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1991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체제를 고치려던 개혁은 왜 체제를 끝냈는가?

1985년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침체한 경제와 경직된 정치를 되살리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내걸었다. 야코블레프가 설계한 글라스노스트는 검열을 풀고 과거의 범죄를 드러냈으며, 셰바르드나제의 외교는 냉전을 끝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개혁은 보수파와 급진파 사이에서 통제를 잃어 갔다.

체제는 왜 멈춰 섰는가

1985년 3월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되었을 때 소련은 이미 10년 넘게 성장이 멈춰 가는 체제였다. 국민소득 증가율은 제8차 5개년 계획기(1966~1970년)의 연평균 7.5%에서 제11차(1981~1985년)에는 약 2.5%까지 떨어졌다. CIA 추정에 따르면 1980~1985년 소련 GNP 성장률은 연 1.8%에 그쳤고, 1982년에는 사실상 제로 성장을 기록했다. 1983년 소련 GDP는 미국은 물론 일본에도 뒤처졌다. 시베리아 유전의 석유가 외화 수입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고 있었지만, 국제 유가는 1980년 배럴당 120달러 수준에서 1985년 27달러, 1986년에는 14달러까지 폭락했다. 군비 지출은 소련 GNP의 15~17%를 잠식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연간 20~30억 달러를 소모하며 정치적 자산까지 갉아먹고 있었다.

멈춘 것은 경제만이 아니었다. 1981년 정치국 14명의 평균 연령은 69세였다.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가 75세로 사망하고, 후임 안드로포프는 취임 당시 이미 신장병으로 투석 치료를 받고 있었다. 안드로포프는 15개월 만에, 그 뒤를 이은 체르넨코는 13개월 만에 집무 중 사망했다. 2년 4개월 사이에 세 명의 최고 지도자가 죽은 것이다. 체르넨코가 1984년 2월 취임했을 때 그는 72세에 폐기종을 앓고 있었고, 정치국 회의를 주재할 체력조차 없었다. 당과 국가의 지도부 전체가 생물학적으로 소진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던 2년 반은 아니었다. 안드로포프는 KGB 의장 시절 파악한 전방위적 부패에 칼을 댔다. 브레즈네프 사망 한 달 만에 내무장관 니콜라이 셸로코프가 해임되었고(후일 자살),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공화국 지도부 전체가 연루된 '면화 사건' 수사가 시작되었다. 1983년 초 안드로포프는 고르바초프와 니콜라이 리시코프에게 경제 개혁 초안을 맡겼다. 중앙위원회에 사상 처음으로 경제 담당 서기직이 신설되어 리시코프가 맡았고, 아벨 아간베갼, 레오니트 아발킨, 올레크 보골몰로프, 타티야나 자슬랍스카야 등 학자들이 개혁 방안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83년 7월 14일 정부는 일부 기업에 부분적 독립채산제(호즈라스초트)를 허용하는 '경제 실험'을 승인했다.

같은 해 자슬랍스카야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내부용 보고서 하나를 발표했다. 제목은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개선과 경제사회학의 과제에 대하여」. 그녀는 이 보고서에서 소련 경제의 쇠퇴가 단순한 관리 실패가 아니라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에 뒤처진 구조적 위기라고 진단했다. 약 50년 전에 형성된 행정적 명령 체계가 더 이상 사회의 노동과 지적 잠재력을 활용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비밀' 딱지가 붙은 이 보고서는 서방으로 유출되어 '노보시비르스크 선언'으로 불리며 개혁의 지적 뇌관이 되었다.

그러나 안드로포프는 1984년 2월 사망했고, 후임 체르넨코는 개혁 준비 작업을 동결했다. 과학기술 정책을 논의할 예정이던 중앙위 전원회의는 취소되고, 그 자리에 관개 사업을 논의하는 전원회의가 열렸다. 체르넨코는 '인민경제의 가속화 발전'이라는 구호를 내걸었지만, 그 내용은 스탈린의 마지막 저작인 『소련에서의 사회주의 경제 문제들』(1952)로 거슬러 올라가는 복고적 논의에 머물렀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간부들은 자리에 남았고, 반부패 수사는 중단되었으며, 정치범에 대한 탄압은 재개되었다.

1985년 3월 10일 체르넨코가 사망했을 때, 정치국은 또 한 명의 노쇠한 지도자를 선택할 여유가 없었다. 다음날인 3월 11일, 54세의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안드로포프 시절 준비된 개혁안들은 서랍 속에서 꺼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석유 값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늙은 정치국이 가장 젊은 서기장을 선택하기까지

1985년 3월 10일 오후 7시 20분,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13개월 전 안드로포프의 장례식에서 숨을 헐떡이며 추도사를 읽던 모습 그대로, 소련은 2년 반 만에 세 번째 서기장을 잃었다. 체르넨코의 주치의 예브게니 차조프는 사망 소식을 가장 먼저 고르바초프에게 알렸고, 이어 KGB 의장 체브리코프에게 전화를 넣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술탄이 죽으면 왕자들이 먼저 궁전에 도착하려 경주했듯, 차조프의 전화 한 통이 모든 것을 좌우할 수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즉시 움직였다. 그날 밤 10시, 사후 2시간 40분 만에 정치국 회의를 소집했다. 우크라이나당 제1서기 셰르비츠키는 미국 순방 중이었고, 유력한 경쟁자 그리고리 로마노프는 리투아니아 팔랑가 휴양지에 있었다. 로마노프는 악천후 속에 간신히 이륙했으나 모스크바에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 셰르비츠키의 뉴욕발 비행기는 '경미한 사유'로 이륙이 지연되었다. 훗날 고르바초프의 보좌관 발레리 볼딘은 이것이 체브리코프의 KGB가 조직한 일이라고 증언했다.

회의장에 들어서기 직전,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빅토르 그리신에게 다가가 물었다. "장례위원회 위원장을 맡으시겠습니까?" 이것은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브레즈네프 사후 안드로포프가, 안드로포프 사후 체르넨코가 장례위원장을 맡아 서기장이 된 것은 불문율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사실상 "나와 싸울 생각입니까?"라고 묻고 있었다. 그리신은 당황하여 거절했다. 정치국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주요 경쟁자는 스스로 경선에서 물러난 셈이었다.

고르바초프에게는 또 하나의 결정적 우군이 있었다. 외무장관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36년간 중앙위원으로, 15년간 정치국원으로 군림한 원로 중 원로였다. 73세의 그로미코 자신도 한때 서기장직을 꿈꿨으나, 이제는 현실적인 계산을 했다. 그로미코는 회의 30분 전 고르바초프를 따로 만나 "힘을 합치자"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대가는 최고소비에트 상임회 의장직, 즉 명목상 국가원수였다.

3월 11일 오후 2시에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그로미코는 가장 먼저 발언했다. "우리는 분열을 허용할 수 없습니다. 단결된 하나의 모습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가 고르바초프의 '무한한 창조적 에너지'와 '당 원칙'을 칭송한 후, 티호노프 총리, 로마노프, 그리신까지 차례로 지지 연설을 했다. 로마노프는 "인생이 겪게 한 풍부한 학교"를 언급했고, 그리신은 "우리는 다른 제안을 가질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고르바초프를 '이 젊은이'라 부르며 무시하던 카자흐스탄의 쿠나예프도 "카자흐스탄 공산주의자들은 미하일 세르게예비치에게 투표할 것입니다"라고 보고했다.

회의록에는 만장일치의 깔끔한 그림이 그려져 있지만, 실상은 달랐다. 니콜라이 리시코프는 훗날 첫 회의가 체르넨코 사망 당일 밤 10시에 열렸다고 증언했고, KGB 제9국 부책임자 미하일 도쿠차예프는 그 자리에서 로마노프가 체르넨코의 유언을 거론하며 그리신을 밀었고 그로미코가 "관짝은 이제 충분하다"며 고르바초프를 관철시켰다고 전했다. 표결은 한 표 차이였다. 공식 회의록이 보여주는 시간대의 모순, 즉 표결이 끝났다고 선언된 시각과 플레넘 개최 시각 사이에 두 시간 반의 공백은 '만장일치'가 사후에 조립된 것임을 암시한다.

그날 밤 고르바초프는 측근들과 함께 플레넘 연설문을 다듬었다. 예고르 리가초프는 밤새 지방 당 서기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안드로포프 시절부터 리가초프가 교체한 전국 주당·지방당 서기의 70%가 고르바초프 편이었다. 당 기관의 암호통신망은 중앙이 독점했기에, 지방 간부들이 가장 먼저 받은 정보는 고르바초프 지지 쪽이었다.

3월 11일 오후 5시, 사망 21시간 40분 만에 중앙위 플레넘이 열렸다. 그로미코가 정치국을 대표해 고르바초프를 추천했고, 토론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소련 역사상 가장 빠른 권력 승계였다. 체르넨코의 부고와 고르바초프의 약력이 실린 신문은 같은 날 발행되었다. 54세의 신임 서기장은 전임자들보다 20년 이상 젊었고, 계단을 오르는 데 부축이 필요하지 않은 첫 지도자였다.

쓰라도 거짓말은 하지 말라: 개방의 설계와 저항

글라스노스트는 고르바초프가 즉위 첫날부터 완성된 청사진으로 내놓은 정책이 아니었다. 그가 1985년 5월 레닌그라드에서 “모든 것은 글라스노스트에 달려 있다”고 말했을 때, 이 말은 주로 하급 관료의 무능과 부패를 공개 비판하라는 신호였다. 그해 12월 20일 국가라디오텔레비전 위원장 세르게이 라핀이 경질되고 알렉산드르 악쇼노프가 후임으로 임명된 것은 이 첫 단계를 상징한다.

그러나 진정한 설계자는 고르바초프가 아니라 1986년 초 선전부장으로 복귀한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였다. 이미 1972년 「역사적 과장에 반대하여」라는 글을 『문학신문』에 발표해 러시아 민족주의를 비판했다가 캐나다 대사로 좌천된 경력의 소유자였다. 야코블레프는 체제의 병이 “모든 곳에 스며든, 모든 것을 덮은 거짓말”이라고 진단했고, 글라스노스트 없이 페레스트로이카는 “파멸할 것”이라고 고르바초프에게 말했다. 기자들에게 내린 그의 지시는 단순했다. “모든 것에 대해 쓰라. 그러나 거짓말은 하지 말라.”

첫 시험대는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전 사고였다. 재앙이 발생하고도 소련 언론은 사흘 동안 침묵했다. TASS의 첫 공식 발표는 4월 28일, 그것도 스웨덴의 방사능 탐지 보도가 나온 뒤에야 이루어졌다. 고르바초프는 18일이 지난 5월 14일에야 텔레비전 연설을 했다. 훗날 그는 체르노빌이 “무엇보다도 표현의 자유를 훨씬 더 크게 확대할 가능성을 연 역사적 전환점”이었다고 썼지만, 1986년 봄의 현실은 달랐다. 사고 직후인 7월 28일자 KGB 내부 문건은 방사능 상황, 오염 규모, 제염 작업 규모, 그리고 “대피 구역 내 방사능 오염”에 관한 정보를 소련 내 출판물에서 명시적으로 금지했다.

그래도 변화는 문화전선에서 시작됐다. 1986년 5월 13일, 제5차 소비에트 영화인대회에서 텡기즈 아불라제의 영화 「참회(포카야니예)」가 상영되었다. 스탈린주의 전체주의를 우화로 고발한 이 영화는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의 비호 아래 제작됐지만 2년 동안 선반에 묶여 있었다. 야코블레프의 승인으로 마침내 스크린에 오르자, 곧이어 다른 금지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야코블레프는 두 개의 핵심 매체에 새 편집장들을 앉혔다. 『모스크바 뉴스』에는 예고르 야코블레프(동명이인), 『오고뇨크』에는 우크라이나 출신 작가 비탈리 코로티치가 임명되었다. 이 두 주간지는 글라스노스트의 쌍두마차가 되어 매주 독자들이 본 적 없는 기사를 쏟아냈다: 경찰 고문, 매춘, 마약 중독,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실상, 스탈린 시대의 은폐된 범죄들. 『오고뇨크』의 구독은 폭발적으로 늘어 “한정 배급” 품목이 되었다.

1987년 1월 13일, 당 중앙위원회는 도서관 특별보관고에 격리된 서적들의 반환을 심사할 부처간위원회를 설치했다. 1987년 3월부터 1988년 10월까지 7,930종의 출판물이 일반 서가로 옮겨졌다. 솔제니친, 나보코프, 브로드스키, 구밀료프, 자먀찐의 작품들, 그리고 1918년 이후 망명한 600여 명 작가의 저작들이 75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 열람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같은 해 4월, 『민족의 우정』 지에 아나톨리 리바코프의 『아르바트의 아이들』 연재가 시작되었다. 1960년대에 완성되어 두 번이나 출판 예고되었다가 번번이 검열에 막혔던 이 소설은, 스탈린 시대 모스크바의 일상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글라스노스트 시대의 문학적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개방의 속도와 범위는 당 내부에서 처음부터 첨예한 대립의 대상이었다. 제2서기 예고르 리가초프는 야코블레프가 발탁한 편집장들을 “급진적”이라고 비난했고, 특히 과거사 청산에 강하게 반대했다. 1988년 3월 13일, 고르바초프가 유고슬라비아 방문을 앞두고 모스크바를 떠나고 야코블레프가 몽골에 체류 중이던 시점에, 『소비에츠카야 로시야』는 레닌그라드의 화학강사 니나 안드레예바가 쓴 「나는 원칙을 양보할 수 없다」를 전면 게재했다. 스탈린을 “우리 역사의 위대한 인물”로 옹호하고 페레스트로이카를 “사회주의의 근본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한 이 5,000단어 분량의 글은 리가초프의 지원 아래 기획된 것이었다. 3주 동안 언론은 이 글에 대한 반응을 내지 못하고 침묵했다. 지식인 사회에는 개혁이 후퇴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번졌다. 4월 5일, 마침내 『프라우다』에 익명의 사설 「페레스트로이카의 원칙: 사고와 행동의 혁명성」이 실렸다. 야코블레프와 이념비서 바딤 메드베데프, 그리고 주요 편집장들이 공동 집필하고 고르바초프가 승인한 이 글은 안드레예바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후퇴는 없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 사건으로 글라스노스트는 더 이상 실험적 정책이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노선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가속이 막혔을 때: 경제·정치 개혁의 두 바퀴

1986년 말, 고르바초프 진영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행정명령만으로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가속(우스코레니예)은 기계공업에 투자를 쏟아붓고 품질검사관(고스프리욤카)을 공장에 들여보내는 방식으로 추진됐지만, 1986년 유가 폭락과 체르노빌 참사가 겹치며 경제는 오히려 흔들렸다. 근본적 제도 개혁 없이는 안 된다는 인식이 퍼졌다.

그 결과가 1987년 1월과 6월, 두 차례의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였다. 1월 전원회의에서 고르바초프는 「개혁과 당의 간부정책에 대하여」라는 보고를 통해 브레즈네프 시기를 '정체'로 규정하고 '억제 메커니즘'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핵심 주장은 단순했다: 경제를 바꾸려면 먼저 정치를 민주화해야 한다. 그 자리에서 그는 지방 당서기 선거에 복수 후보와 비밀투표를 도입하고, 소비에트 선거에도 경쟁을 허용하며, 당 기관이 국가 기관의 업무를 대신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1987년 여름, 실제로 여러 선거구에서 소비에트 선거에 복수 후보가 처음 등장했다.

6월 전원회의는 경제 개혁의 청사진을 내놓았다. 「경제관리의 급진적 재편을 위한 기본방침」이라는 문서에 담긴 구상은, 중앙계획을 폐지하지 않고도 기업에 실질적 자율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핵심 수단이 7월에 통과된 국영기업법이었다. 이 법은 기업이 국가 발주(고스자카즈)를 채우고 나면 나머지 생산량을 시장에서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도록 했고, 독립채산제(호즈라스초트)와 노동자 집단에 의한 관리자 선출을 도입했다. 리시코프 총리와 아발킨, 아간베갼 같은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규제된 시장'으로 가는 첫걸음으로 보았다.

그러나 법과 현실은 달랐다. 각 성(省) 장관들은 국가 발주의 범위를 전체 생산량의 80~90%까지 부풀렸고, 물자공급은 여전히 중앙기관이 쥐고 있었으며, 기업 간 도매시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관리자들은 자율을 원했지만, 원자재를 구할 길 없이 자율만 주어진 상황을 두려워했다. 고르바초프 자신도 나중에 "1987~1988년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개혁을 단행할 적기였는데 그 기차를 놓쳤다"고 인정했다.

1988년 5월 협동조합법은 더 과격했다. 1928년 네프 종료 이후 처음으로 개인이 합법적으로 사업체를 소유·운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연금수령자와 학생만 참여할 수 있었고 높은 세율이 매겨졌지만, 곧 제한이 완화됐다. 1년 만에 협동조합 종사자는 15만 명을 넘었고, 식당·수선소·무역업이 생겨났다. 그러나 동시에 첫 '페레스트로이카 백만장자'들이 등장했고, 국가 상점의 빈 선반과 협동조합 카페의 풍요 사이의 대비가 분노를 키웠다.

정치 개혁의 분수령은 1988년 6~7월의 제19차 전연방 당대표자회의였다. 1941년 이후 처음 열린 당대표회의에서, 고르바초프는 권력을 당에서 국가 기관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제출했다. 2,250명의 인민대의원으로 구성된 새로운 최고 권력기관인 인민대의원대회를 만들고, 그 대의원 3분의 2를 복수 후보 경쟁선거로 선출하며, 나머지 3분의 1은 공산당을 포함한 '사회조직'이 배정한다는 구상이었다. 리가초프를 위시한 보수파는 당의 지도적 역할이 훼손된다고 반발했지만, 고르바초프는 표결에서 승리했다. 이 개혁이 얼마나 빠르게 당의 통제를 벗어날지는 1989년 봄 선거가 되어야 모두가 알게 된다.

1988년 말, 고르바초프는 옛 간부들을 대거 교체했다. 9월 30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그로미코, 솔로멘체프, 돌기흐 등 브레즈네프 시대 원로들이 일괄 사퇴했고, 탈리진고스플란 의장에서 경질됐다. 같은 날 크류치코프가 KGB 의장에 올랐다. 개혁파와 보수파 사이의 균열은 이미 봉합할 수 없는 지점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온 나라가 일을 멈추고 텔레비전 앞에 앉은 13일

1989년 5월 25일 오전 10시, 크렘린 대회궁에서 제1차 소련 인민대의원대회가 열렸다. 대의원 2,250명 중 2,155명이 참석했다. 87퍼센트가 공산당원이었지만, 3월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처음으로 여러 후보 중 하나를 고를 수 있었다. 레닌그라드에서는 시·주 당 지도부 전원이 낙선했고, 전국에서 30여 명의 당 지역서기가 떨어졌다. 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표현대로 선거 운동은 "아래로부터" 폭발한 것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대회를 열기 전 이미 중대한 결정을 내려 놓았다. 전체 회의를 TV와 라디오로 전국에 생중계하라는 지시였다. 이는 사전 검열을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소련 국민은 자기 나라의 최고 권력 기관에서 실제로 어떤 말이 오가는지 처음으로 듣게 된 것이었다. 결과는 즉각적이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라디오를 귀에 대고 일했고, 상점과 미용실과 호텔 로비의 텔레비전 앞에는 군중이 모여들었다. 산업 생산성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

대회는 시작부터 각본을 벗어났다. 개회를 선언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V. P. 오를로프가 "당이여, 영광 있으라"는 어조로 축사를 읽는 동안 민주파 의원석에서는 웅성거림이 일었다. 이내 리가에서 온 의사 V. F. 톨페즈니코프가 일어나 4월 9일 트빌리시에서 소련군이 평화적 시위대를 진압해 21명이 사망한 사건의 희생자들을 위해 묵념할 것을 제안했고, 대회장 전체가 일어섰다.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국가라는 배가 오랫동안 같은 부두에 묶여 있다가 미지의 항해를 시작한 순간이었다."

둘째 날, 대회는 최고소비에트 의장을 선출했다. 사상 처음으로 대안 후보가 등장했다. 레닌그라드 출신의 무소속 의원 알렉산드르 오볼렌스키가 고르바초프에 맞서 출마를 선언하고 연단에서 자신의 정강을 발표했다. 중앙선관위는 그를 투표용지에 올리지 않았지만, 단독 후보 관행을 깨뜨린 행위 자체가 정치적 균열이었다. 고르바초프는 2,123표로 당선되었다.

같은 날 대회는 542명의 상임 최고소비에트를 선출했다. 보리스 옐친은 낙선했다. 모스크바 시민 6백만 명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당선된 의원이 정작 입법부에는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나흘 뒤 옴스크 출신의 법학교수 알렉세이 카잔니크가 자신의 자리를 옐친에게 양보했다. 카잔니크는 "시베리아는 한 사람의 목소리를 더 잃어도 괜찮지만, 옐친 없는 최고소비에트는 정당성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장면은 페레스트로이카의 도덕극으로 전국에 회자되었다.

대회의 극적 정점은 안드레이 사하로프와 고르바초프의 대결이었다. 사하로프는 개회 첫날부터 "먼저 나라 상황을 토론하고, 그다음에 지도자를 뽑자"고 요구하며 고르바초프를 압박했다. 6월 2일에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범죄적 모험'이라고 규정한 자신의 발언을 놓고 아프간 참전용사 의원과 격렬한 설전을 벌였다. 보수파 다수는 사하로프에게 야유를 퍼부었고, 유리 아파나시예프는 이들을 향해 "공격적으로 복종하는 다수"라고 규정했다. 이 표현은 시대의 표어가 되었다.

6월 9일 폐회일, 사하로프는 발언 시간을 초과했음에도 연단에 올라 '권력에 관한 포고령' 초안을 낭독했다. 핵심은 헌법 제6조, 즉 공산당의 권력 독점을 명시한 조항의 폐지였다. 고르바초프는 마이크를 껐다. 보수파 의원들은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생중계 카메라 앞에서 사하로프는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이 초안은 표결에 부쳐지지 않았지만, 바로 그날 388명의 의원이 모여 소련 역사상 최초의 의회 내 공식 야당인 메지레기오날 그룹을 결성했다. 공동의장은 사하로프, 옐친, 아파나시예프, 가브릴 포포프, 빅토르 팔름이었다.

고르바초프는 훗날 이렇게 썼다: "대회는 진짜 탐정소설 같았다. 나는 가끔 속기록을 들춰보는데, 도저히 내려놓을 수가 없다." 13일 전 한 나라에서 시작된 대회는 13일 후 다른 나라에서 끝났다. 사하로프가 개회 전 동료들에게 예언한 대로였다: "2주만 버티면 우리 앞에는 다른 나라가 있을 것이다." 투표로 선출된 의회가 TV 생중계로 국민 앞에서 권력자를 심문하는 풍경은 70년 소비에트 역사에 없었던 일이었고, 다시는 지워지지 않을 기억이 되었다.

개혁이 남긴 것, 남기지 못한 것

페레스트로이카가 무엇을 확정적으로 바꾸었는가에 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이견이 거의 없다. 냉전은 평화롭게 끝났다. 핵전쟁의 실질적 위협이 상수였던 국제질서가 불과 6년 만에 군축협정과 독일통일, 바르샤바조약기구 해체로 대체되었다. 1989년 동유럽의 공산정권들은 모스크바의 개입 없이 무너졌다. 고르바초프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를 명시적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폐기는 소련 외교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전환점이었다. 국내적으로도 글라스노스트가 만들어낸 표현·출판·해외여행의 자유는 1991년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그중 일부는 푸틴의 2022년 탄압 전까지 러시아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가 의도한 바로 그 목표, 즉 계획경제의 틀 안에서 사회주의를 되살리는 것은 달성되지 않았다. 개혁은 중앙계획의 기둥을 허물었지만 시장의 기초는 놓지 못했다. 가격통제가 유지된 상태에서 기업 자율만 확대되자 억압된 인플레이션과 만성적 부족만 심화되었다. 1990년 가을, 고르바초프는 샤탈린-야블린스키500일 계획과 리시코프-아발킨의 점진주의 노선 사이에서 선택을 미루었고, 그 사이 경제는 통제 불능 상태로 빠져들었다.

여기서 역사가들의 논쟁이 시작된다. 첫째이자 가장 큰 쟁점은 소련의 붕괴가 과연 불가피했는가이다. 옥스퍼드의 정치학자 아치 브라운은 『고르바초프 팩터』(1996)에서 1980년대 소련은 쇠퇴하고 있었지만 붕괴 직전은 아니었으며, 체제를 종말로 이끈 것은 고르바초프라는 개인의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스티븐 코트킨은 『아마겟돈은 피했다』(2001)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비에트 체제는 본질적으로 개혁불가능했기 때문에 고르바초프가 시도했다는 사실 자체가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부분 개혁은 필연적으로 전체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블라디슬라프 주보크는 『붕괴』(2021)에서 두 입장을 절충한다. 붕괴는 구조적으로 예정된 것이 아니었지만, "완벽한 폭풍과 무능한 선장"의 조합이 침몰을 불렀다는 것이다. 2022년 출간된 이 저서는 소련 붕괴 30년 시점에서 나온 가장 포괄적인 재평가로 평가받는다.

둘째 쟁점은 중국과의 비교다. 덩샤오핑은 정치적 자유화 없이 경제개혁을 추진했고 당-국가를 보존했다.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 없이는 노멘클라투라가 개혁을 분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옳았는지는 오늘날까지 답이 없는 질문으로 남아 있다. 양국이 출발한 조건도 달랐다. 소련은 연방제 국가였고 민족공화국들의 원심력, 즉 '주권의 행진'이 개혁기에 폭발한 반면, 중국에는 그런 구조가 없었다. 또한 문화대혁명(1966–1976)은 중국의 계획경제 관료들을 이미 제거한 상태였기에 덩샤오핑의 개혁에 저항할 세력이 약했다는 점도 차이로 지적된다.

셋째 쟁점은 고르바초프 개인의 평가다. 같은 증거를 놓고도 한쪽은 그를 냉전을 평화롭게 종식시킨 용기 있는 개혁가로, 다른 쪽은 체제를 지키려다 체제를 날려버린 우유부단한 전술가로 읽는다. 이 간극은 페레스트로이카 전체를 관통하는 근본적 긴장을 반영한다. 위로부터의 혁명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불러내고, 그 혁명은 결국 발화자를 삼킨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1985년 정치국 회의실에 앉은 누구도 6년 뒤 소련이 지도에서 사라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역사가들은 무엇에 동의하지 않는가

소련의 붕괴는 너무나 급격하고 전면적이었기에, 사후적으로는 마치 처음부터 예정된 결말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 30년간의 연구가 축적되면서, 역사가들 사이에서 합의된 것은 오히려 붕괴가 불가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논쟁은 그렇다면 무엇이 결정적이었는가를 두고 전개된다.

첫 번째 균열은 구조 대 인간 행위자라는 오래된 문제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스티븐 코트킨은 『아마겟돈은 피했다』(2001)에서 소련 체제를 '무기력하게 안정된' 상태로 진단했다. 체제는 1985년 시점에서 붕괴 직전이 아니었으며, 코트킨에 따르면 붕괴를 촉발한 것은 다름 아닌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자체의 역동성이었다. 고르바초프와 개혁파들이 진정으로 사회주의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들려 했기에, 그들은 체제의 근본 모순을 드러내는 개혁을 멈출 수 없었다. 즉 체제의 이상이 체제를 죽였다는 역설이다.

이에 맞서 아치 브라운은 『고르바초프 팩터』(1996)에서 한 인간의 선택이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브라운에게 페레스트로이카는 체제의 필연적 붕괴가 아니라, 특정한 개혁가가 특정한 시기에 내린 특정한 결정들의 산물이었다. 다른 서기장이었다면, 가령 안드로포프가 1984년에 죽지 않고 5년만 더 살았더라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라는 가정이 이 입장의 논리적 귀결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두 번째 큰 논쟁, 즉 '중국식 경로'가 가능했는가의 문제가 열린다. 블라디슬라프 주보크는 『붕괴』(2022)에서 안드로포프가 구상한 개혁 노선(경제 자율화를 추진하되 당의 정치적 독점은 유지하는 방안)이 덩샤오핑의 중국 모델과 구조적으로 유사했다고 본다. 주보크의 주장은 단순한 반사실적 가정이 아니라, 집권 첫 2년간 고르바초프 자신이 안드로포프의 청사진을 따라 움직였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마이클 엘만과 내털리야 키비타는 소련과 중국의 출발 조건이 너무 달랐다고 반박한다. 중국은 농민이 인구의 80%였고 농업 집단화의 족쇄가 상대적으로 약했지만, 소련은 도시화가 완료된 중공업 중심 경제였고 군산복합체가 GDP의 4분의 1을 잠식하고 있었다. 같은 약을 처방할 수 있는 환자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세 번째 쟁점은 민족 문제의 비중이다. 마크 베이신저는 민족주의 동원이 1987년 이후 소련 정치의 독립변수가 되었으며, 일단 공화국 단위의 주권 선언이 시작되자 중앙은 어떤 개혁으로도 이를 되돌릴 수 없었다고 본다. 발트 3국의 독립 요구,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 그리고 결정적으로 옐친의 러시아가 연방의 상징적 중심을 장악한 순간, 페레스트로이카는 더 이상 경제개혁 프로그램이 아니라 제국의 해체 과정이 되었다. 반면 주보크는 민족 분리주의가 고르바초프의 '무력 사용 혐오'와 맞물려서야 치명적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중앙이 자신을 방어할 의지를 상실했기에 원심력이 폭발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외부 요인의 비중을 두고도 합의는 없다. 1985~1986년 국제 유가 폭락으로 소련의 외화 수입이 거의 절반으로 줄었고, 체르노빌 참사는 체제의 무능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여기에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지속적 출혈과 레이건 행정부의 군비 경쟁 압박이 겹쳤다. 이 모든 요인이 없었다면 페레스트로이카의 결말이 달랐을까? 주보크는 그렇다고 보지 않는다. '이 배는 완벽한 폭풍과 무능한 선장의 조합으로 침몰했다'는 그의 결론은, 외부 조건보다 국내 지도부의 선택이 결정적이었다는 입장을 압축한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가들은 한 가지에는 동의한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실패를 설명하려면 구조, 인간 행위자, 이데올로기, 제국, 그리고 우연이라는 다섯 변수를 동시에 다루어야 한다는 점이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이 6년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페레스트로이카가 여전히 닫히지 않은 논쟁으로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칠 수 없는 것은 왜 고치려 했는가

페레스트로이카가 남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체제를 고치려던 개혁이 체제를 끝냈다면, 그 체제는 애초에 고칠 수 없는 것이었는가, 아니면 고치는 방식이 잘못되었는가.

스티븐 코트킨은 전자를 주장한다. 『Armageddon Averted』(2001)에서 그는 소련 체제가 본질적으로 개혁 불가능했다고 본다. 중앙계획은 부분을 떼어내는 순간 전체가 작동을 멈추는 시계태엽 같았다. 기업에 자율을 주되 가격과 소유권은 그대로 두자, 수요만 폭증하고 공급은 따라가지 못했다. 1990년 소비재 부족은 페레스트로이카 이전보다 더 심각했다. 코트킨의 표현대로라면 "반쪽 개혁"은 체제의 모순을 폭발시켰을 뿐이다.

블라디슬라프 주보크는 『Collapse』(2022)에서 후자를 강조한다. 소련 붕괴는 불가피하지 않았다. 고르바초프가 정치개방을 경제개혁보다 앞세운 것이 결정적 실수였다는 것이다. 안드로포프식 권위주의 개혁(중국의 덩샤오핑이 걸었던 길, 당 독재를 유지하며 시장만 도입하는 전략)이 소련에도 가능했다고 주보크는 본다. 글라스노스트가 민족분리주의에 불을 붙이고 공산당의 권위를 무너뜨리지 않았다면, 연방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치 브라운은 양쪽 모두에 반대한다. 『The Gorbachev Factor』(1996)에서 그가 보기에 소련 체제는 개혁 가능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개혁되었다. 1989년 봄, 소련은 더이상 공산주의 체제가 아니었다. 당 독재는 무너졌고, 경쟁선거는 현실이었으며, 검열은 사라졌다. 브라운에게 진짜 질문은 체제가 왜 무너졌는가가 아니라, 어째서 이것이(핵무장한 초강대국의 평화적 해체가)거의 피 한 방울 없이 가능했는가이다. 브라운은 그 답을 고르바초프 개인의 "원칙적 자제"에서 찾는다.

이 세 입장은 같은 사실들을 놓고도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린다. 코트킨에게 반쪽 개혁의 실패는 체제의 본질적 결함을 증명한다. 주보크에게 같은 실패는 순서를 잘못 짠 전략의 결과다. 브라운에게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냉전을 전쟁 없이 끝낸 예외적 성취다.

세 입장이 공유하는 전제는 하나다. 1985년 소련은 붕괴 직전이 아니었다. 경제는 침체했고 이데올로기는 공동화되었으나, 정권은 안정적이었고 반체제 운동은 미미했다. 브라운의 정식화대로 "자유화와 민주화가 체제를 위기로 몰고 간 것이지, 위기가 자유화를 낳은 것이 아니었다." 개혁은 대응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그 선택의 결과로 소련은 사라졌고 15개 국가가 탄생했다. 코트킨이 지적하듯 유고슬라비아식 유혈붕괴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에서, 1991년 12월 25일 크렘린에서 소비에트기가 내려가는 장면은 어떤 역사적 상상보다 조용했다. 바로 그렇기에 30년이 지난 지금도 페레스트로이카는(기적이었는지 비극이었는지, 우연이었는지 필연이었는지)확정된 답 없이 남아 있다.

정착된 것, 미결인 것, 그리고 역사가들이 끝내 합의하지 못한 것

페레스트로이카가 무엇을 남겼는지는 어디서 묻느냐에 따라 답이 크게 갈린다. 국제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성취는 분명하다. 1987년 12월 체결된 중거리핵전력(INF) 전폐 조약은 사상 최초로 핵무기 한 부류 전체를 없앴고, 1989년 동유럽의 공산정권들은 루마니아만이 유일한 예외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너졌으며, 냉전 자체가 끝났다. 고르바초프는 2021년 회고에서 "인권, 언론·집회·종교·이주의 자유, 다당제 경쟁선거"를 페레스트로이카의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꼽았다. 이 중 상당수는 푸틴 시대에 후퇴했지만, 소련 시민이 가져본 적 없는 한 가지 자유, 즉 자국을 드나들 권리는 2022년 부분동원령 직전까지 유지됐고, 이 점은 글라스노스트가 남긴 최소한의 유산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가 애초 내걸었던 목표, 즉 소련 체제의 정상화와 재생은 정반대 결과로 귀결되었다. 고르바초프 자신이 "소련을 강화하려 했으나 결국 해체를 감독했다"고 인정했듯, 실패의 규모는 목표의 규모만큼 컸다. 하버드대 마크 크래머의 지적처럼 1985년 소련 경제는 위기가 아니라 침체였고 개혁 없이도 한동안 더 버틸 수 있었다. 경제를 위기로 몰아넣은 것은 부분개혁의 모순, 즉 가격통제를 유지한 채 기업 자율만 확대한 결과 발생한 거대한 억압인플레이션이었다. 여기에 글라스노스트가 체제의 도덕적 정당성을 스스로 허물면서 중도개혁파는 보수파와 급진파 사이에서 발판을 잃었다.

역사가들이 끝내 합의하지 못하는 쟁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페레스트로이카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는가. 소련이 붕괴 직전까지 몰린 것은 개혁이 급진적이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반대로 너무 신중했기 때문인가. 둘째, 1988년 정치개혁을 경제개혁보다 앞세운 결정은 치명적 실수였는가. 덩샤오핑의 중국식 경로, 즉 경제를 먼저 풀고 정치는 건드리지 않는 방식과 비교할 때 글라스노스트를 경제자유화에 앞세운 고르바초프의 순서는 개혁을 주도할 당의 통제력까지 허물었다. 셋째, 그리고 가장 근원적인 물음은 다른 길이 가능했는가이다. 1991년 8월 쿠데타가 없었더라도 신연방조약 체결로 소련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윌리엄 토브먼은 유고슬라비아식 유혈붕괴 대신 비교적 평화로운 해체를 가능하게 한 것이 고르바초프의 진정한 공로라고 보지만, 반대편에서는 처음부터 체제 내 개혁은 불가능했으며 붕괴만이 유일한 종착역이었다고 주장한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물음들은 끝내 닫히지 않았다.

결과

글라스노스트는 체제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고, 경제 개혁은 부족과 혼란을 낳았다. 보수파의 반발과 옐친을 비롯한 급진파의 압박 사이에서 고르바초프의 중도 노선은 설 자리를 잃었고, 개혁은 결국 소련의 해체로 이어졌다.

연표

  1. 1985.03
    고르바초프의 집권

    젊은 서기장이 개혁을 예고했다.

  2. 1986~
    글라스노스트

    검열이 풀리고 언론과 역사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됐다.

  3. 1987–1988
    경제·정치 개혁

    기업 자율화와 준경쟁 선거 등 개혁이 도입됐다.

  4. 1989
    인민대의원대회

    공개 선거와 생중계 토론이 정치의 문을 열었다.

관련 인물 109명

참여78

글라스노스트의 설계자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1923–2005

이념 담당으로서 검열을 풀고 개방을 설계했다.

냉전을 끝낸 외교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1928–2014

외무장관으로 군축과 화해로 냉전을 끝으로 이끌었다.

경제개혁 총리니콜라이 리시코프1929–2024

총리로서 경제개혁의 실무를 맡았다.

수석 경제고문아벨 아간베갼1932–

고르바초프의 수석 경제고문으로 시장개혁을 설계했다.

지적 뇌관타티야나 자슬랍스카야1927–2013

사회학으로 체제의 병폐를 진단해 개혁의 지적 뇌관이 됐다.

「규제된 시장」 설계레오니트 아발킨1930–2011

급진파와 보수파 사이에서 「규제된 시장」 노선을 설계했다.

고르바초프의 외교정책 설계아나톨리 체르냐예프1921–2017

해임된 카자흐당 제1서기, 젤톡산 봉기 촉발딘무하메드 쿠나예프1912–1993

도덕적 양심, 인민대표드미트리 리하초프1906–1999

정치개혁 설계게오르기 샤흐나자로프1924–2001

국가은행 총재, 통화관리빅토르 게라셴코1937–2022

외무장관, 고르바초프 지지안드레이 그로미코1909–1989

제1부총리, 1987년 해임헤이다르 알리예프1923–2003

고르바초프의 이념 고문이반 프롤로프1929–1999

공산당 부서기장블라디미르 이바시코프1932–1994

농공위원회 의장, 농업개혁브세볼로드 무라홉스키1926–2017

역사가, 인민대표로이 메드베데프1925–2026

반체제 물리학자, 인민대표안드레이 사하로프1921–1989

국방장관, 루스트 사건으로 해임세르게이 소콜로프1911–2012

500일 계획 설계자스타니슬라프 샤탈린1934–1997

우크라이나당 제1서기, 해임블라디미르 셰르비츠키1918–1990

정보·외교 정책가예브게니 프리마코프1929–2015

『문학신문』 주필, 인민대표로서 글라스노스트를 확장표도르 부를라츠키1927–2014

1982년부터 『문학신문』 정치평론가로, 1990년부터 주필로 개혁 담론을 주도했으며 1989년 인민대의원으로 선출되어 국제문제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초기 인사 교체 대상발렌틴 메시야츠1928–2019

1985년 11월 고르바초프에 의해 농업장관에서 해임되고 모스크바주당 제1서기로 전보되었다. 며칠 뒤 농업부 자체가 폐지되고 고사그로프롬으로 대체되었다. 이후 모스크바주당 제1서기(1985~1990)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내내 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산업 테크노크라트, 1988년 전원 퇴진으로 물러나다블라디미르 돌기흐1924–2020

중공업·에너지 담당 중앙위 서기(1972~1988)이자 정치국 후보위원(1982~1988)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3년간 브레즈네프식 산업관리 기구를 계속 운영했다. 1983년 고르바초프-리시코프 경제개혁 준비위원회에 참여했으나, 1988년 9월 30일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구시대 간부들과 함께 일괄 해임되었다.

당 기관지에서 시장개혁을 주장한 젊은 경제학자예고르 가이다르1956–2009

1984년 정치국 개혁위원회 작업반에 참여했고, 1987~1990년 《콤무니스트》 경제정책 담당 편집자로, 1990년 《프라우다》 경제부장으로서 당의 공식 매체에서 시장개혁 담론을 주도했다. 1986년 '즈메이나야 고르카' 경제세미나에서 추바이스 등과 함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개혁팀의 핵심을 형성했다.

중앙위 경제부장, 계획에서 시장으로의 이행 주도니콜라이 슬륀코프1929–2022

1987년 CPSU 중앙위 경제부장으로 발탁되어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경제개혁의 실무를 맡았다. 1988년부터는 사회경제정책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계획경제에서 시장 지향 개혁으로의 제도적 전환을 주도했으나, 리시코프 총리와의 노선 갈등과 뇌졸중으로 1990년 정계에서 물러났다.

군수산업 담당 중앙위 서기, 옐친 후임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레프 자이코프1923–2002

1985년 그리고리 로마노프로부터 군수산업 포트폴리오를 물려받아 페레스트로이카 전 기간 소련 군산복합체를 총괄했고, 군축 정치국 위원회를 주재했다. 1987년 보리스 옐친 축출 후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를 겸임하며 개혁의 속도에 제동을 거는 보수파로 인식되었다.

농업개혁 담당 중앙위 서기, 내부 비판자로 전환빅토르 니코노프1929–1993

1985년 고르바초프로부터 농업 포트폴리오를 물려받아 안드로포프발 농업부흥 프로그램을 구체화하고 6개 농업 부처를 통합한 국가농공위원회(고사그로프롬) 창설을 지지했다. 그러나 관료적 통합이 생산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판단, 1989년 1월 정치국 회의에서 고르바초프에게 직접 반박한 후 그해 9월 정치국과 서기국에서 동시 해임되었다.

이념 해체를 실행한 마지막 이념비서바딤 메드베데프1929–2025

1988년 정치국원 겸 이념위원회 의장으로서 즈다노프 결의를 폐기하고 특별보관고를 개방했으며, 대학의 당사·과학적 공산주의 강좌를 20세기 사회정치사로 대체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이념적 해금을 제도화한 핵심 실행자였다.

과학아카데미 마지막 총재, 페레스트로이카기 과학개혁 주도구리 마르추크1925–2013

1986년 체르노빌 참사 후 알렉산드로프의 후임으로 과학아카데미 총재에 임명되어 소련 해체까지 과학계를 이끌었다. 이전 GKNT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고르바초프 시기 과학개혁의 핵심 행정가였다.

옐친에게 패한 마지막 공산당 RSFSR 총리알렉산드르 블라소프1932–2002

1988년 10월 RSFSR 각료회의 의장(총리)에 임명되어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페레스트로이카 후반기 러시아 공화국 정부를 이끌었다. 1990년 5월 제1차 RSFSR 인민대의원대회에서 최고소비에트 의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보리스 옐친에게 467 대 535로 패배하며 구당 체제에서 민주파로 권력이 이동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인민대표대회에서 인준 거부된 대외경제 담당 부총리블라디미르 카멘체프1928–2003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부총리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989년 제1차 소련 인민대표대회에서 각료 인준이 거부된 극소수 인사 중 한 명이었다. 이는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새로이 권한을 얻은 의회가 장관 인준을 거부한 상징적 사례였다.

항공공업의 시장 전환을 주도한 마지막 장관아폴론 시스초프1929–2005

1985년부터 소련 해체까지 항공공업 장관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MiG-29·Su-27·Tu-160·An-124 생산을 총괄하는 한편 항공공업부를 국영 기업체로 전환하는 시장 개혁을 주도했다. 1986~1990년 공산당 중앙위원을 겸했다.

이념방첩 책임자로서 반체제 감시·탄압필리프 봅코프1925–2019

KGB 제5총국장과 제1부의장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전 기간 동안 반체제 인사·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총괄했으며, 만년에는 'KGB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상당히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신사고 외교의 공동 설계, 고르바초프 고문바딤 자글라딘1927–2006

국제부 제1부부장에서 고르바초프 고문으로, 이반 프롤로프와 함께 '신정치적 사고'를 개발하고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와의 대화로 냉전 종식의 외교 기반을 닦았다.

재활위원장, 1988년 숙청미하일 솔로멘체프1913–2008

1987~1988년 정치국 재활위원회를 이끌며 스탈린 시대 탄압 희생자 명예회복을 추진했으나, 1988년 9월 중앙위 총회에서 전격 해임되었다.

낙선한 레닌그라드 당 수장유리 솔로비요프1925–2011

1989년 3월 선거에서 단독 출마했으나 60%의 유권자가 그의 이름을 지워 낙선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당 권위 붕괴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소비재 개혁 추진알렉산드라 비류코바1929–2008

스탈린 탄압 피해자 재활 감독알렉산드르 수하레프1923–2021

기계공업 개혁 실무 · 시장경제 전환아르카디 볼스키1932–2006

내무장관으로 8월 쿠데타 국면 대응보리스 푸고1937–1991

체르노빌 과학보좌 · 군축 정책 참여예브게니 벨리호프1935–2024

모스크바 첫 민선 시장가브릴 포포프1936–

카자흐스탄 제1서기로 젤톡산 촉발겐나디 콜빈1927–1998

페레스트로이카 인사교체 설계게오르기 라주몹스키1936–

고르바초프 비서실장그리고리 레벤코1936–2014

500일 계획 설계그리고리 야블린스키1952–

RSFSR 마지막 공산당 총리이반 실라예프1930–2023

체르노빌 직후 핵산업 인수레프 랴베프1933–

마지막 소련 총참모장미하일 모이세예프1939–2022

석탄장관 · 체르노빌 터널 건설미하일 샤도프1927–2011

페레스트로이카 속 공작기계 공업 사수니콜라이 파니체프1934–

INF 조약 협상 · 페레스트로이카 군사개혁 지지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1923–1991

우크라이나 공산당 마지막 제1서기스타니슬라프 구렌코1936–2013

협동조합법 추진스테판 시타랸1930–2009

KGB 해체 임명된 마지막 의장바딤 바카틴1937–2022

러시아 공산당 재건발렌틴 쿱초프1937–

글라스노스트기 문화자유화 집행바실리 자하로프1934–2023

가스공업부를 가스프롬으로 전환빅토르 체르노미르딘1938–2010

군축 협상 외교관빅토르 카르포프1928–1997

RSFSR 마지막 수반 · 연방 분리 반대비탈리 보로트니코프1926–2012

소련 인민대표 · 코랴크 작가블라디미르 코시긴1933–2012

중앙계획 폐기한 마지막 고스플란 의장블라디미르 셰르바코프1949–

농업 정치국원 · 페레스트로이카 농정 책임예고르 스트로예프1937–

군축 협상 외교관율리 크비친스키1936–2010

아프간 철수 외교 마무리율리 보론초프1929–2007

체르노빌 석관 건설 총괄유리 바탈린1927–2013

주미 대사로 페레스트로이카 외교 대면유리 두비닌1930–2013

구 이념 체제의 대표표트르 페도세예프1908–1990

과학아카데미 부총재·중앙위원으로 페레스트로이카기 구 이념 체제를 대표했고, 1988년 2월 도서관 화재로 물러났다.

전자공업 장관블라디슬라프 콜레스니코프1925–2015

1985년 11월 전자공업 장관에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 기간 내내 소련의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컴퓨터 산업을 총괄했으며, 소련 해체와 함께 부처도 사라졌다.

과학기술정책 수장니콜라이 라표로프1930–2016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의장과 각료회의 부의장을 겸임하며 소련 과학기술정책의 최종 책임을 맡았다.

경제개혁 실무 책임자레프 보로닌1928–2008

각료회의 제1부의장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경제 운영을 총괄했으며, 1989년 가을 최고소비에트에서 전면 파업 금지 비상조치를 제안했다.

마지막 각료회의 관리국장미하일 시카바르드냐1930–2025

1989년부터 소련 각료회의 관리국장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정부 기구의 일상 운영을 책임졌고, 1991년 2월 새 내각 참여를 거부했다.

고스플란 의장, 1987년 국영기업법 시행니콜라이 탈리진1929–1991

1985~1988년 고스플란 의장으로서 국영기업법의 설계와 시행을 맡았으나 개혁 속도를 둘러싼 갈등 속에 1988년 경질되었다.

'공격적으로 복종하는 다수'를 규정한 역사가유리 아파나시예프1934–2015

제1차 인민대의원대회에서 보수파 다수를 '공격적으로 복종하는 다수'라고 규정한 연설로 전국적 명성을 얻었고, 메지레기오날 그룹 공동의장을 맡았다.

트빌리시 진압 진상조사위원장, 대회의 스타 연설가아나톨리 솝차크1937–2000

제1차 인민대의원대회에서 1989년 4월 트빌리시 유혈진압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군의 과잉 진압을 폭로했으며, 생중계 연설로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경제 개혁 준비 위원회 위원올레크 보골몰로프1927–2015

1983년 안드로포프가 소집한 개혁 준비 위원회에 참여했고, 세계사회주의체제경제연구소장으로 동유럽 개혁 모델을 자문했다.

반대 · 저항21

보수적 제2서기예고르 리가초프1920–2021

당의 제2서기로 개혁의 속도와 방향에 제동을 걸었다.

급진 비판자보리스 옐친1931–2007

개혁이 너무 느리다며 급진 노선에서 고르바초프를 비판했다.

초기 페레스트로이카의 KGB 의장, 보수파빅토르 체브리코프1923–1999

부통령, 8월 쿠데타 주도겐나디 야나예프1937–2010

고르바초프의 경쟁자, 보수파그리고리 로마노프1923–2008

KGB 의장, 쿠데타 설계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1924–2007

마지막 총리, 쿠데타 가담발렌틴 파블로프1937–2003

국제부장, 보수파보리스 포노마료프1905–1995

국방장관, 쿠데타 가담드미트리 야조프1924–2020

페레스트로이카를 '배신'으로 규탄한 문화계 보수파 거두티혼 흐레니코프1913–2007

소비에트 작곡가 동맹 서기장으로서 43년간 소련 음악계를 통제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고르바초프와 개혁파를 '당과 인민의 배신자'로 공개 비판했다. 1991년 작곡가 동맹 해체까지 직위를 유지했다.

페레스트로이카를 원칙적으로 거부한 마지막 철도장관니콜라이 코나레프1927–2007

1982년 말 안드로포프의 철도 위기 비판 후 장관에 임명되어 1988년 사상 최대 화물 적재량을 달성했으나, 1991년 2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대한 원칙적 반대를 명시한 사임서를 고르바초프에게 제출하고 물러났다.

시장개혁 거부한 재무장관보리스 고스테프1927–2015

러시아 공산당 창당 · 보수파 지도이반 폴로스코프1935–

우주산업 장관 · GKChP 참여올레크 바클라노프1932–2021

정치국원 · 8월 쿠데타 가담올레크 셰닌1937–2009

독일 통일 고르바초프 양보 반대발렌틴 팔린1926–2018

8월 쿠데타 주도 장군발렌틴 바렌니코프1923–2009

고르바초프 비서실장 · GKChP 가담발레리 볼딘1935–2006

공수군 사령관 · 쿠데타 병력 조율블라디슬라프 아찰로프1945–2011

반페레스트로이카 선언의 저자니나 안드레예바1938–2020

1988년 3월 『소비에츠카야 로시야』에 「나는 원칙을 양보할 수 없다」를 발표해 페레스트로이카를 정면으로 비판했으며, 『프라우다』는 이를 '반페레스트로이카 세력의 선언'이라고 불렀다.

서기장 선거에 도전한 최초의 대안 후보알렉산드르 오볼렌스키1943–

제1차 인민대표대회에서 현직 서기장 고르바초프에 맞서 최고회의 의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투표용지에 포함되지 못했다. 대안 후보의 출현 자체가 정치적 균열로 받아들여졌다.

관련 용어

출처: Archie Brown, The Gorbachev FactorEncyclopaedia Britannica: Perestroi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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