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로 운동 (1911)
Railway Protection Movement (1911)
1911년 청 조정이 지방 자본으로 짓던 간선 철도를 국유화하고 그 운영권을 담보로 외국 은행단에서 차관을 들여오자, 주주였던 쓰촨 등지의 신사·상인·농민이 벌인 반대 운동. 9월 청두에서 총독 자오얼펑의 발포로 유혈 사태가 나고 동지군의 무장 봉기로 번졌으며, 진압을 위해 후베이 신군이 차출된 것이 우창 봉기 성공의 한 원인이 되었다.
상세
국유화: 1905년 세워진 천한(川漢) 철도 회사는 청두에서 우한까지 1,238킬로미터를 놓으려고 주식을 팔고 지주의 수확에 3%의 특별세를 매겨 주권을 주었다. 1911년까지 모인 은 약 1,198만 냥 가운데 77.5%가 이 세금이어서 쓰촨의 신사와 상인 상당수가 주주가 되었다. 공사가 부패와 내분으로 지지부진하자, 의화단 배상금에 쪼들리던 조정은 5월 9일 우전부 대신 성쉬안화이의 주도로 민영 간선 철도를 국유화하고 20일 영국·독일·프랑스·미국 은행단과 1,000만 파운드 차관 계약을 맺었다.
쓰촨의 저항: 보상이 은이 아니라 국채였고 다른 성보다 훨씬 적었기 때문에 쓰촨의 반발이 가장 컸다. 6월 17일 자의국의 푸뎬쥔 등이 보로동지회를 결성했고, 8월 청두에서 1만 명이 넘는 집회와 동맹 휴학·철시가 이어졌으며, 9월 1일 주주 총회는 납세 거부를 결의했다. 9월 7일 자오얼펑이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군중에게 발포해 청두에서 32명이 죽었다. 이후 가로회와 동맹회가 이끈 동지군이 청두를 포위했다.
결과: 조정은 돤팡에게 후베이 신군을 이끌고 쓰촨으로 가게 했고, 이로써 우한의 방비가 약해져 10월 10일 우창 봉기가 성공할 수 있었다. 11월 쓰촨은 감옥에서 풀려난 푸뎬쥔을 수반으로 독립했고, 돤팡과 자오얼펑은 혁명군에게 죽었다. 정작 천한 철도는 정치 혼란 속에 수십 년 동안 놓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