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1920년 히바 칸국의 실권을 쥐고 소비에트 권력과 싸운 투르크멘 요무트 부족 지도자
1857년(1862년 설도 있다) 투르크멘 요무트 부족 지도자의 아들로 태어나 마을의 재판관(카지)과 물 관리인(미라브)을 지냈고, 1912~1916년 투르크멘 봉기로 이름을 얻었다. 1918년 1월 히바의 칸 아스판디야르에게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칸을 암살하고 그 숙부 사이드 압둘라를 허수아비 칸으로 세워 실권을 쥐었다. 1918년 11월 페트로알렉산드롭스크를 포위했고 1919년 콜차크 정부와 연락했으나, 1920년 초 붉은 군대에 패해 카라쿰 사막으로 물러났다. 이후 호레즘 인민소비에트공화국과 투르크멘 SSR을 거듭 침공해 1924년 1월에는 히바를 포위했다.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으로 망명해 1938년 헤라트 근처에서 숨졌다.
1880년 부하라에서 에미르 압둘아하드 칸의 아들로 태어나 열세 살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져 니콜라이 사관학교에서 3년간 통치와 군사를 배웠고, 돌아와 나사프와 카르마나의 총독을 지냈다. 1911년 망기트 왕조의 12대이자 마지막 에미르가 되었다. 즉위 초에는 뇌물과 자의적 징세를 금하는 개혁을 내걸었으나 곧 전통파의 손을 들었고, 1917년 이후 청년부하라인 등 개혁파를 탄압했다. 1918년 3월 콜레소프가 이끈 볼셰비키의 공격을 물리쳤지만, 1920년 8월 말 부하라 작전 중 두샨베를 거쳐 카불로 달아났다. 망명지에서 영국과 손잡고 권력을 되찾으려 했고 바스마치를 지원했다고도 하며, 1944년 카불에서 숨졌다.
1889년 무렵 부하라 에미르국 코크타시 마을에서 우즈베크 로카이 부족 장로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 부족의 벡이 되어 에미르 사이드 알림 칸을 섬겼고, 에미르가 망명한 뒤 그의 복위를 내걸고 동부 부하라의 여러 부족을 모아 바스마치를 이끌었다. 이슬람 보수주의를 내세워 자디드를 대열에서 몰아냈고, 엔베르 파샤를 의심해 한때 체포했다. 1926년 아프가니스탄으로 물러난 뒤에도 국경 너머로 습격을 이어 갔고, 그곳에서 아프가니스탄 정부군과도 싸웠다. 1931년 6월 소련 영내의 카피르니간강을 건너다 사로잡혀 타슈켄트로 압송되었고, 8월 31일 총살되었다. 2021년 우즈베키스탄 대법원이 복권했다.
1991년 연방 존속 국민투표에서 우즈베키스탄은 잔류를 택했지만, 그는 같은 해 독립을 선언했다.
이슬람 카리모프는 소비에트 체제의 경제관료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으로 전환한 정치가였다. 그는 독립 직전 연방의 틀을 둘러싼 협상에 참여하면서도 우즈베키스탄의 주권과 국가적 선택권을 우선했고, 1991년 독립 뒤에는 이를 국가 건설의 중심 원리로 삼았다. 그의 통치는 산업 기반과 국가 통합을 지키려는 정책을 추진했지만, 야당과 언론을 억누르고 이슬람주의와 대중 시위를 강경하게 통제하는 권위주의로 굳어졌다. 따라서 카리모프는 탈소비에트 중앙아시아에서 주권 국가를 세운 지도자인 동시에 정치적 다원주의를 희생시킨 통치자로 기억된다.
1880년 부하라에서 에미르 압둘아하드 칸의 아들로 태어나 열세 살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져 니콜라이 사관학교에서 3년간 통치와 군사를 배웠고, 돌아와 나사프와 카르마나의 총독을 지냈다. 1911년 망기트 왕조의 12대이자 마지막 에미르가 되었다. 즉위 초에는 뇌물과 자의적 징세를 금하는 개혁을 내걸었으나 곧 전통파의 손을 들었고, 1917년 이후 청년부하라인 등 개혁파를 탄압했다. 1918년 3월 콜레소프가 이끈 볼셰비키의 공격을 물리쳤지만, 1920년 8월 말 부하라 작전 중 두샨베를 거쳐 카불로 달아났다. 망명지에서 영국과 손잡고 권력을 되찾으려 했고 바스마치를 지원했다고도 하며, 1944년 카불에서 숨졌다.
1889년 무렵 부하라 에미르국 코크타시 마을에서 우즈베크 로카이 부족 장로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 부족의 벡이 되어 에미르 사이드 알림 칸을 섬겼고, 에미르가 망명한 뒤 그의 복위를 내걸고 동부 부하라의 여러 부족을 모아 바스마치를 이끌었다. 이슬람 보수주의를 내세워 자디드를 대열에서 몰아냈고, 엔베르 파샤를 의심해 한때 체포했다. 1926년 아프가니스탄으로 물러난 뒤에도 국경 너머로 습격을 이어 갔고, 그곳에서 아프가니스탄 정부군과도 싸웠다. 1931년 6월 소련 영내의 카피르니간강을 건너다 사로잡혀 타슈켄트로 압송되었고, 8월 31일 총살되었다. 2021년 우즈베키스탄 대법원이 복권했다.
부하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자디드 개혁운동에서 소비에트 우즈베키스탄의 초대 총리가 된 중앙아시아 혁명가
러시아 외교관 알렉산드르 바르민의 회고: 「‘우즈베크의 레닌’이라 불린 호자예프는 왜소하고 마른 체구였으나 엄청난 에너지로 가득했다. 말라리아로 얼굴이 푸르스름해질 때도 있었지만, 엄청난 업무 속에서도 즐겁게 웃을 줄 알았다. 그는 자기 민족을 알았고 뛰어난 연설가였으며 깊이 사랑받았다.」
부하라의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으로, 11세에 모스크바로 유학하여 전통사회와 근대 유럽의 간극을 체험했다. 1916년 범튀르크주의 자디드 운동에 합류, 청년 부하라당을 창당했고 1918년 토후 전복 시도 실패 후 사형 선고를 받고 타슈켄트로 도피했다. 1920년 부하라 인민소비에트공화국 인민나지르회의 의장이 되었고, 1924년 우즈베크 SSR 수립과 함께 초대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중앙아시아의 국가 획정과 소비에트 연방 편입을 이끌었다. 1930년대 스탈린의 목화 단작 정책에 반대하다 몰락, 1937년 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 선고 후 총살되었다.
우즈베크 공산당 최초의 우즈베크인 제1서기, 강제 집단화와 목화 단작을 이끈 뒤 대숙청에 희생된 인물
«나는 지금 발가벗겨진 인간 형상의 짐승이다.» 1938년 3월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최후 진술에서 이크라모프가 남긴 말로 전해지지만, 다른 사료에는 «너희가 나를 짐승으로 만들었다»는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문구는 확정되지 않았다.
타슈켄트의 우즈베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8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내전기 투르키스탄에서 당 기관을 이끌었고, 1921~1922년 투르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서기를 지냈다. 1922년부터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24~1925년 우즈베크 공산당 창당 조직국원을 맡았다. 1929년 제1서기가 되어 우즈베크인 최초로 이 직책에 올랐고 강제 집단화를 밀어붙여 우즈베키스탄을 소련의 주요 목화 공급지로 만들었다. 1934년 전연방 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37년 해임되어 9월 20일 체포되었고,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되었다. 1957년 6월 완전히 복권되어 당적을 회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