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

8월 쿠데타와 소련의 해체

1917년에 태어난 국가는 어떻게 끝났는가?

1991년 8월, 신연방조약 체결을 막으려는 보수 강경파가 고르바초프를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크류치코프·야조프·파블로프 등이 주도한 이 쿠데타는 옐친이 전차 위에 올라 저항하고 시민이 결집하면서 사흘 만에 무너졌다. 쿠데타의 실패는 오히려 연방의 해체를 가속했다.

붕괴 직전의 국가, 1991년 여름

1991년 여름, 소련은 더 이상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었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시작한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는 당-국가 체제의 통제력을 근본적으로 약화시켰고, 경제는 자유낙하 중이었다. 1991년 4월, 정부가 가격을 한꺼번에 300% 인상하자 국민의 실질소득은 폭락했고, 모스크바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식량 배급제가 도입되었다. 육류·설탕·비누·담배는 상점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고, 다가오는 겨울을 위한 연료 비축량은 필요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공장들은 노동자에게 지급할 현금조차 없었다. 인플레이션은 연 300%를 넘겼고, 재정적자는 화폐 발행으로 메워지며 악순환을 반복했다.

정치적 분열은 경제 붕괴보다 더 빨랐다. 1990년 6월 12일 러시아 공화국이 국가주권선언을 채택하며 자국 법률이 연방 법률보다 우선한다고 선언하자, 다른 공화국들도 잇달아 유사한 선언을 했다. 이른바 '법률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발트 3국은 이미 1990년 봄 독립을 선언했고, 1991년 1월 소련군의 리투아니아 진압 시도는 실패했다. 아르메니아·그루지야·몰도바는 3월 17일 전연방 국민투표마저 보이콧했다. 투표에 참여한 9개 공화국에서 76.4%가 '개조된 연방'으로서의 소련 존속에 찬성했지만, 그 '개조된 연방'이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는 없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가 바로 노보오가료보 과정이었다. 고르바초프는 1991년 4월 23일, 옐친을 포함한 9개 공화국 정상들과 이른바 '9+1 합의'에 서명하며 신연방조약 협상을 시작했다. 모스크바 근교 노보오가료보 관저에서 수차례 열린 회의에서 각 공화국은 연방 예산, 세금, 재산권, 의회 구조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우크라이나의 크랍추크는 연방 세금을 폐지하고 공화국이 분담금을 내는 방식만 인정했으며, 카자흐스탄의 나자르바예프는 '공동 경제 공간의 상실이 선전용 허구가 아니라 냉혹한 현실'이라고 경고했다. 타타르스탄의 샤이미예프는 자치공화국도 연방공화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조약에 서명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7월 23일 최종 합의된 초안은 '소비에트 주권 공화국 연방(SSSR)'이라는 이름으로, 중앙정부의 권한을 외교·국방·일부 재정으로 축소하고 나머지는 공화국에 이양하는 완화된 연방제를 규정했다. 서명 일정은 8월 20일로 잡혔다. 러시아·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이 먼저 서명하고, 나머지 공화국은 9월에서 10월 사이에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이 조약이 발효되는 순간, 소련 각료회의와 KGB를 비롯한 연방 기구들의 권한은 대부분 사라지게 되어 있었다. 보수파에게 이것은 조약이 아니라 국가 해체 문서였다. 1990년 12월,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은 의회 연단에서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하며 사임했다. 1991년 6월 17일, 파블로프 총리는 최고소비에트에 비상대권을 요구했으나 고르바초프에게 거부당했다. 모스크바 시장 포포프는 같은 달 주소련 미국 대사 매틀록에게 '고르바초프에 대한 쿠데타가 준비 중'이라고 알렸고, 매틀록이 이를 고르바초프에게 전달했지만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내각이 연루되었을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7월 23일, 바로 신연방조약 초안이 타결된 날, 보수 성향의 《소베츠카야 로시야》에는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호소문이 실렸다. 작가 본다레프·프로하노프·라스푸틴, KPRF의 주가노프, 그리고 훗날 GKChP 피고인이 되는 바렌니코프·스타로두브체프·티자코프 등 12인이 서명한 이 글은 '위대한 조국이 침묵과 방관 속에 무너지고 있다'며, '교활한 지배자들과 탐욕스러운 약탈자들'이 '나라를 갈기갈기 찢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호소문은 28일 후 발생할 8월 쿠데타의 사실상 이념 강령이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7월 29일 밤 노보오가료보에서 벌어졌다. 고르바초프·옐친·나자르바예프는 비밀 회동에서 신연방조약 서명 후 파블로프·크류치코프·야조프·푸고 등 강경파 각료들을 경질하고 나자르바예프를 새 총리로 임명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이 대화는 크류치코프가 고르바초프의 경호책임자를 통해 설치한 도청 장치에 고스란히 녹음되었다. 8월 초, 크류치코프는 이 녹음 테이프를 공모자들에게 들려주며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설득했다. 8월 4일 고르바초프가 크림반도 포로스 별장으로 휴가를 떠난 사이, KGB의 비밀 시설 'ABTs'에서는 본격적인 비상사태 계획의 세부 조정이 시작되었다. 신연방조약 서명 예정일까지 남은 시간은 16일이었다.

전차가 들어온 아침, 그리고 전차 위에 오른 남자

1991년 8월 19일 오전 6시, 소련의 모든 라디오와 TV는 발레 「백조의 호수」를 틀었다. 이윽고 아나운서가 읽기 시작한 것은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의 문서들이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건강상의 이유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으며,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고, 8인으로 구성된 GKChP가 국가를 통치한다는 내용이었다. 위원회는 모스크바 등 일부 지역에 6개월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정당·사회단체 활동을 정지하며, 파업과 집회를 금지했다. 동시에 모든 시민에게 15소트카(약 1,500㎡)의 토지를 분양하겠다는 파격적인 민생 공약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발표는 18시간 전 포로스에서 시작된 사건의 마지막 단계에 불과했다. 전날 오후, 올레크 바클라노프·발레리 볼딘·올레크 셰닌·발렌틴 바렌니코프 등 4인이 크림 반도 포로스의 대통령 별장으로 날아갔다. 이들은 고르바초프에게 비상사태 선포에 동의하거나, 사임하고 야나예프에게 권력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고르바초프는 단호히 거부했다. 바렌니코프의 회고에 따르면 고르바초프는 "빌어먹을,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그러나 내 의견은 보고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하나, 현장에 있던 다른 이들은 방문단이 분명히 실망하고 초조한 상태로 돌아갔다고 증언했다. 볼딘에게는 "닥쳐, 이 멍청한 놈아!"라고 욕설을 퍼부었다는 기록도 있다.

사절단이 떠나자 KGB는 별장의 모든 통신을 차단했다. 전략핵무기 지휘통제선까지 끊겼다. 세바스토폴 연대가 별장을 봉쇄했고, 대통령 전용기의 활주로는 트랙터로 막혔다. 고르바초프는 작은 소니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BBC 방송을 들으며 상황을 파악했고, 독살을 우려해 외부 음식을 거부했다.

모스크바 시간으로 새벽 1시, 야나예프는 GKChP 구성 문서에 서명했다. 위원회는 야나예프, 발렌틴 파블로프 총리,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KGB 의장,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 보리스 푸고 내무장관, 바클라노프, 그리고 민간 측 인사인 바실리 스타로두프체프(농민연합 의장)와 알렉산드르 티쟈코프(국영기업연합 회장)로 구성되었다. 이른바 '8인조(Gang of Eight)'다. 핵심 설계자는 크류치코프였고, 야나예프는 후일 "체포 위협 속에 강제로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새벽 3시 30분, 야조프는 지휘관들에게 고르바초프의 병환과 GKChP의 출범을 통보했다. 타만스카야 차량화보병사단, 칸테미롭스카야 전차사단, 툴라 공수사단에 모스크바 진입 명령이 떨어졌다. 오전 9시까지 약 4,000명의 병력과 전차 350대, 장갑차 300대, 트럭 420대가 시내로 진입했다. KGB는 체포 명단을 작성했으나, 보리스 옐친에 대한 체포는 실행되지 않았다. 알파 그룹이 옐친의 다차를 포위했지만 진입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고, 지휘관 빅토르 카르푸힌은 후일 크류치코프의 체포 명령을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이 실패는 결정적이었다. 옐친은 오전 9시 러시아 공화국 최고소비에트 건물인 '백악관'에 도착했다. 그와 함께한 이들은 루슬란 하스불라토프 최고소비에트 의장, 이반 실라예프 총리, 알렉산드르 루츠코이 부통령 등이었다. 이들은 즉시 「러시아 시민에게 고함」을 작성해 배포했다. GKChP의 행위를 "반동적·반헌법적 쿠데타"로 규정하고, 군인들에게 쿠데타에 가담하지 말 것을 촉구했으며, 총파업과 고르바초프의 국민 앞 연설을 요구했다. 이 선언은 팩스와 중파 라디오, RELCOM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해 소련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정오 무렵 백악관 앞에는 수천 명의 시민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후에는 수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쓰레기통, 공원 울타리, 콘크리트 블록, 벤치, 잘라낸 나무들로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의용 민병대가 조직되었고, 아프가니스탄 참전용사들과 민간 경비업체 '알렉스' 직원들도 합류했다.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전 외무장관도 백악관을 찾아 "독재가 온다"고 경고했던 자신의 말이 현실이 되었다고 말했다.

오후 5시, GKChP는 외무부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파블로프 총리는 전날의 '알코올 중독'으로 불참했다. 야나예프는 고르바초프가 "매우 피곤해서 건강 회복에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자신을 "고르바초프의 친구"라고 칭하며 그가 복귀하면 함께 일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떨리는 손과 불안정한 목소리는 전 세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과거 브레즈네프 시대라면 편집되었을 이 장면이 여과 없이 방송되면서, 쿠데타 지도부의 무능함이 소련 시청자들에게도 그대로 노출되었다. 고르바초프는 별장에서 임시로 만든 TV 안테나로 이 기자회견을 시청한 뒤, 옐친이 쿠데타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날 저녁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따로 있었다. 옐친이 백악관 앞에 선 타만스카야 사단 소속 전차 110호 위로 올라가 군중 앞에서 「러시아 시민에게 고함」을 낭독한 것이다. 이 장면은 국영 TV 저녁 뉴스에도 예상 밖으로 방영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사단 전차 대대의 참모장 예브도키모프 소령이 자신의 부대가 러시아 정부에 충성한다고 선언했고, 전차 10대가 백악관 방어 진영에 합류했다. 탄약은 없었지만 삼색기가 걸린 전차들의 합류는 군중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쿠데타를 막으려고 들여온 전차가 쿠데타에 맞서는 상징이 된 것이다.

사흘 만에 무너진 쿠데타

8월 21일 0시 31분, 모스크바 차옌코프스키 터널에서 쿠데타의 운명을 가른 충돌이 일어났다. 사도보예 환상도로와 노비 아르바트가 교차하는 지하차도에서 시민들이 타만사단 소속 BMP 보병전투차 8대로 이루어진 순찰대를 가로막았다. 병사들이 공중으로 경고 사격을 가했고, 22세의 아프간전 참전용사 드미트리 코마리가 BMP 관측창을 막으려다 궤도에 깔려 숨졌다. 그를 도우러 달려온 37세 경제학자 블라디미르 우소프는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 BMP 한 대에 불이 붙자 병사들이 후퇴했고, 28세 건축가 일리야 크리쳅스키가 총에 맞아 쓰러졌다. 세 시민의 죽음은 양측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언론인 세르게이 파르호멘코는 "그 죽음들이 결정적이었다: 양측 모두 너무 큰 충격을 받아 모든 것이 멈췄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이 시간 이후 쿠데타는 급속히 무너졌다. 새벽 2시, 알파그룹과 빔펠 특수부대는 백악관 공격 작전 '그롬'의 개시 명령을 끝내 받지 못했다. 사령관 빅토르 카르푸힌은 작전이 유혈참사로 이어질 것이라 판단하고 이의를 제기했다. 누구도 서면 명령에 서명하려 들지 않았다. 새벽 3시, 공군 총사령관 예브게니 샤포시니코프가 야조프에게 "군대를 모스크바에서 철수하고 GKChP를 불법으로 선언하라"고 요구했다. 오전 5시 소집된 국방부 회의에서 전략로켓군 총사령관 유리 막시모프, 해군 총사령관 블라디미르 체르나빈, 공수군 사령관 파벨 그라초프 등이 줄줄이 샤포시니코프의 편에 섰다. 야조프는 항복했다. "이 게임에서 손을 뗀다"고 크류치코프에게 전화한 뒤, 오전 8시 모스크바에서 전 병력 철수를 명령했다. 탱크와 장갑차들이 도시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GKChP 잔존 세력은 마지막 도박을 걸었다. 크류치코프·야조프·바클라노프·티쟈코프, 그리고 루키야노프이바시코프가 비행기로 크림반도로 날아가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만나려 했다. 오후 4시 8분 벨베크 공항에 도착했지만, 고르바초프는 면회를 거부하고 통신 회복을 요구했다. 이보다 44분 늦게 출발한 루츠코이·실라예프·프리마코프·바카틴 등 옐친 측 구출대도 36명의 무장 경찰관과 함께 벨베크에 내렸다. 이들이 먼저 고르바초프와 접촉했다. 오후 5시, 야나예프는 GKChP 해산과 자신의 모든 결정 무효를 선언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다. 저녁 6시 30분 옐친의 대변인은 마침내 고르바초프와의 통화가 연결되었다고 발표했다. 8월 22일 0시 4분,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 브누코보 공항에 도착했다. 같은 비행기에는 체포된 크류치코프도 타고 있었다. 쿠데타는 끝났다.

벨로베즈 푸시차: 하루 만에 사라진 제국

1991년 12월 8일, 벨라루스의 국립공원 벨로베즈 푸시차에 있는 사냥용 별장 비스쿨리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세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모였다. 표면적인 안건은 벨라루스에 대한 러시아산 석유·가스 공급 문제였다. 슈시케비치 벨라루스 최고소비에트 의장은 훗날 "겨울이 오는데 난방할 기름과 가스를 살 돈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크랍추크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기억은 달랐다. "나는 석유와 가스 얘기는 들은 적도 없다. 소련의 장래를 논의하러 간 줄 알았다."

이 자리에는 옐친을 수행한 겐나디 부르불리스 러시아 국가장관이 동행하고 있었다. 부르불리스는 이미 9월에 '러시아의 이행기 전략'이라는 문건(훗날 '부르불리스 각서'로 불린다)을 옐친에게 제출한 인물이었다. 예고르 가이다르의 연구팀이 초안한 이 문건은 러시아가 경제적 독립 노선을 취하고 다른 공화국들과는 '일시적' 정치 연합만 유지해야 한다고 결론내렸다. 부르불리스는 이날 협상장에서 훨씬 더 급진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소련은 국제법의 주체로서 그리고 지정학적 실재로서 그 존재를 종료한다." 슈시케비치는 이 한 문장을 평생 잊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 합의의 첫 문장이었고, 논쟁 없이 채택된 유일한 문장이었다."

세 지도자는 소련이 끝났다는 데 합의한 뒤, 대체물로 독립국가연합(CIS)을 창설하기로 했다. 14개 조항으로 구성된 협정은 당일 오후 3시경 완성되었다. 법리적으로 이들은 1922년 소련 수립 조약의 원서명국인 세 공화국(자캅카스 SFSR은 1936년 해체)을 대표한다는 논리를 취했다. 소련 헌법에 규정된 탈퇴 절차를 우회한 것이다.

서명 직후 옐친은 조지 H.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샤포시니코프 국방장관과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6조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옐친은 핵무기에 대한 단일 통제를 규정한 조항을 직접 읽어주며 부시를 안심시켰다. 옐친은 나자르바예프가 동참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모스크바로 날아가 고르바초프를 만났다. 슈시케비치가 고르바초프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는 부시와의 통화가 끝난 뒤였다. "고르바초프는 화가 나서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한 거요? 온 세계가 뒤집혔소!'라고 말했다"고 크랍추크는 전한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에게는 더 이상 이들을 제지할 힘이 없었다.

벨라루스 KGB는 비스쿨리 주변 숲에 특수부대를 배치하고 모스크바의 명령을 기다렸으나, 체포 명령은 끝내 떨어지지 않았다. 고르바초프는 25년 후 "내전의 냄새가 났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길을 택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12월 10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는 295대 10으로, 12일 러시아 최고소비에트는 188대 7로 협정을 비준했다. 12월 21일 알마아타에서 나머지 공화국들도 참여했고,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사임했다. 크렘린에서 소련 국기가 내려갔다.

크렘린에서 내려간 붉은 깃발

12월 21일 알마아타에서 11개 공화국이 독립국가연합(CIS) 창설 의정서에 서명하자, 고르바초프에게 남은 것은 사임뿐이었다. 12월 23일 크렘린에서 옐친과 9시간 가까이 마주 앉은 그는 권력 이양 절차를 협의했다. 옐친의 보좌관 부르불리스는 회담 후 "사임은 수일 내, 어쩌면 수시간 내"라고 말했다. 그날 밤 소련 국영방송은 크렘린 집무실에 카메라를 설치했지만 고르바초프는 나타나지 않았다. 옐친이 ABC 방송의 촬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사임 당일인 12월 25일 오전 10시 3분, 고르바초프는 캠프 데이비드의 조지 H.W. 부시 대통령에게 마지막 전화를 걸었다. "조지, 내 친애하는 친구여. 그대의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소." 22분간 이어진 통화에서 그는 두 시간 후 TV 연설로 사임할 것이라고 알리고, 핵무기 통제권이 옐친에게 "엄격한 통제 아래" 이양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나는 타이가에 숨지 않을 것이오. 정치적으로 활동을 계속할 생각이오." 부시는 "당신이 한 일은 역사에 살아 있을 것이오"라고 화답했다. 이 통화의 속기록은 2016년 국가안보기록원(NSA)이 공개했다.

오후 7시, 고르바초프는 소련 TV 카메라 앞에 앉았다. 12분간의 고별 연설에서 그는 "독립, 민족의 자치권, 공화국의 주권을 확고히 지지해왔지만 동시에 연방 국가와 국가의 통일성을 보존하는 데도 찬성했다"고 말했다. CIS 창설로 사태가 다르게 흘렀으며 "이 나라를 해체하고 분열시키는 정책이 우세했다"고, 그러나 자신은 "역사적 정당성"을 확신한다고 밝혔다. 냉전 종식, 군비경쟁 중단, 언론·종교·정치적 자유를 자신의 유산으로 제시하면서도, 구체제가 무너지고 새 체제가 작동하기 전에 위기가 심화된 점을 인정했다. 그의 손에는 셰바르드나제·야코블레프·체르냐예프가 함께 작성한 원고가 들려 있었다.

연설 직후, 핵가방 체게트의 이양이 이루어졌다.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직 사임과 동시에 최고사령관직도 사임한다는 포고령에 서명했고, 예브게니 샤포시니코프 국방장관의 입회 아래 3.3파운드짜리 검은 서류가방이 옐친에게 넘겨졌다. 이 가방은 전략로켓군 사령부와 대통령을 연결하는 휴대용 단말기로, 소련의 장거리 핵무기 2만 7천기(그중 1만 1천기는 미국 본토 도달 가능)의 발사를 승인할 수 있는 장치였다. 고르바초프를 6년 9개월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두 명의 통신 장교도 이제 옐친의 경호팀으로 옮겨갔다.

오후 7시 32분, 크렘린 돔 위의 붉은 낫과 망치 깃발이 내려지고 러시아 삼색기가 올라갔다. 눈 덮인 붉은 광장을 지나던 시민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74년 전 겨울궁전을 점령하며 시작된 소비에트 국가는 한 통의 전화와 한 편의 연설, 그리고 깃발 하나의 교체로 막을 내렸다. 이튿날인 12월 26일, 소련 최고소비에트 공화국원은 선언 제142-N호를 채택하여 소련의 공식 해체를 승인했고, 12월 31일 자정을 기해 소련의 모든 기관은 존재를 멈추었다.

끝난 것과 끝나지 않은 것

1991년 12월 26일, 소련은 공식적으로 소멸했다. 74년간의 비자본주의 초강대국 실험은 끝났고, 냉전은 막을 내렸으며, 열다섯 개의 새 독립국이 유엔에서 소련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한때 1억 3천만 명을 고용했던 중앙계획경제는 시장과 사유화와,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궁핍으로 대체되었다. 러시아의 경우 1992년 1월의 충격요법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1991년에 정확히 무엇이 끝났는지는 그 자체로 역사적 질문이다. 경쟁 선거는 이미 치러졌고, 당의 헌법적 독점은 폐지되었으며, 여러 공화국이 주권을 선언한 뒤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소련이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12월보다 몇 달 앞서 실질적으로 소멸했으며 공식적으로 종료된 것은 껍데기였다고 주장한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그 종말이 외부 정복이나 대중 봉기가 아니라 체제 정상의 결정들을 통해 왔다는 사실이다.

가장 깊은 역사학적 균열은 구조주의자와 의도주의자 사이에 있다. 구조주의자들은 개혁 불가능한 경제 모델, 소비에트 연방 구조에 내장된 민족주의 압력, 군비 경쟁의 부담을 원인으로 꼽는다. 테리 마틴이 '적극적 차별 제국'이라 부른 소비에트 민족 정책은 공화국들에 자체 언어와 엘리트와 제도를 부여했고, 본질적으로 훗날 실질적 주권을 요구할 수 있는 네이션들을 건설하고 있었다. 푸틴은 2016년 레닌이 헌법에 공화국 탈퇴권을 포함시킨 것을 '지연 작동 폭탄'이라 불렀다. 경제사가들은 소비에트 GDP 성장률이 1960년대의 연 약 5%에서 1980년대 중반에는 0%에 가까워졌고, 1985년 이후 유가 폭락으로 주요 경화 수입원이 고갈되었다고 지적한다.

의도주의자들은 1985년에서 1991년 사이 특정 개인들이 내린 결정들의 우연성을 강조한다. 아치 브라운의 『고르바초프 팩터』(1996)는 고르바초프가 사건들의 수동적 인질이 아니라 정치적 변화를 주도한 행위자였으며, 그가 없었다면 체제는 수십 년 더 버텼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데이비드 코츠와 프레드 위어는 소비에트 엘리트들이 자본주의와 민족 독립에서 더 큰 개인적 이득을 보았기 때문에 체제를 포기했다는 설명을 내놓았다.

보다 최근의 연구, 특히 블라디슬라프 주보크의 『붕괴』(2022)는 불가피성 서사에 반박한다. 주보크는 소련이 '완벽한 폭풍과 무능한 선장'의 희생물이었다고 주장한다. 고르바초프는 국가를 지탱하던 제도들, 즉 당 기구와 보안 기관과 중앙 부처들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는 개혁을 단행했지만 그로 인한 원심력을 관리할 대체제를 구축하지 못했다. 경제는 처음부터 운명 지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공산당의 정치적 통제와 시장경제를 결합한 중국식 모델이 대안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역사가가 이 반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미하엘 엘만은 구조적 문제들이 주보크가 인정하는 것보다 더 깊었고, 서부 공화국들의 민족주의 동원이 이미 진전된 상태에서 '중국식' 해법이 성공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비판했다.

붕괴가 정리하지 못한 것들은 정리된 것들만큼이나 무겁다. 분할 통치를 위해 자의적으로 그어진 공화국 간 경계선들은 하룻밤 사이에 국제 국경이 되었다. 연방 안에 갇혀 있던 갈등들은 전쟁으로 폭발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1988-1994, 2020년·2023년 재발), 트란스니스트리아(1992),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1992-1993, 2008), 그리고 체첸. 이 '동결분쟁'들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해결되지 않았고, 러시아와 주변국 관계는 계속해서 이 분쟁들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

경제적 유산 역시 첨예하게 논쟁된다. 러시아 GDP는 1990년에서 1998년 사이 약 40% 하락했다. 경제학자 스티븐 로즈필드는 1990년부터 1998년까지 러시아에서 340만 명의 조기 사망이 발생했으며 이 중 상당 부분이 전환의 충격에 기인한다고 계산했다. 2017년 연구는 구소련 전역의 조기 사망을 700만 명으로 추산했다. 러시아 남성의 기대수명은 1990년대 전반기에 6년 이상 하락했다. 이 비용들이 불가피한 전환의 대가였는지, 회피 가능한 정책 선택의 결과였는지는 여전히 살아 있는 논쟁이다.

소비에트 붕괴는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이라 부른 것을 가져오지 않았다. 10년 안에 후속 국가 대부분은 어떤 형태로든 권위주의 또는 준권위주의 통치를 공고히 했다. 끝난 것은 이데올로기적 갈등 그 자체가 아니라, 두 초강대국을 축으로 한 양극 세계라는 특정한 구성이었다. 그것을 대체한 다극적 무질서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가장 폭력적인 표현이었듯이, 붕괴의 미완성된 역사에 속한다.

역사가들은 무엇을 두고 다투는가

소련의 해체는 냉전을 끝냈다. 1917년 10월에 시작된 사회주의 국가 건설 실험은 74년 만에 막을 내렸고,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더 이상 자본주의에 대한 체제적 도전으로 기능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1991년 12월 25일 붉은 깃발이 내려가면서 확정된 사실이다.

그러나 그 너머의 것들은 확정되지 않았다. 첫째, 해체가 필연적이었는지를 두고 역사가들은 합의하지 못했다. 구조주의적 해석은 소련 체제 자체에 내장된 모순, 즉 민족 공화국에 분리할 권리를 부여한 연방 구조, 개혁 불가능한 계획경제, 글라스노스트가 드러낸 역사적 범죄의 유산이 붕괴를 시간문제로 만들었다고 본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2016년 레닌의 민족자결권 보장을 두고 '지연작용식 폭탄'이라고 불렀다. 반면 의도주의적 해석은 개인의 선택을 강조한다. 아치 브라운의 『고르바초프 팩터』(1996)는 고르바초프의 개혁 방향이 달랐다면 연방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데이비드 코츠와 프레드 위어는 소비에트 엘리트들이 사적 이익을 위해 민족주의와 자본주의를 의도적으로 촉진했다고 본다.

둘째, 해체의 성격을 두고도 해석은 엇갈린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89년 「역사의 종언?」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최종적 승리를 선언했고, 1990년대 미국의 승전사관은 이 틀을 정설로 삼았다. 그러나 2005년 푸틴이 해체를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규정한 것은 또 하나의 강력한 대항 서사를 낳았다. 2018년 레바다 센터 조사에서 러시아인의 66%가 소련 해체를 후회했고, 구소련 전역에서 해체 직후 700만 명의 조기 사망이 발생했다는 추정도 있다.

셋째, 해체가 완결된 사건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트란스니스트리아, 압하지야, 남오세티야, 나고르노카라바흐, 크림반도. 옛 소련 영토에서 벌어진 모든 무력충돌은 1991년에 그어진 국경선이 최종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해체는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진행 중인 과정일 수 있다.

중국 학계는 별도의 논의 축을 형성했다. 일부는 고르바초프의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주의' 노선이 마르크스주의를 배반하여 붕괴를 초래했다고 보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스탈린식 모델 자체의 경직성이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시진핑은 2013년 소련 붕괴의 교훈으로 '역사적 허무주의'와 당의 이념 통제 상실을 지목했다.

요컨대 해체가 70년 체제의 종말이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피할 수 없는 것이었는지, 누구의 책임인지, 그리고 무엇을 향한 종말이었는지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닫히지 않은 질문으로 남아 있다.

필연이었는가, 선택이었는가

소련의 해체는 단 하루도 예측되지 않았다. 1991년 봄 CIA는 소련이 앞으로 몇 년은 더 버틸 것이라고 전망했고, 고르바초프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잭 매트록 주소련 미국대사는 냉전의 종식과 동유럽 공산정권의 붕괴, 소련 자체의 해체가 전혀 별개의 사건이었다고 술회했다. 1989년에 이미 끝난 냉전과 1991년에 사라진 국가를 하나의 필연적 드라마로 묶는 것은 사후적 서사였다. 그 서사는 해체의 이유를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 속에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해체 30년 동안 역사가들 사이에는 크게 네 개의 설명이 경쟁해 왔다. 첫째는 서방의 승리 서사다. 소련은 태생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체제였고 군비 경쟁과 냉전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매트록을 비롯한 냉전사 연구자들은 오히려 고르바초프가 외부 압력 없이 스스로 공산당의 지배를 해체했다고 반박한다. 둘째는 러시아 내에서 뿌리 깊은 음모론으로, CIA와 서방의 계획된 파괴 공작이 소련을 무너뜨렸다는 주장이다. 푸틴이 해체를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부른 발언은 이 정서를 국가적 기억으로 고정시켰다.

진지한 학문적 논쟁은 다른 두 축에서 전개된다. 구조적 설명은 소비에트 체제 자체가 내장한 모순, 즉 민족 연방제의 내파성, 계획경제의 고갈, 엘리트의 부패가 붕괴를 예정했다고 본다. 로널드 수니는 소비에트 민족 정책이 바로 그 체제를 파괴할 민족들을 창조했다고 주장했고, 세르히 플로히는 발트에서 우크라이나로 이어진 독립 운동이 중앙의 의지와 무관하게 연방을 분해했다고 썼다. 이 관점에서 고르바초프는 기차가 이미 질주하는 선로 위에 서 있었을 뿐이다.

반대편의 의도적 설명은 개인의 선택이 결정적이었다고 반론한다. 아치 브라운의 『고르바초프 팩터』는 1985년부터 1988년까지 소련 정치의 주된 동력은 고르바초프 개인이었으며, 그가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시장 개혁과 외교 노선 없이는 해체도 없었다고 논증한다. 블라디슬라프 주보크는 더 나아가 2021년 저서 『Collapse』에서 소련은 "완벽한 폭풍과 무능한 선장"의 희생자였을 뿐 구조적 운명은 아니었다고 썼다. 데이비드 코츠와 프레드 위어는 『위로부터의 혁명』에서 당-국가 엘리트 자신이 자본주의로의 이행에서 사적 이익을 발견하고 체제 해체를 선택했다고 주장한다.

스티븐 코언의 '잃어버린 대안' 테제는 이 논쟁 전체에 가장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그가 평생에 걸쳐 주장한 바, 소비에트 체제는 개혁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부하린신경제정책,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하나의 '실행 가능했던 반스탈린주의 전통'이었다. 체제가 무너진 것은 개혁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개혁을 시도한 특정한 방식과 그에 맞선 특정한 저항이 만든 정치적 결과였다.

이 논쟁이 끝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학문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해체가 불가피했다면 그 후의 모든 고통, 즉 1990년대 러시아의 기대수명 6년 하락, GDP 반토막, 4백만 명의 조기 사망, 올리가르히의 등장은 피할 수 없는 대가였다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해체가 선택의 결과였다면, 다른 선택이 가능했고 다른 결과도 가능했다는 뜻이다. 지금도 러시아 국민의 과반이 해체를 후회한다는 여론조사는, 역사의 방향이 정해져 있었다는 서사에 대한 거부다.

같은 사건, 갈라지는 해석들

소련 붕괴의 역사서술은 크게 두 진영으로 갈라진다. 하나는 구조적 설명이고, 다른 하나는 의지적 설명이다. 구조주의자들은 소련 체제가 처음부터 파국을 향해 설계되었다고 본다. 마틴 말리아볼셰비키 이데올로기 자체를 '원죄'로 삼아 1917년부터 붕괴는 예정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 워커는 소련의 민족연방 구조에 초점을 맞춘다. 공화국들에 명목상의 주권과 탈퇴권을 부여한 소비에트 연방제는, 중앙이 약화되는 순간 분리독립의 합법적 통로로 돌변할 '시한폭탄'이었다는 것이다. 경제적 설명에서는 로버트 나이트가 스탈린식 중앙계획경제의 비효율이 누적되어 현대적 경제활동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고 보며, 빅토르 쿠즈네초프는 1987년 이후 페레스트로이카의 모순된 개혁들, 즉 가격통제는 유지한 채 기업자율만 부분 허용한 조치가 계획경제의 규율을 무너뜨리고 혼란만 키웠다고 반박한다.

의지주의 진영은 구조가 아니라 인간의 선택에 방점을 찍는다. 아치 브라운은 『고르바초프 팩터』(1996)에서 서기장 개인의 신념과 정치적 판단이 체제 변혁의 결정적 동력이었다고 논증한다. 데이비드 코츠와 프레드 위어는 『위로부터의 혁명』(1997)에서 더 급진적인 명제를 내놓았다. 소련 체제를 무너뜨린 것은 경제 파탄도 민중 봉기도 아니라, 당-국가 엘리트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유재산과 시장으로 향하는 것이 권력을 부로 전환할 유일한 길임을 깨달았고, 그 이익을 챙기기 위해 스스로 낡은 체제를 해체했다. 코츠와 위어는 구소련 엘리트들이 포스트소비에트 공화국의 경제·정치 고위직에 그대로 남아 있는 사실을 증거로 제시한다.

마크 바이싱어는 이 양극을 잇는 독특한 위치에 서 있다. 『민족주의 동원과 소련 국가의 붕괴』(2002)에서 그는 구조도 의지도 아닌 사건 자체의 동학을 분석한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6,663건의 시위와 2,177건의 대규모 폭력 사건을 계량화한 바이싱어는, 민족주의 운동이 '사건의 조석'을 타고 확산되었다고 주장한다. 한 공화국의 성공이 다른 공화국의 동원을 촉발하는 '편승 효과'가 일어났고, 이것이 구조적 조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농축된 역사'의 시기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블라디슬라프 주보크는 2021년 『Collapse』에서 이 논쟁에 러시아 측 시각을 보탰다. 그는 소련 붕괴를 '완벽한 폭풍과 무능한 선장'으로 압축한다. 구조적 위기는 실재했으나 붕괴는 필연이 아니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의도와 달리, 정부의 자원을 고갈시키고 분리주의에 힘을 실어준 결정적 방아쇠였다는 것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아카이브가 개방되면서도 이 해석들은 수렴하지 않았다. 같은 문서를 두고도 학자들은 정반대의 결론을 도출했다. 한쪽에서는 중앙계획의 내재적 비효율성을 읽어내고, 다른 쪽에서는 개혁이 초래한 제도적 혼란을 읽어낸다. 이는 단순한 학문적 차이를 넘어선다. 소련 붕괴의 원인에 대한 해석은 포스트소비에트 국가들의 정체성과 정당성, 그리고 '누가 이 역사적 파국에 책임이 있는가'라는 정치적 질문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결과

쿠데타 실패 뒤 공산당은 활동을 멈췄고, 공화국들이 잇따라 독립을 선언했다. 1991년 12월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고 고르바초프는 사임했다. 70년간 이어진 소비에트 국가가 막을 내렸다.

연표

  1. 1991.08.19
    쿠데타

    비상사태위원회가 고르바초프를 감금하고 권력 장악을 선언했다.

  2. 1991.08.21
    쿠데타 붕괴

    옐친과 시민의 저항 속에 쿠데타가 사흘 만에 실패했다.

  3. 1991.12.08
    벨로베즈 협정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지도자가 소련의 해체와 독립국가연합 창설을 선언했다.

  4. 1991.12.25
    고르바초프 사임

    고르바초프가 사임하고 크렘린의 소련 국기가 내려졌다.

관련 인물 47명

참여21

독재를 경고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1928–2014

1990년 사임하며 다가오는 독재를 경고한 외무장관이었다.

쿠데타를 경고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1923–2005

글라스노스트의 설계자로 쿠데타 직전 당을 떠나며 다가오는 반동을 경고했다.

GKChP 가담, 쿠데타 실패 후 자살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1923–1991

8월 쿠데타 당시 야나예프를 만나 지지를 표명하고 비상사태 조치 계획을 준비했으며, 쿠데타 실패 후 '내 평생을 바친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크렘린 집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GKChP 가담, 유일하게 사면 거부하고 법정에 서다발렌틴 바렌니코프1923–2009

국방차관 겸 지상군 총사령관으로 1991년 8월 쿠데타에 가담했다. 포로스로 날아가 고르바초프를 설득했고, 쿠데타 실패 후 기소되었으나 사면을 거부하고 정식 재판을 요구했다. 1994년 대법원은 그가 상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GKChP 쿠데타에 가담한 마지막 총참모장미하일 모이세예프1939–2022

총참모장으로서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의 쿠데타를 지지했고, 야조프 체포 후 1991년 8월 22일 단 하루 국방장관 대행을 맡았다가 이튿날 해임되었다.

쿠데타 반대, KGB 해체를 위한 마지막 의장바딤 바카틴1937–2022

8월 쿠데타 당일 야나예프에게 항의하고 프리마코프와 함께 반대 성명을 발표했으며, 루츠코이와 함께 포로스로 날아가 고르바초프를 모스크바로 복귀시켰다. 쿠데타 실패 후 8월 23일 KGB 의장에 임명되어 기관 해체 임무를 맡았다.

GKChP 동조 혐의로 체포된 최고소비에트 의장아나톨리 루키야노프1930–2019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최고소비에트 의장이었다. GKChP에는 가입하지 않았으나, 8월 18일 저녁 파블로프 총리실 모임에 참석했고 쿠데타에 동조한 혐의로 8월 29일 체포되어 15개월간 마트로스카야 티시나에 수감되었다. 1994년 두마의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당의 금고지기, 쿠데타 실패 후 추락사니콜라이 크루치나1928–1991

CPSU 중앙위 업무관리국장으로서 당의 방대한 재산과 '당의 금'을 총괄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닷새 후인 8월 26일 모스크바 자택 5층 발코니에서 떨어져 숨졌다. '나는 반역자도 공모자도 아니다. 그러나 두렵다'는 유서를 남겼다. 그의 죽음에 이어 전임자 게오르기 파블로프와 국제부 간부 드미트리 리소볼리크도 비슷한 추락사로 숨져, 당 자금 행방을 둘러싼 의혹의 중심이 되었다.

GKChP 8인 위원, 포로스 사절단올레크 바클라노프1932–2021

1991년 8월 18일 볼딘·셰닌·바렌니코프와 함께 포로스로 날아가 고르바초프에게 비상사태 선포를 요구했다. 쿠데타 실패 후 8월 23일 체포되어 마트로스카야 티시나에 수감되었다가 1994년 사면받았다.

하루짜리 KGB 의장 대행레오니트 셰바르신1935–2012

쿠데타 실패 후 체포된 크류치코프를 대신해 8월 22일부터 23일까지 하루 KGB 의장 대행을 맡았고, 옐친의 반대로 이튿날 바카틴으로 교체되었다.

쿠데타 가담올레크 셰닌1937–2009

GKChP 가담발레리 볼딘1935–2006

쿠데타 병력 배치 조율블라디슬라프 아찰로프1945–2011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1940–

벨로베즈에 불참했고, 알마아타 의정서로 해체의 마무리를 주재했다.

해체 직전 부서기장 대행블라디미르 이바시코프1932–1994

양편에 걸친 공수군 사령관파벨 그라초프1948–2012

공수군 사령관으로 쿠데타 측에 협력하는 한편, 레베디를 통해 백악관 방어본부에 21일 새벽 2시 공격 계획을 몰래 알렸다.

옐친에게 귀순한 타만 사단 전차대대장세르게이 예브도키모프1955–

8월 19일 자신의 110호 전차를 백악관 방어선으로 돌렸고, 옐친이 그 전차 위에 올라 연설했다.

고르바초프에게 소련 해체를 통보한 의장스타니슬라프 슈시케비치1934–2022

그는 비스쿨리에서 벨로베자 회의를 주최했고, 협정에 서명했으며, 고르바초프에게 직접 전화해 소련 해체를 통보했다.

벨로베자 협정 벨라루스 서명자뱌체슬라프 케비치1936–2020

슈시케비치와 함께 벨라루스 대표로 협정에 서명했다. 후일 러시아 대표단만 사전 계획을 준비해 왔다고 증언해 회담의 즉흥적이면서도 준비된 성격을 드러내는 반론을 제공했다.

고르바초프의 마지막 통화 상대조지 H. W. 부시1924–2018

1991년 12월 25일 사임 연설 두 시간 전, 고르바초프와 마지막 통화를 했다.

벨로베자 협정 서명자비톨트 포킨1932–2025

크라우추크와 함께 우크라이나 대표로 협정에 서명했다.

반대 · 저항8

쿠데타 사전 경고가브릴 포포프1936–

쿠데타에 맞선 전 KGB 장군올레크 칼루긴1934–

크류치코프의 정적이었던 칼루긴은 옛 동료에게서 몇 시간 전에 쿠데타 소식을 듣고 백악관으로 달려가 군중을 이끌며 옐친의 연설을 이끌어냈다.

쿠데타에 맞선 공군 총사령관예브게니 샤포시니코프1942–2020

8월 21일 새벽 야조프에게 군대 철수를 요구하고 국방부 회의에서 쿠데타 중단을 관철시켰다.

백악관에 공격 시각을 알린 공수군 부사령관알렉산드르 레베디1950–2002

공수군 부사령관으로 백악관 주변 군중 속에서 공격 가능성을 평가한 뒤, 백악관 방어본부에 새벽 2시 공격 계획을 전달했다.

백악관 방어 사령관콘스탄틴 코베츠1939–2012

백악관 방어본부를 지휘하며 비무장 의용대를 편성하고 전향 군인들과의 협력을 조율했다.

고르바초프 구출단예브게니 프리마코프1929–2015

8월 21일 루츠코이·바카틴과 함께 포로스로 날아가 고르바초프를 구출했으며, GKChP 사절단보다 먼저 도착했다.

긴급회의 의장루슬란 하스불라토프1942–2023

8월 21일 RSFSR 최고소비에트 긴급회의를 주재하여 쿠데타를 규탄하고 옐친에게 지방 소비에트 의장 해임권을 부여했다.

쿠데타에 맞선 RSFSR 부통령알렉산드르 루츠코이1947–

쿠데타 당일 루키야노프에게 고르바초프의 건강검진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했고, 총대주교 알렉시 2세를 설득하여 옐친 지지를 이끌어냈으며, 백악관 방어 조직에 참여했다.

관련 용어

출처: Serhii Plokhy, The Last Empire: The Final Days of the Soviet UnionEncyclopaedia Britannica: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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