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 배경

독일

111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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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인물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폰 브라운슈바이크

Karl Wilhelm Ferdinand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
왕정·왕당파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신성 로마 제국) 독일 1735–1806 ✕ 아우어슈테트 전상으로 사망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을 낸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 사령관

1792년 7월 25일 코블렌츠에서 자기 이름으로 선언을 내, 프랑스 왕실이 해를 입으면 파리와 주민에게 가혹한 보복을 하겠다고 경고했다.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군주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조카이자 프로이센군 원수였다. 1792년 전쟁이 시작되자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 사령관이 되었고, 7월 25일 코블렌츠에서 이른바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을 냈다. 명의는 공작이었지만 문안은 망명 귀족 쪽에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을 지키려던 이 위협은 파리에서 오히려 왕정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그는 롱위와 베르됭을 점령했으나 9월 20일 발미에서 진격을 멈추고 프랑스에서 철수했다. 1806년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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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0아버지를 이어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군주가 되었다.
  • 1792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 사령관으로 7월 25일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을 냈다.
  • 1792롱위와 베르됭을 점령했으나 9월 20일 발미에서 진격을 멈추고 프랑스에서 물러났다.
  • 1806프로이센군을 이끌고 아우어슈테트에서 싸우다 치명상을 입고 11월 10일 오텐젠에서 사망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Friedrich Wilhelm II
왕정·왕당파 프로이센 독일 (프로이센) 1744–1797 ○ 재위 중 포츠담에서 사망

필니츠 선언에 서명하고 대프랑스 원정에 나선 프로이센 왕

1791년 8월 필니츠에서 레오폴트 2세와 함께 프랑스 왕을 지지하는 선언에 서명했고, 1792년 여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원정에 직접 참가했다.

1786년 숙부 프리드리히 2세를 이어 프로이센 왕이 되었다. 국내에서는 선왕의 계몽 통치에서 물러나 검열과 종교 통제를 강화했다. 프랑스 혁명에 대응해 오스트리아와의 오랜 대립을 접고, 1791년 8월 필니츠에서 레오폴트 2세와 함께 선언을 냈으며 1792년 2월 정식 동맹을 맺었다. 1792년과 1793년 대프랑스 원정에 직접 참가했으나 재정 부족에 묶였고, 조정은 폴란드 분할에 더 관심을 두었다. 1795년 바젤에서 프랑스와 단독 강화를 맺었고 179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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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6숙부 프리드리히 2세가 죽자 프로이센 왕으로 즉위했다.
  • 17918월 필니츠에서 레오폴트 2세와 함께 프랑스 왕을 지지하는 선언을 냈다.
  • 1792–17932월 오스트리아와 정식 동맹을 맺고, 1792년과 1793년 대프랑스 원정에 직접 참가했다.
  • 1793–1795제2·3차 폴란드 분할로 영토를 얻었고, 1795년 4월 바젤 조약으로 프랑스와 단독 강화했다.
  • 179711월 16일 포츠담에서 사망했다.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독일 독일 1818–1883 ○ 자연사

『자본론』의 저자, 제1인터내셔널을 이끈 사람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 『고타강령 비판』(1875)

트리어의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나 『라인신문』 편집장으로 출발했다. 1845년 프로이센 국적을 버린 뒤 죽을 때까지 무국적자였고, 1849년부터는 런던 망명자였다. 엥겔스와 40년을 함께 일하며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썼고 제1인터내셔널을 이끌었다. 만년의 『고타강령 비판』(1875)은 독일 노동자 정당의 통합강령에 들어앉은 라살레주의를 조목조목 해부한 문서로, 국가를 사회주의의 도구로 보는 발상에 대한 그의 마지막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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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2–1843『라인신문』 편집장 — 프로이센 검열로 폐간
  • 1844파리에서 엥겔스와 만나 평생의 공동작업을 시작
  • 1845프로이센 국적 포기 — 이후 죽을 때까지 무국적자
  • 1848『공산당 선언』 발표, 『신라인신문』 편집장
  • 1849–1883런던 망명 — 대영박물관 열람실에서 『자본론』을 쓰다
  • 1864–1872국제노동자협회 창립선언문 집필, 총평의회 지도
  • 1867『자본론』 제1권 출간
  • 1871『프랑스 내전』 — 파리 코뮌을 노동계급 정부의 형태로 옹호
  • 1875『고타강령 비판』 집필 — 브라케에게 보내 지도부에만 회람
  • 1883런던에서 사망,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Friedrich Engels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독일 독일 1820–1895 ○ 자연사

마르크스의 공동저자이자 후원자,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저자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멸한다.」 — 『공상에서 과학으로』(1880)

바르멘의 방적공장주 집안에서 태어나 맨체스터의 가업을 관리하며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1845)를 썼다. 1848년 혁명과 바덴 봉기를 거친 뒤 20년을 상사에 매여 런던의 마르크스 가족을 부양했다. 뒤링을 반박한 『반뒤링론』(1878)에서 세 개 장을 뽑아 만든 소책자가 『공상에서 과학으로』(1880)이고, 이 책은 곧 열 개 언어로 번역되어 마르크스주의 입문서가 되었다. 마르크스 사후에는 『자본론』 2·3권을 편집했고, 1891년 15년간 묻혀 있던 『고타강령 비판』을 당 지도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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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2–1844맨체스터 에르멘 운트 엥겔스 상사 근무 —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의 현장
  • 1844파리에서 마르크스와 만나 평생의 공동작업을 시작
  • 1848『공산당 선언』 공동 집필, 『신라인신문』 편집진
  • 1849바덴-팔츠 봉기에 부관으로 참전
  • 1850–1870맨체스터 상사로 복귀 — 20년간 마르크스 가족을 부양
  • 1878『반뒤링론』 출간 — 각주에서 비스마르크식 국유화를 '사이비 사회주의'라 부르다
  • 1880라파르그의 요청으로 세 개 장을 발췌해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프랑스어로 발표
  • 1883–1894마르크스 사후 『자본론』 제2권과 제3권 편집
  • 1891『고타강령 비판』을 『신시대』에 발표 — 당의 반대를 서문으로 정면 돌파
  • 1895런던에서 사망

페르디난트 라살레

Ferdinand Lassalle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 독일 독일 1825–1864 ✕ 결투 중 총상

독일 최초의 노동자 정당 ADAV의 창립자

「철과 같은, 잔혹한 법칙(das eiserne und grausame Gesetz)」 — 임금을 생존 수준에 묶어 둔다며 라살레가 임금철칙에 붙인 이름(1863)

브레슬라우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변호사이자 선동가. 1863년 5월 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협회(ADAV)를 세워 5년 임기의 회장이 되었고, 보통선거권으로 국가를 움직여 국가 보조 생산협동조합을 세우면 사회주의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비스마르크와 비밀리에 만나 노동자와 프로이센 왕정의 동맹을 타진해 마르크스의 깊은 의심을 샀다. 1864년 결혼 문제로 벌인 결투에서 총상을 입고 사흘 뒤 제네바 근교에서 죽었다. 그가 남긴 강령은 11년 뒤 고타 통합강령의 뼈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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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8–1849라인란트에서 혁명 선동, 무력 저항 선동 혐의로 6개월 금고
  • 1862「노동자 강령」 강연 — 노동자 계급을 독자적 정치 세력으로 호명
  • 1863.5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협회(ADAV) 창립, 5년 임기 회장 취임
  • 1863비스마르크와 비밀 회동·서신 — 노동자와 프로이센 왕정의 동맹을 타진
  • 1864.8제네바 근교 결투에서 총상, 사흘 뒤 사망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Wilhelm Liebknecht

아이제나흐파 창립자, 고타 통합강령의 기초자

「국가사회주의와 가장 앞장서 싸워 온 것이 우리 독일 사회주의자들이며, 국가사회주의가 실은 국가자본주의임을 누구보다 분명히 보인 사람이 나다.」 — '우리의 최근 대회'(1896)

기센에서 태어나 1848년 봉기에 가담했다가 스위스를 거쳐 런던으로 망명해 12년간 마르크스·엥겔스의 가까운 동지로 지냈다. 1869년 베벨과 함께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을 세웠고, 보불전쟁 전쟁공채에 반대하다 체포되어 1872년 라이프치히 반역죄 재판에서 요새금고형을 받았다. 1875년 고타 통합대회를 성사시킨 주역이자 통합강령의 기초자였으며, 마르크스가 조목조목 해부한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1890년부터 죽을 때까지 당 기관지 『전진』을 편집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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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8–1849바덴 봉기 참가, 패배 후 스위스로 망명
  • 1850–1862런던 망명 — 마르크스·엥겔스와 교유하며 공산주의자동맹에 가담
  • 1869베벨과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창립
  • 1870–1872전쟁공채 반대로 체포, 라이프치히 반역죄 재판에서 2년 요새금고형
  • 1875고타 통합대회 주도 — 통합강령을 기초해 라살레파와 합당
  • 1878–1890사회주의자탄압법 아래 제국의회 의원으로 당을 지키다
  • 1890–1900당 기관지 『전진(Vorwärts)』 편집장
  • 1900샤를로텐부르크에서 사망

아우구스트 베벨

August Bebel

40년간 독일 노동운동을 이끈 SPD 공동 창립자, '그림자 황제'

「파리에서의 투쟁은 작은 전초전에 불과하다. 유럽의 본안은 아직 앞에 있으며, 수십 년 안에 '궁전에 전쟁을, 오두막에 평화를'은 전 유럽의 구호가 될 것이다.」 — 제국의회, 1871년 5월 25일

목수 도제 출신으로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1869년 사회민주노동자당을 창립하고 1875년 고타 통합대회로 독일 사민당(SPD)을 세계 최대 사회주의 정당으로 키웠다. 반사회주의법(1878–1890) 아래 취리히에서 불법 기관지를 발행하며 당을 지하에서 이끌었고,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 채택을 주도해 유럽 사민주의의 기준을 세웠으며,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논쟁에서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했다. 《여성과 사회주의》(1879)는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의 고전으로 50여 판을 거듭했고, 1913년 사망 시 장례식은 제2인터내셔널의 국제적 집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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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6–1867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작센인민당 공동 창립, 라이프치히 노동자교육협회에서 활동
  • 1867북독일연방 제국의회 의원으로 첫 당선 — 이후 1913년까지 의원직 유지
  • 1869리프크네히트와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창립
  • 1870–1872보불전쟁 전쟁공채 반대, 파리코뮌 옹호 연설로 반역죄 유죄 — 2년 요새금고형
  • 1875고타 통합대회 주도 — 라살레파와 합당해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APD) 출범
  • 1878–1890사회주의자탄압법 아래 취리히에서 『사회민주주의자』 발행, 지하 조직 지휘
  • 1891에르푸르트 강령 채택 주도 — 유럽 사민주의의 마르크스주의적 기준 확립
  • 1899–1906수정주의 논쟁에서 베른슈타인에 맞서 정통 마르크스주의 방어, 정치적 총파업 논쟁 중재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독일 독일 1846–1919 ○ 병사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초를 놓은 독일 노동운동의 원로 이론가

레닌은 메링을 두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길 원할 뿐 아니라, 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 평했다.

독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문예비평·철학을 대표하는 이론가로, 1891년 SPD에 입당하여 『노이에 차이트』의 주요 필자가 되었고 카우츠키·룩셈부르크와 함께 당내 좌파의 이론적 기둥을 이뤘다. 1916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공동 창립하고 1919년 KPD 창당을 주도했으며, 마르크스의 고전적 전기 『카를 마르크스, 그의 생애』(1918)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념비 『독일 사회민주주의사』(1898)를 남겼다. 프로이센 신화를 해체한 『레싱 전설』(1893)로 엥겔스의 극찬을 받았고, 네오칸트주의와 니체의 영향력에 맞서 사적 유물론을 문화 영역에까지 적용했다.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 피살 2주 만에 급환으로 사망했으며, 베를린 사회주의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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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6포메른 주 슐라베 출생
  • 1884–1890『베를리너 폴크스차이퉁』 편집자
  • 1891SPD 입당; 『노이에 차이트』 주요 필자 (1913년까지)
  • 1902–1907『라이프치거 폴크스차이퉁』 편집장
  • 1906–1911SPD 중앙당학교 강사
  • 1916스파르타쿠스단 공동 창립
  • 1917–1918프로이센 주의회 의원
  • 1919독일 공산당(KPD) 공동 창립

파울 힌덴부르크

Paul von Hindenburg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847–1934 자연사

제1차 세계대전기 독일 야전원수이자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 육군을 지휘했고, 1925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34년까지 재임했다. 1930년대 초 의회 지지를 얻지 못한 내각이 대통령 비상명령에 의존하는 통치를 하도록 승인했고,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히틀러 정부는 곧 테러와 정치적 조작을 통해 권력을 확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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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독일 육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다
  • 1925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다
  • 1933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다

헤르만 폰 아이히호른

Hermann von Eichhorn

1918년 점령지 우크라이나의 군정총독으로 있다가 키예프에서 좌파 사회혁명당원에게 암살된 독일 원수

1918년 점령지 우크라이나의 군정총독이 된 프로이센 원수 헤르만 폰 아이히호른은 키예프에서 좌파 사회혁명당원 보리스 돈스코이의 폭탄 공격으로 암살됐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1870–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하고 제18군단장까지 오른 프로이센 장교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1915년 1월부터 제10군을 이끌며 코브노와 그로드노를 점령했고, 1916년부터는 아이히호른 집단군도 지휘했으며 1917년 12월 원수가 되었다. 1918년 4월 3일 키예프 집단군 사령관 겸 점령지 우크라이나의 군정총독이 되었고, 7월 30일 키예프에서 좌파 사회혁명당원 보리스 돈스코이가 마차에 던진 폭탄에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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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6–1914프로이센군 입대, 1866·1870–71년 전쟁 참전, 제9사단장(1901–1904)·제18군단장(1904–1912)
  • 1915–1918제10군 사령관, 코브노·그로드노 점령, 1916년부터 아이히호른 집단군 사령관, 1917년 원수
  • 1918키예프 집단군 사령관 겸 우크라이나 군정총독, 7월 30일 키예프에서 암살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 독일 독일 1850–1932 ○ 자연사

수정주의의 창시자, 진화적 사회주의 이론가,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 저자

"흔히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라고 불리는 것에 나는 지극히 적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목표가 무엇이든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며, 운동이 전부다." — 비판자들에 대한 답변 (1899)

독일 사민당의 이론가이자 정치인.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이자 『사회민주주의자』 편집장으로 마르크스주의 정통파로 출발했으나, 1899년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을 통해 자본주의 붕괴론·계급양극화·혁명 필연성을 반박하는 수정주의를 제창했다.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고 운동이 전부다"라는 명제로 사민주의의 개혁적·의회주의적 전환의 토대를 놓았으며, 이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진화적 사회민주주의의 분기점이 되었다. 세계대전 중 반전 입장으로 USPD 창립에 참여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수호하다 나치 집권 6주 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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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사회민주노동당(SDAP, 아이제나흐파) 입당; 1875년 고타 통합대회 대의원
  • 1881–1890망명지 취리히·런던에서 『사회민주주의자(Der Sozialdemokrat)』 편집장; 엥겔스와 긴밀히 협력
  • 1891카우츠키와 함께 에르푸르트 강령 기초; 1895년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로 지명됨
  • 1899『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 출간 — 수정주의 논쟁 촉발, 국제 사회주의 운동 분열의 기점
  • 1902–1928제국의회 의원(브레슬라우-서부, 후일 포츠담 II) — 조세·통상·헌법 문제 주력
  • 1915–1917전쟁 차관 반대파로 전환; 하제·카우츠키와 평화 선언 발표, USPD 공동 창립
  • 1918–1928바이마르 공화국 재무부 차관보 역임, 의회민주주의 수호 활동; 1932년 사망

클라라 체트킨

Clara Zetkin
독일 공산당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57–1933 ○ 자연사

국제 여성의 날의 창시자, 여성해방을 계급투쟁의 심장에 놓다

히틀러 집권 반년 전, 최고령 의원으로서 제국의회 개원 연설에서 반나치 통일전선을 호소하다 (1932)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의 창시자. 여성해방을 계급투쟁의 일부로 보고 1910년 국제 여성의 날을 제안했다. 반전 투쟁과 KPD 창립을 거쳐 75세에 제국의회에서 반나치 통일전선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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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8–1917SPD 여성운동 지도, 『평등』 편집(1892–1917)
  • 1910코펜하겐 대회에서 국제 여성의 날 제안
  • 1915–1919반전 운동 — 스파르타쿠스단·KPD 창립 참여
  • 1920–1933제국의회 의원, 코민테른 집행위원
  • 1925회고문 《여성문제에 관한 레닌》 발표
  • 1932최고령 의원으로 개원연설 — 반나치 통일전선 호소
  • 1933소련 망명, 6월 사망 — 크렘린 벽 안장

표트르 아르카디예비치 스톨리핀

Пётр Аркадьевич Столыпин

교수대와 개혁을 한 손에 쥔 총리

1907년 5월 10일, 제2두마 연설에서 혁명세력을 향해 "여러분은 대격변이 필요하겠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대한 러시아다"라고 선언했다.

1905년 혁명을 야전군법회의로 진압하는 동시에, 공동체 농지를 해체하는 농업개혁으로 체제의 새 지지 기반을 만들려 한 제정 러시아의 총리. 1911년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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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내무장관을 거쳐 총리
  • 1906–07야전군법회의로 혁명 진압
  • 1906–11농업개혁, 공동체 탈퇴와 자영농 육성
  • 1907.6「6월 3일 체제」, 선거법 개정으로 두마 장악
  • 1911.9키예프 오페라 극장에서 피격, 사망

후고 하제

Hugo Haase

전쟁에 반대해 독립사회민주당을 세우고 1918년 에베르트와 함께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끈 법률가

1918년 12월 에베르트 정부가 혁명 수병대를 유혈 진압하자, 하제는 USPD 대표들과 항의해 인민대표평의회에서 사임했다.

동프로이센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변호사로 사회주의자 재판을 변호하며 이름을 알렸고, 1911년 베벨과 함께 SPD 공동의장이 되었다. 1914년 8월 전쟁공채에 반대했으나 당의 결정에 따라 제국의회에서 찬성 성명을 읽어야 했다. 1917년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과 독립사회민주당(USPD)을 세웠다. 1918년 11월 인민대표평의회에서 에베르트와 공동의장을 맡았지만 크리스마스 위기 뒤 정부를 떠났다. 1919년 10월 제국의회 앞에서 총격을 받고 11월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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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변호사로 개업해 노동자·농민과 사회주의 활동가를 변호했다.
  • 1911아우구스트 베벨과 함께 독일사회민주당(SPD) 의장이 되었다.
  • 1914전쟁공채에 반대했지만 당 규율에 따라 제국의회에서 찬성표를 던지고 당의 찬성 입장을 변호했다.
  • 1917독립사회민주당(USPD) 창립에 참여해 의장이 되었다.
  • 191811월부터 에베르트와 인민대표평의회 공동의장을 맡았고, 12월 정부의 수병대 진압에 항의해 사임했다.
  • 191910월 8일 제국의회에 들어가다 총격을 당했고, 총상으로 인한 혈액중독으로 11월 7일 사망했다.

독일 사회민주당·독립사회민주당 정치인으로, 1918년 베를린 경찰청장을 지냈다

“내 직책은 혁명에서 받았으니, 혁명에 의해서만 내놓겠다.”

기계공 출신인 아이히호른은 사회민주당에서 일하다 1917년 독립사회민주당으로 옮겼다. 1918년 11월 혁명 뒤 베를린 경찰청장이 되어 좌파 정치 세력에 우호적인 경찰 운영을 폈다. 프로이센 내각은 1919년 1월 4일 그를 해임하고 사회민주당원 오이겐 에른스트로 교체하려 했다. 이에 맞선 대중 시위와 총파업이 일어났고, 이어진 점거와 무장 충돌은 1월 봉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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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사회민주당 전임 간부가 되어 드레스덴에서 편집자로 일하다
  • 1903–1911독일 제국의회 바덴 제9선거구 의원
  • 1908–1917베를린 사회민주당 언론국 책임자
  • 1917독립사회민주당에 가입하다
  • 1918–1919베를린 경찰청장으로 재직하다
  • 1919–1920바이마르 국민의회 베를린 의원
  • 1920–1925독일 공산당에 가입하고 국가의회 의원으로 일하다

필리프 샤이데만

Philipp Scheidemann
독일 국가기관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 독일 독일 1865–1939 → 망명지에서 사망

1918년 11월 9일 제국의회 창문에서 공화국을 선포하고 바이마르 공화국 첫 총리가 된 SPD 정치가

1918년 11월 9일, 제국의회 창문에서 독일을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1919년 6월 베르사유 조약 서명을 거부하며 총리직을 사임했다.

카셀의 인쇄공 출신으로 SPD 언론인을 거쳐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고, 1918년 10월 막스 폰 바덴 내각에 무임소 장관으로 들어갔다. 11월 9일 리프크네히트가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먼저 제국의회 창문에서 공화국을 선포해 에베르트의 노여움을 샀다. 인민대표평의회 위원을 거쳐 1919년 2월 총리가 되었으나, 베르사유 조약 수락을 거부하며 6월 사임했다. 1920년대 카셀 시장을 지냈고 1922년 극우의 청산가리 테러를 피했다. 1933년 망명해 코펜하겐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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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제국의회에 진출해 사회민주당(SPD) 의원단 지도부에서 활동했다.
  • 1917SPD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 19186월 제국의회 부의장이 되었고, 10월 막스 폰 바덴 내각의 사회민주당 장관이 되었다. 11월 9일 제국의회 창문에서 공화국을 선포했으며, 혁명기 과도정부인 인민대표평의회에 참여했다.
  • 19192월 13일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 수반에 임명되었다. 6월 20일 베르사유 조약 서명을 거부하고 내각과 함께 사임했다.

뤼디거 폰 데어 골츠

Rüdiger von der Goltz

핀란드와 발트에서 독일의 동방 영향력을 지키려 한 자유군단 사령관

백군 병참장군 하네스 이그나티우스는 그를 두고 "핀란드의 사실상의 섭정"이라 불렀다.

1918년 발트 사단을 이끌고 핀란드 백군을 도운 뒤 1919년 라트비아에서 독일군과 자유군단을 지휘해 리가를 탈환했으나, 라트비아 정부를 장애물로 여겨 쿠데타를 뒷받침했다. 체시스 패배 뒤 소환되었고 바이마르 시기 극우 퇴역군인 운동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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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대장성(대참모부) 배속
  • 1914제76보병연대 지휘, 제1차 마른 전투에서 부상
  • 1918발트해 사단장, 핀란드 백군 지원 후 '주핀란드 독일군 장군'
  • 1919제6예비군단장, 리가 탈환 후 체시스(벤덴)에서 패배하고 소환
  • 1920카프 쿠데타에서 베를린 방어 사령
  • 1924–1933독일 조국단체연합(VVVD) 의장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도이믹

Ernst Friedrich Däumig
독일 공산당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66–1922

독일 사회주의자이자 노동자평의회 운동의 지도자다.

사회민주당 언론인으로 출발한 도이믹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독립사회민주당에 합류해 베를린 급진파와 혁명적 오프로이테에서 영향력을 키웠다. 1918년 11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 집행위원회 지도부로서 평의회 체제를 헌정의 토대로 삼으려 했으나 제헌의회 지지 세력에 패했다. 그는 1920년 독립사회민주당 좌파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가입을 이끌고 독일통일공산당 공동의장이 되었으며, 1921년 2월 파울 레비와 함께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3월 행동과 레비 제명 뒤 당을 떠나 공산주의 노동공동체를 세웠고, 1922년 USPD에 복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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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게라·할레·에르푸르트의 사회민주당 신문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 1911베를린 사회민주당 기관지 《포어베르츠》에 군사 기술·노동자 교육 담당자로 합류했다.
  • 1916《포어베르츠》를 떠난 뒤 독립사회민주당을 위해 선전 활동을 했다.
  • 1918혁명적 오프로이테 지도자이자 베를린 노동자평의회 집행위원회 주요 인사가 되었다.
  • 1920독립사회민주당 의원으로 제국의회에 들어갔고, 볼셰비키의 21개 조건 수용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가입을 지지했다. 12월 독일통일공산당 공동의장이 되었다.
  • 19212월 파울 레비와 함께 독일통일공산당 공동의장직에서 사퇴했다. 3월 행동 이후 당을 떠나 공산주의 노동공동체를 세웠다.
  • 1922공산주의 노동공동체와 함께 독립사회민주당에 복당했다.

1918년 11월 뮌헨에서 왕정을 무너뜨리고 바이에른 인민국을 선포했다가 이듬해 암살된 언론인

1918년 11월 바이에른 혁명을 조직해 왕정을 무너뜨리고 인민국을 선포했으며, 1919년 2월 사임하러 가던 중 암살되었다.

베를린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연극 평론가와 SPD 기관지 『포어베르츠』 편집인을 지냈고, 뒤에 뮌헨으로 옮겼다. 전쟁에 반대해 USPD에 들어갔고, 1918년 1월 군수 파업을 이끌다 투옥되었다. 11월 7일 테레지엔비제 집회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병영을 돌아 이튿날 바이에른 인민국을 선포하고 총리가 되었다. 독일의 전쟁 책임을 보여 주는 외교 문서를 공개해 우파의 증오를 샀다. 1919년 1월 선거에서 참패한 뒤 사임하러 가던 2월 21일 아르코발라이 백작에게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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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895『프랑크푸르터 차이퉁』 기고 편집자로 활동했다.
  • 1898독일 사회민주당(SPD)에 가입했다.
  • 1900–1905『포어베르츠』 편집인을 지냈다.
  • 1907–1910뉘른베르크의 『프랭키셰 타게스포스트』 편집장을 지냈다.
  • 1917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에 가입했다.
  • 1918군수 노동자 파업을 선동한 혐의로 반역죄 유죄 판결을 받고 슈타델하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10월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 1918–1919바이에른 인민국 초대 공화파 총리를 지냈다.

막스 폰 바덴

Max von Baden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867–1929 ○ 자연사

1918년 휴전을 요청하고 황제의 퇴위를 발표한 뒤 재상직을 에베르트에게 넘긴 독일 제국 마지막 재상

1918년 11월 9일, 베를린의 혁명적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막스 폰 바덴은 황제의 퇴위를 발표하고 재상직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넘겼다.

바덴 대공가의 후계자로 태어나 프로이센 군 장교를 지냈고, 전쟁 중에는 적십자와 전쟁 포로 구호 활동으로 온건파의 신망을 얻었다. 1918년 10월 3일 재상이 되어 SPD를 처음 입각시키고 연합국에 휴전을 요청했으며, 제국을 의회 책임 군주제로 바꾸는 헌법 개정을 이끌었다. 11월 9일 베를린이 시위대로 가득 차자 황제의 동의 없이 퇴위를 발표하고 재상직을 에베르트에게 넘긴 뒤 물러났다. 1920년 쿠르트 한과 함께 잘렘 기숙학교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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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0.3독일 제국 재상에 취임해 SPD와 다수파 정당 인사들을 내각에 포함시켰다.
  • 1918.10연합국에 휴전을 요청하고 제국 헌법 개정을 추진해 의회 책임 정부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 1918.11.9황제의 퇴위를 발표한 뒤 재상직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넘겼다.

빌헬름 그뢰너

Wilhelm Groener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867–1939 ○ 자연사

1918년 에베르트와 비밀 협약을 맺어 장교단을 지키고, 뒤에 바이마르 국방·내무장관을 지낸 장군

1918년 11월 10일 에베르트와 비밀 전화 협약을 맺어 군의 새 정부 지지를 약속하고 장교단의 지휘권을 보전했다.

뷔르템베르크 출신의 참모 장교로 철도 수송 전문가였고, 전쟁 중 전시청을 맡아 군수 생산과 노동 동원을 지휘했다. 1918년 10월 루덴도르프의 뒤를 이어 최고사령부 제1병참감이 되었고, 11월 황제에게 군이 더는 그를 따르지 않는다고 알렸다. 11월 10일 밤 에베르트와 전화로 비밀 협약을 맺어 군의 지지와 장교단 지휘 체계의 유지를 맞바꾸었다. 뒤에 교통장관, 국방장관, 내무장관을 지냈고 1932년 나치 돌격대 금지령으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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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육군에 입대했다.
  • 1912참모본부 철도부장이 되어 전시 병력 수송과 보급을 맡았다.
  • 191810월 루덴도르프의 뒤를 이어 제1병참감이 되었고, 휴전 뒤 에베르트와 협력해 병력 귀환 및 혁명 진압용 의용군 편성을 추진했다.
  • 1920–1923교통장관을 지냈다.
  • 1928–1932국방장관을 지냈다.
  • 1931–1932내무장관을 지냈다.

구스타프 노스케

Gustav Noske

「누군가는 사냥개가 되어야 한다」며 자유군단을 키워 1919년 좌파 봉기를 진압한 SPD 국방장관

1919년 베를린 봉기 진압을 지휘해 자유군단과 군대를 투입하고, 3월 사격 명령으로 군의 즉결 처형을 허용했다.

브란덴부르크의 바구니 제조공 출신으로 SPD 언론인을 거쳐 1906년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고 군사 문제 전문가로 알려졌다. 1918년 11월 정부 대표로 킬에 파견되어 수병 봉기를 수습하고 총독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위기 뒤 USPD가 떠난 인민대표평의회에 들어가 군사를 맡았고, 「누군가는 사냥개가 되어야 한다」며 자유군단을 조직해 1월 봉기와 3월 투쟁을 진압했다. 1919년 2월 초대 국방장관이 되었으나 1920년 카프 폭동 뒤 물러났다. 하노버 주지사를 지냈고 1944년 7월 음모 뒤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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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년대사회민주주의 운동과 바구니 제조공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브란덴부르크 사회민주협회 의장을 지냈다.
  • 1906년제국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해군·육군 문제 전문가로 활동했다.
  • 1918년 11월–12월정부 대표로 킬에 파견되어 수병들과 노동자·병사 평의회를 이끌었고, 12월 28일 군·해군 전국위원이 되었다.
  • 1919년 2월–1920년라이히스베어 장관으로 임명되어 자유군단과 군대를 동원해 1월 봉기 및 베를린의 3월 투쟁을 진압했다. 1920년 카프 폭동 뒤 사임했다.
  • 1920년–1933년프로이센 하노버 주의 고등행정관을 지냈으며, 1933년 9월 직업공무원 복구법에 따라 해임되었다.

막스 호프만

Max Hoffmann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 1869–1927 ○ 뇌졸중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 테이블에 군화를 올려놓은 독일 동부전선 참모장

"장군은 여러 차례 토론이 진행되던 탁자 위에 자신의 군화를 올려놓았다": 이 협상에서 호프만의 군화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쓴 트로츠키

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에서 독일 제8군 참모장으로서 타넨베르크와 마수리안 호수 전투의 작전을 입안한 탁월한 전략 참모였다. 1917년 말부터 동부전선 총참모장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에서 독일 측 실무를 주도했으며, 1918년 1월 18일 소비에트 대표단 앞에 지도를 펼쳐 놓고 폴란드·발트 3국·우크라이나의 분리를 요구하는 영토 조항을 제시했다. 트로츠키의 '전쟁도 평화도 아닌' 선언 이후 파우스트슐라크 작전으로 무저항 진격을 지휘해 굴욕적인 최종 조약을 강요했으며, 협상 테이블에 군화를 올려놓는 무례함으로 혁명적 외교와 제국 군사력의 비대칭을 신체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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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14독일 참모본부 러시아과에서 근무, 러일전쟁 때 일본군 참관
  • 1914–1916제8군·제9군·오버오스트 작전참모, 타넨베르크·마수리안 호수 전투 입안
  • 1916–1918동부전선 총참모장 (소장),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에서 독일 측 실무 주도
  • 1918.2–3파우스트슐라크 작전 지휘, 소비에트 러시아에 최종 조약 강요
  • 1919–1920폴란드 국경 여단장, 이후 퇴역
  • 1920–1927반소비에트 연합군 개입을 주장하는 호프만 계획 추진, 회고록 집필

구스타프 란다우어

Gustav Landauer
아나키스트 독일 유대계 독일인 1870–1919 ✕ 구타 · 총격으로 살해

독일의 아나키스트 사상가이자 바이에른 혁명 정부의 교육 담당자로, 1919년 진압군에 살해되었다.

국가는 사회적 관계다.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때 국가는 다른 사회적 관계로 대체된다.

란다우어는 국가를 단순히 전복할 권력기구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로 보고, 자발적 공동체를 만들어 이를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08년 사회주의자 동맹을 세워 협동조합과 공동체를 통한 사회주의 실천을 모색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했으며, 카를 아이스너의 요청으로 1918년 뮌헨에 와 혁명 정부를 지원했다. 1919년 4월 바이에른 레테 공화국에 참여해 계몽·공교육 담당 인민위원을 맡았고, 공화국 진압 뒤 체포되어 5월 2일 스타델하임 교도소에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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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사회주의자 동맹 창립
  • 1918카를 아이스너의 요청으로 뮌헨에 와 혁명 정부를 지원
  • 1919바이에른 레테 공화국의 계몽·공교육 담당 인민위원

카를 리프크네히트

Karl Liebknecht
독일 공산당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71–1919 ✕ 살해

전쟁공채에 홀로 반대표를 던진 의원, 혁명의 첫 순교자

“주적은 우리 안에 있다.” — 반전 팸플릿(1915)

독일 사회주의 혁명가.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쟁 차관에 유일하게 반대한 제국의회 의원으로, 로자 룩셈부르크와 스파르타쿠스단·독일공산당을 창립했다. 1919년 1월 봉기 후 의용군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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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 출간 — 이 저술로 요새금고형
  • 1912–1916제국의회 의원 — 1914년 12월 전쟁공채 표결의 유일한 반대표
  • 1916노동절 반전 시위로 체포, 징역형
  • 1918.1111월 혁명 — 베를린 왕궁에서 '자유사회주의공화국' 선포
  • 1918.12–1919.1스파르타쿠스단·KPD 공동 창립, 1월 봉기
  • 1919.1의용군에 체포되어 룩셈부르크와 함께 살해

11월 혁명의 혁명정부를 이끌며 평의회 운동을 의회 민주주의로 돌리고 초대 대통령이 된 SPD 지도자

1918년 11월 혁명 때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끌고 국민의회 선거를 추진했다. 1919년 초대 독일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25년까지 재임했다.

하이델베르크의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 마구공으로 일하다 브레멘에서 당 활동가가 되었고, 1913년 베벨의 뒤를 이어 SPD 공동의장이 되었다. 전쟁 중 전쟁공채와 「성내 평화」를 지지했다. 1918년 11월 9일 재상직을 넘겨받아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끌었고, 그날 밤 그뢰너 장군과 비밀 협약을 맺어 군의 지지를 얻었다. 1919년 2월 국민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좌우의 봉기를 군과 자유군단, 헌법 제48조의 긴급명령으로 눌렀다. 1925년 임기 중 맹장염 수술 뒤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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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했다.
  • 1905SPD 당 집행부에 선출되었다.
  • 1912독일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 1913SPD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었다.
  • 191811월 혁명 때 국가수상 막스 폰 바덴에게서 국정을 넘겨받아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끌었다.
  • 1919국민의회에서 독일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 19252월 28일 맹장염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로마노바

Александра Фёдоровна Романова

라스푸틴에 의존해 제정 말기 정치를 좌우한 마지막 황후

남편의 퇴위 소식을 듣고 알렉산드라는 단 한마디만 남겼다. "신이시여, 이것이 러시아를 구하게 하소서!"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로 태어나 1894년 러시아 황후가 된 알렉산드라는, 신이 내린 전제군주권을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신앙으로 니콜라이 2세를 움직였다. 혈우병을 앓는 황태자 알렉세이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리 라스푸틴에게 의존했고, 제1차 세계대전 중 니콜라이 2세가 총사령관으로 전선에 나간 사이 라스푸틴의 조언을 받아들여 각료를 거듭 교체하며 내정을 좌우했다. 독일계 출신이라는 의심과 라스푸틴 스캔들로 민중의 분노를 샀고, 전제정치 고수와 개혁 거부로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을 앞당겼다. 1918년 7월 17일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예프 하우스 지하실에서 남편과 다섯 자녀와 함께 볼셰비키에 의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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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니콜라이 2세와 결혼, 러시아 황후
  • 1904황태자 알렉세이 출산
  • 1905라스푸틴과 첫 만남
  • 1915–17니콜라이 2세 부재 중 라스푸틴과 함께 내정 통제
  • 1917.3가택연금
  • 1918.7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족과 함께 처형

니콜라이 에르네스토비치 바우만

Николай Эрнестович Бауман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러시아 독일 1873–1905 ✕ 살해

국경을 넘나들며 이스크라 조직망을 구축한 '그라치', 혁명의 첫 순교자

망명지에서도 기타를 치고 즉석에서 풍자시를 짓고 캐리커처를 그리던 청년 — 역사가 블라들렌 로기노프가 전하는 바우만의 초상이다.

볼가 독일계 수의사 출신 볼셰비키로, 레닌의 《이스크라》 러시아 국내 불법 배포망을 책임졌다. 1905년 10월 시위 중 군주주의자의 공격으로 사망, 10만 장례 행렬은 혁명 시위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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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카잔 수의과대학 졸업, 사라토프 현에서 근무
  • 1896–97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 해방 투쟁동맹」 활동
  • 1897–99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22개월 독방, 뱟카 유형
  • 1900스위스에서 레닌과 이스크라 창간 준비, 러시아 국내 불법 수송 책임
  • 1901–03모스크바 위원회, 키예프 체포·탈옥(「11인 탈주」), 제2차 당대회 대의원 — 볼셰비키
  • 1903–04모스크바 볼셰비키 조직 및 중앙위 북부국 지도, 체포 후 타간카 감옥 16개월
  • 1905.10석방 직후 시위 중 군주주의자의 공격으로 사망

블라디미르 구스타보비치 그로만

Владимир Густавович Громан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독일 1874–1940 → 옥사

멘셰비키 출신 통계학자로서 고스플란 초기 통제숫자·균형법을 설계한 유전적 계획론의 대표

1929년 12월 27일 전연방 마르크스주의 농업자회의. 스탈린은 연단에서 그로만의 이론을 직접 겨냥했다: 「10월혁명이 농민에게 2월혁명보다 적은 혜택을 주었다」는 주장을 거론하며 청중의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에 「그로만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순간 유전적 계획론은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통계학자·경제학자. 독일계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1898년 RSDLP에 입당해 멘셰비키로 활동하며 농업강령을 공동 기초했고, 펜자 통계국장 시절 다단계 표본추출법을 개발했다. 2월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식량위원장을 맡았고, 1921년 고스플란에 합류해 콘윤크투라 연구소를 이끌며 최초의 '국민경제 통제숫자'와 균형법을 설계했다. 바자로프와 함께 유전적 계획 방법론을 주창했으나 스탈린의 공개 비판 후 1930년 체포되어 1931년 멘셰비키 재판 주피고인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즈달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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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1908모스크바대학 입학, 혁명운동으로 제적 후 1908년 통신졸업
  • 1898–1905RSDLP 입당, 제2차 대회 후 멘셰비키 잔류, 농업강령 공동 기초; 뱟카·예니세이 유형 중 통계 작업 시작
  • 1909–1914펜자 주통계국장, 다단계 표본추출법 개발·농가조사 적용
  • 1917–19182월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식량위원장·중앙식량관리국장, 10월혁명 후 북부지역 식량관리국장
  • 1921–1926고스플란 콘윤크투라 연구소장, 최초 '국민경제 통제숫자'·균형법 설계, '회복적 성장' 개념 정식화
  • 1926–1929고스플란 농업분과위원장, 바자로프와 유전적 계획 방법론 주창; 스탈린의 전연방 마르크스주의 농업자회의 공개 비판
  • 1930–1940'멘셰비키 중앙국' 사건 체포, 1931년 재판에서 10년형; 수즈달 교정노동수용소에서 1940년 사망, 1991년 복권

독일 사회민주당 정치인으로 독립사회민주당 공동대표를 지냈다.

화가와 언론인으로 일했으며, 1917년 독일사회민주당의 전쟁 지지에 반대해 독립사회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 1918~1919년 뷔르템베르크 임시정부에서 내무장관을 맡았고, 1919년부터 독립사회민주당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당 대표단으로 참석했으나 코민테른 가입 조건과 독일공산당과의 합당에 반대했다. 1922년 독립사회민주당 다수가 독일사회민주당에 재통합된 뒤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에서 활동했고, 1933년 나치 집권 후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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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뷔르템베르크 임시정부 내무장관
  • 1919–1922독립사회민주당 공동대표
  • 1920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독립사회민주당 대표로 참석
  • 1922–1933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의 공동대표

헤르만 뮐러

Hermann Müller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민주당 정치인이자 두 차례 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1893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당 지도부에 올랐고, 1919년부터 1920년까지 외무장관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1920년 처음 총리가 되어 좌파 봉기를 진압하는 한편 장애인 고용, 초등교육, 실업급여와 노동자 사회보호를 확대하는 개혁을 추진했다. 1928년 다시 총리가 되어 대연정을 이끌었으며, 대공황과 실업보험 재정 분담을 둘러싼 갈등 속에 연정이 붕괴하자 1930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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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 1916독일 제국 의회 의원으로 선출됐다.
  • 1919–1920외무장관을 지내고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 1920총리로 재임했다.
  • 1928–1930대연정 총리로 재임했다.

빌헬름 리터 폰 레프

Wilhelm Josef Franz Ritter von Leeb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인 1876–1956 ○ 자연사

레닌그라드 봉쇄를 지휘한 독일 국방군 원수

그는 1941년 9월 레닌그라드가 곧 함락될 것이라 확신했지만, 도시는 항복하지 않았다.

빌헬름 리터 폰 레프는 독일 국방군 원수로,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작전 지휘관이었다. 1941년 북부집단군을 이끌고 발트해 연안에서 레닌그라드로 진격해 도시의 육상 봉쇄를 완성했으며, 그 지휘 아래 민간인에 대한 범죄와 유대인 학살 협력이 이루어졌다. 그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범죄 명령을 전달한 책임으로 전후 뉘른베르크 최고지휘부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복역 기간 만료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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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바이에른군 입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 및 세르비아 전역 복무
  • 1930–1933제7사단 사령관
  • 1939–1941C집단군 사령관
  • 1941.06–1942.01북부집단군 사령관, 레닌그라드 공격과 봉쇄 지휘
  • 1948최고지휘부 재판 유죄 판결, 복역 기간 만료로 석방

빌헬름 피크

Wilhelm Pieck
동독 공산주의 동독 독일 1876–1960 ○ 자연사

스파르타쿠스단에서 동독 국가원수까지, 독일 공산주의의 전 생애를 살아낸 유일한 생존 창립자

1919년 1월 15일 밤, 피크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어 에덴 호텔로 끌려갔다. 그는 동지들의 마지막 신문에 입회한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마부의 아들로 가구공을 거쳐 1895년 사민당에 입당,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좌파로 성장했다. 1차대전 반전 활동으로 군사법정에 회부되었고, 스파르타쿠스단과 KPD 창립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유일하게 생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1921)과 상임위원(1931)을 거쳐, 나치 집권 후 모스크바에서 KPD 망명 지도부를 이끌며 코민테른 서기를 지냈다. 전후 귀국해 사민당과의 합당으로 SED를 창출했고, 1949년 동독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사망까지 국가 원수직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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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독일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5징집 후 반전 활동으로 군사법정 회부, 암스테르담 망명
  • 1918–1919스파르타쿠스단 및 독일공산당(KPD) 창립 참여, 중앙위원
  • 1921코민테른(IC) 집행위원회 위원, 프로이센 란트타크 의원
  • 1928–1933라이히스타크 의원
  • 1931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원
  • 1934–1946KPD 의장 (망명 지도부)
  • 1935–1943코민테른 서기
  • 1943자유독일 국가위원회(NKFD) 공동 설립
  • 1946–1950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공동의장
  • 1949–1960독일민주공화국(GDR) 대통령

에리히 레더

Erich Raeder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76–1960 ○ 전범 유죄, 1955년 석방

대양함대 구상을 끝까지 밀어붙인 나치 독일 해군 지휘관

1940년 작전명 바다사자 구상에서 영국 해협의 제해권과 상륙 수송의 취약성이 독일 해군의 근본적 약점으로 드러났다.

에리히 레더는 제정 독일 해군에서 경력을 쌓아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과 나치 독일의 해군을 이끈 제독이다. 그는 전함 중심의 대양함대와 통상파괴전을 결합한 구상을 추진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940년 작전명 바다사자에 대해서는 영국 해협의 제해권과 상륙 수송의 취약성을 들어 회의적이었고, 해군력의 한계는 계획의 실행 가능성을 제약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공모, 평화에 반한 죄,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1955년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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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제정 독일 해군 입대
  • 1912–1918고위 해군참모,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28–1935국가해군 해군지휘부장
  • 1935–1939전쟁해군 총사령관, 상급제독
  • 1939–1943대제독, 전쟁해군 총사령관
  • 1943총사령관직 사임 및 퇴역
  • 1946–1955뉘른베르크 재판 유죄, 종신형 복역

콘라트 아데나워

Konrad Adenauer

잠정 국가를 지속 질서로 만든 정치가

의회평의회 의장 아데나워는 분단된 독일의 기본법을 최종 헌법이 아닌 잠정적 합의로 제시하는 데 앞장섰다.

콘라트 아데나워는 나치즘의 붕괴와 독일 분단 뒤 연방공화국의 틀을 세운 가톨릭 보수 정치가였다. 의회평의회 의장으로서 영구 헌법 대신 통일의 가능성을 열어 둔 잠정적 기본법을 지지하면서 서부 점령지에 민주 제도를 마련했다. 초대 연방총리로는 서방 결속과 유럽 통합,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진했지만 반공 노선으로 냉전의 분단도 굳혔다. 그의 정치적 유산은 잠정성을 내세운 국가 건설이 장기적 질서로 정착한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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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09쾰른 부시장
  • 1917–1933쾰른 시장
  • 1921–1933프로이센 국가평의회 의장
  • 1948–1949의회평의회 의장
  • 1949–1963독일연방공화국 초대 연방총리
  • 1951–1955연방 외무장관
  • 1950–1966기독교민주연합 의장

예브게니야 보그다노브나 보시

Евгения Богдановна Бош

첫 여성 소비에트 정부 수반, 혁명과 병마 사이에서

독일군이 키예프로 진격하자 동료들은 철수를 결정했지만, 보시는 싸우지 않고 도시를 넘길 수 없다며 버텼다. 결국 그녀는 말 그대로 강제로 대피시켜야 했다.

독일계 볼셰비키로, 1917년 우크라이나 인민사무국 서리를 맡아 여성 최초로 소비에트 정부를 이끌었다. 망명 시절 레닌의 민족문제 노선에 맞섰고, 좌익 반대파 46인 선언에 서명했으며 투병 끝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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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RSDLP 가입, 볼셰비키 분파 활동
  • 1907–1911키예프에서 지하혁명운동, 키예프 위원회 서기
  • 1912–1914체포, 시베리아 유형, 탈출·망명
  • 1914–1917스위스 망명, '보지 그룹'으로 레닌과 민족문제 논쟁
  • 1917.04–07남서지역 당위원회 의장, 제6차 당 대회 대표
  • 1917.12–1918.03우크라이나 인민사무국 서리 겸 내무인민비서
  • 1918–1919펜자 당위원회 의장, 카스피-캅카스 전선 정치위원
  • 1923–1924좌익 반대파 합류, 46인 선언 서명

리하르트 뮐러

Richard Müller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독일 독일 1880–1943 ○ 자연사

베를린 혁명적 직장위원을 이끌고 1918년 평의회 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낸 뒤 혁명사를 쓴 선반공

1918년 11월 혁명 때 노동자·병사 평의회 집행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혁명적 직장위원을 이끌며 1916년부터 반전 정치파업을 조직했다.

튀링겐 농촌 출신의 선반공으로 베를린 금속노조 선반공 부문의 지도자가 되었다. 전쟁 중 공장 대표들의 비밀 조직인 혁명적 직장위원을 이끌며 1916년 리프크네히트 체포 항의 파업, 1917년 4월과 1918년 1월의 대중 파업을 조직했다. 1918년 11월 9일 밤 제국의회를 점거해 평의회 선거를 소집했고, 대베를린 노동자·병사 평의회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평의회 정권의 형식상 수반이 되었다. 뒤에 공산당에 들어갔다가 떠났고, 1924~1925년 세 권짜리 혁명사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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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혁명적 직장위원을 이끌고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는 정치파업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 1918독일 혁명기에 노동자·병사 평의회 집행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발데마르 파프스트

Waldemar Pabst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 1880–1970 ○ 자연사

1919년 1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살해를 명령하고 카프 폭동에 가담한 자유군단 장교

1919년 1월 근위기병소총사단 참모장교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살해를 명령했다. 1920년 카프-뤼트비츠 폭동을 조직하고 오스트리아 향토방위대의 핵심 간부가 되었다.

1919년 1월 최대 자유군단 부대인 근위기병소총사단의 참모 장교로, 붙잡혀 온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심문한 뒤 살해를 명령했다. 뒤에 「내가 그들을 처형하게 했다」고 자랑했다. 1920년 카프 폭동에 주도적으로 가담했다가 오스트리아로 가서 우익 향토방위대 조직을 도왔고 추방되었다. 나치 독일에서는 나치당과 느슨한 관계에 머물며 공적 무대에서 물러났다. 1962년 인터뷰와 회고에서 노스케와 에베르트가 살해를 승인했다고 주장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처벌받지 않고 1970년 뒤셀도르프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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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3프로이센 참모본부에서 중위로 복무했다.
  • 1914–1918대위 겸 참모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에서 복무했다.
  • 1918–1919근위기병소총사단의 제1참모장교로 베를린 혁명 진압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15일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체포 후 심문을 거쳐 살해를 명령했다.
  • 1919–1920민족주의 단체 국민연합의 상무이사로 카프-뤼트비츠 폭동의 기술·조직 준비를 맡았다. 폭동 실패 뒤 오스트리아로 도피했다.
  • 1921–1930티롤 향토방위대의 참모장을 거쳐 1928년 연방참모장이 되었다. 1930년 체포되어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되었다.
  • 1930–1943베를린 라인메탈-보르시히에서 무기부문 책임자로 일했고 1938년 자신의 사업체를 인수했다. 1943년 스위스에 남아 정치적 망명을 받았다.
  • 1955–19701955년 독일로 돌아왔다. 전후에는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1970년 뒤셀도르프에서 사망했다.

베르트 헨리크

Werth Henrik
헝가리 반혁명 세력 헝가리 헝가리 독일계(슈바벤인) 1881–1952 ○ 소련 억류 중 사망

독일과의 동맹과 대소련 참전을 가장 강하게 주장한 헝가리군 참모총장

바나트의 레죄하저(오늘날 세르비아의 크니차닌)에서 슈바벤 독일계 가정에 태어나 1897년 빈에서 사관생도가 되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을 치렀다. 1919년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적군의 제1군단을 지휘하다가 6월 호르티의 국민군으로 넘어갔다. 1936년 정년 퇴역했으나 1938년 복귀해 참모총장이 되었고, 국방장관 버르터 카로이와 함께 독일과의 동맹을 가장 앞장서 주장했다. 1939년 3월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 침공과 병합을 지휘했고, 1941년 6월 커셔 폭격 뒤 곧바로 소련을 범인으로 지목하며 즉시 선전포고를 건의했다. 1941년 9월 참모총장에서 물러났고, 1945년 2월 소련군에 체포되어 소련으로 끌려가 1952년 그곳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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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1빈 보병 사관학교
  • 1914–1918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모장교
  • 1919적군 제1군단장, 6월 국민군으로 전향
  • 1938–1941참모총장
  • 1945–1952소련군에 체포, 소련 억류 중 사망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

Maximilian von Weichs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1–1954 ○ 전후 건강 악화로 기소 중단

스탈린그라드 공세를 지휘한 독일 야전원수

유고슬라비아 항복 직후인 1941년 5월, 그는 다친 독일군 1명마다 세르비아인 100명을 처형하라는 보복 명령을 내렸다.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는 바이에른 군대와 제국군 참모 전통을 이어받은 독일 직업군인으로,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에서 군단과 야전군을 지휘했다. 1942년 새로 편성된 B집단군 사령관이 되어 제6군과 동맹군을 포함한 남부 공세의 지휘 구조를 맡았고, 스탈린그라드 포위 뒤에는 후퇴를 주장했으나 히틀러의 명령을 바꾸지 못했다. 이후 발칸의 집단군 F와 남동방면군을 지휘하며 점령지 민간인에 대한 보복과 전쟁범죄 책임이 제기되었고, 전후 인질재판에서 건강 악화로 기소 절차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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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바이에른군 제2중기병연대 입대
  • 1935제1기갑사단 지휘
  • 1937–1939제13군단 및 제13군관구 사령관
  • 1939–1942제2군 사령관
  • 1942–1943B집단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 방면 공세
  • 1943–1945집단군 F 및 남동방면군 총사령관
  • 1947인질재판 절차 중 건강 사유로 석방

하인리히 브란들러

Heinrich Brandler
독일 공산당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81–1967 ○ 자연사

혁명 봉기를 취소한 KPD 의장이자 국제적 우익반대파의 공동 창립자

1923년 10월 21일 켐니츠 회의에서 브란들러는 좌파 사민당원들의 이탈을 목격하고 계획된 봉기를 전격 취소했다. 함부르크에서는 취소 소식이 제때 전달되지 않아 노동자들이 고립된 채 봉기했고, 24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독일공산당(KPD) 의장으로 1921년 3월 행동과 1923년 '독일 10월' 봉기를 이끌었으나, 혁명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봉기를 취소하고 그 책임으로 모스크바에 소환되었다. 에른스트 텔만의 당 지도부에 맞서다 1929년 KPD에서 제명된 후, 아우구스트 탈하이머와 함께 공산당 반대파(KPO)를 창립하여 국제적 '우익반대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나치 집권 후 프랑스·쿠바 망명을 거쳐 1949년 서독으로 귀환, 생애 끝까지 독립적 공산주의 노선을 견지하며 노동정치그룹(Gruppe Arbeiterpolitik)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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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1건설 노조 활동 시작,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4–1916반전 활동, 스파르타쿠스단 창립 멤버; 체포·추방
  • 1918.12독일공산당(KPD) 창립, 중앙위원 선출
  • 1921–1924KPD 의장; 3월 행동·1923년 '독일 10월' 봉기 주도, 실패 후 모스크바 소환
  • 1924–1928코민테른·프로핀테른 활동, 카자흐스탄 유배, 모스크바 VSNKh 근무
  • 1929KPD 제명, 탈하이머와 공산당 반대파(KPO) 창립, 국제적 우익반대파 형성
  • 1933–1948프랑스·쿠바 망명, 반파시스트 통일전선 주창
  • 1949–1956서독 귀환, 노동정치그룹(Gruppe Arbeiterpolitik) 창립·지도

빌헬름 카이텔

Wilhelm Keitel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의 수장으로 나치의 전쟁 범죄에 가담한 장군이다.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수장으로서 그는 범죄 명령에 서명하고 나치의 학살과 전쟁 수행에 책임을 졌다.

카이텔은 1938년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수장이 되었고, 히틀러의 군 통수권 아래서 정책을 전달하고 실행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동부 지역에서의 독일군 범죄를 처벌하지 않도록 한 관할권 명령, 소련 정치장교의 즉결 처형을 요구한 정치장교 명령, 야간과 안개 명령 등 국제법을 위반하는 명령과 포고에 서명했다. OKW 수장으로서 그는 소련에서 아인자츠그루펜과 군대의 민간인 학살 협력 및 소련군 포로의 가혹한 처우에 책임이 있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는 네 혐의 모두 유죄를 선고했고, 그는 1946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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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프로이센군 포병 장교로 입대했다.
  • 1938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수장에 임명되었다.
  • 19455월 독일군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 1946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파울 레비

Paul Levi
독일 공산당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83–1930 ○ 폐렴 중 추락사

룩셈부르크의 변호사에서 KPD 지도자로, '반푸치즘'으로 코민테른 좌경모험주의를 비판하다

1921년 3월 행동 직후,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이 팸플릿을 구상할 때 독일공산당은 50만 당원이었다. 8일 후 내가 이 글을 쓸 때, 그 당은 근본에서 동요했고 그 존립 자체가 의문에 처했다. 바쿠닌적 광기에 희생된 전사자들은 말한다: 다시는 결코!」

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사에서 독일공산당(KPD) 의장이 된 사회주의자. 1921년 3월 행동을 '바쿠닌주의적 푸치즘'으로 규정한 《우리의 길》로 축출된 후 USPD를 거쳐 SPD 좌파 지도자가 되었고, 트로츠키는 그를 '독일에서 유일하게 잃을 머리가 있는 사람'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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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SPD 입당, 프랑크푸르트에서 변호사 개업
  • 1913로자 룩셈부르크의 변호인으로 반군 선동 재판 변론
  • 1915–1918스파르타쿠스단 창립 참여, 침머발트 좌파·『Spartakusbriefe』 편집
  • 1918.12KPD 창립대회에서 '국민의회' 의제 발제
  • 1919.03–1921.02KPD 의장 —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요기헤스 사후 당 재건
  • 1920USPD 좌파 통합으로 KPD 대중정당화, '공개서한' 전술 주도
  • 19213월 행동을 비판한 『우리의 길: 반푸치즘』으로 KPD 제명
  • 1922USPD 거쳐 SPD 합류, 룩셈부르크의 『러시아 혁명』 유고 출간
  • 1924–1930제국의회 SPD 의원, 리프크네히트·룩셈부르크 살해 진상규명·반나치 투쟁

루돌프 뤼터스

Rudolf Lüters

파르티잔전쟁을 지휘한 독일 국방군 장성

뤼터스는 파르티잔의 전투 사기가 “놀라울 만큼 높다”고 평가했다.

루돌프 뤼터스는 제1차 세계대전과 독일 제국군·국방군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 보병대장이 된 직업군인이다. 1942년 말부터 크로아티아의 독일군을 지휘하며 네레트바와 수테스카 공세의 계획·실행에 참여했다. 그는 파르티잔을 잘 조직되고 지휘되는 군대로 평가하면서도, 수테스카에서 포위망 안의 무장 가능 남성을 살려 보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점령전의 절멸적 성격을 드러냈다. 1945년 소련군 포로가 된 뒤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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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제국군 제118보병연대 입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중대·대대 지휘
  • 1920–1933국가방위군 제15보병연대 및 제5사단 복무
  • 1933–1938제1프로이센보병연대 지휘, 보충군관구 감찰
  • 1941–1942제223보병사단 사단장, 소련 침공 참전
  • 1942–1943크로아티아 독일군 사령관, 네레트바·수테스카 공세 지휘
  • 1943제15산악군단 초대 군단장
  • 1944–1945군에서 명예 전역, 소련군 포로로 수용 중 사망

아우구스트 탈하이머

August Thalheimer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84–1948 ○ 자연사

독일공산당의 주요 이론가이자 보나파르트주의 파시즘 분석가

1937년 7월, 바르셀로나에서 KPO 대원 6명이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체포되자, 탈하이머와 브란들러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체포된 동지들에 대한 모든 정치적·개인적 보증을 떠맡는다. 그들은 반파시스트이며 혁명가로서, 스페인 혁명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될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독일공산당(KPD) 창립 세대의 대표적 이론가로, 파시즘을 금융자본에 종속된 도구가 아니라 계급 대립 위에 군림하는 독자적 집행권력으로 본 '보나파르트주의' 파시즘론의 창시자. 1929년 KPD에서 축출된 뒤 하인리히 브란들러와 함께 공산당 반대파(KPO)를 창립해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모두와 거리를 둔 독자 노선을 지키며 망명 속에서도 반파시스트 저술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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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독일 사회민주당(SPD) 입당, 좌파 언론 편집
  • 1916–1918스파르타쿠스단 활동, 반전 선전으로 징집·투옥
  • 1918.12독일공산당(KPD) 창립, 초기 주요 이론가
  • 1923브란들러와 함께 KPD 공동 지도, '독일 10월' 실패로 모스크바 소환
  • 1924–1928모스크바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쑨원대학에서 연구·강의
  • 1929KPD에서 제명, 브란들러와 함께 공산당 반대파(KPO) 창립
  • 1933–1948프랑스·쿠바 망명, 반파시스트 이론 활동 지속

프란츠 할더

Franz Halder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인 1884–1972 ○ 자연사

히틀러의 소련 침공을 기획하고 전후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주조한 독일 육군 참모총장

1941년 8월 11일, 전쟁 초입의 낙관이 산산조각난 할더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러시아 거인을 과소평가했다… 12개 사단을 격멸하면 러시아군은 또 다른 12개 사단을 내보낸다.'

프란츠 할더는 1938년부터 1942년까지 독일 육군 참모총장으로 재직하며 폴란드·프랑스 침공과 바르바로사 작전의 작전 계획을 주도한 군인이다. 1940년 7월 31일 베르크호프 회의 직후 작성한 일기에 소련을 파괴하기로 한 히틀러의 결단을 기록했으며, 이후 정치장교 즉결처형을 명령한 '코미사르 명령'과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전쟁범죄에 사법적 면책을 부여한 '바르바로사 관할권 법령'을 기안했다. 전후에는 미 육군 사적부의 수석 고문으로 활동하며 700여 명의 전직 독일 장교들을 감독해 전쟁범죄를 은폐하고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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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참모 장교로 복무하며 1급·2급 철십자장 수훈
  • 1938–1942육군 참모총장 (OKH), 폴란드·프랑스·발칸·소련 침공 작전계획 주도
  • 1940.07베르크호프 회의: 히틀러의 소련 파괴 결단을 일기에 기록, 바르바로사 계획 입안 개시
  • 1941'코미사르 명령'과 '바르바로사 관할권 법령' 기안, 동부전선의 전쟁 수행을 급진화
  • 1942.09동부전선 전략 실패로 히틀러와 갈등, 참모총장에서 해임
  • 1944–19457·20 음모 연루로 체포, 다하우·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 수감
  • 1947–1961미 육군 사적부 수석 고문, 전직 장교 700여 명의 사료 편찬 지휘하며 '깨끗한 국방군' 신화 구축
  • 1961미국 공로 민간인 훈장 수훈, 히틀러와 미국 대통령 모두에게서 훈장을 받은 유일한 독일인

알베르트 케셀링

Albert Kesselring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5–1960 ○ 전쟁범죄 유죄, 1952년 석방

루프트바페를 키우고 이탈리아 방어를 지휘한 나치 야전원수

1947년 2월 베네치아에서 재판이 시작되어 5월 6일 아르데아티나 학살과 민간인 살해 선동 혐의로 유죄, 사형 선고를 받았고, 7월 4일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1952년 10월 석방되었다.

알베르트 케셀링은 루프트바페 건설을 주도한 나치 독일의 야전원수로, 폴란드·프랑스·소련 침공과 지중해 전구를 지휘했고 1941년 11월부터 남부 총사령관으로 이탈리아 전역을 맡아 구스타프선과 고딕선에서 연합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동시에 그의 지휘 아래 민간인 보복이 자행되었고, 1944년 6월 반당파 지령으로 보복을 승인했으며 아르데아티나 동굴 학살을 포함해 점령기 이탈리아 민간인 약 2만 2천 명이 희생되었다. 1947년 베네치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1952년 석방되었으나, 자신의 전쟁 수행을 철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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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바이에른군 제2 야전포병연대에 입대
  • 1933제국항공성 행정국장, 루프트바페 창설 준비
  • 1936–1937루프트바페 참모총장
  • 1939–1941제1·제2 항공함대 지휘, 폴란드와 서부 및 동부 전선
  • 1941–1943남부 총사령관, 지중해 전구 독일군 지휘
  • 1943–1945남서부 총사령관 겸 C집단군 사령관, 이탈리아 방어
  • 1945서부전선 총사령관, 5월 미군에 항복
  • 1947–1952전쟁범죄 유죄 판결, 1952년 석방

헤르만 호트

Hermann Hoth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5–1971 ○ 전쟁범죄 유죄, 1954년 석방

기갑전의 성과와 동부전선 범죄가 겹친 독일 장군

1942년 12월, 호트의 제4기갑군은 포위된 스탈린그라드의 제6군을 구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헤르만 호트는 프로이센군과 제국군 전통을 이어받아 독일 국방군의 기갑 지휘관으로 성장한 장군이다. 프랑스 침공과 소련 침공에서 빠른 기동작전을 지휘했으며, 1942년 제4기갑군 사령관으로 블라우 작전의 남부 공세와 스탈린그라드 구출 시도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소련과의 전쟁을 절멸전으로 이해했고 정치위원 명령과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조치를 전달·집행했다. 전후 국방군 최고사령부 재판에서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로 15년형을 선고받았고 1954년 조기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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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프로이센군 장교로 복무 시작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 및 야전 지휘
  • 1935–1938제18보병사단 지휘
  • 1939–1940제15군단 지휘, 폴란드와 프랑스 침공 참가
  • 1941제3기갑집단 지휘, 민스크와 비테프스크 점령
  • 1941–1942제17군 사령관
  • 1942–1943제4기갑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 구출 작전 지휘
  • 1948–1954국방군 최고사령부 재판 유죄 판결과 란츠베르크 수감
  • 1956『기갑작전』 출간
  • 1971고슬라에서 사망
서구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독일 독일 1885–1977 ○ 자연사

아직-아닌 것의 철학자: 『희망의 원리』로 인간 해방의 구체적 유토피아를 사유하다

“진정한 기원은 시작이 아니라 끝에 있다. 사회와 존재가 스스로를 뿌리에서 파악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 『희망의 원리』

『희망의 원리』(Das Prinzip Hoffnung)로 '아직-아닌 것'(Noch-Nicht)과 구체적 유토피아의 철학을 정립한 독일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카치·벤야민·아도르노·브레히트와 교류하며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한 축을 형성했다. 1948년 동독으로 귀환해 라이프치히 대학 철학 교수와 국가상을 받았으나, 1956년 헝가리 봉기 후 인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하여 강제 은퇴당했고 1961년 서독으로 망명했다. 그의 사상은 해방신학과 1968년 학생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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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08뮌헨·뷔르츠부르크에서 철학·물리학·음악 수학, 『리케르트 비판』으로 박사
  • 1912–1914하이델베르크에서 막스 베버·짐멜·루카치와 교류
  • 1918『유토피아의 정신』 출간 — 초기 주저
  • 1921『혁명의 신학자 토마스 뮌처』 출간
  • 1920s베를린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브레히트·벤야민·아도르노와 교류
  • 1933–1938나치 집권 후 스위스·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 망명
  • 1935『이 시대의 유산』 출간 — 비동시성 개념으로 파시즘의 대중적 매력 분석
  • 1938–1947미국 망명 중 『희망의 원리』 3부작 집필
  • 1949–1957라이프치히 대학 철학 교수, 동독 국가상(1955), 독일 과학아카데미 회원
  • 1957헝가리 봉기 후 인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 교수로 강제 은퇴
  • 1961베를린 장벽 건설 후 서독 망명 — 튀빙겐 대학 객원교수
  • 1967독일 서적상 평화상 수상
  • 1968–1970s68운동과 해방신학에 영향, 루디 두치케와 교류

바실리 블라디미로비치 시미트

Васил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Шмидт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독일계 1886–1938 ✕ 처형

노동조합의 국가화를 주도한 노동인민위원

아서 랜섬은 1918년 12월 임명 직후 그를 만나 "면도를 깔끔히 한 총명한 젊은이로, 사무 처리에 대한 관심이 그의 인민위원부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고 기록했고, 슈미트는 인민위원부가 노동조합의 직접 통제를 받는다고 말했다.

1886년 12월 17일(그레고리력 2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하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러시아어 전기에서는 독일계로 기재되어 있다. 1905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철도 정비공으로 일했고, 1907년부터 1911년까지 독일에서 도장공으로 지내다 돌아와 1915년부터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1917년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와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1917년 11월 노동부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1928년까지 재임했다. 1928년부터 1930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을 지냈고, 1937년 1월 체포되어 1938년 1월 28일 사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으며, 1957년 7월 30일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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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철도 정비공
  • 1907–1911독일 망명, 도장공 노동
  • 1912–1914페테르부르크 금속노동자조합 비서
  • 1915–1916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 (수차례 체포)
  • 1917.2–10페트로그라드 당 위원회 서기,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7–1918노동부인민위원
  • 1918–1928노동인민위원 (RSFSR, 1923년부터 소련), 전연방 중앙노동조합평의회 간부
  • 1928–1930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겸 노동국방평의회 부의장
  • 1930–1931농업부인민위원
  • 1931–1933소련 인민위원회의 수석중재관
  • 1933–1937프리모리예 변경주 계획위원회 의장 등 지방 경제직

에른스트 텔만

Ernst Thälmann
독일 공산당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86–1944 ✕ 처형

11년 독방에서도 굴하지 않은 히틀러의 개인적 정치수

“힌덴부르크를 찍는 자는 히틀러를 찍는 것이고, 히틀러를 찍는 자는 전쟁을 찍는 것이다.” — 대통령 선거(1932)

독일공산당(KPD) 의장. 함부르크 항만 노동자 출신으로 당을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중정당으로 성장시켰다. 나치 집권 후 체포되어 11년 독방 끝에 1944년 부헨발트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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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20함부르크 부두 노동자 — SPD, USPD를 거쳐 KPD로
  • 1925–1933KPD 의장, 적색전선전사동맹 지도
  • 1925, 1932대통령 선거 출마
  • 1933게슈타포에 체포 — 11년 독방
  • 1944.8히틀러의 직접 명령으로 부헨발트에서 총살

카를 코르슈

Karl Korsch
서구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독일 독일 1886–1961 ○ 뇌질환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공동 창시자, 『마르크스주의와 철학』으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맞선 독일 철학자

“이런 교수들이 몇 명만 더 나와 이론을 뽑아내면 우리는 끝장이다.” — 1924년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지노비예프가 코르슈와 루카치를 겨냥해

루카치와 함께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놓은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혁명적 실천가. 『마르크스주의와 철학』(1923)에서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유물사관을 적용해 헤겔 변증법의 혁명적 회복을 주장했고, 이는 코민테른의 맹렬한 비판을 불렀다. 1923년 튀링겐 노동자 정부의 법무장관, KPD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좌파 반대파로 당에서 축출되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학자로 활동하며 브레히트·벤야민·프랑크푸르트학파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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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0뮌헨·제네바·베를린에서 법학·철학 수학, 예나 대학 법학 박사
  • 1912–1914런던에서 법률 연구, 페이비언협회 가입
  • 1914–1918독일군 복무 — 무기 소지 거부, 두 차례 철십자 훈장 수여
  • 1917독립사회민주당(USPD) 입당, 군인평의회 대표
  • 1920USPD 좌파와 함께 KPD 합류, 예나 대학 강사
  • 1923.3『마르크스주의와 철학』 출간 — 코민테른의 격렬한 비판 대상이 됨
  • 1923.10–11튀링겐 노동자 정부 법무장관 — 제국군의 진압으로 27일 만에 붕괴
  • 1924–1928KPD 제국의회 의원, 코민테른 제5차 대회 참석
  • 1926.4KPD에서 축출 — 당내 좌파 반대파 '결연한 좌파(Entschiedene Linke)' 결성
  • 1933제국의회 방화 사건 당일 독일 탈출 — 덴마크·영국 경유
  • 1936–1961미국 망명 — 툴레인 대학,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 연구, 브레히트에 마르크스주의 강의
  • 1938『카를 마르크스』 출간 —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깊은 영향
  • 1950「오늘날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열 가지 테제」— 정통 마르크스주의와의 결별 선언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Gotthard Heinrici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6–1971 ○ 자연사

동부전선의 방어전문가

1945년 4월 16일, 소련군 포격 직전 전방 참호의 주력을 후방 진지로 철수시켜 방어선을 보존했다.

고트하르트 하인리치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 국방군의 고위 지휘관으로서 동부전선 방어전의 전문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소련 침공과 점령전쟁에 참여했으며, 전쟁범죄와 정치적 명령이 작전 영역에 스며든 현실에서 지휘 책임을 졌다. 1945년 육군집단 비스툴라 사령관이 된 그는 소련군의 주공을 예측하고 제로 고지를 중심으로 종심 방어를 구축했지만, 그 전술적 성과는 패배를 뒤집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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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프로이센 육군 입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서부·동부전선 복무, 참모 장교
  • 1937–1940제16보병사단 사단장
  • 1940–1941제12군단장, 프랑스 전역과 소련 침공 참전
  • 1942–1944제4군 사령관, 동부전선 방어전 지휘
  • 1944–1945제1기갑군 사령관, 폴란드·슬로바키아 방면 후퇴전 지휘
  • 1945.03–04육군집단 비스툴라 사령관, 제로 고지 전투와 베를린 방어 지휘
  • 1945–1948영국군 포로, 1948년 석방

후고 에벌라인

Hugo Eberlein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87–1941 ✕ 총살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서 독일 공산당을 대표해 창립에 기권하고, 뒤에 대숙청으로 총살된 공산주의자

1919년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서 에벌라인은 룩셈부르크와 요기헤스의 위임에 따라 즉각 창립에 반대하는 입장을 전했다. 레닌의 설득으로 개인 의견은 바뀌었지만, 위임을 따라 반대표 대신 기권했다.

튀링겐 잘펠트 출신의 설계 기술자로 SPD에 들어갔고, 전쟁 중 룩셈부르크와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을 세웠다. 1919년 3월 독일 공산당 대표로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 참석해, 서둘러 새 인터내셔널을 세우면 볼셰비키가 지배하게 된다는 룩셈부르크와 요기헤스의 권고에 따라 창립 표결에 기권했다. 창립 뒤에는 코민테른과 독일 당에서 조직·재정 일을 맡았고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을 지냈다. 1933년 소련으로 망명했다가 1937년 체포되어 1941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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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스파르타쿠스단의 지하 정치 조직화에 참여하다.
  • 1918독일 공산당(KPD) 창당에 참여하다.
  • 1919독일 공산당 대표로 코민테른 창립 대회에 참석해 창립 표결에 기권하다.
  • 1921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다.
  • 1937소련에서 체포되어 수감되다.
  • 1941모스크바에서 총살되다.

솜버테이이 페렌츠

Szombathelyi Ferenc
헝가리 헝가리 헝가리 독일계(슈바벤인) 1887–1946 ✕ 처형

노비사드 학살로 번진 바치카 군사 개입을 명령하고, 뒤에 병력 보존과 서방 접촉을 꾀한 참모총장

모손에서 크나우스(크나우즈) 페렌츠로 태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모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을 치렀고, 1934년 어머니의 성인 솜버테이이로 바꾸었다. 1941년 카르파티아 집단을 이끌고 소련 침공에 참가했다. 그해 9월 베르트의 뒤를 이어 참모총장이 되었고, 1942년 1월 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에게 바치카 군사 개입을 명령해 이것이 세르비아인 마을들에 대한 징벌 작전과 노비사드 학살로 번졌다. 1943년 학살 책임자들에 대한 조사와 군사재판을 열었고, 칼러이와 함께 서방 연합국과의 접촉을 이끌었다. 1944년 독일 점령 뒤 해임되었고, 전후 인민재판소에서 종신형을 받은 뒤 유고슬라비아로 넘겨져 1946년 페트로바라딘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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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8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모장교
  • 1926–1938루도비카 군사 아카데미 교관, 교장
  • 1938–1939참모차장
  • 1941카르파티아 집단 사령관
  • 1941–1944참모총장
  • 1946인민재판소 종신형, 유고슬라비아 인도 뒤 처형

하인리히 폰 피팅호프

Heinrich von Vietinghoff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7–1952 ○ 자연사

이탈리아 전선의 독일군 항복을 대표한 장군

1945년 4월 29일 카세르타에서 그의 대리인들이 독일군의 이탈리아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프로이센 군인 가문 출신인 하인리히 폰 피팅호프는 제국군과 국가방위군을 거쳐 국방군의 상급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폴란드 침공과 소련 침공에 참여했고, 1943년부터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의 방어전을 지휘했다. 1945년 4월 카세르타에서 연합군과 항복 조건을 조율하고 군을 대표해 서명하게 함으로써, 독일군의 이탈리아 전쟁을 끝내는 절차의 핵심 당사자가 되었다. 전후에는 포로 생활 뒤 서독 재무장 논의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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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8프로이센군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9–1935국가방위군 장교, 육군부와 군단 참모 복무
  • 1938–1939제5기갑사단 사단장
  • 1940–1942제46기갑군단 사령관, 발칸 및 동부전선 지휘
  • 1942–1943제9군 및 제15군 사령관
  • 1943–1944이탈리아 제10군 사령관, 구스타프선과 고딕선 방어
  • 1944–1945육군집단 C 및 남서방면군 최고지휘관
  • 1945카세르타 항복 협정에서 독일군 대표

에리히 폰 만슈타인

Erich von Manstein
나치당·나치 정권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 1887–1973 ○ 1949년 전범 유죄, 53년 석방

나치 독일 최고의 작전 전략가이자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정점

"프로이센의 야전원수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하지 않은 이유를 이 한 마디로 답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나치 독일의 야전원수이자 동부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작전적 두뇌로 꼽혔던 군인이다. 1940년 프랑스 침공의 아르덴 우회 기동안(낫질 작전)의 입안자이며, 1941~42년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을 함락시키고 1943년 2~3월 하리코프에서 소련군의 과신장된 진격을 역습해 독일 남부전선의 붕괴를 막고 쿠르스크 돌출부를 형성시켰다. 히틀러와의 작전적 불화로 1944년 3월 해임되었고, 전후 영국 군사재판에서 전쟁범죄로 18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953년 석방되어 서독 군 재건에 조언했다.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는 홀로코스트와 국방군 범죄를 외면한 채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주춧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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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프로이센 근위보병 제3연대 소위 임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양 전선에서 참모 장교로 복무하고 대위로 종전
  • 1920s–1935제국방위군 참모·지휘관, 국방성 근무; 소령에서 대령으로
  • 1936육군 참모본부 수석 부참모총장 (소장)
  • 1939–1940폴란드·프랑스 전역: 남부집단군 참모장, 낫질 작전 입안, 제38군단장
  • 1941–1942제11군 사령관: 크림반도·세바스토폴 함락; 야전원수 진급
  • 1942–1944돈 집단군→남부집단군 사령관; 하리코프 역습, 쿠르스크 남부 축; 1944년 3월 해임
  • 1949–1955전쟁범죄로 18년 형(1953년 석방); 『잃어버린 승리』 출간, 서독 군사 고문

하인츠 구데리안

Heinz Wilhelm Guderian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8–1954 ○ 자연사

기갑전의 설계자이자 나치 독일의 장군

1940년 5월, 그는 뫼즈를 건넌 기갑부대가 보병을 기다리지 말고 해협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인츠 구데리안은 전차를 집중 운용하는 기동전 교리를 발전시켜 독일 기갑부대의 형성과 초기 전격전 승리에 기여한 직업군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과장해 ‘기갑군의 아버지’로 내세웠지만, 그 구상은 오스발트 루츠와 여러 장교들의 작업 위에 세워졌다. 1940년 프랑스 침공에서 그는 아르덴을 돌파해 뫼즈를 건너 영국 해협까지 신속히 진격하자고 밀어붙였고, 이 작전은 연합군을 덩케르크 일대에 고립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치 정권과 협력했고 동부전선의 침략전쟁과 점령 범죄에 연루된 지휘관이었으며, 전후 회고록은 자신의 책임과 정권과의 결합을 축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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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하노버 경보병대대 장교
  • 1914–1918제1차세계대전 참전, 통신·참모 장교
  • 1927–1931육군수송·차량화 부대 참모 및 교관
  • 1935–1938제2기갑사단 지휘관, 차량화 부대 감찰관
  • 1938–1940제19군단 사령관, 서부전역 기갑 지휘
  • 1941제2기갑집단 사령관, 바르바로사 작전
  • 1943–1945기갑부대 총감찰관, 육군참모총장 직무대행

카를 페퍼빌덴브루흐

Karl Pfeffer-Wildenbruch

부다페스트 포위전에서 항복을 거부하고 독일군을 지휘한 무장친위대 제9산악군단장

1907년 군에 들어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참모장교로 콘스탄티노플의 독일 군사사절단에서 일했다. 1919년 경찰로 옮겨 칠레 경찰대 책임자, 경찰학교 감찰총감을 지냈고, 친위대에 들어가 힘러의 참모부에서 일했다. 1939년 말 친위대 경찰사단을, 1943년 라트비아인 제6친위군단을 맡았다. 1944년 12월 부다페스트의 제9친위산악군단장이 되어 1944년 12월 24일부터 1945년 2월 11일까지 포위전에서 독일군을 지휘했고, 모든 항복 권유를 거부해 길고 참혹한 포위전으로 이어졌다. 탈출 시도가 실패한 뒤 소련군 포로가 되어 1949년 징역 25년을 선고받았고, 1955년 풀려나 1971년 빌레펠트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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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9독일군 장교, 참모장교
  • 1919경찰 입직
  • 1928칠레 경찰대 책임자
  • 1936경찰학교 감찰총감
  • 1939–1940친위대 경찰사단장
  • 1943–1944제6친위군단(라트비아인)장
  • 1944–1945제9친위산악군단장, 부다페스트 방어 지휘
  • 1945–1955소련 포로, 1949년 징역 25년 선고

빌리 뮌첸베르크

Willi Münzenberg
코민테른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89–1940 ✕ 의문사

나치의 실체를 출판으로 폭로한 '붉은 백만장자'이자, 스탈린과 결별한 코민테른 최고의 선전가

“슈탈린, 너는 배신자다!” — 1939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에 대한 뮌첸베르크의 반응

코민테른 최고의 대중선전가. 국제노동자원조와 반제국주의연맹을 설립하고, 1933년 『갈색서』로 라이프치히 방화의 나치 조작을 폭로했다. 스탈린주의와 결별 후 의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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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9국제사회주의청년조직연합 서기장
  • 1919–1921청년 코민테른 초대 서기장
  • 1921–1937국제노동자원조(IAH/Межрабпом) 창립자·지도자
  • 1924–1933독일 국가의회 의원 (KPD, 헤센-나사우)
  • 1927–1935반제국주의연맹 공동창립자·지도자
  • 1933–1939반파시즘 지하출판·국제연대운동 지휘 (파리)
  • 1939–1940『디 추쿤프트』 발행인, 반나치·반스탈린 독립노선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울리히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Ульрих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독일 1889–1951 ○ 뇌졸중

모스크바 쇼 재판의 판사, 스탈린의 '법적 단두대'

사형을 선고받은 에스토니아 변호사에게 울리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네 직업이 드디어 쓸모 있게 됐군!"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1926–1948)으로서 스탈린 시대 대숙청의 사법적 얼굴이었다. 라트비아 리가 출신으로, 독일계 발트인 혁명가 아버지와 러시아 귀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리가 공과대학을 졸업했다. 1910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18년 체카에서 경력을 시작해 1926년 군사합의부 의장에 올랐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투하쳅스키 등 구당 지도부에 대한 모스크바 쇼 재판(1936–1938)을 주재했고, 2년간 3만 명 이상의 사형 선고를 내린 기관을 지휘했다. 전후에는 블라소프, 크라스노프 등 나치 협력자 재판과 폴란드 지하국가 지도부 재판을 주재했다. 1948년 해임된 뒤 1951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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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RSDLP(볼셰비키) 입당
  • 1914리가 공과대학 상업과 졸업
  • 1915–1917러시아 제국군 공병대대 소위
  • 1918–1919NKVD·체카 재무과장
  • 1920공화국 혁명군사재판소 판사
  • 1921–1926RSFSR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
  • 1926–1948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
  • 1935–1948소련 최고재판소 부의장
  • 1948–1951군사법률아카데미 고등군사법률과정장

에른스트 로이터

Ernst Reuter

분단 베를린의 목소리가 된 사회민주주의자

“세계의 민족들이여, 이 도시를 보십시오. 이 도시와 이 민족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에른스트 로이터는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오가며 20세기 유럽의 격변을 직접 겪은 독일 정치가였다. 나치의 박해와 터키 망명을 거친 뒤 베를린으로 돌아와 도시 행정과 사회민주주의를 결합한 지도력을 보여 주었다. 베를린 봉쇄 때 그는 서베를린 시민의 결의를 국제사회에 호소했고, 분단된 도시를 자유와 자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의 경력은 혁명적 급진주의에서 민주적 지방정치로 이동한 한 세대의 긴장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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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독일 사회민주당 입당
  • 1918–1919볼가 독일인 자치 소비에트 공화국 초대 의장
  • 1921독일 공산당 베를린 지구 제1서기
  • 1926–1931베를린 교통 담당 시의원
  • 1931–1933마그데부르크 시장
  • 1935–1946앙카라대학교 도시계획 강사·터키 정부 고문
  • 1947베를린 시장 당선, 소련 점령당국의 승인 거부
  • 1948–1953서베를린 시장, 1951년부터 통치시장

알프레트 요들

Alfred Jodl

나치 전쟁기획의 실무 책임자

1940년 6월 30일 그는 “영국에 대한 최종 승리는 이제 시간문제”라고 썼다.

알프레트 요들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참모장을 맡아 나치 국가의 군사 결정을 작전 명령으로 바꾼 직업군인이었다. 1940년 영국을 상대로 최종 승리가 시간문제라고 판단하며 압박과 침공 선택지를 검토했고, OKW에서 관련 준비와 지휘 문서 작성을 조정했다. 그는 소련 정치위원 처형 명령과 특공대 즉결 처형 명령에 서명하거나 배포했으며, 점령지 주민 강제 소개와 가옥 소각 명령에도 책임을 졌다.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네 혐목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아 1946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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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바이에른 제4야전포병연대에서 군 복무 시작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포병 장교
  • 1932–1935육군 작전부 근무
  • 1935–1939국방군 최고사령부 국가방위부 책임자
  • 1939–1945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참모장
  • 1944육군 상급대장 진급
  • 1945뉘른베르크 재판 피고, 독일 항복문서 서명
  • 1946뉘른베르크에서 교수형

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 페렌츠

Feketehalmy-Czeydner Ferenc
헝가리 파시스트·나치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작센인(독일계) 1890–1946 ✕ 처형

노비사드 학살을 지휘하고 유죄 판결 뒤 독일로 달아나 친위대에 들어간 헝가리군 장군

트란실바니아의 작센인 가정에서 프란츠 차이드너로 태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포병·참모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을 치렀고, 전간기에 성을 헝가리식인 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로 바꾸었다. 1941년 8월 세게드에 주둔한 제5군단장이 되었다. 1942년 1월 참모총장 솜버테이이가 그를 바치카의 파르티잔 진압에 보냈고, 그의 명령으로 바치카 마을 주민이 학살되었으며 노비사드 학살도 그가 조직했다. 1944년 1월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뒤 다른 유죄 장교들과 빈으로 달아났고, 자원해 친위대에 들어갔다. 화살십자당 정권에서 국방차관이 되어 자신을 비판해 온 버이치질린스키 엔드레의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다. 전후 헝가리를 거쳐 유고슬라비아로 넘겨져 1946년 11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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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포병 소위 임관
  • 1914–1918오스트리아-헝가리군 포병·참모장교
  • 1941–1942제5군단장, 바치카 학살 지휘
  • 1944군사재판 유죄, 빈으로 도주, 친위대 입대
  • 1944–1945화살십자당 정권 국방차관
  • 1946유고슬라비아에서 처형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Friedrich Paulus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90–1957 ○ 자연사

명령과 현실 사이에서 무너진 야전사령관

“한 독일 야전원수가 생포된 전례는 아직 없다”는 승진 통보 뒤, 파울루스는 자살하지 않고 항복했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의 참모 장교이자 장군으로, 소련 침공 계획 수립에도 관여했다. 제6군 사령관으로 스탈린그라드 공격을 지휘했으나, 소련군의 포위 뒤 히틀러의 사수 명령과 군대의 붕괴 사이에 갇혔다. 그는 1943년 1월 31일 항복했고, 포로 생활 중 나치 체제를 비판하며 반나치 독일 장교 조직에 참여했다. 전후 동독에서 군사사를 연구했지만, 그의 경력은 침략전쟁 수행과 뒤늦은 결별이 함께 남긴 책임의 문제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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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독일 제국군 제111보병연대 장교 후보생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참모 장교
  • 1935–1939기갑부대 사령부 참모장, 제10군 참모장
  • 1939–1940제10군, 이후 제6군 참모장
  • 1940–1941독일 육군 총참모부 작전 병참 담당 차장
  • 1942–1943독일 국방군 제6군 사령관
  • 1943상급대장, 1월 30일 야전원수로 승진
  • 1954–1957동독 군사사 연구 및 강의

발터 모델

Walter Model

히틀러의 소방수라 불리며 동부전선의 위기를 진압한 방어전의 명수

눈보라를 뚫고 동프로이센으로 날아간 모델은 히틀러 앞에서 단안경 너머로 노려보며 물었다. 「총통 각하, 9군을 지휘하는 것이 각하십니까, 나입니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 장교로 두각을 나타낸 발터 모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국방군 최고의 방어전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르제프 돌출부의 9군 사령관으로서 소련군의 여러 대공세를 격퇴해 '방어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히틀러에게는 어디든 급파할 수 있는 '소방수'로 신임을 받았다. 1943년 4월 27일 모델은 항공정찰 사진을 제시하며 쿠르스크 돌출부에 구축된 소련군의 종심 방어선 앞에서 성채 작전이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한 최초의 고위 지휘관이었으나 공세는 강행되었고, 북부 공격축을 지휘한 그의 9군은 12km조차 돌파하지 못했다. 전쟁 말기 루르 포위망에서 집단 항복을 거부하고 육군 집단을 해산한 뒤 숲에서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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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52보병연대 사관후보생
  • 1917최고사령부 작전과 참모장교
  • 1935육군총국 제8부(기술) 부장
  • 1940제3기갑사단장
  • 1942제9군 사령관, 르제프 방어전
  • 1943성채 작전 북부 공격 지휘
  • 1944중부집단군 사령관 → B집단군 사령관
  • 1945루르 포위망 포위, 군 해산 후 자결

헬무트 바이들링

Helmuth Weidling

붕괴하는 제국의 마지막 베를린 방위 지휘관

“저항을 즉시 중지하라. 베를린의 민간인과 부상자들이 겪는 고통을 매 시간 연장할 뿐이다.”

헬무트 바이들링은 제국군에서 출발해 국방군 포병 장교와 군단 지휘관으로 올라선 독일 장군이었다. 동부전선에서의 지휘는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과 점령 체계에 연루되었고, 그의 군단은 오자리치 강제수용소 사건과 관련해 전후 책임 추궁의 대상이 되었다. 1945년 4월 23일 베를린 방위구역 사령관이 된 그는 히틀러의 항복 금지 명령 아래 도시 방어를 지휘했으며, 5월 2일 바실리 추이코프와 협상해 주둔군의 저항 중지 명령을 내렸다. 소련 포로가 된 뒤 전쟁범죄로 25년형을 선고받고 1955년 수감 중 사망했으며, 러시아 검찰은 1996년 그를 복권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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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8프로이센군 포병 및 비행선 부대 장교
  • 1919–1938국가방위군 포병 장교, 연대 지휘관
  • 1939–1941폴란드·프랑스 전역 및 동부전선 포병 지휘
  • 1942–1943제86보병사단 사단장
  • 1943–1945제41기갑군단 사령관
  • 1945.04제56기갑군단 사령관, 오데르 전선과 베를린 전투
  • 1945.04.23–05.02베를린 방위구역 사령관, 주둔군 항복 명령
  • 1952–1955소련 수감 중 전쟁범죄 유죄 판결, 복역

오토 율리예비치 슈미트

Отто Юльевич Шмидт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독일 1891–1956 ○ 병사

북극을 과학으로 정복한 수학자, 글라브세브모르푸티의 설계자

두 달간의 빙판 체류 내내 그는 매일 저녁 텐트에서 철학·수학·지리 강연을 열었다. 결핵으로 각혈하면서도 끝까지 진영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고, 104명 중 단 한 명의 무단 이탈도 없었다.

수학자·북극 탐험가·국가행정가. 모길료프 출생의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군론 연구로 모스크바 대수학파를 창건했다. 1932년 쇄빙선 시비랴코프호로 북극해 항로를 세계 최초로 단일 항해로 돌파했고, 1934년 첼류스킨호 침몰 후 빙판 위에서 104명의 생존자를 이끌었다. 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으로 북극 개발을 총괄했으며, 말년에는 태양계 행성이 차가운 먼지 구름의 응축으로 형성되었다는 우주기원론을 제창하여 소련 과학계에 큰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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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키예프 대학 물리수학부 졸업, 군론 연구 시작
  • 1916『추상군론』 출판, 키예프 대학 사립강사
  • 1918–1920식량인민위원부 간부, RSDLP(국제주의자)에서 RKP(b)로 편입
  • 1921–1924국립출판사 소장, 교육·출판 개혁 주도
  • 1924–1942『대소비에트백과사전』 초대 편집장
  • 1929–1949모스크바 대학 고등대수학과 창설·주임, 소련 대수학파 지도
  • 1930–1932전연방북극연구소 소장
  • 1932시비랴코프호로 북극해 항로 최초 단일 항해 통과
  • 1932–1938북극해 항로 총국(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
  • 1934첼류스킨호 침몰, 빙판 위에서 104명과 두 달 생존·전원 구조
  • 1937표류관측소 '북극-1' 설립 주도,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 1939–1942소련과학아카데미 부총재
  • 1942–1956이론지구물리학연구소 소장, 태양계 '차가운 강착' 우주기원론 연구

카를 되니츠

Karl Dönitz

나치 독일 해군의 잠수함 전력을 지휘하고 히틀러 사후 국가원수를 지냈다.

되니츠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해군 잠수함 전력을 지휘했고, 1943년 1월 대제독으로 승진해 해군 총사령관이 됐다. 잠수함 손실이 커진 1943년 5월 이후에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출격을 명령했다. 히틀러가 자살한 뒤 유언에 따라 국가원수로 지명됐으며, 1945년 5월 7일 요들에게 독일 항복문서에 서명하도록 명령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평화에 반한 죄와 전쟁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10년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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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독일 해군 총사령관에 취임
  • 1945히틀러 사후 국가원수가 되어 독일 항복을 지시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서구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독일 독일 1892–1940 ✕ 모르핀 과다복용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유령적 동반자, 기술복제시대 예술론으로 자본주의 문화를 해부한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

「역사철학 테제」에서 벤야민은 이렇게 썼다: "문명의 기록물 가운데 동시에 야만의 기록물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베를린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발터 벤야민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깊이 교차하면서도 어느 학파에도 포섭되지 않은 독보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화비평가였다. 유대 신비주의와 역사적 유물론을 독창적으로 결합한 그의 사유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5)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예술의 '아우라'를 붕괴시키는 메커니즘을 분석했고, 유작 「역사철학 테제」(1940)에서는 파울 클레의 그림에 빗대 '역사의 천사'라는 강렬한 알레고리로 진보서사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았다. 망명 중에도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19세기 파리의 자본주의 문화를 고고학적으로 발굴했고, 브레히트·아도르노·숄렘과의 긴장 어린 교류 속에서 기술·이미지·역사에 관한 가장 선구적인 마르크스주의적 통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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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베른대학교에서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으로 박사학위 취득
  • 1925프랑크푸르트대학교 교수자격 논문 『독일 비극의 기원』 제출했으나 철회
  • 1928『일방통행로』와 『독일 비극의 기원』 출간
  • 1933나치 정권 성립 후 독일을 영구히 떠나 파리로 망명
  • 1935–1936「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집필 및 프랑스어판 발표
  • 1940「역사철학 테제」 집필, 피레네 국경 포트보우에서 자결

에른스트 톨러

Ernst Toller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 독일 유대계 독일인 1893–1939 ✕ 자살

바이에른 혁명에 참여한 독일 유대계 표현주의 극작가

제1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해 베르됭 전투에서 부상한 뒤 1917년 제대했고, 전쟁 경험을 거쳐 평화주의자가 되어 독일독립사회민주당에 가입했다. 1919년 4월 바이에른 레테 공화국 대통령을 엿새간 맡고 공화국의 무장 저항에 참여했으며, 반역죄로 5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대표 희곡들을 썼다. 나치 집권 뒤 망명해 반나치 활동을 이어갔고 1939년 뉴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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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독일군에 자원입대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다.
  • 1917전쟁 중 부상과 건강 악화 뒤 군에서 제대하다.
  • 1919독일독립사회민주당원으로 바이에른 레테 공화국 지도부에 참여하고, 4월 6~12일 대통령을 맡다.
  • 1919공화국의 무장 저항에 참여한 혐의로 반역죄 5년형을 선고받다.
  • 1925석방되어 바이에른에서 추방되고 베를린으로 가다.
  • 1933나치 집권 뒤 독일을 떠나 스위스·프랑스·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Alfred Rosenberg
독일 국가기관 파시스트·나치 독일 발트 독일인 1893–1946 ✕ 처형(교수형)

나치 인종 이론가로서 1941~1945년 동부 점령지 장관을 지낸 레발 태생의 발트 독일인

1893년 러시아 제국 에스토니아현의 레발(탈린)에서 태어나 리가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1918년 물러가는 독일군과 함께 독일로 건너가 1919년 1월 히틀러보다 먼저 독일노동자당에 들어갔고, 1923년 당 기관지 『푈키셔 베오바흐터』의 편집장이 되었다. 1930년 인종 이론서 『20세기의 신화』를 냈고, 히틀러에게 「시온 장로 의정서」를 소개해 유대인 음모론을 심었다. 1941년 7월 17일 동부 점령지 장관이 되어 힌리히 로제를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으로 두었으나 실권은 크게 제한되었다. 발트 지역을 독일의 「생존 공간」으로 보았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네 죄목 모두 유죄를 받고 1946년 10월 16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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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독일노동자당 입당
  • 1923『푈키셔 베오바흐터』 편집장
  • 1930『20세기의 신화』 출간
  • 1941–1945동부 점령지 장관
  • 1946뉘른베르크 재판 사형 선고, 처형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Joachim von Ribbentrop

나치 독일 외무장관으로 독소 불가침 조약 협상을 주도했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1938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 외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 협상을 주도했으며, 이 조약은 독일의 9월 폴란드 침공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추축국에 유대인을 독일의 살해 시설로 이송하고 독일 내 유대인 시민을 추방에 넘기도록 압박하는 외교 활동을 지휘했다. 국제군사재판에서 네 혐의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아 사형을 선고받았고, 1946년 10월 16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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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5독일 외무장관

헤르만 괴링

Hermann Göring

나치 국가의 전쟁과 약탈을 조직한 공군 원수

1940년 8월, 런던과 민간 도시로 공습을 돌린 결정은 RAF에 회복할 시간을 주었다.

헤르만 괴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기 조종사에서 나치 독일의 핵심 권력자이자 공군 최고지휘관으로 변신했다. 그는 프로이센 경찰과 게슈타포 창설, 재무장과 전시경제 동원을 주도하며 독재와 침략전쟁의 국가기구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그는 루프트바페의 역량을 과대평가했고, 공군기지와 전투기 방어망을 압박하던 작전을 영국 도시 폭격으로 돌리는 데 관여해 RAF가 회복할 시간을 주었다. 전쟁 뒤 뉘른베르크에서 주요 전쟁범죄자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집행 전날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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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제1전투비행단 지휘관
  • 1923돌격대 최고지휘관
  • 1932–1945제국의회 의장
  • 1933–1945프로이센주 총리
  • 1935–1945공군 최고사령관
  • 1936–19454개년 계획 전권위원
  • 1940–1945제국원수

발터 울브리히트

Walter Ulbricht
동독 공산주의 동독 독일 1893–1973 ○ 자연사(뇌졸중)

동독을 건설하고 베를린 장벽을 세운 독일 공산주의 지도자

1961년 6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아무도 장벽을 세울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공언했으나, 두 달 뒤인 8월 13일 그의 명령으로 베를린 장벽 건설이 시작되었다.

1893년 라이프치히의 재단사 가정에서 태어나 가구 목수로 훈련받았고, 1912년 사민당에 입당한 뒤 1919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거쳐 1920년 독일공산당(KPD)에 들어갔으며, 1923년 중앙위원, 1928~1933년 라이히스타크 의원이었다. 나치 집권 후 소련으로 망명해 코민테른에서 일했고, 1945년 4월 30일 '울브리히트 그룹'을 이끌고 귀국해 1946년 강제 합병으로 사회주의통일당(SED)을 창당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1950년 SED 제1서기가 되어 동독을 통치하며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을 명령하고 1963년 신경제체계 개혁을 추진했으나, 1971년 5월 3일 실각해 호네커에게 자리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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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독일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8스파르타쿠스단 및 독일공산당(KPD) 창립 참여
  • 1923–1933KPD 중앙위원, 라이히스타크 의원
  • 1933–1945파리·프라하·모스크바 망명, 코민테른 활동
  • 1943자유 독일 국가위원회(NKFD) 결성 참여
  • 1950–1971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중앙위 제1서기
  • 1960–1973독일민주공화국 국가평의회 의장
  • 1971브레즈네프의 압력으로 당직 사임

오토 그로테볼

Otto Grotewohl
동독 공산주의 동독 독일 1894–1964 ○ 자연사

분단 국가의 통합을 이끈 사회민주주의자

1946년 4월, 그는 빌헬름 피크와 함께 새로 창립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오토 그로테볼은 바이마르기의 사회민주주의 정치가로, 나치 독재에 맞서 의회에서 반대표를 던지고 전후 소련 점령지의 독일 사회민주당을 이끌었다. 그는 처음에는 신중했지만 소련 점령 당국의 압력 속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을 추진해 1946년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이 되었다. 이 통합은 동독 국가의 정치적 토대를 놓았지만, 사회민주당 내부의 자유로운 선택이 억압된 강제 통합이기도 했다. 1949년부터 동독 최초의 정부 수반을 맡은 그는 국가 건설과 소련의 영향력 사이에서 제한된 자율성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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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독일 사회민주당 입당
  • 1920–1926브라운슈바이크 주의회 의원
  • 1922–1924브라운슈바이크 법무·국민교육 장관
  • 1925–1933독일 국가의회 의원
  • 1945–1946소련 점령지 독일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
  • 1946–1950독일 사회주의통일당 공동 의장
  • 1949–1964독일민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60–1964중병으로 사실상 정치 활동 중단
  • 1964동베를린에서 사망

파리를 넘겨 파괴 명령을 거부한 독일 장군

1944년 8월 25일 그는 파리 주둔군의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디트리히 폰 콜티츠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복무한 독일 직업군인으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나치 독일의 전쟁을 수행했다. 그는 1944년 8월 파리 군정관으로서 히틀러의 도시 파괴 명령을 실행하지 않고 프랑스군에 주둔군을 넘겨주어 파리 해방의 조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전후 영국의 도청 기록에는 크림반도에서 유대인 학살을 수행했다고 인정하는 발언이 남아 있어, 파리에서의 불복종이 그의 전쟁 책임을 지우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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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8왕립 작센군 제107보병연대 장교, 서부전선 복무
  • 1919–1939제국방위군 장교, 제16보병연대 제3대대 지휘관
  • 1939–1940제16공수보병연대 지휘관, 폴란드·네덜란드 전역
  • 1941–1942제16보병연대 지휘관, 크림·세바스토폴 전투
  • 1943제11기갑사단 및 제48기갑군단 지휘관, 동부전선
  • 1944제76기갑군단·제84군단 지휘관, 이탈리아·노르망디
  • 1944대파리 Wehrmacht 사령관 겸 파리 군정관, 8월 25일 항복
  • 1944–1947트렌트파크와 미국 포로수용소에 억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2세

Friedrich Ebert junior
동독 공산주의 독일 독일계 1894–1979 ○ 자연사

분단의 현장에서 국가 권력으로 이동한 사회민주주의자

1948년 11월 30일, 그는 동부 부문의 ‘임시 민주 마기스트라트’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2세는 사회민주당 정치인에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자로 이동한 독일 정치가로, 초대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상징성과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겹쳐 있었다. 나치 시대에는 불법 정치활동으로 수용소에 구금되었고, 전후에는 소련 점령지에서 사민주의와 공산주의의 강제적 통합을 거쳐 SED 체제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48년 11월 30일 그는 동부 부문의 비정상적 시의회를 이끌어 선출된 베를린 정부를 폐위시키고 경쟁적 동베를린 마기스트라트를 세웠으며, 이후 도시 재건과 동독 국가기관 운영을 함께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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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5사회민주당 기관지 《포어베르츠》 편집자
  • 1927–1933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 시의원
  • 1928–1933독일 국가의회 의원
  • 1946–1949브란덴부르크 주의회 의장
  • 1946–1979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정치국 위원
  • 1948–1967동베를린 초대 시장
  • 1949–1979동독 인민회의·국가평의회 지도부
  • 1971–1979SED 인민회의 원내단 의장

루돌프 헤스

Rudolf Hess

나치당 지도자이자 히틀러의 대리인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헤스는 1920년 나치당에 가입해 히틀러의 측근으로 부상했다. 1933년 당 부지도자가 되었고 1939년 히틀러는 그를 헤르만 괴링 다음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1941년 5월 그는 영국과의 전쟁을 끝내려는 평화 교섭을 위해 스코틀랜드로 단독 비행했으나 영국 정부는 제안을 거부하고 그를 전쟁포로로 억류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평화에 반한 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아 슈판다우 교도소에서 복역했다.

리하르트 구스타보비치 조르게

Рихард Густавович Зорге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독일 1895–1944 ✕ 처형

도쿄에서 전쟁의 시간표를 훔친 스파이

세계대전은 내 생애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쳤다. 다른 어떤 요인보다 오로지 이 전쟁 때문에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 1927년 자서전에서

독일 특파원으로 위장해 도쿄에서 활약한 소련 정보원. 바르바로사 작전을 경고하고 일본의 남방 진출을 확인, 시베리아 사단의 모스크바 투입을 이끌어냈다. 1944년 처형, 1964년 소련영웅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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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29코민테른·적군 정보부 요원
  • 1930–33상하이 정보망
  • 1933–41도쿄, 독일 대사관의 신임을 얻은 특파원
  • 1941.5–6바르바로사 경고 타전, 묵살
  • 1941.9「일본은 북진하지 않는다」, 시베리아 사단 이동의 근거
  • 1941.10/1944.11체포, 도쿄에서 처형

오스카르 디를레방어

Oskar Dirlewanger
나치당·나치 정권 파시스트·나치 독일 독일 1895–1945 ✕ 구타로 사망

볼라 학살에 가담한 SS 특수부대 지휘관

전과자들로 편성된 부대를 지휘한 무장친위대 지휘관. 1940년부터 점령한 폴란드와 벨라루스에서 반(反)빨치산 작전을 지휘하며 민간인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나치 독일의 SS 장교이자 전쟁범죄자. 1940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딴 특수부대를 지휘했으며, 부대는 폴란드와 벨라루스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진압에 투입되어 볼라의 민간인 학살에 가담했다. 그의 지휘 책임은 나치 점령정책과 SS·경찰 지휘체계 속에서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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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뷔르템베르크군에 입대해 기관총수로 복무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위까지 올라 두 등급의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 1919~1921프라이코어단에 가담해 독일 혁명과 노동자 봉기·파업·공산주의자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 1922~1934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나치당에 입당했으나, 1934년 미성년자 성범죄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당에서 제명되고 박사 학위와 군사 훈장을 박탈당했다.
  • 1937~1939콘도르 군단에 배속되어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고 세 차례 부상했으며, 이 복무를 근거로 1940년 유죄 판결이 취소되고 당籍이 회복되었다.
  • 1940밀렵 전과자들로 편성된 오라니엔부르크 밀렵부대를 인수해 지휘하기 시작했고, 이 부대는 특수부대로 개칭되어 점령한 폴란드에서 경비·반(反)빨치산 임무를 맡았다.
  • 1943부대의 연대급 확대가 인가되었고, 부대는 벨라루스에서 반(反)빨치산 작전을 벌이며 민간인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 1944바르샤바 봉기 진압과 볼라 학살에 참가했고, 이어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 진압에도 투입되었다.
  • 19452월 구벤 부근에서 소련군과 교전 중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며, 4월에 부대를 버리고 탈영해 숨었다.

프리드리히 예켈른

Friedrich Jeckeln
나치당·나치 정권 파시스트·나치 독일 독일 1895–1946 ✕ 처형(교수형)

카미야네츠포딜스키·바비 야르·룸불라의 대량 총살을 지휘한 친위대·경찰 고위 지도자

슈바르츠발트의 호른베르크에서 직물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싸웠다. 1929년 나치당, 1930년 친위대에 들어갔고, 1933년부터 브라운슈바이크의 경찰청장과 정치경찰 책임자를 지냈다. 1941년 6월 힘러에게 남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친위대·경찰 고위 지도자로 뽑혀 관할 지역의 아인자츠그루펜 학살을 모두 지휘했고, 카미야네츠포딜스키(2만 3600명)와 바비 야르(3만 3771명)의 대량 총살에 자신의 방식을 썼다. 11월 오스트란트로 옮겨 리가 유대인의 절멸을 명령받았고, 룸불라에서 이틀 동안 2만 5000명이 살해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1945년 4월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 리가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46년 교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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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8독일군 장교, 조종사
  • 1929–1930나치당·친위대 입당
  • 1932–1945제국의회 의원
  • 1933–1938브라운슈바이크 경찰청장, 정치경찰 책임자
  • 1941남부 러시아·우크라이나 친위대·경찰 고위 지도자
  • 1941–1944오스트란트 친위대·경찰 고위 지도자
  • 1946리가 재판 사형 선고, 처형

힌리히 로제

Hinrich Lohse
독일 국가기관 파시스트·나치 독일 독일 1896–1964 ○ 고향에서 사망

1941~1944년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으로서 발트 유대인의 게토 수용과 재산 몰수를 명령한 나치 대관구장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농가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상을 입었다. 1923년 나치당에 들어가 1925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대관구장이 되었고, 1933년 이 주의 주지사를 겸했다. 1941년 7월 25일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에 임명되어 리가와 킬을 오갔고, 7월 27일 포고로 유대인 명부 작성, 노란 별 착용, 재산 몰수와 게토 수용을 명령했다. 리에파야의 유대인 처형을 막은 일로 해명을 요구받자 11월 15일 경제적 이해와 상관없이 모든 유대인을 없애라는 것인지 물었으나, 이후 3년 동안 자리를 지켰다. 1944년 8월 13일 허가 없이 오스트란트를 떠나 해임되었다. 1948년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1951년 건강 문제로 풀려났고 1964년 고향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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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나치당 입당
  • 1925슐레스비히홀슈타인 대관구장
  • 1933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지사
  • 1941–1944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
  • 1948–1951징역 10년 선고, 1951년 석방

요제프 괴벨스

Joseph Goebbels

나치당 선전 책임자이자 선전장관으로 반유대주의와 독재를 선전했다.

요제프 괴벨스는 나치당 선전 책임자로서 1926년부터 베를린 당 조직을 이끌고, 1930년 당 선전 책임자가 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선전장관으로 임명한 뒤 언론·영화·라디오·문화계를 나치 이념에 맞춰 통제하고, 반유대주의 선전과 유대인 박해를 부추겼다. 1938년 11월 포그롬의 주요 선동자였으며, 전쟁 말기에는 총력전을 선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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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45나치당 베를린 대관구 지도자
  • 1930–1945나치당 선전 책임자
  • 1933–1945국민계몽선전부 장관
  • 1944–1945총력전 전권위원

통화 개혁과 사회적 시장경제를 설계한 서독 경제정치가

1948년 6월 21일, 그는 라디오를 통해 일부 공산품의 가격 통제와 강제 배급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전후 서독의 경제 질서를 자유로운 경쟁과 사회적 안전의 결합으로 구상한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였다. 1948년 비조네 경제행정 책임자로서 통화 개혁을 준비하고 독일마르크 도입과 맞물려 가격·생산 통제를 단계적으로 풀어 서독 경제 회복의 제도적 출발을 열었다. 그의 역할은 흔히 ‘경제 기적’의 단독 설계자로 신화화되지만, 연합국의 개혁과 국제 경기, 노동자와 기업의 생산 회복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으며 가격 자유화는 초기 생활비 상승과 노동계급의 저항도 낳았다. 이후 경제부 장관과 수상으로서 그 질서를 서독의 국가 정체성으로 굳혔으나, 경기 침체와 연정 붕괴 속에서 1966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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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2뉘른베르크 상과대학에서 경영학 수학
  • 1925프랑크푸르트대학교 경제학 박사
  • 1947비조네 ‘화폐·신용 특별기구’ 위원장
  • 1948–1949비조네 경제행정청장
  • 1949–1963서독 경제부 장관, 1957년부터 부수상 겸임
  • 1963–1966서독 제2대 연방수상
  • 1966–1967기독교민주연합 당수
  • 1949–1977독일 연방의회 의원

게오르기 에리호비치 란게마크

Георгий Эрихович Лангемак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독일 1898–1938 ✕ 처형

카추샤 로켓의 아버지, RS‑82·RS‑132를 완성하고 '우주비행학'이라는 말을 만든 기술자

1921년 크론시타트 반란 당시,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일부터 4월 18일까지 구금되었다. 붉은군대가 반란을 진압한 후에야 풀려났다. 그가 카추샤를 만들기 20년 전의 일이었다.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가스역학연구소(GDL)에서 무연화약 로켓 개발을 시작해 로켓연구소(RNII) 수석기술자(1934–1938)로서 RS-82와 RS-132 고체연료 로켓탄을 실전 배치 가능한 수준까지 완성했다. 이 로켓탄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BM-13 카추샤 다연장로켓의 핵심 탄약이 되었다. 러시아어에 '코스모나프티카(우주비행학)'라는 용어를 도입했으며 치올콥스키와 교신하며 로켓의 평화적 우주 응용을 구상했다. 1937년 대숙청 당시 허위 고발로 체포되어 1938년 1월 11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 1991년 사회주의노동영웅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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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8페트로그라드대학 일본문헌학과 입학, 해군 사관후보생 학교 졸업 후 해군 복무
  • 1919–22붉은군대 동원, 크론시타트 요새 포대장·사단장 보좌
  • 1923–28붉은군대 군사기술아카데미 졸업
  • 1928–33가스역학연구소(GDL)에서 무연화약 로켓탄 RS-82·RS-132 개발 주도
  • 1934–37로켓연구소(RNII/NII-3) 부소장 겸 수석기술자, 군사기술 1급 공병
  • 1937–38NKVD 체포, 1938년 1월 11일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후 당일 총살
  • 1955/1991사후 복권(1955), 사회주의노동영웅 추서(1991)
서구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독일 독일 1898–1956 ○ 심장마비

서사극과 '낯설게 하기'로 연극을 계급투쟁의 무기로 만든 마르크스주의 극작가

내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희곡들을 이해했다 — 마르크스야말로 내 희곡의 유일한 관객이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극작가이자 서사극의 창시자였다. 1920년대 후반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한 후, 감정적 몰입을 거부하고 관객의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낯설게 하기'와 변증법적 연극론을 정립했으며, 《서푼짜리 오페라》·《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사천의 선인》 같은 작품들로 자본주의와 전쟁을 무대 위에서 해부했다. 1933년 나치를 피해 스칸디나비아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1947년 HUAC 조사 후 유럽으로 돌아와 1949년 동베를린에 헬레네 바이겔과 함께 베를리너 앙상블을 창립해 전후 세계 연극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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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밤의 북소리』로 클라이스트 상 수상
  • 1924베를린으로 이주, 도이체스 극장 연극부 조수
  • 1928『서푼짜리 오페라』 초연, 1920년대 베를린 최대 흥행작
  • 1933나치 독일을 떠나 15년간의 망명 시작
  • 1947할리우드에서 HUAC에 증언, 다음날 미국을 떠남
  • 1949헬레네 바이겔과 동베를린에 베를리너 앙상블 창립
  • 1954스탈린 평화상 수상
서구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미국 독일 1898–1979 ○ 뇌졸중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이자 1960년대 신좌파의 대표적 이론가

'그것은 가장 진전된 위치에서 위대한 거부, 즉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항의다' — 《일차원적 인간》(1964)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 철학자로,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 정신분석을 결합하여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 이론을 전개했다. 《에로스와 문명》(1955)에서 자본주의의 억압 구조를 분석하고 해방된 에로스의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탐구했으며, 《일차원적 인간》(1964)에서는 기술적 풍요가 비판 의식을 잠식하는 현대 산업사회를 '일차원적 사회'로 규정하며 억압적 탈승화 개념을 제시했다. 독일계 유대인으로 나치를 피해 미국에 망명, 전시 OSS에서 근무하고 브랜다이스대와 UC샌디에이고에서 가르치며 1960년대 학생 운동과 신좌파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위대한 거부'로 상징되는 그의 급진적 사유는 비판 이론과 해방 정치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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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제네바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 합류
  • 1934–1942컬럼비아대학교 사회연구소 연구원, 뉴욕
  • 1942–1951OSS 및 국무부 분석관, 중앙유럽과장
  • 1954–1965브랜다이스대학교 정치이론 교수
  • 1965–1970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철학 교수

발터 슈탈레커

Walter Stahlecker
나치당·나치 정권 파시스트·나치 독일 독일 1900–1942 ✕ 파르티잔과 싸우다 치명상

1941년 특수작전집단 A를 이끌며 카우나스 포그롬을 부추기고 발트 유대인 살해를 지휘한 친위대 장교

슈테르넨펠스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튀빙겐 대학에서 법학 박사가 되었다. 1932년 나치당과 친위대에 들어가 뷔르템베르크와 브레슬라우의 게슈타포를 이끌었고, 1938년 빈의 유대인 이주 중앙청 공식 수장이 되었다. 1941년 2월 특수작전집단 A 사령관이 되어 6월 북부집단군을 따라 발트 3국에 들어갔다. 카우나스에서는 클리마이티스에게 포그롬을 시키고 리가에서는 아라이스에게 부대를 꾸리게 하는 등, 학살을 현지인의 「자기 정화」처럼 꾸몄다. 1941년 겨울까지 유대인 24만 9,420명을 죽였다고 보고했고, 11월 말 오스트란트 보안경찰·정보부(SD) 사령관이 되었다. 1942년 3월 러시아 크라스노그바르데이스크 근처에서 소련 파르티잔에게 치명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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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튀빙겐 대학 법학 박사
  • 1932나치당·친위대 가입
  • 1938빈 유대인 이주 중앙청 수장
  • 1941특수작전집단 A 사령관, 오스트란트 보안경찰 사령관
  • 1942소련 파르티잔에게 치명상

하인리히 힘러

Heinrich Himmler

나치 인종국가의 핵심 설계자

1943년 10월 포젠에서 그는 친위대 장교들에게, 시체 백 구에서 천 구를 견디며 '품위 있는 자'로 남은 것이 '기록되지도, 기록될 수도 없는 영광의 장'이라고 말했다.

하인리히 힘러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와 경찰 체계를 확장해 인종주의적 지배와 대량학살을 관료적으로 조직한 핵심 지도자였다. 그는 강제수용소와 절멸정책, 점령지의 학살 부대를 통솔하며 유대인과 여러 집단에 대한 집단살해를 실행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때에는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을 살해·추방하는 독일의 보복 작전을 승인하고 지시했다. 전쟁 말기 서방과의 독자적인 협상을 시도하다 히틀러에게 해임됐고, 영국군에 체포된 뒤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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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에 가입하고 뮌헨 폭동에 가담했다.
  • 1925친위대에 가입했다.
  • 1929–1945제국지도자 친위대로서 친위대를 지휘했다.
  • 1936–1945독일 경찰장으로서 경찰과 정치탄압 기구를 장악했다.
  • 1943–1945내무장관을 겸임했다.
  • 1944바르샤바 봉기에 대한 도시 파괴와 주민 학살·추방 작전을 지시했다.
  • 1945서방과의 독자 협상 시도로 해임되고 체포 뒤 자살했다.

오토 브라운

Otto Braun
코민테른 공산주의 독일 독일 1900–1974 ○ 자연사

「리더」, 대장정에 동행한 유일한 서양인이자 쭌이 회의에서 책임을 추궁당한 코민테른 군사고문

코민테른 요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리더'라는 이름을 썼고 대장정에 동행한 거의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1935년 쭌이 회의에서 보구와 함께 지휘직에서 해임되었으며, 동독이 리더의 정체를 공식 밝힌 것은 1964년이었다.

뮌헨 출신 독일 공산당원으로 1928년 탈옥해 소련에 가 프룬제 군사아카데미에서 배웠다. 1932년 코민테른의 군사고문으로 상하이에 왔고 1933년 장시 소비에트에 들어가 보구와 함께 진지전 방어를 지휘했으나 제5차 포위토벌에 패했다. 대장정에서 1935년 쭌이 회의는 그와 보구의 군사 지도를 비판하고 마오를 앞세웠다. 1939년 모스크바로 돌아갔고 전후 동독에서 번역가·교수로 살며 1973년 회고록 『중국 기록』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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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9코민테른 파견 중국 군사고문

카를 프리드리히 오토 볼프

Karl Friedrich Otto Wolff

나치 SS의 고위 조정자이자 전쟁 말기의 협상 대표

1945년 3월 8일, 볼프는 스위스에서 앨런 덜레스와 북이탈리아 항복 조건을 논의했다.

카를 볼프는 나치 독일의 고위 SS 장교로,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 참모장을 지내며 정권의 핵심 의사결정과 범죄에 접근했다. 이탈리아 점령기에 최고 SS·경찰 지도자로서 유대인 검거와 강제노동, 저항운동 탄압을 관할했고, 그 책임을 전후 협상 참여로 지울 수는 없었다. 1945년 스위스에서 미국 OSS의 앨런 덜레스와 비밀 협상인 작전 선라이즈를 진행해 북이탈리아 독일군의 조기 항복을 이끌었지만, 그 영향력과 동기는 제한적으로 평가된다. 전후에는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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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독일 제국군 제115 보병연대 장교 후보생, 서부전선 복무
  • 1931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과 SS 가입
  • 1935–1943SS 국가 지도자 개인참모장
  • 1943–1944이탈리아 최고 SS·경찰 지도자
  • 1944–1945이탈리아 주둔 독일군 전권대장
  • 1945작전 선라이즈 독일 측 협상 대표, 북이탈리아 항복 관여
  • 1964–1969뮌헨 법원에서 유대인 30만 명 살해 방조죄로 15년형, 1969년 석방

하인츠 라이네파르트

Heinz Reinefarth
파시스트·나치 독일 독일계 1903–1979 ○ 자연사

바르샤바 봉기의 학살을 지휘한 SS 장군

라이네파르트는 바르샤바 봉기 진압 보고에서 “죽일 탄약보다 포로가 더 많다”고 썼다.

하인츠 라이네파르트는 나치당과 SS에 가입해 법률가에서 독일 점령전쟁의 지휘관으로 전환한 인물이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에서 그는 전투부대와 경찰·보안 병력을 묶은 전투단을 지휘했고, 8월 5일 볼라 공격과 민간인 집단살해의 현장 지휘 구조에 핵심적으로 관여했다. 전후 폴란드의 송환 요구에도 기소와 유죄 판결을 피한 그는 서독에서 시장과 주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경력은 전쟁범죄 지휘 책임과 전후 사회의 면책이 한 인물 안에서 이어진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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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예나에서 법학을 마치고 법률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 1932나치당과 SS에 가입했다.
  • 1942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에서 SS 민정 행정감찰관을 맡았다.
  • 1944바르테란트 SS·경찰고등지도자가 되었다.
  • 1944-08바르샤바 봉기 진압 전투단을 지휘했다.
  • 1945퀴스트린 요새 사령관을 맡았고 미군에 체포되었다.
  • 1951–1964베스터란트 시장을 지냈다.
  • 1962–1967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독일 국가기관 파시스트·나치 독일 독일 1904–1942 ✕ 암살 공격 부상으로 사망

친위대 정보·경찰기관 수장으로 홀로코스트 실행을 지휘한 나치 관리다.

1942년 반제 회의에서 하이드리히는 유럽 유대인 살해를 위해 독일 국가기관들의 협력을 조율했다.

하이드리히는 1931년 친위대에 들어가 국가보안부(SD)를 조직하고 이끌었으며, 1936년에는 게슈타포와 형사경찰을 포괄한 보안경찰을 지휘했다. 1939년 제국보안본부(RSHA)가 설치되자 수장이 되어 보안경찰과 SD를 통합 지휘했고, 유대인과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나치의 박해와 살해 정책을 실행하는 핵심 기관을 이끌었다. 1941년 총독 대리로 임명된 보헤미아·모라비아에서 저항 세력을 처형하고 유대인 게토화와 강제이송을 추진했다. 1942년 1월 반제 회의를 주재해 유럽 유대인 살해를 위한 부처 간 협력을 조율했으며, 5월 체코 저항요원의 공격으로 부상한 뒤 6월 4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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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42친위대 국가보안부(SD) 수장
  • 1936–1942보안경찰 수장, 1936–1939년 보안경찰 수석사무국장
  • 1939–1942제국보안본부(RSHA) 수장
  • 1941–1942보헤미아·모라비아 총독 대리

에드문트 페젠마이어

Edmund Veesenmayer

1944년 헝가리 주재 제국 전권대표로서 헝가리 정부에 유대인 이송을 압박한 친위대 외교관

바트키싱겐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뮌헨에서 정치학을 공부해 1928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2년 나치당에 들어갔고, 오스트리아 슈슈니크 총리의 사임 공작,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 해체, 1941년 크로아티아 독립국 선포에 관여했다. 1944년 3월 독일의 헝가리 점령과 함께 친위대 여단지도자로서 헝가리 주재 제국 전권대표가 되어 게슈타포 등 국방군 밖의 점령 기관을 지휘했고, 헝가리 정부에 유대인의 아우슈비츠 이송을 압박했다. 6월에는 리벤트로프에게 약 34만 명의 유대인이 제국으로 넘겨졌다고 보고했고, 10월에는 화살십자당의 권력 장악을 도왔다. 1949년 빌헬름가 재판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으나 1951년 풀려났고, 1977년 다름슈타트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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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뮌헨에서 정치학 박사
  • 1932나치당 입당
  • 1939체코슬로바키아 해체 공작
  • 1941자그레브에서 크로아티아 독립국 선포 주선
  • 1944헝가리 주재 제국 전권대표
  • 1949–1951빌헬름가 재판 징역 20년, 1951년 석방

루트 레발트

Ruth Rewald
독일 독일 1906–1942

스페인 내전 속 아이들의 경험을 기록한 망명 작가

국제여단의 아동시설에서 만난 아이들의 경험을 소설로 옮겼다. 전쟁을 겪는 어린이를 선전의 대상만이 아니라 고유한 기억과 감정을 지닌 존재로 다루려 했다.

독일계 유대인 아동·청소년 문학 작가. 나치 집권 뒤 프랑스로 망명했고, 스페인 내전 중 국제여단이 세운 에른스트 텔만 아동시설에서 활동했다. 아이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네 명의 스페인 소년』을 집필했다. 1942년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된 뒤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사망일은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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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9베를린과 하이델베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학위 없이 중단했다.
  • 1931아동 도서 연작 「어린이 나라의 해와 비」에 첫 이야기들을 발표했다.
  • 1932베를린 노동자 아이들의 삶을 다룬 『뮐러 거리, 오늘의 소년들』을 출간했다.
  • 1934파리 망명 중 쓴 청소년 소설 『멕시코 소년 얀코』가 스트라스부르에서 출간되었다.
  • 1937리자 테츠너의 주선으로 『차오와 징링, 중국의 아이들』이 스위스 노동조합 신문에 실렸다.
  • 1937–1938국제여단 편에서 내전을 다룬 아동·청소년 도서를 준비하기 위해 스페인을 취재했다.
  • 1938연말에 『네 명의 스페인 소년』 원고를 완성했으나 이 작품은 1987년에야 출간되었다.

아돌프 아이히만

Adolf Eichmann
나치당·나치 정권 파시스트·나치 독일 독일·오스트리아 1906–1962 ✕ 처형(교수형)

유럽 각지 유대인의 절멸 수용소 이송을 맡고 1944년 헝가리 유대인의 아우슈비츠 이송을 지휘한 친위대 장교

독일 졸링겐의 칼뱅파 가정에서 태어나 1914년 가족을 따라 오스트리아로 옮겨 자랐고, 1932년 나치당과 친위대에 들어갔다. 1938년 빈에서 오스트리아 유대인의 이주를 조직했다. 1939년 12월 국가보안본부 IV B4과장이 되었고, 1942년 1월 반제 회의에 참석해 회의록을 작성했으며, 이후 그와 부하들이 유대인을 절멸 수용소로 보내는 이송을 맡았다. 1944년 3월 독일의 헝가리 점령 뒤 헝가리 유대인 이송을 지휘해, 7월 이송이 멈출 때까지 72만 5000명 가운데 43만 7000명이 이송되었다. 전후 미군에 붙잡혔다가 수용소에서 달아나 1950년 아르헨티나로 건너갔으나,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납치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1962년 교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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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오스트리아 나치당·친위대 입당
  • 1933–1938친위대 보안국 유대인 문제 담당
  • 1938–1939빈 유대인 이주 중앙청
  • 1939–1945국가보안본부 IV B4과장
  • 1944헝가리 유대인 이송 지휘
  • 1950–1960아르헨티나 도피
  • 1960–1962모사드에 납치, 예루살렘 재판, 처형
동독 공산주의 동독 독일 1907–2000 ○ 자연사

동독 '공포의 대가': 32년간 슈타지를 장악한 국가보안 수장

“사형 찬반에 대한 그 모든 헛소리 — 전부 헛소리다, 동무들. 집행하라! 필요하다면 법정 판결 없이도.” — 1982년, 슈타지 간부들 앞에서

베를린 빈민가 출신의 공산주의 투사로, 1931년 경찰관 살해 후 소련으로 망명해 NKVD 훈련을 받았다. 스페인 내전 참전 뒤 1945년 귀환하여 동독 국가보안부 창설을 주도했고, 1957년 장관에 올라 32년간 9만 명 규모의 감시 기구를 이끌었다. 슈타지는 동독 사회 전반을 통제했고, 제3세계 무장투쟁 세력과 서유럽 극좌 조직 지원으로 냉전기 사회주의권 안보 협력망을 확장했다. 1989년 체제 붕괴로 물러났고 통일 후 1931년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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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KPD 입당
  • 1931뷜로플라츠 경관 살해 후 소련 망명
  • 1936–1939스페인 내전 국제여단 참전 (대위)
  • 1945베를린 귀환, 리히텐베르크 경찰서장
  • 1950국가보안부 차관 겸 국무차관
  • 1957–1989국가보안부 장관 (슈타지 수장)
  • 1976SED 정치국 정위원
  • 1993경관 살해 유죄 판결, 6년형

아네마리 도에르

Annamarie Doherr
서독 독일인 1909–1974 ○ 심장마비

울브리히트의 '장벽 부인'을 끌어낸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기자

보충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자유도시' 형성이 곧 브란덴부르크 문에 국경이 세워진다는 뜻입니까?

함부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학위를 마치지 못하고 언론에 들어간 독일 기자다. 전후에는 소련이 통제하는 베를린 방송에서 일하다 1949년 서베를린으로 옮겨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특파원이 되었고, 1961년 6월 15일 기자회견에서 '국경이 브란덴부르크 문에 세워지는가'를 물어 울브리히트로부터 '아무도 장벽을 세울 의도가 없다'는 유명한 답을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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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함부르크 대학 법학 수학 시작
  • 1934함부르크 국제정치 연구소 견습
  • 1936함부르크 세계경제자료원 근무
  • 1942Wirtschafts-Ring 편집자로 베를린 이주
  • 1943Transocean-Europapress 중앙편집부 편집자
  • 1945소련 통제 베를린 방송(Berliner Rundfunk) 합류
  • 1946베를린 방송 'Zeitecho' 편집장
  • 1949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서베를린 특파원

에리히 호네커

Erich Honecker
동독 공산주의 독일 독일 1912–1994 ○ 사망

장벽의 공화국을 장기 통치한 동독 지도자

1989년 10월의 축출은 동독 체제의 붕괴가 지도부 내부에서도 더는 막을 수 없게 되었음을 드러냈다.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를 거친 독일 공산주의자로, 전후 동독에서 청년조직과 당의 핵심을 지냈다. 1971년부터 1989년까지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을 이끌며 동독의 장기 통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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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1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 1971–1989독일사회주의통일당 제1서기·총서기
  • 1976–1989독일민주공화국 국가평의회 의장
  • 1989대중 시위 속에서 실각

클라우스 바르비

Klaus Barbie
나치당·나치 정권 파시스트·나치 독일 독일계 1913–1991 ○ 반인도적 범죄로 종신형

나치의 리옹 게슈타포 책임자

1987년 리옹 재판에서 그는 이지외 급습을 부인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레지스탕스와 싸웠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클라우스 바르비는 나치 친위대와 보안방첩대에서 활동한 장교로, 점령기 리옹 게슈타포를 지휘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박해했다. 그는 칼뤼르에서 장 물랭을 체포하고 고문했으며, 이지외의 유대인 아동 44명과 교사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데 책임이 있었다. 전후 미국 정보기관의 반공 작전에 이용되어 볼리비아로 도피한 그는 오랫동안 처벌을 피했지만, 1987년 리옹 재판에서 반인도적 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사례는 나치 범죄의 연속성과 냉전 반공주의가 만든 면책의 구조를 함께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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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친위대 입대, 보안방첩대 복무
  • 1940–1941암스테르담 보안방첩대, 유대인·공산주의자 탄압
  • 1942디종 파견, 점령 프랑스 보안 업무
  • 1942–1944리옹 게슈타포장, 레지스탕스 탄압과 유대인 강제이송
  • 1947–1951미군 방첩대 정보원
  • 1951–1983볼리비아에서 클라우스 알트만으로 활동
  • 1987리옹 재판, 반인도적 범죄 유죄 및 종신형
  • 1991리옹 교도소에서 사망

분단의 도시에서 화해의 정치를 만든 사회민주주의자

장벽이 세워진 뒤 그는 말했다. “장벽은 무너져야 하지만, 무너지기 전까지 도시는 살아가야 합니다.”

빌리 브란트는 나치 독재에 맞서 망명과 저항을 거친 독일 사회민주주의 정치가였다. 서베를린 시장으로서 장벽 건설 뒤 흔들린 도시의 사기를 지키고 서방의 책임을 촉구했으며, 장벽을 ‘수치의 장벽’이라 부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방총리로서는 동방정책과 ‘접근을 통한 변화’를 추진해 냉전의 대립을 완화했고 197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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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45나치 독재에 맞선 망명·저항 활동가
  • 1948–1953베를린 주재 독일 사회민주당 대표
  • 1957–1966서베를린 정무시장
  • 1964–1987독일 사회민주당 의장
  • 1966–1969외무장관·부총리
  • 1969–1974독일연방공화국 연방총리
  • 1976–1992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의장

보리스 빅토로비치 라우셴바흐

Борис Викторович Раушенбах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독일계 1915–2001 ○ 자연사

수용소에서 보스토크까지: 우주비행 제어의 개척자

내 인생에서 상관은 코롤료프와 켈디시 단 두 사람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고결한 분들이었다. 그게 중요하다.

소련 우주개발의 기초를 닦은 물리학자이자 로켓 공학자. 코롤료프의 OKB-1에서 우주선 방향제어 및 유도체계를 설계하여 루나 3호의 달 뒷면 촬영(1959)과 가가린의 보스토크 1호 비행(1961)을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했다. 볼가 독일인 가계 출신으로 1942년 민족 기준으로 강제수용되었으나 수용 중에도 계산을 계속했고, 켈디시의 도움으로 복귀하여 우주 프로그램의 핵심 설계자가 되었다. 후기에는 회화의 원근법에 대한 수학적 연구와 정교회 신학으로 전환하여 독창적인 학제적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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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레닌그라드 민간항공대학 수학 및 글라이더 연구
  • 1937–1941RNII (로켓연구소) 엔지니어 — 코롤료프 휘하 유도탄 비행제어
  • 1942–1946타길라그 강제수용소 수감 — 볼호비티노프 설계국에 계산 제공
  • 1946–1948니즈니타길 특별정착 — 켈디시 산하 계산국 근무
  • 1948–1954NII-1 연구원 — 켈디시 지도하 진동 연소 이론 연구
  • 1955–1959OKB-1 — 코롤료프 지도하 우주선 방향제어 선구적 연구
  • 1960–1973OKB-1 부서장 — 루나·보스토크·화성·금성·소유즈 유도체계 총괄
  • 1959–1978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MFTI) 교수 및 이론역학 주임
  • 1978–2001과학아카데미 우주개척자 유산위원회 위원장 · 예술이론·신학 연구

헬무트 그뢰트루프

Helmut Gröttrup
소련 소련 공산주의 독일 독일 1916–1981 ○ 자연사

페네뮌데에서 고로도믈랴까지, R-7의 개념적 선조를 설계한 독일인 로켓 기술자

「낡은 보수적 V-2 형태를 버리면 2천 마일 사거리에 도달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원추형 형상이 근본적으로 유일한 해법입니다.」 1949년 아내 이르가르트에게

독일의 응용물리학자이자 로켓 유도 시스템 전문가. 페네뮌데에서 베르너 폰 브라운의 지휘 아래 V-2 유도 제어를 개발했고, 1944년 패전을 논했다는 이유로 게슈타포에 체포되기도 했다. 1946년 소련으로 강제 이주되어 고로도믈랴 섬에서 170여 명의 독일 기술자 집단을 이끌며 G-4(원추형 단일 단계)와 G-5(패킷 방식 다단)를 설계했다. 이 개념들은 훗날 코롤료프의 R-7 ICBM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으며, 1949년 소련 평가단은 G-4가 R-3보다 우수하다고 판정했다. 1953년 서독 귀환 후 로켓을 떠나 스마트 카드를 발명하고 독일어 '인포르마틱' 용어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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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5V-2 유도 제어 부서, 페네뮌데 육군 연구소
  • 1945–1946뷰로 그뢰트루프 소장, 블라이헤로데 (소련 점령지구)
  • 1946노르트하우젠 연구소 독일 측 책임자, 이후 중앙공장 총책임자
  • 1946–1950NII-88 분소 1호 소장, 고로도믈랴 섬
  • 1954–1958연구원, SEL (슈투트가르트)
  • 1970–1980GAO 전무이사, 기제케 앤 데브리언트

마르쿠스 볼프

Markus Wolf
동독 공산주의 독일민주공화국 독일 1923–2006 ○ 자연사

냉전 정보전의 장기 설계자

1984년 8월 RYaN 회의에서 그는 서방의 핵공격 징후보다 ‘실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마르쿠스 볼프는 나치 박해를 피해 소련으로 망명한 뒤 독일민주공화국의 대외정보기관을 이끈 공산주의 관료이자 정보 책임자였다. 그는 1952년부터 1986년까지 슈타지 해외정보국 HVA를 지휘하며 서독 정치·군사·경제를 겨냥한 첩보와 공작을 조직했다. 1980년대 초 소련이 핵 선제공격 공포 속에서 RYaN 작전을 확대하자, 볼프는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현장 정보가 실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긴장을 드러냈다. 독일 통일 뒤 그는 해외 망명과 재판을 거쳤고, 자신의 국가보안 활동에 대한 책임과 사회주의의 개혁 가능성을 회고록과 공개 발언으로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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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33슈투트가르트에서 성장
  • 1933–1943소련 망명, 모스크바와 코민테른 학교에서 수학
  • 1943–1945모스크바 독일인민방송 편집자·방송원
  • 1949–1951독일민주공화국 모스크바 대사관 초대 참사관
  • 1952–1986대외정보기관 IWF와 HVA 국장
  • 1953–1986국가보안부 장관 제1차관
  • 1986–1990퇴임 후 회고록 집필과 개혁 논쟁 참여
  • 1990–2006망명과 재판을 거쳐 베를린에서 사망

헨리 앨프리드 키신저

Henry Alfred Kissinger
미국 국가기관 미국 독일 1923–2023 ○ 자연사

데탕트와 '연계' 전략으로 초강대국 핵무기 통제의 틀을 설계한, 현실주의 외교의 화신

1972년 파판치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은 마차 대열을 홀로 앞서 달리는 카우보이를 좋아합니다. 이 낭만적인 캐릭터는 제게 꼭 맞습니다"라고 말해 닉슨을 격노시켰다.

나치 독일을 피해 15세에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난민 출신으로, 하버드대에서 현실주의 외교 이론을 정립하고 닉슨·포드 행정부에서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냈다. 소련과의 데탕트를 주도하며 '연계' 전략을 고안, 도브리닌 주미 소련대사와의 비밀 배후채널을 통해 1972년 SALT I과 ABM 조약을 성사시키는 결정적 외교를 펼쳤다. 중국 비밀 방문으로 미중 화해의 문을 열고 파리 평화협정을 중재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나, 캄보디아 폭격과 제3세계 개입으로 전쟁범죄 논란 역시 끌어안은 복합적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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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3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 시티칼리지에서 회계학 수학 후 미군 입대
  • 1943–194984보병사단 정보장교로 유럽 전선 참전, 방첩대 요원으로 게슈타포 색출 및 탈나치화 임무
  • 1950–1969하버드대 정치학 교수, 국방연구프로그램 소장; 록펠러·닉슨 캠페인 외교 고문
  • 1969–1975국가안보보좌관: 데탕트·대중국 개방·SALT I 협상 주도, 도브리닌과의 배후채널 운영
  • 1971–1972중국 비밀 방문으로 마오쩌둥·저우언라이와 회담, 닉슨 방중 길을 열다
  • 1973–1977국무장관: 파리 평화협정, 노벨 평화상(1973), 중동 셔틀 외교; 칠레 쿠데타 연루
  • 1977–2023키신저 어소시에이츠 설립, 저술 및 12명의 대통령에 대한 외교 자문

귄터 샤보프스키

Günter Schabowski
동독 공산주의 동독 독일 1929–2015 ○ 국경 사망 유죄 · 사면

베를린 장벽을 실수로 무너뜨린 동독 정치국의 대변인

기자회견에서 '언제 발효됩니까?'라는 질문에 서류를 뒤적이며 답했다: '제가 알기로는… 즉시, 지체 없이.'

동독의 대표적 선전 담당자로,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편집장을 거쳐 SED 정치국 위원 겸 동베를린 제1서기에 올랐다. 1989년 11월 9일 기자회견에서 새 여행규정의 발효 시점을 묻는 질문에 '즉시, 지체 없이'라고 답변하여 그날 밤 베를린 장벽 붕괴를 촉발했다. 훗날 자신의 실수가 체제의 '관 속의 마지막 못'이었다고 인정했고, 통일 후에는 국경 사망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동독 체제에 대한 공개적 반성으로 감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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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FDGB 기관지 『트리뷔네』 편집자로 언론 경력 시작
  • 1952SED 입당
  • 1967–1968모스크바 CPSU 당학교 수학
  • 1978–1985SED 중앙기관지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편집장
  • 1981–1989SED 중앙위원회 위원 겸 정치국 후보위원, 1984년 정위원
  • 1985–1989SED 동베를린 지구당 제1서기
  • 1989.11.09기자회견에서 여행규정 즉시 발효 발언으로 장벽 붕괴 촉발
  • 1997–2000국경 사망 사건으로 3년형, 1년 복역 후 사면

몰타 회담 직전 10개항 통일 계획으로 독일 문제의 주도권을 쥔 총리

1989년 11월 28일, 콜은 동맹국은 물론 자신의 외무장관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연방의회 연단에 섰다. 부시가 그의 10개항 계획 요약 편지를 받은 것은 콜이 이미 연설을 시작한 직후였다.

16년간 서독과 통일 독일의 총리를 지내며 유럽 통합과 독일 재통일을 이끈 기독교민주연합(CDU) 정치인. 1989년 11월 28일, 동맹국과도 협의 없이 독일 통일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연방의회에서 발표해 불과 며칠 후 열린 몰타 회담에서 독일 문제의 틀을 결정지었다. 이듬해 10월 3일 독일을 재통일시켰고,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마스트리흐트 조약과 유로화 도입을 주도했다. 서독 체제의 동독 확장이라는 방식으로 통일을 완수했으며, 16년 장기 집권 끝에 1998년 선거에서 패배한 뒤 CDU 비자금 스캔들로 당 명예의장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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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라인란트팔츠 주의회 의원 (최연소)
  • 1969–1976라인란트팔츠 주총리
  • 1973–1998기독교민주연합(CDU) 당수
  • 1976–1982연방의회 CDU/CSU 원내대표 (야당 지도자)
  • 1982–1998독일연방공화국 총리
  • 1989.11.28연방의회에서 독일 통일을 위한 「10개항 계획」 발표
  • 1990.10.03독일 재통일
  • 1998연방선거 패배, CDU 당수 사임
동독 공산주의 동독 독일 1937–

호네커를 계승했으나 장벽을 열고 50일 만에 몰락한 동독의 마지막 공산당 지도자

1989년 11월 9일, 크렌츠는 중앙위원회에서 여행 규정 초안을 낭독한 뒤 "자, 이걸 기자들에게 설명해 주게"라며 샤보프스키에게 쪽지를 건넸고, 몇 시간 후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

에리히 호네커의 후계자로 지목된 동독 공산주의 지도자로, 1989년 10월 호네커 축출 후 SED 총서기가 되었다. 취임 3주 만에 여행 규정 초안을 승인하고 11월 9일 중앙위원회에서 낭독한 뒤 이를 귄터 샤보프스키에게 건네며 기자회견에서 발표하도록 했고, 그날 밤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 개혁을 약속했으나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고, 12월 초 전권을 내놓았다. 통일 후 국경 사망 사건에 대한 형사책임으로 6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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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입당
  • 1971–1974에른스트 텔만 피오네르 조직 의장
  • 1974–1983자유독일청년단(FDJ) 중앙평의회 제1서기
  • 1983–1989SED 정치국 위원 겸 중앙위 안보·청년·체육 담당 서기
  • 1984–1989국가평의회 부의장
  • 1989.10–12SED 총서기
  • 1989.10–12국가평의회 의장 겸 국방평의회 의장
  • 1997국경 사망 사건으로 금고 6년 6개월 선고

베른트 위르겐 피셔

Bernd Jürgen Fischer
미국(미확인) 독일(미확인) 1952–

발칸사 연구자, 《전시의 알바니아》로 알바니아 전시기를 유럽 역사서술에 올린 역사가

《전시의 알바니아》는 점령기를 분열과 내부 대립,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집권으로 이어진 권력 투쟁으로 다시 그렸고, 전쟁이 알바니아를 한 고립에서 다른 고립으로 밀어넣었다고 결론지었다.

발칸사·알바니아사 연구자로 1952년 1월 27일 출생했다. 1982년 캘리포니아대학교 샌타바버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인디애나-퍼듀대학교 포트웨인 캠퍼스 역사학 교수와 역사학과장을 지냈으며 지금은 명예교수로 있다. 알바니아 과학원 외국인 회원이다. 국적과 출신 배경은 확인되지 않았다. 《조그 왕과 알바니아의 안정 투쟁》(1984), 《전시의 알바니아 1939–1945》(1999), 《발칸의 강자들》(2006)을 썼고 슈반트너-지버스와 《알바니아 정체성》(2002), 올리버 옌스 슈미트와 《알바니아 약사》(2022)를 함께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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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2캘리포니아대학교 샌타바버라에서 박사 학위 취득
  • 1984《조그 왕과 알바니아의 안정 투쟁》 출간
  • 1999《전시의 알바니아 1939–1945》 출간, 이탈리아·독일·영국·미국 자료를 활용
  • 2002슈반트너-지버스와 《알바니아 정체성》 공동 편집
  • 2006《발칸의 강자들》 출간, 알바니아 과학원 회원으로 선출
  • 2022올리버 옌스 슈미트와 《알바니아 약사》 공저

프레더릭 켐프

Frederick Kempe
미국 독일계 1954–

냉전 위기를 추적한 저널리스트 역사가

켐프는 『베를린 1961』에서 체크포인트 찰리 전차 대치 때 루시어스 클레이 장군이 케네디 대통령에게 한 말을 기록했다: "우리가 신경 쓰는 건 우리의 신경이 아니라 워싱턴에 계신 여러분의 신경입니다."

프레더릭 켐프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저자로, 독일계 이민자 가정의 배경과 유럽 특파원 경험을 바탕으로 냉전의 정치와 대서양 관계를 다뤘다. 그의 대표작 『베를린 1961』은 새로 공개된 미국·소련·독일 문서와 인터뷰를 엮어 베를린 장벽 건설과 1961년 10월 체크포인트 찰리의 전차 대치를 재구성했다. 이 책은 케네디의 위기 대응을 약함으로 해석하고 흐루쇼프의 선택을 제약 조건 속에 놓았으며, 그 비대칭적 논지는 독립 서평에서 비판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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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컬럼비아대학교 저널리즘대학원 졸업
  • 1981『월스트리트 저널』 런던 특파원으로 입사
  • 1984『월스트리트 저널』 빈 지국 개설
  • 1990『월스트리트 저널』 베를린 지국장
  • 1992–1997『월스트리트 저널』 편집국 간부, 중부유럽 경제평론 창간
  • 2002–2005세계판 『월스트리트 저널』 유럽 편집자
  • 2007–애틀랜틱 카운슬 회장 겸 최고경영자
  • 2011『베를린 1961』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