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Gheorghe Gheorghiu-Dej
루마니아 공산주의 루마니아 루마니아 1901–1965 ○ 폐암

소련의 위성에서 반자율적 공산주의 국가로 루마니아를 전환시킨 초대 공산당 지도자

1947년 12월 30일 아침, 게오르기우데지와 페트루 그로자가 군대에 포위된 왕궁으로 찾아와 퇴위 문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거부할 경우 유혈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통보받았다고 미하이 국왕은 망명 후 증언했다.

루마니아 최초의 공산주의 지도자로, 194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국가를 통치했다. 철도 노동자 출신으로 1933년 그리비차 철도 파업을 이끌어 투옥되었고, 수감 중 당내 '감옥파'의 수장으로 부상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에 저항하며 1958년 소련군 철수를 관철시켰고, 중공업화와 서방과의 무역 확대를 통해 바르샤바 조약 내에서 루마니아의 반자율적 지위를 개척했다. 그의 독자노선은 후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에게로 이어졌으나, 집권 기간 내내 세쿠리타테를 통한 국내 탄압을 유지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민족공산주의 독자노선과 탈소련화

게오르기우데지의 역사적 위상은 국내에서 스탈린주의적 통제를 유지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소련의 위성국 틀에서 벗어나 루마니아의 반자율적 지위를 개척한 데 있다. 출발점은 1958년이었다. 헝가리 봉기 때 루마니아가 소련의 가장 충실한 동맹으로서 개입을 지지하고 군대 통과로를 제공한 데 대한 보상으로, 흐루쇼프는 7월 25일 주둔 소련군 3만 5천 명 전원을 철수시켰다. 철수는 심리적으로 결정적이었다. 게오르기우데지는 소련으로부터 쟁취한 양보로 여기고, 이를 발판 삼아 조심스럽게 루마니아의 이익을 소련의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노선으로 나아갔다.

그 핵심은 코메콘(상호경제원조회의)의 분업 구상에 대한 저항이었다. 모스크바는 루마니아를 동독·체코슬로바키아 같은 공업국의 '곡창'으로 남겨 두려 했으나, 게오르기우데지는 1961년 8월 흐루쇼프가 제안한 코메콘의 초국가적 계획 기능을 거부하고 갈라치·보르제슈티를 중심으로 한 중공업 건설을 밀어붙였다. 마이클 샤피르가 지적했듯, 레닌-스탈린주의적 공업화 가치에 대한 그의 신념이 그를 오히려 '민족공산주의자'로 만들었다. 1964년 봄 모스크바가 루마니아 영토 일부를 갈라내는 발레프 계획을 제시하자, 당은 4월 말 「세계 공산주의·노동운동 문제에 관한 루마니아 노동자당의 입장」을 발표하며 자주노선을 공식화했고, 베사라비아 문제를 다룬 카를 마르크스의 미발표 원고까지 출판했다.

탈소련화는 상징적 차원에서도 관철되었다. 1963년 부쿠레슈티의 러시아연구소를 폐쇄하고, 러시아어를 필수 교과에서 제외하며, 거리와 공공건물의 러시아식 명칭을 루마니아식으로 되돌렸다. 흐루쇼프 축출 직후인 1964년 10월에는 주루마니아 KGB 고문관들의 철수를 요구해, 바르샤바 조약국 가운데 처음으로 자국 안보기관에서 소련 고문을 몰아낸 나라가 되게 했다. 그러나 이 개방과 자주는 국내 탄압과 한 세트였다. 바로 그 1958년, 소련군 철수 직후 그는 형법을 더욱 엄격히 개정해 사형 적용 범위를 넓히고 정치범 수를 급증시켰다. '대외적 개방·온건함과 국내 탄압의 결합'이라는 이 패턴을 처음 수립한 인물이 다름 아닌 게오르기우데지였으며, 이는 후임 차우셰스쿠가 더욱 과격하게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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