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탄생
2천 년의 제정을 끝낸 혁명은 왜 공화국이 아니라 군벌의 시대로 이어졌는가?
1911년 10월 우창의 신군 봉기가 각 성의 독립 선언으로 번져 청 왕조가 무너지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이 섰다. 그러나 권력은 혁명파가 아니라 북양군의 위안스카이에게 넘어갔고, 그의 제정 복고 시도와 죽음은 군벌 할거를 남겼다.

무너지는 왕조의 마지막 개혁: 신정과 입헌 준비
1895년 청일전쟁 패배는 30여 년 동안 서양 무기와 기술만 들여오던 양무운동의 한계를 드러냈다. 1898년 광서제는 캉유웨이·량치차오 같은 개혁가를 기용해 교육·군사·경제 제도를 일본식으로 고치는 무술변법을 시작했지만, 약 100일 만에 서태후가 정변을 일으켜 황제를 연금하고 개혁을 뒤집었다. 캉과 량은 처형을 피해 해외로 망명했고, 1900년 서태후가 부추긴 의화단의 외국인 공격은 8개국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과 1901년의 가혹한 배상 조약으로 끝났다. 1 2 3
패전 뒤 조정은 1901년부터 이른바 신정(新政)을 벌였다. 과거제를 없애고 신식 학교와 해외 유학을 장려했으며, 각 성에 무비학당을 세우고 근대식 군대인 신군을 길렀다. 계획은 10년 안에 정규군 50만 명을 갖추는 것이었으나 1911년까지 제대로 훈련된 병력은 약 19만 명이었다. 의화단 배상금이 국가 세입보다 많았기 때문에 세금 징수 체계를 넓히고 경찰과 감옥, 새 법전도 만들었다. 왕조를 살리려는 개혁이었지만, 신식 학교의 학생과 신군 장교, 일본 유학생은 바로 그 왕조를 무너뜨릴 사람들이 되었다. 4 1
정치 개혁은 입헌 준비로 이어졌다. 1905년 다섯 대신이 외국의 헌정을 시찰하러 떠났고, 1906년 9월 서태후는 입헌을 준비하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1908년 8월 일본 메이지 헌법을 본뜬 「흠정헌법대강」이 나와 9년 뒤의 헌법 시행을 약속했고, 1909년 각 성에서 자의국 선거가, 1910년에는 중앙의 자정원 개원이 이어졌다. 1908년 11월 광서제와 서태후가 하루 사이로 죽자 두 살의 푸이가 선통제로 즉위하고 생부 순친왕 짜이펑이 섭정을 맡았다. 4 5
자의국에 모인 신사와 상인은 원래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다. 이들은 국회의 조기 소집을 거듭 청원했으나, 1911년 5월 섭정이 세운 첫 내각은 그 기대를 무너뜨렸다. 경친왕 이쾅을 총리대신으로 한 내각원 13명 가운데 만주족이 8명이고 그중 7명이 황족이었으며 한족은 4명뿐이어서 「황족 내각」이라 불렸다. 개혁의 실권을 만주 황실에 모으려는 이 조치로 입헌파의 상당수가 조정에 등을 돌렸고, 반년 뒤 혁명이 일어났을 때 많은 성에서 이들이 독립 선언의 주역이 되었다. 4 1 6

입헌파와 혁명파: 동맹회와 실패한 봉기들
청 말에는 두 개의 대안이 경쟁했다. 망명한 캉유웨이·량치차오는 보황회를 세워 광서제를 복위시키고 입헌군주제를 실현하려 했다. 반면 쑨원은 1894년 호놀룰루에서 흥중회를 세워 왕조를 개혁이 아니라 타도하려 했고, 1895년 첫 광저우 봉기가 사전에 발각되자 망명해 일본·미국·캐나다·영국을 돌며 자금을 모았다. 동남아시아와 북미의 화교는 혁명 자금의 주된 원천이었고, 동남아시아 화교 신문에서는 입헌파와 혁명파가 군주제와 공화제를 두고 격렬한 지상 논쟁을 벌였다. 1 7 8
1904년에는 국내에서도 혁명 단체가 생겼다. 후난의 황싱·쑹자오런·천톈화는 화흥회를, 상하이의 차이위안페이는 광복회를 세웠다. 1905년 8월 20일 도쿄에서 흥중회와 광복회 등 여러 단체가 합쳐 중국동맹회가 결성되었고 쑨원이 총리, 황싱이 그다음 지도자가 되었다. 강령은 「만주족을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며 민국을 세우고 지권을 고르게 한다(驅除韃虜, 恢復中華, 創立民國, 平均地權)」였다. 결성 당시 회원의 90% 이상이 17~26세였고, 일본 유학생인 왕징웨이·후한민·랴오중카이 같은 청년들이 핵심이었다. 9 1 10
혁명파는 반만주 민족주의를 무기로 삼았다. 쩌우룽의 『혁명군』은 만주족 축출을 외쳤고 장빙린은 「배만(排滿)」을 설파했다. 1906년 12월부터 1908년 4월까지 동맹회가 이끈 일곱 차례의 봉기가 모두 진압되었고, 1907년 7월 광복회의 쉬시린이 안칭에서 안후이 순무 언밍을 암살하고 봉기했다가 처형되자 그와 함께 사오싱의 다퉁 학당을 이끌던 여성 혁명가 추진도 그곳에서 체포되어 7월 15일 처형되었다. 1910년 왕징웨이는 섭정 짜이펑을 암살하려다 붙잡혀 종신형을 받았다. 1908년부터 혁명파는 신군 안으로 조직을 넓히는 데 힘을 쏟았다. 1 11 9 12
1910년 11월 페낭 회의에서 쑨원과 동맹회 지도부는 광저우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하고 말레이반도 화교에게서 자금을 모았다. 1911년 4월 27일 황싱이 이끈 백여 명이 양광 총독 관저를 습격했으나 총독은 담을 넘어 달아났고 청의 증원군에 거의 전멸했다. 황싱은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 수습된 시신 86구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72명은 「황화강 72열사」로 기려졌고, 거사 전날 린줴민이 아내에게 남긴 편지는 혁명파의 명분을 널리 알렸다. 이 봉기는 우창 봉기 전의 마지막 실패였다. 13 10 9
철도와 신군: 보로 운동과 우창의 하룻밤
직접적 계기는 철도였다. 1905년 쓰촨성은 청두에서 우한까지 1,238킬로미터를 잇는 천한(川漢) 철도 회사를 세우고 주식을 팔았으며, 지주에게는 수확의 3%를 특별세로 걷고 그 대가로 주권을 주었다. 1911년까지 모인 은 약 1,198만 냥 가운데 77.5%가 이 세금이었으니 쓰촨의 신사와 상인 상당수가 주주였던 셈이다. 그러나 부패와 내분으로 공사는 거의 진척되지 않았다. 의화단 배상금에 쪼들리던 조정은 5월 9일 우전부 대신 성쉬안화이의 주도로 모든 민영 간선 철도를 국유화하고, 5월 20일 영국·독일·프랑스·미국 은행단과 1,000만 파운드 차관 계약을 맺어 철도 운영권을 담보로 넘겼다. 14 1
쓰촨의 주주들은 은 대신 국채로, 그것도 다른 성보다 훨씬 적게 보상한다는 데 분노했다. 6월 17일 자의국의 푸뎬쥔 등이 보로동지회를 결성했고(보로(保路)는 「철도를 지킨다」는 뜻이다), 8월 청두의 집회에는 1만 명이 넘게 모여 동맹 휴학과 철시가 이어졌다. 9월 1일 주주 총회가 납세 거부를 결의하자 9월 7일 총독 자오얼펑이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석방을 요구하는 군중에게 발포해 청두에서만 32명이 죽었다. 이 「청두 혈안」 뒤 동맹회와 가로회가 이끄는 동지군이 청두를 포위했고, 조정은 후베이·후난 총독 돤팡에게 후베이 신군을 이끌고 쓰촨으로 가게 했다. 우한의 방비는 그만큼 얇아졌다. 14 15
우한에서는 신군 안의 혁명 단체인 문학사와 공진회가 9월 24일 신군 각 부대 대표 60명과 함께 봉기 지휘부를 세우고 장이우를 총사령, 쑨우를 참모장으로 뽑았다. 중추절인 10월 6일로 잡은 거사일은 준비 부족으로 미뤄졌다. 10월 9일 한커우 러시아 조계에서 쑨우가 폭탄을 만들다 사고가 나 크게 다쳤고, 병원에서 신원이 드러나면서 당원 명부가 청 당국에 넘어갔다. 후광 총독 루이청은 혁명파를 잡아들여 몇몇 주요 인물을 처형했다. 검거를 기다리느니 먼저 일어나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15 1
10월 10일 저녁 7시 무렵 공병대의 슝빙쿤 등이 먼저 총을 들었고, 임시 지휘관 우자오린이 이끈 신군은 밤새 총독 관저를 공격했다. 루이청이 달아나자 청군은 무너졌고 11일 아침 우창 전체가 혁명군 손에 들어왔다. 혁명파에게는 지휘를 맡길 명망가가 없었다. 쑨원은 미국에서 화교를 상대로 모금 중이었고 황싱과 쑹자오런도 제때 오지 못했다. 그래서 신군 제21혼성협(여단)의 협통 리위안훙을 끌어내 후베이 군정부 도독으로 앉혔는데, 그는 아내의 침대 밑에 숨어 있다가 총구 앞에서 끌려 나왔다고 전한다. 12일 혁명군은 한커우와 한양까지 차지했다. 15 16 3
양샤 전투와 각 성의 독립
조정은 10월 14일 인창과 펑궈장에게 북양군을 맡겨 우한으로 보냈고, 1908년 섭정 짜이펑에게 파면되어 물러나 있던 위안스카이를 후광 총독으로 다시 불렀다. 북쪽 철도역 류자먀오를 둘러싼 첫 싸움에서 철도 노동자의 도움을 받은 혁명군이 이기자, 조정은 인창을 경질하고 실권을 위안에게 넘겼다. 펑궈장의 제1군과 돤치루이의 제2군은 10월 말 중포와 기관총으로 한커우를 공격했고, 펑궈장은 저항하는 시가에 불을 질러 사흘 동안 도시의 상당 부분을 태웠다. 11월 1일 한커우가 함락되었다. 17 18 19
10월 28일 상하이에서 온 황싱이 11월 3일 혁명군 지휘를 넘겨받았다. 그는 한양 방어를 주장한 쑨우 등의 의견을 물리치고 한커우 탈환을 시도했으나 11월 17~18일의 도하 공격은 8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실패했다. 11월 21일부터 북양군이 한양을 공격했고, 후베이와 후난 부대 사이의 불신 속에 이레 밤낮의 시가전 끝에 혁명군은 27일 한양에서도 물러났다. 한양을 지키다 죽은 혁명군과 주민은 3,300명이 넘었다. 그러나 41일 동안의 버팀은 헛되지 않았다. 그 사이 후베이 밖의 13개 성이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17 10
각 성의 「광복」은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10월 22일 후난에서는 동맹회의 자오다펑이 신군과 함께 창사를 차지했는데, 창사의 중학생이던 마오쩌둥은 이때 혁명군의 일개 병사로 들어가 반년 동안 복무했다. 같은 날 산시(陝西)에서는 시안의 만주족 거주 구역이 공격당해 1만~2만 명으로 추산되는 만주족이 학살되었다. 29일 산시(山西)의 옌시산, 30일 윈난의 차이어가 신군을 이끌고 봉기했고, 차이어가 가르치던 윈난 무비학당 출신 주더도 이 군대에 있었다. 11월 3일에는 상하이에서 천치메이가, 4일에는 항저우에서 젊은 장제스 등이 봉기했다. 1 20 21 22
많은 성에서 독립은 혁명이라기보다 타협이었다. 장쑤에서는 입헌파와 신사가 청의 순무 청더취안을 설득해 그 자신을 도독으로 한 군정부를 세웠고, 안후이도 순무가 독립을 선언했다. 광둥은 후한민의 설득으로 해군 지휘관들이 돌아서면서 11월 9일 독립했으며, 쓰촨은 11월 27일 감옥에서 풀려난 푸뎬쥔을 수반으로 독립했다. 안후이에서는 천두슈가 새 도독 밑에서 비서장을 맡았다. 12월 2일에는 장쑤·저장 연합군이 난징을 점령했다. 변경에서는 12월 29일 외몽골이 복드 칸을 군주로 독립을 선포했고, 티베트에서도 청군이 쫓겨났다. 1 23 24 25
남북 협상과 난징 임시정부
혁명이 번지자 조정은 11월 1일 위안스카이를 내각 총리대신으로 임명하고, 3일에는 입헌군주제로 바꾸는 「19신조」를 서둘러 공포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위안은 한양을 되찾아 북양군의 우위를 보인 뒤 공격을 멈추었다. 혁명을 완전히 진압하면 자신은 다시 쓸모없어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12월 1일 휴전이 성립했고, 12월 18일 상하이에서 위안의 대표 탕사오이와 혁명파 대표 우팅팡의 남북 의화가 열렸다. 열강의 은행들이 어느 쪽에도 돈을 빌려주지 않은 것이 양쪽을 협상으로 몰았다. 위안이 황제를 퇴위시키면 남방이 그를 대총통으로 받든다는 것이 합의의 골자였다. 1 17 18
쑨원은 우창 봉기 소식을 미국에서 신문으로 알았고, 12월 25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12월 29일 난징에 모인 17개 성 대표 45명이 성마다 한 표씩 던진 선거에서 그는 17표 중 16표를 얻어 임시대총통에 뽑혔다. 1912년 1월 1일 쑨원은 중화민국 수립을 선포하고 이날을 민국 원년 1월 1일로 삼았다. 리위안훙이 부총통이 되었고, 황싱이 육군총장 겸 참모총장, 차이위안페이가 교육총장, 입헌파 실업가 장젠이 실업총장을 맡았다. 국기로는 한·만·몽·회·장 다섯 민족의 화합을 뜻하는 오색기가 채택되었다. 26 15 1
그러나 난징 정부에는 돈도 군대도 없었다. 각 성의 군정부는 저마다의 군대를 거느렸고, 북양군에 맞설 통일된 혁명군은 없었다. 위안이 대총통이 되기를 거부하고 다시 싸운다면 공화국은 내전이나 열강의 개입 앞에 무너질 수 있었다. 쑨원은 위안에게 자리를 넘기겠다고 일찍부터 약속했다. 레닌은 1912년 7월 쑨원의 강령을 읽고 그를 “전투적이고 진실한 민주주의”의 대표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위안스카이 같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는 어제는 황제에게 굽실거리다가 혁명의 힘을 보고 황제를 배신했으며 내일은 민주파를 배신할 수 있는 무리라고 경고했다. 26 7 27
퇴위 조서와 임시약법: 타협으로 선 공화국
1912년 1월 16일 동맹회 단원 18명이 베이징 둥화먼에서 위안스카이의 마차에 폭탄을 던져 호위병 열 명가량이 죽었지만 위안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1월 22일 쑨원은 위안이 황제의 퇴위를 지지하면 총통직을 넘기겠다고 공표했다. 위안은 한편으로 융유태후에게 혁명군이 베이징에 이르기 전에 퇴위하지 않으면 황실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압박하고, 다른 한편으로 돤치루이를 앞세운 북양군 장군 50여 명이 공화제를 요구하는 전보를 치게 했다. 2월 3일 태후는 위안에게 퇴위 조건 협상의 전권을 주었다. 1 6 19
2월 12일 융유태후가 여섯 살 선통제의 이름으로 퇴위 조서를 내렸다. 조서는 “인심이 향하는 곳에서 천명을 알 수 있다”며 “통치권을 전국에 공개하여 공화 입헌 국체로 정한다(將統治權公諸全國,定為共和立憲國體)”고 선언하고, 위안스카이에게 전권으로 임시 공화정부를 조직하게 하면서 만·한·몽·회·장 다섯 민족의 영토를 온전히 합쳐 하나의 중화민국으로 삼으라고 했다. 이 조항은 뒤에 중화민국이 청의 모든 영토를 물려받는다는 법적 근거로 쓰였다. 기초자는 장젠이라고 알려졌으나, 당시 《선바오》는 다른 관료의 초안을 쉬스창이 고쳤다고 보도했다. 6 1
「청 황제 퇴위 후 우대 조건」에 따라 푸이는 황제 칭호를 유지하고 외국 군주의 예우를 받으며 자금성 북쪽 내정에 살 수 있었고, 공화국은 황실에 해마다 은 400만 냥을 주기로 했다. 이 돈은 제대로 지급된 적이 없었고, 자금성 안의 「소조정」은 1924년 군벌 펑위샹이 우대 조건을 폐지하고 푸이를 내쫓을 때까지 남았다. 혁명은 만주족 통치를 끝냈지만 국가기구와 군대는 청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베이징 등지에서는 만주족을 향한 폭력이 이어졌고, 기인(旗人)의 생계가 무너지면서 많은 만주족이 깊은 가난에 빠졌다. 5 6 1
쑨원은 자리를 넘기는 조건으로 수도를 난징에 두라고 요구했다. 임시참의원은 2월 14일 베이징 수도안을 20 대 5로 가결했다가 이튿날 19 대 6으로 난징을 택했다. 위안을 남쪽으로 맞으러 차이위안페이와 왕징웨이가 베이징에 갔으나 2월 29일 밤 위안에게 충성하는 차오쿤의 부대가 폭동을 일으켜 시가를 약탈하고 불을 질렀고, 위안은 이를 핑계로 북쪽에 남았다. 3월 10일 그는 베이징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그 직전인 3월 8일 참의원은 위안의 권력을 묶으려고 「중화민국 임시약법」을 통과시켜 11일 공포했다. 약법은 주권이 국민 전체에 있다고 하고, 총통의 명령에 국무원의 부서를 요구하는 내각제를 택했다. 2월에 교육부 관리가 된 루쉰은 난징에서 일하다 부처를 따라 베이징으로 옮겼다. 1 26 28 29 30
국회와 암살: 첫 총선과 1913년의 제2혁명
1912년 3월 3일 비밀결사였던 동맹회는 공개 정당으로 바뀌었고, 5월에는 회원 약 55만 명을 거느린 중국 최대의 정당이 되었다. 8월 25일 동맹회는 다른 정파들과 합쳐 국민당이 되었다. 1912년 말부터 1913년 초까지 치러진 첫 국회 선거에서 투표권은 신사·지주·중간층 상인 같은 성인 남성의 약 10%, 4천만 명 정도에게만 있었다. 선거를 조직한 서른 살의 쑹자오런 덕분에 국민당은 중의원 596석 가운데 269석, 참의원 274석 가운데 123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다. 쑹자오런은 의회가 내각을 구성해 총통의 권한을 제한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며 총리 후보로 꼽혔다. 9 31 32
1913년 3월 20일 베이징으로 가던 쑹자오런은 상하이역에서 두 발의 총을 맞고 이틀 뒤 숨졌다. 저격범 우스잉은 위안 정권과 가까운 상하이 암흑가 인물 잉구이신이 고용한 자였고, 수사의 증거는 국무총리 자오빙쥔을 가리켰다. 그러나 주요 연루자들이 잇달아 살해되거나 사라져 위안은 공식적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4월 8일 국회가 개원했고, 같은 달 위안은 국회의 승인 없이 영국·프랑스·러시아·독일·일본 은행단에서 2,500만 파운드의 「선후대차관」을 들여와 북양군의 군비로 썼다. 국회의 국민당 의원들은 탄핵을 요구했다. 32 33 1
위안은 6월 장시의 리례쥔, 광둥의 후한민, 안후이의 바이원웨이 등 국민당계 도독을 차례로 파면했다. 7월 12일 리례쥔이 후커우에서 장시의 독립을 선언하자, 15일 황싱이 난징에서 장쑤를, 이어 안후이·상하이·광둥·푸젠, 8월에는 쓰촨과 후난이 독립을 선언했다. 이것이 계축년의 「제2혁명」이다. 그러나 반위안군은 급조된 데다 급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7월 22일 쉬저우에서 펑궈장·장쉰의 북양군에 패했다. 9월 1일 장쉰의 군대가 난징을 함락하고 약탈했으며, 9월 12일 충칭이 넘어가며 봉기는 두 달 만에 끝났다. 쑨원과 황싱은 일본으로 망명했고, 바이원웨이 밑에서 일하던 천두슈도 그와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33 10 23 34
승리한 위안은 10월 6일 국회의 정식 대총통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그 다음 날 영국·프랑스·러시아·독일·일본 등 13개국이 일제히 중화민국을 승인했다(미국은 5월 2일 열강 가운데 처음 승인했다). 11월 위안은 국민당을 불법화했고, 국회는 1914년 1월 정식으로 해산되었다. 5월 1일 위안이 고른 66명이 만든 「중화민국 약법」은 총통에게 군사·재정·외교와 국민의 권리에 대한 사실상 무제한의 권한을 주었다. 각 성에는 군대를 거느린 장군이 민정 장관과 나란히 서게 되어, 뒤의 군벌 할거의 토대가 놓였다. 리위안훙은 부총통 자리를 지켰으나 베이징에 사실상 연금되었고, 윈난 도독에서 물러난 차이어도 베이징에서 감시를 받았다. 1 33 18 16 21

21개조 요구와 황제가 되려 한 대총통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1914년 8월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칭다오와 산둥의 독일 권익을 점령했다. 1915년 1월 18일 히오키 에키 공사는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이 마련한 21개조 요구를 위안에게 은밀히 건넸다. 다섯 묶음으로 된 요구는 산둥의 독일 권익 승계, 남만주·동부 내몽골의 조차 연장과 특권, 한예핑 제철 회사 지배, 연안 할양 금지에 더해, 제5호에서 중국 정부가 일본인 고문을 두어 재정과 경찰을 맡기게 했다. 중국 정부는 내용을 열강에 흘려 시간을 벌었고, 일본은 제5호를 뺀 요구를 5월 7일 이틀 기한의 최후통첩으로 내밀었다. 위안은 5월 25일 조약에 서명했다. 전국에서 일본 상품 불매가 일어났다. 35 18
같은 해 여름 제정 복고 운동이 시작되었다. 8월 3일 위안의 미국인 헌법 고문 프랭크 굿나우는 중국에는 공화제보다 군주제가 낫다는 글을 발표했고, 양두는 옌푸·류스페이 등과 「주안회(籌安會)」를 꾸려 「공화는 중국에 맞지 않는다」고 선전했다. 각지의 「청원단」이 국체 변경을 요구하는 청원을 쏟아냈다. 진보당을 이끌던 량치차오는 《대중화》에 국체 변경에 반대하는 글을 실었다. 1915년 12월 11일 선출된 국민대표 1,993명이 만장일치로 입헌군주제를 의결하고 위안을 황제로 추대했으며, 위안은 두 번째 추대를 받아들여 12일 「중화제국」을 선포했다. 연호는 홍헌(洪憲)이었고 등극 의식은 1916년 1월 1일로 잡혔다. 교육부에 있던 루쉰도 공자 제례에 억지로 동원되었다. 36 37 30
반대는 위안의 예상을 넘어섰다. 량치차오의 제자 차이어는 11월 감시를 뚫고 베이징을 빠져나가 일본을 거쳐 윈난으로 돌아갔다. 12월 23일 그는 이틀 안에 제정을 취소하라는 전보를 보냈고, 25일 탕지야오·리례쥔과 함께 윈난의 독립을 선언하고 호국군을 일으켰다. 27일 구이저우가 뒤따랐다. 위안은 8만 명을 보냈으나 쓰촨에서 패했고, 주더도 호국군의 연대장으로 싸웠다. 급료를 한 번도 받지 못한 북양군 장군들은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았고, 펑궈장·돤치루이 같은 측근도 제정에 반대했다. 1916년 3월에는 광시가, 4월에는 광둥·저장이 독립했으며, 일본은 위안 타도 쪽으로 돌아섰다. 진보당 지부들도 각 성에서 독립을 부추겼다. 21 38 36 37 22 19 39
위안은 3월 22일 제정을 취소하고 이튿날 홍헌 연호를 폐지했다. 황제로 있은 날은 83일이었다. 그는 대총통 자리로 돌아가려 했지만 퇴진 요구는 멈추지 않았고, 5월에는 산시(陝西)·쓰촨·후난까지 독립을 선언했다. 6월 6일 위안은 신부전으로 쉰여섯에 죽었다. 리위안훙이 대총통을 이었고 7월 14일 각 성이 독립 선언을 거두면서 호국전쟁은 끝났다. 그해 10월 황싱이 상하이에서, 11월 차이어가 치료차 간 일본 후쿠오카에서 잇달아 병사했다. 위안의 죽음으로 북양군을 묶어 두던 마지막 끈이 끊어졌다. 36 38 21 10 18
복벽과 호법: 군벌 시대의 개막
1916년 6월 리위안훙은 임시약법을 되살리고 국무총리에 돤치루이를 앉혔으며, 8월 1일 2년 반 만에 국회가 다시 열렸다. 그러나 실권은 돤에게 있었다. 독일과 단교하고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문제를 두고 둘은 크게 부딪쳤고, 돤이 일본에서 비밀 차관을 들여온 사실이 드러나자 리는 1917년 5월 23일 그를 파면했다. 돤은 톈진으로 물러나 군대를 모았고 장군들은 정부를 버렸다. 리는 중재를 맡긴 장쉰의 요구대로 6월 13일 국회를 해산했다. 그러자 변발을 자르지 않아 「변발 장군」이라 불리던 청 충신 장쉰은 7월 1일 새벽 베이징에서 캉유웨이 등과 함께 푸이의 복위를 선포했다. 16 40 34 8
「정사(丁巳) 복벽」은 열이틀 만에 끝났다. 리위안훙은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하며 펑궈장을 대리 총통으로, 돤치루이를 다시 총리로 임명했고, 돤은 톈진의 군대를 이끌고 베이징으로 진격했다. 공화국 군의 비행기가 자금성에 폭탄 세 발을 떨어뜨렸는데, 중국 공군의 첫 공중 폭격이었다. 7월 12일 장쉰은 공사관 구역으로 달아났고 캉유웨이도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리는 복직을 거부했고, 돤은 복벽을 진압한 공으로 정부를 장악해 8월 14일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해산된 국회는 다시 소집되지 않았고, 돤은 량치차오와 함께 새 참의원을 꾸렸다. 40 8 41
쑨원은 국회와 임시약법을 지키겠다며 「호법(護法)」을 내걸었다. 1917년 8월 해군 일부와 옛 국회의원 약 100명이 광저우에 모여 군정부를 세웠고, 9월 1일 의원 91명 가운데 84명의 표로 쑨원을 대원수로 뽑았다. 이로써 베이징과 광저우에 두 개의 정부가 병존했다. 그러나 광저우 군정부의 실력은 윈난의 탕지야오와 광시의 루룽팅 같은 남방 군벌에게 있었고, 이들과 다툰 끝에 쑨원은 1918년 광저우를 떠났다. 국제적으로 승인된 정부는 여전히 베이징 정부였지만, 그 주인은 군대를 가진 자가 번갈아 차지했다. 41 42 43
돤치루이의 안후이파, 펑궈장과 그 뒤를 이은 차오쿤·우페이푸의 직례파, 장쭤린의 펑톈파가 베이징을 번갈아 장악했다. 1920년 직환전쟁에서 돤이 밀려났고, 1922년과 1924년 두 차례의 직봉전쟁이 화베이를 휩쓸었으며, 1924년에는 펑위샹이 우페이푸를 배반하고 베이징을 차지했다. 군벌 전쟁은 세금과 아편, 외국 차관으로 치러졌고 농촌은 징발과 약탈에 시달렸다. 우페이푸는 철도 노동자의 파업을 처형으로 짓눌렀다. 「군벌(軍閥)」이라는 말 자체가 1918년 12월 천두슈가 《매주평론》에서 일본어 군바쓰(軍閥)를 들여와 처음 쓴 것이다. 이 혼란은 5·4 세대에게 「공화」라는 이름이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쳤고, 쑨원에게는 자기 군대와 대중 정당 없는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남겼다. 43 44 19
평가: 혁명인가, 왕조 교체인가
신해혁명을 어떻게 볼지는 뒤의 정치와 얽혀 있다.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모두 스스로를 이 혁명의 정당한 계승자로 여기고 쑨원을 국부로 받든다. 10월 10일은 타이완에서 중화민국의 국경일이고, 대륙에서는 신해혁명 기념일이다. 국민당은 이 혁명을 쑨원이 이끈 국민혁명의 출발로 보았고, 공산당은 신민주주의 혁명에 앞선 「구민주주의 혁명」의 미완성으로 규정했다.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론」(1940)에서 이 혁명이 “사회적 성격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지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며”, 그 적들이 아직 강하므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썼다. 1 45 3
마르크스주의 해석의 초점은 계급 지도력이었다. 마오는 1911년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아직 독립된 계급 세력으로 나서지 못하고 소부르주아와 부르주아를 뒤따랐을 뿐이라고 보았고, 「중국 혁명과 중국공산당」(1939)에서는 신해혁명이 “실패한” 까닭을 프롤레타리아가 의식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고 공산당이 아직 없었다는 데서 찾았다. 그보다 앞서 레닌은 1912년 쑨원의 토지 강령을 러시아 나로드니키에 견주면서, 자본주의를 「막겠다」는 그의 이론은 반동적이지만 지대를 국가에 돌리는 토지 국유화 강령은 오히려 가장 철저한 자본주의적 농업 강령이라고 분석했다. 레닌은 위안스카이가 군주제와 혁명 사이를 오갈 것이라 내다보았고, 상하이 같은 도시가 늘면 중국 프롤레타리아가 자기 정당을 만들 것이라고 썼다. 1913년의 「아시아의 각성」은 중국을 정치 활동이 들끓는 땅으로 그렸다. 45 46 27 47
사회사 연구는 혁명이 사회구조를 거의 바꾸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혁명의 주된 참여자는 군인과 전통 관료, 지방 신사였고, 이들은 혁명 뒤에도 지역 권력을 지켰으며 일부는 군벌이 되었다. 민중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루쉰은 혁명 10년 뒤인 1921년 『아Q정전』에서 이 공허를 풍자했다. 소설 속 마을의 지주 집안은 권력을 지키려고 재빨리 혁명파가 되고, 혁명에 끼어들려던 날품팔이 아Q는 영문도 모른 채 처형된다. 혁명의 폭력도 다시 보고 있다. 시안에서만 만주족 1만~2만 명이 죽었다는 추산이 있고, 난징·전장·타이위안·푸저우에서도 만주족 주둔지가 학살당했다. 각 성의 독립 수도 기준에 따라 13개 성(본토 18개 성 가운데), 14개 성(양샤 전투 기간), 17~18개 성(연말까지)으로 서술이 갈린다. 1 48 17 6 3
그럼에도 「황제 없는 중국」은 되돌릴 수 없는 변화였다. 위안스카이와 장쉰의 두 차례 복고는 모두 몇 달, 몇 주 만에 무너졌다. 사회주의 운동에 이 혁명이 남긴 것은 무엇보다 실패의 교훈이었다. 혁명기 창사에서 장캉후의 중국사회당 팸플릿으로 사회주의를 처음 접한 마오쩌둥, 안후이 군정부에서 일하다 제2혁명의 패배로 망명한 천두슈, 차이어의 호국군에서 싸운 주더는 모두 10년 안에 공화제 너머의 답을 찾아 나섰다. 쑨원 자신도 결국 소련의 원조를 받아 당과 군대를 다시 만드는 길을 택했다. 마오가 쓴 대로 5·4 운동은 신해혁명에 없던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대를 내세운 새 단계의 시작이었다. 20 23 22 43 45
결과
황제 체제는 사라졌지만 통일된 공화국은 서지 못했다. 국회와 헌법은 무력 앞에 무력했고, 쑨원의 국민당은 남방으로 밀려났으며, 이 실패의 경험이 5·4 세대가 「공화」 너머의 해답을 찾게 만들었다.
연표와 지도
1905.08 청 제국
- 청 조정
- 혁명군·독립을 선언한 성 (1912년부터 중화민국)
- 외몽골 (보그드 칸국)
경계는 근사치입니다. 각 성이 독립을 선언한 날짜를 바탕으로 현대 성 경계(쓰촨은 충칭 포함, 직례는 허베이·베이징·톈진, 광둥은 하이난 포함)로 칠했습니다. 독립 선언이 성 전체의 장악을 뜻하지는 않았고, 청군이 되찾은 한커우·한양 같은 곳은 생략했습니다. 산둥은 11월 13일 독립을 선언했다가 24일 철회했습니다. 티베트는 1912년 청군을 몰아냈지만 지도에 따로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 11898.06.11–
09.21 무술변법광서제가 캉유웨이·량치차오를 기용해 개혁 조서를 잇달아 냈으나, 9월 21일 서태후의 정변으로 황제가 연금되고 개혁이 끝났다.
- 21901.04신정 시작
의화단 사건 뒤 조정이 개혁 총괄 기구를 세워 신군 창설, 과거제 폐지, 신식 학교 설립 등 청 말 신정을 시작했다.
- 31905.08도쿄에서 중국동맹회 결성
쑨원의 흥중회와 화흥회·광복회가 합쳐 「청 타도, 공화 수립, 토지 균등」을 강령으로 삼았다.
- 41907.07.15추진 처형
쉬시린의 안칭 봉기가 실패한 뒤 사오싱 다퉁 학당에서 체포된 여성 혁명가 추진이 처형되었다.
- 51908.11.14광서제와 서태후 사망
광서제가 죽고 이튿날 서태후도 죽었다. 두 살의 푸이가 선통제로 즉위하고 순친왕 짜이펑이 섭정이 되었다.
- 61911.04.27황화강 봉기
황싱이 이끈 백여 명이 양광 총독 관저를 습격했다가 거의 전멸했다. 신원이 확인된 72명이 「황화강 72열사」로 기려졌다.
- 71911.05철도 국유화와 쓰촨 보로운동
청 조정이 민영 철도를 외채로 국유화하자 쓰촨의 주주와 신사층이 봉기했고, 진압을 위해 후베이의 신군이 차출되었다.
- 81911.05「황족 내각」 구성
섭정이 세운 첫 내각원 13명 가운데 만주족이 8명, 그중 7명이 황족이어서 입헌파의 기대가 무너졌다.
- 91911.09.07청두 혈안
총독 자오얼펑이 보로동지회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석방을 요구하는 군중에게 발포해 청두에서 32명이 죽었다.
- 101911.10–
12 각 성의 독립 선언양샤 전투가 벌어진 41일 사이 후베이 밖의 13개 성이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대부분은 신군과 지방 신사·입헌파의 타협이었다.
- 111911.10.10우창 봉기
혁명파의 폭탄 사고로 명단이 드러나자 신군 공병대가 먼저 봉기해 하룻밤 사이 우창을 장악했고, 리위안훙이 도독으로 추대되었다.
- 121911.10.22창사와 시안의 봉기
후난에서 동맹회와 신군이 창사를 차지했고, 산시(陝西)에서는 시안의 만주족 거주 구역이 공격당해 많은 만주족이 학살되었다.
- 131911.11.01한커우 함락과 위안스카이 총리 임명
북양군이 불타는 한커우를 점령했고, 같은 날 조정은 위안스카이를 내각 총리대신에 임명했다.
- 141911.11.27한양 함락
이레 밤낮의 시가전 끝에 혁명군이 한양에서 물러났다. 한양을 지키다 죽은 혁명군과 주민은 3,300명이 넘었다.
- 151911.12.18남북 의화
휴전 속에 상하이에서 위안스카이의 대표 탕사오이와 혁명파의 우팅팡이 협상을 시작했다.
- 161911.12.29쑨원의 임시대총통 당선
난징에 모인 17개 성 대표의 선거에서 쑨원이 17표 중 16표를 얻었다. 같은 날 외몽골은 복드 칸을 군주로 독립을 선포했다.
- 171912.01.01중화민국 임시정부 수립
난징에서 쑨원이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재정과 군사력은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에 미치지 못했다.
- 181912.02.12선통제 퇴위
위안스카이의 압박으로 청 조정이 퇴위 조서를 내렸고, 쑨원은 약속대로 총통직을 위안에게 넘겼다.
- 191912.03.10위안스카이 취임과 임시약법
위안이 베이징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했고, 이튿날 내각제를 규정한 「중화민국 임시약법」이 공포되었다.
- 201912.08.25국민당 결성
동맹회가 다른 정파들과 합쳐 국민당이 되었다. 쑹자오런이 이끈 국민당은 이어진 총선에서 제1당이 되었다.
- 211913.03쑹자오런 암살과 제2혁명
총선에서 승리한 국민당의 지도자 쑹자오런이 상하이역에서 피살되었다. 남방 성들의 무장 봉기(제2혁명)는 두 달 만에 진압되었다.
- 221913.10.06위안스카이 정식 대총통 선출
제2혁명을 진압한 위안이 국회에서 정식 대총통에 선출되었고, 이튿날 영국·일본 등 13개국이 중화민국을 승인했다.
- 231914.01국회 해산
위안스카이는 국민당을 해산하고 이어 국회를 정지시켰다. 1914년 약법은 총통에게 사실상 전제권을 주었다.
- 241915.01.1821개조 요구
일본 공사가 위안에게 산둥·남만주의 권익과 고문 고용을 요구하는 21개조를 은밀히 건넸다. 위안은 5월 25일 수정된 조약에 서명했다.
- 251915.12제정 선포와 호국전쟁
위안이 「중화제국」 황제를 칭하자 윈난의 차이어가 호국군을 일으켰고 남방 성들이 잇달아 독립을 선언했다.
- 261916.03.22제정 취소
남방 성들의 독립과 북양군 장군들의 냉담 속에 위안이 83일 만에 제정을 취소했다.
- 271916.06.06위안스카이 사망
제정을 취소한 지 두 달 반 만에 위안이 병사했다. 북양군은 안후이파·직례파·펑톈파로 갈라져 군벌 시대가 시작되었다.
- 281917.07.01–
12 장쉰의 복벽「변발 장군」 장쉰이 캉유웨이 등과 함께 푸이의 복위를 선포했으나, 돤치루이의 군대에 밀려 7월 12일 무너졌다.
- 291917.09.10광저우 호법 군정부
임시약법 수호를 내건 옛 국회의원들이 광저우에 군정부를 세우고 쑨원을 대원수로 추대했다. 베이징과 광저우에 두 정부가 병존했다.
관련 인물 25명
지도부4
동맹회를 이끌었고 1912년 1월 난징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한 뒤 위안스카이에게 자리를 넘겼다.
동맹회의 제2인자 · 양샤 전투 혁명군 총지휘황싱1874–1916황화강 봉기를 이끌었고 양샤 전투에서 혁명군을 지휘했으며 난징 임시정부의 육군총장이 되었다. 1913년 제2혁명 때 난징에서 장쑤의 독립을 이끌었다.
국민당을 이끈 내각제론자쑹자오런1882–19131912년 국민당 결성을 주도하고 첫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1913년 3월 상하이역에서 피격되어 숨졌다.
호국전쟁을 일으킨 윈난의 장군차이어1882–19161911년 쿤밍에서 봉기해 윈난 도독이 되었고, 1915년 12월 윈난의 독립을 선언하고 호국군을 이끌어 위안스카이의 제정을 무너뜨렸다.
집행 · 지휘2
참여12
1910년 섭정왕 암살 미수로 투옥되었다가 혁명 뒤 풀려나 쑨원의 측근이 되었다.
상하이 봉기의 청년 장교장제스1887–1975일본에서 돌아와 1911년 11월 상하이·항저우 봉기에 참여했다.
신해혁명 참가자주더1886–1976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했다.
후베이 군정부 도독 · 부총통리위안훙1864–1928우창 봉기 때 반강제로 도독에 추대되었고 난징과 베이징 정부의 부총통을 거쳐 1916년 대총통이 되었다.
동맹회의 여성 혁명가추진1875–1907동맹회의 저장 책임자로 사오싱 다퉁 학당을 이끌다 1907년 쉬시린의 봉기 실패 뒤 처형되었다.
입헌파 계몽가 · 진보당 지도자량치차오1873–1929혁명 전에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했으나 1915년 위안스카이의 제정에 반대하는 글을 쓰고 제자 차이어의 봉기를 이끌어 냈다.
혁명군의 일개 병사마오쩌둥1893–1976창사의 중학생으로 1911년 혁명군에 들어가 반년 동안 병사로 복무했고, 이때 장캉후의 팸플릿으로 사회주의를 처음 접했다.
안후이 군정부 비서장천두슈1879–1942혁명 뒤 안후이 군정부의 비서장이 되었고, 1913년 제2혁명이 실패하자 바이원웨이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1918년 「군벌」이라는 말을 처음 썼다.
광복회 창립자 · 난징 임시정부 교육총장차이위안페이1868–19401904년 상하이에서 광복회를 세웠고, 1912년 난징 임시정부의 교육총장으로 위안스카이를 남쪽으로 맞으러 베이징에 갔다.
동맹회의 일본 유학생 회원랴오중카이1877–1925왕징웨이·후한민과 함께 동맹회의 핵심을 이룬 일본 유학생 출신 혁명가였다.
외몽골 독립의 군주보그드 칸1869–19241911년 12월 29일 청 왕조의 붕괴를 틈타 외몽골의 독립을 선포하고 복드 칸국의 군주가 되었다.
푸이를 자금성에서 내쫓은 군벌펑위샹1882–19481924년 우페이푸를 배반하고 베이징을 차지했으며, 청 황실 우대 조건을 폐지하고 푸이를 내쫓았다.
반대 · 저항4
펑톈에서 혁명파를 진압하며 세력을 키워 뒤에 펑톈파 군벌이 되었다.
무술변법의 지도자 · 보황파캉유웨이1858–1927입헌군주제를 내걸고 혁명파와 맞섰으며, 공화국 수립 뒤에도 제정을 고집해 1917년 장쉰의 복벽에 가담했다.
1917년 복벽을 일으킨 「변발 장군」장쉰1854–19231913년 제2혁명을 진압하며 난징을 약탈했고, 1917년 7월 베이징에서 푸이의 복위를 선포했다가 12일 만에 쫓겨났다.
직례파 군벌우페이푸1874–1939위안스카이가 죽은 뒤 차오쿤과 함께 직례파를 이끌어 베이징을 장악했고, 철도 노동자의 파업을 처형으로 짓눌렀다.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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