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 대한 노동자당의 태도」
인물블라디미르 레닌,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오토 폰 비스마르크,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 니콜라이 베르댜예프, 세르게이 불가코프, 미하일 게르셴존, 표트르 스트루베 용어건신주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변증법적 유물론, 아나키즘, 블랑키즘, 나로드니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반뒤링론, 전투적 무신론자동맹
아래에 싣는, 시노드 예산안 심의 때 국가 두마에서 행한 수르코프 의원의 연설과 이 연설의 초안을 검토하며 우리 두마 의원단에서 벌어진 토론은 극히 중요하고 바로 지금 절실한 문제를 제기했다[1]. 종교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이 오늘날 “사회”의 넓은 층을 사로잡았고, 노동운동에 가까운 인텔리겐치아의 대열과 일부 노동자 층에까지 스며들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회민주당은 종교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밝히고 나설 의무가 무조건 있다.
사회민주당은 자신의 세계관 전체를 과학적 사회주의, 곧 마르크스주의 위에 세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거듭 밝혔듯이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기초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며, 이것은 프랑스의 18세기 유물론과 독일의 포이어바흐(19세기 전반) 유물론의 역사적 전통, 곧 무조건 무신론적이고 모든 종교에 단호히 적대적인 유물론의 전통을 온전히 이어받았다. 마르크스가 원고 상태로 읽은 엥겔스의 『반뒤링론』 전체가 유물론자이자 무신론자인 뒤링을 두고 그의 유물론이 일관되지 못하다는 점, 그가 종교와 종교철학에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 두었다는 점을 폭로한다는 것을 상기하자. 엥겔스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에 관한 저작에서 포이어바흐가 종교와 싸운 것은 종교를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종교를 새로 단장하기 위해서, 새로운 “숭고한” 종교 따위를 지어내기 위해서였다고 그를 나무란다는 것을 상기하자.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마르크스의 이 말은 종교 문제에서 마르크스주의 세계관 전체의 초석이다[2]. 마르크스주의는 현대의 모든 종교와 교회, 온갖 종류의 종교 조직을 언제나 착취를 옹호하고 노동계급을 마비시키는 데 복무하는 부르주아 반동의 기관으로 본다.
그러나 동시에 엥겔스는 사회민주주의보다 “더 왼쪽”이거나 “더 혁명적”이고자 한 사람들이 종교에 대한 선전포고라는 의미에서 무신론을 직접 인정하는 조항을 노동자당 강령에 넣으려 한 시도를 여러 차례 비판했다. 1874년 엥겔스는 코뮌에서 피신해 런던에서 망명자로 살던 블랑키주의자들의 유명한 선언을 논하면서, 종교에 대한 전쟁을 요란하게 선포하는 그들의 행태를 어리석은 짓으로 다루었다. 그는 그러한 선전포고야말로 종교에 대한 관심을 되살리고 종교의 실제적 사멸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엥겔스는 블랑키주의자들이 다음과 같은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탓했다. 억압받는 대중을 종교의 억압에서 실제로 해방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 대중의 계급투쟁뿐이다. 계급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광범한 계층을 의식적이고 혁명적인 사회적 실천으로 전면적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종교와의 전쟁을 노동자당의 정치적 과제로 선포하는 것은 무정부주의적 공문구에 지나지 않는다[3]. 또 1877년 『반뒤링론』에서 엥겔스는 철학자 뒤링이 관념론과 종교에 아주 조금이라도 양보하면 가차 없이 몰아붙였다. 그러면서도 사회주의 사회에서 종교를 금지하자는 뒤링의 이른바 혁명적인 생각 역시 그에 못지않게 단호하게 비판한다. 엥겔스의 말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종교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비스마르크 자신보다 더 비스마르크처럼 구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스마르크가 교권주의자들과 벌인 투쟁의 어리석음을 되풀이하는 것이다(악명 높은 “문화를 위한 투쟁”, 즉 Kulturkampf는 1870년대에 비스마르크가 독일 가톨릭 정당인 “중앙당”에 맞서 가톨릭교를 경찰력으로 박해하는 방식으로 벌인 투쟁이다). 이러한 투쟁으로 비스마르크는 가톨릭교도들의 전투적 교권주의를 강화했을 뿐이며, 진정한 문화의 대의에 해를 끼쳤을 뿐이다. 그는 정치적 구분 대신 종교적 구분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리고 노동계급과 민주주의 세력 일부 계층의 주의를 계급투쟁과 혁명투쟁의 절박한 과제에서 떼어 내어, 가장 피상적이고 부르주아적 기만에 찬 반교권주의 쪽으로 돌려 놓았다. 엥겔스는 극도로 혁명적이고자 했던 뒤링이 비스마르크와 똑같은 어리석음을 다른 형태로 되풀이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노동자당에게 종교와의 정치적 전쟁이라는 모험에 뛰어들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 대신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하고 계몽하는 일, 곧 종교의 사멸로 이어지는 일에 끈기 있게 힘쓸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4]. 이 관점은 독일 사회민주당의 피와 살이 되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예컨대 예수회의 자유와 예수회의 독일 입국 허용을 지지했고, 이런저런 종교에 대한 경찰적 투쟁 수단을 모두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종교를 사적인 일로 선언함” — 에르푸르트 강령(1891년)의 이 유명한 조항이 사회민주당의 이러한 정치 전술을 확고히 다졌다.
이 전술은 이제 벌써 판에 박힌 것이 되어 버렸고, 마르크스주의를 반대 방향, 즉 기회주의 방향으로 왜곡하는 새로운 일탈까지 낳았다. 사람들은 에르푸르트 강령의 이 명제를 이렇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우리 당이 종교를 사적인 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자로서의 우리에게, 당으로서의 우리에게 종교는 사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엥겔스는 이 기회주의적 견해와 직접 논쟁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1890년대에 이 견해에 단호히 맞설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다만 논쟁의 형식이 아니라 적극적인 주장의 형식을 취했다. 엥겔스는 일부러 강조까지 해 가며 이렇게 선언했다. 사회민주당이 종교를 사적인 일로 여기는 것은 국가에 대해서이지, 결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도, 노동자당에 대해서도 아니라는 것이다[5].
이상이 종교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발언의 외적인 역사다. 마르크스주의를 엉성하게 대하는 사람들, 생각할 줄 모르거나 생각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역사는 마르크스주의의 무의미한 모순과 동요의 덩어리다. 말하자면 “일관된” 무신론과 종교에 대한 “관용”이 뒤섞인 무슨 죽 같은 것이고, 신에 대한 혀-혀-혁명적인 전쟁과 신앙을 가진 노동자들에게 “비위를 맞추려는” 비겁한 바람, 그들을 놀라 달아나게 할까 하는 두려움 등등 사이를 오가는 무슨 “무원칙한” 동요라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빈말꾼들의 문헌에서는 이런 취향의 마르크스주의 공격을 적잖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를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대하고 그 철학적 기초와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경험을 깊이 생각해 볼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종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전술이 깊이 일관되어 있으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철저히 숙고한 것이라는 점, 그리고 딜레탕트나 무지한 자들이 동요라고 여기는 것이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나오는 직접적이고 불가피한 결론이라는 점을 쉽게 알아볼 것이다. 종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겉보기 “온건함”이 “놀라 달아나게 하지 않으려는” 바람 따위의 의미에서 이른바 “전술적” 고려로 설명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일 것이다. 오히려 이 문제에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정치 노선은 그 철학적 기초와 떼려야 뗄 수 없이 결부되어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유물론이다. 그러한 것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18세기 백과전서파의 유물론이나 포이어바흐의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종교에 가차 없이 적대적이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유물론 철학을 역사의 영역에, 사회과학의 영역에 적용함으로써 백과전서파와 포이어바흐보다 더 나아간다. 우리는 종교와 싸워야 한다. 이것은 모든 유물론의,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초보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초보에 머무른 유물론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더 나아간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와 싸울 줄 알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 사이에서 믿음과 종교가 생겨나는 원천을 유물론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종교와의 투쟁을 추상적·이데올로기적 설교에 한정해서는 안 되며, 그러한 설교로 환원해서도 안 된다. 이 투쟁은 종교의 사회적 뿌리를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계급 운동의 구체적 실천과 결부되어야 한다. 왜 종교는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뒤떨어진 층에서, 반프롤레타리아트의 광범한 층에서, 그리고 농민 대중 속에서 유지되는가? 인민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부르주아 진보주의자나 급진주의자, 또는 부르주아 유물론자는 대답한다. 그러므로 종교를 타도하라, 무신론 만세, 무신론적 견해를 퍼뜨리는 것이 우리의 주된 과제다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말한다. 틀렸다. 그러한 견해는 피상적이고 부르주아적으로 편협한 문화 계몽주의이다. 그러한 견해는 종교의 뿌리를 충분히 깊이 설명하지 못하며, 유물론적으로가 아니라 관념론적으로 설명한다. 현대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이 뿌리는 주로 사회적 뿌리이다. 근로 대중이 사회적으로 억눌려 있다는 것, 그리고 전쟁이나 지진 따위의 온갖 비상한 사건들보다 천 배나 더 많은 가장 끔찍한 고통과 가장 야만적인 괴로움을 평범한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날마다 시시각각 안겨 주는 자본주의의 맹목적인 힘 앞에서 그들이 완전히 무력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 — 바로 여기에 종교의 가장 깊은 현대적 뿌리가 있다. “공포가 신들을 만들었다.” 인민 대중이 미리 내다볼 수 없기에 맹목적인 자본의 맹목적인 힘, 프롤레타리아와 영세 소경영주의 삶의 걸음걸음마다 “갑작스러운”, “뜻밖의”, “우연한” 파산과 파멸, 거지로, 극빈자로, 매춘부로의 전락, 굶어 죽음을 안겨 주겠다고 위협하고 또 실제로 안겨 주는 그 힘에 대한 공포, — 바로 이것이 현대 종교의 뿌리이며, 유물론자가 예비반 유물론자로 머물고 싶지 않다면 무엇보다 먼저, 무엇보다 많이 염두에 두어야 할 뿌리이다. 자본주의라는 강제 노역에 짓눌리고 자본주의의 맹목적인 파괴적 힘에 매여 있는 대중이 스스로 종교의 이 뿌리에 맞서, 온갖 형태의 자본의 지배에 맞서 단결하여 조직적으로, 계획적으로, 의식적으로 싸우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어떠한 계몽 책자도 그 대중에게서 종교를 지워 없애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종교에 반대하는 계몽 책자가 해롭다거나 쓸데없다는 결론이 나오는가? 아니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사회민주주의의 무신론 선전이 사회민주주의의 기본 과제, 즉 착취자들에 맞선 피착취 대중의 계급투쟁을 발전시키는 일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초, 즉 마르크스와 엥겔스 철학의 기초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 명제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또는 적어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째서 그렇다는 말인가? 사상 선전을, 일정한 사상의 설교를, 수천 년 동안 버텨 온 문화와 진보의 적(즉 종교)과의 투쟁을 — 계급투쟁에, 즉 경제와 정치 영역에서 일정한 실천적 목적을 위한 투쟁에 종속시키라는 말인가?
이런 반론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흔히 나도는 반론 가운데 하나로, 마르크스 변증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이렇게 반박하는 이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모순은 살아 있는 삶의 살아 있는 모순, 곧 변증법적 모순이지, 말뿐인 모순이나 지어낸 모순이 아니다. 무신론의 이론적 선전, 곧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정한 층에서 종교적 믿음을 무너뜨리는 일과 이들 층의 계급투쟁의 성과·진행·조건 사이에 절대적이고 넘을 수 없는 경계를 긋는 것은 비변증법적으로 추론하는 것이고, 움직이는 상대적 경계에 불과한 것을 절대적 경계로 바꾸어 놓는 것이며, 살아 있는 현실에서 떼려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는 것을 억지로 갈라놓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지역, 어떤 산업 부문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를테면 꽤 의식 있는 사회민주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선진층과, 아직 농촌 및 농민과 연결되어 있어 꽤 뒤떨어진 노동자들로 나뉘어 있다고 하자. 앞의 사람들은 물론 무신론자이고, 뒤의 사람들은 신을 믿고 교회에 다니며, 심지어 이를테면 기독교 노동자 조합을 세우고 있는 그 고장 사제의 직접적 영향 아래 있기까지 하다. 나아가 그런 고장에서 경제투쟁이 파업으로 이어졌다고 하자.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마땅히 파업 운동의 성공을 첫째 자리에 놓아야 하고, 이 투쟁에서 노동자들이 무신론자와 기독교도로 갈라지는 것에 마땅히 단호히 맞서야 하며, 그런 분열에 단호히 맞서 싸워야 한다. 이런 조건에서 무신론 설교는 쓸데없을 뿐 아니라 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는 뒤떨어진 층을 겁주어 쫓아내지 말아야 한다거나 선거에서 의석을 잃는다거나 하는 따위의 속물적 고려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실제 진보라는 관점에서 그렇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환경에서 계급투쟁은 맨 무신론 설교보다 백 배는 더 잘 기독교도 노동자들을 사회민주주의와 무신론으로 이끌 것이다. 이러한 때, 이러한 환경에서 무신론 설교자는 그저 성직자와 성직자들 좋은 일만 해 주는 셈이 될 것이다. 성직자들이 무엇보다 바라는 것은 바로 노동자들이 파업 참여 여부로 나뉘는 대신 신을 믿느냐 여부로 나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신과의 전쟁을 설교하는 무정부주의자는 실제로는 성직자들과 부르주아지를 돕게 될 것이다(무정부주의자들이 언제나 실제로는 부르주아지를 돕듯이). 마르크스주의자는 유물론자, 곧 종교의 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변증법적 유물론자, 곧 종교와의 투쟁이라는 문제를 추상적으로, 동떨어지고 순전히 이론적이며 언제나 똑같은 설교의 터전 위에 세우지 않고, 구체적으로, 실제로 벌어지며 대중을 무엇보다 많이, 무엇보다 잘 교육하는 계급투쟁의 터전 위에 세우는 유물론자여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는 구체적 정세 전체를 헤아릴 줄 알아야 하고, 무정부주의와 기회주의 사이의 경계를 언제나 찾아낼 줄 알아야 한다(이 경계는 상대적이고 움직이며 바뀌는 것이지만, 엄연히 존재한다). 무정부주의자의 추상적이고 말뿐이며 실제로는 공허한 “혁명주의”에도, 소부르주아나 자유주의 인텔리겐치아의 속물근성과 기회주의에도 빠져서는 안 된다. 이 인텔리겐치아는 종교와의 투쟁을 겁내고, 자신의 이 과제를 잊으며, 신에 대한 믿음과 타협하고, 계급투쟁의 이해가 아니라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말자, 밀어내지 말자, 겁주지 말자는 자잘하고 옹색한 잔셈과 “나도 살고 남도 살게 하라”는 지혜롭기 그지없는 규칙 따위에 이끌린다. 사회민주주의의 종교에 대한 태도에 관한 개별적 문제들은 모두 앞서 말한 관점에서 해결해야 한다. 예컨대 사제가 사회민주당의 당원이 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자주 제기되는데, 사람들은 흔히 유럽 사회민주당들의 경험을 끌어대며 아무 단서도 없이 이 물음에 긍정으로 답한다. 그러나 이 경험은 노동운동에 마르크스주의 학설을 적용한 데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는 없는 서구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에서도 나온 것이다(이 조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말하겠다). 따라서 여기서 무조건적인 긍정의 답은 옳지 않다. 사제는 사회민주당의 당원이 될 수 없다고 단번에, 모든 조건에 대해 선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반대의 규칙을 단번에 내세울 수도 없다. 사제가 함께 정치 활동을 하려고 우리에게 오고, 당 강령에 반대하지 않으면서 당 활동을 성실히 수행한다면, 우리는 그를 사회민주주의자의 대열에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조건에서는 우리 강령의 정신과 원칙이 사제의 종교적 신념과 모순되더라도, 그 모순은 그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그의 개인적 모순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고, 정치 조직은 당원들의 견해와 당 강령 사이에 모순이 없는지를 시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이런 경우는 유럽에서조차 드문 예외일 것이고, 러시아에서는 더더욱 있을 법하지 않다. 그리고 만일 예컨대 어떤 사제가 사회민주당에 들어와 종교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설교하는 것을 이 당 안에서 자신의 주된, 거의 유일한 활동으로 삼기 시작한다면, 당은 무조건 그를 대열에서 제명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신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모든 노동자를 사회민주당에 받아들일 뿐 아니라 더욱 힘써 끌어들여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종교적 신념을 조금이라도 모욕하는 데 무조건 반대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우리 강령의 정신으로 교육하기 위해서이지, 강령에 맞서 적극적으로 투쟁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당 안에서 의견의 자유를 허용하지만, 그것은 분파 결성의 자유에 의해 정해지는 일정한 한계 안에서다. 우리는 당의 다수가 배척하는 견해를 적극적으로 설교하는 자들과 손잡고 나아갈 의무가 없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사회주의는 나의 종교다”라고 선언하는 사회민주당원과, 그런 선언에 걸맞은 견해를 설교하는 사회민주당원을 어떤 조건에서든 똑같이 비난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로부터(따라서 사회주의로부터도) 이탈한 것은 틀림없지만, 이 이탈의 의미, 이를테면 그 비중은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선동가나 노동자 대중 앞에 나선 사람이 자기 말을 더 잘 알아듣게 하려고, 설명의 실마리를 풀려고, 미숙한 대중에게 가장 익숙한 말로 자기 견해를 더 생생하게 드러내려고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별개의 일이다. 그러나 저술가가 “건신주의”나 건신주의적 사회주의를(이를테면 우리의 루나차르스키 일파 같은 식으로) 설교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앞의 경우에 비난하는 것이 트집 잡기, 심지어 선동가의 자유, “교육적” 영향을 줄 자유를 부당하게 구속하는 것일 수 있는 바로 그만큼, 뒤의 경우에는 당 차원의 비난이 필요하고 반드시 있어야 한다. “사회주의는 종교다”라는 명제는 어떤 이들에게는 종교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형식이고, 다른 이들에게는 사회주의에서 종교로 넘어가는 형식이다.
이제 서유럽에서 “종교를 사적인 일로 선언함”이라는 테제를 기회주의적으로 해석하게 만든 조건들로 넘어가자. 물론 여기에는 노동운동의 근본 이익을 눈앞의 이득에 희생시키는 기회주의 일반을 낳는 일반적 원인들의 영향이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은 국가에 종교를 사적인 일로 선언할 것을 요구하지만, 인민의 아편과의 투쟁, 종교적 미신과의 투쟁 등의 문제를 결코 “사적인 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기회주의자들은 마치 사회민주주의 당이 종교를 사적인 일로 여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태를 왜곡한다!
그러나 흔한 기회주의적 왜곡(우리 두마 의원단이 종교에 관한 발언을 검토하면서 벌인 토론에서는 이 왜곡이 전혀 해명되지 않았다) 말고도,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오늘날 종교 문제에 대해, 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 지나치게 무관심해진 데에는 특수한 역사적 조건들이 있다. 이 조건은 두 가지이다. 첫째, 종교와 투쟁하는 과제는 혁명적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과제이며, 서유럽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자기의 혁명 시기, 또는 봉건제와 중세에 맞서 공세를 펼치던 시기에 이 과제를 상당 부분 수행했다(또는 수행하고 있었다). 프랑스에도 독일에도 사회주의보다 훨씬 앞서 시작된 부르주아적 종교 전쟁의 전통(백과전서파, 포이어바흐)이 있다. 러시아에서는 우리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조건에 따라 이 과제마저 거의 전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어깨에 지워진다. 우리나라의 소부르주아(인민주의) 민주주의는 이 점에서 (『이정표』[6]의 새로 나타난 흑백인단 카데트, 또는 카데트 흑백인단이 생각하듯이) 지나치게 많은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유럽에 비하면 지나치게 적은 일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에 대한 부르주아적 투쟁의 전통은 유럽에서 이미 아나키즘에 의한 이 투쟁의 특유하게 부르주아적인 왜곡을 낳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오래전부터 여러 차례 밝혀 왔듯이, 아나키즘은 부르주아지를 아무리 “격렬하게” 공격하더라도 부르주아 세계관의 토대 위에 서 있다. 로망스어 나라들의 아나키스트와 블랑키주의자, 독일의 모스트(덧붙이자면 그는 뒤링의 제자였다) 일당, 1880년대 오스트리아의 아나키스트들은 종교와의 투쟁에서 혁명적 미사여구를 nec plus ultra(극한)까지 밀고 나갔다. 그러니 오늘날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아나키스트들이 구부려 놓은 막대를 반대쪽으로 지나치게 구부리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이는 이해할 만하고 어느 정도 정당하기도 하지만, 우리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서유럽의 특수한 역사적 조건을 잊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둘째로, 서유럽에서는 민족적 부르주아 혁명이 끝난 뒤, 다소간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도입된 뒤, 종교에 대한 민주주의적 투쟁의 문제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투쟁에 밀려 역사적으로 이미 크게 뒷전으로 물러나 있었고, 그리하여 부르주아 정부들은 교권주의에 대한 quasi(사이비) 자유주의적 “원정”을 벌임으로써 대중의 관심을 사회주의에서 딴 데로 돌리려고 의식적으로 시도했다. 독일의 Kulturkampf(문화투쟁)도, 프랑스 부르주아 공화주의자들의 교권주의 반대 투쟁도 그런 성격을 띠었다. 노동자 대중의 관심을 사회주의에서 돌리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부르주아 반교권주의 — 바로 이것이 서유럽에서 종교와의 투쟁에 대한 오늘날의 “무관심”이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 퍼지기에 앞서 있었던 것이다. 이 역시 이해할 만하고 정당한데,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부르주아적이고 비스마르크적인 반교권주의에 맞서 바로 종교와의 투쟁을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종속시키는 것을 내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조건이 전혀 다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우리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지도자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은 온갖 중세적인 것과의 투쟁에서, 그 가운데에서도 낡은 관제 종교와의 투쟁에서, 또 그것을 쇄신하거나 새롭게 또는 다른 방식으로 근거 지으려는 모든 시도 등과의 투쟁에서 사상적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엥겔스가, 국가가 종교를 사적인 일로 선언하라는 노동자당의 요구를 사회민주주의자 자신과 사회민주당에게 종교가 사적인 일이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바꿔치기한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기회주의를 비교적 부드럽게 바로잡았다면, 러시아 기회주의자들이 이 독일식 왜곡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엥겔스에게서 백 배는 더 혹독한 비난을 받아 마땅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 의원단이 두마 연단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선언한 것은 전적으로 올바른 행동이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종교 문제에 관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모든 발언의 토대가 되어야 할 선례를 만들었다. 무신론적 결론을 더 자세히 전개하며 더 나아갔어야 했을까?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랬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당이 종교와의 투쟁을 과장할 위험이 있었을 것이고, 종교에 대한 부르주아적 투쟁과 사회주의적 투쟁 사이의 경계를 지워 버리는 데로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흑백단 두마에서 사회민주당 의원단이 수행해야 했던 첫째 일은 훌륭하게 수행되었다.
둘째 일 — 사회민주주의자에게는 거의 가장 중요하다 할 일 — , 곧 흑백단 정부를 지지하고 노동계급과 싸우는 부르주아지를 지지하는 데서 교회와 성직자가 하는 계급적 역할을 해명하는 일 역시 훌륭하게 수행되었다. 물론 이 주제에 관해서는 아직 할 말이 아주 많고, 이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발언은 수르코프 동지의 연설에 보탤 것을 찾아낼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연설은 탁월했으며, 모든 당 조직이 그것을 보급하는 것은 우리 당의 직접적인 의무다.
셋째 — 독일 기회주의자들이 그토록 자주 왜곡하는 명제, 즉 “종교를 사적인 일로 선언함”의 올바른 의미를 빠짐없이 상세하게 해명했어야 했다. 유감스럽게도 수르코프 동지는 이것을 하지 않았다. 이것이 더욱 유감스러운 까닭은, 의원단의 이전 활동에서 이미 이 문제를 두고 《프롤레타리》가 때맞춰 지적한 벨로우소프 동지의 오류[7]가 저질러진 바 있기 때문이다. 의원단 안의 토론은 무신론을 둘러싼 논쟁에 가려, 종교를 사적인 일로 선언하라는 그 말 많은 요구를 올바르게 설명하는 문제가 의원단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우리는 의원단 전체의 이 오류를 수르코프 동지 한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않겠다. 그뿐이 아니다. 솔직히 인정하자. 여기에는 이 문제를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고, 독일 기회주의자들을 겨냥한 엥겔스의 지적이 지니는 의의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의식 속에 충분히 새겨 두지 못한 당 전체의 잘못이 있다. 의원단 안의 토론은 이것이 바로 문제에 대한 불분명한 이해였지, 결코 마르크스의 학설을 고려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며, 우리는 의원단의 이후 발언에서 이 오류가 바로잡히리라고 확신한다.
전체적으로 보아, 거듭 말하지만, 수르코프 동지의 연설은 훌륭하며 모든 조직이 이를 널리 보급해야 한다. 이 연설을 토의함으로써 의원단은 사회민주주의자로서의 의무를 더없이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남은 바람은 의원단 내부 토론에 관한 보고가 당 출판물에 더 자주 실리는 것이다. 그래야 의원단과 당이 가까워지고, 의원단이 해내고 있는 힘겨운 내부 작업을 당이 알게 되며, 당과 의원단의 활동에서 사상적 통일이 확립될 것이다.
주석
- 제3두마의 사회민주당 의원 P. I. 수르코프가 1909년 4월 14일(27일) 시노드(러시아 정교회 최고 기관) 예산안 심의에서 한 연설. 의원단이 연설 초안을 두고 벌인 토론은 이 글과 같은 《프롤레타리》 제45호(1909년 5월 13일(26일))의 「당 소식」란에 실렸다. ↩
- 마르크스,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1844). ↩
- 엥겔스, 「망명자 문헌」 제2편 「코뮌의 블랑키주의 망명자들의 강령」(1874). ↩
- 엥겔스, 『반뒤링론』(1878) 제3편 제5장 「국가, 가족, 교육」. 비스마르크가 1870년대에 가톨릭교회를 상대로 벌인 “문화투쟁(Kulturkampf)”과 뒤링의 종교 금지론을 함께 비판한 대목이다. ↩
- 엥겔스가 1891년 마르크스의 『프랑스 내전』 신판에 쓴 서문. 파리 코뮌이 “종교는 순전히 사적인 일”이라고 선언한 것을 국가와 교회의 분리라는 뜻으로 설명했다. ↩
- 『이정표(Вехи)』(모스크바, 1909년 봄). 베르댜예프, 불가코프, 게르셴존, 이즈고예프, 키스탸콥스키, 스트루베, 프랑크 등 입헌민주당(카데트) 쪽 지식인들이 1905년 혁명과 혁명적 인텔리겐치아의 전통을 비판한 논문집이다. ↩
- 제3두마의 사회민주당 의원 T. O. 벨로우소프는 1908년 3월 22일(4월 4일) 시노드 예산안 심의에서 종교를 “각 개인의 사적인 일”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냈다. 《프롤레타리》 제28호(1908년 4월 2일(15일)) 사설이 이 정식의 잘못을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