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 건설
동독은 왜 자기 수도 한복판에 자기 국민을 가두는 장벽을 쌓았는가, 그리고 서방은 왜 그것을 막지 않았는가?
베를린 장벽은 1961년 8월 13일 동독 정부가 서베를린을 둘러싸며 쌓은 156km의 경계 요새 시설이다. 1949년부터 1961년까지 350만 명의 동독 시민이 서독으로 탈출했으며, 그중 상당수가 베를린의 개방된 구역 경계를 통해 빠져나갔다. 숙련 노동자와 지식인의 대규모 유출로 동독 경제가 붕괴 직전에 이르자, 발터 울브리히트 동독 지도자는 니키타 흐루쇼프를 설득하여 경계 봉쇄를 승인받았다. 1961년 8월 3~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조약 회의에서 공식 합의가 이루어졌고, 8월 12일 밤부터 13일 새벽 사이 약 2만 5천 명의 동독 군경 병력이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를 철조망으로 차단했다. 서방 3국은 베를린의 4개국 공동관리 지위를 직접 침해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사적 대응을 피했고,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은 "장벽은 전쟁보다 훨씬 낫다"고 결론지었다. 콘크리트 장벽은 이후 28년간 냉전의 상징이 되었고, 최소 140명이 장벽을 넘다 사망했다.
하나의 독일이 둘이 되기까지: 점령, 분할, 그리고 두 개의 국가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무조건 항복했을 때, 독일은 더 이상 주권국가가 아니었다. 연합국 4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은 1945년 6월 5일 베를린 선언을 통해 독일 제국의 소멸을 공식화하고 영토를 4개의 군사 점령지구로 분할했다. 미국이 남부, 영국이 북서부, 프랑스가 남서부, 소련이 동부를 차지했으며, 수도 베를린은 소련 지구 한복판에 위치했음에도 4개국 공동관리 아래 4개 구역으로 분할되었다. 연합국통제위원회(Allied Control Council)가 독일 전체를 관할한다는 원칙은 있었지만, 실제로는 각 점령국이 자기 지구를 독립적으로 운영했다.
전후 독일은 물질적·인적 재앙 위에 서 있었다. 쾰른 주택의 66%, 뒤셀도르프 주택의 93%가 거주 불능 상태였고, 경제는 완전히 멈춰 섰다. 약 1,200만 명에서 1,400만 명의 독일계 주민이 동부의 옛 독일 영토와 중·동유럽 각국에서 추방되어 서쪽으로 밀려들어왔고, 그중 약 200만 명이 이동 중 사망했다. 전승국들은 포츠담 회담(1945년 7~8월)에서 독일의 탈나치화, 비무장화, 분권화, 그리고 배상금 지급을 합의했다.
그러나 점령국들 사이의 '독일'을 보는 시선은 처음부터 갈라져 있었다. 소련은 자국 점령지구에서 산업 시설의 약 30%를 해체해 본국으로 이전했고, 철도 복선의 한쪽 레일까지 뜯어갔다. 1946년 4월에는 소련 점령지구 내 독일 공산당(KPD)과 사회민주당(SPD)을 강제로 통합해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을 창당했다. 공식적으로는 '자발적 통합'이었으나 실제로는 소련 점령 당국의 압력 아래 이루어졌다. 발터 울브리히트를 비롯한 KPD 출신 인사들이 당의 실권을 장악했다.
반면 서방 점령국들은 독일의 경제적 자립과 민주화를 우선시했다. 1947년 1월, 미국과 영국은 자국 지구를 경제적으로 통합해 '비조니아(Bizonia)'를 출범시켰고, 그해 6월 발표된 마셜 플랜은 서방 지구의 부흥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다. 소련은 마셜 플랜을 '미제국주의의 경제적 침략'으로 규정하고 동유럽 전역의 참여를 차단했다. 서방 지구에서는 1948년 6월 화폐개혁으로 독일 마르크가 도입되었고, 소련은 이에 대응해 동베를린과 소련 지구에 별도의 화폐를 발행했다.
이 갈등은 1948년 6월 소련의 서베를린 봉쇄로 폭발했다. 스탈린은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육로·철도·수로를 차단했고, 서방 3국은 향후 15개월간 27만 8천 회 이상의 항공편으로 233만 톤의 물자를 공수하는 베를린 공수 작전으로 맞섰다. 소련은 1949년 5월 봉쇄를 풀었으나, 이 사건으로 독일 분단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1949년 5월 23일, 서방 3국은 자국 점령지구를 합쳐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을 수립했다. 같은 해 10월 7일, 소련 점령지구는 독일민주공화국(동독)으로 재편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두 개의 독일 국가가 탄생한 것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두 개의 적대적 체제가 냉전의 최전선에 서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베를린(동독 영토 한가운데 갇힌 4개국 공동관리 도시)은 이 두 체제가 가장 가까이 맞닿은 지점으로 남았다.
탈출하는 나라: 설립 첫날부터 흐르기 시작한 출혈
동독은 1949년 10월 7일 건국되던 순간부터 이미 사람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 문제는 정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정권이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다. 전쟁 직후 소련 점령지구 관리들은 '공화국 탈출(Republikflucht)'이라는 말을 이미 썼는데, 서쪽 세 점령지구로 가는 독일인의 이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건국 후 이 말은 그대로 유지되어, 1961년까지 약 350만 명, 동독 인구의 5분의 1에 가까운 사람들이 서방으로 빠져나갔다. SED는 이 유출을 멈추려 애쓰는 동시에, 떠나는 행위 자체를 도덕적으로 낙인찍었다. 1955년 선전원용 책자는 떠나는 사람을 '정치적·도덕적 후진성과 타락'으로 규정했고, 더 좋은 직장 제의에 넘어가 '새롭고 더 아름다운 삶의 씨앗이 싹트고 있는' 나라를 버린다고 질책했다.
그러나 숫자는 선전보다 말을 잘했다. 1950년 18만 7천 명, 1951년 16만 5천 명이 떠났고, 1953년에는 33만 1천 명으로 급증했다. 그해 상반기에만 22만 6천 명이 나갔는데, 이는 스탈린 말기의 점점 편집증적으로 변하는 숙청 분위기와, 6월 봉기를 소련군이 유혈 진압한 뒤의 공포가 겹친 결과였다. 서독은 이들을 '소련지구 난민'으로 받아들이고 연방 피난민법의 지원 대상으로 삼아, 동독을 떠나기만 하면 곧장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1952년 동서독 사이의 내독 국경이 철조망으로 봉쇄되자, 그때까지 국경을 넘던 사람들의 흐름은 전부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네 강대국이 공동 관리하는 베를린의 구역 경계는 봉쇄가 어려웠고, 그래서 도시 전체가 탈출의 고리(loop-hole)가 되었다. 1957년 12월 새 여권법으로 국외 이주 절차가 더 까다로워지자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서베를린을 경유해 탈출하는 사람의 비중이 그때까지 60% 수준이던 것이 1958년 말에는 90%를 훌쩍 넘어섰다.
떠나는 사람들이 평균보다 젊고 교육 수준이 높다는 사실이 이 위기를 단순한 인구 문제가 아니라 체제의 존립 문제로 만들었다. 엔지니어, 기술자, 의사, 교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이 불균형하게 빠져나가 '두뇌 유출'이 일어났고, 1960년대 초에는 동독의 노동 가능 인구가 전쟁 전의 70.5%에서 61%로 줄었다. 소련 측도 이 출혈이 자기 위성국의 신뢰성을 갉아먹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주동독 소련 대사 미하일 페르부힌은 베를린의 개방된 국경이 '사회주의 세계와 자본주의 세계 사이에 사실상 통제되지 않는 국경'으로서 사람들이 도시 양쪽을 비교하게 만들고, '안타깝게도 그것이 항상 동베를린에 유리하게 나오지는 않는다'고 보고했다. 결정적인 경고는 1958년 8월 28일 유리 안드로포프가 보낸 서한이었다. 당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당 관계를 담당하던 안드로포프는, 탈출자 가운데 지식인의 비중이 50% 늘었고 '지식인 탈출이 특히 위험한 국면에 이르렀다'고 중앙위원회에 전했다. 그리고 동독 지도부가 '더 높은 생활 수준 때문'이라고 설명하던 탈출 동기에 대해, 안드로포프는 탈출자들의 진술을 근거로 그것이 물질적인 이유라기보다 정치적인 이유라고 반박했다. 정권이 경제라는 변명을 내세우는 동안, 떠난 사람들은 정권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후통첩, 그리고 빈에서 벌어진 일방적인 대결
흐루쇼프가 1958년 11월 서베를린을 '악성 종양'이라 부르며 서방에 내민 것은 최후통첩이었다. 그해 초 스푸트니크의 성공으로 소련의 군사력에 과신에 빠진 그는, 서독이 나토에 가입하고 핵무기 운반 수단까지 갖추려 하자 베를린을 지렛대로 삼기로 했다. 1958년 11월 10일 연설에서 서방군의 6개월 내 철수를 요구한 데 이어, 11월 27일 미국·영국·프랑스에 보낸 각서는 서베를린을 '비무장 자유도시'로 만들 것을 요구하면서 1944년의 4개국 공동관리 협정을 '무효'라고 선언했다. 핵심은 6개월 안에 독일과 평화조약을 맺지 않으면 소련이 동독과 단독으로 조약을 체결하고, 서베를린 접근로의 통제권을 서방이 인정하지도 않는 동독 정부에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서방군은 동독의 허락이 있어야만 서베를린에 드나들 수 있게 된다.
서방은 메모를 최후통첩으로 읽었지만 하나로 뭉치지 못했다. 프랑스는 흐루쇼프의 허세를 받아치자는 강경론을 폈고, 아이젠하워도 처음에는 강경했으나 협상이 약해 보이는 길임을 깨달았다. 영국은 전쟁을 피하려는 태도가 뚜렷했다. 미국·영국·프랑스는 라이브 오크라는 비밀 계획팀을 꾸려 베를린 접근권을 군사적으로 보장할 육상·항공 계획을 세웠다. 나토의 눈으로 보면 적진 한복판의 서베를린은 군사적 가치가 전혀 없었지만, 아이젠하워는 '정치적 입장 때문에 전적으로 비논리적인 군사 태세를 취해야 하는 경우'라고 토로했다. 결국 흐루쇼프가 기한을 거듭 연기하며 유예한 끝에 1959년 5월 철회했고,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과 제네바 외무장관 회의는 합의 없이 막을 내렸다. 1961년 초 앞둔 소련은 미국 대선 결과를 기다리며 베를린 문제를 새 대통령에게 다시 걸기로 했다.
1961년 6월 4일 빈에서 케네디와 흐루쇼프가 처음 마주 앉았다. 케네디는 취임 직후 직접 만나면 갈등을 풀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참모들은 흐루쇼프를 과소평가한다고 우려했다. 피그스 만 침공의 실패로 케네디가 흔들렸다고 본 흐루쇼프는, 두 나치가 통일되면 전쟁이 되풀이된다는 소련식 논리를 펴며 동독과 단독 평화조약을 체결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케네디가 미국군은 '조약상의 권리'로 베를린에 주둔한다고 맞서자, 흐루쇼프는 4개국 협정이 조약으로 무효화될 것이라며 미국이 중간 합의를 거부하면 12월에 평화조약을 강행하겠다고 못박았다. 미국이 주둔을 철회하면 동맹의 신뢰가 무너진다고 버틴 케네디를 상대로, 흐루쇼프는 이념 논쟁에서 압도하며 상대를 무너뜨렸다. 케네디는 직후 기자에게 '최악의 시간이었다, 그가 나를 짓밟았다'고 털어놓았고, 흐루쇼프는 초조해 보이는 케네디를 보고 '이 젊은이는 밀어붙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빈은 양쪽에 정반대의 결론을 남겼다. 케네디에게는 힘으로 신뢰를 다시 증명해야 한다는 각오를, 흐루쇼프에게는 서베를린 문제를 12월 안에 끝낼 수 있다는 착각을. 그 착각이 몇 주 뒤 울브리히트의 손에 장벽이라는 해법을 쥐여주게 된다.
아무도 벽을 쌓지 않는다고 한 자리, 그리고 전쟁을 준비한 여섯 주
1961년 6월 15일 동베를린의 각료청에서 열린 국제 기자회견에는 300여 명의 기자가 모였다. 서독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의 기자 아네마리 도에르가 울브리히트에게 물었다. 서베를린을 '자유도시'로 만든다는 소련의 구상대로라면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 국가 경계가 생기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울브리히트는 이렇게 답했다. "아무도 벽을 세울 생각이 없다(Niemand hat die Absicht, eine Mauer zu errichten)." '벽(Mauer)'이라는 말이 이 맥락에서 처음 나온 순간이었고, 두 달 뒤 실제로 벽이 세워지면서 이 한 문장은 동독 지도부의 공개적 거짓말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이 부인을 단순한 위증으로만 읽으면 그 여섯 주가 왜 그렇게 흘렀는지 놓친다. 같은 자리에서 울브리히트는 소련이 제안한 독일 평화조약을 칭송하며 서베를린의 중립화를 요구했고, 다음 날 도에르의 보도 제목은 "울브리히트, 완전한 항공 주권을 요구"였다. 동독 지도부가 원한 것은 베를린의 4개국 지위를 허물고 국경 통제권을 쥐는 일이었으며, 탈출 문제 해결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벽'이라는 낱말만 부인했지, 경계를 만든다는 계획 자체는 숨기지 않았다.
서방 쪽에서 케네디는 빈에서 흐루쇼프에게 밀린 뒤 여섯 주 동안 미국이 지킬 범위를 줄여나갔다. 소련은 베를린 전체의 점령 체제를 부정했는데, 미국은 스스로 세 가지 '생명적 이익'을 정의했다: 서베를린 주둔 서방군의 존재, 서부 구역의 안전과 존립 가능성, 그리고 그곳에 이르는 접근권. 세 가지 모두 도시의 서쪽 절반에만 묶여 있었고, 동서 구역 경계는 어디에도 명시되지 않았다. 이 좁혀진 입장은 7월 25일 밤의 전국 TV 연설에서 구체화했다. 케네디는 의회에 32억 5천만 달러의 추가 군비를 요청하고, 육군 6개 사단과 해병 2개 사단 증설, 징집 3배 확대, 예비군 소집을 발표했다. "우리는 평화를 원하지만 항복하지는 않을 것이다(We seek peace, but we shall not surrender)." 흑해 소치에서 휴가 중이던 흐루쇼프는 격분해, 마침 소련에 머물던 케네디의 군축 보좌관 존 매클로이에게 이 군비 증강은 전쟁을 부추긴다고 말했다.
이렇게 여섯 주는 두 갈래로 준비되었다. 동베를린에서는 철조망과 콘크리트 기둥이 분산 구매로 조용히 쌓여 갔고, 워싱턴에서는 군사 예산이 전시 체제에 가깝게 편성되었다. 8월 13일 새벽 실제로 벌어진 일과 맞대어 보면 울브리히트의 부인은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도 벽도 아닌 어떤 중간 상태를 지키려던 서로 다른 계산이 서로를 스쳐 지나간 자리에 남은,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짚은 한 질문이 불러낸 것이기도 했다.
철의 고리를 누가 놓을 것인가: 승인은 모스크바에서, 날짜는 일요일 밤으로
장벽이라는 말이 공식 문서에 처음 등장한 자리는 모스크바 회의장이 아니라, 그보다 이틀 앞선 8월 1일의 전화선 위였다. 흐루쇼프와 울브리히트는 두 시간 넘게 통화하면서 경제 상황을 이야기하다 '국경 봉쇄'로 넘어갔다. 흐루쇼프는 이렇게 지시했다. "베를린 주위에 철의 고리를 놓자. 설명은 쉽다. 우리는 전쟁으로 위협받고 있고, 스파이가 우리 가운데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독일인들은 이 설명을 이해할 것이다." 이어서 덧붙인 말이 결정의 성격을 드러낸다. "고리는 우리 군대가 놓되, 통제는 너희 군대가 하라." 소련은 겉으로는 바르샤바 조약 전체의 결정이라는 옷을 입히려 했지만, 실제의 분업은 동독, 정확히는 울브리히트의 정권이 자기 국민을 향해 총을 겨누는 모양새가 되도록 짜여 있었다. 흐루쇼프는 또한 "새 국경 체제를 시행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말라. 설명하면 탈출 물결이 더 커질 뿐"이라며 철저한 비밀을 요구했다. 이는 6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울브리히트가 '아무도 장벽을 세울 의도가 없다'고 선언했던 바로 그 노선의 연장이었다. 거짓말은 그 자리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작전의 일부로 계획된 것이었다.
흐루쇼프는 오랫동안 물리적 장벽에 반대해 왔다. 벽이 곧 공산주의가 자기 국민을 가둘 수밖에 없다는 자백으로 읽힐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울브리히트에게 콘크리트 벽이 아니라 철조망 장애물만 승인해 주려 했다. 그러나 1961년 여름이 되자 태도가 바뀌었다. 미국 역사학자 호프 해리슨의 표현대로 '꼬리가 개를 흔드는' 구도였다. 소련이라는 개를 움직인 것은 동독이라는 꼬리, 즉 울브리히트의 끈질긴 압박이었다. 울브리히트는 1953년부터 국경 봉쇄를 요구해 왔고, 흐루쇼프의 평화공존 노선이 독일 통일 문제에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자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했다. 여기에 중국 요인이 겹쳤다. 마오쩌둥은 평화공존을 '부르주아 평화주의'라고 비난하고 있었고, 강경파인 울브리히트가 중국과 가까운 것을 아는 흐루쇼프는 베를린에서 유약한 태도를 보이면 동구권 내부의 지지를 잃을까 두려워했다. 이처럼 벽은 단순한 국경 통제가 아니라, 공산권 내부의 권력 관계가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8월 3일부터 5일까지 모스크바에서 바르샤바 조약 가맹국 공산당 제1서기들의 비밀 회의가 열렸다. 울브리히트는 여기서 베를린 경계 봉쇄를 정식으로 요구했고, 이번에는 동맹국들의 지지를 얻었다. 알바니아 대표 라미즈 알리아 같은 예외는 있었지만, 핵심 결정은 이미 8월 1일의 전화로 끝나 있었다. 회의는 장벽 건설에 합의하고, 서방이 경제 제재로 보복할 경우 동독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기록에 따르면 흐루쇼프는 이 자리에서 울브리히트에게 봉쇄 시점을 직접 고르도록 했다. 동독 쪽은 처음부터 일요일 새벽을 노렸다. 서방 관료들이 주말에 반응이 느리고, 베를린 시민 상당수가 도시 밖으로 나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날짜는 8월 12일에서 13일로 넘어가는 밤으로 정해졌다.
8월 7일 아침, 울브리히트는 임시로 소집된 SED 정치국 회의에서 모스크바 회의 결과를 보고했다. 정치국 회의록(제39/61호)에 따라 날짜가 공식 확정되었다. 그 사이 베를린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듯한 얼굴로 시간이 흘렀다. 바로 그 주말, 8월 6일부터 7일까지 마리엔펠데 난민 수용소에는 3천268명의 탈출자가 등록되었다. 장벽을 세우기로 결정한 지도부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탈출자 수를 세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결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서방 정보기관은 군대 이동 징후를 보고하면서도 그것이 '국경 봉쇄'로 이어질 것을 며칠 뒤에야 경고했다. 벽은 아직 한 조각도 서 있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놓일 모든 것이 이미 모스크바와 동베를린의 회의실에서 결정되어 있었다.
철조망의 첫날, 인권은 항의하고 조약은 침묵했다
1961년 8월 13일 새벽의 핵심은 콘크리트가 아니라 통행의 갑작스러운 중단이었다. 동독 인민경찰과 국경수비대는 도로와 철도, 전차 선로를 끊고 철조망을 쳤다. 베르나우어 슈트라세에서는 건물의 현관은 동베를린에, 인도는 서베를린에 놓여 주민들이 창문으로 뛰어내리려 했고, 동독 경찰은 이를 막았다. 처음부터 이 조치는 서방의 침공을 막는 방어선이라기보다 동독 시민이 떠나는 마지막 통로를 닫는 행정적·경찰적 작전이었다. 동독 정부는 이를 ‘반파시스트 보호 장벽’이라고 불렀다. 그 표현의 내부 논리는 서독의 첩보와 정치적 선동이 사회주의 건설을 파괴하므로 국경을 지키는 일이 국가와 평화를 지키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논리가 실제로 요구한 대가는 노동자와 가족의 이동권이었다. 국가는 시민을 설득해 남게 하는 대신, 떠날 수 없게 했다.
서방의 계산은 분노와 군사적 대응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딘 러스크 미 국무장관은 공개적으로 조치를 비난하면서도, 8월 13일 미국 베를린 공관 전문이 지적했듯 동독이 동베를린과 동독 쪽 통행을 막은 사실만으로는 서방 3국의 베를린 주둔권과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연합국 접근로가 직접 차단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러스크의 표현대로 장벽은 ‘사격할 문제’가 아니었다. 미국이 전차로 철조망을 밀어버리면 동독 경찰과의 충돌이 소련군과의 충돌로 번지고, 베를린의 법적 권리를 지키려던 행동이 핵전쟁의 도화선이 될 수 있었다. 워싱턴의 비밀 문서에는 더 냉정한 계산도 남아 있다. 소련 주재 미국 대사 르웰린 톰프슨은 난민이 동독에 남는 편이 미국과 서독의 장기적 이익일 수 있다고 썼다. 공개 담화의 인권 언어와 비공개 전략의 체제 안정 계산은 서로 모순되지만 동시에 작동했다.
그렇다고 서베를린의 충격이 추상적인 외교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시민들은 서방이 자신들을 포기했다고 느꼈고, 미국은 며칠 안에 린든 존슨 부통령과 병력을 보내 사기를 수습해야 했다. 8월 18일 콘라트 아데나워는 연방의회에서 장벽을 인권과 베를린의 4개국 지위에 대한 직접적인 침해라고 규탄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을 통한 즉각적인 철거가 아니라 협상을 택하겠다고 했다. 이 선택은 장벽을 승인한 것이 아니었다. 동독이 자기 주민에게 가한 폭력을 고발하면서도, 서방의 법적 권리와 생존 가능한 서베를린을 지키는 비용을 계산한 것이다. 첫날의 결론은 그래서 불편했다. 장벽은 동독의 강제 봉쇄였고 서방의 방치도 아니었지만, 서방은 인권 침해를 막기 위해 전쟁할 의사가 없었다. 그 틈에서 철조망은 도시의 법적 경계보다 먼저 사람들의 삶을 갈랐다.
장벽 뒤의 약속, 탱크 앞의 한계
장벽이 세워진 뒤 서베를린 시민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콘크리트 자체보다 버려졌다는 감각이었다. 8월 19일 린든 B. 존슨 부통령과 루시어스 D. 클레이 장군이 도착했을 때 수십만 명이 쇠네베르크 시청 광장에 모였다. 존슨은 미국이 서베를린의 자유와 서방 세계와의 연결을 보장한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장벽을 철거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워싱턴이 지키려 한 것은 세 가지로 좁혀져 있었다. 서방군의 서베를린 주둔, 서베를린의 생존 가능성, 그리고 그곳으로 들어가는 통로였다. 동독이 자기 주민의 이동을 막는 조치에는 항의할 수 있었지만, 그 조치가 서방군의 법적 접근권을 당장 끊은 것은 아니었다. 이 구분은 냉정했지만, 전쟁을 피하려는 계산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장벽을 무너뜨리려는 무력 행동은 동독 병력과의 충돌을 거쳐 소련군과의 전투, 더 나아가 핵전쟁으로 번질 수 있었다. 따라서 서방의 연대는 시민에게는 위안이었으나 장벽의 철거를 뜻하지 않았고, 동독 주민에게는 출구가 닫혔다는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
그 한계가 10월 22일부터 27일까지 더 위험한 방식으로 드러났다. 동독 국경수비대가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서방 연합국 군인과 외교관의 신분증을 검사하려 하자, 미국은 이를 동독이 아니라 소련이 보장한 연합국의 베를린 접근권에 대한 시험으로 보았다. 클레이의 지시에 따라 미국은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은 채 통과할 장교들을 보냈고, 10월 27일 오후 소련 전차 열 대가 프리드리히슈트라세로 나와 미군 전차 맞은편에 섰다. 밤이 되자 소련 전차는 서른 대까지 늘었고, 양측은 약 백 야드 거리에서 포신을 겨눈 채 대치했다. 이것은 장벽을 둘러싼 상징전이 아니라, 누가 베를린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지를 전차로 묻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양측 지도부는 현장 지휘관의 명분과 핵보유국의 책임을 분리하려 했다. 존 F. 케네디는 공개적으로 물러서지 않으면서도 비밀 연락선을 통해 철수를 모색했고, 니키타 흐루쇼프 역시 소련이 직접 서방군을 밀어냈다는 인상을 피할 필요가 있었다. 10월 28일 오전 소련 전차가 먼저 물러난 뒤 미국 전차도 뒤따랐다. 미국 국무부의 사후 기록은 케네디와 로버트 케네디가 소련 연락책 아나톨리 도브리닌의 보좌관 게오르기 볼샤코프를 통한 해결을 추진했다는 설명과, 흐루쇼프가 미국의 체면을 살려 주려고 철수를 명령했다는 설명을 함께 기록하며 어느 쪽이 결정적이었는지는 확정하지 않는다. 결말은 서방의 항복도 동독의 승리도 아니었다. 서방은 접근권의 원칙을 지켰지만 사람들의 이동 자유를 회복시키지 못했고, 소련은 동독의 장벽을 지켜 주면서도 미국과 직접 충돌하는 선은 넘지 않았다. 장벽은 남았고, 그 주변의 평화는 권리의 완전한 회복이 아니라 서로가 감당할 수 있는 위험의 경계 위에 놓였다.
장벽이 끝낸 것과 끝내지 못한 것, 기록이 바꾼 판결
장벽은 1961년의 위기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그 위기의 핵심 쟁점을 다른 방식으로 봉합했다. 동독 지도부가 보기에 국경 봉쇄는 사회주의 국가의 생산력과 국가 존립을 지키는 비상조치였다. 실제로 서베를린을 통한 대규모 이탈은 거의 멎었고, 정권은 당장 노동력과 행정 통제력을 잃는 붕괴를 피했다. 소련 지도부 역시 서방군이 서베를린에 남아 있는 문제와 동독의 인구 유출을 분리할 수 있었다. 서방은 장벽을 인권 침해로 규탄했지만, 미국 국무부의 비밀 분석은 반란이나 전쟁을 촉발하지 않는 한 난민 흐름의 중단이 장기적으로 자신들에게도 이익일 수 있다고 보았다. 공개적 항의와 군사적 불개입은 모순처럼 보였지만, 서방이 지키겠다고 한 것은 서베를린으로의 접근권과 주둔권이지 동베를린 주민의 도시 내 이동권을 무력으로 회복하는 일이 아니었다. 이 계산은 핵전쟁을 피했지만, 동독 시민의 자유를 사실상 협상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렇다고 장벽이 동독의 근본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다. 사람을 붙잡아 둘 수는 있었지만, 사람들이 떠나려 했던 정치적 불신과 생활상의 비교 경험은 제거하지 못했다. 장벽은 탈출을 범죄로 만들고, 철조망과 감시탑을 일상적인 국가 폭력으로 제도화했다. 1989년의 붕괴도 장벽 하나의 물리적 실패라기보다, 여행 자유를 요구한 시민운동, 동유럽 국경 개방, 그리고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동맹국에 무력 개입을 명령하지 않은 조건이 겹친 결과였다. 따라서 이 사건이 확정한 것은 독일 분단의 영구성이 아니라, 1961년 강대국들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 분단을 관리하기로 한 한시적 합의였다.
누가 장벽을 만들었는지를 둘러싼 역사학의 판결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냉전 중 서방과 동서독 정부가 만든 초기 서술은 소련의 베를린 압박과 초강대국 대결을 중심에 놓고 울브리히트를 모스크바의 집행자로 그렸다. 1991년 뒤 동독과 소련 문서가 공개되면서 호프 M. 해리슨 등은 울브리히트가 난민 유출의 경제적·정치적 비용을 가장 직접적으로 감당한 당사자로서 국경 폐쇄를 강하게 밀었고, 흐루쇼프가 이를 승인하고 자신의 베를린 전략에 편입했다고 재구성했다. 반대 해석은 최종 승인, 소련군의 억지력, 서방의 대응 한계를 들어 소련의 책임을 축소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남은 논쟁은 장벽이 필요했는가가 아니다. 문서가 보여 주는 선택은 시민을 설득하는 개혁이 아니라 시민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봉쇄였다는 점에서 비교적 분명하다. 논쟁의 대상은 그 선택을 누가 먼저 제안했고, 모스크바와 동베를린이 책임을 어떻게 나누었는가이다.
결과
베를린 장벽은 동독의 인구 유출을 즉각 중단시키고 정권의 붕괴를 막았지만, 동시에 동독이 스스로를 감옥으로 선언한 꼴이 되었다. 장벽은 28년간 냉전의 가장 가시적인 상징으로 남았고, 서베를린은 장벽 안에 갇힌 자본주의의 섬이 되었다. 10월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벌어진 미소 탱크 대치 사건은 핵전쟁으로 번질 수 있었으나 케네디와 흐루쇼프의 철수로 진정되었다. 장벽의 존재 자체가 동독의 경제적·정치적 실패를 매일 증명했고, 1989년 동유럽 혁명의 물결 속에서 결국 붕괴되었다. 1,300m 구간이 현재 베를린 장벽 기념공원에 보존되어 있다.
연표
- 1949.10.07동독 수립
동독이 소련 점령지구에서 출범했다. 이때부터 1961년까지 350만 명이 서방으로 탈출할 것이다.
- 1958.08.28안드로포프의 긴급 서한
유리 안드로포프가 중앙위원회에 보낸 서한에서 동독 지식인 탈출이 50% 증가했으며, 탈출 동기는 경제적 이유가 아니라 정치적 이유라고 경고했다.
- 1958.11흐루쇼프의 1차 최후통첩
흐루쇼프가 서베를린을 '비무장 자유도시'로 만들고 6개월 내 서방군을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서방 3국이 이를 거부했다.
- 1961.06.03빈 정상회담
흐루쇼프와 케네디가 빈에서 만났다. 흐루쇼프는 베를린 문제에 대한 최후통첩을 재확인했고, 케네디는 견고함을 보이려 했으나 실질적 합의 없이 끝났다.
- 1961.06.15울브리히트의 부인
울브리히트가 동베를린 국제 기자회견에서 "아무도 장벽을 세울 의도가 없다(Niemand hat die Absicht, eine Mauer zu errichten)"고 선언했다.
- 1961.07.25케네디의 대국민 연설
케네디가 TV 연설에서 의회에 32억 5천만 달러의 추가 군사 예산을 요청하고, 육군 병력을 87만 5천 명에서 100만 명으로 증원하며, 징병을 3배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 1961.08.03모스크바 바르샤바 조약 회의
3일부터 5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의에서 울브리히트가 베를린 경계 봉쇄를 공식 승인받았다.
- 1961.08.07SED 정치국, 봉쇄일 결정
울브리히트가 정치국에 회의 결과를 보고했고, 정치국은 8월 12~13일 밤으로 경계 봉쇄 날짜를 확정했다.
- 1961.08.13장벽 건설 개시
오전 1시경, 약 2만 5천 명의 동독 군경 병력이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거리를 철조망과 바리케이드로 차단했다. 소련군은 배후에서 대기했다. 울브리히트가 서명한 봉쇄 명령은 불과 몇 시간 전 정원 파티장에서 작성되었다.
- 1961.08.18아데나워의 의회 연설
서독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가 연방의회에서 장벽이 인권과 베를린 4개국 지위를 위반했다고 비판했으나, 전쟁보다 협상을 선택하겠다고 밝혔다.
- 1961.08.19존슨 부통령과 클레이 장군, 베를린 방문
린든 B. 존슨 부통령과 루시어스 D. 클레이 장군이 서베를린을 방문해 주민들을 진정시키고 미국의 연대를 상징적으로 과시했다.
- 1961.10.27체크포인트 찰리 탱크 대치
미군 M48 전차 10대와 소련군 T-54 전차 33대가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75미터 거리를 두고 16시간 동안 대치했다. 케네디와 흐루쇼프의 비밀 채널을 통한 합의로 상호 철수했다.
관련 인물 13명
지도부3
울브리히트는 소련 점령지구에서 SED를 창당하고 1949년 동독 수립을 주도했으며, 1961년 흐루쇼프를 설득해 베를린 경계 봉쇄를 관철시켰다.
소련 지도자, 전후 독일 분할의 설계자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스탈린은 얄타·포츠담 회의에서 독일 분할 점령을 확정하고 소련 지구에서 강제적 공산화와 배상금 추출을 지휘했다.
소련 공산당 제1서기 겸 총리, 1차·재차 베를린 최후통첩을 날린 장본인니키타 흐루쇼프1894–1971흐루쇼프는 1958년 11월 서방 3국에 서베를린 철수를 요구하는 6개월 최후통첩을 발하고 1961년 빈 정상회담에서 이를 재차 확인했다.
참여4
1961년 6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울브리히트에게 장벽 건설 의사를 묻는 질문을 던졌다.
서베를린 시장빌리 브란트1913–1992베를린 장벽 건설 당시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수치의 장벽'이라는 표현을 쓰고 시민 사기 저하에 대응했다.
동독 초대 총리오토 그로테볼1894–1964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강제 통합으로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이 창당될 때 공동 의장을 맡았다.
케네디의 군축 고문존 J. 매클로이1895–19891961년 7월 소련에서 흐루쇼프가 미국의 군비 증강이 전쟁을 위협한다고 그에게 말했다.
목격 · 증언4
안드로포프는 1958년 8월 28일 중앙위원회에 서한을 보내 동독 지식인 탈출이 50% 증가했고 그 동기가 경제가 아니라 정치라고 경고했다.
주동독 소련 대사, 개방 국경의 문제를 보고한 관찰자미하일 페르부힌1904–1978페르부힌은 베를린의 개방 국경이 동서 양쪽을 비교하게 만들어 동베를린에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소련 지도부에 보고했다.
건설 과정을 재해석한 연구자호프 M. 해리슨1963–그녀의 기록물 연구는 울브리히트가 국경 폐쇄를 주도했음을 보여 주었다.
위기 재구성의 역사가프레더릭 켐프1954–1961년 베를린 위기와 8월·10월 대치의 정치적 의미를 문서로 기록했다.
관련 용어
출처: Hope M. Harrison, Driving the Soviets Up the Wall: Soviet-East German Relations, 1953–1961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3)Frederick Kempe, Berlin 1961: Kennedy, Khrushchev, and the Most Dangerous Place on Earth (Penguin, 2011)National Security Archive, 'The Berlin Wall, Fifty Years Ago,' Electronic Briefing Book No. 354, edited by William Burr (12 August 2011), https://nsarchive2.gwu.edu/NSAEBB/NSAEBB354/index.htmChronik der Mauer / Chronicle of the Berlin Wall, chronik-der-mauer.de, a project of the Zentrum für Zeithistorische Forschung and the Berlin Wall FoundationBerlin Wall Foundation (Stiftung Berliner Mauer), 'Victims at the Berlin Wall,' https://www.stiftung-berliner-mauer.de/en/topics/victims-berlin-wallWilliam Burr, ed., The Berlin Crisis 1958–1962, Digital National Security ArchiveUS National Archives, 'Building of the Berlin Wall: A City Torn Apart,' symposium publication (27 October 2011), https://www.archives.gov/files/research/foreign-policy/cold-war/1961-berlin-crisis/berlin-publicatio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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