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우다
Pravda
1912년 5월 5일 페테르부르크에서 창간된 러시아의 일간지로, 볼셰비키당과 이후 소련공산당 중앙위의 공식 기관지였다. 창간 초기에는 당 중앙위 기관지가 아니었고 검열로 폐간될 때마다 제호를 바꿔 발행했으며, 1917년 복간되어 10월 혁명 뒤 당 중앙의 기관지가 되었다. 소련 시기에 정책 변경을 알리는 가장 권위 있는 일간지였고, 1991년 중단 뒤 그해 9월 복간되었으며 1993년부터 러시아연방공산당의 기관지다. 트로츠키가 빈에서 편집하던 동명 신문(1908~1912)과 제호 갈등이 있었고, 인터넷 매체 《프라우다Ru》와 '포르탈 콤바트' 허위정보망은 별개 매체다.
상세
창간 이전: 같은 이름의 선행 간행물
'프라우다'라는 제호는 1912년의 볼셰비키 일간지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1903년 모스크바에서 철도기술자이자 미술사가인 V. A. 코제프니코프가 문학·예술·사회생활을 다루는 월간지로 창간한 《프라우다》가 먼저 있었고, 그 편집진은 A. A. 보그다노프, M. N. 포크롭스키, I. I.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 등 훗날 볼셰비키 파벌의 활동가가 된 필자들로 구성되었다. 코제프니코프와 편집진의 갈등 끝에 멘셰비키 파벌로 넘어갔고, 우크라이나 사회민주주의 조직 '스필카'의 기관지가 된 뒤 1906년까지 사실상 발행이 끊겼다. 영어권 자료의 연표가 이 1903년 간행물을 프라우다의 기간에 포함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1908년 10월부터 1912년 4월까지는 레프 트로츠키가 편집하는 사회민주주의 신문 《프라우다》가 제네바에서 창간되어 리보프를 거쳐 빈에서 발행되었는데, 흔히 '빈 프라우다'라 불린다. 아돌프 이오페가 국제부를 맡았고, 1910년에는 당 중앙위원 레프 카메네프가 편집진에 들어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의 사실상 기관지가 되기도 했으나 이 지위는 공식적으로 확정된 것이 아니었다.
창간과 1912~1914년
1912년 1월 프라하에서 열린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6차 전러시아 회의는 레닌의 발의로 대중적 노동자 일간지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창간 자금은 공장과 제소에서 노동자들이 모았고, 같은 해 4월 레나 금광 총격 사건이 신문 발행을 앞당겼다. 1912년 5월 5일(구력 4월 22일) 마르크스의 생일에 첫 호가 나왔으나, 이때 프라우다는 아직 당 중앙위의 공식 기관지가 아니었다. 그 역할은 국외에서 인쇄해 밀반입하던 비합법 신문 《소치알데모크라트》가 맡고 있었다.
창간 당시 프라우다는 4만~6만 부를 찍었고 1912~1914년에 레닌의 저작 285편이 이 지면에 실렸다. 1912년 12월까지 공식 발행인은 N. G. 폴레타예프, 이후 A. E. 바다예프였으며, 문학부는 막심 고리키가 이끌었고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편집부 서기로 일했다. 빈 프라우다 측은 같은 이름의 신문이 나오자 격렬히 항의했으나 제호는 레닌의 신문에 남았다.
검열과의 싸움이 곧 이 시기 프라우다의 역사였다. 1913년 7월 16일(구력 3일) 처음 폐간된 것을 시작으로, 356호 가운데 49호가 압수되고 21호가 벌금 처분을 받았다. 폐간될 때마다 제호를 바꿔 《라보차야 프라우다》, 《세베르나야 프라우다》, 《프라우다 트루다》, 《자 프라우두》, 《프롤레타르스카야 프라우다》, 《푸티 프라우디》, 《트루도바야 프라우다》로 발행을 이어갔으며, 각 제호마다 압수된 호수가 기록되어 있다. 1914년 7월 21일(구력 8일)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을 앞두고 완전히 금지되었다.
1917년과 소비에트 기관지 시기
1917년 2월 혁명 이후 3월 18일(구력 5일) 당 중앙위와 페트로그라드 위원회의 기관지로 복간되어 발행부수가 8만 5천~9만 부로 늘었다. 일부 러시아 자료는 이 시기 독일이 파르부스를 중개로 신문에 자금을 댔다는 학설을 전하며, 1917년 12월 3일 독일 국가장관 퀼만이 카이저에게 보낸 서한을 그 근거로 인용한다. 이는 독일 측 문서를 인용한 학술적 논쟁으로 확정된 사실이 아니며 출처를 밝혀 제시해야 한다.
1917년 7월 18일(구력 5일) 페트로그라드 반정부 시위 뒤 신문은 폐쇄되어 10월까지 《리스토크 프라우디》, 《라보치 이 솔다트》 등 다른 제호로 나왔고, 10월 혁명 뒤인 11월 9일(구력 10월 27일) 다시 '프라우다'라는 제호로 당 중앙의 기관지가 되었다. 편집장은 니콜라이 부하린이 맡았다. 1918년 비공산주의 언론이 정리된 뒤 소비에트의 기관지 《이즈베스티야》를 밀어내고 사실상 전국 제1의 신문이 되었으며, 첫 호가 나온 5월 5일은 1922년 열 번째 기념일을 계기로 언론의 날로 지정되었다.
소비에트 시기의 프라우다는 단순한 신문이 아니라 정치 기구였다. 편집국은 1931년 착공한 대규모 인쇄공장을 1934년 5월 가동했고, 1931년 6월부터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같은 날 신문을 볼 수 있도록 중앙지의 지형(紙型)을 항공편으로 레닌그라드에 보냈으며, 기술이 발전한 뒤에는 사진전신으로 전국에 전송했다. 정치국이 어떤 기사를 싣고 싣지 않을지를 결정하기도 했고, 프라우다의 논설과 풍자문은 정부 결정문이나 법원 판결문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스타하노프 운동, 조시첸코와 아흐마토바 비판, '뿌리 없는 세계시민주의'와의 투쟁, 처녀지 개간 같은 이념 캠페인은 프라우다 지면에서 시작되었다. 발행부수는 1975년 1,060만 부에 이르렀고, 이 증가는 상당 부분 당원에 대한 당 간행물 의무 구독으로 설명된다. 1972년 4월 25일부터는 시간대와 배달 사정을 고려해 지역별로 다른 두 개의 판을 발행했고, 다른 소비에트 신문들이 주 6회 나온 것과 달리 매일 발행되었다.
1991년 이후
1991년 8월 19일 프라우다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폐간 조치에서 빠진 아홉 개 신문 가운데 하나였다. 8월 22일 신문은 '소련공산당 중앙위 기관지'로서는 마지막으로 나왔고, 같은 날 보리스 옐친의 명령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 1991년 9월 노동집단이 발행하는 일반 정치지로 복간되어 편집장 겐나디 셀레즈뇨프의 지도 아래 발행되었으나 편집국은 프라우다 거리 24호 사옥의 대부분을 잃었다. 1992년에는 그리스 자니코시스 형제의 자금 지원을 받는 '프라우다 인터내셔널'이 세워졌고, 1993년 10월 사태 직후 러시아 연방 언론부에 의해 다시 한 번 발행이 중단되었다가 빅토르 린니크를 새 편집장으로 선출하고 10월 21일 복간되었다. 이 무렵 편집국의 일부는 인터넷 매체 《프라우다Ru》로 옮겨갔고, 1996년에는 소유주와 기자들 사이의 분쟁으로 프라우다가 여러 매체로 갈라졌다. 러시아연방공산당은 종이 신문 프라우다를 확보했고, 이 신문은 1997년 4월부터 알렉산드르 일린을 편집장으로 당의 기관지로 발행되었다. 2013년 2월 24일 러시아연방공산당 제15차 대회가 채택한 새 당규약 전문은 프라우다를 당의 공식 인쇄 기관지로 규정했다.
구분과 예시
프라우다는 다른 소비에트 중앙지들과 역할이 달랐다. 《이즈베스티야》는 소련 최고회의의 기관지로 대외 관계를 다뤘고, 《트루드》는 국가가 통제하는 노동조합 운동의 기관지였으며, 《베드노타》는 붉은 군대와 농민에게 배포되었다. 제호를 공유하는 파생지들도 있었다.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공산주의청년동맹의 기관지, 《피오네르스카야 프라우다》는 소년단의 기관지였고, 각 공화국과 주의 당 기관지들도 같은 이름을 썼다.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가 각각 '진실'과 '소식'을 뜻한다는 데서 나온 '프라우다에는 소식이 없고 이즈베스티야에는 진실이 없다'는 말은 이 중앙지 체계의 위상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널리 인용된다.
소련 시기 프라우다는 정책 변경이나 지도부 내 권력 투쟁의 결과를 알리는 신호로 읽혔기 때문에, 서방의 소련 연구자들은 프라우다를 정독하며 사소한 표현의 변화까지 주목했다. 창간 100주년인 2012년 5월 5일에는 노동조합의 집 열주홀에서 기념행사가 열려 겐나디 주가노프가 연설했고,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축전을 보냈다. 1962년부터는 '프라우다' 크로스컨트리 대회가, 1968년부터는 프라우다 상 육상 경기가 열리는 등 신문의 이름은 체육 행사에도 붙었다. 미국 기업 이스트뷰 정보서비스는 프라우다 전 호의 아카이브를 전자화했고, 이 아카이브는 러시아 여러 도서관의 열람실에서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제호를 둘러싼 혼동도 함께 기록해 둘 필요가 있다. 2013년 미국 상원의원 존 매케인이 프라우다에 기고하려 했을 때, 러시아연방공산당 소유의 종이 신문은 당의 정치 노선에 맞지 않는다며 게재를 거부했고 매케인의 글은 인터넷 매체 《프라우다Ru》에 실렸다. 한편 '포르탈 콤바트'로 불리는 프라우다 허위정보망은 2013년 크림 출신의 한 우크라이나 시민이 만든 뒤 2022년 러시아의 침공기에 러시아어권 주민을 겨냥해 확장된 별개의 매체 체계로, 언어별로 여러 사이트를 운영하며 인공지능 학습 데이터를 겨냥한 콘텐츠를 유포한다. 이들은 신문 프라우다와 무관하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러시아어) 1912 founding, censorship-era mastheads, 1917 revival, central organ history
- 위키백과 (영문) English overview, Soviet Press Day, post-1991 fate
- 위키백과 (영문) Trotsky's Vienna Pravda and the 1912 title dispute
- 위키백과 (러시아어)
-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러시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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