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 대장정에 동행한 유일한 서양인이자 쭌이 회의에서 책임을 추궁당한 코민테른 군사고문
코민테른 요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리더’라는 이름을 썼고 대장정에 동행한 거의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1935년 쭌이 회의에서 보구와 함께 지휘직에서 해임되었으며, 동독이 리더의 정체를 공식 밝힌 것은 1964년이었다.
뮌헨 출신 독일 공산당원으로 1928년 탈옥해 소련에 가 프룬제 군사아카데미에서 배웠다. 1932년 코민테른의 군사고문으로 상하이에 왔고 1933년 장시 소비에트에 들어가 보구와 함께 진지전 방어를 지휘했으나 제5차 포위토벌에 패했다. 대장정에서 1935년 쭌이 회의는 그와 보구의 군사 지도를 비판하고 마오를 앞세웠다. 1939년 모스크바로 돌아갔고 전후 동독에서 번역가·교수로 살며 1973년 회고록 『중국 기록』을 냈다.
다른 이름: 리더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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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군사·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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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1935
중국공산당 혁명군(1949년 이전)중앙홍군 군사고문
군사·지휘 -
코민테른중국 군사고문대표
군사·지휘
경력 연표
- 1928독일에서 탈옥해 소련으로 이동
- 1932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후 중국 파견
- 1932–1939코민테른 파견 중국 군사고문
- 1933–1935중앙홍군 군사고문
- 1935쭌이 회의에서 군사 노선 비판을 받아 지휘권 상실
- 1939소련으로 귀환
관련 역사 사건
모스크바 망명과 반파시스트 학교, 1939~1954
1939년 8월 28일 브라운은 중국을 떠나 소련으로 향했다. 당시 소련은 독일 공산당원을 포함한 외국인 공산주의자들에게 위험한 곳이었고, 스탈린의 비밀경찰은 혁명에 충성해 온 이들 다수를 투옥·고문·살해했다. 브라운은 도착 직후 정치적 곤란을 겪으면서도 그런 운명은 피했다.
모스크바 외국어출판사에서 편집자·번역가로 일했고,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뒤에는 독일인 출신이라는 점이 활용되어 포로로 잡힌 독일 장교들의 충성을 전향시키는 정치교관 임무를 맡았다. 이때 1920년대의 옛 가명 ‘바그너 정위’를 다시 썼고, 뒤에는 일본군 포로를 상대로도 비슷한 일을 했다. 1946~1948년에는 모스크바주 크라스노고르스크에 머물며 반파시스트 중앙학교에서 강의했고, 이후 다시 외국어출판사에서 일했다. 스탈린이 죽은 뒤에야 약 30년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