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신주의
God-Building
1905년 혁명이 패배한 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일부가 내세운 사상으로, 초월적인 신을 ‘찾는’ 대신 인류와 노동하는 집단의 힘 자체를 새 종교의 대상으로 ‘세우자’고 했다. 루나차르스키·고리키·바자로프가 대표하고 보그다노프 주변의 전진파와 겹쳤다. 포이어바흐의 인류 종교와 마흐의 경험비판론, 니체의 가치 창조 사상에 기댔으며, 레닌과 플레하노프는 이를 마르크스주의와 무신론의 포기라고 비판했다.
상세
왜 혁명가들이 ‘신을 세우자’고 했나?
1905년 혁명은 패배했고, 1907년 6월 스톨리핀의 쿠데타 뒤 러시아는 반동의 시기로 들어갔다. 혁명가들 가운데는 낙담한 사람이 많았고, 지식인 사회에서는 신비주의와 종교적 탐구가 유행했다. 볼셰비키 안의 몇몇 이론가와 작가는 이런 분위기를 그냥 무시할 수 없다고 보았다. 수백만 민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종교적 감정을 빼앗기만 하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면 사회주의는 대중을 감동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해답이 건신주의(богостроительство)였다. 러시아어판 위키백과의 요약대로, 이들은 신을 이미 존재하는 초월적 실체로서 ‘찾지’ 않고, 집단의 힘으로 신을 ‘세우려’ 했다. 소련 대백과사전(제3판)은 이 흐름이 “신 없는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종교”를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집단과 진보의 신격화가 되었다고 정리한다. 종교의 내용은 버리되,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감정과 의례, 상징의 힘은 사회주의를 위해 쓰자는 발상이었다.
한국어 백과사전에서는 이를 ‘건신주의(建神主義)’라고 옮긴다. 같은 시기 메레시콥스키·베르댜예프 같은 종교철학자들이 추구한 ‘구신주의(богоискательство, 신 찾기)’와 짝을 이루는 이름이다. 건신주의자들은 오히려 이 종교적 퇴폐파와 가장 격렬하게 논쟁했다.
누가 무엇을 주장했나?
이론가는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였다. 그는 1908년과 1911년에 두 권으로 낸 『종교와 사회주의』에서 과학적 사회주의야말로 가장 종교적인 종교이며, 신은 최고의 가능성에 이른 인류라고 주장했다. 블라디미르 바자로프는 1909년 「구신주의와 건신주의」라는 글로 이 입장을 정리했고, 이들은 보그다노프와 함께 1908년 논문집 『마르크스주의 철학 개요』에 글을 실었다. 영어판 위키백과는 이들이 포이어바흐의 인류 종교와 함께 아베나리우스와 마흐의 경험비판론, 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정리한다. 낡은 가치를 부수고 인간이 스스로 새 가치를 창조한다는 니체의 생각은 루나차르스키와 고리키에게 사회주의적 ‘새 인간’의 꿈으로 옮겨졌다.
막심 고리키는 1907년 프랑스 잡지 『메르퀴르 드 프랑스』의 종교 설문에서, 종교는 미래가 없고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본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에 맞서 건신주의의 입장을 폈다. 이듬해 그는 소설 『고백』(1908)에서 이 사상을 문학으로 옮겼다. 신을 찾아 떠돈 주인공 마트베이는 한 노인에게서 “신을 세우는 이는 바로 민중이다! 헤아릴 수 없는 세계의 민중!”이라는 말을 듣는다.
Богостроитель — это суть народушко! Неисчислимый мировой народ!
소설은 주인공이 민중을 향해 바치는 기도로 끝난다. “당신은 나의 신이요, 노동과 반항의 탐구 속에서 당신 정신의 아름다움으로 모든 신을 짜 낸 창조주입니다!” 여기서 신은 하늘에 있지 않고 일하고 싸우는 민중 자신이다.
Ты еси мой бог и творец всех богов, соткавший их из красот духа своего в труде и мятеже исканий твоих!
레닌은 왜 건신주의를 그렇게 비판했나?
레닌에게 이것은 단순한 말의 차이가 아니었다. 그는 종교를 피억압자의 무력감에서 생겨나 착취를 정당화하는 정신적 억압으로 보았고, 아무리 세련된 형태라도 종교를 되살리려는 시도는 반동기에 부르주아가 원하던 바로 그것이라고 보았다. 친구였던 고리키의 『고백』도 날카롭게 비판했다. 1909년 6월 볼셰비키 신문 『프롤레타리』의 확대편집국 회의는 건신주의를 “마르크스주의의 기초와 결별하는 흐름”으로 규정했고, 같은 회의에서 보그다노프가 분파 지도부에서 밀려났다.
건신주의자들은 1909년 8~12월 고리키의 지원으로 이탈리아 카프리섬에서 노동자를 위한 분파 학교를 열었다. 레닌은 이 학교를 “건신주의의 문필가 본부”라고 불렀다. 학교가 끝난 뒤 이들은 1909년 말 보그다노프를 중심으로 전진파를 꾸렸다. 레닌이 같은 시기에 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9)은 이들의 철학적 기반인 마흐주의를 겨냥했고, 1913년 가을 고리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는 신을 ‘찾는’ 것과 ‘세우는’ 것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며 거듭 반대했다.
건신주의는 어떻게 되었나?
러시아어판 위키백과에 따르면 전진파가 1913년 사실상 해체된 뒤 옛 건신주의자들은 대부분 신칸트주의와 마흐주의 쪽 지향을 버렸다. 루나차르스키는 1917년 볼셰비키로 돌아가 교육인민위원이 되었고, 고리키는 혁명 뒤 소련 문학의 대표자가 되었다. 보그다노프의 문화 이론은 프롤레트쿨트로 이어졌다.
그러나 건신주의가 던진 물음, 곧 사회주의가 사람들의 감정과 의례, 삶의 의미에 대한 요구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는 사라지지 않았다. 혁명 뒤 소련에서 붉은 의례와 국가 축제를 둘러싼 논쟁, 레닌 묘와 지도자 숭배를 두고 건신주의의 흔적을 찾는 연구가 이어졌다. 니체에서 출발한 가치 창조의 사상이 러시아 혁명가들 사이에서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로서, 건신주의는 니체 수용사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