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9년 스페인 원정군을 이끌고 가에타의 교황 곁으로 가 로마 공화국 진압에 나선 스페인 장군
1809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해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 루이스와 함께 제1차 카를로스 전쟁에서 이사벨 2세 편에 서서 싸웠고, 온건당에 속했다. 1848년 9월 카탈루냐 총사령관이 되어 제2차 카를로스 전쟁의 반란 세력을 이듬해 초까지 진압했다. 1849년 5월 교황의 세속 권력을 되살리고 로마 공화국을 무너뜨리러 이탈리아로 파견되어, 스페인 병사 4,000명을 이끌고 가에타에서 비오 9세 휘하에 들어갔다. 뒤에 육군장관을 지냈고 1854년 7월 혁명적 위기 속에 하루 동안 총리를 맡았다. 1868년 혁명을 지지해 급진민주당에 들어갔고, 1873년 정계에서 물러났다. 1883년 마드리드에서 죽었다.
「스페인의 레닌」이라 불린 UGT의 노동자 지도자, 혁명과 전쟁 사이에서 무너진 공화국 총리
1936년 11월, 라르고 카바예로는 CNT 지도자 네 명을 각료로 임명했다. 국가의 폐지를 강령으로 삼아 온 아나키스트들이 국가의 장관석에 앉은 것이다. 그중 보건장관 페데리카 몬세니는 스페인 역사상 첫 여성 각료였다.
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장공으로 일하다 노동조합 지도자가 된 사람. 노동총동맹(UGT)을 이끌며 1917년 8월 총파업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아래에서는 국가참사원에 들어가 조직을 지켰는데 이 선택은 평생 논쟁으로 남았다. 제2공화국 노동장관으로 농촌 8시간 노동제를 밀어붙였고, 1934년 아스투리아스 봉기 전후로 급격히 좌경화해 지지자들에게 「스페인의 레닌」이라 불렸다. 1936년 9월 총리 겸 전쟁장관이 되어 11월에는 CNT 지도자 넷을 입각시켜 아나키스트를 처음으로 정부에 앉혔으나, 인민군 재건과 혁명의 속도를 놓고 공산당·소련 고문단과 계속 부딪쳤다. 1937년 5월 사태 뒤 POUM 금지 요구를 거부하다 각료들이 이탈하면서 물러났고, 망명지 프랑스에서 게슈타포에 붙잡혀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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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마드리드의 가난한 집에서 출생, 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장공이 됨
1890–1894건설노동자 파업을 계기로 노동총동맹(UGT) 활동 시작, 1894년 PSOE 입당
19178월 총파업 지도로 종신형 선고, 이듬해 하원의원 당선과 함께 석방
1924–1930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아래 국가참사원 노동 참사관, UGT 조직을 유지한 대가로 오랜 논쟁을 남김
1925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사후 PSOE와 UGT의 최고 지도자로
1931–1933제2공화국 노동장관, 농촌 8시간 노동제를 비롯한 노동 입법 추진
1934–1935「스페인의 레닌」으로 불릴 만큼 좌경화, 10월 아스투리아스 봉기 실패로 수감됐다 무죄 석방
「대다수, 민중은 떠날 수 없습니다. 나는 늘 노동자들과 함께 살아왔고, 그들과 함께 남을 것입니다. 그들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입니다」, 사회당 기관지 《라 보스》에, 1939년 3월
마드리드 대학 철학 교수로 출발해 1925년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의 뒤를 이어 사회당(PSOE)과 UGT를 이끈 마르크스주의 수정파였다. 제2공화국 제헌의회 의장(1931)을 지내며 온건한 의회주의 노선을 고수했고, 1934년 10월 무장봉기에 반대하며 당내 주류에서 밀려났다. 내전 발발 후에도 마드리드에 남아 평화 협상을 모색했고, 1939년 3월 카사도 대령의 네그린 전복에 합류해 국방평의회 외무담당이 되었으나 프랑코는 무조건 항복만을 받아들였다. 다른 평의회 구성원들이 망명하는 날에도 홀로 마드리드에 남아 ‘노동자들과 늘 함께 살아왔으니 그들의 운명을 함께하겠다’고 말했고, 프랑코 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아 카르모나 감옥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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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PSOE·UGT 입당; 마드리드 대학 논리학 교수 임용
1917혁명적 총파업 위원회 참여, 종신형 선고 후 1918년 사면
1925–1931PSOE·UGT 의장;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에 협조 노선
1931–1933제2공화국 제헌의회 의장
193410월 무장봉기에 반대, UGT 의장 사임
1937.05조지 6세 대관식 공화국 대표로 런던 방문, 이든과 평화 중재 모색
1939.03카사도 쿠데타 합류, 국방평의회 외무담당
1939.03–1940.09프랑코군에 체포, 군사재판서 30년형 선고, 카르모나 감옥에서 사망
1933년 6월 9일 자신의 계획에서 벗어나려던 딸을 잠든 사이 총으로 쏘아 죽였고, 끝내 뉘우치지 않은 채 정신병원에서 숨졌다.
페롤의 부유한 자유주의자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서재에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을 읽으며 독학했다. 언니가 맡긴 조카 페피토 아리올라를 음악 신동으로 키운 경험에서 교육·개혁·우생학에 대한 믿음을 굳혔다. 아버지가 죽은 뒤 1914년 여성 권리를 지킬 「미래 여성의 모범」을 낳으려고 아이에게 권리를 주장하지 못할 아버지를 골라 딸 일데가르트를 낳았다. 딸이 정치에 깊이 뛰어들고 독립하려 하자 1933년 6월 9일 잠든 딸을 쏘아 죽였다. 26년 형을 받아 시엠포수엘로스 정신병원에서 지내다 1955년 숨졌다.
1849년 스페인 원정군을 이끌고 가에타의 교황 곁으로 가 로마 공화국 진압에 나선 스페인 장군
1809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해군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 루이스와 함께 제1차 카를로스 전쟁에서 이사벨 2세 편에 서서 싸웠고, 온건당에 속했다. 1848년 9월 카탈루냐 총사령관이 되어 제2차 카를로스 전쟁의 반란 세력을 이듬해 초까지 진압했다. 1849년 5월 교황의 세속 권력을 되살리고 로마 공화국을 무너뜨리러 이탈리아로 파견되어, 스페인 병사 4,000명을 이끌고 가에타에서 비오 9세 휘하에 들어갔다. 뒤에 육군장관을 지냈고 1854년 7월 혁명적 위기 속에 하루 동안 총리를 맡았다. 1868년 혁명을 지지해 급진민주당에 들어갔고, 1873년 정계에서 물러났다. 1883년 마드리드에서 죽었다.
「스페인의 레닌」이라 불린 UGT의 노동자 지도자, 혁명과 전쟁 사이에서 무너진 공화국 총리
1936년 11월, 라르고 카바예로는 CNT 지도자 네 명을 각료로 임명했다. 국가의 폐지를 강령으로 삼아 온 아나키스트들이 국가의 장관석에 앉은 것이다. 그중 보건장관 페데리카 몬세니는 스페인 역사상 첫 여성 각료였다.
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장공으로 일하다 노동조합 지도자가 된 사람. 노동총동맹(UGT)을 이끌며 1917년 8월 총파업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아래에서는 국가참사원에 들어가 조직을 지켰는데 이 선택은 평생 논쟁으로 남았다. 제2공화국 노동장관으로 농촌 8시간 노동제를 밀어붙였고, 1934년 아스투리아스 봉기 전후로 급격히 좌경화해 지지자들에게 「스페인의 레닌」이라 불렸다. 1936년 9월 총리 겸 전쟁장관이 되어 11월에는 CNT 지도자 넷을 입각시켜 아나키스트를 처음으로 정부에 앉혔으나, 인민군 재건과 혁명의 속도를 놓고 공산당·소련 고문단과 계속 부딪쳤다. 1937년 5월 사태 뒤 POUM 금지 요구를 거부하다 각료들이 이탈하면서 물러났고, 망명지 프랑스에서 게슈타포에 붙잡혀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았다.
상세 이력 보기
1869마드리드의 가난한 집에서 출생, 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장공이 됨
1890–1894건설노동자 파업을 계기로 노동총동맹(UGT) 활동 시작, 1894년 PSOE 입당
19178월 총파업 지도로 종신형 선고, 이듬해 하원의원 당선과 함께 석방
1924–1930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아래 국가참사원 노동 참사관, UGT 조직을 유지한 대가로 오랜 논쟁을 남김
1925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사후 PSOE와 UGT의 최고 지도자로
1931–1933제2공화국 노동장관, 농촌 8시간 노동제를 비롯한 노동 입법 추진
1934–1935「스페인의 레닌」으로 불릴 만큼 좌경화, 10월 아스투리아스 봉기 실패로 수감됐다 무죄 석방
「대다수, 민중은 떠날 수 없습니다. 나는 늘 노동자들과 함께 살아왔고, 그들과 함께 남을 것입니다. 그들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입니다」, 사회당 기관지 《라 보스》에, 1939년 3월
마드리드 대학 철학 교수로 출발해 1925년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의 뒤를 이어 사회당(PSOE)과 UGT를 이끈 마르크스주의 수정파였다. 제2공화국 제헌의회 의장(1931)을 지내며 온건한 의회주의 노선을 고수했고, 1934년 10월 무장봉기에 반대하며 당내 주류에서 밀려났다. 내전 발발 후에도 마드리드에 남아 평화 협상을 모색했고, 1939년 3월 카사도 대령의 네그린 전복에 합류해 국방평의회 외무담당이 되었으나 프랑코는 무조건 항복만을 받아들였다. 다른 평의회 구성원들이 망명하는 날에도 홀로 마드리드에 남아 ‘노동자들과 늘 함께 살아왔으니 그들의 운명을 함께하겠다’고 말했고, 프랑코 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아 카르모나 감옥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12PSOE·UGT 입당; 마드리드 대학 논리학 교수 임용
1917혁명적 총파업 위원회 참여, 종신형 선고 후 1918년 사면
1925–1931PSOE·UGT 의장;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에 협조 노선
1931–1933제2공화국 제헌의회 의장
193410월 무장봉기에 반대, UGT 의장 사임
1937.05조지 6세 대관식 공화국 대표로 런던 방문, 이든과 평화 중재 모색
1939.03카사도 쿠데타 합류, 국방평의회 외무담당
1939.03–1940.09프랑코군에 체포, 군사재판서 30년형 선고, 카르모나 감옥에서 사망
1933년 6월 9일 자신의 계획에서 벗어나려던 딸을 잠든 사이 총으로 쏘아 죽였고, 끝내 뉘우치지 않은 채 정신병원에서 숨졌다.
페롤의 부유한 자유주의자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서재에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을 읽으며 독학했다. 언니가 맡긴 조카 페피토 아리올라를 음악 신동으로 키운 경험에서 교육·개혁·우생학에 대한 믿음을 굳혔다. 아버지가 죽은 뒤 1914년 여성 권리를 지킬 「미래 여성의 모범」을 낳으려고 아이에게 권리를 주장하지 못할 아버지를 골라 딸 일데가르트를 낳았다. 딸이 정치에 깊이 뛰어들고 독립하려 하자 1933년 6월 9일 잠든 딸을 쏘아 죽였다. 26년 형을 받아 시엠포수엘로스 정신병원에서 지내다 1955년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