푀양파
입헌군주제파 · 1791년 의회 우파
바렌 도주와 샹드마르스 사건을 거치며 자코뱅에서 갈라진 온건파였습니다. 1791년 헌법과 왕의 지위를 지키고 혁명의 추가 급진화를 끝내려 했습니다.
전환점1792년 8월 10일 왕권 정지와 푀양파 내각 해임 뒤 정치적 기반 붕괴
미국 독립전쟁의 파급부터 1799년 브뤼메르까지, 대외전쟁·공포정치·자유와 평등의 쟁점을 혁명의 흐름 속에서 배웁니다.
1791–1794 · 세력 관계도
혁명 내부의 의회 좌석·정치클럽·파리 대중운동뿐 아니라 입헌군주파와 의회 밖 반혁명도 함께 봐야 전체 구도가 보입니다. 네 층을 시기와 성격에 맞는 축으로 나누어 배치했습니다.
주의 · 오늘날의 당원명부와 강령을 갖춘 정당 지도가 아닙니다. 푀양파는 1789년의 변화 일부를 인정하면서 1791년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망명귀족·선서거부 성직자·지역 반란도 하나의 지휘계통이 아니었습니다.
1791–1794
입헌군주제파 · 1791년 의회 우파
바렌 도주와 샹드마르스 사건을 거치며 자코뱅에서 갈라진 온건파였습니다. 1791년 헌법과 왕의 지위를 지키고 혁명의 추가 급진화를 끝내려 했습니다.
전환점1792년 8월 10일 왕권 정지와 푀양파 내각 해임 뒤 정치적 기반 붕괴
왕실 인맥 · 망명자 군대
왕권 회복이나 구체제 복원을 바란 여러 흐름입니다. 망명귀족 일부는 국외에서 군대를 조직하고 유럽 군주국의 개입과 결합했지만, 모든 망명자가 같은 이유나 노선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전환점1792년 전쟁과 왕정 붕괴 뒤 국내 왕당파와 국외 망명 세력이 반혁명의 표적이자 기반으로 부각
성직자 시민헌법 선서 거부
성직자 시민헌법에 대한 선서 거부가 교회와 지역사회를 갈라놓았습니다. 선서거부 성직자는 하나의 왕당파 정당은 아니었지만, 박해와 종교정책 속에서 여러 지역의 반혁명 동원망과 겹쳤습니다.
전환점1792년 추방 논쟁과 왕의 거부권이 입헌군주제 위기를 심화
지역적·가톨릭적·왕당파적 무장 저항
징병, 종교 갈등, 지방의 불만이 결합한 서로 다른 서부 농촌 반란입니다. 가톨릭 왕당군의 이름을 채택했지만 파리의 단일 정파나 하나의 전국 조직으로 보면 안 됩니다.
전환점1793년 내전의 핵심 전선이 되었고 정규군 패배 뒤에도 슈앙 반란 등 무장 저항 지속
1792–1795
몽타뉴파
자코뱅·코르들리에 클럽 출신이 많이 앉은 공회의 좌파였습니다. 강한 공화국과 중앙집권을 지지하고 파리 상퀼로트와 동맹해 지롱드파를 밀어냈습니다.
전환점1793년 6월 이후 주도권 장악, 곧 혁명정부의 방향을 둘러싼 경쟁 격화
마레(늪)라고도 부름
국민공회의 가장 큰 중간 지대였습니다. 하나의 강령이나 지도부를 가진 정파라기보다 사안과 정세에 따라 표가 움직인 느슨한 다수였습니다.
전환점초기에는 지롱드파, 1793년에는 산악파, 테르미도르에는 반로베스피에르 연합의 열쇠
브리소파라고도 부름
왕정 폐지에 참여한 공화파였지만 파리 코뮌과 무장 민중의 압력, 중앙집권적 비상정부를 경계했습니다. 1792년 대오스트리아 전쟁을 주도했습니다.
전환점1793년 6월 봉기 뒤 지도부가 체포되어 의회 세력으로 붕괴
1789–1794
‘격앙된 자들’이라 불린 급진 선동가들
자크 루·장 바를레·테오필 르클레르 등이 부와 투기, 식량 문제를 공격했습니다. 산악파 내부의 정식 분파라기보다 산악파와 에베르파 모두를 압박한 별도 흐름이었습니다.
전환점1793년 가을 산악파와 에베르 계열 양쪽의 견제로 지도자들이 체포되거나 고립
정당이 아닌 대중 기반
수공업자·상점주·임금노동자와 구역 활동가들이 가격 통제, 생존권, 직접 참여를 요구했습니다. 여러 세력이 지지를 놓고 경쟁했지만 이들 전체가 한 파벌의 지휘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전환점1793년 지롱드파 축출을 압박했고 1794년 대중조직 억제로 약화
더 급진적인 파리 정치클럽
청원·감시·봉기 정치와 가까웠습니다. 당통·데물랭과 에베르는 서로 다른 시기에 이 클럽을 기반으로 삼았으므로 코르들리에를 하나의 ‘에베르당’으로 볼 수 없습니다.
전환점1794년 에베르파 체포에 반발하지 못했고 이후 영향력 상실
전국 지부망을 가진 정치클럽
초기에는 입헌군주파부터 브리소·로베스피에르까지 폭넓게 거쳤습니다. 분열을 거친 1793년에는 산악파와 로베스피에르의 핵심 정치 기반이 됐습니다.
전환점한 시점의 자코뱅파를 혁명 10년 전체의 고정 정당으로 보면 안 됨
1793–1794
과격파·과장파(Exagérés)
에베르의 신문 『페르 뒤셴』, 코르들리에 일부, 파리 코뮌 인맥이 느슨하게 연결됐습니다. 더 강한 경제 통제와 대중 압력, 비기독교화를 밀었고 봉기 호소가 실패한 뒤 숙청됐습니다.
전환점1794년 3월 24일 에베르와 주요 동료 처형
공안위원회 전체와 동일하지 않음
로베스피에르·생쥐스트·쿠통의 인맥은 중앙집중적 혁명정부와 ‘덕과 공포’를 정당화했습니다. 공안위원회는 로베스피에르 개인의 당이 아니었지만 이들은 양쪽 경쟁 세력 제거에 책임이 있었습니다.
전환점양쪽 경쟁자 제거 뒤 고립,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 9일에 몰락
데물랭의 『비외 코르들리에』
당통·데물랭 주변은 1793년 말부터 공포 완화와 수감자 심사, 부패 공격을 요구했습니다. 처음부터 일관된 온건파였던 것도, 단일한 전복 계획이 입증된 것도 아닙니다.
전환점1794년 4월 5일 당통·데물랭 등 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