遵义会议 · 1935.01.15–17

쭌이 회의

Zunyi Conference

대장정 중이던 1935년 1월 15~17일 구이저우 쭌이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 장시 근거지 상실과 샹강의 참패를 따져 보구와 코민테른 고문 오토 브라운의 군사 지도를 비판했고, 마오쩌둥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올렸다. 중국공산당 사학은 이를 마오 지도권의 출발점으로 보지만, 실제 권력의 이동은 3인 군사소조(1935년 3월), 군사위원회 주석(1935년 11월), 당 주석(1943년)으로 몇 단계에 걸쳐 이루어졌다.

상세

회의는 1월 쭌이 점령 뒤 저우언라이가 소집했다. 보구는 첫 보고에서 적의 압도적 우세와 홍군 사이의 협조 부족 같은 「객관적」 원인을 들었고, 저우언라이는 지도부의 잘못된 결정을 인정하며 자신을 책임자 셋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장원톈은 마오와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보구와 브라운을 정면 비판했고, 마오는 근거지의 한 치 땅을 지키려다 군대를 소모한 진지전과 운동전의 포기를 비판했다. 왕자샹이 마오를 거들었고, 펑더화이는 브라운을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탕자에 견주었다.

참석자는 정치국 위원·후보위원과 군 지휘관, 브라운과 통역 우슈취안 등 20명 안팎으로, 명단은 지금도 다투어진다. 보구·브라운·허커취안(카이펑)을 뺀 17명이 마오 편에 섰다. 회의 뒤 장원톈이 보구를 대신해 당의 총책임자가 되었고, 3월 마오·저우언라이·왕자샹의 3인 군사소조가 꾸려졌는데 최종 군사 결정권은 저우언라이에게 있었다.

쭌이 회의는 1950년대까지 공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고 자세한 기록은 1985년 50주년에야 나왔다. 날짜도 오랫동안 1월 7~9일로 알려졌다가 쭌이 기념관의 페이페이루가 15~17일로 바로잡았다. 회의는 소련 유학파의 영향력을 줄이고 마오의 군사 노선을 복권한 전환점이었지만, 「쭌이에서 마오의 지도가 확립되었다」는 서술은 뒤에 정식화된 것이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위키백과 (영문)
  3. zh.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