 저지는 불에 기름을 부었을 뿐이다. 곧 혁명가를 부르는 대중 행렬이 생겨나 모든 노동자, 사무원, 전차 종업원, 남자와 여자를 휩쓸어 갔다. 작업 중지는 완벽했다. 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는 8월 5일에 제빵공이, 7일에 철도 공작창 노동자가, 이어 다른 모든 공장이 파업을 시작한다. 8월 8일에는 전차가 멈추고 신문이 나오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1903년 여름 남러시아의 웅대한 총파업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부분적 경제투쟁과 작은 「우연한」 사건들이라는 수많은 작은 수로에서 빠르게 흘러 모여 거대한 바다가 되었고, 몇 주 동안 차르 제국의 남부 전체를 기묘한 혁명적 노동자 공화국으로 바꾸어 놓았다. 「형제의 포옹, 환희와 열광의 외침, 자유의 노래, 즐거운 웃음, 유머와 기쁨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내를 물결치는 수천 명의 군중 속에서 들려왔다. 분위기는 고양되어 있었다. 지상에 새롭고 더 나은 삶이 시작된다고 거의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깊이 진지하면서도 목가적이고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페테르 폰 스트루베 씨의 자유주의 잡지 『해방』의 통신원은 당시 이렇게 썼다.
1904년은 시작하자마자 전쟁을, 그리고 한동안 대중파업 운동의 휴지기를 가져왔다. 처음에는 경찰이 조직한 「애국」 시위의 흐린 물결이 전국을 덮었다. 「자유주의」 부르주아 사회는 처음에 차르의 공식 국수주의에 완전히 짓눌려 땅에 엎드렸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는 곧 싸움터를 다시 장악한다. 애국적 룸펜프롤레타리아트의 경찰 시위에 혁명적 노동자 시위가 맞선다. 마침내 차르 군대의 수치스러운 패배는 자유주의 사회도 마비에서 깨운다.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대회, 연회, 연설, 청원서, 선언의 시대가 시작된다. 전쟁의 치욕으로 일시적으로 짓눌린 절대주의는 혼란 속에서 이 양반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그들은 벌써 하늘 가득 자유주의의 바이올린 소리를 듣는다. 반년 동안 부르주아 자유주의가 정치의 앞무대를 차지하고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늘로 물러난다. 그러나 오랜 침체 끝에 절대주의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궁정 도당이 힘을 모으며, 카자크 장화로 한 번 힘차게 발을 구르는 것만으로 12월에 자유주의의 행동 전체가 쥐구멍으로 쫓겨 들어간다. 연회, 연설, 대회는 「뻔뻔스러운 월권」이라며 단칼에 금지되고, 자유주의는 갑자기 밑천이 바닥났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바로 자유주의의 실이 끊어진 그 자리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동이 시작된다. 1904년 12월, 실업을 토양으로 바쿠에서 웅대한 총파업이 터진다. 노동계급이 다시 싸움터에 나선 것이다. 말하기가 금지되어 입을 다물자 다시 행동이 시작되었다. 바쿠에서는 총파업 한가운데서 몇 주 동안 사회민주주의가 상황의 무제한의 주인으로 군림했다. 캅카스의 12월 사건이 그 자신이 몰아친 혁명의 높아 가는 파도에 그토록 빠르게 추월당하지 않았더라면 엄청난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바쿠 총파업에 관한 환상적이고 불분명한 소식이 아직 차르 제국의 모든 끝에 이르지도 않았을 때, 1905년 1월 페테르부르크에서 대중파업이 터졌다.
잘 알려져 있듯이 여기서도 계기는 아주 사소했다. 푸틸로프 공장의 노동자 두 사람이 합법적인 주바토프 협회 회원이라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이 징계는 1월 16일 이 공장 노동자 1만 2,000명 전원의 연대 파업을 불러일으켰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파업을 계기로 요구를 넓히기 위한 활발한 선동을 시작했고, 8시간 노동제, 결사의 권리, 언론과 출판의 자유 등의 요구를 관철했다. 푸틸로프 노동자들의 동요는 빠르게 나머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전해졌고, 며칠 만에 14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들어갔다. 공동 협의와 격렬한 토론 끝에 8시간 노동제를 맨 앞에 둔 저 프롤레타리아의 시민적 자유 헌장이 만들어졌고, 1월 22일 20만 명의 노동자가 가폰 신부의 인도로 그것을 들고 차르 궁전으로 행진했다. 징계당한 푸틸로프 노동자 두 사람의 분쟁이 일주일 만에 근대의 가장 거대한 혁명의 서막으로 바뀐 것이다.
바로 뒤이은 사건들은 잘 알려져 있다. 페테르부르크의 학살은 1월과 2월에 러시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발트 지방, 캅카스, 시베리아의 모든 산업 중심지와 도시에서, 북에서 남까지, 서에서 동까지 거대한 대중파업과 총파업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제 대중파업은 앞선 시기와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이번에는 어디서나 사회민주주의 조직들이 격문으로 앞장섰다. 어디서나 페테르부르크 프롤레타리아트와의 혁명적 연대가 총파업의 이유이자 목적으로 명시되었다. 어디서나 동시에 시위, 연설, 군대와의 충돌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미리 짠 계획이나 조직된 행동은 이야기할 거리조차 없었다. 정당들의 격문은 대중의 자연발생적 봉기를 따라잡기에도 벅찼고, 지도자들은 앞서 돌진하는 프롤레타리아 군중의 구호를 정식화할 시간조차 거의 없었다. 또 앞선 대중파업과 총파업은 하나로 흘러 모이는 개별 임금투쟁들에서 생겨났고, 그것들이 혁명적 상황의 전반적 분위기 속에서, 사회민주주의 선동의 영향 아래 급속히 정치적 시위가 되었다. 경제적 계기와 노동조합적 분산이 출발점이었고, 하나로 모으는 계급 행동과 정치적 지도가 최종 결과였다. 이제 운동은 거꾸로 간다. 1월과 2월의 총파업은 처음부터 사회민주주의의 지도 아래 통일된 혁명적 행동으로 터졌다. 그러나 이 행동은 곧 개별 지방, 도시, 업종, 공장에서의 국지적이고 부분적이며 경제적인 파업의 끝없는 연쇄로 흩어졌다. 1905년 봄 내내 한여름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제국 전체에서 거의 모든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에 맞서는 지칠 줄 모르는 경제투쟁이 끓어올랐다. 그 투쟁은 위로는 상업 사무원, 은행원, 기술자, 배우, 예술 직종 등 모든 소부르주아적·자유주의적 직업을 사로잡고, 아래로는 가내 하인, 경찰의 하급 관리층, 나아가 룸펜프롤레타리아트층까지 파고들었으며, 동시에 도시에서 농촌으로 흘러나가 군대 병영의 철문까지 두드렸다.
이것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전반적 대결을 그린 거대하고 다채로운 그림이다. 그것은 모든 층과 모든 구석의 사회적 분화와 정치의식의 다양성 전체를 비추고, 노련한 대공업 프롤레타리아 정예 부대의 정식 노동조합 투쟁부터 한 무리 농촌 프롤레타리아의 형태 없는 항의 폭발과 흥분한 병사 수비대의 첫 어렴풋한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은행 사무실에서 소맷부리와 스탠드칼라 차림으로 벌이는 점잖고 우아한 반란부터 연기 자욱하고 어둡고 더러운 경찰 초소에서 불만에 찬 경찰관들이 투박하게 모여 소심하면서도 대담하게 내는 웅성거림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사다리 전체를 거쳐 간다.
계획과 도식에 따른 「질서 있고 규율 잘 잡힌」 투쟁의 애호가들, 특히 멀리서 언제나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를 더 잘 알고자 하는 이들의 이론에 따르면, 1905년 1월의 거대한 정치적 총파업 행동이 수많은 경제투쟁으로 흩어진 것은 아마 「큰 실수」였을 것이다. 그 실수가 저 행동을 「마비」시키고 「밀짚 불」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이다. 혁명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혁명을 「만들지」는 않고 혁명의 법칙을 그 진행 자체에서 비로소 배워야 하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도, 총파업의 첫 해일이 겉보기에 성과 없이 밀려 나가는 것을 보고 처음 순간에는 한동안 다소 갈피를 잃었다. 그러나 저 「큰 실수」를 저지른 역사는, 그 주제넘은 훈장들의 공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로써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결과를 헤아릴 수 없는 혁명의 거대한 작업을 해냈다.
페테르부르크 사건의 강력한 충격 아래 1월에 프롤레타리아트가 갑자기 총궐기한 것은 밖으로는 절대주의에 대한 혁명적 선전포고라는 정치적 행위였다. 그러나 이 첫 전반적·직접적 계급 행동은 바로 그런 것으로서 안으로 더욱 강력하게 되돌아와 작용했다. 그것이 처음으로 수백만, 또 수백만의 사람들 속에서 마치 전기 충격처럼 계급 감정과 계급의식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계급 감정의 각성은 곧바로, 수백만을 헤아리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수십 년 동안 자본주의의 사슬에 묶여 참아 온 저 사회적·경제적 생존의 견딜 수 없음을 아주 갑자기, 날카롭고 아프게 의식하게 된 데서 드러났다. 그래서 이 사슬을 자연발생적으로 전반적으로 흔들고 잡아당기는 움직임이 시작된다. 근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천 갈래 고통이 모두 오래되어 피 흘리는 상처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는 8시간 노동제를 위해, 저기서는 도급제에 맞서 싸우고, 여기서는 난폭한 십장을 자루에 담아 손수레에 실어 「내다 버리고」, 다른 곳에서는 파렴치한 벌금 제도에 맞서, 어디서나 더 나은 임금을 위해, 여기저기서 가내 노동의 폐지를 위해 싸운다. 대도시의 뒤처지고 영락한 직종들, 그때까지 목가적인 잠 속에서 졸고 있던 작은 지방 도시들, 농노제의 유산을 지닌 마을, 이 모든 것이 1월의 번개에 깨어나 갑자기 자기 권리를 떠올리고 이제 놓친 것을 열병처럼 만회하려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경제투쟁은 실제로는 행동의 붕괴나 분산이 아니라 단지 전선의 변경이었다. 절대주의와의 첫 총력전이 자본과의 총결산으로 갑작스럽고도 자연스럽게 바뀐 것이고, 그 총결산은 그 성격에 맞게 개별적이고 분산된 임금투쟁이라는 형태를 띠었다. 1월에 총파업이 경제적 파업들로 흩어지면서 정치적 계급 행동이 꺾인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주어진 상황에서, 혁명의 주어진 단계에서 가능했던 정치적 행동의 내용이 소진된 뒤에 그것이 흩어졌다, 아니 차라리 경제적 행동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1월의 총파업이 그 이상 무엇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아나키스트의 도식에 따라 단 한 번의 「끈질긴」 총파업으로 단번에 절대주의를 무너뜨리기를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완전한 무사려뿐이었다. 러시아에서 절대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무너뜨려야 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러기 위해 높은 수준의 정치적 훈련, 계급의식, 조직을 갖추어야 한다. 이 모든 조건을 그것은 소책자와 전단에서가 아니라, 오직 살아 있는 정치 학교에서, 투쟁으로부터 투쟁 속에서, 혁명의 전진하는 진행 속에서 얻을 수 있다. 또 절대주의는 충분한 「노력」과 「끈기」만 있으면 아무 때나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절대주의의 몰락은 러시아 사회의 내적인 사회적·계급적 발전의 외적 표현일 뿐이다. 절대주의가 무너질 수 있기 전에, 그리고 무너질 수 있도록, 미래의 부르주아 러시아가 그 내부에서, 그 근대적 계급 분화에서 만들어지고 형성되어야 한다. 거기에는 여러 사회층과 이해관계 사이의 경계 긋기, 프롤레타리아 혁명 정당뿐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자유주의, 급진주의, 소부르주아, 보수주의, 반동 정당들의 형성이 속하고, 인민층뿐 아니라 부르주아층의 자기 성찰, 자기 인식, 계급의식이 속한다. 그러나 이것들도 투쟁 속에서, 혁명 자체의 과정 속에서, 사건들이라는 살아 있는 학교를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와의 충돌과 서로 간의 충돌 속에서, 끊임없는 상호 마찰 속에서가 아니고서는 형성되고 성숙할 수 없다. 부르주아 사회의 이 계급 분열과 계급 성숙, 그리고 절대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그 사회가 벌이는 행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특한 지도적 역할과 그 계급 행동으로 말미암아 한편으로는 가로막히고 어려워지며, 다른 한편으로는 채찍질당하고 가속된다. 혁명이라는 사회적 과정의 여러 저류가 서로 교차하고 서로를 가로막으며 혁명의 내적 모순을 키우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럼으로써 혁명의 거대한 폭발을 가속하고 증폭할 뿐이다.
이렇게 겉보기에는 아주 단순하고 적나라하며 순전히 기계적인 문제, 곧 절대주의의 타도가 기나긴 사회적 과정 전체를, 사회적 토대를 송두리째 파헤치는 일을 요구한다. 가장 밑에 있던 것이 위로, 가장 위에 있던 것이 아래로 뒤집혀야 하고, 겉보기의 「질서」가 혼돈으로, 겉보기의 「무정부적」 혼돈에서 새로운 질서가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데 낡은 러시아를 사회적으로 재편하는 이 과정에서 첫 총파업이라는 1월의 번개뿐 아니라, 그보다 더 그 뒤를 이은 경제 파업들의 거대한 봄·여름 뇌우가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했다. 임노동과 자본 사이의 격렬한 전반적 대결은 여러 인민층과 부르주아층 사이의 경계 긋기에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뿐 아니라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보수 부르주아지의 계급의식에도 똑같이 이바지했다. 그리고 도시의 임금투쟁이 강력한 군주주의적 모스크바 산업가 정당의 형성에 이바지했듯이, 리플란트의 거대한 농촌 봉기의 붉은 수탉은 유명한 귀족적·농업적 젬스트보 자유주의를 신속히 청산하게 했다.[옮긴이 2]
그러나 동시에 1905년 봄과 여름의 경제투쟁 시기는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활발한 사회민주주의 선동과 지도라는 형태로, 1월 서막의 교훈 전체를 뒤늦게 제 것으로 만들고 혁명의 다음 과제를 분명히 깨달을 가능성을 주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지속적인 사회적 성격을 띤 또 하나의 결과가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생활수준, 곧 경제적·사회적·지적 생활수준의 전반적 향상이다. 1905년 봄 파업은 거의 모두 승리로 끝났다. 엄청나고 대부분 아직 다 살펴볼 수도 없는 사실 자료 가운데 견본으로, 바르샤바에서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이 지도한 가장 중요한 파업 몇 가지에 관한 자료를 들어 보자. 바르샤바 금속 업종의 가장 큰 공장들, 곧 릴포프·라우·뢰벤슈타인 주식회사, 루즈키 사, 보르만·슈베데 사, 한트케, 게를라흐·풀스트, 가이슬러 형제, 에버하르트, 볼스키 사, 콘라트·야르무슈키에비치 주식회사, 베버·덴, 그비즈진스키 사, 볼라노프스키 철사 공장, 고스틴스키 주식회사, K. 브룬 부자, 프라제, 노르블랭, 베르너, 부흐, 케네베르크 형제, 라보르, 디트마르 램프 공장, 세르코프스키, 베시치츠키 등 모두 22개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1월 25일과 26일부터) 4~5주의 파업 끝에 모두 9시간 노동일, 15~25퍼센트의 임금 인상, 그 밖의 여러 작은 요구를 쟁취했다. 바르샤바 목공 업종의 가장 큰 작업장들, 곧 카르만스키, 다미에츠키, 그로멜, 셰르빈스키, 트로이에로프스키, 호른, 베펜제, 트보르코프스키, 다프·마르텐스 등 모두 10개 작업장에서 파업 참가자들은 이미 2월 23일에 9시간 노동일을 쟁취했다. 그러나 그들은 만족하지 않고 8시간 노동제를 고집했고, 다시 한 주 뒤 임금 인상과 함께 그것도 관철했다. 미장 업종 전체는 2월 27일에 파업을 시작해 사회민주당의 구호에 따라 8시간 노동제를 요구했고, 3월 11일에 9시간 노동일, 모든 범주의 임금 인상, 정기적인 주급 지급 등등을 쟁취했다. 도장공, 수레 목수, 마구공, 대장장이는 함께 임금 삭감 없는 8시간 노동제를 쟁취했다. 전화 작업장들은 열흘 동안 파업해 8시간 노동제와 10~15퍼센트의 임금 인상을 쟁취했다. 대규모 아마 직물 공장 힐레·디트리히(노동자 1만 명)는 9주 파업 끝에 노동시간 1시간 단축과 5~10퍼센트의 임금 개선을 쟁취했다. 그리고 바르샤바의 나머지 모든 업종에서, 우치에서, 소스노비에츠에서 끝없는 변주로 같은 결과를 본다.
러시아 본토에서는 8시간 노동제를 쟁취했다. 1904년 12월에는 바쿠의 일부 석유 노동자 범주가, 1905년 5월에는 키예프 지역의 제당 노동자가, 1905년 1월에는 사마라시의 모든 인쇄소가(동시에 도급 임금 인상과 벌금 폐지도 관철했다), 2월에는 페테르부르크의 군의료 기구 공장, 한 가구 공방, 탄약 공장이 쟁취했다. 또 블라디보스토크의 탄광에 8시간 교대제가 도입되었고, 3월에는 국채 인쇄 관영 기계 작업장에서, 4월에는 보브루이스크시의 대장장이들에게서, 5월에는 티플리스 시영 전차 종업원들에게서 쟁취했으며, 역시 5월에 모로조프의 거대한 면직 공장에서 8시간 반 노동일을(동시에 야간 노동 폐지와 8퍼센트 임금 인상), 6월에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몇몇 착유 공장에서 8시간 노동제를, 7월에 페테르부르크 항구 대장장이들에게서 8시간 반을, 11월에 오룔시의 모든 민간 인쇄소에서(동시에 시간급 20퍼센트, 도급 임금 100퍼센트 인상과 노사 동수 조정 기관 도입) 쟁취했다.
9시간 노동일은 모든 철도 공작창에서(2월), 많은 관영 육군·해군 작업장에서, 베르댠스크시 대부분의 공장에서, 폴타바시와 민스크시의 모든 인쇄소에서, 9시간 반은 니콜라예프시의 조선소, 기계 작업장, 주물 공장에서, 6월에는 바르샤바 웨이터 총파업 뒤 많은 식당과 카페에서(동시에 20~40퍼센트 임금 인상과 매년 2주 휴가) 쟁취했다.
10시간 노동일은 우치, 소스노비에츠, 리가, 코브노, 레발, 도르파트, 민스크, 하리코프 등 도시의 거의 모든 공장에서, 오데사의 제빵공들에게서, 키시뇨프의 수공업 작업장에서, 페테르부르크의 몇몇 모자 공장에서, 코브노의 성냥 공장에서(동시에 10퍼센트 임금 인상), 모든 관영 해군 작업장과 모든 항만 노동자에게서 쟁취했다.
임금 인상은 대체로 노동시간 단축보다 작았지만, 그래도 상당했다. 바르샤바에서는 1905년 3월 중순 시 공장 감독청이 15퍼센트의 전반적 임금 인상을 확인했다. 섬유 공업의 중심지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는 임금 인상이 7~15퍼센트에 이르렀다. 코브노에서는 전체 노동자의 73퍼센트가 임금 인상을 받았다. 고정 최저임금이 도입된 곳도 있다. 오데사 제빵소의 일부, 페테르부르크의 네바 조선소 등이다.
물론 양보는 여기저기서 여러 번 곧 다시 철회된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더 격렬한 보복 투쟁의 계기가 될 뿐이다. 그리하여 1905년 봄의 파업 시기는 저절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점점 더 넓게 퍼지고 서로 얽히는 경제투쟁의 끝없는 연쇄의 서막이 되었다. 혁명이 겉으로 정체된 시기, 전보가 러시아 싸움터의 놀라운 소식을 세상에 전하지 않고 서유럽 독자가 러시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중얼거리며 실망한 채 아침 신문을 내려놓는 시기에도, 실제로는 제국 전체의 깊은 곳에서 혁명의 거대한 두더지 작업이 쉼 없이 날마다, 시간마다 계속된다. 끊임없는 집약적 경제투쟁은 급속히 단축된 방법으로 자본주의를 본원적 축적과 가부장적 약탈 경영의 단계에서 고도로 근대적이고 문명화된 단계로 넘어가게 한다. 오늘날 러시아 공업의 실제 노동시간은 러시아 공장법, 곧 법정 11시간 반 노동일뿐 아니라 독일의 실제 사정마저 뒤에 남겨 두고 있다. 러시아 대공업의 대부분 업종에서 오늘날 10시간 노동일이 지배하는데, 이것은 독일에서는 사회 입법이 도달할 수 없는 목표로 내세우는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이다. 독일에서 열광하는 저 갈망의 대상 「산업적 입헌주의」, 기회주의 전술의 지지자들이 그것 때문에 오직 그것만이 구원을 준다는 의회주의의 고인 물에서 조금이라도 날카로운 바람을 멀리하려 하는 그것이, 러시아에서는 바로 혁명의 폭풍 한가운데서, 혁명으로부터, 정치적 「입헌주의」와 함께 태어난다! 실제로 일어난 것은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아니 차라리 문화 수준의 전반적 향상만이 아니다. 지속적인 복지 단계로서의 물질적 생활수준은 혁명 속에서 자리를 얻지 못한다. 모순과 대조로 가득 찬 혁명은 놀라운 경제적 승리와 자본주의의 가장 잔인한 보복을 동시에 가져온다. 오늘은 8시간 노동제, 내일은 대량 직장폐쇄와 수십만 명의 맨 굶주림. 이 날카로운 혁명적 파도의 오르내림에서 가장 값진 것, 남는 것이기에 값진 것은 그 정신적 침전물이다. 곧 프롤레타리아트의 비약적인 지적·문화적 성장이며, 그것은 경제투쟁에서도 정치투쟁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가 앞으로 거침없이 전진하리라는 깨뜨릴 수 없는 보증이 된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노동자와 고용주의 관계 자체가 뒤집힌다. 1월 총파업과 그 뒤를 이은 1905년의 파업들 이래로 자본주의적 「주인 노릇」의 원칙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모든 주요 산업 중심지의 가장 큰 공장들에서 마치 저절로 노동자 위원회라는 제도가 생겨났고, 고용주는 오직 이 위원회와만 협상하며, 위원회가 모든 분쟁을 결정한다. 끝으로 그 이상이다. 겉보기에 혼란스러운 파업들과 1월 총파업 이후의 「조직되지 않은」 혁명적 행동이 열병 같은 조직 작업의 출발점이 된다. 역사 부인은 독일 노동조합 행복의 문 앞에서 무섭게 보초를 서는 관료적 판박이 인간들을 멀리서 웃으며 놀려 댄다. 혹시 있을지 모를 독일 대중파업의 혹시 있을지 모를 시도를 위한 무조건적 전제로서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미리 참호를 둘러쳐야 한다는 확고한 조직들, 바로 그 조직들이 러시아에서는 거꾸로 대중파업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독일 노동조합의 수호자들이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직이 값비싼 도자기처럼 와장창 깨질까 봐 가장 두려워하는 동안, 러시아 혁명은 정반대의 그림을 보여 준다. 대중파업과 시가전의 소용돌이와 폭풍, 불길과 열기 속에서 바다 거품에서 솟아오르는 비너스처럼 솟아오르는 것은 신선하고 젊고 힘차고 생기 넘치는 노동조합이다.
여기서도 작은 예를 하나만 들자. 그러나 그것은 제국 전체에 전형적이다. 1906년 2월 말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러시아 노동조합 제2차 협의회에서 페테르부르크 노동조합 대표는 차르 수도의 노동조합 조직 발전에 관한 보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폰 협회를 쓸어 가 버린 1905년 1월 22일은 전환점이었습니다. 대중 속의 노동자들은 사건들을 통해 조직의 의미를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웠고, 오직 자신들만이 이 조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월 운동과 직접 연결되어 페테르부르크에서 첫 노동조합이 생겨납니다. 인쇄공 노동조합입니다. 임금 협약을 마련하기 위해 선출된 위원회가 규약을 작성했고, 6월 19일에 노동조합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거의 같은 무렵 사무원과 부기원 노동조합이 만들어졌습니다. 거의 공개적으로(합법적으로) 존재하는 이 조직들 외에, 1905년 1월부터 10월 사이에 반합법·비합법 노동조합들이 생겨났습니다. 앞의 것에는 이를테면 약국 조수와 상업 사무원의 노동조합이 속합니다. 비합법 노동조합 가운데서는 시계공 협회를 특기해야 하는데, 그 첫 비밀 회의는 4월 24일에 열렸습니다. 전체 공개 집회를 소집하려는 모든 시도는 경찰과, 수공업 회의소로 대표되는 고용주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습니다. 이 실패가 노동조합의 존재를 막지는 못했습니다. 노동조합은 집행부 회의 말고도 6월 9일과 8월 14일에 비밀 조합원 총회를 열었습니다. 남녀 재봉사 노동조합은 1905년 봄 숲속의 한 집회에서 창립되었는데, 거기에는 재봉사 70명이 참석했습니다. 창립 문제를 논의한 뒤 규약 작성을 맡을 위원회를 선출했습니다. 노동조합의 합법적 존재를 관철하려는 위원회의 모든 시도는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 활동은 개별 작업장에서의 선동과 조합원 모집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제화공 노동조합도 비슷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7월에 시 밖의 숲에서 밤에 비밀 집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제화공 100명이 넘게 모였고, 노동조합의 의미, 서유럽에서의 그 역사, 러시아에서의 그 과제에 관한 보고가 있었습니다. 이어서 노동조합을 창립하기로 결의했고, 규약을 작성하고 제화공 전체 집회를 소집할 위원회에 12명이 선출되었습니다. 규약은 작성되었지만, 아직 그것을 인쇄하는 데도 전체 집회를 소집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고된 시작이었다. 그다음에 10월의 나날, 두 번째 전반적 총파업, 10월 30일의 차르 선언, 짧은 「헌정 시기」가 왔다. 노동자들은 정치적 자유의 물결에 불같은 열의로 뛰어들어 곧바로 그것을 조직 사업에 이용한다. 날마다 열리는 정치 집회, 토론, 단체 결성과 나란히 곧바로 노동조합 확충에 착수한다. 10월과 11월에 페테르부르크에서 40개의 새 노동조합이 생긴다. 곧 「중앙 사무국」, 곧 노동조합 연합체가 세워지고, 여러 노동조합 신문이 나오며, 11월부터는 중앙 기관지 『노동조합』도 나온다. 페테르부르크에 관해 위에서 보고한 것은 대체로 모스크바와 오데사, 키예프와 니콜라예프, 사라토프와 보로네시, 사마라와 니즈니노브고로드, 러시아의 모든 큰 도시에, 그리고 더 높은 정도로 폴란드에 들어맞는다. 개별 도시의 노동조합들이 서로 연계를 찾고 협의회가 열린다. 「헌정 시기」의 종말과 1905년 12월의 반동으로의 선회는 노동조합의 공개적이고 폭넓은 활동에도 일시적으로 끝을 가져오지만, 그 생명의 불을 꺼뜨리지는 않는다. 노동조합은 조직으로서는 비밀리에 계속 활동하고, 동시에 아주 공공연히 임금투쟁을 이끈다. 모순에 찬 혁명적 상황에 걸맞게 노동조합 생활에 합법 상태와 비합법 상태가 독특하게 뒤섞인 상태가 생겨난다. 그러나 투쟁 한가운데서 조직 사업은 아주 철저하게, 아니 꼼꼼하기까지 하게 계속 확충된다. 이를테면 지난 당대회(1906년 6월)에 유료 조합원 1만 명을 대표하는 대의원 다섯 명을 보낸 폴란드·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의 노동조합들은 정식 규약, 인쇄된 조합원 수첩, 납부 증지 따위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1905년 6월에 바리케이드에 섰고 12월에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올 구호 하나만 기다리며 시가전에 대비했던 바로 그 바르샤바와 우치의 제빵공과 제화공, 금속 노동자와 인쇄공이, 한 대중파업과 다음 대중파업 사이에서, 감옥과 직장폐쇄 사이에서, 계엄 상태 아래서 자기 노동조합 규약을 꼼꼼하고 주의 깊게 토론할 여유와 거룩한 진지함을 찾아낸다. 아니, 어제와 내일의 이 바리케이드 투사들은 불운한 노동조합 조합원 수첩이, 끊임없는 경찰의 추격 속에 비밀 인쇄소에서, 충분히 빨리 인쇄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집회에서 지도자들을 사정없이 혼내며 탈당하겠다고 위협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 열의와 이 진지함은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1906년 7월 첫 두 주 동안 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 15개의 새 노동조합이 생겼다. 코스트로마에서 6개, 키예프, 폴타바, 스몰렌스크, 체르카시, 프로스쿠로프에서 여러 개, 아주 작은 지방 소읍에 이르기까지. 올해 6월 4일 모스크바 노동조합 연합체 회의에서는 개별 노동조합 대의원들의 보고를 들은 뒤 이렇게 결의했다. 「대중파업을 위한 시기가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되므로,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을 규율하고 거리의 소요로부터 떼어 놓아야 한다. 정부의 도발 가능성에 비추어 대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끝으로 연합체는 한 노동조합이 파업을 이끄는 동안 다른 노동조합들은 임금 운동을 삼가기로 결의했다.」 대부분의 경제투쟁은 이제 노동조합이 지도한다.[1*]
이렇게 1월 총파업에서 시작되어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그치지 않는 거대한 경제투쟁은 혁명의 넓은 배경을 이루었고, 그 배경에서 정치적 선동 및 혁명의 외적 사건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때로는 여기저기서 개별 폭발이, 때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전반적이고 거대한 주요 행동이 거듭 솟아오른다. 그리하여 이 배경 위에서 차례로 불길이 솟는다. 1905년 5월 1일 노동절에 바르샤바에서 전례 없는 절대적 총파업이 완전히 평화적인 대중 시위와 함께 일어나고, 그 시위는 무방비 군중과 병사들의 피 묻은 충돌로 끝난다. 6월에는 우치에서 병사들에게 흩어진 대중 소풍이 군인들의 몇몇 희생자 장례식에 10만 노동자가 모이는 시위로, 다시 군대와의 충돌로, 마침내 총파업으로 이어지고, 그 총파업은 23일, 24일, 25일에 차르 제국 최초의 바리케이드 투쟁으로 넘어간다. 역시 6월에 오데사 항구에서 장갑함 「포툠킨」호 갑판 위의 작은 사건을 계기로 흑해 함대 최초의 대규모 수병 반란이 터지고, 그것은 곧바로 그 반작용으로 오데사와 니콜라예프에서 거대한 대중파업을 불러일으킨다. 그 메아리로 크론시타트, 리바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중파업과 수병 반란이 뒤따른다.
10월에는 페테르부르크가 8시간 노동제를 도입하는 웅대한 실험이 있다. 노동자 대표 평의회는 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적 방법으로 8시간 노동제를 관철하기로 결의한다. 곧 정해진 날에 페테르부르크의 모든 노동자가 고용주에게 하루 8시간 넘게는 일할 뜻이 없다고 선언하고, 해당 시각에 작업장을 떠난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활발한 선동의 계기가 되고, 프롤레타리아트는 아주 큰 희생도 마다하지 않고 열광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여 실행한다. 이를테면 그때까지 11시간을, 그것도 도급 임금으로 일하던 섬유 노동자에게 8시간 노동제는 엄청난 임금 손실을 뜻했지만, 그들은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일주일 만에 페테르부르크의 모든 공장과 작업장에 8시간 노동제가 시행되고, 노동자들의 환호는 끝이 없다. 그러나 처음에 어리둥절했던 고용주들이 곧 반격을 준비한다. 어디서나 공장을 폐쇄하겠다는 위협이 나온다. 노동자 일부는 협상에 응해 여기서는 10시간, 저기서는 9시간 노동일을 얻는다. 그러나 페테르부르크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예, 곧 큰 관영 금속 공장의 노동자들은 흔들리지 않았고, 직장폐쇄가 뒤따라 4만 5,000~5만 명을 한 달 동안 길거리로 내몬다. 이 결말을 통해 8시간 운동은 12월의 전반적 대중파업으로 이어지는데, 큰 직장폐쇄는 그 대중파업을 크게 가로막았다.
그러는 사이 10월에 불리긴의 두마 계획에 대한 대답으로 차르 제국 전역에서 두 번째의 가장 거대한 전반적 대중파업이 뒤따르고, 철도원들이 그 구호를 낸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이 두 번째 주요 혁명 행동은 이미 1월의 첫 번째 행동과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을 띤다. 정치의식의 요소가 이미 훨씬 큰 역할을 한다. 물론 여기서도 대중파업 폭발의 첫 계기는 부차적이고 겉보기에 우연한 것이었다. 연금 기금을 둘러싼 철도원과 경영진의 분쟁이다. 그러나 뒤이은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전반적 봉기는 분명한 정치 사상에 떠받쳐진다. 1월 파업의 서막은 정치적 자유를 구하러 차르에게 간 청원 행렬이었다. 10월 파업의 구호는 「차르 체제의 입헌 희극을 걷어치워라!」였다. 그리고 총파업이 곧바로 거둔 성공, 곧 10월 30일의 차르 선언 덕분에 운동은 1월처럼 안으로 되흘러 경제적 계급투쟁의 시작을 만회하는 대신, 밖으로 흘러넘쳐 갓 쟁취한 정치적 자유를 열심히 행사한다. 시위, 집회, 젊은 언론, 공개 토론, 그리고 노래의 끝으로 피의 학살, 이어서 새로운 대중파업과 시위. 이것이 11월과 12월 나날의 폭풍 같은 그림이다. 11월에는 사회민주당의 호소에 따라 페테르부르크에서 리플란트와 폴란드의 유혈 사태와 계엄령 선포에 항의하는 첫 시위성 대중파업이 벌어진다. 짧은 헌정의 꿈과 잔혹한 깨어남 뒤의 동요는 마침내 12월에 차르 제국 전역에서 세 번째 전반적 대중파업의 폭발로 이어진다. 이번에는 진행과 결말이 앞의 두 경우와 또다시 전혀 다르다. 정치적 행동은 1월처럼 경제적 행동으로 바뀌지 않지만, 10월처럼 빠른 승리를 거두지도 못한다. 차르 궁정 도당은 진짜 정치적 자유를 가지고 하는 실험을 더는 하지 않고, 그래서 혁명적 행동은 처음으로 그 폭 전체로 절대주의의 물리적 폭력이라는 굳은 벽에 부딪힌다. 전진하는 사건들의 논리적인 내적 발전을 통해 대중파업은 이번에 공공연한 봉기, 곧 모스크바의 무장 바리케이드전과 시가전으로 바뀐다. 모스크바의 12월 나날은 정치적 행동과 대중파업 운동의 상승선의 정점으로서 혁명의 노고 많은 첫해를 마무리한다.
모스크바 사건은 동시에 작은 견본으로 혁명운동 전체의 논리적 발전과 미래를 보여 준다. 그것은 전반적인 공개 봉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지만, 그 봉기는 다시 일련의 준비적 부분 봉기라는 학교를 거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 부분 봉기들은 바로 그 때문에 당분간 부분적인 외적 「패배」로 끝나고, 하나하나 따로 보면 「시기상조」로 보일 수 있다.
1906년은 두마 선거와 두마의 일화를 가져온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힘찬 혁명적 본능과 상황에 대한 분명한 인식으로 차르식 입헌 소극 전체를 보이콧하고, 몇 달 동안 정치 무대의 앞자리는 다시 자유주의가 차지한다. 1904년의 상황이 되돌아온 듯 보인다. 행동 대신 말의 시기가 오고, 프롤레타리아트는 한동안 그늘로 물러나 그만큼 더 부지런히 노동조합 투쟁과 조직 사업에 몰두한다. 대중파업은 잠잠해지고, 그사이 자유주의 수사의 요란한 불꽃이 날마다 쏘아 올려진다. 마침내 철의 장막이 갑자기 덜컹 내려오고, 배우들은 쫓겨나 흩어지며, 자유주의의 불꽃은 연기와 김만 남긴다. 두마를 지지하고 자유주의적 말의 시기를 다시 열기 위한 시위로 러시아 전역에서 네 번째 대중파업을 일으키려던 러시아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의 시도는 맥없이 무너진다. 정치적 대중파업만의 역할은 소진되었고, 대중파업이 전반적 인민 봉기와 시가전으로 넘어갈 때는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자유주의의 일화는 끝났고, 프롤레타리아의 일화는 아직 다시 시작되지 않았다. 무대는 당분간 비어 있다.
IV
앞에서 우리는 몇 가지 간결한 선으로 러시아 대중파업의 역사를 그려 보려 했다. 이 역사를 잠깐 훑어보기만 해도, 독일의 토론에서 흔히 대중파업에 대해 그리는 그림과는 한 획도 닮지 않은 그림이 드러난다. 최고 기관의 결의에 따라 계획과 신중함으로 수행되는 메마른 정치적 「행동」이라는 경직되고 공허한 도식 대신, 우리는 혁명의 큰 틀에서 도저히 오려 낼 수 없고 수천 갈래의 혈관으로 혁명의 온갖 것과 이어져 있는, 살과 피를 지닌 한 조각의 살아 있는 삶을 본다.
러시아 혁명이 보여 주는 대중파업은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모든 국면, 혁명의 모든 단계와 계기를 그 안에 비출 만큼 변화무쌍한 현상이다. 그 적용 가능성, 그 작용력, 그 발생 계기는 끊임없이 바뀐다. 그것은 혁명이 이미 막다른 골목에 이른 듯 보이던 곳에서 갑자기 새롭고 넓은 혁명의 전망을 열고, 확실히 기댈 수 있다고 믿는 곳에서는 실패한다. 그것은 때로 넓은 바다 물결처럼 제국 전체를 덮치고, 때로 가는 물줄기들의 거대한 그물로 갈라진다. 때로 신선한 샘처럼 땅속에서 솟구치고, 때로 땅속으로 완전히 스며들어 사라진다. 정치적 파업과 경제적 파업, 대중파업과 부분 파업, 시위 파업과 투쟁 파업, 개별 업종의 총파업과 개별 도시의 총파업, 조용한 임금투쟁과 시가전, 바리케이드 투쟁. 이 모든 것이 뒤섞이고 나란히 달리고 서로 교차하며 서로에게로 넘쳐 흐른다. 그것은 영원히 움직이고 바뀌는 현상들의 바다다. 그리고 이 현상들의 운동 법칙은 분명해진다. 그것은 대중파업 자체에, 그 기술적 특성에 있지 않고, 혁명의 정치적·사회적 역관계에 있다. 대중파업은 혁명적 투쟁의 형태일 뿐이며, 싸우는 세력들의 관계에서, 정당의 발전과 계급 분화에서, 반혁명의 위치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동, 이 모든 것이 곧바로 보이지 않고 거의 통제할 수 없는 수천 갈래의 길로 파업 행동에 영향을 준다. 그러면서도 파업 행동 자체는 거의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형태와 범위와 작용만 바꿀 뿐이다. 그것은 혁명의 살아 있는 맥박이자 동시에 혁명의 가장 강력한 구동 바퀴다. 한마디로, 러시아 혁명이 보여 주는 대중파업은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효과를 더 강하게 하려고 고안해 낸 영리한 수단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운동 방식, 혁명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나타나는 형태다.
이로부터 대중파업 문제를 판단하는 데 몇 가지 일반적 관점을 끌어낼 수 있다.
1
대중파업을 하나의 행위, 개별 행동으로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이다. 대중파업은 오히려 여러 해, 어쩌면 수십 년에 걸친 계급투쟁의 한 시기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 집합 개념이다. 러시아에서 4년 전부터 벌어진 수없이 다양한 대중파업 가운데, 계획과 의도에 따라 일으키고 끝내는 순전히 정치적이고 짧은 개별 행위라는 대중파업의 도식에 들어맞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변종, 그것도 부차적인 변종인 순수한 시위 파업뿐이다. 5년에 걸친 시기 전체를 통틀어 러시아에서 우리가 보는 시위 파업은 몇 안 되며, 그것도 주의할 점은 대개 개별 도시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바르샤바와 우치의 해마다의 노동절 총파업(러시아 본토에서는 지금까지 5월 1일이 작업 중지로 기념된 일이 이렇다 할 규모로는 없다), 1905년 9월 11일 처형된 마르친 카스프샤크를 기리는 추도 행사로서 바르샤바의 대중파업, 1905년 11월 폴란드와 리플란트의 계엄령 선포에 항의하는 시위로서 페테르부르크의 대중파업, 1906년 1월 22일 페테르부르크 학살 기념일을 맞아 바르샤바, 우치, 쳉스토호바, 동브로바 탄전과 일부 러시아 도시에서 벌어진 대중파업, 또 1906년 7월 군사 반란 때문에 군사법원에서 판결을 받은 병사들에게 연대를 표하는 티플리스의 총파업, 끝으로 같은 계기로 올해 9월 레발에서 군사법원 심리 중에 벌어진 파업이 그것이다. 그 밖의 모든 크고 작은 대중파업과 총파업은 시위 파업이 아니라 투쟁 파업이었고, 그런 것으로서 대개 자연발생적으로, 매번 특수한 국지적이고 우연한 계기에서, 계획도 의도도 없이 생겨나 자연력 같은 힘으로 큰 운동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질서 있는 퇴각」에 나서는 대신 때로는 경제투쟁으로, 때로는 시가전으로 바뀌었고, 때로는 저절로 무너졌다.
이 전체 그림에서 순수한 정치적 시위 파업은 아주 부차적인 역할, 곧 거대한 면적 한가운데 있는 작은 점 몇 개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으로 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눈에 띈다. 투쟁 파업과 달리 당 규율, 의식적 지도, 정치 사상을 가장 많이 보여 주므로 도식에 따르면 대중파업의 가장 높고 가장 성숙한 형태로 보여야 할 시위 파업이, 실제로는 운동의 시작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1905년 5월 1일 바르샤바의 완전한 작업 중지는 사회민주당의 결의가 그토록 놀랍게 수행된 첫 사례로서 폴란드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큰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마찬가지로 같은 해 11월 페테르부르크의 연대 파업은 러시아에서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대중 행동의 첫 시험으로서 큰 인상을 남겼다. 똑같이 1906년 1월 17일 함부르크 동지들의 「시험 대중파업」도, 그토록 논란 많은 무기를 처음으로 신선하게 시험한 것으로서, 그것도 함부르크 노동자들의 투쟁 기분과 투쟁의 기쁨을 그토록 설득력 있게 보여 준 훌륭한 시험으로서, 앞으로 올 독일 대중파업의 역사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확실하게, 독일에서 대중파업의 시기가 일단 진지하게 시작되면 그것은 저절로 5월 1일의 진정한 전반적 작업 중지로 이어질 것이다. 노동절은 당연히 대중투쟁의 기치 아래 첫 대시위로서 영예를 얻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쾰른 노동조합 대회에서 노동절을 부른 이름인 「절름발이 말」은 아직 큰 미래를, 독일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진지한 혁명적 투쟁이 발전하면서 그런 시위의 의미는 빠르게 줄어든다. 미리 짠 계획과 정당의 구호에 따라 시위 파업이 이루어지는 것을 객관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바로 그 계기들, 곧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의식과 훈련의 성장이 이런 종류의 대중파업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오늘날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 그것도 바로 대중의 가장 유능한 전위는 시위 파업에 관해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이제 농담을 받아 주지 않으며, 모든 결과를 감수하는 진지한 투쟁만을 생각하려 한다. 그리고 1905년 1월의 첫 대중파업에서는 시위의 요소가, 의도적이라기보다 본능적이고 자연발생적인 형태로이기는 해도, 아직 큰 역할을 했던 반면, 거꾸로 8월에 해산된 두마를 지지하는 시위로 대중파업을 일으키려던 러시아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의 시도는 무엇보다도 훈련된 프롤레타리아트가 맥없는 반쪽 행동과 단순한 시위를 단호히 싫어한 탓에 실패했다.
2
그런데 부차적인 변종인 시위 파업 대신, 오늘날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행동의 본래 담지자인 투쟁 파업을 살펴보면, 거기서는 경제적 계기와 정치적 계기를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점이 또한 눈에 띈다. 여기서도 현실은 이론적 도식과 크게 어긋나며, 순수한 정치적 대중파업을 노동조합 총파업에서 가장 성숙하고 높은 단계로 논리적으로 끌어내면서도 동시에 둘을 분명히 갈라놓는 현학적 관념은 러시아 혁명의 경험으로 철저히 반박되었다. 이것은 1896~1897년 페테르부르크 섬유 노동자들의 저 첫 대규모 임금투쟁부터 1905년 12월의 마지막 대규모 대중파업에 이르기까지 대중파업이 아주 눈치채지 못하게 경제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넘어가서 둘 사이의 경계를 긋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역사적 사실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큰 대중파업 하나하나도 말하자면 작은 규모로 러시아 대중파업의 전체 역사를 되풀이한다. 그것은 순전히 경제적인, 또는 적어도 부분적인 노동조합 분쟁으로 시작해 정치적 시위에 이르는 사다리를 거쳐 간다. 1902년과 1903년 남러시아의 거대한 대중파업 뇌우는, 앞에서 보았듯이, 바쿠에서는 실업자 징계로 인한 분쟁에서, 로스토프에서는 철도 공작창의 임금 분쟁에서, 티플리스에서는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상업 사무원의 투쟁에서, 오데사에서는 작은 공장 하나의 임금투쟁에서 생겨났다. 1905년 1월 대중파업은 푸틸로프 공장의 내부 분쟁에서, 10월 파업은 연금 기금을 둘러싼 철도원의 투쟁에서, 12월 파업은 끝으로 결사의 권리를 위한 우편·전신 종업원의 투쟁에서 발전한다. 운동 전체의 진보는 경제적 초기 단계가 빠지는 데서가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 시위에 이르는 사다리를 거쳐 가는 속도에서, 그리고 대중파업이 나아가는 지점의 극단성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운동 전체는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가는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도 나아간다. 큰 정치적 대중 행동은 하나하나가 그 정치적 정점에 이른 뒤에 경제 파업의 온갖 덩어리로 바뀐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큰 대중파업 하나하나에만이 아니라 혁명 전체에도 해당한다. 정치투쟁이 확산되고 명료해지고 강화되는 것과 함께 경제투쟁은 뒤로 물러나기는커녕, 그 자신도 같은 걸음으로 확산되고 조직되고 강화된다. 둘 사이에는 완전한 상호작용이 있다.
정치투쟁의 새로운 돌진과 새로운 승리는 저마다 경제투쟁을 위한 강력한 충격으로 바뀐다. 그것이 경제투쟁의 외적 가능성을 넓히는 동시에, 처지를 개선하려는 노동자들의 내적 동인과 투쟁 의욕을 높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행동의 물결이 거품을 일으키며 지나갈 때마다 비옥한 침전물이 남고, 거기서 곧바로 경제투쟁의 천 갈래 줄기가 솟아난다. 그리고 그 반대도 그렇다. 노동자와 자본 사이의 끊임없는 경제적 전쟁 상태는 모든 정치적 휴지기에도 투쟁 에너지를 깨어 있게 하고, 말하자면 프롤레타리아 계급 힘의 늘 신선한 저수지를 이룬다. 정치투쟁은 그 저수지에서 언제나 새롭게 그 힘을 길어 낸다. 그리고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칠 줄 모르는 경제적 굴착은 시시때때로 여기저기서 개별적인 날카로운 분쟁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뜻하지 않게 큰 규모의 정치적 분쟁이 폭발한다.
한마디로 경제투쟁은 한 정치적 결절점에서 다른 결절점으로 이어 주는 것이고, 정치투쟁은 경제투쟁을 위해 토양을 주기적으로 비옥하게 하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여기서는 시시때때로 자리를 바꾼다. 그래서 대중파업 시기에 경제적 계기와 정치적 계기는 현학적 도식이 바라듯이 깔끔하게 갈라지거나 심지어 서로를 배척하기는커녕, 오히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서로 얽힌 두 측면일 뿐이다. 그리고 그 둘의 통일이 바로 대중파업이다. 공론을 일삼는 이론이 「순수한 정치적 대중파업」에 이르려고 대중파업에 인위적인 논리적 해부를 가한다면, 이 해부에서도 다른 모든 해부에서처럼 현상은 그 살아 있는 본질에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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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러시아의 사건들은 대중파업이 혁명과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러시아 대중파업의 역사, 그것은 러시아 혁명의 역사다. 물론 우리 독일 기회주의의 대표자들은 「혁명」이라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유혈, 시가전, 화약과 납을 떠올리고, 거기서 끌어내는 논리적 결론은 이렇다. 대중파업은 피할 수 없이 혁명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러시아에서 우리는 거의 모든 대중파업이 최종적으로는 차르 질서의 무장한 수호자들과의 충돌로 귀결되는 것을 본다. 이 점에서 이른바 정치적 파업은 큰 경제투쟁과 완전히 같다. 그러나 혁명은 유혈과는 다른 것이고 그 이상의 것이다. 혁명을 오로지 거리의 소요와 난동의 관점, 곧 「무질서」의 관점에서만 보는 경찰적 견해와 달리, 과학적 사회주의의 견해는 혁명에서 무엇보다도 사회적 계급관계의 깊은 내적 변혁을 본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보면 러시아에서 혁명과 대중파업 사이에는, 대중파업이 대개 유혈로 끝난다는 진부한 관찰이 확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연관도 있다.
우리는 앞에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에 바탕을 둔 러시아 대중파업의 내적 메커니즘을 보았다. 그런데 바로 이 상호작용이 혁명기라는 조건에 달려 있다. 오직 혁명기의 뇌우 서린 공기 속에서만 노동과 자본 사이의 작은 부분적 분쟁 하나하나가 전반적 폭발로 자라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해마다, 날마다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에 가장 격렬하고 가장 잔인한 충돌이 일어나지만, 투쟁은 해당 개별 업종이나 개별 도시, 나아가 개별 공장의 울타리를 넘지 않는다. 페테르부르크에서 같은 조직 노동자 징계, 바쿠에서 같은 실업, 오데사에서 같은 임금 분쟁, 모스크바에서 같은 결사권 투쟁은 독일에서 일상다반사다. 그러나 이런 경우 가운데 단 하나도 공동의 계급 행동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들이 의심할 바 없이 정치적 색채를 띤 개별 대중파업으로 자라나더라도, 그때조차 전반적인 뇌우에 불을 붙이지는 않는다. 가장 뜨거운 공감에도 불구하고 나라 안 프롤레타리아트의 완전한 부동 속에서 피를 흘리며 꺼져 간 네덜란드 철도원 총파업이 그 놀라운 증거다.
그리고 거꾸로, 사회의 토대와 계급사회의 벽이 느슨해져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혁명기에만,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계급 행동 하나하나가 몇 시간 만에 그때까지 손대지 않은 노동자층 전체를 부동 상태에서 끌어낼 수 있고, 그것은 곧바로 당연히 폭풍 같은 경제투쟁으로 드러난다. 정치적 행동이라는 전기 충격으로 갑자기 흔들려 깨어난 노동자는 다음 순간 무엇보다도 가장 가까운 것, 곧 자신의 경제적 노예 관계에 맞선 방어에 손을 뻗는다. 정치투쟁의 폭풍 같은 몸짓이 그에게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강도로 자기 경제적 사슬의 무게와 압박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를테면 독일에서 가장 격렬한 정치투쟁, 곧 선거전이나 관세율을 둘러싼 의회 투쟁이 같은 시기 독일에서 벌어지는 임금투쟁의 진행과 강도에 거의 눈에 띄는 직접적 영향을 주지 못하는 반면, 러시아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행동 하나하나가 곧바로 경제투쟁의 면적을 넓히고 깊게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대중파업에서 표현되는 저 직접적 전화, 곧 경제투쟁이 정치투쟁으로, 정치투쟁이 경제투쟁으로 바뀌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은 혁명이 비로소 만들어 낸다. 그리고 속류 도식이 대중파업과 혁명의 연관을 대중파업을 마무리하는 피 흘리는 거리 충돌에서만 본다면, 러시아의 사건들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전혀 거꾸로 된 연관이 드러난다. 실제로는 대중파업이 혁명을 낳는 것이 아니라 혁명이 대중파업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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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파업에서 의식적 지도와 주도권의 문제에 대해서도 해명을 얻으려면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대중파업이 개별 행위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한 시기 전체를 뜻하고, 이 시기가 혁명기와 같은 것이라면, 대중파업은 그 결정이 가장 강한 사회민주당의 최고 기관에서 나온다 하더라도 마음대로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사회민주당이 자기 판단대로 혁명을 연출하고 취소할 수 있는 힘을 손에 쥐지 못하는 한, 사회민주주의 부대의 가장 큰 열광과 조바심도 진정한 대중파업의 시기를 살아 있고 강력한 인민운동으로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당 지도부의 결단과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의 당 규율에 기대어 일회적이고 짧은 시위는 충분히 조직할 수 있다. 스웨덴의 대중파업이나 최근 오스트리아의 대중파업들, 또는 1월 17일 함부르크의 대중파업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시위는 진정한 혁명적 대중파업의 시기와, 외교 관계가 긴장되었을 때 외국 항구에서 벌이는 잘 알려진 함대 시위가 해전과 다른 것과 꼭 마찬가지로 다르다. 순전히 규율과 열광에서 태어난 대중파업은 기껏해야 하나의 일화로서, 노동자들의 투쟁 기분의 징후로서 역할을 할 뿐이고, 그 뒤 사정은 조용한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물론 혁명 동안에도 대중파업이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렇게든 저렇게든 노동자들이 만들어야 한다. 노동자들의 결단과 결의도 거기서 역할을 하며, 그 주도권과 그 뒤의 지도는 당연히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되고 가장 깨어 있는 사회민주주의 핵심에 돌아간다. 그러나 이 주도권과 이 지도가 활동할 여지는, 혁명기가 이미 와 있을 때 대개 개별 행위, 개별 파업에 적용될 때뿐이고, 그것도 대개 한 도시의 범위 안에서다. 이를테면 앞에서 보았듯이 사회민주당은 바쿠, 바르샤바, 우치, 페테르부르크에서 여러 번 직접 대중파업의 구호를 내어 성공을 거두었다.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전반적 운동에 적용하면 같은 일이 훨씬 덜 성공한다. 게다가 거기서 주도권과 의식적 지도에는 아주 분명한 한계가 그어져 있다. 바로 혁명 동안에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어떤 지도 기관이든 어떤 계기와 어떤 요인이 폭발로 이어질 수 있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를 미리 내다보고 계산하기란 극히 어렵다. 여기서도 주도권과 지도는 마음대로 명령하는 데 있지 않고, 상황에 가능한 한 능숙하게 적응하고 대중의 분위기와 가능한 한 긴밀히 접촉하는 데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러시아의 대중파업에서는 예외 없이 자연발생성의 요소가 추진하는 요소로든 억제하는 요소로든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러시아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아직 젊거나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투쟁의 개별 행위 하나하나에 경제적·정치적·사회적, 일반적·국지적, 물질적·심리적 계기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함께 작용해서 어떤 행위도 계산 문제처럼 정해 놓고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민주주의를 선두로 지도적 역할을 하더라도 들판에서 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기동 훈련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토대가 끊임없이 무너지고 부서지고 움직이는 한가운데서 벌이는 투쟁이다. 요컨대 러시아의 대중파업에서 자연발생성의 요소가 그토록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혁명이란 훈장 노릇으로 가르쳐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러시아에서, 사회민주당이 대중파업을 지휘하기를 그토록 어렵게 하고 시시때때로 변덕스럽게 지휘봉을 그 손에서 쳐 내거나 쥐여 주는 바로 그 혁명이, 그 대신 독일 토론의 이론적 도식에서 「지도」의 주된 걱정거리로 다루어지는 대중파업의 모든 어려움, 곧 「보급」, 「비용 충당」, 「희생」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다는 것을 본다. 물론 혁명은 그것을 노동운동의 최고 지도 기관들이 조용한 비밀 협의회에서 연필을 손에 들고 정리하는 그런 의미로 해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모든 문제의 「정리」는, 혁명이 바로 엄청난 인민 대중을 무대에 올려서, 민사소송 비용을 미리 적어 두듯 그들의 운동 비용을 계산하고 정리하는 일이 모두 전혀 가망 없는 일로 보이게 된다는 데 있다. 물론 러시아의 지도 조직들도 투쟁의 직접적 희생자들을 힘껏 지원하려 한다. 이를테면 8시간 캠페인으로 인한 페테르부르크의 거대한 직장폐쇄의 용감한 희생자들은 몇 주 동안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조치는 혁명의 엄청난 대차대조표에서 바다의 물 한 방울이다. 진정하고 진지한 대중파업 시기가 시작되는 순간, 모든 「비용 계산」은 물 한 잔으로 대양을 퍼내려는 계획으로 바뀐다. 그것은 모든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대중에게 치르게 하는 끔찍한 결핍과 고통의 대양이다. 그리고 혁명기가 이 겉보기에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에 주는 해결은, 그것이 동시에 대중이 가장 날카로운 고통에도 무감각해질 만큼 엄청난 대중적 이상주의를 풀어놓는다는 데 있다. 해고당할 경우를 위해 정확히 정해진 지원금을 미리 보장받기 전에는 노동절 작업 중지에 응하지 않는 노동조합원의 심리로는 혁명도 대중파업도 만들 수 없다. 그러나 혁명기의 폭풍 속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바로 지원을 요구하는 신중한 가장에서 「혁명 낭만주의자」로 바뀐다. 그에게는 투쟁의 이상에 견주면 최고의 재산인 생명조차, 물질적 안락은 말할 것도 없이, 하찮은 가치밖에 없다.
그런데 발생을 명령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비용을 계산하고 충당한다는 의미에서 대중파업의 지도가 혁명기 자체의 일이라면, 그 대신 전혀 다른 의미의 대중파업 지도가 사회민주당과 그 지도 기관들에 돌아간다. 사회민주당은 대중파업의 기술적 측면, 그 메커니즘을 놓고 골머리를 앓는 대신, 혁명기 한가운데서도 정치적 지도를 맡도록 부름받았다. 투쟁에 구호와 방향을 주는 것, 투쟁의 모든 국면과 모든 순간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미 존재하고 이미 풀려나 발휘된 힘 전체가 실현되고 당의 투쟁 자세에서 표현되도록 정치투쟁의 전술을 짜는 것, 사회민주당의 전술이 그 결단성과 날카로움에서 실제 역관계의 수준 아래에 결코 머물지 않고 오히려 이 관계를 앞질러 나가도록 하는 것, 이것이 대중파업 시기에 「지도」의 가장 중요한 과제다. 그리고 이 지도는 저절로 어느 정도 기술적 지도로 바뀐다. 사회민주당의 일관되고 단호하며 전진하는 전술은 대중 속에 확신과 자신감과 투쟁 의욕을 불러일으킨다. 흔들리고 맥없으며 프롤레타리아트를 과소평가하는 데 바탕을 둔 전술은 대중을 마비시키고 혼란스럽게 한다. 앞의 경우에는 대중파업이 「저절로」, 그리고 언제나 「제때」 터지고, 뒤의 경우에는 지도부가 직접 대중파업을 호소해도 때로 아무 성과가 없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은 둘 모두에 대해 웅변적인 예를 제공한다.
VIII
독일 노동계급을 기다리고 있는, 조만간 닥쳐올 거대한 투쟁의 시기에 가장 중요한 요건은, 전술의 완전한 결단성과 일관성 외에 가능한 한 큰 행동 능력, 곧 프롤레타리아 대중 가운데 지도적인 사회민주주의 부분의 가능한 한 큰 통일이다. 그런데 더 큰 대중 행동을 준비하려는 최초의 미약한 시도들이 이미 이 점에서 중요한 폐단 하나를 곧바로 드러냈다. 노동운동의 두 조직, 곧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완전한 분리와 독립화가 그것이다.
러시아 대중파업을 자세히 살펴보아도, 독일 자체의 사정을 보아도 분명한 것은, 어떤 더 큰 대중 행동이든 일회적 시위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투쟁 행동이 되려면 결코 이른바 정치적 대중파업으로 생각될 수 없다는 점이다. 독일에서 그런 행동에는 노동조합도 사회민주당과 꼭 마찬가지로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상상하듯 사회민주당이 훨씬 작은 조직이라 125만 노동조합원의 협력에 기대야 하고 「그들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훨씬 더 깊은 데 있다. 모든 직접적 대중 행동, 공공연한 계급투쟁의 모든 시기는 동시에 정치적이면서 경제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어떤 계기로든 어떤 시점에서든 거대한 정치투쟁, 대중파업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동시에 독일에서 거대한 노동조합 투쟁의 시대를 열 것이고, 이때 사건들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운동에 동의했는지 아닌지를 조금도 묻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옆으로 비켜서거나 심지어 운동에 저항하려 한다면, 그런 태도의 결과는 오직, 비슷한 경우의 당 지도자들과 꼭 마찬가지로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사건의 물결에 그냥 옆으로 밀려나고 대중의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이 그들 없이 치러지는 것뿐일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분리와 그 둘의 독립화는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것이기는 하나 의회주의 시기의 인위적 산물일 뿐이다. 한편으로 여기서는 부르주아 사회의 조용하고 「정상적인」 흐름 속에서 경제투쟁이 분산되어 개별 기업마다, 개별 생산 부문마다 수많은 개별 투쟁으로 해체된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투쟁은 대중 자신이 직접행동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의 형태에 걸맞게 대의의 방식으로, 입법 대의 기관에 압력을 가하는 방식으로 이끌어진다. 혁명적 투쟁의 시기가 오면, 곧 대중이 싸움터에 나타나면, 경제투쟁의 분산도 정치투쟁의 간접적 의회 형태도 사라진다. 혁명적 대중 행동 속에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은 하나이고, 노동운동의 두 개의 분리된, 완전히 독립된 형태로서의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 사이의 인위적 칸막이는 그냥 씻겨 나간다. 그런데 혁명적 대중운동에서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은 의회주의 시기에도 실제 사정으로서 들어맞는다. 노동계급에게는 경제적 계급투쟁과 정치적 계급투쟁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계급투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 안에서 자본주의적 착취를 제한하는 것과 부르주아 사회와 함께 착취를 폐지하는 것을 동시에 겨냥하는 하나의 계급투쟁만이 있다.
계급투쟁의 이 두 측면이 의회주의 시기에 기술적 이유로 서로 갈라진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나란히 진행되는 두 행동이 아니라 노동계급 해방투쟁의 두 국면, 두 단계일 뿐이다. 노동조합 투쟁은 노동운동의 현재의 이익을, 사회민주주의 투쟁은 미래의 이익을 아우른다. 『공산당 선언』은 공산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들의 여러 집단 이익(민족적 이익, 지역적 이익)에 맞서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통 이익을 대표하고, 계급투쟁의 여러 발전 단계에서 운동 전체의 이익, 곧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의 최종 목표를 대표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노동조합은 집단 이익과 노동운동의 한 발전 단계를 대표한다. 사회민주당은 노동계급과 그 해방의 이익을 전체로서 대표한다. 그러므로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의 관계는 부분과 전체의 관계이고, 노동조합 지도자들 사이에서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이론이 그토록 호응을 얻는다면, 그것은 노동조합의 본질 자체와 노동계급의 전반적 해방투쟁에서 노동조합이 하는 역할을 근본적으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이 나란히 행동한다는, 그리고 둘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이 이론은 완전히 허공에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역사적 뿌리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사회민주당의 정치투쟁이 의회 투쟁에 흡수되는 것처럼 보이는 부르주아 사회의 조용하고 「정상적인」 시기의 착각에 바탕을 둔다. 그런데 노동조합 투쟁을 보완하는 짝인 의회 투쟁은 노동조합 투쟁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부르주아 사회질서의 토대 위에서 벌이는 투쟁이다. 노동조합이 경제적 개혁 작업이듯 의회 투쟁은 그 본성상 정치적 개혁 작업이다. 노동조합이 경제적 현재 작업이듯 의회 투쟁은 정치적 현재 작업이다. 의회 투쟁도 노동조합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전체의 한 국면, 한 발전 단계일 뿐이며, 그 계급투쟁의 최종 목표는 의회 투쟁도 노동조합 투쟁도 똑같이 넘어선다. 그러므로 의회 투쟁과 사회민주주의 정치의 관계도 노동조합 활동과 꼭 마찬가지로 부분과 전체의 관계다. 오늘날 사회민주당은 바로 의회 투쟁과 노동조합 투쟁을 부르주아 사회질서의 폐지를 겨냥한 하나의 계급투쟁으로 묶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조합이 사회민주당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이론은 단순한 이론적 오해나 착각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정치투쟁을 실제로도 의회 투쟁으로 축소하고 사회민주당을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정당에서 소부르주아 개혁 정당으로 바꾸려는 사회민주당 기회주의 날개의 잘 알려진 경향의 표현이다.[1*] 사회민주당이 노동조합의 동등권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그로써 기회주의 조류의 대표자들이 오래전부터 추구해 온 저 변신을 간접적으로, 말없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노동운동 안의 관계를 그렇게 옮겨 놓는 일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불가능하다. 노동조합은 사회민주당의 일부일 뿐이라는 이론적 관계는 바로 독일에서 사실 속에서, 살아 있는 실천 속에서 그 고전적 예시를 찾아내며, 그것은 세 방향으로 드러난다. 첫째, 독일 노동조합은 직접적으로 사회민주당의 산물이다. 지금의 독일 노동조합 운동의 시작을 만든 것도, 그것을 키운 것도 사회민주당이며, 오늘날까지 그 지도자들과 조직의 가장 활동적인 담지자들을 공급하는 것도 사회민주당이다. 둘째, 독일 노동조합은 사회민주주의 학설이 노동조합 실천의 혼을 이룬다는 의미에서도 사회민주당의 산물이다. 노동조합이 모든 부르주아 노동조합과 종교 노동조합보다 우월한 것은 계급투쟁의 사상 덕분이다. 그 실천적 성공, 그 힘은 그 실천이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론에 비추어지고 편협한 경험주의의 저지대에서 들어 올려졌다는 사정의 결과다. 독일 노동조합의 「실천 정치」의 힘은 자본주의 질서의 더 깊은 사회적·경제적 연관에 대한 통찰에 있다. 그런데 이 통찰을 노동조합은 다름 아닌, 실천에서 자신이 딛고 서 있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론에 빚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조합을 사회민주주의 이론에서 해방하려는, 사회민주주의에 맞서는 다른 「노동조합 이론」을 찾으려는 시도는 노동조합 자신과 그 미래의 관점에서 보면 자살 시도에 다름 아니다. 노동조합 실천을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론에서 떼어 내는 것은 독일 노동조합에게 모든 부르주아 노동조합 부류에 대한 우월성 전체를 곧바로 잃는 것, 지금까지의 높이에서 갈피 없는 더듬기와 순전하고 평범한 경험주의의 수준으로 추락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끝으로 셋째, 노동조합은, 그 지도자들은 차츰 이 의식을 잃어 왔지만, 그 수적 힘에서도 직접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선동의 산물이다. 물론 어떤 지방에서는 노동조합 선동이 사회민주주의 선동보다 앞섰고 지금도 앞서며, 어디서나 노동조합 활동이 당 활동의 길도 닦는다. 효과의 관점에서 보면 당과 노동조합은 완전히 서로 손발을 맞추어 일한다. 그러나 독일 계급투쟁의 그림을 전체로서, 그리고 그 더 깊은 연관 속에서 살펴보면 관계는 크게 달라진다. 어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125만 조합원이라는 자랑스러운 높이에서, 아직 50만도 채 못 되는 사회민주당의 초라한 조직 당원을 다소 의기양양하게 내려다보며, 사회민주당 대열에서 노동조합 발전의 전망을 아직 비관적으로 생각하던 10~12년 전의 시절을 상기시키기를 즐긴다. 그들은 이 두 사실, 곧 노동조합원의 높은 숫자와 사회민주당 조직원의 낮은 숫자 사이에 어느 정도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수천, 또 수천의 노동자들이 당 조직에 가입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기 때문이다. 이론대로라면 모든 노동자가 이중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두 가지 집회에 나가고, 두 가지 회비를 내고, 두 가지 노동자 신문을 읽는 등등.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이미 높은 수준의 지성과, 순전히 노동운동에 대한 의무감에서 날마다 시간과 돈을 바치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상주의가 필요하고, 끝으로 당 조직에 속함으로써만 채울 수 있는 본래의 당 생활에 대한 열정적 관심도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당 생활이 내용 풍부하고 매력적이며 노동자의 생활수준이 더 높은 대도시에서, 사회민주주의 노동자 가운데 가장 깨어 있고 가장 지적인 소수에게는 들어맞는다. 그러나 대도시 노동자 대중의 더 넓은 층에서, 그리고 지방, 지역 정치 생활이 독자적이지 못하고 수도의 사건들의 반영에 지나지 않아 당 생활도 빈약하고 단조로우며, 끝으로 노동자의 경제적 생활수준이 대개 아주 궁색한 작고 아주 작은 소읍들에서는 이중의 조직 관계를 실행하기가 매우 어렵다.
대중 속에서 사회민주주의 성향을 지닌 노동자에게 문제는 그때 저절로, 그가 바로 자기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해결된다. 자기 경제투쟁의 직접적 이익은, 이 투쟁의 본성 자체로 말미암아, 직업 조직에 가입하는 것 말고는 달리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여기서 흔히 생활수준을 크게 희생하며 내는 회비는 그에게 직접적이고 눈에 보이는 이득을 가져다준다. 그런데 그의 사회민주주의 성향은 특별한 당 조직에 속하지 않고도 발휘할 수 있다. 의회 선거에서 투표함으로써, 사회민주당 대중 집회에 참석함으로써, 대의 기관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한 연설에 관한 보도를 지켜봄으로써, 당 언론을 읽음으로써. 이를테면 베를린의 사회민주당 유권자 수와 『전진』 구독자 수를 조직 당원 수와 비교해 보라.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이것이다. 대중 속의 평균적인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노동자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복잡하고 미묘한 이른바 두 영혼 이론[옮긴이 3]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노동조합 안에서도 바로 사회민주주의적으로 조직되어 있다고 느낀다. 중앙 연합들이 공식적인 당 간판을 달고 있지 않더라도, 대중 속의 노동자는 어느 도시, 어느 소읍에서나 자기 노동조합의 선두에서 가장 활동적인 지도자로, 공적 생활에서 동지로, 사회민주주의자로 알고 있는 바로 그 동료들을 본다. 때로는 사회민주당의 제국의회·주의회·시의회 의원으로, 때로는 사회민주당 연락 위원, 선거 협회 집행부, 당 신문 편집인, 당 서기로, 또는 그저 연설가와 선동가로. 또 그는 자기 노동조합의 선동에서 대개, 사회민주주의 선동에서도 알고 있어 그에게 소중하고 이해하기 쉬워진, 자본주의적 착취와 계급관계에 관한 같은 생각을 듣는다. 아니, 노동조합 집회에서 가장 많이 나서고 가장 인기 있는 연설가들이 바로 이름난 사회민주주의자들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작용하여, 계급의식을 지닌 평균적 노동자에게 노동조합으로 조직됨으로써 자기 노동자 정당에도 속하고 사회민주주의적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독일 노동조합의 본래의 흡인력이 있다. 중앙 연합들이 오늘날의 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중립이라는 겉모습 덕분이 아니라 그 본질의 사회민주주의적 현실 덕분이다. 이것은 정치적 「중립」의 필요성을 근거 짓는 데 쓰이는 바로 그것, 곧 가톨릭, 히르슈·둥커 등 여러 부르주아 정당 계열 노동조합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로는 도저히 반박되지 않는다. 기독교, 가톨릭, 개신교, 자유사상 노동조합 가운데 어디에든 가입할 완전한 선택의 자유를 지닌 독일 노동자가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아닌 「자유 노동조합」을 고르거나 심지어 그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온다면, 그것은 오직 그가 중앙 연합들을 근대 계급투쟁의 명백한 조직으로, 또는 독일에서 같은 말인 사회민주주의 노동조합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일부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존재하는 「중립」의 겉모습은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대중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노동조합 운동의 행운의 전부다. 만일 저 「중립」의 겉모습, 노동조합이 사회민주당에서 멀어지고 떨어져 나가는 일이 언젠가 진실이 되고, 특히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눈에 현실이 된다면, 노동조합은 곧바로 경쟁하는 부르주아 단체들에 대한 그 모든 장점을, 그와 함께 그 흡인력과 생기를 주는 불길을 잃을 것이다. 이 말은 널리 알려진 사실들로 설득력 있게 증명된다. 노동조합의 정당 정치적 「중립」이라는 겉모습은, 사회민주당 자체가 대중에게 아무 신용도 없고, 대중의 눈에 사회민주당이라는 오명이 노동자 조직에 득보다 해가 되며, 한마디로 노동조합이 전혀 깨이지 않은 부르주아 성향의 대중 자체에서 처음부터 부대를 모집해야 하는 나라에서라면 유인 수단으로서 탁월한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세기 내내 그런 나라의 본보기였고 오늘날에도 상당한 정도로 그런 나라는 영국이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정당 관계가 전혀 다르다. 사회민주당이 가장 강력한 정당이고 그 흡인력이 300만이 넘는 프롤레타리아의 대군으로 나타나는 나라에서, 사회민주당이라는 꺼림칙한 오명이니 노동자 투쟁 조직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필요성이니 하고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독일의 사회민주당 유권자 수와 노동조합 조직의 숫자를 나란히 놓기만 해도, 독일 노동조합이 영국처럼 깨이지 않은 부르주아 성향의 대중에게서가 아니라 이미 사회민주당이 흔들어 깨워 계급투쟁 사상으로 끌어들인 프롤레타리아 대중, 곧 사회민주당 유권자 대중에게서 부대를 모집한다는 것을 어린아이에게도 분명히 알려 주기에 충분하다. 어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분개하며, 이것은 「중립 이론」의 소도구인데, 노동조합을 사회민주당의 신병 학교로 여기는 생각을 물리친다. 실제로 그들에게 그토록 모욕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이 요구는 독일에서는, 사정이 대개 거꾸로라는 단순한 이유로 공상이 되어 버렸다. 독일에서 노동조합의 신병 학교를 이루는 것은 사회민주당이다. 노동조합의 조직 사업이 대개 아직 매우 어렵고 고되기는 하지만, 몇몇 지방과 경우를 빼면 대체로 토양이 이미 사회민주주의의 쟁기로 일구어졌을 뿐 아니라, 수확이 잘되려면 노동조합의 씨앗 자체와 마침내 씨 뿌리는 사람도 「붉어야」, 곧 사회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노동조합의 세력 숫자를 사회민주당 조직이 아니라, 유일하게 올바른 것인 사회민주당 유권자 대중과 비교해 보면, 이 점에 관한 통념과 크게 어긋나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곧 「자유 노동조합」은 오늘날 실제로는 아직 독일의 계급의식 있는 노동자 가운데 소수를 대표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것은 125만 조직원으로도 사회민주당이 흔들어 깨운 대중의 절반도 아직 다 끌어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든 사실들에서 나오는 가장 중요한 결론은, 독일에서 다가오는 대중투쟁을 위해 무조건 필요한 노동조합 노동운동과 사회민주주의 노동운동의 완전한 통일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민주당의 기반이자 동시에 노동조합의 기반을 이루고, 그 의식 속에서 운동의 두 측면이 정신적 통일로 녹아든 넓은 대중 속에 구현되어 있다. 이런 사정에서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 사이의 이른바 대립은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 관리 일부 사이의 대립으로 쪼그라들며, 그것은 동시에 노동조합 안에서 노동조합 지도자들 가운데 이 일부와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 대중 사이의 대립이다.
지난 15년 동안, 특히 1895~1900년의 경제 호황기에 독일 노동조합 운동이 크게 성장하면서 저절로 노동조합의 큰 독립화, 투쟁 방법과 지도의 전문화, 마침내 정식 노동조합 관리층의 등장이 뒤따랐다. 이 모든 현상은 15년에 걸친 노동조합 성장의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역사적 산물이자, 독일의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무풍의 산물이다. 그것들은 어떤 폐단과 떼려야 뗄 수 없지만, 의심할 바 없이 역사적으로 필요한 악이다. 그러나 발전의 변증법은 바로, 노동조합 성장의 이 필요한 촉진 수단들이 조직의 일정한 높이에서, 사정의 일정한 성숙도에서 그 반대물, 곧 그 이상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바뀌게 만든다.
노동조합 지도자로서의 직업 활동의 전문화와, 조용한 시기의 분산된 경제투쟁에 따르는 자연히 좁은 시야는 노동조합 관리들을 너무도 쉽게 관료주의와 어떤 견해의 편협함으로 이끈다. 그런데 이 둘은 노동조합 운동 자체의 미래에 극히 치명적일 수 있는 일련의 경향으로 드러난다.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조직의 과대평가가 속한다. 조직이 목적을 위한 수단에서 차츰 자기 목적으로, 투쟁의 이익이 그것에 종속되어야 하는 최고선으로 바뀌는 것이다. 공공연히 인정되는 저 안정 욕구, 곧 더 큰 위험과 노동조합의 존립에 대한 짐작된 위협과 더 큰 대중 행동의 불확실성 앞에서 움츠러드는 욕구도 여기서 설명되며, 노동조합 투쟁 방식 자체와 그 전망과 성과의 과대평가도 그렇다. 끊임없이 경제적 소규모 전쟁에 몰두하며, 아무리 작은 경제적 성과라도, 임금 인상이나 노동시간 단축 하나하나라도 그 높은 가치를 노동자 대중에게 납득시키는 것을 과제로 삼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차츰 자신들이 더 큰 연관과 전체 상황에 대한 조망을 잃게 된다. 그래야만, 이를테면 어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그토록 큰 만족감을 가지고 지난 15년의 성과, 수백만 마르크의 임금 인상을 가리키면서, 거꾸로 메달의 다른 면, 곧 같은 시기에 곡물 폭리, 조세·관세 정책 전체, 집세를 터무니없이 끌어올린 토지 폭리로 인해 프롤레타리아 생활수준이 엄청나게 짓눌린 일, 한마디로 15년에 걸친 노동조합 투쟁의 성과를 상당 부분 다시 상쇄해 버린 부르주아 정치의 모든 객관적 경향에 강조점을 두지 않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현재 작업과 그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이 작업에 대한 비판과 그 한계에 주된 무게를 두는 온전한 사회민주주의적 진리에서, 이렇게 하여 일상 투쟁의 긍정적 측면만을 내세우는 반쪽 노동조합적 진리가 잘라 다듬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부르주아 사회질서가 노동조합 투쟁에 그어 놓은 객관적 한계에 대한 침묵에서, 이 한계를 노동운동의 최종 목표와 관련지어 지적하는 모든 이론적 비판에 대한 직접적 적대가 생겨난다. 무조건적 찬양과 끝없는 낙관이 모든 「노동조합 운동의 친구」의 의무가 된다. 그런데 사회민주주의의 관점은 바로 무비판적인 의회적 낙관과 싸우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무비판적인 노동조합적 낙관과 싸우는 데 있으므로, 마침내 사회민주주의 이론 자체에 맞서는 전선이 형성된다. 사람들은 「새로운 노동조합 이론」, 곧 사회민주주의 학설과 반대로 자본주의 질서의 토대 위에서 노동조합 투쟁에 경제적 상승의 전혀 무제한적 전망을 열어 줄 이론을 더듬어 찾는다. 물론 그런 이론은 이미 꽤 오래전부터 있다. 독일에서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 사이에 쐐기를 박고 노동조합을 부르주아의 토대로 꾀어 넘기려는 의도로 공공연히 세워진 좀바르트 교수의 이론이 그것이다.
이런 이론적 경향과 밀접히 연관된 것이 지도자와 대중의 관계에서 일어난 전환이다. 의심할 바 없는 결함을 지닌 지역 위원회들의 합의제 지도 대신 노동조합 관리의 사무적 지도가 들어선다. 그로써 주도권과 판단력은 말하자면 그의 직업적 전문 분야가 되고, 대중에게는 주로 규율이라는 더 수동적인 덕목이 맡겨진다. 관리층의 이런 그늘진 면은 분명 당에도 상당한 위험을 품고 있으며, 그 위험은 최근의 새 제도인 지역 당 서기 임용에서 아주 쉽게 생겨날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 대중이 이 서기들이 순전한 집행 기관으로 남고 지역 당 생활의 주도권과 지도의 정당한 담지자로 여겨지지 않도록 유의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에서는 사안의 본성상, 정치투쟁 자체의 성격상 관료주의에 노동조합 생활에서보다 좁은 한계가 그어져 있다. 노동조합에서는 바로 임금투쟁의 기술적 전문화, 이를테면 복잡한 단체협약의 체결 따위 때문에, 조직원 대중에게 흔히 「업계 생활 전체에 대한 조망」이 없다는 판정이 내려지고, 그로써 그들의 판단 무능력이 근거 지어진다. 이런 견해가 피워 낸 꽃이 특히, 노동조합 실천의 전망과 가능성에 대한 모든 이론적 비판이 대중의 노동조합 신앙심에 위험이 된다는 이유로 그것을 금기시하는 논법이다. 여기서는 노동자 대중이 노동조합 투쟁의 구원을 맹목적이고 어린아이처럼 믿을 때에만 조직으로 끌어들이고 붙잡아 둘 수 있다는 견해에서 출발한다. 기존 질서의 모순과 그 발전의 복잡한 본성 전체에 대한 대중의 통찰에, 자기 계급투쟁의 모든 계기와 단계에 대한 대중의 비판적 태도에 바로 그 영향력의 바탕을 두는 사회민주당과 반대로, 이 뒤집힌 이론에 따르면 노동조합의 영향력과 힘은 대중의 무비판과 판단력 부재 위에 세워진다. 「인민에게서 믿음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어떤 노동조합 관리들이 노동조합 운동의 객관적 결함에 대한 모든 비판을 이 운동 자체에 대한 습격으로 낙인찍는 원칙이다. 그리고 끝으로 노동조합 관리들 사이의 이런 전문화와 관료주의의 결과가 사회민주당에 대한 노동조합의 강한 독립화와 「중립」이기도 하다. 노동조합 조직의 외적 독립은 그 성장과 함께 자연스러운 조건으로서, 정치적 투쟁 형태와 노동조합적 투쟁 형태 사이의 기술적 분업에서 자라나는 관계로서 생겨났다. 독일 노동조합의 「중립」은 그것대로 반동적인 결사법, 곧 프로이센·독일 경찰국가의 산물로 생겨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 관계 모두 그 본성을 바꾸었다. 경찰이 강요한 노동조합의 정치적 「중립」 상태에서 나중에, 노동조합 투쟁의 본성 자체에 근거한 필연이라는, 자발적 중립의 이론이 꾸며졌다. 그리고 통일된 사회민주주의 계급투쟁 안의 실천적 분업에 바탕을 두어야 할 노동조합의 기술적 독립은, 노동조합이 사회민주당에서, 그 견해와 그 지도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이른바 사회민주당과의 「동등권」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사회민주당에서 떨어져 나가고 그와 대등하다는 이 겉모습은 주로 노동조합 관리들 속에 구현되고, 노동조합의 행정 기구가 그것을 키운다. 겉으로는 노동조합 관리들의 참모진 전체, 완전히 독립된 중앙 본부, 수많은 직업 언론, 끝으로 노동조합 대회가 나란히 존재함으로써, 사회민주당의 행정 기구, 곧 당 집행부, 당 언론, 당대회와 완전히 나란한 듯한 겉모습이 만들어졌다.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이 대등하다는 이 환상은 무엇보다도, 사회민주당 당대회와 노동조합 대회에서 부분적으로 아주 비슷한 의제를 다루고 같은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심지어 정반대의 결의를 내리는 괴이한 현상으로까지 이어졌다. 노동운동의 일반적 이익과 과제를 대표하는 당대회와, 직업적 일상 투쟁의 특수한 문제와 이익이라는 훨씬 좁은 영역을 다루는 노동조합 회의 사이의 자연스러운 분업에서, 노동운동의 같은 일반적 문제와 이익에 관해 이른바 노동조합적 세계관과 사회민주주의적 세계관 사이의 인위적 분열이 만들어졌다.[2*]
이렇게 하여, 아래, 곧 넓은 프롤레타리아 대중 속에서는 사회민주당과 완전히 하나인 바로 그 노동조합 운동이, 위, 곧 행정 상부 구조에서는 사회민주당에서 날카롭게 떨어져 나와 그에 맞서는 독립된 제2의 강대국으로 일어서는 기묘한 상태가 생겨났다. 그로써 독일 노동운동은 바닥과 몸통은 하나의 덩어리로 되어 있지만 두 꼭짓점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이중 피라미드라는 독특한 형태를 띠게 된다.
위에서 말한 것으로 보아, 다가올 정치적 계급투쟁을 생각해서도, 노동조합 자신의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서도 무조건 필요한 독일 노동운동의 탄탄한 통일을 자연스럽고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는 길이 어떤 것인지는 분명하다. 노동운동의 개별 문제를 놓고 사회민주당 지도부와 노동조합 중앙 본부가 간헐적으로나 주기적으로 협상하는 방식으로 바라는 통일을 이루려 하는 것만큼 잘못되고 가망 없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바로 노동운동의 두 형태의 최상층 조직 수뇌부가 그 분리와 독립화를 자기 안에 구현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들 자체가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동등권」과 병존이라는 환상의 담지자다. 당 집행부와 총위원회의 결합으로 둘의 통일을 이루려 하는 것은 거리가 가장 멀고 건너가기가 가장 어려운 바로 그 자리에 다리를 놓으려는 것과 같을 것이다.[3*] 노동운동의 진정한 통일을 보증하는 것은 위, 곧 조직 지도부의 수뇌와 그들의 연방적 동맹이 아니라 아래, 곧 조직된 프롤레타리아 대중이다. 100만 노동조합원의 의식 속에서 당과 노동조합은 실제로 하나다. 그것들은 다양한 형태를 띤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민주주의적 해방투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저절로,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 일부 사이에 생겨난 마찰을 없애고 둘의 상호 관계를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의식에 맞출 필요성, 곧 노동조합을 다시 사회민주당에 결합할 필요성이 나온다. 이로써 표현되는 것은 실제 발전의 종합일 뿐이다. 그 발전은 처음에 노동조합이 사회민주당에 포함되어 있던 데서 노동조합이 사회민주당에서 떨어져 나오는 데로 나아갔고, 그 뒤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이 모두 크게 성장하는 시기를 거쳐 다가올 거대한 프롤레타리아 대중투쟁의 시기를 준비했으며, 그럼으로써 둘 모두의 이익을 위해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재결합을 필연으로 만들었다.
물론 여기서 문제는 지금의 노동조합 구조 전체를 당 속에 해체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문제는 노동운동 전체와 그 노동조합적 부분 현상 사이의 실제 관계에 걸맞은 자연스러운 관계를 사회민주당 지도부와 노동조합 지도부 사이에, 당대회와 노동조합 대회 사이에 세우는 것이다. 그런 전환은 달리 될 수 없듯이 노동조합 지도자 일부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노동자 대중이 자기 판단력과 행동력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그럼으로써 거대한 투쟁과 거대한 과제의 시대를 위한 성숙함을 보여 줄 때가 무르익었다. 그 시대에는 그들, 곧 대중이 행동하는 합창단이고, 지도부는 「대사가 있는 인물」, 곧 대중 의지의 통역자일 뿐이어야 한다.
노동조합 운동은 노동조합 지도자 소수의 완전히 설명할 수 있지만 그릇된 환상 속에 비치는 그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으로 끌어들여진 프롤레타리아 대다수의 의식 속에 살아 있는 그것이다. 이 의식 속에서 노동조합 운동은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한 조각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그대로 보이기를 감행하라.」
페테르부르크, 1906년 9월 15일
주석
- 제1장. 프리드리히 엥겔스, 「일하는 바쿠닌주의자들」, 『폴크스슈타트』에서 옮긴 『국제 문제』, 20쪽. ↩
- 옮긴이 1. 실러의 희곡 『군도』(Die Räuber)에서 주인공 카를 모어가 연인 아말리아를 제 손으로 죽이는 결말을 빗댄 말. 대중파업이라는 관념을 죽이는 것도 마르크스주의 자신이라는 뜻이다. ↩
- 옮긴이 2. 「붉은 수탉」은 독일어에서 방화를 이르는 관용어로, 1905년 리플란트(지금의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남부)에서 농민들이 독일계 귀족의 영지를 불태운 봉기를 가리킨다. 「모스크바 산업가 정당」은 10월 선언 뒤 모스크바에서 결성된 상공업당을 말한다. ↩
- 1*. 1906년 6월 첫 두 주 동안에만 다음과 같은 임금투쟁이 벌어졌다.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오데사, 민스크, 빌나, 사라토프, 모길료프, 탐보프의 인쇄공이 8시간 노동제와 일요 휴무를 요구하며 파업했다. 오데사, 니콜라예프, 케르치, 크림, 캅카스, 볼가 선단, 크론시타트, 바르샤바, 프워츠크에서 선원들이 노동조합 인정과 체포된 노동자 대표의 석방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벌였다. 사라토프, 니콜라예프, 차리친, 아르한겔스크, 니즈니노브고로드, 리빈스크의 항만 노동자도 파업했다. 제빵공은 키예프, 아르한겔스크, 비아위스토크, 빌나, 오데사, 하리코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라돔, 티플리스에서, 농업 노동자는 베르흐네드네프롭스크, 보리소프, 심페로폴 군, 포돌스크, 툴라, 쿠르스크 현, 코즐로프, 리포베츠 군, 핀란드, 키예프 현, 옐리사베트그라드 군에서 파업했다. 이 기간에 여러 도시에서는 거의 모든 업종이 동시에 파업했다. 사라토프, 아르한겔스크, 케르치, 크레멘추크가 그렇다. 바흐무트에서는 탄전 전체의 탄광 노동자가 총파업을 벌였다. 다른 도시들에서는 앞에서 말한 두 주 사이에 임금 운동이 차례로 모든 업종을 사로잡았다. 키예프, 페테르부르크, 바르샤바, 모스크바,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지역 전체가 그렇다. 파업의 목적은 어디서나 노동시간 단축, 일요 휴무, 임금 요구였다. 파업은 대부분 승리로 끝났다. 지역 보고들은 이 파업들이 일부는 처음으로 임금 운동에 참여한 노동자층까지 사로잡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 주, R. L.) ↩
- 1*. 독일 사회민주당 안에 이런 경향이 있다는 것은 흔히 부정되므로, 기회주의 조류가 최근 자신의 본래 목표와 바람을 정식화한 솔직함은 환영해야 한다. 올해 9월 10일 마인츠의 한 당 집회에서 다비트 박사가 제출한 다음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저자 주, R. L.) ↩사회민주당은 「혁명」이라는 개념을 폭력적 전복의 의미가 아니라 평화적인 발전의 의미, 곧 새로운 경제 원리의 점진적 관철로 이해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마인츠 공개 당 집회는 모든 「혁명 낭만주의」를 거부한다.
집회는 정치권력의 쟁취를 사회민주주의의 사상과 요구를 위해 인민의 다수를 쟁취하는 것 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보지 않는다. 그것은 폭력적 수단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정치·경제·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정신적 선전과 실천적 개혁 작업을 통해 머리를 혁명화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는 쟁취다.
사회민주당은 비합법 수단과 전복보다 합법 수단으로 훨씬 더 잘 번성한다는 확신에서, 집회는 「직접적 대중 행동」을 전술 원칙으로 거부하고 의회적 개혁 행동의 원칙을 고수한다. 곧 집회는 당이 앞으로도 입법과 유기적 발전의 길을 통해 점차 우리의 목표에 이르도록 진지하게 힘쓰기를 바란다.
물론 이 개혁적 투쟁 방법의 근본 전제는 제국과 각 주에서 무산 인민 대중이 입법에 참여할 가능성이 줄어들지 않고 완전한 동등권에 이르기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집회는, 다른 모든 수단이 실패할 경우 노동자들이 자신의 합법적 권리에 대한 습격을 막고 더 많은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짧게든 길게든 노동을 거부하는 것도 노동자의 다툴 수 없는 권리라고 본다.
그러나 정치적 대중파업은 그것이 엄격히 합법적인 궤도 안에 머물고 파업 참가자 쪽에서 무력이 개입할 정당한 빌미를 주지 않을 때에만 노동자들에게 승리로 수행될 수 있으므로, 집회는 이 투쟁 수단의 사용을 위한 유일하게 필요하고 효과적인 준비를 정치·노동조합·협동조합 조직의 확충에서 찾는다. 그래야만 대중파업의 성공적 진행을 보장하는 전제, 곧 목적의식적 규율과 알맞은 경제적 뒷받침을 넓은 인민 대중 속에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옮긴이 3. 노동자가 노동조합원으로서는 정치적으로 「중립」이고 유권자나 당원으로서는 사회민주주의자라는 식으로 두 정체성을 나누는 노동조합 중립론을 비꼰 말. 괴테 『파우스트』의 「아, 내 가슴속에는 두 영혼이 산다」에서 온 표현이다. ↩
- 2*. 저작집 편집자에 따르면 원고에는 여기에 다음 대목이 있었다. 「그런데 이 비정상적 상태가 일단 만들어지면, 그것은 점점 더 자라나고 날카로워지는 자연스러운 경향을 지닌다. 노동조합 대회와 당대회의 의제를 나란히 다루는 나쁜 관습이 생긴 뒤로는, 노동조합 대회의 존재 자체가 사회민주당에서 점점 더 강하게 선을 긋고 멀어지게 하는 자연스러운 자극이 된다. 자신과 남들 앞에서 제 「독립성」을 증명하기 위해, 당대회의 입장을 그냥 되풀이함으로써 제 쓸모없음이나 굴종을 증명하지 않기 위해, 잘 알려져 있듯이 주로 관리들의 대회인 노동조합 대회는 본능적으로 갈라놓는 것, 「특수하게 노동조합적인 것」을 내세우려 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이제는 노동조합의 나란한 독립 중앙 지도부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심리적으로, 걸음마다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대한 제 독립성을 느끼게 하고 당과의 모든 접촉을 무엇보다 「권한의 경계」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
- 3*. 저작집 편집자에 따르면 원고에는 여기에 다음 대목이 있었다. 「당과 노동조합 사이의 이런 종류의 결합, 곧 매번 강대국 대 강대국으로 협상하는 것이 체제가 된다면, 그것은 바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운동 전체와 이 운동의 한 부분 현상 사이의 연방적 관계, 비정상으로서 없애야 할 그 관계를 성스럽게 떠받드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 최고 기관 사이의 외교적·연방적 관계는 관계를 점점 더 멀어지고 식게 할 뿐이고, 늘 새로운 마찰의 원천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안의 본성에 있다. 이 관계의 형식 자체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해방투쟁의 경제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을 조화롭게 통합한다는 큰 문제가 린덴 거리와 엥엘 강변의 「기관들」 사이의 「좋은 이웃」 관계라는 하찮은 문제로 바뀌고, 노동운동의 큰 관점이 사소한 서열 배려와 민감함에 가려진다. 외교적 기관 방식의 첫 시험, 곧 대중파업 문제를 둘러싼 당 집행부와 총위원회의 협상은 이미 이 방식이 가망 없다는 충분한 증거를 내놓았다. 그리고 최근 총위원회가 개별 사안에서 자신과 당 집행부 사이의 협의가 때로는 이쪽에서, 때로는 저쪽에서 여러 번 요청되었고 실제로 열렸다고 밝혔다면, 이 확언은 상호 예절의 관점에서는 아주 안심되고 고무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다가올 심각한 시대를 앞두고 자기 투쟁의 모든 문제를 좀 더 깊이 파악해야 하는 독일 노동운동은 이 중국식 관료주의를 옆으로 치우고, 과제의 해결을 사정이 저절로 주는 그곳에서 찾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린덴 거리에는 당 집행부가, 엥엘 강변에는 노동조합 총위원회가 있었다. 옮긴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