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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루스

시민권 3 · 민족·국가 51 · 사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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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 인물 3전체보기

스타니슬라프 스타니슬라보비치 슈시케비치

Станіслаў Станіслававіч Шушкевіч
국가원수 벨라루스 벨라루스 1934–2022 ○ 코로나19 합병증

체르노빌 진실을 요구한 핵물리학자, 소련의 종말을 고르바초프에게 직접 통보한 사람

고르바초프가 물었다. '국제사회 반응은 생각했나?' 나는 답했다. '옐친이 지금 부시와 통화 중입니다. 부시는 찬성하는 눈치입니다!'

민스크에서 태어난 핵물리학자로, 벨라루스 국립대학 교수이자 라디오전자공학 전문가였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조사위원회에서 소련 당국의 은폐에 맞서 진실 공개를 요구하다 해임되었고, 이 경험이 그를 정치로 이끌었다. 1991년 벨라루스 최고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비스쿨리 사냥 별장에서 옐친·크랍추크와 회동을 주최했으며, 원래 석유·가스 공급 논의로 시작된 자리에서 소련 해체 선언문에 처음으로 서명 의사를 밝혔고, 고르바초프에게 전화를 걸어 소련이 끝났음을 통보했다. 독립 벨라루스의 첫 국가원수였으나 1994년 루카셴코의 부패 의혹 공세로 실각했고, 말년에는 망명하지 않고 민스크에서 루카셴코 정권을 비판하는 야당 원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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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벨라루스 국립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 1963–1965벨라루스 국립대학 핵물리학과 부교수
  • 1966–1970민스크 무선기술연구소 연구부총장
  • 1971–1990벨라루스 국립대학 핵물리학과 주임
  • 1989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
  • 1990–1991벨라루스 SSR 최고소비에트 제1부의장
  • 1991–1994벨라루스 최고소비에트 의장 (국가원수)
  • 1998–2018벨라루스 사회민주당 의장

뱌체슬라프 프란체비치 케비치

Вячаслаў Францавіч Кебіч
정부 수반 벨라루스 벨라루스 1936–2020 ○ 코로나19

소련 종말 문서에 서명하고서 '러시아만 미리 알고 왔다'고 증언한 벨라루스 초대 총리

「나도, 슈시케비치도, 크랍추크도, 포킨도 그런 문서가 준비되어 서명될 줄은 몰랐다」: 러시아만 벨로베시 협정의 계획을 미리 알고 왔다고 주장한 케비치

벨라루스 폴리테크닉 대학 출신의 기계공학자로, 민스크 공장들에서 경력을 쌓아 벨라루스 공산당과 각료회의 의장(1990) 자리까지 올랐다. 1991년 12월 슈시케비치와 함께 벨로베시 협정에 서명하여 소련 해체의 공동 서명자가 되었고, 훗날 '러시아 대표단만 사전 계획을 가지고 왔으며 우리는 그 문서가 준비될 줄 몰랐다'고 증언하여 회동의 즉흥성과 준비성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다. 1994년 대선에서 루카셴코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했고, 이후 루카셴코의 친러·개헌 노선을 지지하는 의원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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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벨라루스 폴리테크닉 대학 기계공학부 졸업
  • 1958–1973민스크 자동라인 공장 기술자, 작업반장, 부수석기사
  • 1973–1980민스크 키로프 공작기계 공장 수석기사, 공장장, 생산연합 총책임자
  • 1980–1985벨라루스 공산당 민스크 시당 제2서기, 중앙위 부장, 민스크 주당 제2서기
  • 1985–1990벨라루스 SSR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 1990–1994벨라루스 SSR 각료회의 의장 / 벨라루스 총리
  • 1996–2004벨라루스 하원 의원

스베틀라나 알렉산드로브나 알렉시예비치

Святлан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Аляксандраўна Алексіевіч

증언의 목소리로 소비에트 세기를 기록한 작가

“나는 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문학적 방법을 찾아 왔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벨라루스의 작가이자 기자로, 러시아어로 전쟁과 사회적 격변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을 엮어 집단적 기억의 문학을 만들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아연 소년들》에서 공식 영웅담이 가린 여성과 병사의 경험을 드러냈고, 《체르노빌의 기도》에서는 1986년 재난 뒤 생존자와 유가족, ликвидатор들의 목소리로 기술 재난의 인간적 결과를 기록했다. 그녀의 작업은 사실의 기록과 문학적 구성 사이의 긴장을 감수하면서도 개인의 목소리를 역사 이해의 중심에 놓았으며, 201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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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67학교 교사와 지역 신문 기자
  • 1972벨라루스 국립대학교 저널리즘 학위
  • 1973–1976《농촌신문》 기자
  • 1976–1984잡지 《뇨만》 논픽션·수필 부문 책임자
  • 1985《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출간
  • 1989《아연 소년들》 출간
  • 1997《체르노빌의 기도》 출간
  • 2015노벨 문학상 수상

민족·국가적 배경 인물 51전체보기

판텔레이몬 니콜라예비치 레페신스키

Пантелеймон Николаевич Лепешинский
이념 · 선전 소련 벨라루스 1868–1944 ○ 자연사

당 역사 기록화의 제도적 기초를 놓은 이스트파르트의 공동 창립자

어느 날 내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는 당시 카멘니 다리 근처 정부 청사(지금의 세라피모비치 거리)에 살고 있었다. 그의 서재 책상 옆 바닥에는 조가 흩어져 있었고, 작은 병아리들이 그것을 쪼아 먹고 있었다. 내 놀란 표정에 그가 말했다. "젊은 생명을 바라보는 건 즐거운 일이지." — 보리스 우를라니스의 회고록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하다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1897년 예니세이 유형지에서 레닌과 함께 지냈고, 이후 「이스크라」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10월 혁명 후 계몽인민위원부에서 학교 개혁을 주도했고, 1921년 당 역사 연구를 제도화한 이스트파르트(당 역사 위원회)의 창립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만년에는 역사박물관과 혁명박물관 관장을 지냈으며, 레닌의 망명 시절을 생생하게 기록한 회고록 『전환점에서』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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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1891페테르부르크 대학 수학, 학생 혁명서클 조직, 1890년 제적, 키예프 대학 외부시험으로 졸업
  • 1895–1897「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투쟁동맹」 활동, 체포·투옥 후 예니세이 유형 — 레닌과 동일 지역
  • 1900–1905「이스크라」 대리인, 프스코프에서 신문 배포 조직, 망명 중 제네바에서 당 서고·기록보관소 설립
  • 1918–1920계몽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학교개혁 부장 — 통일노동학교 규정 초안 작성, 리트비노비치에 실험적 학교-코뮌 설립
  • 1919–1920투르케스탄 공화국 계몽부인민위원 대리, 타슈켄트에서 교원 양성과 첫 공화국 교육대회 조직
  • 1921–1924이스트파르트(당 역사 위원회) 공동 창립자이자 부의장 — 당 역사의 제도적 연구 기반 구축
  • 1925–1927소련 MOPR(국제혁명투사원조회) 중앙위원회 의장
  • 1927–1930, 1935–1936국립역사박물관 관장, 이후 혁명박물관 관장

표트르 게르모게노비치 스미도비치

Пётр Гермогенович Смидович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벨라루스 1874–1935 ○ 자연사

세 혁명을 관통한 이스크라 요원, 비로비잔의 국가건설을 설계한 볼셰비키

1922년 12월 30일, 제1차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의 개회를 선언했다 — 소련이라는 국가의 탄생을 공식화한 순간이었다.

1898년 입당한 구볼셰비키.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으로 모스크바대학에서 제적된 후 파리에서 전기공학을 배우고 벨기에 노동당에서 활동했다. 이스크라 요원으로 세 혁명을 관통했고, 10월 혁명기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이자 모소베트 의장을 지냈다. KOMZET 위원장으로 유대인 자치주 비로비잔 실험을, 북방위원회 위원장으로 북방 소수민족 정책을 설계했다.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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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RSDLP 입당, 페테르부르크 혁명활동
  • 1902–1905이스크라 요원, 우만 지하인쇄소 공동 조직, 세 혁명 참여
  • 1917–1918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VTsIK 간부,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 1921안토노프 봉기·크론시타트 진압 참여
  • 1924–1935KOMZET 위원장: 유대인 자치주(비로비잔) 기획·추진
  • 1924–1935북방위원회 위원장: 북방 소수민족 행정·경제 기반 수립
  • 1933–1935VTsIK 자연보호구위원회 위원장

로잘리야 사모일로브나 제믈랴치카

Розалия Самойловна Землячка
정부 수반 소련 벨라루스 1876–1947 ○ 자연사

지하 암호명 '데몬', 유일한 여성 소브나르콤 부의장

지하 활동 시절 스스로 택한 암호명 '데몬(Демон)'은 레르몬토프의 시를 암호표로 삼았다는 설과 함께 평생 그녀의 혁명적 인격을 상징하는 별칭으로 남았다.

이스크라 대리인 출신의 볼셰비키 핵심 조직가로, 1903년 중앙위원회에 협력되고 1905년·1917년 모스크바 봉기를 지도했다. 내전기 제8군·제13군 정치부장으로 복무하며 여성 최초로 적기훈장을 받았다. 1920-21년 크림 지방 당 서기 시절 조직한 적색 테러는 오늘날까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다. 1939년 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에 올라 이 직위의 유일한 여성이 되었고, 스탈린 시기 숙청을 피한 극소수 구볼셰비키 여성 가운데 하나로 194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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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RSDRP 가입, 키예프에서 사회민주주의 운동 시작
  • 1901이스크라 대리인 — 오데사·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 활동
  • 1903–04중앙위원회 협력, '다수파 위원회 국' 구성원
  • 1905모스크바 위원회 서기, 12월 봉기 지도
  • 1917모스크바 합법 위원회 서기, 10월 로고슈스코-시모놉스키 봉기 지휘
  • 1918–20제8군·제13군 정치부장, 루간스크 방어전 참가, 최초의 여성 적기훈장 수훈
  • 1920–21크림 당 책임서기, 혁명위원회 위원 — 적색 테러 조직
  • 1924–34중앙통제위원회 위원, 교통인민위원부 간부, 페름·모스크바 지구당 서기
  • 1939–40소비에트 통제 위원회 의장
  • 1939–43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 이 직위의 유일한 여성
  • 1943–47당 통제 위원회 부의장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크레스틴스키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Крестинский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벨라루스 1883–1938 ✕ 처형

책임서기에서 피고석으로 간 초기 볼셰비키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첫날, 크레스틴스키는 피고석에서 일어나 '나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며, 반소비에트 블록의 구성원도 아니었다'고 선언했다. 대숙청기 세 재판 전체에서 법정 자백을 거부한 유일한 순간이었다.

차르 시절 변호사 출신의 볼셰비키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혁명을 이끌고 최초의 정치국원이 되었다. 스베르들로프 사후 1919년부터 2년간 책임서기로서 당을 이끌었으나,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를 지지하며 레닌과 충돌해 실각했다. 이후 소련 최대의 외교무대인 주독 전권대표로 9년간 활약했고, 대숙청기 모스크바 재판에서 유일하게 법정 자백을 거부한 피고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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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22재무인민위원
  • 1919–21책임서기, 정치국원
  • 1938제3차 모스크바 재판 후 처형

직접 연루된 역사 사건 4전체보기

1922.12

소련의 결성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야·자캅카스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대등한 자격으로 연방조약을 맺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했다. 공화국들을 러시아 연방에 편입하려던 자치화안은 레닌의 개입으로 폐기되었고, 탈퇴권을 명시한 대등한 공화국들의 연방이라는 원칙이 채택되었다. 뒤이은 코레니자치야(토착화) 정책은 민족 언어와 민족 간부를 국가가 체계적으로 육성한, 당대 세계에 전례가 없는 민족정책이었다.

1986

체르노빌 참사

1986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의 4호기가 폭발해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유럽으로 퍼졌다. 초기에 사고를 축소·은폐한 관성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한 새 지도부의 시험대가 됐다. 리시코프가 이끄는 정부위원회가 수습에 나섰고, 수십만 명의 「청산인」이 피폭을 무릅쓰고 동원됐다.

1991

노보오가료보 협상과 신연방조약

1991년 3월 국민투표에서 연방 유지가 76%의 찬성을 얻자, 고르바초프는 이를 마지막 정치적 자본으로 삼았다. 4월 23일 그는 모스크바 교외 노보오가료보 별장에서 러시아의 옐친을 포함한 9개 공화국 정상과 「9+1 성명」을 발표하고, 소련을 주권 공화국들의 자발적 연방으로 재편하는 신연방조약 협상을 시작했다. 발트 3국과 그루지야 등 6개 공화국은 처음부터 불참했다. 여름 내내 세금 징수권과 연방·공화국 권한을 놓고 밀고 당긴 끝에 조약안이 만들어졌고, 서명일은 8월 20일로 잡혔다. 7월 말 고르바초프·옐친·나자르바예프의 심야 회동은 서명 뒤 크류치코프·파블로프 등 강경파를 교체하기로 합의했는데, 이 대화는 KGB의 도청으로 당사자들에게 그대로 새어 들어갔다.

1991

8월 쿠데타와 소련의 해체

1991년 8월, 신연방조약 체결을 막으려는 보수 강경파가 고르바초프를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크류치코프·야조프·파블로프 등이 주도한 이 쿠데타는 옐친이 전차 위에 올라 저항하고 시민이 결집하면서 사흘 만에 무너졌다. 쿠데타의 실패는 오히려 연방의 해체를 가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