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1991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중앙위 서기국, 조직부, 간부국을 통해 임명권과 당 기구를 움직인 라인.

지도부 타임라인

  1. 1917–1918 옐레나 드미트리예브나 스타소바 중앙위 기술서기 · 당 조직 실무
  2. 1918–1919 야코프 미하일로비치 스베르들로프 중앙위 서기국 의장 · 혁명 직후 당 조직
  3. 1919 옐레나 드미트리예브나 스타소바 중앙위 서기국 의장
  4. 1919–1921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크레스틴스키 책임서기
  5. 1921–1922 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몰로토프 책임서기
  6. 1922–1953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서기장 · 노멘클라투라 장악
  7. 1922–1924, 1928–1939 라자르 모이세예비치 카가노비치 조직부 · 서기국 · 당 인사 장악
  8. 1939–1946 게오르기 막시밀리아노비치 말렌코프 중앙위 서기 · 간부국 책임자
  9. 1946–1948 안드레이 알렉산드로비치 즈다노프 중앙위 서기 · 전후 서기국의 제2인자
  10. 1948–1953 게오르기 막시밀리아노비치 말렌코프 중앙위 서기 · 스탈린 말기 후계 서열
  11. 1953–1964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 제1서기 · 당 기구 장악
  12. 1957–1960 알렉세이 일라리오노비치 키리첸코 중앙위 서기 · 당 임명 업무
  13. 1966–1976 안드레이 파블로비치 키릴렌코 중앙위 간부 담당 선임서기
  14. 1983–1990 예고르 쿠즈미치 리가초프 조직당사업부장 · 제2서기
  15. 1990–1991 블라디미르 안토노비치 이바시코프 부서기장 · 말기 당 기구

소속 인물

옐레나 드미트리예브나 스타소바

Елена Дмитриевна Стасова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73–1966 ○ 자연사

혁명 직후 당 서기국의 실무 관리자

마리야 에센이 지하 가명을 정할 때 말했다. "차라리 '정언명령'이라 부르고 싶지만 너무 기니까, 그냥 '압솔류트'로 하자." 스타소바는 그 이름대로 임무를 절대 실수하지 않는 당의 연락책이 되었다.

1898년 사회민주노동당 창립과 함께 입당한 구볼셰비키로, 이스크라의 지하 연락책과 위조문서·무기 운반을 도맡아 '아브솔류트'(절대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1917년부터 중앙위 기술서기와 서기국 의장으로서 합법화된 당의 장부·연락·회의 실무를 체계화했고, 이후 코민테른 독일 담당과 MOPR 의장으로 국제 혁명가 구호 조직을 이끌었다. 초기 당 기구의 조직적 토대를 닦은 몇 안 되는 여성 중앙위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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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8중앙위 기술서기, 합법화된 당 조직의 기록과 연락 실무
  • 1919중앙위 서기국 의장
  • 1921–26코민테른 독일 담당

세묜 이바노비치 발라쇼프

Семён Иванович Балаш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러시아 제국 → 소련 러시아인 1874–1925 ✕ 자살

프룬제와 함께 첫 소비에트를 세운 이바노보 볼셰비키, 당명 '스트란니크'

1905년 5월, 발라쇼프는 자신의 아파트를 총파업 사령부로 삼아 72일간 7만 직조 노동자의 투쟁을 지휘했고, '콤파니야' 공장 노동자들은 그를 첫 소비에트 대표로 뽑았다.

농민 출신 직조공으로 1898년 RSDLP에 입당해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위원회의 핵심이 되었다. 1905년 프룬제, 아파나시예프와 함께 72일간의 총파업과 러시아 최초의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를 이끌었으며, 아파나시예프가 흑백파에게 살해된 뒤 시당 위원장을 맡았다. 1908년 체포되어 9년간 시베리아에 유배됐다가 1917년 3월 귀환해 위원장직을 되찾고 체카에서 활동했다. 내전 후 여러 책임직을 거쳤으나, 누적된 박해와 투옥으로 쇠약해진 끝에 1925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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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RSDLP 위원회에 입당
  • 1905프룬제·아파나시예프와 함께 총파업 지도, 첫 소비에트 대표 선출
  • 1905–1908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RSDLP 위원장, 브랸스크·모스크바에서 당 활동
  • 1908–1917체포 후 시베리아 유형
  • 1917–1918이바노보 볼셰비키 위원장·체카, 내전 전투 참전
  • 1919–1925하리코프·폴타바·모스크바에서 당 및 소비에트 직책

미하일 표도로비치 블라디미르스키

Михаил Фёдорович Владимирский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74–1951 ○ 자연사

4반세기 동안 당의 회계를 감시한 구볼셰비키

1919년 3월 16일부터 30일까지, 의사 출신 구볼셰비키가 스베르들로프의 급서로 공백이 된 소비에트 국가원수직을 대행했다. 불과 2주였지만 혁명 정권의 초기 권력 계승에서 결정적 틈을 메운 순간이었다.

1895년 입당한 구볼셰비키. 모스크바 노동자동맹 창립, 1905년 12월 무장봉기 등 지하운동을 거쳐, 1919년 3월 스베르들로프 사후 2주간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장 대행으로 국가원수직을 수행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부수상 겸 국가계획위원장, 러시아 보건인민위원을 지냈고, 1927년부터 사망까지 24년간 중앙감사위원장으로 당의 회계와 규율을 관장했다. 스탈린 노선을 지지하며 숙청기에도 입지를 유지했으나 사위 류틴은 당에서 제명·숙청되는 역설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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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모스크바 노동자동맹 창립 참여 · RSDLP 입당
  • 1896–1905체포·유배·망명 반복, 해방노동 그룹 합류, 이스크라 협력, 베를린·카잔 의학 학위
  • 1905–1907모스크바 당위원 · 소비에트 대의원, 12월 무장봉기 참여, 재차 체포 후 프랑스 망명
  • 1917–191910월 봉기 모스크바당 5인 지도부 · 군사혁명위 · 전러시아 중앙집행위 간부, 1919.3 중앙집행위원장 대행
  • 1922–1926우크라이나 부수상 · 국가계획위원장 · 당 중앙통제위원장 겸 노동자농민감찰 인민위원
  • 1926–1927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27–1951전연방공산당 중앙감사위원회 의장 (24년간, 사망 시까지)
  • 1930–1934러시아 공화국 보건인민위원 (겸임)

리디야 알렉산드로브나 포티예바

Лид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Фотиева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81–1975 ○ 자연사

레닌의 개인비서, 마지막 정치투쟁의 전달자

1923년 3월 5일, 레닌은 포티예바에게 스탈린과의 관계 단절 편지를 받아쓰게 한 뒤 카메네프에게 '그루지야 문제에서 트로츠키 편에 섰다'고 전하라고 지시했다. 글랏세르는 트로츠키에게 말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스탈린을 향한 폭탄을 준비 중입니다."

레닌의 개인비서(1918~1924)로, 1922년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유언)를 구술받아 30년간 보관, 1956년 공개로 이끌었다. 1923년 병상의 레닌을 대신해 트로츠키와의 연락을 중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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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17모스크바 음악원과 베스투제프 여성고등과정 수학, 학생운동으로 페름 유형
  • 1904–1905제네바·파리 망명 중 RSDLP(b) 입당, 제1차 러시아 혁명 참가
  • 1917「프라우다」지에서 몰로토프의 보좌관,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
  • 1918–1924V.I. 레닌 개인비서, 인민위원회의(Sovnarkom) 및 노동국방회의(STO) 서기 겸임
  • 1922–1923레닌의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유언) 구술 필기, 그루지야 문제 자료 분석 및 레닌-트로츠키 연락 중개
  • 1918–1930인민위원회의 및 노동국방회의 서기 지속
  • 1938–1941중앙 V.I. 레닌 박물관 연구원
  • 1941–1945MOPR(국제혁명투사원조기구) 중앙위원회 근무
  • 1956–1975연방 등급 개인연금 수급자, 회고록 집필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얀손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Янсон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에스토니아 1882–1938 ✕ 대숙청 중 처형

에스토니아 출신 볼셰비키, 강제수용소 체계를 구상한 소련 법무인민위원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 열아홉 살 얀손은 아버지와 함께 겨울궁전 행진에 나섰다가 총격 속에서 아버지가 중상을 입는 장면을 목격했다.

에스토니아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로, 1905년 레벨(탈린) 노동자대표소비에트 의장을 지낸 후 미국 망명 시기 에스토니아 노동자 사회주의연맹을 조직했다. 1920년대 중앙통제위원회 간부로 당 숙청을 주도했으며, 1928년 톨마초프·야고다와 함께 기존 교도소 체계를 OGPU 강제수용소 모델로 전환할 것을 스탈린에게 제안했다. 이후 러시아공화국 법무인민위원, 소련 수상운수인민위원을 지냈으나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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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레벨 노동자대표소비에트 의장
  • 1907–1917에스토니아 노동자 사회주의연맹 서기 (미국)
  • 1921–1923금속노조 중앙위원회 서기
  • 1923–1927중앙통제위원회 서기
  • 1927–1930중앙통제위원회 당콜레기야 서기
  • 1928–1930러시아공화국 법무인민위원
  • 1931–1934소련 수상운수인민위원
  • 1935–1937글라브세브모르푸티 부국장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크레스틴스키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Крестинский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벨라루스 1883–1938 ✕ 처형

책임서기에서 피고석으로 간 초기 볼셰비키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첫날, 크레스틴스키는 피고석에서 일어나 '나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며, 반소비에트 블록의 구성원도 아니었다'고 선언했다. 대숙청기 세 재판 전체에서 법정 자백을 거부한 유일한 순간이었다.

차르 시절 변호사 출신의 볼셰비키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혁명을 이끌고 최초의 정치국원이 되었다. 스베르들로프 사후 1919년부터 2년간 책임서기로서 당을 이끌었으나,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를 지지하며 레닌과 충돌해 실각했다. 이후 소련 최대의 외교무대인 주독 전권대표로 9년간 활약했고, 대숙청기 모스크바 재판에서 유일하게 법정 자백을 거부한 피고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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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22재무인민위원
  • 1919–21책임서기, 정치국원
  • 1938제3차 모스크바 재판 후 처형

마트베이 표도로비치 시키랴토프

Матвей Фёдорович Шкирят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83–1954 ○ 자연사 · 담석증

30년간 당원 명부 위에 놓인 지우개

1948년 1월, 음악가 소환 회의. 즈다노프의 설교가 이어지는 가운데 시키랴토프가 프로코피예프를 향해 주의를 기울이라고 명령했다. 프로코피예프는 대답했다: "나는 나에게 소개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1906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모스크바 재봉노동자 사이에서 지하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레닌의 첫 당원 검증을 집행한 이래 30년간 중앙통제위원회·당통제위원회에서 스탈린기 모든 핵심 숙청의 실무 집행자로 활동했으며(부하린·리코프 기소, 체첸-인구시 지도부 전원 체포, 몰로토프 아내 추방 등) 1952년 당통제위원장 겸 중앙위 상임위원에 올랐으나 스탈린 사후 한 달 만에 상임위에서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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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RSDLP 입당, 모스크바 재봉노동자 사이에서 지하활동
  • 1910–14체포·볼로그다 유형 → 귀환 후 모스크바 볼셰비키 지하조직 복귀
  • 1917모스크바 병사대표 소비에트·툴라 소비에트 집행위원,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8–20전러시아 재봉노조 중앙위 서기, 모스크바 시당위원
  • 1921–34중앙통제위원회(CCC) 위원 → 상임위원, 당 검증·숙청 실무 총괄
  • 1934–39당통제위원회 당콜레기야 서기
  • 1939–52당통제위원회 부위원장, 중앙위원
  • 1952–54당통제위원회 위원장, 중앙위 상임위원 (1953.3 제외)

그리고리 예레메예비치 예브도키모프

Григорий Еремеевич Евдоким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84–1936 ✕ 처형

지노비예프의 오른팔로 페트로그라드를 구했고, 스탈린의 쇼재판에서 사라졌다

1919년 페트로그라드 공방전. 세르주: 「백발에 우렁찬 목소리, 술 좋아하는 늙은 뱃사람. 도시는 주로 그 덕에 구원되었다」

15세에 하천 선원이 되어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9년 제7군 정치부장으로 유데니치의 페트로그라드 공세를 막아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고, 빅토르 세르주는 「도시를 구한 것은 주로 예브도키모프였다」고 기록했다. 내전 후 페트로그라드 노조 의장과 소비에트 부의장을 거쳐 1925년 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로 지노비예프의 최측근이자 '신반대파' 지도자가 되었다. 1926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으나 곧 통합반대파에 가담해 모든 직위를 잃고 출당됐다. 복당 후 낙농업 관료로 전락했다가 1936년 제1차 모스크바 전시재판에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함께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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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LP 입당, 볼셰비키
  • 1908–16수차례 체포와 유형, 시베리아 탈출
  • 1917페트로그라드 적위대 조직, 제헌의회 의원
  • 1919제7군 정치부장, 페트로그라드 방어
  • 1922–25페트로그라드 노조평의회 의장, 소비에트 부의장
  • 1925–26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 '신반대파'
  • 1926.1–4중앙위 서기 겸 조직국원
  • 1927통합반대파, 중앙위 제명, 출당
  • 1929–34낙농공업 총관리국장 등 경제 관료
  • 1936.8제1차 모스크바 전시재판, 사형

야코프 미하일로비치 스베르들로프

Яков Михайлович Свердл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85–1919 ○ 병사

혁명 직후 당과 국가를 연결한 조직가

1918년 1월 5일 제헌의회 개회 순간, 사회자로 나선 원로 사회혁명당원을 단상에서 밀어내고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의 이름으로 직접 개회를 선언했다.

중앙위 서기국 의장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겸하며 혁명 직후 볼셰비키 권력의 실무를 총괄했다. 레닌의 정치 결정을 표결·인사·기관 운영으로 전환한 독보적 조직가로, 10월 봉기 실무 지휘, 제헌의회 해산, 최초 소비에트 헌법 제정, 코민테른 창립을 주관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비준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12년 넘는 유형과 감옥 생활로 쌓은 당내 인맥과 현장 감각이 그의 무기였다. 34세에 스페인 독감으로 급서하자 레닌은 '당 전체의 기둥이 무너졌다'고 썼으며, 그의 공백은 훗날 스탈린의 권력 집중을 앞당긴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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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중앙위 서기, 10월 봉기 조직 실무
  • 1917–19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18–19중앙위 서기국 의장

이반 이바노비치 코롯코프

Иван Иванович Коротк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85–1949 ○ 자연사

당 통제 기관에서 미술관으로 간 볼셰비키

11세에 마을을 떠나 그림 도제가 되었고, 16세에 성상화가 밑에서 이콘을 그렸다. 그로부터 20년 뒤, 같은 손으로 당 중앙기구의 간부 명단을 쥐었다.

블라디미르 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도제로 나가 성상화가 기술을 익혔고, 1905년 20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 후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지역 당 조직을 이끌었고, 1923년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에 올라 스탈린의 당 기구 강화 초기 단계에서 간부 임명 라인을 관리했으며, 오르그뷰로 후보위원도 지냈다. 이후 15년간 중앙통제위원회와 당통제위원회에서 근무하며 대숙청기의 당 기구 숙청 작업에도 관여했고, 1939년 한동안 직위에서 배제된 뒤 푸시킨 미술관 관장으로 자리를 옮겨 1944년 은퇴할 때까지 박물관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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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RSDRP 입당,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1905-07년 혁명 참여
  • 1913–16체포 및 유형
  • 1917야로슬라블 RSDRP(b) 위원회 위원
  • 1918–21테이코보 현 당위원장·집행위원장,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현 집행위 부위원장, 이후 현 당위 서기
  • 1922–24RKP(b) 중앙위원
  • 1923–24중앙위 조직지도부장, 오르그뷰로 후보위원
  • 1924–34중앙통제위원회 간부위원
  • 1934–39당통제위원회 위원
  • 1939–44푸시킨 국립미술관 관장
  • 1944은퇴

세르게이 미로노비치 키로프

Сергей Миронович Кир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86–1934 ✕ 암살

그의 죽음이 대숙청의 총성이 되었다

1926년 레닌그라드 부임 첫해, 키로프는 공장을 돌며 180회 넘는 노동자 집회 연설을 했다. 연단 없이 작업복 차림으로 노동자들과 직접 호흡한 유일한 정치국원이었다.

레닌그라드 당을 이끌며 공업화를 진두지휘한 정치국원. 공장 연설로 노동자의 신임을 얻었으나, 1934년 12월 스몰니에서 총격당했다. 그의 죽음은 '12월 1일법'과 함께 대숙청의 신호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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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7블라디캅카스에서 언론·지하활동
  • 1921–26아제르바이잔 당 제1서기, 바쿠 유전 재건
  • 1926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 지노비예프의 기반 인수
  • 1930정치국원
  • 1934.12.1스몰니에서 니콜라예프에게 피살, 같은 날 신속 처형령 발효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우글라노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Углан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86–1937 ✕ 처형

모스크바를 쥔 우파 반대파의 조직적 기반

1928년 10월 19일, 스탈린이 직접 연단에 오른 모스크바 당 조직 합동 총회. 우글라노프가 4년간 일궈온 모스크바 조직은 그날 중앙위의 '우경 위험' 규탄을 전폭 지지했고, 그는 한 달 뒤 제1서기직에서 물러났다.

농민 출신 볼셰비키로, 1924년부터 1928년까지 모스크바 당 조직을 이끌며 당내 최고 실력자 중 하나로 부상했다.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 당 기구를 장악했고, 류틴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좌익 반대파를 분쇄하는 데 앞장섰다. 1928년 이후 강제 집단화와 급속한 공업화에 반대하는 '우익 반대파'의 핵심 지도자로 부하린·리코프와 함께 맞섰으며, 1929년 당 지도부의 경제정책 오류 인정 거부를 공개 비판했다. 같은 해 입장을 철회했으나 1932년 류틴 사건으로 출당되었다가 복권, 1936년 재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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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RSDLP 입당, 볼셰비키
  • 1914–16차르군 복무, 부상 후 페트로그라드 귀환
  • 19172월·10월 혁명 참여,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원
  • 1921–22페트로그라드 현당 책임서기, 크론시타트 진압 참여
  • 1922–24니즈니노브고로드 현당 책임서기
  • 1924–28모스크바 현당 제1서기, 중앙위 서기
  • 1926–29정치국 후보위원
  • 1928–30소련 노동인민위원
  • 1932류틴 사건으로 출당
  • 1937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당일 총살

파벨 페트로비치 포스티셰프

Павел Петрович Постыше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87–1939 ✕ 처형

'우크라이나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불린 스탈린의 공포 특사, 결국 자신도 총살되다

1935년 12월 28일 『프라우다』 기고: "새해를 맞아 아이들에게 좋은 욜카를 만들어 줍시다!" 이 한 줄로 금지된 전나무가 돌아왔고, 데드 모로스와 함께하는 어린이 새해 축제는 소비에트의 가장 사랑받는 전통이 되었다.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직공의 아들로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기 시베리아·극동에서 활동한 후 1932년 말 대기근 와중 곡물징발 특사로 우크라이나에 파견되었다. 1933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가 되어 코시오르를 능가하는 실권으로 집단화 반대파를 숙청하고 지식인층을 탄압, '우크라이나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불렸다. 1935년 프라우다 기고로 새해 트리 전통을 부활시켰다. 1937년 쿠이비셰프 주당 제1서기로 좌천되어 대숙청을 집행했으나 이듬해 체포, 1939년 총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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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7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와 이르쿠츠크에서 지하 볼셰비키 활동; 1905년 이바노보 파업 참가, 여러 차례 체포·유형
  • 1917–1922이르쿠츠크 소비에트 부의장, 혁명재판소 의장, 중앙시베리아 위원, 극동공화국 군사위원
  • 1924–1930키예프·하리코프 당위원회 서기,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30–1933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조직지도부장
  • 1932.11–12대기근 와중 곡물징발 특별전권대표로 볼가하류·우크라이나 파견
  • 1933–1937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 코시오르를 능가하는 실권으로 대숙청·러시아화 주도, 당원 10만 명 숙청
  • 1934–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
  • 1937–1939쿠이비셰프 주당 제1서기로 좌천, 1938년 2월 체포, 1939년 2월 26일 총살

이반 파블로비치 톱스투하

Иван Павлович Товстуха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우크라이나 1889–1935 ○ 폐결핵 · 사망

스탈린의 첫 비서, 그 기록 보관자이자 첫 전기 작가

바자노프의 회고: 톱스투하는 당대회 투표용지의 필적을 하나하나 대조하며 누가 스탈린의 이름을 지웠는지 식별했다. 「그가 가진 건 반쪽짜리 폐뿐이었지만, 스탈린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스탈린의 첫 개인비서(1918~1935)이자 중앙위 비밀부장(1926~1930)으로, 스탈린 개인 사무국을 운영하고 레닌연구소 기록보관소를 통제한 인물이다. 1922년 백과사전 「그라나트」에 스탈린의 첫 공식 전기를 집필했으며, 레닌 전집 초판 편찬 작업을 주도했다. 망명 시절 프랑스 사회당에 가입해 노동자로 일했고, 귀국 후 민족인민위원부 서기로 스탈린과 인연을 맺었다. 그의 기록 관리(특히 레닌과 트로츠키 관련 문서의 선택적 접근)는 스탈린 진영의 이념적 정비에 결정적 도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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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09체르니고프 사회민주주의 조직에서 혁명운동 시작
  • 1909–11불온서적 소지로 체포, 시베리아 유형
  • 1912–17망명, 오스트리아·프랑스에서 노동; 프랑스 사회당 및 파리 RSDLP(b) 지부 가입
  • 1917–18적위대 중앙참모부 감찰부 서기
  • 1918–21민족인민위원부 서기·간부, 스탈린과 결합
  • 1921–24중앙위 기구 책임일꾼, 스탈린 개인 사무국 조직·운영
  • 1922백과사전 「그라나트」에 스탈린 최초 공식 전기 집필
  • 1924–26레닌연구소 부소장, 레닌 전집 초판 편찬 참여
  • 1926–30중앙위 비밀부장 겸 서기장 제1보좌관
  • 1930–31레닌연구소 부소장,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 편집위원
  • 1931–35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부소장 겸 기록보관소장
  • 1934–35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후보위원,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스타니스와프 비켄티예비치 코시오르

Станислав Викентьевич Косиор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폴란드 1889–1939 ✕ 처형

기근을 부인한 우크라이나 당 수장, 스탈린의 총에 쓰러지다

1932년 4월, 우크라이나 전역에 기근이 번지던 때 코시오르는 스탈린에게 전보했다: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있다는 이야기는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굶주리는 마을들은 현지의 무능 탓일 뿐입니다."

폴란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 돈바스와 키예프의 지하운동을 거쳐 우크라이나 공산당 창설에 참여했다. 1928년부터 1938년까지 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로서 소련 내 소수민족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최고 지도부에 올라 집단화와 공업화를 진두지휘했으며, 1932~33년 대기근 당시 그 존재를 부인하고 곡물 징발을 지속했다. 1930년 정치국 정위원. 대숙청 말기인 1938년 5월 '폴란드 군사조직'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1939년 2월 총살당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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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돈바스 지하 볼셰비키 활동, 여러 차례 체포·유형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9–192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26–1928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조직국원
  • 1928–193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총서기 → 제1서기
  • 1930–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8.5'폴란드 군사조직' 혐의로 체포
  • 1939.2.26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당일 집행

알렉산드라 바실리예브나 아르튜히나

Александра Васильевна Артюхина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89–1969 ○ 자연사

제노트델을 전성기로 이끈 유일한 여성 조직국·서기국원

1927년 국제회의 연단에서 "우리 경제학자들조차 여성 노동을 덜 가치 있는 것으로 본다"며 당내 편견을 직시했다.

방직 노동자 출신 혁명가로서 제노트델(여성노동부)을 전성기로 이끌며 여성의 산업 진출을 추진했다. 유일한 여성 조직국원·서기국 후보위원(1926~1930)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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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4상트페테르부르크 방직·금속 노동자, 노조 조직, 프라우다에 '금속노동자 슈라' 필명 기고
  • 1914–1917체포되어 유형
  • 1917–1924비시니볼로초크 당위원, 노동위원, 트베리현 여성부장, 프롤레타르카 공장위원장
  • 1924–1929당 중앙위 여성노동부(제노트델) 부장, 잡지 《라보트니차》 편집장
  • 1926–1930중앙위원, 조직국 위원, 서기국 후보위원
  • 1930–1934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4–1938섬유(면방직)노동자노조 중앙위원장
  • 1938–1951모스크바 방직 공장장

마르테먄 니키티치 류틴

Мартемьян Никитич Рютин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90–1937 ✕ 처형

「류틴 강령」으로 스탈린 독재에 마지막 당내 저항을 조직한 우익 반대파

1932년 9월 OGPU 심문에서: "내 뒤에는 어떤 배후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나 자신이 이 조직의 주동자였고, 그 선두에 섰으며, 나 혼자 강령과 호소문 전부를 썼다." — 동지들을 감싸며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지려 한 순간.

이르쿠츠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 하얼빈 소비에트 의장과 여러 지역 당서기를 역임하고 1927년 중앙위원 후보가 되었다. 강제 집단화를 목격한 후 우익 반대로 전환, 1932년 200쪽 분량의 「류틴 강령」을 집필해 스탈린 개인독재 타도를 호소했다. 이는 당내 마지막 조직적 반대운동이었다. 1932년 체포되어 1937년 25분 재판 끝에 사형 선고를 받고 당일 총살되었다. 1988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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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7멘셰비키 입당, 하얼빈 소비에트 의장
  • 1918–21이르쿠츠크 군관구 사령관, 이르쿠츠크 당위원장
  • 1923–24다게스탄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5–28크라스나야프레스냐 구당서기, 중앙위원 후보
  • 1928–30『크라스나야 즈베즈다』 부편집장, 소유즈키노 의장
  • 1930당 제명, 체포 후 석방
  • 1932「류틴 강령」 집필,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결성
  • 1937군사재판 25분 만에 사형, 당일 총살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포스크료비셰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Поскрёбыше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91–1965 ○ 자연사

스탈린의 그림자: 25년간 정보를 걸러내고 헌법과 당사를 쓴 비서실장

딸 나탈리야의 증언: 「아버지는 거의 24시간 일하셨다. 새벽 5시에 퇴근해서 오전 10-11시에 다시 출근하셨다. 사람들은 그를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 불렀다. 어떤 질문에도 답을 주셨다.」

스탈린의 개인비서로 25년간 특별섹터를 이끌며 모든 정보를 여과했다. 1936년 헌법과 『당사 소사』를 집필했으며, 아내가 숙청되는 와중에도 자리를 지켰다. 1952년 베리야의 음모로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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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펠트셰르 → 투르케스탄군 정치부 → 즐라토우스트 현 혁명위 의장
  • 1922–1928중앙위 업무관리국장 → 서기장(스탈린) 보좌관
  • 1928–1934스탈린 개인비서, 중앙위 비밀부 부장 → 비밀부장
  • 1934–1952중앙위 특별섹터장 — 25년간 스탈린 비서실 총괄
  • 1939제18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 최고회의 대의원
  • 1941–1945전쟁기 스탈린 비서실에서 군사작전·얄타·포츠담 회담 실무
  • 1952–1953중앙위 상임위원회·국장단 서기 → 베리야 음모로 해임

마리야 아키모브나 볼로디체바

Мария Акимовна Володичева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91–1973 ○ 자연사

레닌의 업무서기, 마지막 구술의 기록자

1963년, 72세의 볼로디체바는 유리 카랴킨에게 말했다: "레닌 동지를 해독하는 것은 아주 어려웠고, 스탈린 동지는 아주 쉬웠습니다…"

레닌의 업무서기(1918~1924)로, 1922년 12월 30~31일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를 포함한 마지막 구술들을 받아썼다. 1923년 3월 5일 레닌이 트로츠키에게 그루지야 사건 방어를 요청한 편지를 받아쓰고 전달했으며, 유언 초기 필사본을 스탈린의 명령으로 폐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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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VII(4월) 전러시아 당대회 서기국 근무, VI 당대회 속기사
  • 1917.11–1918.07인민위원회의(Sovnarkom) 출판국 서기
  • 1918–1924인민위원회의 및 노동국방회의(STO) 타자수·속기사, 서기 보좌관
  • 1922.12–1923.03레닌의 마지막 논문·편지 구술을 받아씀: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 등
  • 1924–1928V.I. 레닌 연구소(후일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연구원

멘델 마르코비치 하타예비치

Мендель Маркович Хатаевич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93–1937 ✕ 총살

곡물 징발이 씨 뿌릴 사람마저 없앨 것이라고 몰로토프에게 경고한 당 서기, 4년 뒤 총살되다

"곧 씨 뿌리고 수확할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1932년 11월, 하타예비치가 몰로토프에게. 당일 답신: "진정한 볼셰비키는 국가의 필요를 먼저 놓아야 합니다."

멘델 하타예비치는 1893년 고멜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치과기공사로 일하다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32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로서 11월 몰로토프에게 "콜호스의 최소한의 필요를 고려하지 않으면 곧 씨 뿌리고 수확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서한으로 경고했으나, 몰로토프는 "진정한 볼셰비키는 국가의 필요를 먼저 놓아야 한다"고 답했다. 1933년부터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 제1서기로 좌천된 뒤에는 오히려 대기근의 집행자가 되어 기아와 식인 보도를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1937년 대숙청 와중 체포되어 반혁명 테러조직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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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7고멜에서 지하 볼셰비키 활동, 여러 차례 체포, 예니세이현 유형, 1917년 3월 사면
  • 1917–1921고멜·사마라 당 간부; 체코군에 포로로 잡혀 고문으로 오른손 마비; 서부전선 제21소총사단 정치위원
  • 1921–1925고멜현당 책임비서(1921–23), 오데사현당 책임비서(1923–24),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조직배치부 부장(1924–25)
  • 1925–1928타타르 주당 책임비서
  • 1928–1932중부볼가 변경당 제1서기: 대규모 집단화 추진, 쿨라크 대량 체포·추방 지휘
  • 1932.10–1933.01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곡물 몰수 지령 공동 서명; 11월 몰로토프에 기근 경고 서한
  • 1933–1937.03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주당 제1서기; 기아와 식인 사례를 스탈린에게 보고하고도 1934년 당대회에서 집단화의 승리를 찬양
  • 1937.03–10재차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9월 체포, 10월 27일 사형선고, 10월 30일 총살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폴론스키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Полонский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93–1937 ✕ 처형 · 복권 1956

볼셰비키 조직부장에서 숙청된 노동조합 간부

1933년 1월 중앙위 조직부장에 임명되어 당 전 간부 배치를 관장했으나, 불과 4년 뒤 자신이 구축한 기구의 수사·처형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토볼스크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전형적인 혁명 세대 간부로, 선원과 전기기사를 거쳐 1917년 모스크바 금속노조 서기로 10월 봉기에 참가했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1930–1933)를 지낸 뒤 1933년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에 임명되어 스탈린의 당 기구에서 간부 배치를 총괄했고, 이후 교통인민위원부 정치총국장과 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 서기를 역임하며 노동조합과 교통 부문 정치통제의 중추로 활약했다. 11년간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를 지냈으나 1937년 체포되어 '우익 반혁명 조직' 혐의로 총살되었고, 흐루쇼프 시기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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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볼셰비키 입당
  • 1913페테르부르크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위원
  • 1917모스크바 금속노조 중앙이사회 서기 · 10월 봉기 참가
  • 1918–1920사단 군정위원 · 남동철도 군정위원 · VTsSPS 남부국 의장
  • 1925–1928로고시스코-시모놉스키 구당위 서기 · 모스크바 당위 제2서기
  • 1930–193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자카프카스 변경위 서기
  • 1933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
  • 1933–1935교통인민위원부 정치총국장 · 부인민위원
  • 1935–1937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서기
  • 1937체신 부인민위원 · 체포

클라브디야 이바노브나 니콜라예바

Клавдия Ивановна Николаева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93–1944 ○ 병사

인쇄공 출신으로 당 중앙위원·노조 지도부에 오른 프롤레타리아 여성혁명가

1918년 제1차 전러시아 여성노동자·농민대회, 레닌이 입장하자 니콜라예바는 일어나 《인터내셔널》을 부르기 시작했고 1,147명의 대의원들이 따라 불렀다.

인쇄공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 1917년 《라보트니차》 편집장, 내전기 페트로그라드 여성부를 이끌었다. 당 중앙위원·오르그뷰로 위원까지 오른 소비에트 체제 최고위 여성 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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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RSDLP(b) 입당, 인쇄노조 활동
  • 1908–15반복적 체포·유배, 혁명 선전 지속
  • 1917《라보트니차》 편집장, 10월혁명 참여
  • 1918–19페트로그라드 여성부·선전부장, 제1차 전러시아 여성대회 의장
  • 1924–26오르그뷰로 위원·서기국 후보위원·제노트델 책임
  • 1930–33중앙위 선동대중부장
  • 1936–44전연방노조중앙평의회 서기
  • 1942영국 파견, 귀환 중 공습 하 부상자 구조

야니스 에두아르도비치 칼른베르진슈

Ян Эдуардович Калнберзинь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라트비아 1893–1986 ○ 자연사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창립자이자 발트 3국 최장기 집권 공화당 제1서기

1939년 라트비아 당국에 체포되어 리가 중앙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1940년 6월 소련군 진주 후 사면으로 석방되자마자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호출되었다. 지하운동가에서 소비에트 공화국 창립 지도자로의 전환은 불과 며칠 사이에 이루어졌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1940년부터 1959년까지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창립과 제도화를 주도했다.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7년 입당, 붉은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내전에 참전했으며 이후 라트비아 지하운동과 모스크바 유학을 오갔다. 1940년 소련군 진주 후 리가 형무소에서 석방되어 곧바로 공화국 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고, 전후 집단화와 공업화를 통해 라트비아의 소비에트 체제 편입을 총괄했다. 1957년 CPSU 정치국 후보위원에 올랐으나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때 불충분한 대응을 이유로 제1서기에서 물러났다. 이후 1970년까지 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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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라트비아 사회민주당(볼셰비키) 입당
  • 1919–1920적군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남부전선에서 내전 참전
  • 1923–1933서방 소수민족 공산대학 및 붉은교수양성소에서 수학
  • 1925–1939라트비아 내 지하 공산주의 운동 활동, 수차례 체포·투옥
  • 1940–1959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40–1951라트비아 공산당 리가 시위원회 제1서기 (겸임)
  • 1952–197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57–1961CPSU 중앙위 정치국(간부회) 후보위원
  • 1959–1970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 겸임

라자르 모이세예비치 카가노비치

Лазарь Моисеевич Каганович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93–1991 ↓ 실각 1957

스탈린의 조직부 사람

1934년 17차 당대회 개표위원장. 스탈린 반대표 약 290장을 삭제하고, 키로프(단 3표) 대신 스탈린이 최소 반대표를 얻은 것처럼 조작했다. 스탈린의 한마디 — '중요한 건 누가 투표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개표하느냐다.'

가난한 유대계 제화공 출신으로 1911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스탈린의 가장 오랜 측근으로 30년간 권력 핵심에 머물렀다. 조직부·서기국에서 임명과 배치를 관리하며 스탈린의 지지자들을 당 기구 곳곳에 심었고, 1930년대 초에는 사실상 2인자로 모스크바 재건과 지하철 건설을 지휘했다. 집단화, 대숙청, 우크라이나 당 통제까지 스탈린 체제의 강경 집행자로 모든 핵심 사업에 참여했으며, 1957년 반당 그룹으로 실각한 뒤 1991년 97세로 사망할 때까지 소련 체제의 처음과 끝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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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24조직지도부, 임명과 배치 실무
  • 1928–39중앙위 서기, 스탈린의 당 기구 장악 지원
  • 1957반당 그룹으로 실각

이오시프 미하일로비치 바레이키스

Иосиф Михайлович Варейкис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리투아니아 1894–1938 ✕ 처형 · 복권 1956

집단화와 대숙청의 지역당 보스, 스탈린에게 '간첩이 너무 많다'는 핀잔을 듣다

1937년 9월, 극동지방에서 철도 노동자만 500명을 간첩으로 색출해 총살했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하자, 스탈린은 이렇게 물었다. '바레이키스 동지, 당신 구역에는 왜 그렇게 간첩이 많은 겁니까?'

리투아니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하며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기에는 심비르스크 방어를 지휘하고 좌파 에스에르 봉기 진압에 참여했으며, 1920년대 중앙위 출판부장을 거쳐 중앙검은토지주·보로네시·스탈린그라드·극동지방의 제1서기를 차례로 맡았다. 집단화 과정에서 오스트로고시스크 봉기를 직접 진압하고, 트로이카를 통해 수만 명을 유죄판결했다. 1937년 극동지방에서 한인 17만 명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집행하고 수백 명의 '일본 간첩'을 적발했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했으나, 그해 10월 자신이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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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8.01–1918.06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공화국 인민위원 · 당 지역위 서기
  • 1918.06–1920.08심비르스크 현당위원회 위원장
  • 1920–1921비텝스크 현집행위원회 위원장 · 식량인민위원
  • 1921–1923바쿠 소비에트 부의장
  • 1923.08–1924.02키예프 현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4.02–1924.10투르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책임서기
  • 1924–1930전연방공산당 중앙위 후보위원
  • 1924.10–1926.01중앙위 출판부장 · 『몰로다야 그바르디야』 편집장
  • 1926.01–1928.04사라토프 현당위원회 서기
  • 1928.08–1934.06중앙검은토지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30–1937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
  • 1934.06–1935.03보로네시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35.03–1936.12스탈린그라드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
  • 1937.01–1937.10극동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
  • 1937.10체포
  • 1938.07.29사형선고 후 총살 (코무나르카)

보리스 페트로비치 셰볼다예프

Борис Петрович Шеболдае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95–1937 ✕ 처형

대테러 전야에 무너진 아조프-흑해 변경주의 당 주인

1914년 입당한 고참 볼셰비키로, 니즈니볼가와 북캅카스 변경주 당 제1서기로서 집단화와 곡물 징발을 지휘했고 1932년 쿠반의 '검은 명부' 탄압에 그 이름이 남았다. 1934년부터 아조프-흑해 변경주 제1서기를 지냈으나, 1936년 여름 예브도키모프가 '셰볼다예프파' 숙청을 위해 파견되고 류시코프가 지역 NKVD를 맡으면서 포위되었다. 1937년 2~3월 중앙위원회 총회 보고로 격하되어 쿠르스크주로 밀려났고, 그해 6월 체포되어 10월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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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볼셰비키 입당
  • 1918–1920국내전기 캅카스에서 정치 활동
  • 1928–1931니즈니볼가 변경주 당 제1서기
  • 1931–1934북캅카스 변경주 당 제1서기
  • 1934–1937아조프-흑해 변경주 당 제1서기
  • 1937쿠르스크주로 격하, 6월 체포, 10월 총살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안드레예프

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Андрее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벨라루스 1895–1971 ○ 자연사

20년간 정치국에 앉아 있던 조직의 사나이, 가장 자주 지방을 숙청하러 파견된 서기

1917년 4월 3일 밤, 레닌의 귀국을 맞은 핀란드역 집회에서 불과 서너 걸음 떨어진 자리에 앉아 이렇게 적었다: 「지하 볼셰비키 시절 우리가 얼마나 레닌을 보고 듣고 싶어 했던가. 마침내 그 꿈이 이루어졌다.」

스탈린 시대 내내 당 기구의 중추를 이룬 조직가. 13세에 모스크바 식당의 주방 소년으로 일을 시작했고, 노동자 야학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접한 뒤 1914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정치국원(1932–1952)을 20년간 지내며 조직국을 실질적으로 운영했고, 중앙위 서기로서 대숙청 시기 지방 당 조직을 숙청하기 위해 가장 빈번히 파견된 인물이었다. 철도·농업 인민위원을 겸임하며 경제 부처도 두루 거쳤고, 전시에는 군수 수송과 부상병 구호를 총괄했으며, 1952년 청각 장애를 이유로 정치국에서 물러난 뒤에도 1962년까지 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 일원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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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볼셰비키 입당, 페트로그라드 위원회에서 활동
  • 191710월 혁명 참여,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
  • 1920–22전러시아 중앙노조평의회 서기,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부하린 노선 지지
  • 1922–27철도노조 중앙위원장
  • 1924–25중앙위원회 서기 (1기)
  • 1928–30북캅카스 지방당 제1서기, 집단화 추진
  • 1930–31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겸 노농감독인민위원, 집단화 특별위 주재
  • 1931–35교통인민위원, 철도 근대화 추진
  • 1932–52정치국 정위원 (1926년부터 후보위원), 20년간 최고 지도부
  • 1935–46중앙위 서기 (2기), 조직국 실질적 운영자 — 대숙청 시기 가장 자주 지방에 파견되어 당 조직을 교체
  • 1938–46연방회의(소비에트) 의장
  • 1939–52당 통제위원회 의장, 예조프의 뒤를 이어 당 규율 총괄
  • 1943–46농업인민위원, 전후 복구 계획 참여
  • 1946–53소비에트 각료회의 부의장, 농업·콜호즈 담당
  • 1953–62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 위원
  • 1957–62소중우호협회 회장

표트르 이바노비치 스모로딘

Пётр Иванович Смородин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비에트 러시아 1897–1939 ✕ 총살 · 1954년 복권

콤소몰의 대중적 기반을 다지고 '배움'을 기치로 내건 노동자 출신 제1서기

제5차 콤소몰 대회에서 한 대의원이 스모로딘을 "노동청년의 지도자"로 전국에 선전하자고 제안하자, 그는 단상에서 이렇게 쏘아붙였다. "무슨 까닭에 나를 성상(이콘)으로 만들려는 거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4세에 페트로그라드 외과기구 공장의 견습공이 되었고, 1917년 5월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0월 무장봉기에 직접 참가했다. 페트로그라드 사회주의 노동청년동맹(SSRM) 창설을 주도했고,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서 NEP 시기 청년 조직의 대중적 기반을 다지고 '배움'을 콤소몰의 핵심 과제로 내세웠다. 이후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 당 지역위원회 서기를 역임했고,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가담했으나 1938년 '인민의 적'으로 체포되어 1939년 총살당했으며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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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7페트로그라드 외과기구 공장 견습공·노동자
  • 1917페트로그라드 사회주의 노동청년동맹(SSRM) 공동 창설자
  • 1920–1921페트로그라드 콤소몰 시위원회 서기
  • 1921–1924콤소몰(РКСМ)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28–1937레닌그라드 바실레오스트롭스키·비보르크·모스크바 구당위원회 서기
  • 1937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2서기
  • 1937–1938스탈린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38스탈린그라드 시당위원회 제1서기

아르비트 야노비치 펠셰

Арвид Янович Пельше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99–1983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의 당 규율 수호자, 라트비아 출신 정치국원

1918년 모스크바 레온티옙스키 골목에서 체카 청사 폭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시 체카 직원이었던 펠셰는 현장에서 부상자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 혁명 초기 비밀경찰 본부를 뒤흔든 이 폭발 사건은 그가 이후 소비에트 권력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경로에 자리한 초기 위기 중 하나였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브레즈네프 시대 정치국원 겸 당통제위원장으로 17년간 당 규율을 총괄했다. 비러시아계로 소련 최고지도부에 오른 드문 인물이며,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공화국 산업화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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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라트비아 사회민주당(볼셰비키) 입당
  • 19176차 당대회 대의원, 10월혁명 참가
  • 1918모스크바 체카 직원
  • 1919–1929적군 및 해군에서 정치·교육 업무
  • 1941–1959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담당 서기
  • 1959–1966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66–1983정치국 정위원 겸 당통제위원회 의장

보리스 게오르기예비치 바자노프

Борис Георгиевич Бажан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러시아 1900–1982 ○ 망명 중 자연사

스탈린 비서실에서 유일하게 망명한 정치국 기록자

1923년 10월 26일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레닌트로츠키에게 자신의 후계자 역할을 제안했고, 트로츠키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 장면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정치국 서기 보리스 바자노프였다.

볼셰비키 당의 기술서기로,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스탈린의 개인 보좌관 겸 정치국 서기를 지내며 모든 정치국 회의의 기록을 담당했다. 레닌 사후 권력 투쟁이 한창이던 시기 정치국의 내부 작동 방식을 직접 목격했으며, 1928년 소련을 탈출한 후 파리에서 회고록을 출간해 스탈린 체제의 의사 결정 구조와 권력 장악 과정을 서방에 최초로 폭로했다. 스탈린의 서기국에서 망명한 유일한 인물로, 그의 회고록은 초기 소비에트 권력의 내막을 전하는 핵심 사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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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0–1922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 화학 전공 (중퇴)
  • 1922중앙위 조직지도부 근무, 카가노비치 보좌
  • 1923중앙위원회 조직국 서기
  • 1923–1925스탈린 개인보좌관 · 정치국 서기 — 모든 정치국 회의 기록
  • 1926–1927『재정신문』 편집자, 재무인민위원부 및 체육최고위원회 근무
  • 19281월 1일 소련 탈출 — 이란 · 인도 경유 프랑스 망명
  • 1930–1980회고록 『스탈린의 전 비서의 회상』 출간 및 확대판 간행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차플린

Николай Павлович Чаплин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비에트 러시아 1902–1938 ✕ 처형 · 1955년 복권

콤소몰을 당의 청년 훈련 기관으로 만든 소년 정치위원

콤소몰 총서기에서 물러난 직후, 그는 가짜 이름으로 원양 화물선 갑판 선원이 되어 독일·영국·벨기에·포르투갈·터키를 돌았다. 함께 갑판을 닦던 선원들은 그가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인 줄 몰랐다.

농촌 사제의 아들로 태어나 열여섯에 스몰렌스크 학교에 청년 공산주의자 조직을 세웠다. 1922년 전연방 피오네르 조직의 초대 의장이 되어 소비에트 아동·청소년 대중운동의 틀을 놓았고,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콤소몰 중앙위원회 총서기로서 청년 농민학교, 공장견습학교(FZU), 정치교육 체계를 통해 콤소몰을 당의 간부 양성 기구로 전환시켰다. 청년의 교양과 지식을 강조한 그의 노선은 크룹스카야루나차르스키의 지지를 받았다. 콤소몰 지도부를 떠난 뒤 상선 선원으로 위장해 유럽을 여행했고, 이후 트란스캅카스 당 기관과 철도 정치부에서 일했으며 1936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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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스몰렌스크 학교 청년 공산주의자 조직 결성
  • 1919스몰렌스크 군·시 콤소몰 위원회 의장
  • 1920–1921튜멘 현·스몰렌스크 현 콤소몰 위원회 서기
  • 1921–1922콤소몰 중앙위원회 정치교육부장
  • 1922전연방 피오네르 조직 중앙국 초대 의장
  • 1922–1924트란스캅카스 지역 콤소몰 위원회 서기
  • 1924–1928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총서기
  • 1924–1934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24–1930전연방 공산당 조직국 후보위원
  • 1930–1931트란스캅카스 지역 당위원회 제2서기
  • 1931–1933중앙소비자조합 간부회 위원·전연방급식조합 의장
  • 1933–1937무르만스크·키로프 철도 정치부장
  • 1937남동철도 관리국장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안드리아노프

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Андриан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02–1978 ○ 자연사

전시 스베르들롭스크를 이끌고 숙청된 레닌그라드를 재건한 스탈린 시대의 지역 당 보스

1942년,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원회는 「베르흐-이세츠키 제철소에서 전채요리와 술이 곁들여진 야회를 개최한 건에 대하여」라는 결의를 채택했다. 공장 간부들의 연회를 규탄한 이 결의는 안드리아노프의 강경한 통치 스타일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바실리 안드리아노프는 스탈린 시대 후기 소련의 주요 지역당 지도자로,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1939~1946)와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1949~1953)를 지냈다. 전시 스베르들롭스크에서 신타길 제철소와 스레드네우랄스크 제련소 건설을 진두지휘하고 방산 생산을 총괄하여 네 개의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 후 말렌코프의 추천으로 레닌그라드에 파견되어 대규모 당·국가 기구 개편을 주도했고, 1952년 10월 스탈린에 의해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3월 간부회에서 제외되고 곧 레닌그라드 당직에서도 해임되었으며, 국가통제부 차관을 거쳐 1956년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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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5붉은군대 복무
  • 1926볼셰비키당 입당
  • 1937–1938코브로프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38스탈린그라드 주당위원회 제2서기
  • 1939–1946스베르들롭스크 주·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46–1952당 중앙위원회 조직국 위원
  • 1949–1953레닌그라드 주·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52–1953당 중앙위원회 간부회 위원
  • 1953–1956소련 국가통제부 차관

판텔레이몬 콘드라티예비치 포노마렌코

Пантелеймон Кондратьевич Пономаренко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02–1984 ○ 자연사

스탈린이 신임한 유격대 총사령관, 후계 문턱에서 밀려나다

1941년 12월, 스탈린은 포노마렌코를 불러들여 여러 시간 면담한 끝에 전 유격대를 총괄할 중앙본부 설립안을 직접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독일군 후방을 향한 '철도전쟁'의 씨앗이 그날 뿌려졌다.

스탈린이 신임한 유격대 지휘관으로 '철도전쟁'을 기획해 독일군 후방을 마비시켰다. 1952년 간부국에 올라 후계자로 거론됐으나, 스탈린 사후 실권을 잃고 외교관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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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7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 1939년 서부 벨라루스 병합 관리
  • 1942–1944중앙유격대본부장, '철도전쟁'·'콘체르트' 작전 기획·지휘
  • 1944–1948벨라루스 인민위원회의·각료회의 의장
  • 1948–1953중앙위 서기, 조달장관, 당 간부국원 — 스탈린 말기 급부상
  • 1953–1954소련 초대 문화장관
  • 1954–1955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
  • 1955–1962폴란드·인도·네팔·네덜란드 주재 대사
  • 1965–1978중앙위 부설 사회과학연구소 교수

게오르기 막시밀리아노비치 말렌코프

Георгий Максимилианович Маленк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02–1988 ↓ 실각 1957

패자가 죽지 않게 된 시대의 첫 패자

19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 연단에 선 것은 스탈린이 아니었다. 중앙위원회 사업보고를 한 사람은 말렌코프였다. 홀은 술렁였고, 누구나 신호를 읽었다.

스탈린의 서류를 관리하던 후계 서열 1위. 스탈린 사후 총리가 되어 소비재와 감세를 말한 첫 지도자였지만, 당 기구를 쥔 흐루쇼프에게 밀렸고 1957년 「반당 그룹」으로 몰려 카자흐스탄의 수력발전소 소장으로 좌천되었다. 총살 대신 좌천: 새 규칙의 첫 수혜자로 30년을 더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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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45서기국 간부 인사, 전시 국가방위위원회에서 항공기 생산 총괄
  • 1953.3–55총리, 소비재·감세·「핵전쟁에 승자 없다」 발언
  • 1957「반당 그룹」 주모자로 실각
  • 1957–68카자흐스탄 우스티카메노고르스크 수력발전소장

바실 파블로비치 므자바나제

Васил Павлович Мжаванадзе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그루지야 1902–1988 ○ 실각 1972 · 자연사

19년 집권한 그루지야의 보스, 그림자 경제의 대부

1965년 6월, 므자바나제는 스탈린의 고향 고리에 있는 박물관을 다시 열게 하면서 스탈린의 이 말을 인용했다: "우리 당은 검증된 사람에게만 문이 열리는 요새다."

흐루쇼프가 키예프 군관구에서 알아본 군사정치위원 출신으로, 1953년 베리야 체포 직후 그루지야 당 제1서기로 발탁되어 베리야의 후견망을 일소하고 19년간 공화국을 통치했다. 1957년 정치국 후보위원에 올랐고, 농업-공업 분리 개혁에는 은밀히 저항했으며, 1964년 흐루쇼프 축출 음모를 사전에 통보받은 소수 고위 간부 중 한 명이었다. 스탈린 격하에 제동을 걸어 1965년 고리 박물관을 재개관시켰고, 그의 장기 집권 아래 그루지야는 부패와 지하경제가 번성하는 '그루지야 모델'로 자리잡았다. 1972년 자신이 임명했던 내무장관 셰바르드나제가 수집한 비리 자료로 실각했고, 이후 모스크바에서 연금 생활을 하다 198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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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24공장 노동자
  • 1924–37붉은 군대 복무, 1927년 입당
  • 1937–41군사정치위원,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 1941–45대조국전쟁: 레닌그라드 전선·여러 야전군 군사평의회 위원
  • 1945–53키예프·프리카르파티예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 1953–72그루지야 당 중앙위 제1서기
  • 1957–72CPSU 정치국(상임위) 후보위원
  • 1972.9부패 혐의로 해임, 연금 생활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코사레프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Косаре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03–1939 ✕ 처형

스탈린이 직접 술잔을 부딪히며 '죽이겠다' 속삭인 콤소몰의 젊은 지도자

1938년 크렘린궁 연회에서 스탈린이 갑자기 코사레프와 잔을 부딪치고 포옹한 뒤 입맞춤했다. 박수갈채 속에서 스탈린은 그의 귀에 속삭였다: "배신하면 죽인다." 아내 마리야는 남편의 얼굴이 핏기를 잃고 창백해지는 것을 보았다.

25세에 콤소몰 제1서기가 된 혁명 청년의 얼굴. 스파르타크 스포츠 협회와 소비에트 축구 리그를 창설했으며, 대숙청에서 콤소몰원 14만 명을 숙청했으나 결국 스탈린의 불신으로 체포·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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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콤소몰 창립과 동시 가입, 볼셰비키당 입당
  • 1922–26모스크바 바우만·펜자 주 콤소몰 제1서기
  • 1926지노비예프 지지파 숙청 위해 레닌그라드 파견
  • 1929–38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25세 최연소 지도자
  • 1934당 중앙위원·오르그뷰로 정위원 — 최연소
  • 1936–38콤소몰 대숙청: 141,337명 제명
  • 1938–39베리야가 직접 체포, 로도스의 고문에도 자백 거부, 총살

표트르 세르게예비치 포프코프

Пётр Сергеевич Попк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03–1950 ✕ 처형

레닌그라드 포위전의 실무 지휘자, 레닌그라드 사건의 첫 희생자

1949년 8월 13일,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집무실로 호출된 포프코프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레닌그라드 사건의 시작이었다.

블라디미르 현 출신의 소비에트 당 간부로, 목수 견습생에서 레닌그라드 시·주당 제1서기까지 오른 노동자 출신 당료였다. 1939년부터 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으로서 872일 포위전 내내 식량 공급, 방역, 에너지 수송, '생명의 길' 운영을 지휘하며 도시 방어의 핵심 실무를 맡았다. 전후 배급제 폐지와 도시 재건을 진두지휘했고 1946년 제1서기로 승진해 소련 제2도시 당 조직을 총괄했다. 1949년 1월 주최한 레닌그라드 무역박람회가 말렌코프의 공격을 받으며 '레닌그라드 사건'의 발단이 되었고, 그해 8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체포되어 1950년 처형되었다. 1954년 사법 복권, 1987년 당적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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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6블라디미르 볼로스트 콤소몰 서기
  • 1926–1937목수·연구직, 레닌그라드 공과대학 졸업
  • 1937–1938레닌그라드 레닌스키 구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 1938–1939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제1부의장
  • 1939–1946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 포위전 내내 도시 방어·보급 총괄
  • 1941–1944방어위원회 위원·방공군 군사평의회 위원·방역위원장
  • 1946–1949레닌그라드 주·시당 제1서기,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위원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체포·재판·처형 (1954년 사법 복권, 1987년 당적 복권)

니콜라이 일리치 벨랴예프

Николай Ильич Беляе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03–1966 ↓ 실각 1960 · 자연사

흐루쇼프를 지킨 측근, 테미르타우로 무너지다

1959년 8월, 테미르타우 노동자 봉기의 총성이 멈춘 뒤 벨랴예프는 브레즈네프와 함께 현장에 도착했다. 16명이 사망한 진압의 책임을 두고 브레즈네프는 현지 간부들을 질책했지만, 몇 달 뒤 그 책임은 정작 벨랴예프에게 돌아갔다.

시베리아 바시키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콤소몰 활동가로 당에 입문한 후, 플레하노프 국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서시베리아에서 집단화 사업을 주도하며 당 간부로 성장했다. 알타이 지방 제1서기 시절 전후 복구와 처녀지 개간에서 보여준 성과로 흐루쇼프의 주목을 받아 1955년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다. 1957년 반당 그룹 사태에서 흐루쇼프를 단호히 옹호하여 정치국원으로 승격되었고 곧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으나, 1959년 테미르타우 노동자 봉기의 책임을 지고 1960년 해임되었다. 이후 스타브로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가 같은 해 연금 생활에 들어갔으며, 그의 몰락은 브레즈네프의 첫 고위 인사 숙청 중 하나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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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39서시베리아 협동조합·당 경제사업
  • 1939–43노보시비르스크 식품공업 담당 당서기
  • 1943–55알타이 지방당 제1서기
  • 1955–58중앙위 서기 (농업 담당)
  • 1957–60정치국원 · 카자흐스탄 당 제1서기
  • 1960스타브로폴 지방당 제1서기로 좌천 후 연금

아베르키 보리소비치 아리스토프

Аверкий Борисович Арист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03–1973 ○ 자연사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프레지디움 위원, 낚시를 사랑한 당 조직관리자

아들 세르게이 흐루쇼프의 증언: "아버지가 아베르키 보리소비치 아리스토프에 대해 실망을 표하는 말을 한 번 이상 들었다. 사업 얘기를 꺼내면, 그는 매번 낚시 얘기로 화제를 돌린다."

아스트라한 빈농 카자크 집안 출신으로, 금속공학자에서 당 기구로 진입하여 스탈린 말기 프레지디움 위원과 중앙위 서기에 발탁되었다. 말렌코프 집권 직후 실각했으나 흐루쇼프에 의해 복권되어 1957년 반당 그룹 격파 후 다시 프레지디움에 진입, 러시아공화국 당 조직을 실질적으로 총괄했다. 흐루쇼프가 '랴잔 사건'의 책임을 전가하며 1961년 폴란드 대사로 좌천시켰고, 1964년 흐루쇼프 축출 플레넘에선 '당의 신임을 저버렸다'는 문구를 결의안에 삽입할 것을 정식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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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46스베르들롭스크·케메로보·크라스노야르스크 당 서기
  • 1946–50첼랴빈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50–52크라스노야르스크 변강당위 제1서기
  • 1952–53프레지디움 위원 겸 중앙위 서기, 당·노조·콤소몰 담당
  • 1955–60중앙위 서기 (재임명)
  • 1957–61프레지디움 위원 (재진입), 러시아공화국 당국 부의장
  • 1961–71주폴란드 소련 대사
  • 1971–73주오스트리아 소련 대사

야코프 표도로비치 카푸스틴

Яков Фёдорович Капустин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04–1950 ✕ 처형

레닌그라드 공업을 책임진 2인자, '레닌그라드 사건'의 주요 피고로 처형된 기술관료 출신 당 간부

1937년 말, 키로프 공장 당위원회는 카푸스틴을 '전문적 무능'을 이유로 당에서 제명했다. 노동자들이 작업반장에게 탄원서를 제출해 재심을 요구했고, 결정은 번복되었다.

트베리 현 농민 출신으로 노동자·군 복무를 거쳐 레닌그라드 산업대학을 우등 졸업한 기술관료였다. 1940년 레닌그라드 시당 공업 담당 서기가 되어 포위전 내내 KV 전차·연대포·박격포 생산을 총괄했고, 1945년 제2서기로 승진해 도시 경제 재건을 지휘했다.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체포되어 영국 스파이 혐의가 조작되었고, 이듬해 10월 1일 보즈네센스키·쿠즈네초프·포프코프 등과 함께 레바쇼보에서 총살되었다. 1954년 사법 복권, 1988년 당적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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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8볼호프스트로이 토공·'붉은 푸틸로베츠' 공장 리벳공; 붉은군대 복무, 소대장 보좌관
  • 1928–1934보로실로프 제련공장 정비사·직장; 레닌그라드 산업대학 기계공학 우등 졸업
  • 1935–1938영국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비커스 연수; 키로프 공장 터빈공장 부책임자 (당 제명 후 노동자 탄원으로 복권)
  • 1938–1940키로프 공장 당위 서기 → 키로프 구당 서기
  • 1940–1945레닌그라드 시당 공업 담당 서기; 포위전 중 국방위원회 전권대표·방어위원회 '빅5' 위원
  • 1945–1949레닌그라드 시당 제2서기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체포·재판·처형 (1954년 사법 복권, 1988년 당적 회복)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샤탈린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Шаталин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인 1904–1984 ○ 실각 1955 · 자연사

말렌코프의 간부 책임자: 스탈린 사후 보안기관을 감독하다 흐루쇼프에게 밀려난 당 조직가

1953년 7월, 샤탈린은 내무성 당 활동가 비공개 회의에서 베리야 체포의 당위성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중앙위는 이런 악당의 체포를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속임수를 썼다.”

니콜라이 샤탈린은 스탈린 말기부터 후계 투쟁기까지 당 간부국과 조직부를 실무에서 움직인 인물이다. 1938년 중앙위 기구에 들어가 말렌코프 밑에서 간부국 제1부국장으로 일했고, 1946년 조직국원에 선출되었다.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 직후 중앙위 서기가 되어 내무성(MVD)을 감독하고 베리야 체포 작전에 관여했으며, KGB 창설 과정에서는 말렌코프를 대리해 세로프 임명에 반대했다. 말렌코프가 흐루쇼프에게 패배한 1955년, 샤탈린은 서기직에서 해임되고 프리모리예 지방당 제1서기로 좌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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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3붉은 군대 복무
  • 1923–1929콤소몰 · 소비에트 · 교사 활동 (모스크바주 카시라)
  • 1933–1935국영농장 정치부장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
  • 1935–1938모스크바 국립사범대 대학원 · 강사 · 학장 직무대행
  • 1938–1939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기구: 지도당기관부 지도원 · 부부장
  • 1939–1944중앙위 간부국 제1부국장
  • 1944–1947중앙위 에스토니아·라트비아 담당 국장 겸 간부국 제1부국장
  • 1946–1952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조직국원
  • 1947–1950『파르티나야 지즌』 주필 겸 하바롭스크 지방당 제1서기
  • 1950–1953중앙위 계획재정부장 · 간부배치부장
  • 1953–1955소련 공산당 중앙위 서기 · 내무성 제1차장 (1953년 7월)
  • 1955–1956프리모리예 지방당 제1서기
  • 1956–1958소련 국가통제부 차관
  • 1958–1959소련 각료회의 ·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기구 근무
  • 1960–1984연금생활 · 국가계획위 산하 계획규범연구소 부소장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쿠즈네초프

Алекс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узнец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05–1950 ✕ 처형

전후 당 서기국의 2인자,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숙청되다

1950년 9월 29일 재판에서 형량을 통고받은 뒤: "나는 볼셰비키이며, 내가 받은 판결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로 남을 것이다. 역사가 우리를 정당화할 것이다."

보로비치 출신의 소비에트 당 간부로, 콤소몰 조직가에서 출발해 대숙청기 레닌그라드 제2서기로 급부상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도시 방어를 조직했고, 전후 중앙위 서기 겸 간부국장으로서 즈다노프와 함께 스탈린의 후계 구도를 형성하는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으며,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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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32노브고로드·레닌그라드 지역 콤소몰 조직가
  • 1932–1937레닌그라드 시 당 기구에서 승진, 스몰니·제르진스키 구당 서기
  • 1937–1938레닌그라드 주당 제2서기 — 대숙청기 즈다노프의 부관
  • 1941–1944레닌그라드 포위전: 방어위원회 부의장, 방어시설·식량 위원회 주재, 전선군사평의회 위원
  • 1945–1946레닌그라드 주·시당 제1서기, 즈다노프의 후임
  • 1946–1949중앙위 서기·간부국장·조직국 위원 — 전후 서기국의 실질적 제2인자로 국가보안기관 감독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체포·재판·처형 (1954년 복권)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페고프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Пег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05–1991 ○ 자연사

스탈린 말기 서기국에서 외교로 밀려난 간부 책임자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중 페고프는 인도 외무부를 찾아가 이렇게 선언했다. "소련 함대는 이미 인도양에 있으며, 소련은 제7함대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스탈린 집권 말년에 당 중앙위 서기 겸 상임위 후보위원까지 올랐다가 흐루쇼프 집권 후 외교 일선으로 옮겨간 소련의 당·국가 간부이다. 1952년 10월 스탈린 부재 시 말렌코프·수슬로프와 함께 서기국 회의를 번갈아 주재하는 핵심 3인에 들었으나, 스탈린 사망 직후 상임위와 서기직에서 동시에 밀려났다. 이후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서기로 국가기구 실무를 총괄하다 1956년 이란 대사를 시작으로 알제리·인도 대사를 거쳐 외무차관으로 외교 경력을 마무리했다.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당시 인도 외무부에 미 제7함대 개입을 막겠다고 공개 약속해 소련 해군의 억지력을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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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극동지역당위원회 제3서기, 이후 프리모르스키 조직국 제1서기
  • 1939–1947프리모르스키 주당위원회 제1서기 (1940년부터 블라디보스토크 시당위 제1서기 겸임)
  • 1941–1945극동전선·태평양함대 군사평의회 위원
  • 1947–1952중앙위 당기관검증국 부국장 → 경공업부장 → 당·노조·콤소몰 기관 담당 부장 → 간부선발배치부장
  • 1952–1953당 중앙위 서기 겸 상임위원회 후보위원
  • 1953–1956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서기
  • 1956–1973주이란 대사 (1956–63) → 주알제리 대사 (1964–67) → 주인도 대사 (1967–73)
  • 1973–1982외무차관 → 중앙위 해외간부·출국 담당 부장

이반 바실리예비치 스피리도노프

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Спиридон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05–1991 ○ 자연사

흐루쇼프 시대의 레닌그라드 당 수장, 스탈린 시신 이장을 제안하고 당 기구의 충성 시험에 걸려 넘어진 인물

중앙위 간부회의에서 흐루쇼프가 사임 의사를 내비치자 침묵이 흘렀다. 스피리도노프가 일어나 "동지들, 니키타 세르게예비치의 바람을 지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흐루쇼프의 얼굴이 굳었고 며칠 뒤 그는 모든 당직을 잃었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야간 공업학교를 마친 후 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레닌그라드에서 기업 간부로 성장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이다. 1957년 프롤 코즐로프의 후임으로 레닌그라드 지역당 제1서기에 올라 대규모 주택 건설(소위 '흐루쇼프카')과 과학·방위 산업 단지 확장을 주도했다. 1961년 제22차 당대회에서 레닌그라드 대표단장으로서 스탈린 시신의 레닌 묘역 이장을 공식 제안해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를 극적으로 추동했다. 곧 중앙위원회 서기로 발탁되었으나, 중앙위 간부회의에서 흐루쇼프의 위장 사임 제의를 진심으로 지지하는 실수를 범해 실각,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연방회의 의장이라는 의전적 직책으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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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오룔 직물기계 공장장
  • 1941–1944쿠즈네츠크 직물기계 공장장 (전시 소개)
  • 1944–1950레닌그라드 국영계측기 공장장
  • 1950–1952레닌그라드 모스크바 구당위 서기
  • 1952–1954레닌그라드 주집행위 부의장
  • 1954–1956레닌그라드 주당위 서기
  • 1956–1957레닌그라드 시당위 제1서기
  • 1957–1962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
  • 1961–1962CPSU 중앙위원회 서기
  • 1962–1970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포포프

Георгий Михайлович Поп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06–1968 ○ 자연사

전후 모스크바 재건을 이끌었으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당 보스

1949년 12월 16일, 중앙위 전원회의는 포포프를 서기직과 모스크바 당 제1서기에서 해임했다. 공식 이유는 '비판 억압, 자기비판 부재, 간부에 대한 그릇된 태도'였다. 그 자리에는 흐루쇼프가 앉았다.

셰르바코프 사후 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1945~1949)를 맡아 전후 복구와 800주년 기념 사업을 진두지휘했으며, 동시에 중앙위 서기(1946~1949)로 발탁되어 스탈린의 후계 구도에서 잠시 거론될 만큼 급부상했다. 1949년 12월 '비판 억압과 간부 운용의 오류'를 이유로 전격 해임되었고, 흐루쇼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후 도시건설·농기계 장관, 항공공장장, 폴란드 대사를 거쳐 변방 공장장으로 밀려났으며, 1965년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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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탐보프현·타타르 자치공화국에서 콤소몰 활동
  • 1926볼셰비키당 입당
  • 1928–1938모스크바 중앙노동연구소 근무
  • 1938전연방 산업아카데미 기계공학부 졸업, 중앙위 간부부 인스트럭터
  • 1938–1945모스크바 시당 제2서기
  • 1941예비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7~10월)
  • 1944–1950모스크바 시 집행위원장 (사실상 시장)
  • 1945–1949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
  • 1946–1949중앙위 서기 · 조직국 위원
  • 1949–1951도시건설장관 → 농업기계제조장관
  • 1951–1953쿠이비셰프 프룬제 항공공장장
  • 1953–1954주폴란드 소련 대사 (간섭 문제로 소환)
  • 1954–1965항공산업 공장장, 블라디미르 공장장(1959~), 1965년 연금

블라디미르 니키포로비치 말린

Владимир Никифорович Малин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인 1906–1982 ○ 자연사

당 중앙 문서 흐름을 11년간 통제한 총무부장

1964년 10월 흐루쇼프 실각 직후 브레즈네프 보좌관들이 총무부를 우회해 문서를 유통시키자 말린은 일기에 썼다: "이중 지휘계통이 생겨서 어느 문서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된다."

1954년부터 1965년까지 CPSU 중앙위 총무부장으로 정치국과 중앙위를 오가는 모든 문서를 통제한 당 기구의 핵심 관리자였다. 전쟁 시기에는 중앙 빨치산운동 사령부 정치국장 겸 부사령관으로 점령지 파르티잔 활동을 조직했고, 벨라루스 공산당 제3서기를 지냈다. 쿠바 미사일 위기와 흐루쇼프 실각 직후 정치국 회의에서 직접 속기록을 작성한 그의 노트는 소련 지도부 의사결정의 내부를 보여주는 사료다. 1965년 브레즈네프가 측근 체르넨코를 후임에 앉히며 아카데미 사회과학원 총장으로 전출된 것은 브레즈네프식 후원 인사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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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3레닌그라드 공산대학 졸업
  • 1938–1939벨라루스 공산당 모길료프 주당위 제1서기
  • 1939–1941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선전선동 서기
  • 1942–1944중앙 빨치산운동 사령부 정치국장 겸 부사령관
  • 1943–1947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제3서기
  • 1949–1952레닌그라드 시당위원회 서기
  • 1952–1954CPSU 중앙위원회 인스펙터
  • 1954–1965CPSU 중앙위 총무부장
  • 1965–1970CPSU 중앙위 부설 아카데미 사회과학원 총장

안드레이 파블로비치 키릴렌코

Андрей Павлович Кириленко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06–1990 ↓ 은퇴 1982

브레즈네프 시대의 간부 담당 선임서기

1981년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 후보 명단을 낭독하며 거의 모든 이름을 잘못 발음했고, 브레즈네프를 포함한 상임간부석마저 공공연히 웃음을 터뜨렸다. 한때 '3인자'로 불리던 후계자의 공개적 몰락이었다.

항공기술자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제18군 군사평의회에서 브레즈네프와 함께 복무하며 정치적 동반자가 되었다. 중앙위 서기국에서 소련 군산복합체 전체를 총괄하는 실력자로, 브레즈네프·수슬로프와 함께 당의 '3인자'로 불리며 후계자로 거론되었다. 정체기 당 관료제의 승진 통로와 충성 네트워크를 상징했으나, 1970년대 후반 뇌 기능 저하로 쇠퇴하다 안드로포프 집권 직후 축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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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55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주 당 제1서기
  • 1966–76중앙위 간부 담당 선임서기
  • 1982안드로포프 집권 직후 은퇴

프롤 로마노비치 코즐로프

Фрол Романович Козл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08–1965 ○ 뇌졸중

뇌졸중 하나로 브레즈네프 시대를 연 제2서기

1959년 7월 13일, 미국 『타임』지는 코즐로프의 사진을 표지에 싣고 「흐루쇼프의 후계자?」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로부터 4년 뒤 뇌졸중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랴잔 농가 출신의 금속공학자로, 이젭스크 군수공업 현장에서 올라와 전후 레닌그라드 당을 장악했다. 1957년 반당그룹 사건에서 흐루쇼프를 결정적으로 지지한 뒤 중앙위 서기 겸 상임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60년부터는 흐루쇼프의 공인된 후계자로서 서기국과 상임위원회를 사실상 지휘했다. 당·군·보안기관의 인사권을 독점할 정도로 권력이 집중되었으나, 1963년 4월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흐루쇼프의 후계 구도 전체가 붕괴했고, 그의 빈자리는 브레즈네프가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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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39이젭스크 제철공장 제강소장 → 당위원회 서기
  • 1940–44이젭스크 시당 제2서기: 군수생산 지휘
  • 1947–49쿠이비셰프 주당 제2서기: 중공업·항공 감독
  • 1949–53레닌그라드 시당 제1서기 → 주당 제2서기: 「레닌그라드 사건」 후 당 재건
  • 1953–57레닌그라드 주당 제1서기: 지하철·도시 현대화 추진
  • 1957–58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58–60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일상적 정부 운영 총괄
  • 1960–64중앙위 서기, 사실상의 제2서기: 서기국·상임위원회 주재

알렉세이 일라리오노비치 키리첸코

Алексей Илларионович Кириченко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우크라이나 1908–1975 ↓ 실각 1960

흐루쇼프 초의 당 임명 담당 서기

1957년 6월 반당 그룹과의 대결에서 키리첸코는 논거를 고르는 수고도 없이 모든 비난을 거칠게 쳐내며 흐루쇼프 편에 섰다. 흐루쇼프 없이는 자신에게도 미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당 역사상 첫 우크라이나인 제1서기로, 1957년 반당 그룹에 맞서 흐루쇼프를 결사적으로 지지하며 모스크바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다. 1958년 사실상 당 제2서기로서 서기국을 주재하고 인사권을 장악했으나, 거친 성격과 독자적 행보로 동료들의 반감을 사고 흐루쇼프의 신임마저 잃었다. 1960년 실각 후 공장장으로 전락했다가 연금 생활자로 완전히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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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57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
  • 1957–60중앙위 서기, 당 임명 업무
  • 1960흐루쇼프 체제 내부에서 실각

블라디미르 표도로비치 프로미슬로프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Промысл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비에트 러시아 1908–1993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모스크바의 얼굴을 만든 23년 집권 시장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빅토르 그리신은 프로미슬로프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그는 대체로 대표 기능을 수행하는 데 바빴다. 수많은 해외 출장이 시간을 잡아먹었고, 시 집행위 업무와 도시 문제를 해결할 시간은 늘 부족했다."

토목 기술자 출신으로 1963년부터 1986년까지 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의장(사실상 시장)을 지내며 오스탄키노 타워, 로시야 호텔, 노비 아르바트, 수십 개 지하철역, 1980년 올림픽 경기장 등 전후 수도의 스카이라인을 바꾸었다.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빅토르 그리신은 회고록에서 그가 형식적 대외 활동과 해외 출장에 치중하고 실무를 보좌진에게 떠넘겼다고 비판했으며, 자신의 저서에 과도한 인세를 받은 스캔들도 남았다.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교체될 때까지 소비에트 수도 최장기 행정 수반으로서 도시 발전과 노멘클라투라 정치를 동시에 체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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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38건설 현장 감독, 글라브기드로에네르고스트로이 부서장
  • 1938–41모스크바 시당 기구 → 중공업인민위원부
  • 1941–45탱크공업인민위원부 → 국방공업건설총국
  • 1946–51모스크바 시당 → 모스크바 시 집행위 부의장
  • 1955–59글라브모스스트로이 국장 겸 시집행위 제1부의장
  • 1959–63RSFSR 건설위 의장 → RSFSR 부수상 겸 건설장관
  • 1963–86모스크바 시 집행위원회 의장 (사실상 시장)

이오시프 미하일로비치 투르코

Иосиф Михайлович Турко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벨라루스인 1908–1994 ○ 15년형 후 복권 · 자연사

쿠즈네초프가 야로슬라블에 심은 인물, 사형 대신 15년형을 산 레닌그라드 사건 피고인

“그는 내 얼굴과 머리를 때리고, 내가 쓰러지자 배를 발로 찼다… 나는 의사가 주사기를 든 것을 보았다. 겁이 나서 바로 두 통의 조서에 서명했다.”

벨라루스계 출신으로 레닌그라드 공장과 당 기구를 거쳐 야로슬라블 주당위 제1서기(1946–1949)까지 오른 당 간부로, 전후 알렉세이 쿠즈네초프가 러시아 공화국 각지에 배치한 지역 간부 중 한 명이었다. 1950년 9월 29~30일 레닌그라드 사건 재판에서 중앙 피고인 6인과 함께 기소되어 사형 대신 1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MGB 수사관들에게 구타당해 허위 자백에 서명했고, 1954년 석방·복권된 후 조용히 살다 199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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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7유리 공장 노동자 → 레닌그라드 '프롤레타리' 공장 기술자·기획생산부장
  • 1937–1940레닌그라드 '프롤레타리' 공장장
  • 1940–1944레닌그라드 크라스노그바르데이스키 구당위 간부서기 → 제1서기
  • 1944–1945레닌그라드 주당위 서기
  • 1945–1946레닌그라드 주당위 제2서기
  • 1946–1949야로슬라블 주당위 제1서기 · 소련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 1949–1954레닌그라드 사건: 해임·체포·15년형 (MGB 구타로 허위 자백)
  • 1954–1956쿠스타나이 주 집행위원회 부의장
  • 1956–레닌그라드 주 계획위원회 부의장 → 연방급 개인연금 생활자

콘스탄틴 빅토로비치 루사코프

Константин Викторович Русак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09–1993 ○ 자연사

사회주의권 당 대 당 외교를 관장한 브레즈네프의 비서

1979년 12월, 루사코프는 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을 담은 정치국 문서에 서명했다. 그가 관장하던 '사회주의 국가' 범주 안에는 이제 군사적 현상 변경까지 포함되었다.

레닌그라드 공과대학을 졸업한 토목기술자 출신으로, 1930년대 육류·어류 가공공장 건설 현장에서 경력을 시작해 1950년 소련 수산공업장관까지 올랐다. 1957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시대 간부 숙청 때 폴란드 대사관 참사관으로 밀려났다가, 1964년 브레즈네프 시대에 중앙위 기구로 복귀해 사회주의 국가 공산당·노동자당 연락부를 이끌었다. 1977년 중앙위 서기로 겸직하면서 9년간 바르샤바 조약 동맹국과 몽골·베트남·쿠바 등 사회주의권 집권당과의 관계를 총괄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에도 참여했다. 1986년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직후 '구시대 인물'로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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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9육류·어류 가공공장 건설 현장의 기술자·현장소장
  • 1939–1946수산공업인민위원부에서 건설·기술 간부로 승진
  • 1946–1957수산공업 차관·제1차관·장관(1950–1952) 역임
  • 1958–1960주폴란드 소련 대사관 참사관
  • 1962–1963주몽골 소련 대사
  • 1964–1972중앙위 사회주의국가 공산당·노동자당 연락부 차장 → 제1차장 → 부장
  • 1972–1977브레즈네프 중앙위 서기장 보좌관
  • 1977–1986중앙위 서기 겸 사회주의국가 공산당 연락부장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루다코프

Александр Петрович Рудак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10–1966 ○ 자연사

흐루쇼프 산업분할 서기국의 중공업 담당 서기

1962년 11월 23일 밤, CPSU 중앙위 플레눔이 흐루쇼프의 제안으로 당 조직을 산업계열과 농업계열로 분할하면서, 루다코프는 소련 전역의 공장·광산·건설 현장을 아우르는 산업 담당 서기로 선출되었다.

도네츠 탄광의 광부로 출발해 흐루쇼프 시대 소련 중공업 정책의 최고 실무자가 된 당 간부다. 우크라이나 당 기구에서 20년 가까이 석탄·중공업 부문을 관장한 뒤 1962년 흐루쇼프의 산업·농업 분할 개혁으로 산업 담당 중앙위 서기에 선출되었고, 개혁이 폐기된 후에도 사망 시까지 브레즈네프 체제에서 서기직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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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36도네츠 탄광 광부
  • 1936–1938우크라이나 콤소몰 기구에서 활동
  • 1938–1942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기구: 지도원, 석탄공업부 차장·부장
  • 1942–1944CPSU 중앙위 기구 근무
  • 1944–1954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보, 석탄공업부장, 중공업부장, 당·노조·콤소몰기관부장
  • 1954–1962CPSU 중앙위 중공업부장
  • 1962–1966CPSU 중앙위 서기 (산업 담당)

게오르기 세르게예비치 파블로프

Георгий Сергеевич Павл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인 1910–1991 ✕ 투신 자살

브레즈네프의 18년 당 살림꾼, '당의 금' 지기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몇 주 후, 80세의 파블로프는 모스크바 그라나트니 거리 자택 발코니에서 몸을 던졌다.

게오르기 파블로프는 1965년부터 1983년까지 18년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관리국장을 지내며 당 중앙기구의 물적·행정적 기반을 총괄한 인물이다. 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업학교에서 브레즈네프보다 한 학년 아래로 함께 수학했으며, 마리 자치공화국 당 제1서기와 당-국가통제위원회 부서장을 거쳐 브레즈네프 집권 직후 관리국장에 발탁되었다. 당의 재정·건설·출판·요양 시설을 장악하고 1980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직후 모스크바 자택 발코니에서 투신 자살했으며, 후임 니콜라이 크루치나도 한 달 앞서 같은 방식으로 사망하여 '당의 금' 의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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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장 부설 공장학교 교사, 금속공업학교 재학
  • 1939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40–1941드네프로제르진스크 시당 지도원 → 금속공업부장
  • 1941–1943오르스크 피난, 시당 위원회 근무
  • 1943–1947드네프로제르진스크 시당 제2서기 → 제1서기
  • 1947–1949중앙위 간부관리국 감찰관 → 당·노조·콤소몰 기관부 지도원
  • 1949–1950마그니토고르스크 시당 제1서기
  • 1950–1951첼랴빈스크 주당 제2서기 (부친의 점령기 경력 문제로 해임)
  • 1951–1957코스트로마 주 집행위 부의장 → 주당 서기 → 시당 제1서기 → 주당 제2서기
  • 1957–1963마리 자치공화국 당 제1서기
  • 1961–1971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63–1965당-국가통제위원회 부서장
  • 1965–1983중앙위원회 관리국장(Управляющий делами ЦК КПСС)
  • 1971–1986중앙위원회 위원
  • 1980사회주의노동영웅 수훈

미하일 티모페예비치 예프레모프

Михаил Тимофеевич Ефрем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인 1911–2000 ○ 자연사

볼가 강변 고아원 소년에서 코시긴 내각 부의장이 된 당 조직인사 전문가

1952년 11월 19일, 건설이 지연되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 간부회의에서 사회를 본 예프레모프는 현 상황을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라 규정하고, "성공의 열쇠는 동지적 지원, 즉 팔꿈치 감각에 있다"고 선언했다.

사마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아버지를 잃고 고아원에서 자란 예프레모프는 기술학교와 산업대학을 거쳐 전기기술자로 출발했다. 1942년 쿠이비셰프 당 기구에 들어간 뒤 10년 만에 제1서기로 도약했고, 볼가 수력발전소 건설을 진두지휘하며 지역경제 지도자로 입지를 굳혔다. 1959년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당기관부장으로 발탁되어 연방 차원의 간부 인사를 관장했고, 첼랴빈스크와 고리키(니즈니노브고로드)의 제1서기를 거쳐 1965년 코시긴의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임명돼 6년간 경제행정을 총괄했다. 말년에는 동독과 오스트리아 대사를 지내며 외교무대로 전환했고, 75세까지 현역으로 일하다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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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33사마라 에너지콤비나트 기술전기검사소장
  • 1933–34붉은 군대 복무 (볼가 군관구 사령부)
  • 1934–38쿠이비셰프 목재가공콤비나트 부기계장·주임동력기사
  • 1941–42차파옙스크 제15공장 건설 주임동력기사
  • 1942–51쿠이비셰프 주당: 강사·부서장·서기 대리·중공업부장
  • 1951–52쿠이비셰프 주당 제2서기
  • 1952–59쿠이비셰프 주당 제1서기 (볼가 수력발전소 건설 진두지휘)
  • 1959–61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당기관부장 ·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위원
  • 1961–62첼랴빈스크 주당 제1서기
  • 1962–65고리키 공업주당 제1서기 → 고리키 주당 제1서기 (소브나르호스 분할·통합기)
  • 1965–71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코시긴 내각)
  • 1971–75주동독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5–86주오스트리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레오니트 니콜라예비치 예프레모프

Леонид Николаевич Ефрем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12–2007 ○ 자연사

고르바초프에게 스타브로폴을 넘겨주고 그를 배신자라 부른 당원

은퇴 후 그는 『배신자 고르바초프』라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스타브로폴에서 길을 열어준 후임자를 향해 "양면적인 자들의 동맹"이라 쏘아붙였다.

농업기계화 기술자로 출발한 예프레모프는 전시 항공공업과 쿠이비셰프 당 기구를 거쳐 흐루쇼프 시기 쿠르스크·고리키·스타브로폴 당 조직을 차례로 이끈 지역 간부로 성장했다. 전성기에는 CPSU 상임위 후보위원과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제1부의장을 지내며, 연방 구조 안에서 러시아 공화국을 별도 관리하려는 당 구도 중심에 섰다. 흐루쇼프 실각 후 스타브로폴로 되돌아갔고, 1970년 그 자리를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넘겨준 것이 가장 역사적인 순간이 되었다. 훗날 그는 회고록 『배신자 고르바초프』에서 후임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후 18년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으로 일하다 1988년 연방급 연금생활자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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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41보로네시 농업기계화연구소 졸업 → 항공공장 기술자, 독일 통상대표부 장비 인수원
  • 1941–46보로네시 제18항공공장 주임기사, 당 조직자 (Il-2 생산)
  • 1946–52쿠이비셰프 당 간부 → 주 집행위원장
  • 1952–58쿠르스크 주당 제1서기 (1957년 주에 레닌훈장 수여)
  • 1958–62고리키 주당 제1서기
  • 1962–65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제1부의장 · 상임위 후보위원
  • 1964–70스타브로폴 지방당 제1서기 (후임: 미하일 고르바초프)
  • 1970–88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

니콜라이 로마노비치 미로노프

Николай Романович Мирон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13–1964 ✕ 항공사고 사망

흐루쇼프 축출을 조직한 당의 '권력 부처' 담당자

KGB 의장 세미차스트니는 훗날 회고했다: “내가 맡고 있던 KGB 의장 자리는 원래 니콜라이 로마노비치 미로노프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당 조직 출신으로 브레즈네프의 청년기 친구였으며,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장(1959–1964)으로서 KGB·내무·군·검찰·법원을 총괄 감독한 흐루쇼프 시대 후기의 실세였다. 1964년 반흐루쇼프 음모에서 중앙위원과 군·보안 간부들을 직접 포섭하며 쿠데타의 실무를 조직했고, 브레즈네프 집권 후 KGB 의장으로 내정되었으나 취임 직전 베오그라드 근교 아발라 산 항공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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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5정치장교·군 선전선동 담당, 255소총병사단에서 복무하며 부상, 소령으로 종전
  • 1945–1951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당 선전부, 키로보그라드 주당 서기 등 우크라이나 당직 역임
  • 1951–1956MGB·KGB 제3총국(군 방첩) 부국장, 소장 진급
  • 1956–1959레닌그라드주 KGB 국장
  • 1959–1964중앙위 행정기관부장 — KGB·내무·군·검찰·법원 감독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사빈킨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Савинкин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13–1993 ○ 1987년 연금 퇴직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기 19년간 소련 전력 기관들의 인사 문지기

사빈킨이 3년 넘게 부장 대행에 머물자 부서 평직원들조차 조바심을 냈다. 경찰 중장 치간니크는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직원들조차 그의 임명이 이례적으로 지연되는 데 지쳐 초조하게 결정을 기다렸습니다."

1968년부터 1987년까지 CPSU 중앙위 행정기관부장을 지내며 KGB·내무부·국방부·검찰·법원의 고위 간부 임명을 통제한 군사정치 간부다. 1935년 붉은 군대 입대 후 정치장교로 참전했고, 1950년부터 중앙위 기구에서 행정기관 부문 경력을 쌓았다. 1964년 전임자 미로노프의 급사로 부장 대행이 되었고, 3년 넘는 대행 끝에 1968년 정식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으로 기억되며, 국방부 인사에 집중했고 1987년 퇴직할 때까지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세 서기장을 거치며 전력 기관 인사 시스템의 보이지 않는 기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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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붉은 군대 입대, 무선통신대대 사병 및 하급 지휘관
  • 1937적군 화학연구소 콤소몰 서기
  • 1939–1941군사정치 아카데미 수학, 서부전선 제33군 정치부 선전담당 고등교관
  • 1942–1944자바이칼 전선: 여단 정치부장, 전선 정치부 간부부 차장, 총정치국 간부국 고등교관
  • 1947–1950군사정치 아카데미 복학 및 졸업
  • 1950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행정부 교관
  • 1952–1959중앙위 행정부문 육군 부문장, 부문 차장 등 역임
  • 1959–1968중앙위 행정기관부 차장 → 제1차장, 1964년 10월부터 부장 대행
  • 1968–1987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장

빅토르 바실리예비치 그리신

Виктор Васильевич Гришин
당 서기국 · 조직인사 러시아 러시아 1914–1992 ○ 자연사

18년간 모스크바를 통치하고 연금 재신청 중 사망한 브레즈네프 시대의 얼굴

1964년 10월, 흐루쇼프 실각 당시 그리신은 일리초프와 함께 흐루쇼프의 사임 성명 초안을 작성했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정치적 죽음이 담긴 그 서류에 서명했고, 이후 브레즈네프 시대가 열렸다.

브레즈네프 시대 보수파의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로 18년간(1967~1985) 수도를 통치했다. 1971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고, 브레즈네프와 체르넨코 사후 두 차례 서기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1985년 고르바초프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모스크바 인근 원전 건설을 저지해 체르노빌 이후 선견지명을 인정받았고, 1980년 올림픽 인프라를 총괄했다. 1992년 연금 재등록을 위해 구청 사회보장과를 찾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후기 소비에트 체제의 안정과 정체를 동시에 체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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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38측량기사, 기관차 차량기지 부책임자
  • 1941–50세르푸호프 시당 제2서기 → 제1서기
  • 1950–52모스크바 주당 기계제조부장 → 제2서기
  • 1956–67전소비에트 중앙노동조합평의회(VTsSPS) 의장 · 세계노조연맹 부의장
  • 1967.06–1985.12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 1971.04–1986.02정치국 정위원 (1961년부터 후보위원)
  • 1980모스크바 올림픽 인프라 건설 총괄
  • 1986–87최고소비에트 상무회 국가고문, 이후 연금 생활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시콜니코프

Алексей Михайлович Школьник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14–2003 ○ 자연사

흐루쇼프 시절 3개 주를 지배하고 인민통제로 간 실무자

보로네시 제1서기 시절, 흐루쇼프의 시찰을 앞두고 국영농장과 콜호스에 명령을 내렸다. 노동자들은 예비선로의 레일을 뜯어내 트랙터 뒤에 묶고 들판을 가로질러 끌며 수확이 끝난 것처럼 연출했다.

페름 공장에서 10년간 엔지니어로 일한 뒤 전쟁 중 당 기구에 진입했다. 흐루쇼프 시절 탐보프·보로네시·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3개 주에서 1서기를 지내며 지역 산업과 농업을 지휘했고, 보로네시에서는 수확 과시를 위해 들판에 레일을 끌게 한 일화로 유명하다. 1964년 10월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흐루쇼프의 농업 정책과 당 기구 분할을 비판하며 그의 축출에 한몫했다. 이후 RSFSR 각료회의 제1부의장(1965~1974)을 거쳐 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1974~1987)으로 국가 감독 기구를 13년간 이끌며 브레즈네프 체제의 행정 통제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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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43페름 공장에서 교대장·직장·동력책임자로 근무
  • 1943–1945몰로토프(페름) 주당위 부서장
  • 1945–1947중앙당통제위원회 전권위원(블라디미르·보로네시 주)
  • 1947–1949칼루가 주당위 제2서기
  • 1952중앙위 지도원·부부장
  • 1952–1955탐보프 주당위 제1서기
  • 1955–1960보로네시 주당위 제1서기
  • 1960–1965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
  • 1965–1974RSF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74–1987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

이반 바실리예비치 카피토노프

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Капитон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15–2002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기 노멘클라투라를 21년간 운영한 인사 책임자

1976년, 당대회 보고서 초안을 본 브레즈네프가 격노했다 — 「카피토노프 자신은 아무것도 쓸 줄 모른다. 그런데도 서기다. 그의 지시로 이 잡담을 꾸며낸 것이다. 당장 불러서 뼈저리게 야단쳐라!」 체르냐예프의 일기 속 한 장면이다.

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를 거쳐 1965년 중앙위 서기 겸 조직당사업부장에 올랐고, 이후 21년간 소련 간부 임명 체계 전체를 실무적으로 관장했다.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를 거치며 당 서기국을 지킨 최장수 서기였으나, 정작 정치국원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고 브레즈네프는 그를 공개적으로 질책했다. 정체기 당관료제의 충성 네트워크와 인사 정체를 가장 오래 떠받친 기술자형 인사관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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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4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
  • 1954–1959모스크바 주당 제1서기
  • 1959–1964이바노보 주당 제1서기
  • 1965–1983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
  • 1965–1986중앙위 서기 (조직·간부 담당)
  • 1986–1988중앙감사위원회 의장

바실리 세르게예비치 톨스티코프

Василий Сергеевич Толстик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17–2003 ○ 자연사

해빙기 레닌그라드를 이끈 당 지도자이자 주중 대사

1970년, 아무런 외교 경력도 없던 레닌그라드 당 수장이 갑자기 주중 대사로 발령받았다. 브레즈네프는 그의 독립적 성향과 전쟁 영웅으로서의 권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레닌그라드 철도기술원을 졸업한 토목기사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전후 레닌그라드 복구사업에 투신했다. 1962년 흐루쇼프에 의해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로 발탁되어 1965년 경제개혁의 도시 적용을 주도하고 대규모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 1970년 느닷없이 주중 소련 대사로 전출되었는데, 이는 그의 독자적 권위를 견제하려는 브레즈네프의 의중이 작용한 결과로 평가된다. 외교 경험이 전무했음에도 베이징에서 중소관계 정상화를 위한 실무적 대화 통로를 유지했으며, 이후 주네덜란드 대사를 끝으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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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40건설 기술직 후 레닌그라드 철도기술원 졸업, 군 건설현장 주임기사
  • 1941–1946붉은군대 복무, 카렐리야 전선 참전, 주독 점령군 수송부서장
  • 1948–1960레닌그라드에서 건설·소비에트·당 직책 역임, 레닌그라드 주당위 제2서기까지 승진
  • 1962–1970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 · CPSU 중앙위 러시아공화국 뷰로 위원(1962–1966)
  • 1962–1971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
  • 1970–1978주중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79–1982주네덜란드 소련 특명전권대사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우즈베키스탄 1917–2008 ↓ 중앙직 사임 1961

중앙아시아 출신 첫 프레지디움 위원, 민족 정책 실무자

1956년 10월 타슈켄트 제1차 우즈베크 지식인대회에서 소련 최초로 스탈린 시기 대량 탄압의 실상과 피해자 이름을 공개석상에서 밝혔다.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우즈베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통신으로 협동조합대학을 졸업하고 붉은군대에서 정치·무선정찰 장교로 복무하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다. 전후 우즈베키스탄 당에서 급속히 승진해 1955년 우즈베크 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57년 중앙아시아 출신 최초로 CPSU 프레지디움 정위원 겸 중앙위 서기에 올랐다. 흐루쇼프 해빙기 동안 우즈베크 내 대규모 정치 재활, 강제이주 민족 귀환, 타슈켄트 핵물리연구소 설립을 주도하며 민족정책을 현장에서 실행했다. 1961년 흐루쇼프와의 정책적 이견으로 중앙직을 떠난 뒤 시리아 대사 등을 지내고 90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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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6붉은군대 복무, 정치·무선정찰 업무
  • 1948–1950나망간 주당위 제1서기
  • 1951–1953우즈베크 SSR 각료회의 의장
  • 1954–1955우즈베크 SSR 각료회의 의장 (복직)
  • 1955–1957우즈베키스탄 당 중앙위 제1서기
  • 1957–1961CPSU 중앙위 서기 겸 프레지디움 위원
  • 1968–1977주시리아 소련 대사
  • 1986–2008우즈베키스탄 역사문화기념물보호협회 의장

표도르 다비도비치 쿨라코프

Фёдор Давыдович Кулак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18–1978 ○ 급서

브레즈네프의 후계 후보였으나 급서로 고르바초프의 자리를 열어준 농업 담당 서기

1978년 4월 농업 전원회의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농업 담당 정치국원 겸 서기인 쿨라코프를 위원회에조차 넣지 않았다. 석 달 뒤 그는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농민 출신으로 농업 전문가 경로를 밟아 올라온 당 간부로, 1965년부터 중앙위 농업 담당 서기를 맡으며 브레즈네프·수슬로프·키릴렌코와 함께 서기국과 정치국을 겸한 4인 중 하나였다. 스타브로폴 제1서기 시절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발탁해 후원했으며, 1971년 정치국 위원에 오른 후 서방 분석가들은 그를 유력한 후계자로 꼽았다. 그러나 1978년 농업 정책을 둘러싼 당내 비판 속에 급서하면서 그의 서기국 자리는 고르바초프에게 넘어갔고, 이는 소련 지도부 세대교체의 분수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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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1탐보프 주 사탕무 국영농장 조수, 펜자 주 사탕공장 농업기사
  • 1941–1944펜자 주 지구 콤소몰 제1서기, 지구 집행위원회 의장, 현급 당위 제1서기
  • 1950–1955펜자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55–1959RSFSR 농업 차관
  • 1959–1960RSFSR 곡물생산물 장관
  • 1960–1964스타브로폴 변경당위 제1서기 — 고르바초프를 발탁·후원
  • 1964–1976중앙위 농업부장
  • 1965–1978중앙위 농업 담당 서기
  • 1971–1978정치국 위원 (후보위원 건너뜀)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부슈예프

Виктор Михайлович Бушуе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19–1996 ○ 자연사

소련 화학공업을 지휘한 당 중앙위 부장

1973년 출간한 저서에서 "화학공업 없이는 단 하나의 국가적 과제도 최적의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전면적 화학화를 당 노선으로 정당화했다.

모스크바 화학기계공학 연구소를 졸업하고 고스플란에서 엔지니어로 출발해 소련 화학공업의 중앙계획과 당적 지도를 아우른 관료이다. 1965년부터 1976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화학공업부장으로 재임하며 코시긴 개혁기 화학공업 현대화(합성고무·플라스틱·광물비료·석유화학의 대규모 확장)를 당 라인에서 주관했다. 1966년부터 1981년까지 중앙감사위원회 위원으로서 당내 재정·문서 감사 역할을 겸했으며, RSFSR 최고회의 대의원도 3선 지냈다. 그의 저서 『24차 당대회 결정에 비추어 본 화학공업』(1973)은 브레즈네프기 화학공업 정책의 대표적 당 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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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모스크바 화학기계공학 연구소 졸업
  • 1942–1950s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엔지니어 → 선임 엔지니어
  • 194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50s–1965고스플란 부문장 → 소련 각료회의 산하 고스플란 부서 부책임자
  • 1965–1976CPSU 중앙위원회 화학공업부장
  • 1966–1981CPSU 중앙감사위원회 위원
  • 1967–1980RSFSR 최고회의 대의원 (제7·8·9 소집)

게오르기 엠마누일로비치 츠카노프

Георгий Эммануилович Цукан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인 1919–2001 ○ 자연사

브레즈네프의 문서를 통제한 조용한 문지기

츠카노프가 말한 '세 개의 못' 원칙: "브레즈네프의 지시는 곧바로 실행하지 않고 상상의 첫 번째 못에 걸어둡니다. 재촉이 오면 두 번째 못으로. 세 번째 못까지 와야 비로소 전화를 들죠. 실제 실행되는 것은 10분의 1도 안 됩니다."

야금 기술자 출신으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수석 보좌관을 20년 가까이 지낸 당 기구의 핵심 인물이다. 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업대학을 같은 해 졸업한 브레즈네프와 인연을 맺어, 1958년 중앙위원회 기구에 합류한 뒤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으로 있는 전 기간 동안 그의 비서실을 실질적으로 총괄했다. 정치국 자료와 지시 사항을 필터링하며 총서기가 접하는 정보의 흐름을 통제했고, 이른바 '세 개의 못' 원칙으로 대변되는 특유의 실용주의로 방대한 관료적 업무를 관리했다. 겉으로는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았으나, 매일 브레즈네프를 대면하는 몇 안 되는 인물로서 정체기 소비에트 정치의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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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58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첼랴빈스크 지역 철강 기업에서 근무, 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공장 주임기사 역임
  • 1958–1960CPSU 중앙위원회 기구
  • 1960–1963소련 최고회의 간부회의 기구
  • 1963–1964CPSU 중앙위원회 서기 보좌관
  • 1964–1966CPSU 중앙위원회 제1서기(브레즈네프) 보좌관
  • 1966–1983CPSU 중앙위원회 서기장(브레즈네프, 이후 안드로포프) 보좌관
  • 1983–1985CPSU 중앙위원회 해외간부담당부서 제1부장
  • 1985–2001연금 생활

니콜라이 그리고리예비치 예고리체프

Николай Григорьевич Егорыче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20–2005 ↓ 강등 1967 · 자연사

모스크바 당 보스에서 브레즈네프에게 도전했다가 외교관으로 밀려난 인물

1967년 6월 전원회의 연단에서 브레즈네프의 면전에 '수도의 방공은 충분히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 그 순간, 모스크바 시당위원장으로서의 정치 경력은 끝났다.

니콜라이 예고리체프는 1962년부터 1967년까지 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제1서기를 지낸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이다. 그의 재임기 모스크바에서는 대규모 주택 건설로 300만 명 이상이 새 보금자리를 얻었고, 그의 주도로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의 무명용사 묘가 조성되었으며 트리움프 개선문이 복원되었다. 196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모스크바 방공 체계의 취약성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며 브레즈네프 지도부를 정면으로 비판했고, '콤소몰 그룹'(셸레핀 파벌)의 일원으로 간주되던 그 발언 직후 해임되었다. 이후 덴마크 대사(1970~1984)와 아프가니스탄 대사(1988)를 지내며 소련군 철수 시기 외교 업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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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6모스크바 바우만 구당위원회 서기
  • 1956–1960모스크바 바우만 구당위원회 제1서기
  • 1960–1961CPSU 중앙위원회 감찰관
  • 1961–1962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제2서기
  • 1962–1967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70–1984주덴마크 소련 대사
  • 1988주아프가니스탄 소련 대사

예고르 쿠즈미치 리가초프

Егор Кузьмич Лигачё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20–2021 ↓ 실각 1990

페레스트로이카 안의 보수적 제2서기

1990년 2월 6일 중앙위 전원회의, 69세의 리가초프는 사퇴 압박 속에서도 '지독하게도 일하고 싶다, 페레스트로이카의 구체적 사업에 착수하고 싶다!'고 외쳤다. 이 한마디는 곧 소련 전역의 유행어가 되었고, 며칠 후 그는 정치국에서 물러났다.

톰스크에서 18년간 주당 서기로 지역 산업화를 이끌었고, 안드로포프 말기에 중앙 조직당사업부장으로 발탁되어 고르바초프 체제의 제2서기가 되었다. 반알코올 캠페인의 주도자로 개혁 초기를 함께했으나, 곧 글라스노스트 전면화와 옐친의 급진 노선을 견제하는 당 보수파의 얼굴로 돌아섰다. 1990년 제28차 당대회에서 '레닌주의자' 후보로 고르바초프에게 맞섰고, 공유재산이 인민을 결속시킨다는 신념을 끝까지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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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3–85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
  • 1985–90제2서기, 페레스트로이카 내부 보수파
  • 1990제28차 당대회에서 실각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 로마노프

Григорий Васильевич Роман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23–2008 ↓ 강제은퇴 1985

레닌그라드에서 모스크바로, 마지막 한 걸음에서 멈춘 후계자

«아무도 고르바초프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다음 날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모든 일을 끝내 놓았다. 정치국 규칙이 요구하는 대로 우리를 기다리지도 않고. 그토록 빨랐다! 이미 그들 모두와 비밀리에 거래를 마친 것이다.» — 1985년 3월 체르넨코 사후 승계 과정을 회고하며.

레닌그라드 조선기술자 출신으로, 1970년부터 13년간 레닌그라드 주 당 제1서기를 지내며 대규모 주택 건설, 지하철 확장, 레닌그라드 원전 및 방조제 착공 등 도시 기반을 재편했다. 군수공업을 관장하는 중앙위 서기와 정치국 위원까지 올랐고,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 모두 그를 차기 서기장 후보로 주목했다. 1985년 체르넨코 사후 고르바초프와의 승계 경쟁에서 밀려난 것은 소련 말기 역사의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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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45통신병으로 레닌그라드·발트 전선 복무, 부상
  • 1946–54조선소 설계기사 → 당위 비서·파르토르그
  • 1957–61레닌그라드 키로프 구 당 제1서기
  • 1963–70레닌그라드 주 당 제2서기
  • 1970–83레닌그라드 주 당 제1서기
  • 1973–76정치국 후보위원
  • 1976–85정치국 정위원
  • 1983–85중앙위 서기, 군수공업 담당

세르게이 이오시포비치 마냐킨

Сергей Иосифович Манякин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인 1923–2010 ○ 자연사

26년간 옴스크를 통치한 소련 최장수 지역당 서기

1961년 10월 볼셰레치예에서 아침 일찍, 당위원회 앞 광장에서 파란색 운동복 차림으로 체조를 하던 남자—그가 바로 옴스크 주의 새 제1서기, 39세의 마냐킨이었다.

소련 역사상 가장 오래 지역당 제1서기를 지낸 인물로, 1961년부터 1987년까지 26년간 옴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를 역임했다. 흐루쇼프가 농업 위기에 대응해 직접 임명했으며,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옴스크는 정유·중공업·농공복합단지를 갖춘 시베리아의 주요 산업도시로 성장했다. 1987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으로 발탁되어 개혁기 국가 감독 기구를 이끌었고, 이후 당통제위원회 제1부의장을 지냈다. 1961년부터 1990년까지 29년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재임하며 흐루쇼프·브레즈네프·고르바초프 3대를 관통한 전형적인 브레즈네프기 지역당 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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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3붉은군대 병사, 부상으로 제대
  • 1948–1957농업경제인: 농업기사 → MTS 소장 → 콜호즈 의장 (스타브로폴)
  • 1957–1960스타브로폴 지방당위 농업부장
  • 1960–1961스타브로폴 지방집행위원회 의장
  • 1961CPSU 중앙위원회 감찰관
  • 1961–1987옴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87–1989소련 인민통제위원회 의장
  • 1989–1990CPSU 중앙위 당통제위원회 제1부의장

유리 필리포비치 솔로비요프

Юрий Филиппович Соловьё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25–2011 ○ 자연사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레닌그라드를 이끈 리가초프 측근

1989년 3월 정치국 회의에서 솔로비요프는 레닌그라드 당 지도부 7명 전원이 낙선했다고 보고하며, 유권자들이 후보 개인이 아니라 페레스트로이카 자체에 반대표를 던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닌그라드 지하철 건설 현장에서 20년 넘게 일하며 기술 관료로 성장한 후 당 기구로 옮겨갔다. 1985년 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와 정치국 후보위원에 오르며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소련 제2도시를 책임졌다. 1989년 3월 소련 인민대표대회 선거에서 단독 출마했으나 유권자 60%가 그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충격적 패배를 당했으며, 레닌그라드 당 지도부 7명 전원이 낙선한 이 사건은 당 권위 붕괴를 상징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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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1973렌메트로스트로이 근무, 수석기술자 거쳐 국장
  • 1973–1974레닌그라드 시집행위원회 부의장
  • 1974–1975레닌그라드 주당위 서기
  • 1975–1978레닌그라드 주당위 제2서기
  • 1978–1984레닌그라드 시당위 제1서기
  • 1984–1985소련 산업건설부 장관
  • 1985–1989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 (1986년부터 정치국 후보위원 겸임)

니콜라이 예피모비치 크루치나

Николай Ефимович Кручина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28–1991 ✕ 추락사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당 금고를 지킨 마지막 재무관

1990년 7월 9일 제28차 당대회 연단에서 크루치나는 당 중앙위가 49억 루블의 예비 기금을 보유하고 있다고 처음 공개했다. 소련 공산당 역사상 당 재정의 실체가 대의원들 앞에 드러난 유일한 순간이었다.

알타이 농촌 출신의 농학도로 콤소몰과 당 농업 부문에서 경력을 쌓아, 1965년부터 13년간 첼리노그라드 주당 제1서기로 카자흐 초원의 처녀지 개간을 지휘하며 사회주의 노동 영웅이 되었다. 1983년 고르바초프의 신임으로 당 중앙위 업무관리국장에 올라 당의 방대한 재산과 해외 원조 자금, 이른바 '당의 금'을 총괄했다. 1990년 제28차 당대회에서 처음으로 당 예산을 공개해 49억 루블의 예비 기금을 밝혔으나, 쿠데타 실패 며칠 후 모스크바 자택 발코니에서 떨어져 숨졌다. 그의 죽음과 전임자 파블로프·국제부 간부 리소볼리크의 연이은 추락사는 당 자금의 행방을 둘러싼 미스터리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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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9콤소몰 노보체르카스크·카멘스크·스몰렌스크 시·주 위원회 제1서기
  • 1959–1962콤소몰 중앙위 농촌청년부장
  • 1962–1963중앙위 농업부 지도원
  • 1963–1965카자흐스탄 공산당 첼리니 크라이 위원회 서기
  • 1965–1978카자흐스탄 공산당 첼리노그라드 주 위원회 제1서기
  • 1978–1983중앙위 농업부 제1부장
  • 1983–1991중앙위 업무관리국장 (당 재무·재산 총괄)

야코프 페트로비치 포그레브냐크

Яков Петрович Погребняк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우크라이나인 1928–2016 ○ 자연사

반알코올 캠페인을 이끌며 리가초프의 마산드라 비노테카 파괴 명령을 폭로한 우크라이나 공산당 서기

나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잔의 내용물을 테이블 밑에 쏟아버렸다. 옆에 있던 당 서기가 속삭였다. '이봐, 내 바지가 벌써 다 젖었어. 구두 속에도 보드카야!'

도네츠크 공업대학을 졸업한 금속공학자 출신으로, 1957년부터 당에 들어가 크라마토르스크, 이바노프란코프스크, 니콜라예프 주당 제1서기를 거쳐 1971년부터 16년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반알코올 캠페인이 시작되자 우크라이나 내 시행을 감독했으며, 후일 예고르 리가초프가 마산드라 와인 공장의 150년 역사 비노테카를 파괴하라고 요구했고 블라디미르 셰르비츠키의 개입으로 이를 막았다고 증언했다. 1987년 민족주의 정서가 고조되던 리보프로 발령받아 1990년까지 제1서기를 지냈고, 소련 붕괴 후에는 '우크라이나-폴란드 협회' 회장을 맡으며 회고록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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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0크라마토르스크 시당 제2서기
  • 1960–1962크라마토르스크 시당 제1서기
  • 1963–1964폴타바 공업주당 제1서기
  • 1966–1969이바노프란코프스크 주당 제1서기
  • 1969–1971니콜라예프 주당 제1서기
  • 1971–1987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통상·반알코올 캠페인)
  • 1987–1990리보프 주당 제1서기

야코프 페트로비치 랴보프

Яков Петрович Ряб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인 1928–2018 ○ 자연사

옐친의 정치적 후견인, 국방산업을 관장한 당 서기, 우스티노프를 꺾고 T-72를 관철시킨 실무형 관료

T-72 전차가 시속 70킬로미터로 질주하며 불꽃을 튀기자, 그레치코 원수가 말했다. "보고할 것도 없네. 생산에 들어가야 해." 곧바로 브레즈네프에게 전화를 걸어 덧붙였다. "우스티노프? 엿이나 먹으라지, 그 작자 헛소리랑 같이!"

야코프 랴보프는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제1서기(1971–1976)와 CPSU 중앙위원회 서기(1976–1979)로서 소련 군수산업을 총괄한 당-국가 관료다. 우랄 기술자 출신으로 키릴렌코의 발탁을 받아 스베르들롭스크 당 조직을 장악했고, 보리스 옐친을 발굴해 후계자로 추천했다. 중앙당 서기로 옮겨 국방을 담당하자 우스티노프와 T-72 전차 채택을 두고 정면 충돌했으며, 그레치코 원수의 지지로 T-72를 소련 주력 전차로 관철시켰다. 이후 국가계획위 제1부의장, 대외경제관계위 의장, 각료회의 부의장, 주프랑스 대사를 역임하고 페레스트로이카 말기 고르바초프 및 리즈코프와의 갈등으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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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4제9공장 선반공
  • 1946–1960스베르들롭스크 터보모터 공장 기술자·설계국장·공장장·당위서기
  • 1960–1963CPSU 스베르들롭스크 오르조니키제 구당위 제1서기
  • 1963–1966CPSU 스베르들롭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66–1971CPSU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제2서기
  • 1971–1976CPSU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 제1서기
  • 1971–1990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76–1979CPSU 중앙위원회 서기 (국방·군수산업 담당)
  • 1979–1983소련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제1부의장
  • 1983–1984소련 대외경제관계위원회(GKES) 의장
  • 1984–1986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화학공업 담당)
  • 1986–1990주프랑스 소련 특명전권대사

예브게니 미하일로비치 탸젤니코프

Евгений Михайлович Тяжельник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비에트 러시아 1928–2020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청년 간부 파이프라인의 전형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이 되자 탸젤니코프는 브레즈네프에게 통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젊은 안드로포프가 카렐리야에서 썼다는 시를 찾아 나선 것이다. 안드로포프는 그런 찬양이 필요 없었다. 탸젤니코프는 루마니아 대사로 떠났다.

브레즈네프 시대에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1968–1977), CPSU 중앙위원회 선전부장(1977–1982), 주루마니아 소련 대사(1982–1990)를 지낸 소비에트 당-국가 엘리트의 전형이다. 콤소몰 지도자로서 바이칼-아무르 간선철도(BAM) 건설을 비롯한 대규모 청년 동원 사업을 총괄했으며, 1971년부터 19년간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첼랴빈스크 교육대학 총장에서 지역 당 이념비서를 거쳐 전국 청년 조직의 수장으로 발탁된 그의 경로는 후기 소비에트 노멘클라투라의 표준 궤적을 보여준다. 브레즈네프에 대한 개인적 충성으로 승진했으나, 안드로포프 집권 후에는 같은 방식이 통하지 않아 루마니아 대사로 전출되었고 차우셰스쿠 정권 말기까지 부쿠레슈티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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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첼랴빈스크 교육대학 물리·수학부 우등 졸업, 마르크스-레닌주의 강좌 조교
  • 1950–1952첼랴빈스크 교육대학 콤소몰 위원회 비서
  • 1952–1954첼랴빈스크 주 콤소몰 위원회 선전선동부 부장
  • 1956–1961첼랴빈스크 교육대학 마르크스-레닌주의 강좌 선임교원, 당위원회 비서
  • 1961–1964첼랴빈스크 교육대학 총장
  • 1964–1968첼랴빈스크 주 CPSU 위원회 이념담당 비서
  • 1968–1977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77–1982CPSU 중앙위원회 선전부장
  • 1982–1990주루마니아 소련 특명전권대사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파블로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Павл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29–1993 ○ 자연사

반反해빙 노선의 콤소몰 수장이자 모스크바 올림픽을 이끈 체육 장관

밤중에 브레즈네프가 직접 전화를 걸었다: "들어봐, 심판이 왜 '니스트루'를 편파 판정한 거야? 조치를 취해." 또 다른 고위 인사가 전화해 말했다: "프라하에 연결돼 있나? 당장 전화해서 하키 선수들에게 골대를 향해 슛을 날리라고 해."

셸레핀의 후원 아래 30세에 콤소몰 제1서기가 되어 9년간 청년동맹을 이끌었다.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에 맞서 ≪프라우다≫를 통해 솔제니친·에렌부르크를 공개 공격하고, 1930년대를 어두운 색으로만 그리는 풍조를 비판한 강경파였다. 1968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 계열을 숙청할 때 체육위원회 의장으로 밀려났으나, 오히려 15년간 소련 스포츠의 황금기를 진두지휘하며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72년 슈퍼시리즈를 성사시켰다. 안드로포프 집권 후 몽골·버마 대사로 전출되어 사실상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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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9콤소몰 전임 간부로 활동, 모스크바 시당 콤소몰 제2서기·제1서기
  • 1959–1968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셸레핀의 후계자로 청년동맹 지휘
  • 1961–197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63≪프라우다≫ 기사로 ≪노비 미르≫·솔제니친·에렌부르크 공격
  • 1965≪프라우다≫ 기사에서 1930년대를 부정적 일변도로 보는 풍조 비판
  • 1968–1983소련 체육·스포츠 위원회 의장, 15년간 스포츠 행정 총괄
  • 1972소련-캐나다 아이스하키 슈퍼시리즈 성사 주도
  • 1977–1983소련 올림픽 위원회 초대 위원장
  • 1980모스크바 하계 올림픽 조직 총괄
  • 1983–1985주몽골 소련 대사
  • 1985–1989주버마 소련 대사, 이후 강제 은퇴

유리 니콜라예비치 흐리스토라드노프

Юрий Николаевич Христорадн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비에트 러시아인 1929–2018 ○ 자연사

고리키 지역을 14년간 이끈 당 간부, 소련 말기 종교정책의 마지막 책임자

1990년 6월, 흐리스토라드노프는 러시아 정교회 지방공의회에서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해 연단에 섰다. 그가 인사말을 전한 바로 그 공의회는 알렉시 2세를 새 총대주교로 선출했다.

유리 흐리스토라드노프는 브레즈네프 시대 고리키(니즈니노브고로드) 주 당위원회 제1서기로 14년간 재임하며 도시의 대규모 주택 건설과 지하철 착공을 주도한 소련의 지역 당 간부였다. 고리키 자동차 공장의 주물 공장에서 노동자로 출발하여 당 기구를 따라 승진했고, 1976년부터 1990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1988~1989)을 거쳐 소련 각료회의 산하 종무위원회의 마지막 의장(1989~1991)으로서 고르바초프 치하의 종교 자유화 국면에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관장했다. 1990년 러시아 정교회 지방공의회에서 소비에트 정부를 대표하여 인사말을 전했으며, 이 공의회는 알렉시 2세 총대주교를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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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고리키 자동차 공장 주물 공장 작업반장
  • 1952주물 공장 부책임자 보좌
  • 1958주물 공장 부책임자
  • 1960자동차 공장 주물 단지 당위원회 서기
  • 1962고리키 시 아브토자보츠크 구 당위원회 서기
  • 1963고리키 시 아브토자보츠크 구 당위원회 제1서기
  • 1966고리키 시 당위원회 제2서기
  • 1968고리키 시 당위원회 제1서기
  • 1974고리키 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76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88소련 최고소비에트 연방회의 의장
  • 1989소련 각료회의 종무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니키토비치 슬륀코프

Николай Никитович Слюньк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비에트 벨라루스 1929–2022 ○ 자연사

트랙터 공장장 출신 정치국원, '당 중앙위의 디렉터'

1983년 1월 안드로포프가 급서한 키셀료프의 후임으로 그를 긴급 소환했을 때, 슬륀코프는 당 경험 부족을 들어 사양했다. 안드로포프의 답은 짧았다: '오늘날 가장 큰 정치는 경제요. 가서 그 정치를 하시오.'

민스크 트랙터 공장에서 노동자로 시작해 공장장·총감독을 거쳐 벨로루시 공산당 제1서기(1983~1987)와 고르바초프 치하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1987~1990)를 지낸 소비에트 경제 관료 출신 정치인. 벨로루시 당 책임자 시절 농업 생산량을 30% 끌어올리고 적자 농장을 완전 해소해 '당 중앙위 디렉터'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실무형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1987년 중앙위 경제부장으로 발탁되어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계획경제에서 시장 지향 개혁으로의 이행을 주도했으나, 정부 수반 니콜라이 리시코프와의 마찰과 건강 악화로 1990년 정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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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60민스크 트랙터 공장 보조기사·기사·상급기사·부책임자·책임자·노조위원장
  • 1960–1965민스크 트랙터 예비부품공장 책임자
  • 1965–1972민스크 트랙터 공장장·민스크 트랙터제조 생산연합 총감독
  • 1972–1974민스크 시당위 제1서기
  • 1974–1983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 1983–1987벨로루시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87–1990CPSU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원; 1987~1988 경제부장, 1988~1990 사회경제정책위원회 위원장

블라디미르 안토노비치 이바시코프

Владимир Антонович Ивашко
당 서기국 · 조직인사 러시아 우크라이나 1932–1994 ↓ 당 해체 1991

해체 직전 공산당의 마지막 부서기장

1991년 8월 21일 아침, 쿠데타가 무너지는 것이 확실해지자 이바시코는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야나예프에게 전화해 "고르바초프를 만나러 갈 비행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거절당한 그는 결국 자신이 지지하지 않은 쿠데타 주역들—야조프, 루키야노프 등—과 같은 비행기에 올라 포로스로 향해야 했다.

하르키우 광산대학 출신의 경제학자로, 우크라이나 당 기구에서 20년간 경력을 쌓은 뒤 1989년 셰르비츠키의 후임으로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신설된 부서기장직에 선출되어 모스크바로 옮겼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고르바초프가 총서기직을 사임하자 당 역사상 마지막 지도자가 되었으나, 불과 닷새 만에 당 활동이 정지되면서 소비에트 공산당은 그와 함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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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90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 1990–91공산당 부서기장
  • 1991.8고르바초프 사임 뒤 며칠간 서기장 대행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파스투호프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Пастух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비에트 러시아 1933–2021 ○ 자연사

콤소몰의 마지막 거물이자 고스코미즈다트 수장

1967년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예고리체프브레즈네프의 국방 정책을 공개 비판한 다음 날, 파스투호프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예고리체프가 답했다. "보랴, 왜 그랬나? 네 인생을 망쳤어."

1977년부터 1982년까지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4천만 대원의 청년 조직을 이끈 소비에트 당-국가 간부이다. 재임 중 바이칼-아무르 간선철도(BAM) 건설과 북극점 스키 횡단 등 대규모 청년 동원 사업을 총괄했고, 1978년 CPSU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소련 국가출판·인쇄·서적거래위원회(고스코미즈다트) 의장으로서 검열 체계와 출판 산업을 관장했으며, 이후 덴마크(1986–1989)와 아프가니스탄(1989–1992) 주재 대사를 지냈다. 소련 해체 후에도 러시아 외무차관, CIS 담당 장관, 국가두마 의원을 역임하며 후기 소비에트 엘리트의 연속성을 대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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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바우만 고등기술학교 졸업 (기계공학), 바우만 구 콤소몰 제2비서
  • 1959–1961바우만 구 콤소몰 제1비서
  • 1961–1962모스크바 시 콤소몰 제2비서
  • 1962–1964모스크바 시 콤소몰 제1비서
  • 1964–1977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
  • 1977–1982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2–1986소련 국가출판·인쇄·서적거래위원회 의장
  • 1986–1989주덴마크 소련 특명전권대사
  • 1989–1992주아프가니스탄 소련/러시아 특명전권대사
  • 1992–1996러시아 연방 외무차관
  • 1996–1998러시아 연방 외무제1차관
  • 1998–1999러시아 연방 CIS 담당 장관

발레리 이바노비치 볼딘

Валерий Иванович Болдин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35–2006 ↓ 실각 · 구금 1991, 자연사

고르바초프의 문서를 관리하다 그를 배반한 당 기구 수호자

1991년 8월 18일, 볼딘은 10년간 보좌했던 고르바초프에게 최후통첩을 전하기 위해 바클라노프·바렌니코프·셰닌과 함께 포로스로 날아갔다.

티미랴제프 농업대학과 중앙위 사회과학원을 졸업한 경제학자 출신으로, 1961년부터 중앙위 기구에서 일했으며 1969년부터 《프라우다》에서 농업부장과 경제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81년 고르바초프의 보좌관이 되었고, 1987년부터 중앙위 총무부장으로서 정치국과 서기국의 전체 문서 흐름을 통제하는 자리에 올랐으며, 1990년에는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겸임했다. 그러나 1991년 8월 쿠데타에서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에 가담하여 바클라노프·바렌니코프·셰닌과 함께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간 4인방 중 한 명이 되었고, 쿠데타 실패 후 체포·구금되었다가 1994년 사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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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65중앙위 기구 근무
  • 1969–81《프라우다》 농업부장·경제논설위원
  • 1981–87고르바초프 중앙위 서기·서기장 보좌관
  • 1987–91중앙위 총무부장
  • 1990–91소련 대통령 비서실장
  • 1991GKChP 가담·체포·구금
  • 1994–2006은행 고문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레벤코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Ревенко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우크라이나 1936–2014 ○ 자연사

고르바초프 대통령 집권기의 제도적 중추, 총무부장에서 대통령장까지

1990년 고르바초프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날, 레벤코를 불러 "소비에트 백만장자를 보고 싶나?"라고 한 뒤 상금 전액을 아동 종양센터와 체르노빌 지역에 배분했다. 다 쓴 뒤 고르바초프가 말했다: "이제 백만장자는 없네."

우크라이나 출신 소련 당·국가 기구 관료로, 고르바초프 시기 중앙당 총무부장과 소련 대통령장을 지내며 개혁기 제도 운영의 핵심 축을 형성했다. 오데사와 키예프에서 콤소몰과 당 기구를 거쳐 1984년 모스크바로 발탁되었고, 1985년 총무부장이 되어 중앙위 문서 흐름과 서기장실을 총괄하는 최측근 참모가 되었다. 1990년 대통령제 출범 후 대통령자문위원회 위원과 대통령장을 역임하며 소련 말기 행정권의 제도적 전환을 실무적으로 떠받쳤다. 소련 해체 후 고르바초프 재단 부총재로 일하다 키예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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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61오데사 냉동기계공장 기술자
  • 1961–1972오데사 콤소몰 지도부, 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 서기
  • 1972–198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감사원, 키예프 주당위 서기·제2서기
  • 1980–1984우크라이나 SSR 최고회의 간부회의 위원, 우크라이나 공산당 감사위원회 의장
  • 1984–1985CPSU 중앙위 감사원, 조직당사업부 부부장
  • 1985–1991CPSU 중앙위 총무부장 — 고르바초프의 사실상 비서실장
  • 1990–1991소련 대통령자문위원회 위원
  • 1991–1992소련 대통령장

올레크 세묘노비치 셰닌

Олег Семёнович Шенин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37–2009 ○ 자연사

소련을 지키려다 감옥으로 간 마지막 정치국원

GKChP 위원들은 가장 큰 실수를 했다. 'A'라고 말하고서 'B'와 나머지 알파벳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소련 말기 당 조직·인사 업무를 총괄한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로, 실질적으로 고르바초프와 이바시코에 이은 당내 3인자였다. 1987년부터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당 제1서기를 지내며 시베리아 공업지대를 관리했고, 1990년 정치국에 진입해 페레스트로이카 후반기 당 기구의 보수적 반격을 주도했다. 1991년 8월 쿠데타에서 GKChP에 가담해 바클라노프·볼딘·바렌니코프와 함께 포로스의 고르바초프를 찾아간 4인 중 한 명이었으며, 실패 후 1년 이상 수감되었다가 1994년 사면되었다. 소련 해체 후에도 공산당연합(СКП-КПСС) 의장과 재건 КПСС 의장을 맡으며 소비에트 체제 복원을 위한 통일공산당 운동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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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2CPSU 입당
  • 1974–1977아친스크 시당 제1서기
  • 1977–1983하카스 주당 제2서기 → 아프가니스탄 당 고문
  • 1985–1987하카스 주당 제1서기
  • 1987–1990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당 제1서기
  • 1990–1991CPSU 정치국원·중앙위 서기 (조직당사업)
  • 1993–2001СКП-КПСС 평의회 의장
  • 2004–2009재건 КПСС 의장

갈리나 블라디미로브나 세묘노바

Галина Владимировна Семёнова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937–2017 ○ 자연사

페레스트로이카기의 여성·가족 정책 설계자, 정치국 네 번째 여성

“나는 그저 한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단 1분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 정치국 입성 후 ‘여성 담당’이라는 낙인에 맞서

갈리나 세묘노바는 소련 역사상 정치국 정위원에 오른 네 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고르바초프 시기 말기 가족·여성·인구정책을 총괄한 당 중앙위 서기였다. 1981년부터 10년간 잡지 《크레스티얀카》(농촌 여성)의 편집장으로 재임하며 발행부수를 600만 부에서 2,200만 부로 끌어올렸고, 패션·가족·문화 기사로 편집 방향을 전환해 수백만 소비에트 여성의 일상 담론에 접속했다. 1990년 제28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원 겸 서기국원으로 발탁되었으며, 여성위원회 신설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중앙위 결정을 주도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에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당 지도부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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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오데사 지역신문 《콤소몰스코예 플레먀》 문예부원
  • 1963우크라이나 콤소몰 중앙위 기관지 《콤소몰스카야 이스크라》 부장
  • 1965–1974콤소몰 중앙위 기관지 《콤소몰스카야 지즌》 문예부원 → 부장 → 책임비서
  • 1974–1981《콤소몰스카야 지즌》 편집장
  • 1978–1981CPSU 중앙위 부설 사회과학 아카데미(AON) 대학원생
  • 1981–1990《크레스티얀카》(농촌 여성) 편집장
  • 1990–1991CPSU 중앙위 서기 · 정치국 위원
  • 1991소련 대통령 비서실 고문

푸아트 엔베르 오글루 무사예프

Fuad Ənvər oğlu Musayev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아제르바이잔인 1938–2017 ○ 신부전으로 사망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바쿠로 가는 버스를 막아 폭력을 숨가이트로 돌린 인물

“나는 이것이 포그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정착지들에서 도시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라고 명령했다. 명령은 실행됐다. 버스들은 숨가이트로 향했다.”

소련 및 아제르바이잔의 당·국가 관료로, 건설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1983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1988년 2월 아르메니아에서 쫓겨난 아제르바이잔인 난민들이 버스로 바쿠에 몰려들자 시내 진입로를 봉쇄했고, 이 조치는 바쿠의 폭력적 충돌을 막았으나 버스 행렬이 숨가이트로 방향을 돌리게 만들었다. 소련 해체 후에는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첫 축구협회 회장(1992~2003)을 지내며 아제르바이잔 축구의 UEFA·FIFA 가입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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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1977아제르바이잔 SSR 농촌건설부 제1차관
  • 1977–1981아제르바이잔 SSR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위원장
  • 1981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부의장
  • 1981–198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설 담당 서기
  • 1983–1988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89–1990소련 산업안전·광산감독 국가위원회 의장
  • 1990–1991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업 담당 서기
  • 1992–2003아제르바이잔 축구협회 연합(AFFA) 회장

게오르기 페트로비치 라주몹스키

Георгий Петрович Разумовский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인 1936– ○ 생존

페레스트로이카 인사교체의 설계자, 마지막 생존 정치국원

1989년 1월, 빌뉴스 시당은 보고선거 비판에 대한 답변을 두 번째로 요구했으나 라주몹스키의 답변은 없었고, 그해 12월 리투아니아 공산당은 독자노선을 선언했다.

고르바초프 시기 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1985~1988)과 당건설간부정책위원회 위원장(1988~1990)을 맡아 페레스트로이카 최대 규모의 간부 교체를 주도한 당 조직·인사 책임자였다. 농학자 출신으로 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제1서기(1983~1985)를 거쳐 1986년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에 발탁되었다. 당내 민주화를 내세운 고르바초프 아래에서, 라주몹스키가 중앙에서 내려보낸 엄격한 대의원 할당은 리투아니아 공산당의 반발과 분리 독립을 촉발한 연쇄 요인이 되었다. 상하이 총영사(1990~1992)를 지냈고, 2025년 현재 1986년 정치국원 중 유일한 생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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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쿠반농업대학 졸업, 콜호스 농학자
  • 1959–1961콤소몰 구역위 제1서기
  • 1964–1967코레놉스크 구역당 제1서기
  • 1967–1971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조직당사업부장
  • 1971–1973중앙위 조직당사업부 부문장
  • 1973–1981크라스노다르 지방집행위원회 의장
  • 1981–1983소련 각료회의 사무국 농업부장
  • 1983–1985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제1서기
  • 1985–1988중앙위 조직당사업부장 (리가초프 후임)
  • 1986–1990중앙위 서기
  • 1988중앙위 당건설간부사업부장
  • 1988–1990당건설간부정책위원회 의장, 정치국 후보위원
  • 1990–1992주상하이 소련 총영사

그리고리 페트로비치 하르첸코

Григорий Петрович Харченко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우크라이나인 1936– ○ 소련 해체 후 모스크바 정착

숨가이트의 참상을 목격한 조직당사업부 부장, "우리는 하루 늦었다"

고르바초프는 우리가 세 시간 늦었다고 말하지만, 전혀 아니다. 우리는 하루 늦었다! 하루 종일 군대 파견 결정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소련 철도 기술자에서 당 간부로 성장하여 고르바초프 시기 중앙위 조직당사업부 부장(1987~1988)을 지냈다. 1988년 2월 28일 밤 KGB 부의장 필리프 봅코프와 함께 숨가이트에 도착, 사흘간의 포그롬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중앙의 대응이 '세 시간이 아니라 하루 늦었다'고 증언했다. 이후 자포리자 주당 제1서기(1988~1990)와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정치국원(1990~1991)을 지냈으며, 소련 해체 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상품생산자연합 부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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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모스크바철도공학원 졸업, 자포리자 전기기관차수리공장 근무
  • 1960–1967콤소몰 서기 → 자포리자 주 콤소몰 제1서기
  • 1967–1974레닌 구 당 제1서기 → 자포리자 시집행위 의장
  • 1974–1986자포리자 주당 산업담당 서기 → 제2서기
  • 1987–1988중앙위 조직당사업부 부장
  • 1988.02볼스키 조에 합류, 숨가이트 파견
  • 1988–1990자포리자 주당 제1서기
  • 1990–1991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제2서기·정치국원

발렌틴 알렉산드로비치 쿱초프

Валенти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упц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37– ↓ 실각 1993 · 생존

러시아 공화당을 재건한 마지막 세대 서기

1991년 10월 25일, 당 활동 정지 일주일 후 쿱초프는 크렘린에서 옐친을 만나 러시아 공산당 금지령을 철회해 달라고 설득했다. 옐친은 듣지 않았고, 쿱초프는 이후 1년 반 동안 '지하 제1서기'로서 당을 복원대회까지 이끌었다.

볼로그다주 집단농장과 제철소를 거쳐 올라온 금속공학자 출신 당 간부로, 1985년부터 5년간 볼로그다주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90년 CPSU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어 사회정치조직 담당 부서를 이끌었고, 러시아 공화국 공산당(КП РСФСР) 창립 작업에 참여했다. 1991년 8월 이반 폴로스코프의 후임으로 КП РСФСР 제1서기에 선출되었으나, GKChP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음에도 사건 직후 '쿠데타 공모'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옐친의 당 활동 금지령 이후에도 지하에서 조직을 유지하며 1993년 КПРФ 복원대회를 주도했고, 이후 11년간 쥬가노프의 제1부의장으로서 신생 러시아 공산당의 제도화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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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58볼로그다주 콜호스 노동자 · 독서실장 · 군 복무
  • 1958–1974체레포베츠 제철소 압연공 · 현장감독 · 당위원회 서기
  • 1974–1979체레포베츠 시당 제1서기
  • 1979–1984볼로그다 시당 제1서기
  • 1984–1985볼로그다 주당 제2서기
  • 1985–1990볼로그다 주당 제1서기
  • 1989–1991소련 인민대의원
  • 1990–1991CPSU 중앙위 서기 · 사회정치조직 담당
  • 1991.8–11КП РСФСР 중앙위 제1서기
  • 1993–2004КПРФ 중앙위 제1부의장
  • 1995–2011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II–V 소집)

이반 쿠지미치 폴로스코프

Иван Кузьмич Полозк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35– ↓ 실각 1991 · 생존

러시아 공화당을 세운 보수파 당간부

고르바초프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폴로스코프를 아주 오래전부터 안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내지만, 멍청하고 무식하다. 누군가 써주면 그대로 읊을 뿐이다."

러시아 SFSR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 수준 공산당인 КП РСФСР의 창립 제1서기(1990–1991)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맞서는 당내 보수 반대파의 얼굴이었다. 1990년 5월 러시아 최고회의 의장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과 맞붙어 초기 집계에서 앞섰으나 정치국의 명령으로 후보에서 물러났고, 한 달 뒤 창립대회에서 러시아 공산당을 이끌게 되었다. 크라스노다르 당 조직을 5년간 이끈 지방 당료 출신으로, 정치국 위원까지 올랐으나 당내 개혁파와 강경파 양쪽의 압박 속에 1991년 8월 심장마비로 사임했다. 쿠데타 실패와 당 해산 후에도 КПРФ 자문기구에서 활동하며 러시아 공산당 운동의 상징적 원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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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2콤소몰 · 쿠르스크주 솔른체보 구 당 간부
  • 1969–1972쿠르스크주 당 부서 부장
  • 1972릴스크 구 집행위원회 의장
  • 1973–1978, 1980–1983CPSU 중앙위 기구 근무
  • 1983–1984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이념 담당 서기
  • 1984–1985CPSU 중앙위 조직당사업부 과장
  • 1985–1990크라스노다르 지방당 제1서기
  • 1990–1991КП РСФСР 중앙위 제1서기 · CPSU 정치국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