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사마트 마살리예비치 마살리예프

Абсамат Масалы уулу Масалие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키르기스 1933–2004 ○ 자연사

소련 말 키르기지야의 당 지도자

1990년 10월 25일 최고회의 대통령 선출에서 그도 아파스 주마굴로프도 과반을 얻지 못했고, 10월 27일 아카예프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95년 선거에서는 아카예프 71.6퍼센트, 마살리예프 24.4퍼센트로 패했다.

키르기스 소비에트의 당·국가 지도자로 1933년 4월 10일 오시주 알리시 마을에서 태어나 2004년 7월 31일 비슈케크에서 사망했다. 광산 기술자로 교육받고 1956년부터 키질키야 탄광관리국에서 일했으며 당·국가기구로 올랐다. 1985년 11월 2일 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선출되어 1991년 4월 6일까지 재임했고, 1986~19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 1990년 7월 14일~1991년 4월 25일 정치국원이었다. 1990년 최고회의 의장을 지냈고 대통령 선출과 1995년 선거에서 아카예프에게 패했다. 1992년 9월부터 2004년까지 키르기스스탄 공산주의자당을 이끌었다. 사망일은 출처에 따라 7월 31일과 8월 1일로 갈린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90년 오슈 사태와 권력 상실

압사마트 마살리예프의 제1서기 재임 마지막은 소련이 해체를 향해 가던 시기의 키르기스 공화국에서 가장 첨예한 위기와 맞물렸다. 1990년 6월, 페르가나 계곡의 오슈주에서 키르기스인과 우즈베크인 사이의 토지 분쟁이 폭력 충돌로 번지면서 오슈와 우즈겐 일대가 유혈 사태에 휩싸였다. 콜호스 토지 배분을 둘러싸고 결성된 우즈베크 측 '아돌라트'와 키르기스 측 '오슈 아이마기'의 대립이 도화선이었고, 양쪽 시위대가 곧 충돌했다. 공화국 당 지도부는 사태를 제압하지 못했고, 6월 6일 고르바초프가 내무부 소속 군대를 투입한 뒤에야 질서 회복이 시작되었다. 공식 집계로 300명 이상, 비공식적으로는 1,000명 이상이 숨진 이 참사는 공화국 당 지도부의 권위를 근본적으로 흔들었다. 프룬제(비슈케크)에서는 오슈 사태의 책임을 물어 마살리예프의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민주운동 세력과 지식인층은 사태 발생 직후 그가 제때 대응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이런 압박 속에서 1990년 10월 의회 대통령 선거에서 마살리예프는 아파스 주마굴로프와 함께 과반을 얻지 못했고, 결국 무소속 성향의 학자 아스카르 아카예프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마살리예프는 최고회의 의장직에서 물러났고, 1991년에는 중앙의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고문 자리로 사실상 밀려났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 정치를 버리지 않았다. 독립 후 신생 키르기스스탄에서 키르기스스탄 공산주의자당을 이끌었고, 1995년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아카예프에 도전했으나 패했다. 남부 오슈 지역을 기반으로 강한 지지를 얻은 그는 1995년부터 죽을 때까지 의회 의원으로 남아, 독립 키르기스스탄에서 공산주의 이념의 상징적 중심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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