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보오가료보 협상과 신연방조약
제국은 계약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는가?
1991년 3월 국민투표에서 연방 유지가 76%의 찬성을 얻자, 고르바초프는 이를 마지막 정치적 자본으로 삼았다. 4월 23일 그는 모스크바 교외 노보오가료보 별장에서 러시아의 옐친을 포함한 9개 공화국 정상과 「9+1 성명」을 발표하고, 소련을 주권 공화국들의 자발적 연방으로 재편하는 신연방조약 협상을 시작했다. 발트 3국과 그루지야 등 6개 공화국은 처음부터 불참했다. 여름 내내 세금 징수권과 연방·공화국 권한을 놓고 밀고 당긴 끝에 조약안이 만들어졌고, 서명일은 8월 20일로 잡혔다. 7월 말 고르바초프·옐친·나자르바예프의 심야 회동은 서명 뒤 크류치코프·파블로프 등 강경파를 교체하기로 합의했는데, 이 대화는 KGB의 도청으로 당사자들에게 그대로 새어 들어갔다.
제국은 왜 계약서를 찾기 시작했는가
1990년 말 소련은 스스로를 하나의 국가라고 부르기 어려운 상태였다. 1988년 11월 에스토니아가 주권 선언을 한 것을 시작으로, 2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15개 공화국 전부가 자국 법률이 연방 법률보다 우선한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주권 퍼레이드」였다. 러시아 공화국이 1990년 6월 12일 국가주권 선언을 채택하면서 이 흐름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소련 인구의 절반과 영토의 4분의 3을 차지하는 공화국이 연방 정부의 권위를 명시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중앙과 공화국 사이에는 「법률 전쟁」이 벌어졌고, 모스크바가 어떤 법을 통과시키면 공화국 의회가 이를 무효화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국가는 여전히 소련이라고 불렸지만, 법적으로는 이미 분해되고 있었다.
경제는 더 빨리 무너지고 있었다. 1985년 배럴당 30달러를 넘던 국제 유가가 1986년부터 급락해 10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석유·가스 수출로 외화를 벌어 곡물과 소비재를 수입하던 소련의 구조에서 유가 폭락은 외환 위기, 예산 위기, 공급 위기로 이어졌다. 1989년에는 국가 예산 적자가 GDP의 약 10퍼센트에 달했고, 정부는 이를 메우기 위해 화폐를 찍어냈다. 그 결과 1990년까지 연간 인플레이션율은 20퍼센트에 근접했지만, 가격은 여전히 국가가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은 가격 상승이 아니라 상품의 소멸로 나타났다. 설탕, 담배, 비누, 고기, 버터가 차례로 사라졌고, 모스크바에서조차 빵을 사기 위한 줄이 몇 년 만에 다시 등장했다. 1989년 말부터 많은 도시에서 배급제(타론)가 도입되었고, 사람들은 돈은 있어도 살 물건이 없는 역설적 상황에 놓였다.
정치적 중심도 붕괴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1990년 3월 소련 대통령직을 신설해 인민대표대회에서 간선으로 선출되었지만, 바로 그 달 러시아 인민대표대회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이 압승을 거두며 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제1서기에서 해임된 지 2년 만에 정계에 복귀했다. 1990년 5월 옐친은 러시아 최고회의 의장에 선출되었고, 그로부터 한 달 뒤 러시아는 국가주권 선언을 채택했다. 이제 소련에는 합법적 선거로 권력을 얻은 지도자가 둘이었고, 둘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경제 개혁의 실패는 정치적 교착을 더 깊게 만들었다. 1990년 여름 스타니슬라프 샤탈린과 그리고리 야블린스키가 주도한 「500일 계획」은 500일 안에 소련을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충격요법을 제안했다. 옐친은 이를 전폭 지지했고, 고르바초프도 처음에는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가 이끄는 각료회의가 강하게 반발했고, 고르바초프는 1990년 10월 결국 500일 계획을 포기했다. 그 대신 채택된 절충안은 시장도 계획도 아닌 애매한 문서였고, 경제는 계속 무너졌다. 1991년 1월 리시코프가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발렌틴 파블로프가 후임이 되었지만, 이미 누구도 중앙정부의 경제 정책을 신뢰하지 않았다.
발트 3국의 이탈도 가속화되었다. 리투아니아는 1990년 3월 11일 독립 회복을 선언했고,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도 뒤따랐다. 고르바초프는 경제 봉쇄로 대응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1991년 1월 13일, 소련군과 KGB 특수부대가 빌뉴스의 TV 타워를 급습해 14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부인했으나, 빌뉴스의 피는 그의 권위에 치명상을 입혔다. 국내 진보 진영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고, 서방은 충격을 받았다.
이것이 1990년 12월 24일 제4차 소련 인민대표대회가 연방 유지에 관한 국민투표 실시를 결의했을 때의 소련이었다. 법적으로는 공화국들이 주권을 주장하며 중앙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상점에 물건이 없었으며, 정치적으로는 고르바초프와 옐친이라는 두 개의 권력 중심이 서로를 마비시키고 있었다. 고르바초프에게 국민투표는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은 정치적 무기였다. 국민이 직접 연방 유지를 원한다고 답한다면, 그 민주적 정당성으로 독립을 향해 달려가는 공화국 지도부를 압박하고 새로운 연방 조약의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렇게 1991년 3월 17일, 소련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국 단위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76% 뒤에 숨은 질문: 국민투표는 무엇을 물었고, 무엇을 감추었나
1990년 12월 24일, 제4차 소련 인민대표대회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전국적 국민투표를 제안했다. "나는 각 시민이 주권국가 연방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표명할 수 있도록 전국적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대회에 제안한다." 그가 이렇게 말했을 때, 소련은 이미 법적으로 분해되고 있었다. 1988년 11월 에스토니아를 시작으로, 1990년 한 해 동안 15개 모든 연방공화국이 자국 법률이 연방법보다 우선한다고 선언하는 국가주권 선언을 채택했다. 이른바 '법률 전쟁' 속에서, 연방은 더 이상 단일한 법적 공간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당초 대회는 다섯 개의 문항을 국민투표에 부칠 예정이었다: 연방 유지, 단일국가 유지, 사회주의 체제 유지, 소비에트 권력 유지, 그리고 민족 간 평등 보장이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단 하나의 문항만을 밀어붙였다. 최종 투표용지에 적힌 질문은 이랬다: "귀하는 완전히 보장된 인간의 권리와 자유, 그리고 모든 민족의 평등을 누릴 수 있는 평등한 주권 공화국들의 새로워진 연방으로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보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하는 것은 연방 보존뿐 아니라 공화국 평등, 인권 보장, 모든 민족의 권리까지 함께 거부하는 셈이었다. 옐친 센터의 역사학자 예브게니 볼크는 이를 "상당한 교활함이 담긴 질문"이라고 평했다.
6개 공화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몰도바)은 아예 국민투표를 거부했다. 발트 3국은 이미 독자적인 주민투표를 실시한 뒤였다. 리투아니아는 2월 9일 투표에서 93%가 독립을 지지했고,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도 3월 3일 각각 78%와 74%로 독립을 선택했다. 그루지야는 3월 31일 독립 국민투표를 예고했다. 이들 공화국에서는 모스크바에 충성하는 군부대와 일부 지역(트란스니스트리아, 가가우지아, 압하지야, 남오세티야)에서만 투표가 진행되었다.
참여한 9개 공화국 내에서도 질문은 통일되지 않았다. 카자흐스탄은 문구를 "평등한 주권 공화국들의 연방"에서 "평등한 주권 국가들의 연합"으로 바꿨다.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 국가주권 선언에 기초하여 우크라이나가 소비에트 주권국가 연합의 일부가 되는 데 동의하십니까?"라는 두 번째 문항을 추가했다. 러시아공화국에서는 옐친이 러시아 대통령직 신설에 관한 별도 국민투표를 같은 날 실시하도록 했다. 이는 고르바초프가 연방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바로 그 무대에서 러시아가 독자적인 민주적 정당성을 구축하는 장치였다.
투표 결과는 겉보기에 압도적이었다. 투표자 1억 4,857만 명 가운데 1억 1,351만 명(76.4%)이 '찬성'을 선택했다. 그러나 지역별 편차는 극심했다. 모스크바 시에서는 찬성이 50.02%에 그쳤고, 유권자 대비로는 34%만이 찬성한 셈이었다. 레닌그라드도 50.54%였다. 옐친의 정치적 기반인 스베르들롭스크는 49.33%로 과반에도 못 미쳤다. 반면 중앙아시아에서는 투표율과 찬성률이 모두 90%를 넘었다. 이 격차는 연방에 대한 지지가 이미 도시·산업 지역과 러시아 핵심부에서 붕괴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월 21일 소련 최고소비에트는 국민투표 결과를 "소련 전 영토에서 최종적이며 구속력을 갖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불참한 6개 공화국과 러시아 대도시들의 미온적 반응을 고려할 때, 그 구속력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고르바초프가 얻은 것은 숫자 위의 승리, 즉 정치적 협상장에 들고 갈 종이 한 장이었다. 4월 23일 그 종이를 들고 노보오가료보에 모인 9개 공화국 정상들과의 회담(이른바 '9+1 성명')으로 이어지지만, 이미 국민투표 자체가 보여준 균열은 그 협상이 감당해야 할 무게를 예고하고 있었다.
9+1, 혹은 일시적 휴전이 낳은 기적
4월 23일 노보오가료보 회의는 그 자체로 가능성이 희박한 사건이었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고르바초프는 옐친의 사퇴를 요구하는 보수파 인민대의원들의 압박에 동조했고, 3월 말에는 모스크바 시내에 전차가 배치되었다. 그런데 4월 23일, 두 사람은 같은 테이블에 앉아 공동 성명에 서명했다. 이 전환의 배경에는 짧은 '휴전'이 있었다.
고르바초프의 보좌관 게오르기 샤흐나자로프는 이 시기를 두 사람의 대립이 정점에 이르렀던 동시에 협력의 최고점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국민투표가 76%의 찬성으로 통과된 뒤, 고르바초프는 이 결과를 구체적 합의로 전환하지 못하면 정치적 파산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4월 10일 소련 안전보장회의에서 처음으로 '공화국 지도자들과 함께 행동 프로그램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고, 고르바초프는 옐친과의 짧은 화해 국면을 최대한 활용해 절차를 밀어붙였다.
회의장에는 러시아의 옐친, 우크라이나의 레오니트 크랍추크, 벨라루스의 니콜라이 데멘테이, 카자흐스탄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 카리모프, 아제르바이잔의 아야즈 무탈리보프, 키르기스스탄의 아스카르 아카예프, 타지키스탄의 카하르 마흐카모프, 투르크메니스탄의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그리고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가 자리했다. 발트 3국,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몰도바는 초대받지도 않았고 올 생각도 없었다. 이 9개 공화국은 소련 인구의 약 90%, 경제력의 압도적 대부분을 차지했기에, 참석자들은 자신들이 실질적인 소련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다고 믿었다.
회의 결과물인 「무질서 극복과 정세 안정을 위한 긴급 조치에 관한 공동 성명」, 이른바 '9+1 성명'은 겉보기에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문장으로 채워져 있었다. 헌정 질서 회복, 신연방조약의 조속한 체결, 파업과 시민불복종을 통한 정치적 목적 달성 시도 규탄, 그리고 '연방 공화국의 역할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것' 없이는 위기 극복이 불가능하다는 인식. 그러나 이 합의의 견고함은 각 당사자가 같은 문장에서 서로 다른 미래를 읽고 있었다는 사실에 기대고 있었다.
고르바초프에게 9+1 성명은 '중도주의' 노선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국민투표의 위임을 구체적 조약으로 전환해 개혁파와 보수파 사이에서 주도권을 되찾으려 했다. 옐친은 달리 보았다. 그는 훗날 고르바초프 자신도 노보오가료보 협상의 성공을 완전히 믿지 않았으며, '구석에 몰렸기 때문에' 시간을 벌려는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적었다. 옐친에게 이 회의는 6월 12일로 예정된 러시아 대통령 선거 전까지 자신의 입지를 안정시키는 수단이었다. 크랍추크는 더 솔직했다. 훗날 회고록에서 그는 '반동 세력이 훨씬 더 위험했기 때문에, 우리 대다수가 희망했던 무혈 독립을 위해서는 고르바초프를 지지하는 것이 이익이었다'고 썼다.
9+1 성명은 신연방조약을 위한 제도적 틀도 마련했다. 이후 5월 24일부터는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조약의 초안을 구체화해 나갔다. 그러나 첫 회의에서 이미 핵심 쟁점들은 그대로 드러났다. 연방의 명칭에 '소비에트'와 '사회주의'를 유지할 것인지, 세금 징수권을 연방이 직접 가질지 공화국이 분담금 형태로 낼 것인지, 자치공화국이 독자적 서명권을 가질 것인지. 이 모든 질문은 4월 23일에는 덮어두고 출발한 것들이었다. 그 덮어둠이 바로 9+1의 본질이었다.
총리가 대통령을 우회하려 했던 하루: 1991년 6월 17일
1991년 6월 17일, 발렌틴 파블로프 총리는 눈에 띄게 긴장한 모습으로 최고회의 연단에 섰다. 며칠 전 고르바초프가 자신을 총리직에서 교체할 계획임을 알아차린 파블로프가 꺼내든 카드는 의회를 통한 우회였다. 그는 경제 위기의 책임을 소련과 러시아공화국 간 '법률 전쟁(war of laws)' 탓으로 돌리면서, 각료회의에 긴급 권한을 부여하는 5개항 결의안을 제출했다. 구체적으로는 대통령 승인 없이 경제 분야의 법령을 공포할 권한, 독자적 입법 발의권, 중앙은행과 세무기관에 대한 통제권, 그리고 조직범죄 단속을 위한 특별 권한이었다. 표면상의 명분은 경제 위기 극복이었으나, 실질은 헌정 질서의 급진적 재편, 즉 대통령에서 총리로의 실권 이양이었다.
이날은 비공개 회의였지만 내용은 곧바로 새나갔다.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KGB 의장이 연단에 올라 '영향력 있는 외부 요원들(agents of influence)'이 소련의 권력 구조에 침투해 있다고 주장하며 파블로프를 지지했고,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도 합세했다. 보수파 의원 모임인 소유즈(Союз, Soyuz) 그룹의 지도자 빅토르 알크스니스는 즉각 표결을 요구했다. 최고회의 의장 아나톨리 루키야노프는 이미 노보오가료보의 연방조약 협상장으로 떠난 뒤였다. 루키야노프의 부재는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파블로프 측에 동정적이면서도 공개적으로 편들기를 피했고, 자리를 비움으로써 상황을 관망하는 셈법을 택했다.
의장대행 이반 랍테프는 개혁파였다. 그는 KGB와 내무부, 국방부의 공식 입장 표명을 요구하며 표결을 지연시켰다. 랍테프의 훗날 증언에 따르면, 그 순간 표결이 이루어졌다면 파블로프 안이 통과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회의장의 분위기는 그만큼 반(反)고르바초프로 기울어 있었다.
노보오가료보에서 소식을 들은 고르바초프는 분노했다. 그가 공화국 정상들과 조약 초안을 놓고 밀고 당기는 사이, 자신이 임명한 총리가 의회를 무대로 쿠데타를 연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6월 21일 직접 최고회의에 출석해 파블로프와의 의견 차이는 없다고 선을 그은 뒤, 각료회의가 막 확보한 확대 권한을 다시 박탈했다. 그날 저녁 고르바초프는 각료들에게 농담조로 "쿠데타는 끝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사흘 뒤인 6월 20일, 모스크바 시장 가브릴 포포프가 미국 대사 잭 매틀록을 은밀히 만나 파블로프·야조프·크류치코프·루키야노프 네 사람이 쿠데타를 준비 중이라고 경고했다. 매틀록은 즉시 고르바초프에게 전달했으나, 고르바초프는 처음에 이를 비웃었다. 6월 17일은 단지 표결로 끝난 하루가 아니었다. 신연방조약이 권력을 빼앗을 이들에게 그것은 리허설이었고, 두 달 뒤 같은 얼굴들이 이번에는 탱크를 동원해 다시 무대에 올랐다.
도청된 밀약: 7월 29일 밤, 세 사람이 나눈 대화는 어떻게 쿠데타의 뇌관이 되었나
1991년 7월 29일 밤, 노보오가료보에서 조약 초안이 가결된(7월 23일) 지 엿새 만에 고르바초프·옐친·나자르바예프 세 사람이 비공식적으로 만났다. 공화국 지도자들도, 보좌관들도 배제된 자리였다. 고르바초프는 나흘 뒤 포로스로 여름 휴가를 떠날 예정이었고, 귀환 직후인 8월 20일로 서명일이 잡혀 있었다. 세 사람은 서명 '다음 날'에 관한 모든 것을 이 밤에 결정했다.
대화의 핵심은 인사였다. 나자르바예프를 새 연방의 총리로 앉히고, 현 총리 파블로프를 비롯해 KGB 의장 크류치코프, 국방장관 야조프, 내무장관 푸고, 국영방송 수장 크랍첸코를 교체한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나자르바예프가 "도대체 야나예프가 무슨 부통령이냐"고 거들자 부통령까지 명단에 올랐다. 옐친은 한발 더 나아가 고르바초프에게 당 서기장과 대통령직을 분리하라고 압박했고, 고르바초프는 이전과 달리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국민 직선으로 대통령에 출마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반문했다.
세 사람은 고르바초프가 즐기던 코냑 「유빌레이니」를 마시며 새벽 3시까지 이야기를 이어갔다. 고르바초프의 보좌관 아나톨리 체르냐예프는 며칠 뒤 일기에 "그가 옐친·나자르바예프와 술을 마시며 조약과 차기 선거를 논의했다"고 적었다. '금주 캠페인'으로 '미네랄니 세크레타르(광천수 서기장)'라는 조롱을 듣던 고르바초프가 정적 옐친과 사적 자리에서 술잔을 기울인 것은 그 자체로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의 괴이한 풍경이었다.
대화 도중 옐친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뒤에서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그는 훗날 회고했다. 옐친은 "발코니로 나가자, 도청당하는 것 같다"고 말했고, 고르바초프는 "설마" 하면서도 그를 따라나섰다. 옐친의 직감은 정확했다. KGB 제9국(경호국) 국장 유리 플레하노프가 고르바초프의 집무실을 사전에 도청 장치로 '준비'해 두었고, 대화 전체가 녹음되었다. 이 테이프는 곧바로 크류치코프의 손에 들어갔다.
녹음은 쿠데타 모의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훗날 "크류치코프가 이 녹음을 입수해 다른 사람들의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켰다"고 썼다. 특히 야조프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경질이 확정적이라는 증거를 직접 듣자 크류치코프 편에 섰다. 7월 29일 밤의 대화는 서명을 현실로 만드는 마무리 작업인 동시에, 서명을 막으려는 세력이 마지막 남은 망설임을 버리게 만든 사건이었다. 고르바초프가 포로스로 떠난 8월 4일부터 크류치코프는 본격적으로 쿠데타 준비에 착수했다.
서명일은 어떻게 쿠데타의 날이 되었나
1991년 8월 15일, 『프라우다』지는 「주권국가연합 조약」의 최종 텍스트를 게재했다. 고르바초프에게 이것은 노보오가료보 과정의 완결이었다. 소련은 '소비에트 주권 공화국 연방'(약칭은 동일하게 CCCP)으로 재편되고, 공화국들은 완전한 정치권력을 보유하며 국방·외교·금융체계만을 연방에 위임했다. 제23조는 서명 즉시 1922년 연방조약이 "효력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된다"고 명시했다. 8월 20일 러시아·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이 먼저 서명하고, 벨라루스·아제르바이잔·타지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키르기스스탄이 10월까지 뒤따를 예정이었다. 우크라이나는 9월로 판단을 미룬 상태였다.
강경파에게 이 조약은 자신들이 섬겨온 국가의 사형선고였다. 각료회의, 전연방 KGB, 국방부는 지금의 형태로는 사라지고, 크류치코프·야조프·파블로프·푸고는 자리에서 쫓겨난다. 7월 29일 도청된 대화는 그 사실을 이미 알려주었다. 8월 17일, 공모자들은 모스크바 KGB 별장에 모여 공개된 조약문을 검토하고 20일 전에 행동하기로 결의했다. 크류치코프는 1990년 12월부터 준비해왔다: 프스코프 공장에 주문된 수갑 25만 켤레, 인쇄된 체포영장 30만 장, 수감자를 맞을 준비를 마친 레포르토보 교도소.
8월 18일 일요일 오후 1시, 다섯 명의 사절단이 모스크바를 떠나 크림반도 포로스의 대통령 별장으로 향했다: 올레크 바클라노프(국방회의 제1부의장), 올레크 셰닌(정치국 서기), 발레리 볼딘(고르바초프의 비서실장), 발렌틴 바렌니코프 육군대장(국방차관 겸 지상군 총사령관), 유리 플레하노프(KGB 경호국장). 오후 5시경 도착한 그들은 고르바초프에게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부통령 야나예프에게 권력을 이양하거나 사임하라고 요구했다. 고르바초프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바렌니코프의 이름을 고의로 잊은 척하며 모욕했고, 10년 넘게 자신의 문서를 관리해온 볼딘에게는 "닥쳐, 이 놈아!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에게 나라 사정을 설교하느냐!"고 고함쳤다. 협상이 진행 중이던 오후 4시 32분, KGB 기술진은 별장의 모든 통신을 차단했다. 일반 전화선, 정부 핫라인, 핵지휘체계까지 모두였다. 활주로는 트랙터로 봉쇄되었다. 고르바초프는 포로가 되었다.
그날 밤 크렘린에서 야나예프·파블로프·크류치코프·야조프·푸고·루키야노프가 모였다. 바클라노프·셰닌·볼딘·바렌니코프가 포로스에서 돌아와 고르바초프의 거부를 보고했다. 술에 취해 있던 야나예프는 망설였으나 떠밀려 서명했다. 오후 11시 25분, 그는 고르바초프의 "건강상 이유"를 들어 자신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하는 포고령에 서명했다. 8월 19일 오전 1시, 8인으로 구성된 국가비상사태위원회(ГКЧП)가 공식 출범했다. 오전 4시, KGB 국경부대가 포로스 별장을 봉쇄했다. 오전 6시, 국영방송은 ГКЧП의 「소비에트 인민에게 고함」을 낭독한 뒤 『백조의 호수』로 전환했다.
8월 19일 월요일은 조약 서명을 준비하던 날이었다. 대신 타만스카야 사단과 칸테미롭스카야 사단의 전차들이 모스크바로 진입했다: 병력 4천, 전차 350대, 장갑차 300대. ГКЧП의 결의 제1호는 집회·파업을 금지하고 당 기관지 9종을 제외한 모든 신문을 폐간했으며, 모든 도시 주민에게 1,500제곱미터의 토지를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다. 절박한 선심성이었다. 그러나 공모자들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보리스 옐친을 체포하지 않은 것이다. 알파 그룹은 그의 다차를 포위했으나 진입하지 않았다. 옐친은 오전 9시까지 러시아 백악관에 도착해 RSFSR 지도부를 소집하고 「러시아 시민들에게」를 발표, ГКЧП를 "반헌법적 쿠데타"로 규정했다. 그는 백악관 앞에서 전차 위에 올라섰다. 그 이미지는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서명 예정일인 8월 20일 화요일, 모스크바에는 통행금지령이 내려졌다. 정오에 니콜라이 칼리닌 대장이 모스크바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국방부에서 크류치코프·야조프·푸고는 '그롬(천둥) 작전'을 승인했다. 알파와 빔펠 특수부대가 공수부대·OMON·전차 3개 중대의 지원을 받아 백악관을 공격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특수부대 지휘관 빅토르 카르푸힌과 보리스 베스코프는 작전이 대량 유혈사태를 초래할 것이라며 사실상 거부했다. 공수부대 사령관 파벨 그라초프는 부하 알렉산드르 레베디를 백악관에 은밀히 들여보내 옐친 측에 "공격은 새벽 2시"라고 알려주었다. 공격은 끝내 실행되지 않았다.
8월 21일 오전 1시 직후, 정원순환도로 아래 터널에서 세 명의 민간인이 진격하는 장갑차를 막으려다 목숨을 잃었다: 드미트리 코마르, 블라디미르 우소프, 일리야 크리쳅스키. 이 죽음은 양측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야조프는 모스크바에서 철수를 명령했다. ГКЧП 사절단은 포로스로 날아갔으나 고르바초프는 그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그날 저녁, 고르바초프는 자유의 몸이 되었고 공모자들은 체포되었다. 조약은 서명되지 않았다. 8월 20일에도, 그 후로도 결코. 소련을 구하려던 쿠데타는 소련을 붙잡을 마지막 도구를 산산조각냈다.
쿠데타가 죽이고도 살린 협상: 노보오가료보-2는 왜 처음부터 운명이 달랐는가
쿠데타가 진압된 직후인 8월 26일, 고르바초프는 최고회의에서 신연방조약 협상을 재개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상황은 봄·여름과 전혀 달랐다. 공화국 지도자들은 실권을 쥔 승자였고, 고르바초프는 쿠데타를 막지 못한 패자였다. 쿠데타 세력은 바로 그가 직접 임명한 인물들이라는 사실이 그의 권위에 치명타를 입혔다. 키르기스스탄의 아카예프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출판된 초안은 수용 불가능하다"고 선언했고, 카자흐스탄의 나자르바예프는 "연방이 아닌 국가연합만이 가능하다"고 못박았다. 9월 2일, 고르바초프와 10개 공화국 정상은 「10+1 성명」을 발표했다. 각 공화국이 자발적으로 참여 형태를 결정하는 '주권국가연합' 조약을 새로 만들고, 과도기에는 국가평의회(고르바초프와 공화국 정상들로 구성)가 최고 의사결정기구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9월 5일 인민대표대회는 스스로 해산했고, 구소련의 중앙권력은 사실상 이 평의회로 이관되었다. 샤흐나자로프는 이를 두고 '정치국의 새 판본'이라 불렀으나, 이전 정치국과 달리 고르바초프에게는 거부권이 없었다.
9월 중순, 작업그룹이 새 초안을 내놓았다. 국명은 '자유주권공화국연합'이었고, 여름 초안에 있던 '연방의 배타적 권한' 조항은 사라졌다. 연방세 조항도 빠졌다. 옐친은 이것으로도 부족했다. 9월 28일 그는 고르바초프에게 수정안을 보내 「연방세와 징수금」 조항(제7조)과 「연방헌법」 조항(제8조)을 통째로 삭제하고, 대통령 직선제 조항도 지웠다. 대신 의회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자는 제안이었다. 사실상 중앙정부에 독자적 재정과 헌법을 모두 부정한 셈이다. 고르바초프는 일부를 받아들여 예산 조항을 '특별협정으로 정한다'는 모호한 문구로 대체했지만, 헌법 조항은 사수했다.
10월 11일 국가평의회에서 우크라이나의 크랍추크 의장이 참가자들에게 사실상의 퇴장을 통보했다: 우크라이나는 12월 1일 독립 국민투표 전까지 조약 협상에 적극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빠진 조약은 지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소비에트'라고 부를 수 없었다. 11월 8일 크랍추크는 기자회견에서 "노보오가료보 과정은 이제 과거완료형"이라고 선언했다.
그래도 협상은 이어졌다. 11월 14일 국가평의회에는 러시아,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그리고 8월부터 10월 사이에 독립을 선포했지만 여전히 협상장에 남아 있던 중앙아시아 4개 공화국 등 7개 공화국 대표가 모였다. 쟁점은 국체의 성격이었다. 옐친·슈시케비치·나자르바예프는 국가연합(컨페더레이션)을, 고르바초프는 "무정형의 것을 만들 바에야"라며 '연방국가'를 고수했다. 절충 끝에 "민주적 국가연합국가"라는 공식이 나왔다. 기자회견에서 모두 "연합은 될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형용사 모순을 해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1월 25일, 가서명이 예정된 국가평의회에서 옐친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러시아 최고회의가 '국가연합국가'라는 표현을 담은 조약을 비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슈시케비치도 벨라루스 의회가 10일의 검토 기간을 요구했다며 동참했다. 고르바초프는 "당신이 의도적으로 조약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격분해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공화국 정상들이 그를 다시 불러들였고, 결국 '조약문을 의회에 송부해 검토한다'는 수준으로 합의가 축소되었다. 가서명은 없었다. 11월 27일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초안이 『프라브다』에 실렸다. 조약문은 '주권국가연합(SSG)'이라는 국호 아래 컨페더레이션을 규정했고, 연방헌법도, 연방세도, 대통령 직선제도 없었다. 그러나 이 문서를 서명할 공화국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12월 1일 우크라이나 국민투표에서 90.3%가 독립을 선택했고, 일주일 뒤 벨로베즈에서 소련은 법적으로 종말을 맞았다.
1922년의 세 서명자가 1991년에 다시 만났을 때
12월 1일 우크라이나 국민투표에서 92%가 독립을 택하자, 고르바초프가 11월에 7개 공화국과 합의한 주권국가연합(SSG) 구상은 수포가 되었다. 옐친은 12월 5일 고르바초프에게 "우크라이나 없이는 연방조약이 의미를 잃는다"고 말했고, 이튿날 크렘린의 승인 없이 민스크로 날아갔다. 그를 부른 것은 벨라루스 최고회의 의장 스타니슬라프 샤슈케비치였다.
샤슈케비치의 초대 명분은 러시아산 석유·가스 공급 협상이었다. 벨라루스는 에너지 전량을 러시아에 의존했고 1992년 1월 1일부터 발효될 공급 계약이 전무했다. 샤슈케비치는 우크라이나에도 같은 의제로 초청했다. 그러나 크랍추크는 "석유와 가스라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며 다른 기억을 갖고 있었다. 그가 생각한 의제는 소련의 장래, 즉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국가의 처리 방식이었다.
세 정상은 12월 7일 벨라루스 서부 벨로베자 숲 속의 비스쿨리 사냥터 별장에 모였다. 소련 최고위 간부용 호화 별장이었다. 샤슈케비치는 훗날 "처음부터 소련 탈퇴를 결정할 생각은 없었다"고 주장했고, 케비치 벨라루스 총리는 "러시아 대표단이 샤흐라이·쇼힌·부르불리스와 함께 초안을 갖고 왔다. 옐친만이 모든 걸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8일 오전 협상에서 옐친의 국가서기 겐나디 부르불리스가 문장 하나를 던졌다. "소련이 국제법의 주체이자 지정학적 실체로서 존재를 중단했다." 그리고 누군가 지적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는 1922년 연방조약의 원서명국 4곳 중 3곳이며, 네 번째인 자캅카스연방은 1936년 해체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세 서명자가 1922년 조약을 폐기할 법적 권한을 갖는다는 논리였다. 1990년 4월 제정된 공화국 탈퇴법은 완전히 우회되었다.
14개 조문은 오후 3시경 완성되었다. 제1조는 소련 소멸을, 제6조는 핵무기에 대한 단일 통제를 포함한 통합군사공간을 규정했다. 옐친은 즉시 조지 H.W. 부시 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제6조를 직접 읽어주며 "고르바초프는 아직 모른다"고 강조했다. 부시가 핵무기 문제를 묻자 옐친은 샤포시니코프 소련 국방장관이 이미 동의했다고 답했다. 샤슈케비치가 고르바초프에게 전화를 넣은 것은 그 후였다. 고르바초프는 격분했으나 실제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25년 후 그는 "체포 명령은 내전을 의미했다. 그건 위험했다"고 해명했다.
합의는 12월 10일 우크라이나 의회가 295 대 10으로, 벨라루스 의회가 263 대 1로, 12일 러시아 최고회의가 188 대 7로 각각 비준했다. 러시아 의원 22명의 '공산주의자들 러시아' 분파 중 15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세르게이 바부린 등 소수 의원은 연방조약 폐기가 헌법상 인민대의원대회 권한이지 최고회의 권한이 아니라고 반발했으나 묵살되었다. 크랍추크는 훗날 "벨로베자 합의는 평화적으로 완수된 쿠데타였다"고 말했다. 3개 공화국 의회의 표결로 노보오가료보 과정이 9개월간 지켜온 신연방조약 구상은 최종 사망했다.
쿠데타가 없었다면: 풀리지 않은 반사실, 갈리는 역사학자들
노보오가료보 과정은 소련사에서 전례가 없는 실험이었다. 제정 시기든 소비에트 시기든, 이 광대한 다국적 공간의 통치 형태를 중앙의 일방적 명령이 아니라 구성 공화국들의 공개적이고 때로는 격렬한 협상으로 결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안드레이 그라초프는 이 과정을 두고 "고르바초프가 사실상 크렘린의 차르 지위를 포기하고 유럽위원회 위원장 같은 역할로 옮겨가고 있었다"고 썼다. 1991년 8월 15일 공개된 「주권소비에트공화국연합」(SSR) 조약안은 공화국들에 외교·통상·국제기구 가입권을 부여했고, 조약에 명시되지 않은 모든 권한은 공화국에 유보했다. 이는 1년 뒤 마스트리흐트에서 서명된 유럽연합 조약보다도 느슨한 구상이었으며, EU가 탈퇴권을 명문화한 것은 2007년 리스본 조약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그 진보성 때문에 조약은 좌우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받았다. 8월 16일, 미래의 쿠데타 주모자들은 조약 서명을 막기로 결의했다. 같은 날 「러시아 신문」에는 「민주 러시아」 운동의 성명이 실렸는데, 조약이 "제국의 전통을 부활시킨다"며 서명 거부를 촉구했다. 중앙의 강경파는 조약이 제국을 너무 멀리 해체한다고 보았고, 러시아 급진파는 제국을 충분히 해체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 이중의 압력 속에서 조약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는 소련사에서 가장 격렬한 역사학적 논쟁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옥스퍼드의 아치 브라운은 『고르바초프 팩터』에서 소련의 전면적 해체가 "미리 정해진 결말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발트 3국의 이탈은 막을 수 없었지만, 나머지 9개 공화국이 느슨한 연방으로 존속하는 것은 가능했다는 것이다. 브라운은 소련 체제의 종말과 소련 국가의 해체를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자는 1989년 봄 경선 국민대표대회 선거로 이미 완료되었고, 후자는 옐친이 '러시아 카드'를 연방에 대항해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비로소 현실이 되었다. 즉 8월 쿠데타가 없었다면, 그리고 옐친이 러시아의 완전한 독립이 아닌 신연방 내 주권을 선택했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었다.
이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반론은 우크라이나의 무게를 드는 것이다. 하버드의 세르히 플로히는 『마지막 제국』에서 발트 없이도 연방은 존속할 수 있었지만, 두 번째로 큰 공화국인 우크라이나 없이는 정치적 의미가 전혀 없었다고 지적한다. 우크라이나 최고회의는 1991년 6월 27일에 이미 조약안 논의를 9월로 연기했고, 크랍추크는 10월 11일 국가평의회에서 12월 1일 국민투표 전까지는 어떤 조약 협상에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우크라이나가 조약에 서명할 의사가 있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시간을 벌고 있었는지는 크랍추크 자신의 회고록조차 명확히 답하지 않는다. 그가 후일 밝혔듯, "참가자 대다수는 우리 공화국들의 신속하고 무혈의 독립 획득을 근거 있게 희망했기 때문에" 고르바초프를 지지한 것이었다.
세 번째 입장은 쿠데타 자체가 조약의 생존 불가능성을 증명했다고 본다. 신연방조약이 작동하려면 KGB, 군부, 당기구라는 소련을 떠받쳐온 세 기둥을 해체하거나 무력화해야 했는데, 바로 그 기둥들이 8월 18일에 일어나 조약을 끝장냈다. 이 역설은 고르바초프가 풀 수 없었던 수수께끼였다: 제국을 계약으로 대체하려면 제국을 지탱해온 억압 기구들을 먼저 제거해야 하는데, 그 기구들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바로 그 기구들뿐이었다. 드미트리 야조프는 훗날 회고록에서 "우리는 소련을 구하려 했지만 구한 것은 소련의 관뿐이었다"고 썼다.
그라초프는 1991년 11월 25일 노보오가료보에서 열린 마지막 국가평의회의 한 장면을 증언한다. 서명식용 원탁에는 이미 공화국 깃발들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옐친은 "러시아 의회는 연방국가는커녕 국가연합 개념조차 비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선언했고, 슈시케비치가 동조했다. 나자르바예프는 "우리는 국가연합적 연방국가에 합의했지, '바지 속의 구름' 같은 무언가에 합의한 게 아니다"라고 항변했지만, 가서명은 무산되었다. 참석자들은 그날 밤 노보오가료보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협상은 제국의 종언을 5개월 늦추는 데는 성공했지만, 제국의 종언 자체를 막지는 못했다. 노보오가료보 과정이 마지막으로 증명한 것은, 강제도 유토피아도 아닌 계약이라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이 공간을 하나로 묶을 정치적 동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결과
서명 예정일을 이틀 앞둔 8월 18일, 조약으로 권력을 잃게 될 강경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협상은 무산되었다. 쿠데타 실패 후 가을에 고르바초프는 조약을 국가연합 형태로 되살리려 했지만, 서명할 공화국이 하나씩 줄어들었다. 12월 1일 우크라이나 국민투표가 독립을 택하고 12월 8일 벨로베즈 협정이 체결되면서 신연방조약 구상은 최종적으로 사망했다. 조약이 연방을 구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대안이었는지, 이미 때를 놓친 문서였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쿠데타가 없었다면」이라는 가정은 소련사 최대의 반사실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연표
- 1991.03.17연방 국민투표
참여한 9개 공화국에서 76%가 연방 유지에 찬성했다.
- 1991.04.239+1 성명
노보오가료보에서 고르바초프와 9개 공화국 정상이 신연방조약 협상을 시작했다.
- 1991.06파블로프의 비상 권한 요구
총리가 최고회의에 대통령을 우회하는 비상 권한을 요구했다가 거부되어, 지도부 내부의 균열이 드러났다.
- 1991.07.29심야의 밀약
고르바초프·옐친·나자르바예프가 서명 후 강경파 교체에 합의했고, KGB가 이 대화를 도청했다.
- 1991.08.18–20무산된 서명
서명 예정일을 이틀 앞두고 쿠데타가 일어나 조약이 무산되었다.
- 1991.09–11국가연합 시도
주권국가연합 초안으로 조약을 되살리려 했으나 서명할 공화국이 줄어들었다.
- 1991.12.08벨로베즈 협정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가 독립국가연합 창설을 선언하며 신연방조약 구상이 최종 사망했다.
관련 인물 27명
참여9
러시아 대통령으로서 협상의 실질적 상대역이었고, 조약으로 가장 많은 권한을 얻을 쪽이었다.
게오르기 샤흐나자로프1924–2001고르바초프의 보좌관으로 조약 초안 작업에 참여했다.
그리고리 레벤코1936–2014조약 준비 실무를 맡은 작업그룹을 이끌었다.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1940–신연방조약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였고, 새 연방의 총리 후보로 거론되었다.
공격을 막은 공수부대 사령관파벨 그라초프1948–2012공수부대 사령관으로 8월 18일 야조프의 명령으로 부대를 모스크바에 투입했으나, 20일 밤 백악관 공격 작전을 사실상 거부했고 부하 레베디를 통해 옐친 측에 공격 시간을 알려주었다.
벨라루스 대표스타니슬라프 슈시케비치1934–2022벨라루스 최고회의 의장으로 11월 14일·25일 국가평의회에서 고르바초프의 '연방국가'에 맞서 국가연합을 주장했고, 25일 가서명을 거부했다. 벨로베즈 협정 서명자 3인 중 하나.
벨라루스 대표 참가자니콜라이 데멘테이1930–2018벨로루시 최고 소비에트 상임위원장으로서 국민투표를 조직하고 노보오가료보 협상에 참가했다.
9+1 회의에 참석한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아야즈 무탈리보프1938–2022연방은 공화국을 위해 존재한다며 신연방조약을 지지하고 자치공화국 문제에 적극 발언했다.
투르크메니스탄 대표단 수장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1940–20069+1 회의에 참석해 신연방조약 준비 과정에서 투르크메니스탄을 대표했으나 발언권은 제한적이었다.
반대 · 저항11
최고회의 의장으로 조약에 회의적이었고, 쿠데타 주모자들과 가까웠다.
발렌틴 파블로프1937–20036월에 비상 권한을 요구했고, 조약 서명 직전 쿠데타에 가담했다.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1924–2007협상장을 도청했고, 조약이 서명되기 전에 쿠데타를 조직했다.
파블로프의 후원자드미트리 야조프1924–20206월 17일 최고회의에서 파블로프의 비상 권한 요구를 지지했고, 포포프가 매틀록에게 경고한 4인 중 하나였다.
포로스 사절단의 수장올레크 바클라노프1932–2021국방회의 제1부의장으로서 8월 18일 포로스로 날아가 고르바초프에게 비상사태 선포를 요구한 5인 사절단을 이끌었다. 거부당한 후 GKChP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배반한 비서실장발레리 볼딘1935–2006고르바초프의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10년 넘게 그의 문서를 관리했으나, 8월 18일 포로스 사절단에 합류했다. 고르바초프는 그에게 '닥쳐, 이 놈아!'라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전해진다.
포로스 사절단의 정치국 대표올레크 셰닌1937–2009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로서 8월 18일 포로스 사절단의 일원으로 고르바초프에게 비상사태 선포를 요구했다. GKChP에는 정식으로 가입하지 않았으나 쿠데타 기획의 핵심이었다.
포로스 사절단의 군사적 얼굴발렌틴 바렌니코프1923–2009육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으로 8월 18일 포로스 사절단에 합류했다. 고르바초프가 고의로 그의 이름을 잊은 척 모욕했다. 후일 GKChP 재판에서 유일하게 사면을 거부하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대표레오니트 크랍추크1934–2022우크라이나 최고회의 의장으로 10월 11일 국가평의회에서 12월 1일 국민투표 전까지 조약 협상 불참을 통보했고, 11월 8일엔 노보오가료보 과정을 '과거완료형'이라 선언했다. 벨로베즈 서명자.
비상 권한 표결을 강행한 소유즈파 지도자빅토르 알크스니스1950–20251991년 6월 17일 최고회의에서 파블로프의 긴급 권한 결의안 표결을 즉각 실시할 것을 요구해, 이 결의안을 헌정 쿠데타로 몰고 갈 뻔했다.
조약에 반대한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아스카르 아카예프1944–현재8월 26일 최고 소비에트 회의에서 초안이 '수용 불가'라며 연방제 개정을 요구했다.
대상 · 피해2
관련 용어
출처: Serhii Plokhy, The Last Empire: The Final Days of the Soviet Union (2014)Archie Brown, The Gorbachev Factor (1996)William Taubman, Gorbachev: His Life and Time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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