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주의
Republicanism
세습 군주나 한 사람의 절대 권력 대신 시민과 그 대표에게 주권을 두는 공화정을 옹호하는 정치사상과 운동이다. 이름은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공공의 것’)에서 왔고, 국가의 목적을 지배자의 번영이 아닌 공동선에 두며 시민적 덕성, 정치 참여, 혼합정체, 법의 지배, 지배받지 않는 자유를 강조한다. 고대 그리스·로마와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사상을 거쳐 미국 혁명과 1792년 프랑스 제1공화국에서 근대적 형태를 갖추었고, 19~20세기에 유럽·라틴아메리카·중국·터키로 퍼졌다. 자유주의와 함께 절대군주제에 맞섰으나, 개인과 경제적 자유보다 시민적 덕성과 공동선을 앞세운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상세
이름과 핵심 관념
공화주의라는 이름은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 곧 ‘공공의 것’에서 왔다. 프랑스어권의 정의에 따르면 공화주의는 국가의 목적과 존재 이유, 그 결정이 지배자들만의 번영이 아니라 공동선을 향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영어권 개관은 그 원칙으로 시민적 덕성, 적극적 정치 참여, 시민 교육, 부패와의 싸움, 균형 잡힌 혼합정체, 헌법으로 제한된 정부, 비지배로서의 자유, 법의 지배와 공동선을 꼽는다. 자유를 단지 간섭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군주나 다른 사람의 자의적 지배를 받지 않는 상태로 보는 것이 공화주의 자유관의 특징으로 거론된다. 근대에 들어 공화주의는 군주주의·권위주의·전제정치와 맞서는 이념으로 자리 잡았고, 영국처럼 군주가 주로 의례적 역할을 하는 나라에서는 세습 군주제를 선출 공화정으로 바꾸자는 요구를 가리키기도 한다.
고전적 연원과 근대 혁명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폴리비오스의 저작에는 혼합정체와 시민적 덕성 같은 관념이 이미 나타난다. 폴리비오스는 로마 공화정을 군주정·귀족정·민주정을 섞은 체제로 설명했고, 키케로는 『국가론』에서 로마의 레스 푸블리카를 그리스의 폴리테이아와 연결했다. 중세 말 이후 피렌체·제노바·베네치아 같은 상업 도시국가가 공화정을 채택했고,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공화정을 논했다. 잉글랜드에서는 찰스 1세가 처형된 뒤 잉글랜드 공화국(1649~1660)이 들어섰고, 제임스 해링턴과 존 밀턴이 공화주의 사상을 대표했다. 18세기에는 몽테스키외와 루소가 이 전통을 넓혔다. 프랑스식 공화주의는 루소의 일반의지에서 나온 사회계약의 한 형태로 설명되며, 시민 각자가 지역·종교·인종의 매개 없이 국가와 직접 관계를 맺는다고 본다. 공화주의는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미국 혁명의 동력이 되었고, 1792~1804년의 프랑스 제1공화국을 통해 유럽에서 큰 영향력을 얻었다. 1791년 벨파스트와 더블린에서 결성된 아일랜드인연합회도 두 혁명에 고무된 공화주의 단체였다.
19세기 유럽과 아메리카의 공화파
이탈리아에서는 주세페 마치니가 공화주의를 되살렸다. 그는 1831년 7월 망명지 마르세유에서 청년 이탈리아를 세워 이탈리아를 자유·독립·통일의 원칙에 선 단일 민주공화국으로 만들고 통일 이전의 군주 정권들을 몰아내려 했다. 그러나 통일은 카보우르와 가리발디의 행동으로 사보이아 왕가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카를로 카타네오는 1860년과 1867년 의원에 선출되고도 왕가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지 않으려고 의석을 거부했으며, 1895년에는 이탈리아 공화당이 창당되었다. 프랑스에서는 1848년에 제2공화국, 1870년에 제3공화국이 선포되었고, 제3공화국은 1880년대에 집회·출판의 자유와 무상·세속·의무 초등교육을 법으로 정했으며 1905년 교회와 국가를 분리했다. 스페인에서는 이사벨 2세 치세에 처음으로 분명한 반군주제 공화주의 운동이 나타났고, 제1공화국(1873~1874)과 제2공화국(1931~1939)이 들어섰다. 스페인 공화파는 단일국가와 연방국가 가운데 어느 형태를 택할지를 두고 갈렸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공화주의가 19세기 초 스페인 식민지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시몬 볼리바르 등이 스스로를 공화주의자로 내세웠다. 브라질에서는 1870년 급진 자유주의자들이 군주제 아래에서는 원하는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공화당을 세웠다.
20세기의 확산과 신공화주의
한국어권 개관은 공화주의를 프랑스 혁명, 남아메리카 해방, 신해혁명(1911), 스페인 혁명, 이집트 혁명(1952)의 사상적 원천으로 꼽는다. 중국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일본을 거쳐 자유·헌정·민권·공화·국민 같은 공화주의 어휘를 받아들였다. 오스만 제국이 무너진 뒤 무스타파 케말은 1923년 터키 공화국을 선포했고, 공화주의는 케말주의 6대 원칙의 하나로 남았다. 1970년대 이후 J. G. A. 포콕과 퀜틴 스키너는 고대에서 18세기까지 공화주의의 계보를 다시 썼다. 포콕은 1975년 『마키아벨리적 계기』에서 18세기 초에는 공화주의 관념이 자유주의 관념만큼 중요했다고 주장했다. 1990년대에는 필립 페팃 등이 자유를 비지배로 규정하는 신공화주의를 정식화했다. 프랑스에서는 1989년 이후 공화주의가 국가 정체성을 규정하는 언어로 더 자주 쓰였다.
자유주의·사회주의와의 관계
18세기에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가 함께 절대군주제에 맞섰기 때문에 자주 혼동되었다. 현대 연구자들은 둘을 근대 민주주의 이념에 함께 기여한 별개의 흐름으로 보며, 공화주의가 시민적 덕성과 공동선을 강조한 반면 자유주의는 경제와 개인주의에 바탕을 두었다고 구분한다. 영어권 개관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고전적 공화주의에서 갈라져 나와 근대 공화주의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서술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민주공화국에 대해 두 가지를 함께 말했다. 엥겔스는 1891년 6월 카우츠키에게 보낸 에르푸르트 강령 초안 비판에서 노동계급의 당이 권력을 잡을 수 있는 형태는 민주공화국뿐이며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특수한 형태라고 썼다. 레닌은 1917년 『국가와 혁명』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한편, 민주공화국이 자본주의에 가능한 가장 좋은 정치적 외피이며 자본이 이 외피를 장악하면 인물·제도·정당이 바뀌어도 그 권력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