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란실바니아 통합을 이끈 국민농민당의 지도자, 1947년 종신형을 받고 시게트 감옥에서 죽다
1947년 11월 11일 부쿠레슈티 군사법원은 일흔네 살의 마니우에게 종신 중노동형을 선고했다. 그가 마지막 변론에서 남긴 말은, 자기가 한 일은 모두 루마니아 인민을 위한 것이었고 역사가 판단할 것이라는 한 문장이었다.
트란실바니아 설라지의 그리스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변호사로, 헝가리 의회의 루마니아 민족당 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1918년 12월 알바이울리아 대집회 뒤 트란실바니아 지도평의회 의장으로 루마니아와의 통합을 이끌었고, 1926년 농민당과 합쳐 국민농민당을 세워 1928~30년과 1932~33년 총리를 지냈다. 카롤 2세의 개인 통치와 1938년 왕정 독재에 맞섰고, 안토네스쿠 시기에는 베사라비아 회복까지는 지지했으나 드네스트르를 넘는 전쟁에 반대해 1944년 8월 23일 쿠데타 준비에 참여했다. 전후에는 그로자 정부와 소련의 지배에 맞서는 야당의 중심이었고 1946년 선거 조작에 항의했다. 1947년 7월 당 지도부가 터머더우 비행장에서 국외 탈출을 시도하다 체포된 것을 빌미로 국민농민당이 해산되었고, 그는 10~11월 재판에서 「반역」 죄로 종신형을 받았다. 1953년 2월 시게트 감옥에서 80세로 죽어 표지 없는 무덤에 묻혔다.
상세 이력 보기
- 1906–1910헝가리 의회 루마니아 민족당 의원
- 1918–1920트란실바니아 지도평의회 의장
- 1926국민농민당 창당
- 1928–1930총리
- 1932–1933총리
- 19448월 23일 쿠데타 준비 참여
- 1945–1947그로자 정부에 맞선 야당 지도자
- 1947터머더우 사건, 당 해산, 종신형
- 1953시게트 감옥에서 사망
루마니아를 추축국의 대소 전쟁에 몰아넣고 트란스니스트리아의 학살을 명령한 「지도자」, 1946년 질라바에서 처형되다
1944년 8월 23일 오후, 왕궁에 불려온 안토네스쿠가 국왕의 즉각 휴전 요구를 거부하자 미하이는 미리 정한 신호로 경비병을 불러 그를 체포했다. 그날 밤 국왕의 라디오 연설이 휴전을 알렸고, 루마니아군은 독일군에게 총구를 돌렸다.
피테슈티의 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기병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로 머러셰슈티 방어전 계획에 참여했고 파리·런던 주재 군사 담당관과 1933~34년 참모총장을 지냈다. 1937~38년 고가 정부의 국방장관을 맡았으나 카롤 2세와 대립해 1940년 비스트리차 수도원에 연금되었다. 1940년 여름 베사라비아·북트란실바니아 상실로 왕정이 흔들리자 9월 4일 전권을 가진 총리가 되어 이틀 뒤 카롤 2세를 퇴위시키고 스스로 「지도자」를 칭했으며, 철위단과 함께 국민군단국가를 세웠다가 1941년 1월 군단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1940년 11월 삼국동맹에 가입하고 1941년 6월 독일과 함께 소련을 침공해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를 되찾고 드네스트르 너머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점령했다. 이아시 포그롬과 오데사 학살, 트란스니스트리아로의 강제 이송으로 루마니아 관할에서 28만에서 38만에 이르는 유대인과 1만 명이 넘는 로마인이 죽었다고 2004년 비젤 위원회는 결론지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두 개 군을 잃은 뒤 강화의 길을 찾았으나 1944년 8월 23일 미하이 국왕에게 체포되어 소련으로 넘겨졌고, 1946년 5월 부쿠레슈티 인민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6월 1일 질라바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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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1918제1차 세계대전 참모 장교
- 1933–1934참모총장
- 1937–1938국방장관
- 1940전권 총리, 카롤 2세 퇴위, 「지도자」 칭호
- 1940–1941국민군단국가, 군단 반란 진압
- 1941소련 침공, 트란스니스트리아 점령
- 19448월 23일 체포, 소련 이송
- 1946인민법정 사형 선고, 질라바 처형
동부전선의 루마니아군 지휘관
스탈린그라드 북서쪽 측면이 무너지기 전, 두미트레스쿠는 독일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페트레 두미트레스쿠는 루마니아 왕국의 직업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동부전선에서 루마니아 제3군을 지휘했다. 그는 독일군과 함께 소련을 상대로 부코비나와 우크라이나, 크림, 캅카스 작전에 참여하며 루마니아군의 전쟁 수행을 이끌었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 북서쪽에서 제3군의 취약한 측면이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에 노출되자 지원을 요청했지만, 군대는 큰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전후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1946년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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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1–1903포병·공병학교 수학, 소위 임관
- 1911–1913육군참모대학 수학
- 1930–1932프랑스 주재 군사 attaché
- 1935–1937육군참모본부 부참모장
- 1940–1941루마니아 제1군 사령관
- 1941–1944루마니아 제3군 사령관
- 1942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3군 지휘
- 1944전역, 전쟁범죄 혐의로 조사됨
공산당원이 아닌 지주 변호사로 공산 정권의 첫 총리와 국가원수를 지낸 「붉은 부르주아」
1945년 3월 초 비신스키는 부쿠레슈티로 날아와 미하이 국왕에게 두 시간 안에 그로자를 총리로 임명하라고 요구했고, 거부하면 루마니아의 독립 국가 존속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라데스쿠 정부는 무너졌고 3월 6일 그로자 정부가 들어섰다.
트란실바니아 후네도아라의 정교회 사제 집안에서 태어나 부다페스트·베를린·라이프치히에서 법학을 공부한 변호사이자 지주였다. 헝가리 의회 시절 루마니아 민족당에서 출발해 1920년대 아베레스쿠 정부의 장관을 두 번 지냈고, 1933년 데바에서 농민 조직 「농민전선」을 세워 1935년 체베아 협정으로 공산당과 손을 잡았다. 1944년 8월 23일 뒤 부총리를 거쳐 1945년 3월 6일 소련 외무부 부인민위원 비신스키가 왕궁에서 강요한 대로 총리가 되었고, 곧바로 토지개혁을 공포해 대지주의 땅을 나누었다. 1945년 여름 미하이 국왕이 그의 사임을 요구하며 법령 서명을 거부하는 「국왕 파업」에 들어갔지만 그는 소련의 지지를 믿고 버텼다. 1946년 선거 조작과 1947년 국민농민당 해산을 거쳐 그해 12월 30일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국왕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1952년 6월까지 총리로 있다가 대국민의회 간부회 의장, 곧 명목상 국가원수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끝내 공산당에 들지 않은 부유한 지주로서 트란실바니아 헝가리인 소수민족에 우호적이었고, 스스로를 「붉은 부르주아」라고 부르는 재담으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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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1921아베레스쿠 정부 장관
- 1926–1927아베레스쿠 정부 장관
- 1933농민전선 창설
- 1935체베아 협정, 공산당과 제휴
- 1944–1945부총리
- 1945–1952총리
- 194712월 30일 미하이 국왕 퇴위 강요
- 1952–1958대국민의회 간부회 의장(국가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