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라트비아

시민권 7 · 민족·국가 35 · 사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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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 인물 7전체보기

반혁명 세력 라트비아 라트비아 1871–1942 ○ 사망

1919년 친독 라트비아 정부를 이끈 목사이자 작가

"민족의 운명을 가르는 것은 영리한 연설이나 조약이 아니라 힘이다"는 1924년 반역 재판 석상에서 남긴 말이다.

라트비아 문학의 대표적 소설가이자 루터교 목사로 1919년 5월 리예파야 쿠데타 뒤 폰 데어 골츠가 뒷받침한 친독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체시스 전투 뒤 정권이 무너져 독일로 피했고 1924년 귀국해 국가반역죄로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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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899도르파트(타르투) 대학 신학부 수학
  • 1903–1906체시스에서 잡지 《아우스트룸스》 편집·발행
  • 1906–1918마티시·칼스나바·비에탈바 교구 루터교 목사
  • 1917라트비아 농민연합 창립 참여, 이사
  • 1919.05–06친독 임시정부 수반(총리)
  • 1924국가반역죄 유죄 판결, 대통령 사면 뒤 추방
  • 1926–1930동프로이센 알트슈타트 독일 교구 목사

카를리스 울마니스

Kārlis Ulmanis
외국 정치가 라트비아 라트비아 1877–1942 ○ 사망

라트비아 독립전쟁의 총리, 뒤에 1934년 쿠데타의 독재자

점령 당일 라디오 연설에서 저항을 금하며 "나는 내 자리에 남고, 그대들도 그대들의 자리에 남으시오."라고 했다.

1918년 11월부터 라트비아 임시정부 총리로 소비에트군, 독일계 쿠데타, 베르몬트군을 차례로 넘기고 1920년 리가 강화와 토지개혁을 이끌었다. 1934년 쿠데타로 독재를 세웠고 1940년 소련에 강제이송되어 1942년 감옥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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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1라트비아 임시정부 초대 총리
  • 1920리가 강화 조약과 토지개혁 주도
  • 1918–1934농민연합 지도자로 총리·외무장관 여러 차례 역임
  • 1934-05군과 아이스사르기 동원, 무혈 쿠데타
  • 1936-04'민족의 지도자' 자처, 대통령 겸 총리
  • 1939-10소련군 기지 배치를 허용한 상호원조조약 서명
  • 1940-07소련 점령 뒤 퇴위, 7월 강제이송
  • 1942크라스노보츠크 감옥에서 사망

지그프리츠 안나 메이에로비츠

Zigfrīds Anna Meierovics
외국 정치가 라트비아 라트비아·유대계 1887–1925 ✕ 교통사고

라트비아 독립의 국제 승인을 얻어 낸 초대 외무장관

라트비아의 초대 외무장관으로 1918년 영국의 사실상 승인, 1920년 리가 강화, 1921년 연합국의 법적 승인과 국제연맹 가입을 얻어 냈다. 총리도 지냈으며 1925년 교통사고로 서른여덟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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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라트비아 농민연합 공동 창립자, 비제메 지방 토지위원회 재무부장
  • 1918초대 외무장관 취임
  • 1920소비에트 러시아와 리가 평화조약 체결
  • 1921연합국의 법적 승인과 국제연맹 가입 성사
  • 1921–1923총리 역임
  • 1923–1924총리 재임

알프레드스 페테리스의 아들 루빅스

Alfrēds Pētera dēls Rubiks

소련 말기 라트비아 공산당의 완고한 수호자

1991년 8월 쿠데타 시도 뒤 체포되어, 소련 연방 질서를 지키려던 정치가에서 수감된 피고인이 되었다.

알프레드스 루빅스는 리가의 도시 행정과 라트비아 공산당에서 성장한 라트비아 공산주의 정치가였다. 그는 소련 체제와 라트비아의 독립을 둘러싼 충돌에서 당의 연방적 질서를 지키려 했고, 1991년 8월 쿠데타를 지지한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과 수감으로 정치적 책임을 졌다. 출소 뒤에도 사회주의당을 이끌고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정치적 노선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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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7소련군 복무
  • 1957–1961리가 전기기계공장 기술기사
  • 1982–1984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지방산업부 장관
  • 1984–1990리가 시 집행위원회 의장
  • 1990–1991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91–19971991년 쿠데타 시도 관련 수감, 1995년 8년형 선고
  • 1999–2015라트비아 사회주의당 의장
  • 2009–2014유럽의회 의원

민족·국가적 배경 인물 35전체보기

페테리스 이바노비치 스투치카

Пётр Иванович Стучка
이론가 소련 라트비아 1865–1932 ○ 자연사

계급적 법 개념을 정식화한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법이론의 건설자

'법이란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고 이 계급의 조직된 힘, 즉 국가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관계의 체계, 즉 질서이다.' — 『법과 국가의 혁명적 역할』

라트비아 출신 법률가·혁명가. 라이니스와 함께 라트비아 마르크스주의 '신조류' 운동을 이끌었고, 10월 혁명 후 법무인민위원으로 '법원 포고 제1호'를 기초해 소비에트 사법의 토대를 놓았다. 1918~1920년 라트비아 소비에트 정부 수반, 1923년부터 RSFSR 최고재판소 초대 소장을 지냈다. 파슈카니스와 공산아카데미 법학부를 창설하고 최초의 『국가와 법 백과사전』을 편집했으며, 법을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고 국가권력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관계의 체계'로 정의한 계급적 법 개념은 초기 소비에트 법이론의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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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3–1888리가 김나지움 졸업,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졸업 — 변호사 개업
  • 1888–1897라이니스와 함께 라트비아 마르크스주의 '신조류' 운동 및 신문 『디에나스 라파』 주도
  • 1897–1903체포, 7개월 구금 후 뱟카현 5년 유형 — 풍자집 『작은 등에』 공동 집필
  • 1906RSDRP 입당, 라트비아 사회민주당 통합대회 주재 — RSDRP 지역조직으로 편입
  • 1917.10–11스몰니에서 라트비아 소총병 연락,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 조사위원장 — 법무인민위원으로 '법원 포고 제1호' 기초
  • 1918–1920RSFSR 법무인민위원·외무부인민위원, 라트비아 소비에트 정부 수반(1918.12–1920.1)
  • 1923–1932RSFSR 최고재판소 초대 소장, 코민테른 국제통제위원회 의장(1924), 『국가와 법 백과사전』 편집장(1925~1927), 소비에트법연구소 소장(1931)
반혁명 세력 라트비아 라트비아 1871–1942 ○ 사망

1919년 친독 라트비아 정부를 이끈 목사이자 작가

"민족의 운명을 가르는 것은 영리한 연설이나 조약이 아니라 힘이다"는 1924년 반역 재판 석상에서 남긴 말이다.

라트비아 문학의 대표적 소설가이자 루터교 목사로 1919년 5월 리예파야 쿠데타 뒤 폰 데어 골츠가 뒷받침한 친독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체시스 전투 뒤 정권이 무너져 독일로 피했고 1924년 귀국해 국가반역죄로 추방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0–1899도르파트(타르투) 대학 신학부 수학
  • 1903–1906체시스에서 잡지 《아우스트룸스》 편집·발행
  • 1906–1918마티시·칼스나바·비에탈바 교구 루터교 목사
  • 1917라트비아 농민연합 창립 참여, 이사
  • 1919.05–06친독 임시정부 수반(총리)
  • 1924국가반역죄 유죄 판결, 대통령 사면 뒤 추방
  • 1926–1930동프로이센 알트슈타트 독일 교구 목사

이오아킴 이오아키모비치 바체티스

Иоаким Иоакимович Вацетис
군사 · 국방 소련 라트비아 1873–1938 ✕ 처형

적군 최초의 총사령관, 제국군 대령에서 혁명의 군사 건설자로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반군이 모스크바 중심부를 장악했을 때, 바체티스의 라트비아 소총병들이 새벽 포격으로 그들을 제압했다. 볼셰비키 정부는 그날 아침 그에게 존속을 빚졌다.

라트비아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차르의 장교가 되었고, 혁명 후에는 소비에트 공화국 최초의 전군 총사령관으로서 초대 붉은 군대의 틀을 만들었다. 1918년 7월 모스크바에서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을 지휘해 좌파 사회혁명당의 무장봉기를 진압함으로써 볼셰비키 정권을 위기에서 구했고, 그 직후 동부전선을 이끌며 백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비당원 군사 전문가로서 트로츠키·레닌과 긴밀히 협력했으나, 1919년 반역 혐의로 체포·해임된 이후에는 전선에서 물러나 군사학자와 교수로 활동했다. 대숙청 속에서 체포·처형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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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1917차르 군대에서 복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라트비아 소총병 연대장으로 종군하여 대령까지 진급
  • 1917–1810월 혁명 후 볼셰비키 편에 서서 12군 사령관,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장 역임
  • 1918.07모스크바 좌파 사회혁명당 봉기 진압 지휘
  • 1918.07–09동부전선 사령관
  • 1918.09–1919.07RSFSR 전군 총사령관 — 붉은 군대 최초의 총사령관
  • 1919–37적군 군사 아카데미에서 교편, 1927년 교수, 1935년 2등급 군사령관
  • 1937/1957대숙청 속 체포·처형, 1957년 복권

카를리스 울마니스

Kārlis Ulmanis
외국 정치가 라트비아 라트비아 1877–1942 ○ 사망

라트비아 독립전쟁의 총리, 뒤에 1934년 쿠데타의 독재자

점령 당일 라디오 연설에서 저항을 금하며 "나는 내 자리에 남고, 그대들도 그대들의 자리에 남으시오."라고 했다.

1918년 11월부터 라트비아 임시정부 총리로 소비에트군, 독일계 쿠데타, 베르몬트군을 차례로 넘기고 1920년 리가 강화와 토지개혁을 이끌었다. 1934년 쿠데타로 독재를 세웠고 1940년 소련에 강제이송되어 1942년 감옥에서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8-11라트비아 임시정부 초대 총리
  • 1920리가 강화 조약과 토지개혁 주도
  • 1918–1934농민연합 지도자로 총리·외무장관 여러 차례 역임
  • 1934-05군과 아이스사르기 동원, 무혈 쿠데타
  • 1936-04'민족의 지도자' 자처, 대통령 겸 총리
  • 1939-10소련군 기지 배치를 허용한 상호원조조약 서명
  • 1940-07소련 점령 뒤 퇴위, 7월 강제이송
  • 1942크라스노보츠크 감옥에서 사망

직접 연루된 역사 사건 4전체보기

1918.11–1920.10

발트 독립전쟁과 국경의 강화

1918년 11월 독일이 무너진 뒤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신생 정부는 붉은 군대, 러시아 백군, 독일 자유군단이라는 세 세력 사이에서 국가를 만들어야 했다. 영국 함대의 지원과 핀란드 의용군, 토지개혁으로 농민을 얻은 에스토니아는 1919년 초 붉은 군대를 밀어냈고, 자국 땅에서 출발한 유데니치의 북서군이 페트로그라드 앞에서 무너지자 이를 무장해제한 뒤 1920년 2월 타르투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첫 독립 승인 조약을 맺었다. 라트비아는 스투치카의 소비에트 정부, 폰 데어 골츠의 독일군과 니에드라의 친독 정부, 베르몬트-아발로프의 리가 공격을 차례로 이겨 냈고, 리투아니아는 리트벨을 물리쳤지만 폴란드에 빌뉴스를 잃었다. 1920년 한 해에 맺어진 타르투·모스크바·리가·타르투(핀란드) 조약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북서 국경을 그렸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 분쟁은 남았다.

1939.08–1940.08

독소 불가침조약과 동유럽 분할

독소 불가침조약은 1939년 8월 23일 밤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소련 외무인민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서명한 조약으로, 공개된 불가침 조항과 함께 동유럽에서의 세력 범위를 나누는 비밀 추가 의정서를 담고 있었다. 영국·프랑스와의 집단안보 협상이 폴란드의 소련군 통과 거부로 교착된 상황에서, 스탈린은 독일과의 협정을 선택했다. 조약 체결 1주일 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고, 9월 17일 소련도 폴란드 동부로 진격했다. 9월 28일 양국은 독소 우호 및 국경 조약을 체결하여 폴란드 분할을 확정했고, 비밀 의정서를 개정해 리투아니아를 소련 세력권으로 넘기는 대가로 루블린과 바르샤바 일부를 독일 측에 양보했다. 이 조약은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파기될 때까지 소련의 발트 3국 합병, 핀란드 겨울전쟁, 베사라비아 점령의 발판이 되었다.

1987–1991

발트 독립운동과 「발트의 길」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는 1940년 독소불가침조약의 비밀의정서에 따라 소련에 병합된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고, 글라스노스트가 열리자 그 기억이 곧 정치가 되었다. 1987년 8월 탈린의 히르베파르크 집회가 비밀의정서를 처음 공개적으로 규탄했고, 1988년에는 세 공화국 모두에서 인민전선(에스토니아의 라흐바린네, 라트비아 인민전선, 리투아니아의 사유디스)이 결성되었다. 합창 축제의 전통 위에서 자란 이 대중운동은 「노래 혁명」이라 불렸다. 1988년 11월 에스토니아가 첫 주권 선언을 냈고, 1989년 8월 23일 조약 체결 50주년에는 200만 명이 세 나라의 수도를 잇는 600킬로미터의 인간 사슬 「발트의 길」을 만들었다. 그해 12월 인민대의원대회는 비밀의정서의 존재를 인정하고 무효를 선언했다. 병합의 법적 근거가 소련 스스로의 손으로 부정된 것이다.

1991

8월 쿠데타와 소련의 해체

1991년 8월, 신연방조약 체결을 막으려는 보수 강경파가 고르바초프를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크류치코프·야조프·파블로프 등이 주도한 이 쿠데타는 옐친이 전차 위에 올라 저항하고 시민이 결집하면서 사흘 만에 무너졌다. 쿠데타의 실패는 오히려 연방의 해체를 가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