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눈의 용」, 덩샤오핑과 짝을 이룬 홍군 총참모장이자 회하이 전역의 지휘관
1916년 펑두 전투에서 오른눈을 잃고 「외눈의 용」이라 불렸으며, 인민해방군 창건자의 한 사람이자 1948년 11월 회하이 전역을 지휘한 전략가였다.
쓰촨의 군인으로 1916년 전투에서 오른눈을 잃었고 1926년 입당해 난창 봉기에 참여했다. 소련 프룬제 군사아카데미에서 배운 뒤 홍군 총참모장으로 대장정을 이끌었고, 항일전쟁기 129사단장으로 정치위원 덩샤오핑과 「류덩」 부대를 이루었다. 국공내전에서 1947년 다볘산 진격과 1948~1949년 회하이 전역을 지휘해 승리의 결정적 국면을 만들었다. 건국 후 원수가 되어 난징 군사학원을 세웠으며 1958년 「교조주의」 비판을 받고 물러났다.
다른 이름: 유백승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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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1927
중화민국 국가기관국민혁명군 잠편 제15군 군장
군사·지휘 -
1926–1986
군사·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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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1949
중국공산당 혁명군(1949년 이전)홍군 총참모장·제2야전군 사령원
군사·지휘 -
1951–1958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인민해방군 군사학원 원장
교육 -
중화인민공화국 국가기관원수대표
군사·지휘
경력 연표
- 1912–1913쓰촨 군정부 군관학교 입학, 제2혁명 실패 뒤 상하이로 피신
- 1926.05중국공산당 입당, 12월 루저우·순칭 봉기 총지휘
- 1927.08.01난창 봉기 참모장
- 1927.11–1930소련 유학,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수학
- 1932–1937홍군 총참모장
- 1935.01–05대장정 선봉으로 우장 도하·쭌이 점령, 이족 지도자와 결의하고 다두허 도하 지휘
- 1937–1945팔로군 129사단장
- 1945.08–1949.01진지루위 군구 사령원, 상당 전역 승리, 1947년 다볘산 진출, 1948년 중원야전군으로 화이하이 전역
- 1949.02–12제2야전군 사령원, 도강 후 난징 군사관제위원회 주임, 서남 진군
- 1951.01–1958.09인민해방군 군사학원 원장 겸 정치위원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 1966.01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관련 역사 사건
- 1924–1927제1차 국공합작과 북벌, 1927년의 파국난창 봉기 참여자1926년 입당한 뒤 난창 봉기에 참여했다.
- 1927–1936징강산에서 옌안까지: 소비에트 근거지와 대장정홍군 총참모장진사강·다두강 도하와 이족(彝族) 지역 통과를 이끌었다.
- 1937–1945중일전쟁과 제2차 국공합작129사단장덩샤오핑과 진지루위 근거지를 세웠다.
- 1945–1949국공내전중원야전군 사령관 · 화이하이 전역1947년 다볘산 진격과 1948~1949년 화이하이 전역을 지휘했다.
- 1949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열병식의 소련식 편성을 제안붉은광장 열병식을 본 경험으로 개국 열병식의 편성을 제안했다.
군사교육과 「교조주의」 비판: 난징의 학교
건국 직후 류보청은 군사교육 사업에 종사했다. 1951년 1월 중국인민해방군 군사학원 원장 겸 정치위원에 임명되었는데, 영문판 사료는 이 전보가 류보청에게는 좌천이었다고 본다. 한편 중국어판 사료는 그가 스스로 세운 「치군필선치교(治軍必先治校)」, 즉 군대를 다스리려면 먼저 학교를 세워야 한다는 방침 아래 교관을 직접 양성하고 교재를 집필·심정·번역했으며, 해군·공군·포병·장갑병·방화병·정보 등 학과를 속속 개설해 해방군의 제 군·병종 지휘간부 양성 체계를 마련했다고 기록한다. 같은 사료는 그가 소련 유학 시절 익힌 정규전 교리를 군에 이식하려 했다고 전하며, 영문판 사료도 그가 소련 등 여러 나라의 군사 교재 번역을 조직하고 고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주요 전역을 학생들에게 소개했다고 서술한다.
이 학교 사업은 그를 정치적 공격의 표적으로 만들었다. 1956년 흐루쇼프의 비밀연설 이후 중국공산당 내에서 교조주의와 경험주의를 극복하자는 방침이 내려왔고, 펑더화이가 주도한 군 내부 조사와 숙청에서 류보청은 핵심 표적이 되었다. 부하들과 부관들, 그중에는 샤오커도 있었는데, 비판을 받고 구금되었고, 류보청은 그들을 두둔한 책임으로 여러 차례 자기비판을 해야 했다. 중국어판 사료에 따르면 1958년 군사위 확대회의에서 그는 펑더화이 등에 의해 군사 교조주의의 대표로 비판받았고, 7월 10일 병중에 중난하이 인화당으로 끌려나와 검사(자기비판)를 했다. 이후 9월 13일 군사학원 지도직에서 물러났고 사실상 한직에 밀려났다. 다만 영문판 사료는 반교조주의 운동과 그의 자기비판이 1956년부터 진행되었고 1959년에 난징을 떠나 베이징에서 반은둔 생활에 들어갔다고 서술해, 퇴진 시점을 두 사료가 다르게 전한다. 류보청은 1954년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1955년 원수, 1956년 당 정치국 위원에 올랐으나, 그 직함들은 펑더화이의 실권에 견줄 것이 못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