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개혁과 보통선거를 주장한 왈라키아 1848년 혁명의 급진파 지도자이자 역사가
1819년 부쿠레슈티의 하급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1840년 알렉산드루 2세 기카 공에 맞선 음모로 2년간 수감되어 결핵을 얻었다. 석방 뒤 비밀 결사 「형제단」을 이끌었고, 역사 잡지를 펴내며 보야르의 대토지를 농민에게 나누자는 토지 개혁론을 썼다. 1846년 파리에서 루마니아 학생회를 이끌었다. 1848년 파리 봉기에 참가한 뒤 부쿠레슈티로 돌아가 6월 혁명에 가담했고 임시정부의 장관 겸 국무장관을 이틀간 지냈다. 9월 오스만 당국에 체포된 뒤 트란실바니아에서 추방되었고, 1849년 5월 데브레첸에서 코슈트를 만나 아브람 이안쿠의 루마니아 부대와 헝가리 정부 사이를 중재하려 했다. 망명지를 떠돌다 1852년 팔레르모에서 결핵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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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6왈라키아군 입대
- 1840–1842기카 공 반대 음모로 마르지네니 수도원 수감
- 1844『다키아 역사 잡지』 공동 편집
- 1848왈라키아 임시정부 장관 겸 국무장관
- 1849데브레첸에서 코슈트와 루마니아·헝가리 중재 교섭
1848~1849년 합스부르크 편에서 아푸세니산맥 루마니아 농민군을 이끌고 헝가리군과 싸운 「산의 왕자」
1824년 트란실바니아 비드라데수스에서 농노에서 풀려난 농민 집안에 태어나 클루지의 피아리스트 학교에서 법을 공부했다. 법률 서기로 일하던 1848년 3월 빈과 페슈트의 혁명 소식을 들었고, 헝가리 혁명가들이 농노제 폐지 논의를 거부하는 데 분개했다. 블라지 집회에서 트란실바니아의 헝가리 병합에 반대하는 급진파에 섰고, 「아우라리아 게미나」 군단 4,000명을 이끌고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싸웠다. 아푸세니산맥 거점을 끝까지 지키며 1849년 5월 하트바니의 헝가리군을 무찔렀고, 7월 말 철수하는 헝가리군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보장했다. 전후 감시와 체포에 시달리다 빈에서 황제 청원이 막힌 뒤 정신이 무너졌고, 1872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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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8블라지 집회 급진파
- 1848–1849「아우라리아 게미나」 군단 지휘관
- 1852오스트리아 당국에 두 번째 체포
주니메아를 세운 비평가로 제2차 발칸 전쟁의 부쿠레슈티 강화를 주재한 루마니아 총리
크라이오바에서 태어나 빈의 테레지아눔을 나오고 기센에서 박사, 파리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다. 22세에 야시 대학 교수, 23세에 총장이 되었다. 1860년대 주니메아 결사를 세우고 1867년 잡지 『문학 담화』를 창간했으며, 에미네스쿠·크레앙가·카라자레 같은 작가를 길러 낸 비평가로 서구 제도를 뿌리 없이 들여오는 「뿌리 없는 형식」을 비판했다. 보수당 정치인으로 1910~1914년 외무장관, 1912~1913년 총리를 지냈고, 제2차 발칸 전쟁을 끝낸 부쿠레슈티 강화회의에서 루마니아를 대표했다. 독일을 선호해 독일에 맞선 1차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했으나, 부쿠레슈티를 점령한 독일군에 협력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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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3야시 대학 총장
- 1867주니메아의 잡지 『문학 담화』 창간
- 1910–1914루마니아 외무장관
- 1912–1913루마니아 총리
- 1913부쿠레슈티 강화회의 루마니아 대표
1927년 잠시 총리를 지내고 1944년 카이로에서 휴전을 교섭한 루마니아 귀족 정치가
왈라키아 공 바르부 슈티르베이의 손자로,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한 대지주이자 여러 은행·기업의 이사회 의장이었다. 1913년부터 왕실 영지 관리인으로 페르디난드 1세와 마리 왕비의 최측근 조언자였고 처남 브러티아누의 국민자유당을 지지했으며, 1927년 6월 2주 동안 「거국」 내각 총리를 지냈다. 카롤 2세 치세에 파리로 망명했다가 1940년 돌아왔고, 1944년 3월 안토네스쿠와 마니우 양쪽의 밀사로 카이로에서 연합국과 휴전을 교섭했다. 쿠데타 뒤 모스크바 대표단을 이끌어 9월 12일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1945년 국왕이 총리로 세우려 했으나 비신스키가 거부했고, 이듬해 간암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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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3왕실 영지 관리인
- 1927.06총리
- 1930–1940파리 망명
- 1944.03카이로에서 연합국과 휴전 교섭
- 1944.09.12모스크바에서 휴전협정 서명
- 1945.02총리 지명이 비신스키에게 거부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