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톈

张闻天
중국공산당 마오주의 중국 중국 1900.8.30.–1976.7.1. ↓ 실각 1959 · 심장마비

쭌이 회의 뒤 총서기를 맡은 「28인의 볼셰비키」, 1959년 루산에서 펑더화이 편에 섰다

「28인의 볼셰비키」의 한 사람으로 쭌이 회의 뒤 보구를 대신해 총서기가 되었고, 1959년 루산에서 펑더화이를 지지했다가 1976년 우시에서 사망했다.

모스크바 중산대학 출신으로 「28인의 볼셰비키」의 한 사람이었으나 1935년 쭌이 회의에서 보구 대신 마오를 지지해 당 총서기(총부책)를 맡았다. 옌안에서 선전·이론 부문을 이끌었고 정풍운동 이후 마오에게 실권을 넘겼다. 건국 후 주소련 대사와 외교부 부부장을 지냈으며 1959년 루산 회의에서 대약진 운동을 비판해 펑더화이와 함께 「반당집단」으로 몰려 실각했다. 문화대혁명기 유배지에서 1976년 심장병으로 사망했고 1979년 복권되었다.

다른 이름: 뤄푸 · 장문천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경제 구상과 「자오칭 문고」

장원톈은 정치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평생 경제 문제를 연구한 이론가였다. 모스크바에 유학·교수로 머문 1925~1930년에 그는 니콜라이 부하린이 공급·판매 협동조합을 통해 사영 농촌 경제를 허용하자는 이론을 접했고, 이것이 훗날 자신의 정책 구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공급·판매 협동조합을 지지한 그의 노선은 집단 농장을 옳은 농촌 사회주의 형태로 본 마오쩌둥, 류사오치와 갈렸다.

1947~1948년 동북 토지개혁에서 좌경적 경향과 과격한 폭력이 나타나자 장원톈은 허장 지역 신문들에 그런 경험을 전재하지 못하게 하고 상공업을 보호하도록 지시했으며, 《토지 평분 운동에서 상공업을 보호할 데 관한 지시》를 기초했다. 그는 강제적 집단화에 강하게 반대하고 당에 계급투쟁보다 농촌 생산 장려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1948년 동북국 상무위원 겸 조직부장으로서 그는 《동북 경제 구성 및 경제 건설 기본 방침에 관한 강요》를 기초해 ‘오종 경제성분’ 사상을 제기했고, 이 강요는 마오쩌둥의 인정을 받아 전당에 전달되어 각 해방구 경제 건설의 방침이 되었다. 1953년 신화사 우렁시와의 대화에서 그는 소련 집단화 체제의 약점과 실패를 지적하며 중국이 소련 모델을 맹목적으로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문화대혁명기에 그는 처음에는 자기 집에서 감호(연금)당했고, 1969년에는 장푸라는 가명으로 가족과 함께 광둥 자오칭으로 하방되었다. 1971년 9·13 사건 뒤 그는 나중에 「자오칭 문고」로 불린 일련의 이론 글을 써서 극좌 노선과 문화대혁명의 오류를 비판하고 중국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사회주의 사회의 우선 과제는 생산력의 발전이라고 주장하면서 인민 대중의 물질적 이익을 위한 투쟁 원칙을 수정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혼란과 기만’이라고 했고, 인민 내부 모순을 적아 모순으로 과장하는 것이 당에 큰 해를 끼쳤다고 지적했다. 1979년 8월 25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추도대회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