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와 개혁을 한 손에 쥔 총리
1907년 5월 10일, 제2두마 연설에서 혁명세력을 향해 "여러분은 대격변이 필요하겠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대한 러시아다"라고 선언했다.
1905년 혁명을 야전군법회의로 진압하는 동시에, 공동체 농지를 해체하는 농업개혁으로 체제의 새 지지 기반을 만들려 한 제정 러시아의 총리. 1911년 암살당했다.
경력 연표
- 1906내무장관을 거쳐 총리
- 1906–07야전군법회의로 혁명 진압
- 1906–11농업개혁, 공동체 탈퇴와 자영농 육성
- 1907.6「6월 3일 체제」, 선거법 개정으로 두마 장악
- 1911.9키예프 오페라 극장에서 피격, 사망
관련 역사 사건
스톨리핀 농업개혁
스톨리핀 농업개혁의 핵심은 농민 공동체(미르)를 해체하고 토지의 사적 소유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1906년 11월 9일 칙령으로 농민은 공동체에서 탈퇴하여 자신의 몫을 개인 소유로 등록할 권리를 얻었다. 개혁은 여러 축에서 전개되었다. 첫째, 공동체 토지를 분할하여 농민 개개인에게 사유지를 부여하고, 둘째, 흩어진 띠 모양 경지를 한 곳으로 모은 '오트루프'(отруб)나 주택까지 이전한 '후토르'(хутор)를 장려했다. 셋째, 농민토지은행이 저리 대출로 토지 구입을 지원했고, 넷째, 시베리아 등 미개척지로의 이주를 장려해 약 300만 명이 이동했다. 스톨리핀은 근면하고 유능한 농민이 부농으로 성장해 기존 체제의 보수적 지지 기반이 되기를 기대했다: 이른바 '강자에의 내기'였다. 개혁 성과는 엇갈렸다. 약 600만 가구가 사유화를 신청했으나 실제 공동체를 떠난 가구는 약 150만(10.6%)으로, 전체 공동지의 21.2%인 2,520만 데샤틴이 개인 소유로 전환되었다. 시베리아 이주자의 약 18%는 귀환했다. 그럼에도 1916년까지 농민은 경작지의 89%, 가축의 94%를 보유하게 되었다. 스톨리핀이 요청한 '20년의 평온'은 주어지지 않았고, 제1차 세계대전과 혁명으로 개혁은 중단되었다. 개혁이 성공 중이었는지, 처음부터 불충분했는지는 오늘날까지 역사학계의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