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년 7월 25일 코블렌츠에서 자기 이름으로 선언을 내, 프랑스 왕실이 해를 입으면 파리와 주민에게 가혹한 보복을 하겠다고 경고했다.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군주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조카이자 프로이센군 원수였다. 1792년 전쟁이 시작되자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 사령관이 되었고, 7월 25일 코블렌츠에서 이른바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을 냈다. 명의는 공작이었지만 문안은 망명 귀족 쪽에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을 지키려던 이 위협은 파리에서 오히려 왕정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그는 롱위와 베르됭을 점령했으나 9월 20일 발미에서 진격을 멈추고 프랑스에서 철수했다. 1806년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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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아버지를 이어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군주가 되었다.
1792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 사령관으로 7월 25일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을 냈다.
1792롱위와 베르됭을 점령했으나 9월 20일 발미에서 진격을 멈추고 프랑스에서 물러났다.
1806프로이센군을 이끌고 아우어슈테트에서 싸우다 치명상을 입고 11월 10일 오텐젠에서 사망했다.
1791년 8월 필니츠에서 레오폴트 2세와 함께 프랑스 왕을 지지하는 선언에 서명했고, 1792년 여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원정에 직접 참가했다.
1786년 숙부 프리드리히 2세를 이어 프로이센 왕이 되었다. 국내에서는 선왕의 계몽 통치에서 물러나 검열과 종교 통제를 강화했다. 프랑스 혁명에 대응해 오스트리아와의 오랜 대립을 접고, 1791년 8월 필니츠에서 레오폴트 2세와 함께 선언을 냈으며 1792년 2월 정식 동맹을 맺었다. 1792년과 1793년 대프랑스 원정에 직접 참가했으나 재정 부족에 묶였고, 조정은 폴란드 분할에 더 관심을 두었다. 1795년 바젤에서 프랑스와 단독 강화를 맺었고 179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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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숙부 프리드리히 2세가 죽자 프로이센 왕으로 즉위했다.
17918월 필니츠에서 레오폴트 2세와 함께 프랑스 왕을 지지하는 선언을 냈다.
1792–17932월 오스트리아와 정식 동맹을 맺고, 1792년과 1793년 대프랑스 원정에 직접 참가했다.
1793–1795제2·3차 폴란드 분할로 영토를 얻었고, 1795년 4월 바젤 조약으로 프랑스와 단독 강화했다.
1848년 슐레스비히 전쟁의 연방군 사령관을 지내고 11월 베를린에 진주해 혁명을 누른 프로이센 원수
1784년 슈테틴의 발트 독일계 브랑겔 가문에서 태어나 1796년 용기병 연대에 들어갔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공을 세워 철십자 훈장을 받았고, 1834년 뮌스터 사단장으로 쾰른 분쟁 때의 소요를 눌렀다. 1848년 4월부터 말뫼 휴전(8월 26일)까지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독일 연방군 제2군단을 지휘했다. 철수 명령에는 자신이 프로이센 왕이 아니라 제국 섭정의 지휘를 받는다며 버텼다. 그해 가을 마르크 총사령관이 되어 11월 10일 베를린에 진주해 계엄을 선포하고 프로이센 국민의회를 해산시켰다. 1856년 원수가 되었고, 여든 살에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의 연합군을 지휘했다. 「파파 브랑겔」로 불렸고 1877년 베를린에서 죽었다.
1790년 함부르크 핑켄베르더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17년부터 아헨에서 사업을 일으켰고 라인 철도 회사 부사장을 맡는 등 라인주의 철도 건설에 앞장섰다. 1843년 라인주 의회, 1847년 연합 의회 의원이 되었고 타협에 열린 자유주의의 대표 인물로 꼽혔다. 1848년 캄프하우젠의 3월 내각에서 재무장관이 되었고, 다음 아우어스발트 내각에서도 그 자리를 지키다 9월 8일 물러났다. 귀족에게는 위험한 급진파로, 급진파에게는 기득권의 하인으로 보였고 마르크스는 그를 「자유주의 아첨꾼」이라 비웃었다. 정계를 떠나 1851년 디스콘토 협회를 세웠다. 1864년 슐랑엔바트에서 죽었다.
1792년 7월 25일 코블렌츠에서 자기 이름으로 선언을 내, 프랑스 왕실이 해를 입으면 파리와 주민에게 가혹한 보복을 하겠다고 경고했다.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군주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조카이자 프로이센군 원수였다. 1792년 전쟁이 시작되자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 사령관이 되었고, 7월 25일 코블렌츠에서 이른바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을 냈다. 명의는 공작이었지만 문안은 망명 귀족 쪽에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을 지키려던 이 위협은 파리에서 오히려 왕정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그는 롱위와 베르됭을 점령했으나 9월 20일 발미에서 진격을 멈추고 프랑스에서 철수했다. 1806년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780아버지를 이어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군주가 되었다.
1792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 사령관으로 7월 25일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을 냈다.
1792롱위와 베르됭을 점령했으나 9월 20일 발미에서 진격을 멈추고 프랑스에서 물러났다.
1806프로이센군을 이끌고 아우어슈테트에서 싸우다 치명상을 입고 11월 10일 오텐젠에서 사망했다.
1791년 8월 필니츠에서 레오폴트 2세와 함께 프랑스 왕을 지지하는 선언에 서명했고, 1792년 여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원정에 직접 참가했다.
1786년 숙부 프리드리히 2세를 이어 프로이센 왕이 되었다. 국내에서는 선왕의 계몽 통치에서 물러나 검열과 종교 통제를 강화했다. 프랑스 혁명에 대응해 오스트리아와의 오랜 대립을 접고, 1791년 8월 필니츠에서 레오폴트 2세와 함께 선언을 냈으며 1792년 2월 정식 동맹을 맺었다. 1792년과 1793년 대프랑스 원정에 직접 참가했으나 재정 부족에 묶였고, 조정은 폴란드 분할에 더 관심을 두었다. 1795년 바젤에서 프랑스와 단독 강화를 맺었고 1797년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786숙부 프리드리히 2세가 죽자 프로이센 왕으로 즉위했다.
17918월 필니츠에서 레오폴트 2세와 함께 프랑스 왕을 지지하는 선언을 냈다.
1792–17932월 오스트리아와 정식 동맹을 맺고, 1792년과 1793년 대프랑스 원정에 직접 참가했다.
1793–1795제2·3차 폴란드 분할로 영토를 얻었고, 1795년 4월 바젤 조약으로 프랑스와 단독 강화했다.
빈 회의 뒤 「메테르니히 체제」로 혁명을 억누르다 1848년 3월 빈 봉기로 쫓겨난 오스트리아 국가재상
라인란트의 메테르니히 가문에서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나 스트라스부르와 마인츠에서 공부했다. 1809년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이 되었고, 빈 회의에서 오스트리아 대표단을 이끌어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 질서를 짰다. 1821년부터 1848년까지 국가재상을 지내며 「메테르니히 체제」로 러시아·프로이센과 손잡고 혁명과 민족 운동을 억눌렀고, 1819년 카를스바트 결의로 독일의 대학과 언론을 단속했으며, 국내에서는 검열과 첩자망을 썼다. 1848년 3월 13일 빈 봉기 때 루트비히 대공의 요구로 사임하고 런던으로 망명했다. 런던·브라이턴·브뤼셀을 거쳐 1851년 빈 궁정으로 돌아와 프란츠 요제프에게 조언했고, 1859년 86세로 죽었다.
1848년 슐레스비히 전쟁의 연방군 사령관을 지내고 11월 베를린에 진주해 혁명을 누른 프로이센 원수
1784년 슈테틴의 발트 독일계 브랑겔 가문에서 태어나 1796년 용기병 연대에 들어갔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공을 세워 철십자 훈장을 받았고, 1834년 뮌스터 사단장으로 쾰른 분쟁 때의 소요를 눌렀다. 1848년 4월부터 말뫼 휴전(8월 26일)까지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 독일 연방군 제2군단을 지휘했다. 철수 명령에는 자신이 프로이센 왕이 아니라 제국 섭정의 지휘를 받는다며 버텼다. 그해 가을 마르크 총사령관이 되어 11월 10일 베를린에 진주해 계엄을 선포하고 프로이센 국민의회를 해산시켰다. 1856년 원수가 되었고, 여든 살에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의 연합군을 지휘했다. 「파파 브랑겔」로 불렸고 1877년 베를린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