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1913

발칸 전쟁

오스만 제국의 유럽 영토를 나눠 갖기로 한 발칸 동맹은 1912년 어떻게 제국을 거의 유럽에서 몰아냈고, 왜 여덟 달 만에 마케도니아를 두고 서로 싸웠으며, 이 두 전쟁은 어떻게 1차 세계대전의 무대를 만들었고, 바젤에 모인 제2인터내셔널과 발칸의 사회주의자들은 이 전쟁에 어떻게 맞섰나?

1912년 러시아의 후원 아래 불가리아·세르비아·그리스·몬테네그로가 비밀 조약으로 발칸 동맹을 맺었다. 10월 8일 몬테네그로가, 17일 나머지 세 나라가 오스만 제국과 전쟁에 들어갔고, 불가리아군은 뤼레부르가즈에서 이겨 콘스탄티노폴리스 앞 차탈자 선까지 진격했으며 세르비아군은 쿠마노보에서, 그리스군은 테살로니키에서 승리했다. 11월 28일 알바니아가 독립을 선언했고, 같은 달 바젤에서는 제2인터내셔널이 임시대회를 열어 전쟁이 유럽 전쟁으로 번지는 것을 막자는 선언을 채택했다. 1913년 1월 통일진보위원회의 쿠데타로 전쟁이 재개되었으나 에디르네·이오아니나·슈코드라가 차례로 함락되었고, 5월 30일 런던 조약으로 오스만은 에노스-미디아 선 서쪽 영토를 잃었다. 마케도니아 분할을 두고 6월 29일 불가리아가 옛 동맹국을 공격하자 세르비아·그리스에 루마니아와 오스만까지 가세했고, 8월 10일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 대부분과 남도브루자를 잃었다.

불가리아세르비아그리스몬테네그로튀르키예마케도니아 문제와 발칸 동맹

19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의 유럽 영토에서 민족국가들이 생겨났지만 그 형성은 끝나지 않았다. 세르비아는 1877~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으로 영토를 넓혔고, 그리스는 1881년 테살리아를 얻었으며, 1878년 자치공국이 된 불가리아는 1885년 동루멜리아를 합쳤다. 세 나라와 몬테네그로는 모두 아직 오스만이 다스리는 루멜리아, 곧 알바니아·마케도니아·트라키아에 남은 동족을 내세워 더 많은 땅을 노렸다. 그 한가운데가 마케도니아였다. 1893년부터 1912년까지 그리스계와 불가리아계 주민 사이에 학교와 교회를 둘러싼 경쟁이 무장 투쟁으로 번졌고, 1904년부터 1908년까지는 그리스·불가리아·세르비아의 무장대가 마케도니아의 기독교 농민, 특히 슬라브어를 쓰는 주민의 민족 귀속을 놓고 게릴라전을 벌였다. 영어 위키백과의 「마케도니아 투쟁」 항목은 20세기 초까지 이 지역 주민 대부분이 뚜렷한 민족 정체성을 갖지 않았고 민족주의 교육과 선전, 테러에 떠밀려 한쪽을 택해야 했다고 쓴다. 1 2

불가리아 쪽 운동의 중심은 1893년 살로니카에서 생긴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기구였다. 처음에는 마케도니아와 아드리아노플 지역의 자치를 목표로 했으나 1903년 일린덴-프레오브라제니예 봉기가 오스만군에 짓밟혀 마을 100여 곳이 불탄 뒤, 자치와 장래의 발칸 연방을 바라는 좌파 「연방파」와 불가리아와의 통합을 바라는 우파 「중앙파」로 갈라졌다. 1908년 청년 튀르크 혁명은 1876년 헌법과 의회를 되살려 발칸의 여러 민족에게 개혁과 자치의 기대를 주었지만, 1909년 반혁명이 실패한 뒤 청년 튀르크 안에서는 민족주의 분파가 우세해졌다. 같은 해 10월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했고 불가리아는 독립을 선언했다. 북쪽 길이 막힌 세르비아의 파시치 정부는 노비파자르 산자크와 코소보 같은 「옛 세르비아」로 눈을 돌렸고,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이 리비아를 잃고 알바니아에서 잇단 봉기가 일어나자 발칸 국가들은 지금이 기회라고 판단했다. 3 1

동맹 교섭은 1911년 하반기부터 모두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러시아의 감독 아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가 1912년 3월 13일 조약을 맺었다. 겉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겨냥했으나 비밀 부속서는 오스만 제국에 맞선 전쟁과 영토 분할을 정했다. 마케도니아는 오흐리드에서 크리바팔랑카에 이르는 선의 동쪽을 불가리아 몫으로 인정한 「무쟁 지역」과 약 1만 1천 제곱킬로미터의 「쟁점 지역」으로 나뉘었고, 쟁점 지역의 귀속은 동맹의 보증인인 러시아 황제가 중재하기로 했다. 1912년 5월 29일 그리스-불가리아 동맹이 영토 분할 규정 없이 맺어졌고, 몬테네그로는 불가리아·세르비아와 차례로 동맹했으며 그리스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와 구두 「신사협정」을 맺었다. 그리스의 가치는 육군보다 에게해를 지배해 오스만의 증원을 막을 해군에 있었다. 이렇게 9월 말까지 발칸 동맹이 갖추어졌지만, 동맹국끼리도 열강과도 오스만 영토를 어떻게 나눌지에 대한 합의는 없었다. 1 4

불가리아튀르키예제1차 발칸 전쟁: 트라키아에서 차탈자까지

9월 26일 오스만 제국이 트라키아에서 동원하자 세르비아와 불가리아가, 30일에는 그리스가 동원령을 내렸다. 국경 문제 교섭이 깨진 몬테네그로가 10월 8일 맨 먼저 선전포고했고, 세르비아·불가리아·그리스는 10월 13일 공동 최후통첩을 보낸 뒤 17일 전쟁에 들어갔다. 영어 위키백과의 「제1차 발칸 전쟁」은 오스만 정부가 10월 1일에 시작한 동원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서둘러 선전포고한 것을 패전의 주원인으로 꼽는다. 개전 때 발칸 동맹군 91만 2천 명이 오스만군 58만 명과 맞섰고, 오스만의 여러 사단은 아직 리비아에서 이탈리아와 싸우고 있었다. 인구 약 2,600만의 제국이었지만 그 4분의 3이 아시아에 살아 증원은 바다를 건너야 했는데, 엘리와 렘노스 해전에서 그리스 해군에 두 번 진 오스만 함대는 에게해를 내주었다. 1 5

동맹의 주력은 불가리아군이었다. 불가리아는 개전 때 모두 59만 9,878명을 동원했고, 페르디난트 1세는 이 전쟁을 「초승달에 맞선 십자가의 정의롭고 위대하며 신성한 투쟁」이라 선언했다. 동부 트라키아에 투입된 29만 7천여 명의 불가리아 3개 군은 오스만군의 공세 계획을 무너뜨리고 크르크킬리세를 저항 없이 차지했으며, 10월 28일부터 11월 2일까지 뤼레부르가즈-프나르히사르 전투에서 12만 6천 명의 오스만군을 격파했다. 투입 병력으로 보아 보불전쟁과 1차 세계대전 사이에 유럽에서 벌어진 가장 큰 전투였다. 요새 에디르네(아드리아노플)에는 6만 1,250명의 수비대가 고립되었다. 오스만군은 수도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차탈자 방어선까지 물러났다. 5 6 7 8

11월 17일 불가리아군은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 공격하겠다고 경고했는데도 17만 6,351명과 대포 462문으로 차탈자 선을 공격했으나, 아시아에서 온 증원군으로 보강한 14만 571명의 오스만군에 막혔다. 뤼레부르가즈 전투 뒤 불가리아군에는 콜레라가 퍼져 있었다. 12월 3일 오스만과 불가리아(세르비아·몬테네그로 대표)는 휴전에 합의했고 강화 교섭은 런던으로 넘어갔다. 그리스는 휴전에 서명하지 않고 에페이로스에서 작전을 이어 갔다. 불가리아가 제1차 전쟁에서 잃은 회복 불가능한 인명은 전사 1만 4천 명, 병사 1만 9천 명으로 모두 3만 3천 명이었다. 5 6 9

세르비아그리스몬테네그로알바니아마케도니아·알바니아 전선과 알바니아 독립

세르비아의 주목표는 바르다르 마케도니아였다. 라도미르 푸트니크가 이끄는 세르비아군은 10월 23~24일 쿠마노보 전투에서 오스만 바르다르군을 꺾었고, 비톨라(모나스티르) 전투로 그 잔존 부대를 알바니아 중부로 몰아냈다. 그 뒤 파시치가 테살로니키 경쟁에 끼라고 요구했으나 푸트니크는 그리스와 불가리아가 테살로니키를 두고 싸우는 편이 세르비아의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계획에 유리하다고 보고 군대를 서쪽 알바니아로 돌려 아드리아해에 이르렀다. 그리스군은 왕세자 콘스탄티노스의 지휘로 사란다포로 협곡과 야니차를 넘었고, 11월 8일(영어 「제1차 발칸 전쟁」 항목은 9일) 하산 타흐신 파샤가 테살로니키와 수비대 2만 6천 명을 그리스에 넘겼다. 북쪽에서 서둘러 내려온 불가리아 제7릴라 사단은 하루 늦게 도착했다. 총리 베니젤로스는 왕세자에게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살로니카를」 차지하라고 압박했었다. 5 1 10

알바니아인 대부분은 개전 때 자기 땅이 분할되지 않도록 오스만 편에 섰지만, 오스만 군대와 행정은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 세르비아는 알바니아 자치주 구상에 반대하며 오스만 유럽 영토를 동맹 네 나라가 나눠 갖기를 바랐다. 알바니아 영토가 분할될 위기에 놓이자 이스마일 케말리는 빈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지를 얻고 블로러로 가서, 1912년 11월 28일 40명의 대표가 모인 블로러 회의에서 알바니아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 12월 4일 그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가 섰다. 선언 당시 대표들이 실제로 장악한 도시는 블로러 하나뿐이었지만 권력 공백 속에서 효과가 있었다. 런던 대사회의는 12월 17일 알바니아 독립을 사실상 인정했고, 국제 사회가 알바니아를 중립 세습 공국으로 승인한 것은 제2차 전쟁 뒤인 1913년 7월 29일이었다. 5 11

서부 전선의 점령에는 민간인 학살이 뒤따랐다. 영어 위키백과는 당대 기록을 들어 개전 뒤 두세 달에서 넉 달 사이 코소보주에서 알바니아인 2만~2만 5천 명이 살해되었고, 제2차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알바니아인 사망자가 12만 명을 넘었다고 적는다. 몬테네그로는 슈코드라(스쿠타리)를 1912년 10월 28일부터 포위했다. 열강이 1913년 4월 10일부터 몬테네그로 해안을 봉쇄했는데도 니콜라 1세는 포위를 이어 갔고, 4월 23일 에사드 파샤가 항복했다. 그러나 독립 알바니아를 앞세운 열강의 압력으로 몬테네그로는 이 도시를 내놓아야 했다. 아드리아해 항구를 얻지 못한 세르비아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최후통첩을 받고 알바니아에서 물러났다. 세르비아 사회민주당의 디미트리예 투초비치는 이 원정에 병사로 동원되어 전선에서 민간인에 대한 전쟁범죄를 고발하는 편지를 당 기관지 『노동자 신문』에 보냈다. 5 12 1 13

튀르키예불가리아세르비아그리스런던 회의, 1913년 쿠데타와 런던 조약

오스트리아-헝가리·프랑스·영국·독일·이탈리아·러시아의 대사들이 1912년 12월 런던 세인트제임스 궁전에서 에드워드 그레이를 의장으로 모였고, 12월 16일부터 교전국 대표들의 강화 회의가 열렸다. 쟁점은 알바니아의 지위, 노비파자르 산자크, 그리고 코소보·마케도니아·트라키아의 귀속이었다. 아드리아해를 세르비아에 내주지 않으려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는 독립 알바니아를 강하게 밀었고, 러시아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를 지지했다. 교섭의 고비는 에디르네였다. 불가리아의 에디르네 할양 요구가 다가오고 대재상 카밀 파샤가 강화 교섭을 이어 가자, 1913년 1월 23일 엔베르 파샤와 탈라트가 이끄는 통일진보위원회 회원 약 50명이 정부 청사를 덮쳤다. 이른바 바브알리 습격이다. 육군장관 나즘 파샤가 살해되고 카밀 파샤는 총구 앞에서 사임했다. 새 정부는 런던 회의에서 철수하고 2월 3일 전쟁을 재개했다. 9 14 15 16

열강은 공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 보전에 합의하고 발칸 국가들에 엄중히 경고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저마다 다른 신호를 보내 그 경고를 스스로 무력화했다. 러시아는 발칸 동맹 결성의 주역으로서 동맹을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장래 전쟁에 쓸 도구로 보았으나, 자기들이 오래 노려 온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해협을 향한 불가리아의 계획은 알지 못했다. 1912년의 프랑스는 독일과 싸울 준비가 안 되었다고 보고, 발칸 동맹의 행동에서 비롯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충돌에는 끼지 않겠다고 동맹국 러시아에 통보했다. 영국은 러시아의 영향력을 견제하려고 그리스의 동맹 가입을 은밀히 부추겼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의 팽창 자체를 적대시했다. 빌헬름 2세는 처음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세계대전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겠다고 말했지만, 1912년 12월 8일 독일 제국 전쟁회의는 독일이 적어도 1914년 중반까지는 전쟁 준비가 안 된다고 결론짓고 그 뜻을 빈에 전했다. 1

재개된 전쟁은 오스만에 아무것도 돌려주지 못했다. 2월 오스만군은 갈리폴리 반도의 볼라이르와 마르마라해 연안 샤르쾨이에서 상륙 협공을 시도했으나 엔베르·알리 페트히·무스타파 케말 사이의 연락 부족으로 실패했다. 3월 6일 그리스군이 비자니 요새를 뚫고 이오아니나를 차지했다. 3월 26일에는 불가리아 제2군 10만 6,425명과 세르비아 2개 사단 4만 7,275명이 에디르네를 함락했다. 최종 공격에서 불가리아군 8,093명, 세르비아군 1,462명이 사상했다. 에디르네에서 소령으로 싸운 카즘 카라베키르도 포로가 되어 1913년 10월에야 풀려났다. 불가리아의 검열은 외국 특파원의 전보에서 세르비아군의 참여를 지웠고, 세르비아는 자기들이 조약에도 없던 불가리아의 영토를 위해 피를 흘렸다고 항의했다. 영어 위키백과는 이 전투가 두 나라 대결의 씨앗을 뿌렸다고 평가한다. 5 16 17

1913년 런던 조약은 5월 30일 오스만 대표단 없이 서명되었다. 에게해의 에노스와 흑해의 미디아를 잇는 선의 서쪽 오스만 유럽 영토 전부가 알바니아를 빼고 발칸 동맹에 넘어갔고, 크레타도 동맹국 군주들에게 양도되었다. 알바니아의 국경과 그 밖의 알바니아 문제는 열강이 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조약은 넘겨받은 땅을 동맹국끼리 어떻게 나눌지 정하지 않았다. 세르비아는 1912년 3월 불가리아와 합의한 분할을 이행하지 않겠다고 했고, 그리스와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에서 공동 국경을 만들려 했다. 바로 그날 불가리아 총리 이반 게쇼프는 옛 동맹국과 전쟁을 벌이려는 차르의 정책에 반대해 사임했다. 14 1 18

불가리아세르비아그리스루마니아튀르키예동맹의 붕괴와 제2차 발칸 전쟁

알바니아 독립으로 아드리아해 항구를 잃은 세르비아는 쟁점 지역 전부에 더해 자기들이 점령한 무쟁 지역까지 요구했다. 불가리아는 1912년 조약과 사상자 차이(세르비아 2만 9,698명, 불가리아 8만 7,926명)를 들어 러시아 황제에게 호소했으나,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사조노프는 오히려 불가리아에 세르비아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테살로니키에서는 그리스가 불가리아 대대 하나의 입성을 허락했는데 1만 8천 명의 사단이 들어와 공동 관리를 꾀한다는 의심을 샀다. 불가리아는 테살로니키와 피에리아 북쪽 땅을 넘기라고 요구하고 런던 조약 뒤에도 동원을 풀지 않았다. 그리스와 세르비아는 1913년 6월 1일 공동 국경과 상호 군사 지원을 정한 동맹 조약을 맺었다. 이 동맹의 군사 조항은 그리스 쪽 전권 이오아니스 메탁사스가 교섭했다. 6월 8일 니콜라이 2세가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국왕에게 중재를 제안했으나 불가리아는 조건을 붙여 사실상 거부했고, 러시아는 불가리아와의 동맹을 버렸다. 1 19

1913년 6월 29일 미하일 사보프 장군은 차르 페르디난트의 직접 명령에 따라 정부와 협의하지도, 선전포고하지도 않고 세르비아·그리스군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렸다. 6월 29~30일 밤 브레갈니차강의 세르비아군과 니그리타의 그리스군이 기습을 받았다(영어 위키백과의 여러 항목은 율리우스력 날짜인 6월 16일을 함께 쓴다). 세르비아군은 버텼고, 그리스군은 7월 2~4일 킬키스-라하나스 전투에서 이겼다. 대체로 불가리아계 주민이 살던 킬키스는 그리스군에게 약탈되고 불탔으며, 퇴각하는 불가리아군은 니그리타·세레스·독사토를 파괴하고 그리스 주민을 학살했다. 그리스군은 진격하며 불가리아 마을 약 160곳을 파괴했다. 7월 10일에는 실리스트라 요새를 넘기라는 요구를 거절당한 루마니아가 선전포고했고, 거의 저항 없이 소피아에서 11킬로미터 떨어진 브라즈데브나까지 내려왔다. 루마니아군은 전투 사상자가 거의 없었지만 콜레라로 1,600명을 잃었다. 1 6 20

불가리아 군대가 서쪽과 남쪽에 묶이자 오스만 제국도 움직였다. 엔베르 파샤가 지휘하는 오스만군은 7월 12일 에노스-미디아 선에 이르렀고, 불가리아군이 버린 에디르네를 7월 23일 다시 차지했다. 무스타파 케말도 이 부대에서 디메토카와 에디르네 탈환에 참여했다. 에디르네 탈환으로 엔베르는 「에디르네의 정복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소피아에서는 7월 13일 다네프 총리가 물러나고 17일 친독일 성향의 라도슬라보프 내각이 섰다. 크레스나 협곡에서는 불가리아군이 그리스군을 포위하려 했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고, 콘스탄티노스 왕은 베니젤로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휴전에 동의했다. 7월 30일 부쿠레슈티에 모인 대표단(세르비아의 파시치, 그리스의 베니젤로스, 루마니아의 마요레스쿠 등)은 31일부터 휴전하기로 했다. 8월 10일 부쿠레슈티 조약이 맺어졌다(영어 「런던 조약」 항목은 12일로 적는다). 루마니아의 반대로 오스만은 회의에 끼지 못했고, 불가리아는 오스만과 따로 9월 29일(「발칸 전쟁」 항목은 30일) 콘스탄티노폴리스 조약을 맺어 에디르네와 크르클라렐리를 돌려주었다. 6 16 21 22 23 1

1913년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세르비아는 바르다르 마케도니아의 중심부와 노비파자르 산자크의 동쪽 절반을 얻어 영토가 4만 8,300제곱킬로미터에서 8만 7,780제곱킬로미터로 늘고 인구가 150만 명 넘게 불었다. 그리스는 남부 에페이로스와 테살로니키·카발라를 포함한 남부 마케도니아를 얻어 면적이 6만 4,790제곱킬로미터에서 10만 8,610제곱킬로미터로, 인구가 266만 명에서 436만 3천 명으로 늘었다. 몬테네그로는 산자크의 서쪽 절반을, 루마니아는 남도브루자를 차지했다. 불가리아는 스트루미차 일대와 에게해 연안 서트라키아를 지켰지만, 가장 많은 피를 흘린 동트라키아와 바라던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잃었다. 남도브루자와 동트라키아에서 10만 명 남짓한 불가리아인이 불가리아로 옮겨 갔다. 그리스와 오스만은 11월 14일 아테네 조약을 맺었지만 에게해 섬들의 지위를 두고 1914년 봄 다시 전쟁 직전까지 갔다. 22 1 6

불가리아세르비아루마니아스위스사회주의자들의 대응: 발칸 연방, 전쟁 공채 반대, 바젤

발칸의 사회주의 정당들은 전쟁 전부터 자기 지역의 해법을 따로 내놓았다. 서유럽 사회주의 정당들이 현상 유지를 평화의 조건으로 본 데 비해, 발칸의 사회주의자들은 현상 자체가 분쟁의 원천이라며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무너뜨리고 열강의 음모에서 자유로운 민주적 발칸 연방을 세우자고 주장했다. 1910년 1월 7~9일 디미트리예 투초비치가 조직한 첫 발칸 사회민주당 대회가 베오그라드에서 열렸고, 디미터르 블라고예프가 이끈 불가리아 협의파 대표단도 참석했다. 대회는 열강의 발칸 간섭과 이웃을 희생시켜 패권을 쥐려는 발칸 국가 지도자들의 시도를 규탄했다. 전쟁이 터지자 불가리아 의회에 진출한 정당들은 전쟁 공채에 찬성해 전쟁을 지지했지만, 러시아어 위키백과의 「트로츠키와 발칸 전쟁」 항목이 적듯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사회주의자들은 예외적으로 반대표를 던졌다. 세르비아 의회에서 전쟁 예산에 반대한 드라기샤 라프체비치는 이 표결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24 25 13 26 27

블라고예프는 제1차 발칸 전쟁을 열강의 제국주의와 발칸 부르주아지의 배외주의·계급적 야망이 낳은 것이라고 규탄했고, 협의파는 두 전쟁 모두에 반대하며 발칸 연방 공화국을 내세웠다. 투초비치는 돌아와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세르비아 부르주아지 정복 정책 비판』을 써서 「우리는 한 민족 전체를 미리 계획해 죽이려 했다」고 고발했다. 레닌은 1912년 11월 7일 『프라우다』에 실은 「세르비아-불가리아 승리의 사회적 의미」에서 마케도니아 정복이 지주 지배를 허무는 일종의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보면서도, 세르비아·불가리아·튀르크 농민이 모든 민족의 지주에 맞선 혁명으로 해방을 이루었다면 희생은 백분의 일이었을 것이라고 쓰고,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발칸 연방 공화국을 대안으로 들었다. 루마니아에서는 크리스티안 라콥스키가 제2차 전쟁 때 루마니아의 불가리아 침공을 비판하고 남도브루자를 병합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25 28 13 29 30

레프 트로츠키는 1912년 9월 키예프의 자유주의 일간지 『키옙스카야 미슬』의 특파원으로 발칸에 가서 「안티드 오토」라는 필명으로 두 전쟁을 1년 동안 취재했다. 개전일에 소피아에 도착한 그는 「발칸은 발칸 민족에게」라는 구호를 지지하며 미국이나 스위스 같은 반도 전체의 연방 국가를 주장했고, 병사와 장교들에게 들은 전쟁의 잔학 행위를 기사로 썼다. 세르비아군이 알바니아 민간인에게 저지른 민족 청소도 기록했다. 1912년 11월 말부터는 주로 루마니아에 머물며 라콥스키와 가까워졌고,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워 해협 장악을 주장한 카데트 지도자 밀류코프와 전쟁의 「도덕적 파국」을 두고 논쟁했다. 그의 기사는 뒤에 소련판 저작집 제6권 「발칸과 발칸 전쟁」(1926)에 묶였다. 31 26

바젤 임시대회는 이 전쟁 한가운데서 열렸다. 발칸 전쟁이 유럽 전쟁으로 번질 것을 걱정한 제2인터내셔널 집행부는 1912년 10월 28일 임시대회를 열기로 했고, 11월 24~25일 바젤에 23개국 대표 555명이 모였다. 약 1만 명이 붉은 깃발을 들고 바젤 대성당까지 행진했고, 대성당과 광장에서 장 조레스, 후고 하제, 아우구스트 베벨, 클라라 체트킨, 키어 하디, 빅토어 아들러 등이 연설했다. 25일 만장일치로 채택된 선언은 1907년 슈투트가르트 결의를 되풀이하며, 전쟁이 닥치면 각국 노동계급과 의원단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전쟁 발발을 막아야 하고 그래도 전쟁이 일어나면 빨리 끝내도록 힘쓰고 전쟁이 낳은 경제 위기를 인민을 일깨우는 데 써서 자본주의 계급 지배의 철폐를 앞당겨야 한다고 밝혔다. 총파업의 효과를 둘러싼 논란은 선언에서 빠졌다. 역사가 제임스 졸은 이 대회를 인터내셔널의 낙관적 자신감이 정점에 이른 순간이라고 불렀다. 32 33 24

불가리아세르비아그리스튀르키예알바니아평가

발칸 전쟁의 인명 피해는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영어 위키백과의 「제1차 발칸 전쟁」은 모든 편이 전쟁범죄를 저질렀지만 중립적 관찰자가 부족해 민간인 희생을 확정하기 어렵다고 쓴다. 군인 손실도 출처마다 다르다. 불가리아가 러시아 황제에게 중재를 호소하며 내세운 사상자 수는 세르비아 2만 9,698명, 불가리아 8만 7,926명이었고, 불가리아의 제1차 전쟁 회복 불가능 손실은 3만 3천 명으로 적힌다. 알바니아인 사망자는 개전 뒤 몇 달 동안 2만~2만 5천 명, 제2차 전쟁 끝까지 12만 명 이상이라는 당대 추산이 인용되고, 1912년 발칸에 살던 무슬림 가운데 1923년까지 남은 사람은 38퍼센트였다. 폴 모이제스는 이를 「인정받지 못한 제노사이드」라 불렀다. 튀르키예에서는 이 전쟁을 「발칸 참사」로, 그리스에서는 영토와 인구를 두 배로 늘린 서사적 성취로 기억한다. 5 1 6

전쟁범죄에 관한 대표적 동시대 조사는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국제위원회가 1913년 8~9월 현지를 돌고 1914년 초여름 워싱턴에서 낸 보고서다. 마크 레빈은 이 보고서를 철저히 문서화된 자료로 높이 평가하지만, 에니카 아바지와 알베르트 도야는 위원회가 세르비아에서 쫓겨나고 그리스에서 협조를 받지 못한 채 불가리아 정부가 준비한 자료에 기댔다며 그 신빙성을 문제 삼는다. 현지에 간 네 위원 가운데 밀류코프와 브레일스퍼드는 당대에도 친불가리아적이라는 평을 들었다. 보고서는 1차 세계대전 발발에 묻혔고, 1993년 유고슬라비아 전쟁 때 재발간되어 「발칸적 폭력」이라는 고정관념을 강화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트로츠키의 기사도 1993년 같은 이유로 재출간되었다. 34 26

발칸 전쟁은 1차 세계대전의 직접 전사였다. 크게 불어난 세르비아는 남슬라브 통합을 외쳤고,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독일은 세르비아를 러시아의 위성국으로 보며 경계했다. 불가리아는 동맹국 진영으로 돌아섰고, 발칸 동맹을 잃은 러시아는 마지막 남은 동맹국 세르비아를 조건 없이 지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영어 위키백과는 이 구도가 1914년 7월 위기를 순식간에 세계대전으로 키웠다고 정리한다. 오스만에서는 통일진보위원회가 1913년 6월 독재를 세웠고, 발칸에서 쫓겨난 난민과 학살 소식이 제국 안의 소수민족에 대한 증오를 키워 2년 뒤의 집단 학살을 부추긴 요인이 되었다. 1 5

사회주의 운동에게 이 전쟁은 시험이자 착시였다. 대전이 일어나지 않고 전쟁이 발칸에 갇히자 인터내셔널 안에는 위험이 지나갔다는 낙관이 퍼졌고, 카우츠키 등은 열강의 경제적 상호의존이 전쟁을 비합리적으로 만든다는 「초제국주의」론을 폈다. 1914년 7월 이 낙관은 무너졌고, 주요 정당들은 각국 정부의 전쟁을 지지했다. 이때 바젤 선언은 반대편의 기준이 되었다. 레닌은 1915년 이 선언을 「전쟁과 전쟁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전술에 관한 가장 완전하고 정확하며 엄숙한 표현」이라 부르며 지도자들의 배신을 고발했고, 지노비예프는 선언이 「조국 방위」를 명시적으로 거부했다고 강조했다. 반면 블라고예프의 협의파와 세르비아 사회민주당은 1912년에 이어 1914년에도 전쟁 공채에 반대해, 발칸 사회주의의 반전 노선은 치머발트 좌파와 공산주의 운동으로 이어졌다. 24 33 25 28 27

결과

오스만 제국은 동트라키아를 빼고 유럽 영토를 잃었고, 세르비아와 그리스는 영토가 거의 두 배가 되었으며 알바니아가 독립국이 되었다. 마케도니아는 세르비아·그리스·불가리아로 나뉘었고 전쟁 내내 민간인 학살과 대규모 추방이 벌어졌다. 커진 세르비아를 경계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독일, 패전 뒤 동맹국 쪽으로 돌아선 불가리아, 세르비아를 버릴 수 없게 된 러시아의 구도가 1914년 7월 위기를 세계대전으로 키웠다. 대전을 막았다는 착각 속에서 인터내셔널은 낙관에 빠졌지만, 바젤 선언은 1914년 이후 반전 사회주의자들의 기준이 되었고 전쟁 공채에 반대한 발칸 사회주의자들은 치머발트 좌파와 공산주의 운동으로 이어졌다.

연표와 지도

마케도니아 부쿠레슈티 소피아 쿠마노보 슈코드라 에디르네 뤼레부르가즈 차탈자 이스탄불 킬키스 테살로니키 블로러 2 베오그라드 22 부쿠레슈티 23 부쿠레슈티 1 소피아 3 소피아 4 소피아 20 소피아 5 체티네 7 쿠마노보 16 슈코드라 18 브레갈니차강 15 에디르네 21 에디르네 8 뤼레부르가즈 10 차탈자 12 차탈자 6 이스탄불 13 이스탄불 24 이스탄불 19 킬키스 9 테살로니키 17 테살로니키 11 블로러 14 이오아니나 25 아테네
  1. 11908-10불가리아튀르키예
    보스니아 병합과 불가리아 독립

    청년 튀르크 혁명의 혼란을 틈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고 불가리아가 독립을 선언했다.

  2. 21910-01-07세르비아불가리아
    첫 발칸 사회민주당 대회

    투초비치가 조직하고 블라고예프의 협의파 대표단이 참석한 대회가 베오그라드에서 열려 열강의 간섭과 발칸 국가들의 패권 추구를 규탄했다.

  3. 31912-03-13세르비아불가리아
    세르비아-불가리아 동맹 조약

    러시아의 감독 아래 맺은 조약의 비밀 부속서가 마케도니아를 무쟁 지역과 쟁점 지역으로 나누고 러시아 황제의 중재를 정했다.

  4. 41912-05-29그리스불가리아
    그리스-불가리아 동맹

    영토 분할 규정 없이 맺은 조약으로 그리스가 발칸 동맹에 들어왔다.

  5. 51912-10-08몬테네그로튀르키예
    몬테네그로의 선전포고

    국경 교섭이 깨진 몬테네그로가 동맹국 가운데 맨 먼저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했다.

  6. 61912-10-17불가리아세르비아그리스튀르키예
    전면전 개시

    13일의 공동 최후통첩이 거부된 뒤 세르비아·불가리아·그리스가 오스만 제국과 전쟁에 들어갔다.

  7. 71912-10-23세르비아튀르키예
    쿠마노보 전투

    23~24일 세르비아군이 오스만 바르다르군을 꺾고 북마케도니아로 진격했다.

  8. 81912-10-28불가리아튀르키예
    뤼레부르가즈 전투

    11월 2일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이 오스만군을 차탈자 선까지 밀어냈다.

  9. 91912-11-08그리스튀르키예
    테살로니키 항복

    하산 타흐신 파샤가 수비대 2만 6천 명과 함께 도시를 그리스군에 넘겼다(출처에 따라 9일).

  10. 101912-11-17불가리아튀르키예
    차탈자 공격 실패

    콜레라에 시달린 불가리아군의 공격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앞 방어선에서 막혔다.

  11. 1912-11-24스위스
    바젤 임시대회

    23개국 대표 555명이 모인 제2인터내셔널 임시대회가 25일 반전 선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12. 111912-11-28알바니아
    알바니아 독립 선언

    이스마일 케말리가 이끈 블로러 회의가 알바니아 독립을 선언했다.

  13. 121912-12-03불가리아튀르키예
    휴전

    오스만과 불가리아(세르비아·몬테네그로 대표)가 휴전했고, 그리스는 서명하지 않았다.

  14. 1912-12-16영국
    런던 강화 회의

    열강 대사회의와 함께 교전국 대표들의 강화 회의가 런던에서 열렸다.

  15. 131913-01-23튀르키예
    바브알리 습격

    엔베르와 탈라트가 이끄는 통일진보위원회가 정부를 무너뜨리고 런던 회의에서 철수했다.

  16. 141913-03-06그리스튀르키예
    이오아니나 함락

    그리스군이 비자니 요새를 뚫고 이오아니나를 차지했다.

  17. 151913-03-26불가리아세르비아튀르키예
    에디르네 함락

    불가리아 제2군과 세르비아 2개 사단이 다섯 달 포위 끝에 요새를 함락했다.

  18. 161913-04-23몬테네그로알바니아튀르키예
    슈코드라 항복

    열강의 해상 봉쇄 속에서 에사드 파샤가 몬테네그로군에 항복했으나 몬테네그로는 도시를 내놓아야 했다.

  19. 1913-05-30튀르키예불가리아세르비아그리스몬테네그로알바니아
    런던 조약

    에노스-미디아 선 서쪽 오스만 영토가 발칸 동맹에 넘어갔다. 같은 날 게쇼프가 사임했다.

  20. 171913-06-01세르비아그리스
    세르비아-그리스 동맹

    두 나라가 공동 국경과 불가리아에 맞선 상호 지원을 약속했다.

  21. 181913-06-29불가리아세르비아그리스
    불가리아의 기습

    차르의 명령을 받은 사보프 장군이 선전포고 없이 세르비아·그리스군 공격을 명령했다(율리우스력 6월 16일).

  22. 191913-07-02그리스불가리아
    킬키스-라하나스 전투

    4일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그리스군이 불가리아군을 물리쳤고 킬키스는 불탔다.

  23. 201913-07-10루마니아불가리아
    루마니아의 참전

    실리스트라를 거절당한 루마니아가 선전포고하고 소피아 11킬로미터 앞까지 진격했다.

  24. 211913-07-23튀르키예불가리아
    오스만의 에디르네 탈환

    엔베르가 이끄는 오스만군이 불가리아군이 버린 에디르네를 다시 차지했다.

  25. 221913-07-31불가리아세르비아그리스몬테네그로루마니아
    부쿠레슈티 휴전

    30일 부쿠레슈티에 모인 대표단이 31일부터 휴전하기로 했다.

  26. 231913-08-10불가리아세르비아그리스몬테네그로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조약

    마케도니아가 분할되고 남도브루자가 루마니아에 넘어갔다(출처에 따라 12일).

  27. 241913-09-29불가리아튀르키예
    콘스탄티노폴리스 조약

    불가리아가 에디르네와 크르클라렐리를 오스만에 돌려주었다(출처에 따라 30일).

  28. 251913-11-14그리스튀르키예
    아테네 조약

    그리스와 오스만이 강화했으나 에게해 섬들의 지위는 미해결로 남았다.

관련 인물 39명

세르비아·그리스·몬테네그로 (1912년 발칸 동맹, 1913년 반불가리아 연합)6명

오스만 제국7명

발칸과 국제 사회주의의 반전 세력12명

참여11

세르비아 사회민주당 의원드라기샤 라프체비치1867–1939

발칸 전쟁 직전 세르비아 의회에서 전쟁 예산에 반대표를 던져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발칸 연방을 주장했다.

불가리아 협의파 지도자디미터르 블라고예프1856–1924

제1차 발칸 전쟁을 열강의 제국주의와 발칸 부르주아지의 배외주의가 낳은 것이라 규탄했고, 협의파는 두 전쟁에 반대하며 발칸 연방 공화국을 내세웠다.

루마니아 사회민주주의자크리스티안 라콥스키1873–1941

전쟁 중 평화를 호소했고 제2차 전쟁 때 루마니아의 불가리아 침공과 남도브루자 병합에 반대했다. 1913년 그의 영지에 트로츠키가 머물렀다.

『프라우다』 논설 필자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

1912년 11월 「세르비아-불가리아 승리의 사회적 의미」에서 마케도니아 정복을 부르주아 혁명에 견주면서 발칸 연방 공화국을 대안으로 내세웠고, 1915년 바젤 선언으로 사회배외주의를 고발했다.

바젤 임시대회 연설자장 조레스1859–1914

바젤 대성당에서 연설하며 인터내셔널이 권력자들에게 명령조로 말하고 필요하면 행동으로 뒷받침할 만큼 강하다고 선언했다.

바젤 임시대회 연설자아우구스트 베벨1840–1913

독일 사회민주당 대표로 바젤 대성당과 광장의 집회에서 연설했다.

바젤 임시대회 연설자후고 하제1863–1919

바젤에서 연설했고, 1914년 7월 국제사회주의사무국 회의에서 바젤 결의를 재확인했다.

바젤 임시대회 연설자클라라 체트킨1857–1933

바젤 대성당 집회의 연설자 가운데 하나였다.

바젤 임시대회 연설자키어 하디1856–1915

영국 노동당 대표로 바젤 집회에서 연설했다.

바젤 임시대회 연설자빅토어 아들러1852–1918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대표로 바젤에서 연설했고, 1914년 7월에는 오스트리아 당이 전쟁 열기에 맞설 힘이 없다고 고백했다.

세르비아 사회민주당 지도자디미트리예 투초비치1881–1914

1910년 첫 발칸 사회민주당 대회를 조직했고, 1912년 세르비아군에 동원되어 알바니아 원정의 민간인 학살을 『노동자 신문』에 고발했으며, 돌아와 『세르비아와 알바니아』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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