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민테른 노선을 대표한 중공의 젊은 총서기이자 당 언론의 설계자
정풍운동에서 그는 "당에 이렇게 큰 손실을 끼쳤으니,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얼마나 많은 일을 더 해도 이 손실을 메울 수 없다"고 고백하며 "모든 악결과의 가장 주요한 책임자는 바로 나"라고 말했다.
중국공산당 총서기(1931–1935)로서 장시 소비에트 시기와 대장정 초기 당을 이끌었으며, 모스크바 쑨원대학 출신 '28인의 볼셰비키' 일원으로 왕밍과 함께 코민테른 좌경 노선을 대표했다.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에게 실각한 후 조직부장, 신화통신사 사장, 『해방일보』 사장을 지내며 중공 언론·선전의 제도적 기초를 세웠다. 1946년 충칭 협상 후 옌안으로 귀환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으며, 당내에서는 그를 '정직하고 박식했던' 초기 지도자로 기억한다.
경력 연표
- 1925–1926상하이대학 수학, 5·30 운동 참여
- 1926–1930모스크바 쑨원대학 유학, '28인의 볼셰비키' 결성
- 1931–1935중공 중앙 총서기 (중앙총책임자)
- 1935.1쭌이 회의에서 실각, 정치국원 유임
- 1937–1938중공 중앙 조직부장
- 1941–1946『해방일보』 사장 겸 신화통신사 사장
- 1946충칭 정치협상회의 중공 대표, 귀환 중 순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