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공산당을 이끈 그루지야 관료
“법은 집행되어야 하지만, 희생자 없이 집행되어야 한다.”
기비 굼바리제는 기록관과 당 조직가를 거쳐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 지도부에 오른 공산당 관료였다. 국가보안기관 출신으로서 그는 민족운동이 고조된 시기에 당의 통치와 대중의 신뢰가 충돌하는 현장을 맡았다. 1989년 트빌리시 유혈 진압 뒤 책임 규명과 질서 유지를 함께 주장했지만, 소비에트 체제의 위기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83–1985 정치·당 지도 · 소련공산당·볼셰비키 · 당 최고 지도자
경력 연표
- 1966–1967소비에트군 복무
- 1968–1972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중앙국가기록원 연구원·최고회의 간부 보좌
- 1977–1983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행정기관 부문 간부
- 1983–1985제스타포니 지구당 제1서기
- 1988트빌리시 시당 제1서기
- 1988–1989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보안위원회 위원장
- 1989–1990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 1989–1990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상무회 의장
소련 정치국
- 정위원 1990.07–1991.01
1991.01 해임
관련 역사 사건
트빌리시 4·9 참사와 책임 규명
굼바리제는 1988년 12월 그루지야 국가보안위원회(KGB) 위원장에 오른 지 넉 달 만에, 1989년 4월 9일 트빌리시 루스타벨리 대로에서 소련군이 군중을 강제 해산시켜 무고한 시민이 희생된 참사의 한가운데에 서게 되었다. 그가 재구성한 당시 상황에 따르면, 사건 전야에 소련 KGB 부위원장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로부터 "정세를 감시하되 어떠한 무력 행동도 취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트빌리시를 지켜보고 있었다. 육군이 동원된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그는 4월 9일 새벽 6시 KGB 부위원장 필리프 보브코프에게 전화를 걸어 "큰일 났습니다. 군대가 광장을 정리했고 열두 명이 죽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참사 닷새 뒤인 4월 14일 그는 전임 제1서기 점베르 파티아시빌리를 대신해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으나, 모스크바의 책임 회피에 맞서 사실을 밝히는 쪽을 택했다. 4월 25일 서방 기자들에게 "가스가 사용된 것은 사실이며, 일부 사람들은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밝혀, 치명적 가스 사용을 최초로 인정한 고위 당국자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24일 제2차 소련 인민대표대회에서 그는 군 최고검찰관 알렉산드르 카투세프의 보고가 사건의 책임을 흐린다며 강하게 반박했고, 그루지야 대의원들이 퇴장하는 가운데 대회는 결국 트빌리시에서의 폭력 사용을 규탄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이후 그는 인민대표대회에서 군인들이 시위대를 진압하며 "스탈린과 베리야의 원수를 갚아주마"고 외쳤다고 증언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