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년 9월 20일 발미에서 켈레르만은 뒤무리에의 요청으로 중부군을 이끌고 합류해 서쪽 구릉에 포병을 배치했다. 탄약 마차 폭발로 동요한 보병을 안정시키고 'Vive la Nation'을 외쳐 사기를 결집했으며 프로이센군은 철수했다.
1735년 5월 28일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난 프랑스 군인이다. 작센 출신 가문이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했고 조부 대에 귀족이 되었다. 1750년(또는 1752년) 왕립군에 입대해 7년 전쟁에 참전했고, 1788년 준장이 되어 구체제에서 장성이 된 유일한 제국 원수가 되었다. 1789년 혁명에 호의적이었고 1792년 9월 20일 발미 전투에서 중부군을 이끌어 프로이센군을 격퇴한 공로로 '발미의 승리자'로 불렸다. 1793년 11월 불충성 혐의로 13개월 수감되었다가 로베스피에르 몰락 후 석방·복직했다. 1804년 제국 원수, 1808년 발미 공작이 되었고 1814년 상원에서 나폴레옹 퇴위에 찬성한 뒤 루이 18세 치하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1820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1792년 발미와 즈마프의 승리로 혁명을 구했으나 1793년 3월 18일 네르빈덴에서 패배한 뒤 파리 진군을 기도했고, 국민공회가 보낸 위원들을 오스트리아에 인도한 뒤 전향했다. 그 전향은 지롱드파를 매장했다.
프랑스 혁명전쟁기의 장군·정치인. 왕정 시대 왕군 장교로 7년 전쟁에 참전하고 셰르부르 항만 책임자를 지냈다. 혁명 후 자코뱅 클럽에 가담했으며 지롱드파의 지지로 1792년 3월 외무장관이 되어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주도하고 잠시 육군장관을 겸했다. 루이 16세와 갈등해 사임한 뒤 북부군 사령관으로 켈레르만과 함께 발미(1792년 9월 20일)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치고 즈마프(1792년 11월 6일)에서 승리했다. 1793년 3월 18일 네르빈덴에서 패배한 뒤 파리 진군과 국민공회 해산, 1791년 헌법과 입헌군주정 복고를 기도했으나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오스트리아 측으로 넘어갔다. 망명 생활 끝에 영국에서 사망했고 이름은 파리 개선문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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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9캉브레에서 출생. 출처에 따라 1월 25일·26일·27일로 생년월일 기록이 갈린다.
1792지롱드파 지지로 외무장관이 되어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주도하고 잠시 육군장관을 지냈다.
노예제와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고, 1791년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으로 여성의 투표권과 법적 평등을 요구했다. 1793년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마리 구즈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정치 저술가다. 노예제를 비판하고, 1791년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 여성의 법적 평등과 공적 발언·정치 참여를 요구했다. 이 선언은 의회가 제정한 법률이 아니라 기존 권리 선언의 배제를 비판하는 글이었다. 혁명기의 폭력과 산악파의 권력에 반대하는 글을 썼으며, 1793년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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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5몽토방의 요리업자 루이이브 오브리와 강제로 혼인했다
1766아들 피에르 오브리가 태어났고 남편이 곧 죽은 뒤 올랭프 드 구주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793년 7월 13일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살해된 친구 장폴 마라를 그린 《마라의 죽음》은 혁명의 대표적 이미지가 되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이 그림은 오랫동안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발견되었다.
1748년 파리에서 태어나 1825년 브뤼셀에서 사망한 프랑스 화가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화가로 1780년대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로 명성을 얻었으며, 프랑스 혁명의 적극적 지지자이자 자코뱅 클럽 성원으로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였다. 국민공회 의원으로서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고, 일반 치안위원회 위원으로 공포정치에 관여했다. 로베스피에르 실각 후 1794~1795년 두 차례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804년 제정 선포 후 나폴레옹의 궁정 화가가 되어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을 그렸다. 1815년 나폴레옹 몰락 후 브뤼셀에서 망명 생활을 했으며 그곳에서 사망했다. 지로데·제라르·그로·앵그르 등을 길러냈다.
혁명기 급진 저술가로, 1796년 「평등파 선언」에서 법문의 평등을 넘어 실제 평등과 재산의 공동 향유를 요구했다.
프랑스의 저술가로, 법률가·사서로도 일했다. 1796년 「평등파 선언」에서 법문에 적힌 평등을 넘어 실제 생활에서의 평등과 재산의 공동 향유를 요구했다. 바뵈프의 운동과 관련된 글이지만 저자는 마레샬이다. 선언의 모든 표현이 운동 지도부의 합의나 실현된 정책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 글을 통해 혁명기의 평등 요구와 후대 사회주의 사이의 연결, 그 사이에 놓인 차이를 함께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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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0마자랭 도서관 부사서로 임용되어 고전학 소양을 쌓았다.
1788「정직한 사람들의 연감」이 파리 고등법원의 판결로 불태워지고 3개월 수감되었으며, 이후 저작을 익명으로 발표했다.
1790–1792「파리 혁명」지의 주필로서 성직자와 교회를 비판하는 반교권 운동을 이끌었고 전쟁 반대 논설을 실었다.
1793–1796바뵈프를 만나 1796년 「평등파 선언」을 작성했으며, 평등파 음모의 비밀 구제위원회 위원이었다.
1801여성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것을 금하는 법률안을 제안했고, 유고 「덕에 대하여」는 1807년 간행되었다.
1793년 9월 파리 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1794년 3월 에베르·뱅상·모모로 등과 함께 체포되어 3월 24일 처형되었다.
수아송 출신으로, 젊어서 군에 복무했다가 제대한 뒤 극작가·가정교사로 살았다. 혁명기에 코르들리에 클럽의 연설가가 되었고, 1793년 부쇼트가 이끄는 전쟁부의 한 부서를 맡아 방데 전역에 파견되었다가 잇따른 승진으로 장군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파리 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어 11월 리옹 진압에 부대를 이끌었다. 강좌에서는 1794년 3월 에베르·뱅상·모모로 등과 함께 체포되어 3월 24일 처형된 에베르파의 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재판에서는 혁명군을 앞세운 군사 음모 혐의가 제기되었는데, 이는 당시 고발 측의 주장으로 읽어야 한다. 그의 처형 며칠 뒤 파리 혁명군은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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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군에서 제대한 뒤 극작가·가정교사로 활동했다.
1792뒤무리에 휘하 벨기에 주둔군의 보급 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
17934월 부쇼트의 전쟁부에서 한 부서를 맡고 5월 방데에 파견되었으며, 7월 잇따른 승진으로 장군이 되었다.
17939월 파리 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11월 리옹 진압에 부대를 이끌었다.
1793–179412월 17일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2월 2일 코르들리에 클럽의 운동으로 풀려났다.
1793년 공안위원회의 병력·부대 이동 담당 위원으로 14개 군을 창설하고 1793년 가을 북부전선의 프랑스 부대를 지휘해 주르당의 와티니 승리에 기여했으며, 군대를 1793년 중반 약 64만 5천 명에서 1794년 9월 약 150만 명으로 늘렸다.
1753년 부르고뉴의 놀레에서 태어나 1823년 마그데부르크에서 죽은 프랑스의 수학자·군인·정치가다. 1791년 입법의회에, 1792년 9월 국민공회에 선출되었고, 1793년부터 공안위원회에서 병력과 부대 이동을 맡아 1793~94년 프랑스의 군사적 성공을 이끌어 '승리의 조직자'로 불렸다. 정직한 행정가이자 확고한 공화주의자라는 평판을 얻었고, 1794년 테르미도르에 로베스피에르와 결별해 그의 몰락에 가담했으며 총재정부의 초기 총재 다섯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797년 18일 프뤽티도르 쿠데타로 축출되어 망명했고, 1800년 잠시 전쟁장관을 지냈으며 제정 즉위에는 반대하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백일천하 때 내무장관을 맡았으며, 왕정복고 뒤 추방되어 망명지에서 죽었다.
1791년 6월 14일 그의 발의로 채택된 법이 동업조합과 같은 직업의 노동자·고용주가 공동 이익을 위해 단결하는 것을 금지했다.
렌 출신 변호사로 1789년 제3신분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었다. 브르타뉴 클럽 창립에 참여했고, 1789년 8월 국민제헌의회 의장으로서 봉건제를 폐지한 8월 4일 밤 회의를 주재했다. 헌법위원회에서 1791년 헌법의 상당 부분을 기초했다. 1791년 6월 14일 그의 이름이 붙은 법이 채택되어 동업조합과 노동자의 단결을 금지했고, 이 금지는 1864년까지 이어졌다. 같은 해 9월 민중 결사의 공동 정치 행동을 제한하는 법도 제출했다. 푀양파와의 관계로 공포정치기에 혐의를 받아 1794년 4월 22일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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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렌 세네쇼세의 제3신분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었고 브르타뉴 클럽 창립에 참여했다.
17898월 국민제헌의회 의장으로 8월 4일 밤 회의를 주재했고, 9월 말 헌법위원회에 들어갔다.
17916월 14일 르 샤플리에 법이 채택되었고, 7월 샹드마르스 학살 뒤 자코뱅 클럽을 떠나 푀양파로 옮겼다.
1793년 10월 30일 일반안전위원회를 대표해 보고하며 여성이 정치 결사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고, 국민공회는 여성 클럽과 민중 결사를 금지했다.
그르노블의 법률가로 1792년 이제르 대표로 국민공회에 선출되어 산악파에 앉았고,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했다. 1793년 일반안전위원회 위원이 되어 바디에와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위원으로 꼽혔다. 10월 브리소파 의원들을 기소하는 보고를 맡았고, 10월 30일에는 여성의 클럽과 민중 결사를 금지하는 보고를 해 채택시켰다. 이 조치는 혁명기 여성의 정치 활동을 크게 제약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후 동인도회사 사건을 조사했다. 테르미도르 뒤 투옥되었다가 사면되었고, 바뵈프의 평등파 음모에 연루되었으나 무죄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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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이제르 대표로 국민공회에 선출되어 산악파에 앉았다.
1793일반안전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0월 3일 브리소파 의원 기소 보고를 했다.
179310월 30일 여성 클럽과 민중 결사를 금지하는 보고를 해 채택시켰다.
1794동인도회사 사건 조사 보고를 맡았고, 로베스피에르는 그 보고를 비판했다.
1795–17971795년 투옥되었다가 사면되었고, 평등파 음모 재판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파리 도 지도부 위원으로서 파슈 시장과 함께 「자유, 평등, 박애 아니면 죽음」을 담은 표어를 공공건물 정면에 새기게 했다.
브장송 출신의 인쇄·출판업자로, 1787년 파리 인쇄업 조합의 장인이 되었고 혁명이 시작되자 「국민 자유의 첫 인쇄업자」를 자처했다. 코르들리에 클럽의 서기이자 주요 연설가로 클럽의 결의와 벽보를 찍어 퍼뜨렸고, 바렌 도주 뒤 왕의 폐위를 주장했다. 파리 도 지도부 위원 시절 파슈 시장과 함께 「자유, 평등, 박애」를 담은 표어를 공공건물에 새기게 했다. 1793년 방데에서 롱생을 보좌했고 11월 이성 축제를 이끄는 등 탈기독교화에 앞장섰다. 강좌에서는 1794년 3월 에베르파와 함께 체포되어 3월 24일 처형된 인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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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7파리 인쇄업 조합의 장인으로 받아들여졌다.
1791코르들리에 클럽 서기로 선출되어 결의와 벽보를 작성·배포했고, 바렌 도주 뒤 왕의 폐위를 주장했다.
1793파리 도 지도부 위원으로 파슈 시장과 함께 「자유, 평등, 박애」를 담은 표어를 공공건물에 새기게 했다.
1794년 7월 26일(테르미도르 8일) 로베스피에르가 연설에서 그를 재정의 적으로 지목하자, 곧바로 연단에 올라 국민공회의 의지를 마비시킨 것은 로베스피에르라고 반박했다.
몽펠리에의 면직물 상인 집안 출신으로, 1791년 바렌 도주 뒤 공화국 선포를 청원했다. 입법의회와 국민공회에서 재정위원회를 이끌며 국고를 감독했고, 1793년 8월 공채 대장부 창설안을 내 국가 부채를 하나로 정리했다. 성직자 급여 폐지를 주장해 이신론자 로베스피에르의 반감을 샀다. 테르미도르 8일 로베스피에르가 그를 지목하자 즉시 반박했고, 이 대결은 이튿날 로베스피에르 몰락의 계기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테르미도르 반동기에도 몸을 숨겨야 했고, 1816년 국왕 시해자 추방으로 망명해 브뤼셀 근교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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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바렌 도주 뒤 국민의회에 공화국 선포를 청원했고, 입법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792국민공회 의원으로 재선되었고 10월 재정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7938월 24일 공채 대장부 창설안을 제출했다.
17947월 26일 테르미도르 8일 연설에서 자신을 지목한 로베스피에르를 연단에서 반박했다.
1816–1820국왕 시해자 추방법으로 벨기에로 망명했고, 1820년 브뤼셀 근교에서 사망했다.
『페르 뒤셴』을 창간해 파리 상퀼로트의 목소리를 만들고 1793년 지롱드파 타도에 앞장선 언론인으로, 급진적 비기독교화를 밀어붙이다 1794년 3월 혁명정부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처형됐다.
프랑스 혁명기의 언론인이자 파리 코뮌의 검사 대리. 1790년 창간한 『페르 뒤셴』의 거칠고 대중적인 문체로 상퀼로트 독자층에 영향력을 얻었고 코르들리에 클럽의 유력 인물이 됐다. 1793년 지롱드파 공격, 더 강한 경제 통제와 비기독교화 운동을 지지했다. 다만 ‘에베르파’는 정식 정당이 아니라 그의 신문, 코르들리에 일부, 코뮌 인맥을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1794년 3월 봉기 호소가 실패한 뒤 혁명정부에 체포되어 3월 24일 처형됐다.
1789년 7월 11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초안을 국민의회에 제출했고, 바스티유 습격 뒤 국민위병 총사령관이 되었다. 1791년 샹드마르스에서 국민위병이 군중에게 발포해 신임을 잃고 중도 노선은 끝났다.
1757년 태어나 1834년 파리에서 죽은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가다. 미국 독립전쟁에 자원해 대륙군 소장으로 요크타운 포위전의 결정적 승리에 기여했고, 1789년 삼부회 의원과 국민위병 총사령관을 지내며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작성에 관여했다. 혁명기에는 입헌군주제를 지키려는 중도 노선을 택했으며, 1791년 샹드마르스 유혈 사건으로 민중의 신임을 잃었고 1792년 체포령 뒤 오스트리아에 억류되어 5년 넘게 수감되었다. 나폴레옹 정부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복고 왕정 아래 자유파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830년 7월 혁명에서 국민위병을 다시 지휘하고 루이필리프를 지지했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고 '두 세계의 영웅'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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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7–1781대륙군 소장으로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 1781년 요크타운 포위전에서 미국군 우익 지휘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 9일, 국민공회 의원들은 그를 약 90명의 동료와 함께 체포했고, 그는 재판 없이 처형됐다.
프랑스 혁명기의 변호사이자 국민공회 의원으로, 공안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792년 생필품 연설에서는 생존에 필요한 물자의 확보를 강조하면서 재산과 상업의 정당한 영역도 인정했다. 1794년 정치도덕 보고에서는 덕과 공포를 혁명 정부의 원리로 제시했다. 이 주장은 공포정을 정당화한 당사자의 논리이며, 여러 위원회와 국민공회가 내린 결정을 모두 그의 개인 명령으로 볼 수는 없다. 테르미도르의 정치적 패배 뒤 처형됐다.
1799년 제2차 취리히 전투에서 헬베티아 방면군을 이끌고 코르사코프의 오스트리아·러시아군을 격파했고, 1800년 제노바를 약 60일간 방어하며 오스트리아군을 묶어 보나파르트의 마렝고 승리를 도왔다.
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기의 군사령관. 1758년 5월 6일 니스(당시 사르데냐 왕국 니스 백작령)에서 출생명 안드레아 마세나로 태어났다. 구체제 왕립 이탈리아 연대의 사병으로 출발해 1784년 평민이 오를 수 있는 최고 부사관 계급에 이르렀고, 1793년 8월 여단장, 같은 해 12월 20일 사단장이 되었다. 1804년 5월 19일 나폴레옹이 창설한 최초 18명의 제국 원수 중 한 명이 되었고, 1808년 리볼리 공작, 에슬링 대공 작위는 1809년(일부 문헌은 1810년 1월)에 받았다. 1817년 4월 4일 파리에서 58세로 결핵으로 사망했다.
1791년 바렌 도주 뒤 제헌의회에서 영국의 선례를 들어 왕을 재판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바르나브가 7월 15일 연설에서 이를 반박했다.
에브뢰의 변호사로, 1789년 삼부회 제3신분 대표가 되어 제헌의회에서 교회 재산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1791년 바렌 도주 뒤에는 영국의 선례를 들어 왕을 재판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바르나브는 성문 헌법이 없는 영국은 본보기가 될 수 없다며 반박했다. 1792년 국민공회 의원으로 다시 뽑혀 롤랑 부인의 영향 아래 지롱드파의 주요 연설가가 되었고, 마라를 공격하며 도에서 모은 국민방위대로 의회를 지키자고 제안했다. 1793년 6월 2일 지롱드파와 함께 체포령을 받자 노르망디로 달아나 봉기 조직에 가담했다. 이후 보르도 근처에 숨어 지내다 1794년 페티옹과 함께 숨진 채 발견되었으며, 자살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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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에브뢰 바이야주의 제3신분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어 교회 재산의 국유화를 요구했다.
1791바렌 도주 뒤 영국 선례를 들어 왕을 재판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바르나브가 반박했다.
1792에브뢰 형사재판소 소장을 지낸 뒤 외르 도의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지롱드파에 합류했다.
『공산당 선언』 제3장은 그를 푸리에·오언과 함께 계급 투쟁이 덜 발전한 시기에 나온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 체계의 창시자로 꼽는다.
파리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해 요크타운 포위전에 참여했다. 혁명기에 국유재산 투기로 돈을 모았고 공포정치 시기에 투옥되었다. 『산업』, 『조직자』, 『산업가의 교리문답』 등에서 과학자·기업가·노동자를 아우르는 생산적 ‘산업가’가 무위도식하는 계급 대신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만년의 『새 그리스도교』에서는 가장 가난한 계급의 처지 개선을 내세웠다. 『공산당 선언』이 그를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자적 정치 운동을 보지 못한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자로 분류한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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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9–1783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해 요크타운 포위전에 참여했다.
1793–1794공포정치 시기 생트펠라지와 뤽상부르에 갇혔다가 테르미도르 9일 뒤 풀려났다.
1794년 2월 북부군 사령관이 되어 플뢰뤼스 전투에 참여했고, 1794년 12월–1795년 1월 얼어붙은 강을 건너 위트레흐트와 암스테르담에 입성했는데, 이때 프랑스 경기병이 얼음 위에서 네덜란드 함대를 사로잡았다.
1778–1804 프랑스 혁명전쟁기의 장군. 프랑스 혁명전쟁 프랑드르 전선에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네덜란드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라인 전선에서 싸웠다. 이후 왕당파로 돌아섰고, 1797년 프뤽티도르 18일 쿠데타에서 카옌으로 유배되었으며, 런던으로 도피한 뒤 1799년 코르사코프의 참모로 복무했다. 프랑스로 돌아와 나폴레옹에 대한 왕당파 음모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804년 4월 감옥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1794년 플뢰뤼스에서 제1차 대동맹에 결정적 승리를 거둔 것이 혁명기의 대표적 순간이다. 1798년에는 오백인회에서 동료 의원 피에르 델브렐과 함께 20~25세의 독신·무자녀 남성을 징병하는 주르당법을 발의해 통과시켰다.
프랑스의 군인으로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복무했고 1804년 제국 원수가 되었다. 1762년 리모주에서 외과의사 로크 주르당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했으며, 혁명 전쟁에서 북부군을 이끌어 1793년 10월 와티니에서 승리하고 마우보주 포위를 깼다. 이어 삼브르에뫼즈군을 지휘해 1794년 플뢰뤼스에서 제1차 대동맹을 상대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총재정부 시기 자코뱅 정치인으로서 오백인회 의원(1797~1799)으로 일했고, 1798년 징병법(주르당법)을 입안했다. 1813년 비토리아에서 패배했으나 1830년 7월 혁명을 지지했고, 사망할 때까지 앵발리드 총독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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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8–1783보조루아 연대에 입대해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 1779년 서배너와 서인도 제도에서 복무
17935월 27일 준장으로 진급하고 두 달 뒤 사단장이 되었으며, 9월 22일 북부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10월 와티니에서 승리
1794삼브르에뫼즈군(6월 29일 정식 편성)을 이끌고 6월 26일 플뢰뤼스에서 승리
1797–1799오백인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1798년 징병법을 발의·통과시켰고, 1799년 오스트라흐와 슈토카흐에서 패배
1804–1815나폴레옹에게 원수와 백작 작위를 받고 피에몬테 총독을 지냈으며, 1808년 스페인에서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참모장을 맡고 1813년 비토리아에서 패배
1816–18331815년 이후 부르봉 왕가에 충성해 1816년 그르노블 총독, 1819년 프랑스 상원의원이 되었고, 1830년 7월 혁명을 지지해 잠시 외무를 맡은 뒤 앵발리드 총독으로 사망할 때까지 재임
1793년 8월 29일 생도맹그 민사위원으로서 북부 관구의 모든 노예가 자유라고 선포했다. 국민공회의 전 식민지 노예제 폐지보다 다섯 달 앞섰다.
파리 고등법원 변호사로, 흑인우호협회의 노예제 폐지론을 지지하는 글을 썼고 브리소와 가까웠다. 1792년 폴브렐 등과 함께 민사위원으로 생도맹그에 파견되었는데, 처음 내건 임무는 노예해방이 아니라 자유 유색인의 동등한 권리 보장이었다. 백인 식민자들과의 충돌과 영국·에스파냐의 위협 속에서 1793년 8월 29일 북부 관구의 노예해방을 선포했다. 해방된 이들에게는 농장 노동 의무가 따랐다. 국민공회는 1794년 2월 4일 노예제 폐지를 모든 식민지로 넓혔다. 해방의 동기가 평등 이념이었는지 권력 유지의 필요였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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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4법학 학위를 받고 파리 고등법원 변호사가 되었다.
1792폴브렐 등과 함께 민사위원으로 생도맹그에 파견되었다.
17938월 29일 북부 관구의 노예해방을 선포했다.
1794–1795본국으로 소환되어 식민자들의 고발에 맞서 해명했고, 혐의를 벗었다.
1796–1797생도맹그로 돌아갔으나 투생 루베르튀르가 1797년 8월 그를 배에 태워 프랑스로 돌려보냈다.
전쟁부 사무총장으로 부처 사무국을 급진 애국파로 채웠고, 1794년 3월 에베르파와 함께 체포되어 3월 24일 처형되었다.
파리 감옥 수위의 아들로, 소송대리인 사무소의 서기로 일했다. 코르들리에 클럽 초기 회원으로 서기를 맡았고, 1792년 8월 10일 봉기 뒤 파리 코뮌 총평의회에 들어갔다. 1793년 4월 부쇼트 전쟁장관 아래 전쟁부 사무총장이 되어 부처 사무국을 급진 애국파로 채웠다. 1793년 12월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2월 풀려난 뒤 관용파와 혁명정부에 맞선 에베르파의 투쟁에 나섰다. 강좌에서는 1794년 3월 에베르·롱생·모모로 등과 함께 체포되어 3월 24일 처형된 인물로 등장한다. 반역 음모 혐의를 뒷받침할 물증은 제시되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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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8월 10일 봉기 뒤 파리 코뮌 총평의회에 들어가 파브르 데글랑틴의 자리를 이었다.
17934월 부쇼트 장관 아래 전쟁부 사무총장이 되었다.
1793–179412월 17일 일반안전위원회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2월 2일 풀려났다.
1798년 8월 22일 킬랄라에 상륙하고 8월 27일 캐슬바 전투에서 레이크 경 휘하 영국군을 격파했다. 8월 31일 코노트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9월 8일 발리너멕에서 패배해 포로가 되었다.
1767년 생낭보르(로렌 보주)에서 태어나 1792년 자원 입대해 급속히 승진했고 1794년 여단장이 되었다. 1798년 아일랜드 원정을 지휘해 8월 22일 킬랄라에 상륙하고 8월 27일 캐슬바에서 영국군을 격파했으며 8월 31일 코노트 공화국 선포에 관여했으나 9월 8일 발리너멕에서 항복하고 포로 교환으로 귀국했다. 이후 생도맹그 원정에 참전하고 1813년 미국으로 이주해 1815년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미군을 도왔으며 만년에는 프랑스어 교사로 지내다 1823년 뉴올리언스에서 사망했다.
1793년 7월 13일 ‘지롱드파 반란 음모를 안다’고 속여 마라의 면담을 얻어, 약용 목욕 중이던 그를 부엌칼로 찔러 죽였다.
프랑스 혁명기 인물로 지롱드파를 지지했다. 1793년 7월 13일 자코뱅 지도자 장폴 마라를 암살했다. 그녀는 마라를 1792년 9월 학살의 책임자로 보았고 급진화한 자코뱅파 때문에 혁명이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했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혁명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7월 17일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1800년 3월 유럽으로 돌아와 이탈리아 방면군에 배속되었고, 6월 14일 마렝고에서 오스트리아군이 우세하던 시점에 도착해 세 연대를 적 중앙에 투입했다. 승리 직전에 총탄에 맞아 죽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의 장군이다. 1768년 오베르뉴의 아야쉬르시울에서 태어나 에피아 사관학교에서 교육받고 왕립군에서 복무했다. 1792년 가족 대부분이 이민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라인군에 들어갔으며, 라우터부르크 전투의 공로로 준장이 되었다. 라인군과 1795~1796년 원정에서 복무하며 모로의 퇴각을 엄호했고, 잉글랜드 방면군 사령관을 지냈다. 이집트 원정에서는 피라미드 전투에서 맘루크의 공격을 맞았고 상이집트 원정으로 현지 주민에게 '정의의 술탄'이라 불렸다. 1800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마렝고에서 부데 사단과 함께 반격을 이끌었고 승리 직전에 전사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의 위대한 장군의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1801~1802년 나폴레옹이 과들루프에 파견한 원정군 사령관. 델그레스의 저항을 진압했으나 1802년 9월 3일 바스테르에서 황열로 사망했고, 반란은 1804년까지 이어졌다.
1770년 메츠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복무하던 콩티 용기병연대에 5세에 사관후보생으로 들어갔다. 혁명을 지지했고 1791년 소위, 1793년 대위, 1794년 기병대장을 거쳐 1796년 클레베르에 의해 준장으로 승진했다. 오슈 휘하에서 라인·삼브르뫼즈 군에서 복무하며 네우비트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1800년 모로의 라인 군에서 사단을 지휘해 12월 3일 호엔린덴에서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우회 기습해 승리를 결정지었다. 1801년 라인 군 해산 뒤 바타비아 공화국 기병 총감독이 되었다. 1801~1802년 나폴레옹은 그를 과들루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그는 델그레스의 저항을 진압한 뒤 노예제 강제 재도입을 집행했다. 1802년 9월 3일 바스테르에서 황열로 사망했다.
상업 문명을 비판하고, 사람들이 저마다의 정념에 맞게 일하는 협동 공동체 ‘팔랑스테르’를 구상했다. 『공산당 선언』은 그를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자로 꼽는다.
브장송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1791년부터 1816년까지 여러 도시에서 외판원·서신 담당 사무원으로 일했다. 1808년 『네 운동의 이론』을 익명으로 낸 뒤, 상업이 사기와 비참을 낳는다고 비판하고, 협동 공동체 ‘팔랑스테르’에서 각자의 정념에 맞게 일하는 ‘매력 있는 노동’을 구상했다. 빅토르 콩시데랑 등 제자들이 그의 사상을 퍼뜨렸고 여러 나라에서 공동체 실험이 있었다. 『공산당 선언』 제3장은 그를 생시몽·오언과 함께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로 꼽고, 제자들이 팔랑스테르 같은 실험에 매달려 노동자의 정치 운동에 반대한다고 비판했는데, 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평가다.
1848년 2월 3일, 카베의 추종자 69명이 르아브르 항구에서 배에 올랐다. '이카리아로 가자!' 그들은 신대륙에 지상의 공산낙원을 세우러 떠났다.
프랑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이자 이카리아 운동의 창시자. 1840년 『이카리아 여행』을 출판하여 노동자 협동조합에 기반한 공산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했고, '공산주의(communisme)'라는 말을 처음 정치적 용어로 정립했다. 약 40만 추종자를 거느린 당대 가장 대중적인 사회주의 옹호자로, 『진정한 기독교』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사회 평등의 복음으로 재해석했다. 1848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와 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를 세웠고, 1898년까지 이어진 미국 최장수 비종교 공동체 실험이 되었다. 계몽주의 유토피아 사상과 노동자 운동을 잇는 교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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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디종 출생. 변호사 자격 취득
1830–18317월혁명 참여 후 바스티아 검찰총장. 코트도르 하원의원 당선
1833–1834『르 포퓰레르』 창간. 반정부 논설로 반역죄 유죄 판결, 영국 망명
1834–1839영국에서 로버트 오웬과 교류하며 공산주의 사상 구상
1840『이카리아 여행』 출판.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
1841–1847『르 포퓰레르』 복간. 약 40만 명 독자층 확보, 『진정한 기독교』 출간
1848추종자들과 미국으로 이주. 텍사스·일리노이에 이카리아 공동체 설립
1849–1856노부 이카리아 공동체 지도자. 내부 갈등 속 1856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사망
1871년 5월 파리 코뮌을 진압한 티에르는 1873년 독일군의 프랑스 영토 철수를 앞당긴 뒤 왕당파 의회의 반대 속에 사임했다.
마르세유 출신 변호사·언론인으로 『프랑스 혁명사』를 써 이름을 알렸고, 1830년 7월 혁명에서 루이 필리프를 옹립한 뒤 7월 왕정의 내무장관과 총리를 지냈다. 1834년 리옹 견직공 봉기와 파리 봉기를 진압했다. 제2제정기에는 자유주의 야당의 지도자였다. 1871년 2월 국민의회가 그를 행정 수반으로 세웠고, 3월 18일 몽마르트르의 대포 회수가 실패하자 정부를 베르사유로 옮겨 5월 피의 주간에 코뮌을 진압했다. 1871년 8월 대통령이 되었고 독일 배상금을 조기에 갚았으나 1873년 왕당파 의회에 밀려 사임했다.
스당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베르사유군을 이끌고 파리 코뮌을 진압했으며, 「도덕 질서」의 대통령이 된 원수
1871년 5월 베르사유군 사령관으로 파리 코뮌을 진압했다. 1873년 대통령이 된 뒤 「도덕 질서」 정부를 이끌었고, 1877년 공화파가 의회 다수당이 되자 1879년 사임했다.
아일랜드계 귀족 가문 출신 군인으로 알제리 정복과 크림 전쟁의 말라코프 공격, 1859년 마젠타 전투로 원수와 공작이 되었다. 1870년 샬롱군을 이끌고 메스를 구하러 가다 스당에서 부상당해 황제와 함께 포로가 되었다. 독일에서 풀려난 뒤 티에르의 베르사유군 사령관이 되어 1871년 5월 파리에 진입했고, 피의 주간의 진압과 대량 처형이 그의 지휘 아래 벌어졌다. 1873년 티에르를 이어 대통령이 되어 왕정복고를 기다리는 「도덕 질서」 정부를 이끌었고, 1877년 의회와의 충돌에서 패한 뒤 1879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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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프랑스군에 입대했다.
1855크림 전쟁 중 세바스토폴 공방전의 말라코프 전투에서 승리했다.
1859마젠타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승리에 기여해 원수와 마젠타 공작 작위를 받았다.
1864알제리 총독으로 임명됐다.
1870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하다 스당 전투에서 부상당해 나폴레옹 3세와 함께 포로가 됐다.
1871티에르 대통령 아래 베르사유군 사령관이 되어 5월 파리 코뮌 진압을 지휘했다.
1873프랑스 제3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돼 「도덕 질서」 정책을 추진했다.
1877–1879의회와의 대립 뒤 공화파가 선거에서 승리하자 1879년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1830·1848년 혁명을 거쳐 코뮌의 전쟁 대표가 되고 바리케이드에서 죽음을 택한 자코뱅 언론인
1871년 파리 코뮌의 전쟁 대표 들레클뤼즈는 피의 주간 마지막 날인 5월 25일, 무장하지 않은 채 샤토도 광장의 바리케이드로 걸어가 전투 중 총에 맞아 숨졌다.
드뢰 출신으로 1830년 7월 혁명에 가담했고, 1848년 2월 혁명 뒤 공화파 신문을 내며 활동하다 망명했다. 제2제정기에 체포되어 기아나 유형지 카옌에서 복역했고, 1868년 신문 『르 레베유』를 창간했다. 1871년 2월 국민의회 의원으로 뽑혔으나 코뮌에 참여하려고 사퇴했다. 자코뱅계 「독립 혁명가」로 공안위원이 되었고 5월 11일 민간인으로서 전쟁 대표를 맡았다. 5월 25일 패배가 분명해지자 샤토도 광장의 바리케이드 위로 걸어 올라가 총에 맞아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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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7월 혁명에 참여했다.
18482월 혁명 뒤 공화파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이후 망명했다.
1868신문 『르 레베유』를 창간했다.
1871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뒤 사퇴하고 파리 코뮌에 합류해 공안위원과 전쟁 대표를 맡았다.
1871년 6월 파리 코뮌이 진압된 뒤, 파리 은신 중에 「인터내셔널가」의 가사를 썼다. 미국 망명 중 추방된 코뮌원들과의 연대를 조직했다.
파리의 포장공 가정에서 태어나 직물 도안공으로 일하며 1830년대부터 노래와 시를 썼고, 1848년 6월 봉기에 가담했다. 도안공 조합을 세우고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했다. 1871년 4월 2구 보궐선거로 코뮌 의원이 되었고, 피의 주간 뒤인 6월 숨어 지내며 「인터내셔널가」를 썼다. 궐석 사형 선고를 받고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880년 사면으로 돌아왔다. 1887년 가난 속에 숨졌고, 이듬해 피에르 드제이테르가 곡을 붙인 「인터내셔널가」는 세계 노동운동의 노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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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첫 노래 「자유 만세」를 지었다.
18481848년 혁명에 참여했다.
1864직물 도안공 조합의 창설을 주도했고, 조합은 이후 제1인터내셔널에 가입했다.
1871파리 코뮌 의원으로 선출되어 공공서비스위원회에서 일했고, 피의 주간 전투에도 참여했다.
1871년 파리 코뮌에서 예술가 연맹 의장과 의원을 맡아 박물관 개방을 추진했다. 코뮌 패배 뒤 방돔 원주 파괴 책임으로 6개월 수감됐고, 재건 비용 판결 후 스위스로 망명했다.
쥐라 지방 오르낭의 부농 가정에서 태어나 「오르낭의 매장」과 「돌 깨는 사람들」로 사실주의를 열었고, 프루동과 가까웠다. 1870년 레지옹 도뇌르를 거절했다. 1871년 코뮌의 예술가 연맹 의장으로 미술관의 자치와 검열 폐지를 요구했고, 6구 보궐선거에서 코뮌 의원이 되어 공안위원회에 반대한 소수파에 섰다. 방돔 원주를 옮기자고 제안한 일 때문에 피의 주간 뒤 6개월 금고를 선고받았고, 1873년 원주 재건 비용을 물라는 판결이 나자 스위스로 망명해 라투르드페이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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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1851「돌 깨는 사람들」과 「오르낭의 매장」 등 일상 장면을 대형 화폭의 사실주의 양식으로 그려 파리 살롱의 관습에 도전했다.
1870정부의 권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공개적으로 거절했다.
1871파리 코뮌에서 예술가 연맹 의장을 맡고 박물관 개방과 전시회 조직을 추진했으며, 의원으로 활동했다.
1873방돔 원주 재건 비용 32만 3천 프랑을 부담하라는 판결 뒤 스위스로 떠나 라투르드페이에 정착했다.
클뤼세레는 1848년 프랑스군 장교로 6월 봉기 진압에 참여했고, 이후 이탈리아 통일전쟁과 미국 남북전쟁에서 복무했다. 1871년 파리 코뮌에서 전쟁대표로 국민방위군 재편을 추진했으나 지도부와의 갈등 속에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코뮌 진압 뒤 해외로 피신했다. 사면 후 귀국해 툴롱에서 사회주의자로 하원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이후 사회주의에서 멀어져 반드레퓌스파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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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3프랑스 쉬렌에서 태어났다.
1848프랑스군 장교로 6월 봉기 진압에 참여했다.
1860가리발디 의용군에 합류해 이탈리아 통일전쟁에 참여했다.
1861–1863미국 남북전쟁에서 북군에 복무하고 준장 계급에 올랐다.
1871파리 코뮌의 전쟁대표로 국민방위군 재편을 추진했다. 지도부와 충돌해 5월 1일 체포됐고, 5월 21일 특별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브르타뉴 브레스트 출신인 르멜은 파리에서 제본공으로 일하며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1865년 제본공 노동자들의 남녀 동일임금 쟁취에 기여했고,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해 외젠 바를랭과 협동조합 식당 라 마르미트를 운영했다. 1871년 파리 코뮌 때 여성 연합의 지도적 활동가로 바리케이드에서 싸웠다. 체포된 뒤 루이즈 미셸과 함께 누벨칼레도니로 유형되었으며 1880년 사면으로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 코뮌에서 몽마르트르 여성감시위원회를 이끌고 바리케이드에서 싸운 루이즈 미셸은 패배 뒤 뉴칼레도니아로 유형되었으며, 귀환 후 노동자 집회와 아나키스트 운동에 헌신했다.
오트마른의 성에서 하녀의 딸로 태어나 교사가 되었고, 1850년대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학교를 열며 공화파·사회주의 클럽에 드나들었다. 1871년 3월 18일 몽마르트르에서 대포를 지키러 나섰고, 코뮌 기간 감시위원회와 구급 활동, 방위군 대대에서 활동했다. 피의 주간 뒤 어머니 대신 자수해 법정에서 사형을 요구했으나 뉴칼레도니아 유형을 선고받았다. 그곳에서 카나크인의 1878년 봉기를 지지했다. 1880년 사면으로 돌아와 아나키스트로서 연설과 투옥을 거듭했고 1905년 마르세유에서 강연 여행 중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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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s–1860s마을에서 교사로 일한 뒤 1856년 파리로 옮겼다. 1865년 파리에 학교를 열고 시를 발표했으며, 블랑키주의 혁명가들과 교류하고 여성의 시민권과 여학생 교육을 위한 활동에 참여했다.
1871파리 코뮌에서 몽마르트르 여성감시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제61 몽마르트르 대대에서 싸우며 구급소를 조직했다. 피의 주간에 어머니를 지키려 프랑스군에 자수했다.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요구했지만 태평양의 프랑스 유형지 뉴칼레도니아로 이송형을 선고받았다.
1873–1880뉴칼레도니아로 유형되어 카나크인과 교류하고 프랑스어를 가르쳤으며 1878년 카나크 봉기를 지지했다. 1880년 코뮌 참여자 사면으로 프랑스로 돌아왔다.
1880–1905프랑스로 돌아온 뒤 노동자 집회와 시위에서 연설했고, 아나키스트로서 여러 차례 투옥되면서도 프랑스와 유럽에서 활동했다. 1883년 실업 노동자 시위를 이끌었고, 세바스티앵 포르와 함께 1895년 아나키스트 잡지 《르 리베르테르》를 창간했다. 1905년 마르세유에서 사망했다.
파리 코뮌의 마지막 바리케이드에서 싸우고 망명지에서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를 쓴 언론인
프랑스 혁명적 사회주의 언론인 프로스페르올리비에 리사가레는 파리 코뮌에 참여하고, 생존자 증언과 문서를 모아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를 썼다.
툴루즈의 바스크계 가정에서 태어나 제2제정기 공화파 강연가·언론인으로 활동하다 여러 차례 기소되었다. 1870년 전쟁 중 지방 국민방위정부의 군사 조직에 참여했고, 1871년 코뮌 기간 파리에서 신문 『악시옹』과 『트리뷴 뒤 푀플』을 냈다. 피의 주간에는 벨빌의 마지막 바리케이드까지 싸운 뒤 런던으로 탈출해 마르크스 가족과 가까워졌고 엘리너 마르크스와 약혼했다. 1876년 브뤼셀에서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를 펴냈다. 1880년 사면 뒤 돌아와 신문 『라 바타유』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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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파리 코뮌에 참여하고 『악시옹』과 『트리뷴 뒤 푀플』을 창간·편집했다.
1876코뮌 생존자들의 증언과 당시 문서를 바탕으로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를 처음 출간했다.
제본공 노동조합을 국제노동자협회와 파리 노동자협회 연맹으로 연결하고, 파리 코뮌의 재정과 노동 관계를 맡아 조직했다. 1871년 5월 28일 베르사유군에 붙잡혀 몽마르트르에서 다른 포로들과 총살되었다.
농가 출신으로 파리에서 제본공이 되어 1864년 제본공 파업을 이끌었고, 상호부조 조합과 협동 식당 「라 마르미트」를 세웠다. 국제노동자협회 파리 지부의 중심인물로 1868년 두 차례 재판을 받았고, 노동조합 연합회를 조직했다. 1871년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에 들어갔고 코뮌 의원으로 재정과 식량 공급을 맡았다. 공안위원회 설치에 반대한 소수파에 속했다. 5월 28일 붙잡혀 몽마르트르로 끌려가 군중에게 구타당한 뒤 총살되었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정당을 세운 원로로, 1914년 「신성 연합」 정부에 입각한 사회주의자
1914년 전쟁 발발 뒤 게드는 사회주의자의 반전 노선에서 이탈해 무임소 장관으로 프랑스 정부에 들어갔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그는 사회주의 투쟁 외의 별도 반전 행동을 거부했지만, 전쟁기 정부 참여는 그 선택을 현실 정치로 옮겼다.
파리코뮌을 지지했다가 망명한 언론인으로, 1880년 마르크스와 함께 프랑스 노동자당 강령을 작성하며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의 대표가 되었다. 개혁주의자 조레스와 오랫동안 맞섰고, 1905년 통합 사회당(SFIO) 창당에 참여했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는 계급투쟁이 전쟁을 없앨 것이라며 특별한 반전 행동이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1914년 8월 조국이 위협받는다고 보고 무임소 장관으로 입각해 1916년까지 「신성 연합」 정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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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카를 마르크스와 프랑스 노동자당 강령을 작성했다. 강령은 그해 11월 당 창립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1907제2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프랑스 소수파를 대표해 사회주의 투쟁 외의 특별한 반전 조치를 거부하는 결의안을 냈다.
1914–1916전쟁 발발 뒤 무임소 장관으로 프랑스 정부에 참여해 1916년까지 재임했다.
제2제정기 블랑키주의자로 활동하며 공화주의·무신론 신문에 글을 쓰고 정치 활동으로 여러 차례 투옥됐다. 1870년 9월 공화정 선포 뒤 파리 경찰청에서 정치 업무를 맡았고, 1871년 3월 코뮌 봉기 후 경찰청장이 됐다. 코뮌 평의원과 공안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4월 말 검사로 임명돼 인질 정책 집행과 반대파 체포에 관여했다. 피의 주간에 구금 중이던 변호사 귀스타브 쇼데를 처형하게 했고, 1871년 5월 24일 베르사유 정부군에 붙잡혀 재판 없이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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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대블랑키주의·공화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신문에 기고했다. 정치 활동으로 여러 차례 투옥됐다.
1870년9월 공화정 선포 뒤 파리 경찰청에서 정치 담당 관리로 일했다.
1871년3월 20일 파리 경찰청장에 임명됐고, 26일 코뮌 평의원으로 선출됐다. 공안위원회를 거쳐 4월 말 코뮌 검사로 임명됐다.
1871년피의 주간에 귀스타브 쇼데 처형을 명령했다. 5월 24일 베르사유 정부군에 붙잡혀 재판 없이 총살됐다.
필리프 페탱은 제1차 세계대전의 장군으로, 베르됭 전투의 승리와 병사들의 사기를 회복한 지휘로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 독일의 침공 앞에서 전쟁 지속을 반대하고 휴전을 요청했으며, 의회가 헌법 제정 권한을 넘긴 뒤 비시 프랑스의 국가수반으로 공화국을 권위주의 체제로 대체했다. 그의 정부는 독일과 협력하고 반유대주의 법령을 시행해 점령 질서에 프랑스 국가기구를 결합시켰다. 해방 뒤 고등법원은 그를 적과의 내통과 반역으로 사형 선고했으며, 드골은 이를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공화국의 포도주 통 속에 사회혁명의 포도주를 준비하십시오!」 — 1905년 5월 1일, 마로생의 포도 재배 협동조합을 방문한 자리에서
장 조레스는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의 중심 인물로, 1902년 프랑스 사회당을 이끌고 1905년 쥘 게드의 혁명적 사회당과 통합해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를 출범시켰다. 1904년 창간한 《뤼마니테》를 통해 개혁적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고,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반유대주의와 군국주의에 맞서 공화국의 양심을 대변했다. 마르크스주의 계급 분석에 기초한 《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1900~1903)를 저술해 프랑스 혁명사학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14년 7월, 독일 사민당과의 국제적 총파업으로 세계대전을 막으려 했으나 개전 사흘 전 민족주의자 라울 비용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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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타른주 공화파 의원으로 국민의회 진출
1892–1893카르모 광부 총파업 지지, 독립 사회당 의원으로 재선
1898–1902드레퓌스 사건에서 진보 진영의 양심으로 활동, 《라 프티트 레퓌블리크》 편집
1934년 1월 내내 그의 지면은 연루된 의원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냈고, 2월 6일 아침 신문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에게 호소했다. 그날 밤 광장에 모인 대열의 앞자리에는 악시옹 프랑세즈의 행동대 카믈로 뒤 루아가 있었다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아들로 태어나 의학을 공부하다 문필로 옮겨 간 논객으로, 모라스와 함께 《악시옹 프랑세즈》를 창간하고 그 논조를 만들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파리 선출 하원의원을 지냈으며, 인신공격과 고발을 무기로 삼는 그의 문체는 프랑스 정치 언어에 한 세대의 흔적을 남겼다. 1923년 아들 필리프의 죽음을 경찰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벌인 소송에서 명예훼손으로 유죄를 받고 1927년 벨기에로 달아났다가 1930년 사면으로 돌아왔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에서 그는 연루된 정치인들의 이름을 날마다 지면에 올려 「도둑들의 공화국」이라는 구도를 만들었고, 이 지면 공세가 2월 6일 광장으로 이어졌다.
막심 베강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페르디낭 포슈의 핵심 참모로 연합군 작전을 조율하고 1918년 휴전 조건을 독일 대표단에 낭독한 프랑스 장군이다. 전간기에는 폴란드·레반트에서 프랑스의 군사적 영향력을 수행했으며, 1940년 5월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어 독일군의 돌파 뒤 본토에서 계속 싸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휴전을 권고했다. 그는 비시 정부와 북아프리카에서 제한적 협력을 택했지만, 유대인 박해 정책을 가혹하게 집행했고 독일과의 전면 협력에는 거리를 두었다. 전후 반역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1948년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이후 페탱의 기억을 옹호했다.
「이것은 드레퓌스의 복수다!」, 종신형 선고를 듣고 리옹 법정에서, 1945년 1월 27일
프로방스 마르티그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청력을 잃은 시인이자 논객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악시옹 프랑세즈를 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그가 말한 「통합민족주의」는 왕정 복고와 의회 공화국의 폐기를 내걸고 유대인, 개신교도, 프리메이슨, 외국인을 프랑스를 안에서 좀먹는 「네 개의 연합국」으로 지목했다. 1926년 교황청이 악시옹 프랑세즈를 단죄했음에도 세력은 유지되었고, 1938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 내내 그의 신문은 「도둑들」을 날마다 지목했고 2월 6일 아침 지면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들에게 호소했다. 1940년 페탱의 집권을 「신의 뜻밖의 선물」이라 부르며 비시를 지지했고, 점령기 내내 저항 세력과 유대인을 지면에서 고발했다. 1945년 1월 대적 협력 혐의로 종신형과 공민권 박탈을 선고받았다.
투르 대회에서 SFIO 다수를 코민테른으로 이끌어 프랑스 공산당을 세운 『뤼마니테』 지도자
1920년 투르 대회에서 SFIO의 코민테른 가입을 지지해 다수파의 분열을 이끌고 프랑스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1923년 루르 점령 반대로 체포됐으나 상원 고등법원은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브르타뉴 팽폴 출신으로 1891년 게드의 프랑스 노동자당에 들어갔고, 1905년 통합 사회당(SFIO)에 참여했다. 1918년부터 평생 『뤼마니테』를 이끌었다. 전쟁 뒤 지지자들이 10월 혁명 쪽으로 기울자, 1920년 투르 대회에서 코민테른 가입을 이끌어 프랑스 공산당의 창립자가 되었다. 1923년 프랑스의 루르 점령을 비난했다가 투옥되었다. 하원 의원과 상원 의원을 지내며 공산당의 원로로 남았고, 1958년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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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쥘 게드와 폴 라파르그가 세운 프랑스 노동자당의 지롱드 지부에 가입했다.
1905통합 사회당(SFIO) 창당 대회에 참여하고 당 선전 담당자로 활동했다.
1918『뤼마니테』의 책임자로 선출되어 1958년 사망할 때까지 신문을 이끌었다.
1920투르 대회에서 SFIO의 코민테른 가입을 지지하고 분열 뒤 프랑스 공산당의 전신인 프랑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지부(SFIC) 창립에 참여했다.
1923프랑스의 루르 점령에 반대한 뒤 체포되어 상원 고등법원에 회부됐으나, 법원은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전쟁에 반대하며 국제주의 사회주의자들을 조직했고, 프랑스 공산당 창당 과정에서 제3인터내셔널 위원회 서기로 활동했다.
교사로 일하며 1901년 사회당에 가입했고, 교원 노동조합 활동에 참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쟁 협력에 반대하고 짐머발트의 입장을 지지했으며, 국제관계 재개 위원회와 제3인터내셔널 위원회의 서기를 맡았다. 1920년 투르 대회에서 창당된 프랑스 공산당의 초기 지도부에 참여했다.
전쟁이 닥치면 총을 들고 형제에게 쏘지 말라. 자본가들의 금고를 지키는 전쟁에도 나가지 말라.
역사 교사 출신으로, 에르베는 1901년 반군국주의 기사로 교직에서 해임된 뒤 사회주의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05년 SFIO 창당에 참여하고 CGT에서도 활동했으며, 《사회전쟁》을 창간해 반군국주의와 전쟁 시 봉기를 주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애국주의와 전쟁 지지로 돌아섰고, 1919년 민족사회당 창당을 추진했다. 전간기에는 의회주의를 비판하고 권위주의적 공화국과 페탱의 집권을 주장했으며, 1930년대에는 독일 나치즘을 한때 지지했지만 반유대인 박해를 비판했다.
1940년 6월 16일 레이노 내각이 물러난 뒤 그는 페탱을 정부 수반으로 지명했고, 페탱은 다음 날 휴전을 요청했다. 그는 7월 10일 헌법법에 서명했고 다음 날 페탱이 국가원수가 되었다.
광산공학을 전공한 프랑스의 중도우파 공화주의 정치가로, 1900년 뫼르테모젤에서 29세에 하원의원이 되었고 1906년부터 26년간 뫼르테모젤주의회 의장을 지냈다. 1911~1914년 식민지 장관, 1913년 전쟁 장관, 1917~1919년 봉쇄·해방 지역 장관을 지냈고 1920년 상원에 들어가 1931년 상원의장이 되었다. 1932년 폴 두메르 암살 후 제3공화국 마지막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1939년 재선되었으나 직접적 권한은 좁았다. 1940년 6월 16일 페탱을 지명했고 7월 10일 569대 80으로 통과된 헌법법에 서명했으며 다음 날 페탱이 국가원수가 되었다. 사임하지 않았고 1943년 독일군에 체포되었다. 1950년 3월 6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집권하는 동안 나는 집무실을 거의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밖에 나가 파리 교외를 지나며 고물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2인승 자전거의 행렬을, 맞춰 입은 스웨터 차림의 노동자 부부들을 보았을 때, 그래도 내가 어렵고 어두운 삶들에 일종의 갠 하늘을, 한 줄기 트임을 들여놓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리옴 재판 진술, 1942년 3월
드레퓌스 사건으로 정치에 들어와 1920년 투르 대회에서 다수파의 코민테른 가입에 맞서 사회당(SFIO)의 「낡은 집」을 지킨 지도자. 1936년 인민전선 정부의 총리로 마티뇽 협정을 중재하고 2주 유급휴가와 주 40시간제를 입법했으며,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자 총리이자 최초의 유대인 총리로서 극우의 표적이 되었다. 1940년 페탱 전권 위임에 반대한 80인 중 한 명으로 비시 정권의 리옴 재판에서 피고석을 인민전선 변호의 연단으로 바꾸었고, 부헨발트 억류에서 살아 돌아와 1946년 말 과도정부 총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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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1906국사원 법관이자 문예비평가,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조레스를 따라 사회주의 운동에 입문
1940년 5월 16일 파리에서 처칠이 '전략 예비대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자 가믈랭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모리스 가믈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모 경험과 공화국 군부의 조정자로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프랑스군 최고지휘부에 오른 장군이었다. 그는 독일과의 장기전을 예상하며 마지노선에 기대는 방어 구상을 세웠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사르 공세를 제한하고 독일의 벨기에 침공에 대비해 주력을 딜강과 벨기에 국경으로 전진시키는 선택을 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아르덴 돌파와 세당의 붕괴 뒤 해임되었고, 프랑스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재판과 독일 억류를 겪었다.
1928년 그는 한 부에 10상팀짜리 일간지를 창간해 발행 부수를 백만 부 가까이 끌어올렸다. 신문은 손해를 봤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값이 싼 만큼 널리 읽혔고, 그 지면에서 자란 언어가 1934년 2월 광장에 나온 대열들의 언어가 되었다
코르시카 출신으로 향수 산업에서 당대 유럽 최대의 재산을 쌓은 실업가. 1922년 《르 피가로》를 사들이고 1928년에는 값싼 대중지 《라미 뒤 푀플》을 창간해 반공과 반유대, 반의회 선동의 무기로 삼았다. 조르주 발루아의 파소와 초기 불의 십자단을 지원했고 1933년에는 연대 프랑스를 직접 만들어 자금을 댔다. 그의 이력은 1930년대 프랑스 극우 동맹의 물음, 곧 누가 이 조직들의 비용을 댔는가에 대한 대답의 큰 몫이다. 1934년 2월 6일 광장에는 그가 세운 조직이 대열로 나와 있었고, 그는 그해 7월 이혼 소송과 재정 파탄 끝에 죽었다.
레닌은 로스메르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다섯 가지나 여섯 가지 언어로 침묵을 지키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 필리프 로브리외, 『프랑스 공산당 내부사』에서 인용
미국 태생의 프랑스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이자 코민테른 지도부 핵심 인물.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라 비 우브리에르》를 발행하며 반전 국제주의 운동을 조직했고, 모스크바에서 17개월간 체류하며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을 주도했다. 프랑스 공산당 정치국원으로 활약하다 1924년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좌익반대파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투신했으며, 1938년 자신의 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만년에는 알제리 전쟁 반대 선언에 서명했고 회고록 『레닌의 모스크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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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914CGT 기관지 《라 비 우브리에르》 편집 —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혁명적 생디칼리슴 운동 주도
1915–1918반전 국제주의자로 치머발트 회의 프랑스 참가 조직 — 전쟁 내내 반전 활동 지속
1919–1920제3인터내셔널 가맹위원회 활동 — 모스크바 파견, 17개월 체류하며 코민테른 집행위원 선출
1921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대회 주도 — 로조프스키·톰 만과 함께 임시평의회 간부
1922–1924프랑스 공산당(PCF) 정치국원 겸 《뤼마니테》 사무총장 — 당내 좌파 지도부 핵심
1924.10트로츠키 반대 운동에 반발하여 수바린·모나트와 함께 PCF에서 제명
1929–1931프랑스 최초 트로츠키주의 조직 공산주의자동맹 결성 참여 — 전술적 차이로 1931년 탈퇴
1938.9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 개최 — GPU의 암살 위협 속 비밀 진행
1939멕시코 방문 — 트로츠키와의 우정 회복, 듀이위원회 참여, 트로츠키 손자 시에바의 후견인
「그렇다면 나는 거리에 있게 되겠군요」, 해임을 통보하는 달라디에와의 전화에서, 1934년 2월 3일. 우파 신문은 이 말을 거리로 나가겠다는 예고로 읽었고, 시아프는 실직을 뜻했을 뿐이라고 했다
코르시카 아자시오 출신의 경찰 관료로 1927년부터 1934년까지 파리 경찰청장을 지냈다. 좌파 시위에는 엄격하고 극우 동맹의 가두 행동에는 관대하다는 평이 따라다녔으며, 우파 신문과 참전군인 조직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1934년 2월 3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자 우파는 공화국이 자기 편 경찰을 쳐낸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사흘 뒤 콩코르드 광장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해임된 뒤에도 파리에서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았고, 1940년 비시 정권이 레반트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해 부임하던 길에 지중해 상공에서 비행기가 격추되어 죽었다.
1914년 크리스마스 밤, 부상당한 채 테트드포 정상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독일군을 상대로 중대를 지휘하며 버텨 두 차례 표창을 받았다.
로베르 투숑은 산악전과 보병 교육으로 명성을 쌓은 프랑스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경험과 알프스 부대 지휘를 바탕으로 승진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돌파 뒤 제6군을 지휘하며 마지노선에서 이동한 부대들을 엔강 방어선에 급히 배치했고, 샤를 드골의 제4기갑사단도 몽코르네 반격에 투입했다. 그러나 전차부대는 충분히 통합되거나 지원되지 못했고, 그의 군은 전선의 틈을 막은 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휴전 뒤 퇴역한 그는 비시의 국가평의회와 리옹 국가재판소에 참여해 군인으로서의 경력과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협력이 겹치는 유산을 남겼다.
폴 레노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공화국 정치가로, 경제·식민지·국방 문제에서 독자적인 노선을 보였다. 그는 나치 독일의 위협에 맞서 재무를 전시 체제로 돌리고 기갑·공군 중심의 현대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0년 프랑스가 붕괴하자 영국과의 동맹을 유지하고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계속하려 했지만, 정전파에 밀려 총리직을 사임했고 이후 비시 정권과 독일에 억류되었다. 해방 뒤에도 의원과 헌법 논의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며 강한 의회주의를 지켰다.
샤를 들레스트랭은 제1차 세계대전의 포로 경험과 기갑부대 지휘를 거친 프랑스 장군으로, 현대전에서 전차의 역할을 중시했다. 패전과 휴전 뒤에도 저항을 선택한 그는 샤를 드골의 지명으로 비밀군의 초대 지휘관이 되어 여러 저항운동의 군사 조직을 묶었다. 그는 장 물랭과 협력해 점령지 전역으로 조직을 넓혔지만 1943년 6월 9일 체포되었고, 후임을 정해야 하는 상황은 칼뤼르 회의의 배경이 되었다. 나치 수용소에서 살해된 그는 사후 해방훈장을 받았다.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이보다 큰 승리는 없었다」, 마티뇽 협정 타결 직후 라디오 연설에서, 1936년 6월
성냥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1909년 서른 살에 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이 되어 1940년까지 이끈 프랑스 노동운동의 얼굴. 혁명적 생디칼리슴에서 출발했으나 1914년 신성동맹을 받아들이며 개혁주의로 옮겨 갔고, 베르사유 조약의 노동 조항 기초와 국제노동기구(ILO) 창설에 참여했다. 1936년 재통합된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에 서명했으며, 비시 정권 아래 억류되어 독일로 이송되었다가 살아 돌아와 1948년 공산당 주도의 CGT에서 갈라져 나온 「노동자의 힘」(FO)의 창립 의장이 되었고 195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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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906오베르빌리에 성냥 공장 노동자, 아버지를 실명시킨 백린에 맞선 파업으로 해고
1909–1940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
1914.08반전 총파업 노선을 접고 「신성동맹」 수용, 조레스 장례식에서 연설
1919–1921베르사유 조약 노동 조항 기초, ILO 창설 참여; CGT 분열로 혁명파가 CGTU로 이탈
1936.03–06재통합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 서명, 조합원 100만에서 400만으로
샤를 욍치제르는 프랑스 식민보병 출신의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발칸 전선과 전간기 해외 지휘·협상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0년 세당 방면 제2군을 지휘하며 독일군의 돌파를 막지 못했고, 그 판단은 프랑스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비판받았다. 그는 전투를 계속할 수 있는 한계가 임박했다고 보았으며, 페탱 정부의 전권대표단 의장으로 6월 22일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이후 비시의 국방장관이 되어 협력국가의 군사 재편을 맡았고, 194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그는 소련과의 군사협정을 협상했으나, 프랑스 대표단의 권한은 제한적이었고 영국 대표는 서면 권한이 없었으며, 회담은 폴란드 통과 문제에서 막혔다.
프랑스 육군 장성 에메 두멩크는 제1차 세계대전기에 자동차 수송을 조직했고 전간기에는 독립 기갑사단 구상을 내놓았다.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프랑스 군사대표단을 이끌며 소련과의 군사협정을 협상했으나 권한은 제한돼 있었고 회담은 폴란드 통과 문제에서 막혔으며, 독일·소련 협정으로 중단됐다. 1940년에는 최고사령부 소장으로 아르덴 전선의 붕괴를 겪었고, 이후 국가재건 총감과 군사사 저술 활동을 거쳤다.
피에르 라발은 변호사와 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출발했지만 전후 우파로 이동해 제3공화국의 핵심 각료와 총리를 지냈다. 1940년 패전 뒤 그는 페탱이 국민의회에서 전권을 얻고 헌정 질서를 폐기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비시 체제의 중심에 섰다. 라발은 독일과의 협력이 프랑스의 지위를 보전할 수 있다고 믿었고, 1942년 복귀한 뒤 노동력 제공과 경찰 협력을 확대했다. 해방 후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1945년 처형되었다.
「저 바보들 같으니, 저들이 무엇에 환호하는지 안다면」, 1938년 9월 30일 뮌헨 협정에서 돌아와 부르제 공항의 환호 인파를 보고 했다고 전해지는 말. 인용 여부와 장소·상대를 두고 증언이 엇갈린다.
빵집 아들 출신 역사 교사로 급진당을 이끌었다. 1934년 2월 6일 폭동 뒤 총리직에서 물러났고, 1936년 6월부터 국방을 맡아 인민전선을 지탱했으나 1938년 4월 총리로 복귀한 뒤 11월 법령으로 주 40시간제를 폐기하고 총파업을 꺾었다. 1938년 9월 뮌헨 협정에 서명했고, 1939년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했으며 독소 불가침조약 뒤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1940년 3월 핀란드 지원 실기로 실각해 리옴 재판에 섰고 1943년부터 부헨발트 인근과 이터성에 억류되었다가 1945년 5월 5일 풀려났다. 전후 하원에 복귀해 1958년 드골의 전권에 반대했고 1970년 10월 10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2월 6일 밤 그의 대열은 하원 뒤편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돌입 대신 해산을 명령했다. 좌파는 그 밤에서 파시즘의 총연습을 보았고 극우는 그를 배신자라 불렀다. 두 평가는 그 뒤로도 그를 함께 따라다녔다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생시르를 거쳐 모로코와 1차 대전에서 복무하고 중령으로 예편한 직업군인. 1931년부터 참전군인 조직 불의 십자단을 이끌며 수십만 규모의 대중운동으로 키웠고, 규율과 자동차 대열을 앞세운 그 행동양식은 프랑스 좌파에게 파시즘의 얼굴로 보였다. 1934년 2월 6일 밤 그의 대열은 하원 뒤편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돌입 대신 해산을 명령했고, 이 신중함 때문에 극우 진영 안에서 배신자로 몰렸다. 1936년 인민전선 정부가 동맹을 해산하자 프랑스사회당(PSF)을 세워 선거정치로 방향을 틀었고, 이 당은 1930년대 말 프랑스 최대의 우파 정당이 되었다. 1940년 페탱을 지지해 비시 국민평의회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영국에 정보를 넘기는 조직을 운영하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독일에 억류되었고, 해방 뒤에는 비시 부역 혐의로 프랑스 당국에 다시 구금되었다가 1946년 병으로 죽었다. 그가 파시스트였는가 아니면 권위주의적 보수의 프랑스적 형태였는가는 스테른헬 이래 오늘날까지 프랑스 우파 연구의 중심 논쟁으로 남아 있다.
1919년 4월 19일, 흑해의 전함 장 바르호 위에 붉은 깃발이 올랐다. 백군 지원을 거부한 수병들의 반란 지도자로 체포된 앙드레 마르티는 콘스탄티노플 군법회의에서 중노동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 해군 기관사로 복무하던 1919년, 백군 지원을 거부하며 전함 장 바르호의 반란을 이끌어 중노동 20년형을 받았다. 1923년 사면 후 프랑스 공산당에 합류해 하원의원·중앙위원을 지냈고, 1935년 코민테른 서기 겸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국제여단 정치위원으로서 알바세테에서 여단을 조직했고, 엄격한 규율로 '알바세테의 도살자'라 불렸다. 1952년 PCF에서 축출되었으나 30년간 프랑스 공산주의와 코민테른 국제 활동의 중심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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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프랑스 해군 기관병 입대
1919흑해 함대 반란 지도 — 전함 장 바르호에서 백군 지원 거부, 체포 후 중노동 20년형
「거리도 우리 것이다」라는 뜻으로 그는 의회 의석과 준군사 조직을 함께 유지했다. 1934년 2월 6일 밤 콩코르드에 도착한 대열 가운데 청년애국단이 있었고, 그날 죽은 열다섯 명 가운데 여럿이 그 조직의 단원이었다
1차 대전 참전 뒤 하원의원이 된 정치인으로, 1924년 좌파연합의 집권에 맞서 청년애국단을 세워 수만 명 규모의 준군사 조직으로 키웠다. 파란 외투와 베레모를 갖춘 이 조직은 공산당 집회를 습격하고 거리를 다투는 일을 활동으로 삼았고, 그러면서도 지도자는 의회 안에 자리를 두고 있었다. 이 이중성은 프랑스 극우 동맹들의 특징이었다. 1934년 2월 6일 청년애국단은 콩코르드 광장의 주력 대열 가운데 하나였고 사망자도 그 대열에서 나왔다. 1940년 페탱 전권 위임에 찬성표를 던졌고 점령기 파리 시의회 의장을 지냈으며, 해방 뒤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투르 대회의 코민테른 가입을 이끌고 프랑스 공산당 초대 서기장이 되었다가 1923년 떠난 정치가
1920년 투르 대회에서 코민테른 가입을 이끌어 프랑스 공산당 초대 서기장이 되었으나, 1923년 탈당했다. 이후 장관을 지냈고 1940년 페탱 내각에서 정전협정에 참여하고 전후 부역 혐의로 재판받아 무죄가 되었다.
벨포르 지방 출신의 교사로 SFIO에 들어가 1918년 당 사무총장이 되었다. 1920년 카섕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한 뒤 투르 대회에서 코민테른 가입을 지지했고, 새로 선 프랑스 공산당의 초대 서기장이 되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규율 요구와 충돌해 1923년 1월 당을 떠나 SFIO로 돌아갔다. 1930년대 여러 내각에서 장관을 지냈고, 1940년 6~7월 페탱의 첫 내각에 들어갔으나 비시 정부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전후 부역 혐의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다.
1945년 1월, 후퇴 명령이 내려졌지만 장군은 상징적 도시 스트라스부르의 수성을 명령해 드골의 지시를 '완벽한 수렴'으로 하루 먼저 앞질렀다.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는 제1차 세계대전과 모로코 전쟁을 거친 프랑스 직업군인으로, 1940년 패전 속에서도 사단의 결속을 지킨 지휘관이다. 비시 정권 아래 복무했지만 1942년 독일군의 남부 프랑스 점령에 맞서라는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고, 투옥과 탈출 뒤 자유 프랑스에 합류했다. 육군 B와 프랑스 제1군을 지휘하며 프로방스 상륙 이후 툴롱과 마르세유를 해방하고 라인강과 다뉴브강까지 진격했으며, 1945년 베를린 항복식에서 프랑스를 대표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식민전쟁을 지휘하던 중 암으로 사망했고 사후 프랑스 원수로 추서되었다.
1946년 6월 1일, 호찌민이 프랑스에서 협상 중일 때 코친차이나 임시정부를 일방 선포해 베트남민주공화국과의 충돌을 격화했다.
브레스트 출신의 해군 장교로 1차 대전 뒤 카르멜회 수도사가 되었다가, 2차 대전 때 해군으로 돌아와 드골의 자유 프랑스 해군을 이끌었다. 1945년 10월 31일 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으로 부임해 식민 행정의 복구를 맡았다. 1946년 베트민 지도부가 프랑스에서 협상하는 동안, 3월 6일 호–생트니 협정을 어기고 코친차이나 자치 공화국을 세워 사실상 전쟁을 시작하게 했다. 하이퐁 포격 등 강경책을 이끌다 1947년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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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카르멜회에 입회해 수도사가 되었다.
1940드골 휘하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했다.
1945드골에 의해 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으로 지명되었고, 10월 31일 현지에 도착했다.
19466월 1일 코친차이나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11월 랑선과 하이퐁의 무력 장악을 지지했다.
죽기 직전 블룸에게 남긴 유서: "그들이 나를 망신시킬 수 없었다면, 적어도 내 죽음의 책임은 지게 될 것이다. 나는 탈영병도, 배신자도 아니다."
릴 시장 출신의 사회당 정치인으로 블룸 내각의 내무장관. 1936년 6월 파업 국면에서 점거 공장에 대한 강제 해산을 거부했고, 인민전선 강령의 첫 항목이던 극우 동맹 해산을 집행했다. 극우 주간지 『그랭구아르』가 1차 대전 중 탈영했다는 날조 기사를 퍼붓자 군 명예심사와 하원의 압도적 표결이 거듭 무고를 확인했지만 캠페인은 멈추지 않았고, 그는 11월 17일 릴의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례에는 수십만이 모였고, 그의 죽음은 언론의 명예훼손을 규제하는 입법 논의를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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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1914릴의 사회주의 학생운동, 당 기관지 기자
1914–1918전우의 시신을 수습하러 나갔다 포로가 되어 독일 수용소 억류
1925–1936릴 시장
1928–1936하원의원, 사회당 노르 연맹 지도자
1936.06내무장관, 점거 공장 강제 해산 거부와 극우 동맹 해산 집행
1936.07–11『그랭구아르』의 탈영 날조 캠페인, 군 심사와 하원 표결로 거듭 무고 확인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군인·저항 지도자·정치가로, 1940년 패전 뒤에도 전쟁을 계속할 프랑스의 대표성을 자임했다.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를 조직해 비시 정권의 정통성 주장에 맞섰고, 해방 뒤에는 임시정부를 이끌며 국가 재건의 방향을 둘러싼 갈등을 드러냈다. 그는 강한 행정부와 국가적 자율성을 중시해 제5공화국을 세웠지만, 개인 권력과 식민지 전쟁을 둘러싼 긴장도 남겼다.
“삶은 값비싸지 않으며, 죽음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명예와 이상에 맞게 사는 것이다.”
베르티 알브레히트는 여성해방과 반파시즘을 결합한 프랑스의 활동가로, 피임과 낙태의 권리를 주장하며 여성주의 잡지를 만들었다. 나치즘의 위험을 일찍 경고하고 독일인 망명자를 도운 일은 앙리 프르네와의 협력, 그리고 지하 저항운동 콩바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Les Petites Ailes와 Vérités의 제작을 맡고 콩바의 사회사업을 조직하며 체포와 투옥, 탈출 뒤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고문받은 뒤 프레즈네 감옥에서 숨졌고, 사후 해방의 동료로 추서되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파업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 『르 포퓔레르』 1면에 실은 기고의 제목이자 결론, 1936년 5월 27일
교사 출신의 사회당(SFIO) 좌파 지도자. 1935년 당내 분파 「혁명적 좌익」을 결성해 인민전선을 지지하되 그 너머의 혁명적 출구를 주장했고, 1936년 5월 파업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 『르 포퓔레르』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를 실어 논쟁의 한복판에 섰다. 블룸 총리실의 공보 업무를 맡으면서도 급진화를 멈추지 않았고, 1938년 당에서 제명되자 노동자농민사회당(PSOP)을 세웠다. 전쟁 중 멕시코에 망명했고, 전후 SFIO에 복귀해 죽을 때까지 당내 좌파와 반식민주의 진영에 섰다.
「기회주의, 합법주의, 의회 환상이 있었다… 우리가 당 앞에서 용기 있게 이 자기비판을 수행한다면 대중 사이에 투쟁에 유리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20구 파리에서 레옹 블룸을 꺾고 국회의원이 된 이후 37년간 프랑스 공산당 지도부에서 모리스 토레즈의 2인자로 활동한 정치인. 제2차 세계대전 중 점령 하 프랑스에서 지하당을 지휘했으며, 전후 국민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1947년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PCF의 참여 정부 노선을 '의회 환상'이었다고 자인하며 마셜 플랜에 대한 투쟁적 반대로의 전환을 상징했다. 1969년 대통령 선거에서 21.3%를 득표, 프랑스 공산당 사상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금속노동자와 노동조합 활동가로 출발한 샤를 티용은 1919년 해군 mutiny에 참여한 뒤 프랑스 공산당과 CGTU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는 1940년 독일 점령에 맞선 민족해방과 노동계급의 단결을 호소했고, 1941년부터 공산주의 무장조직을 통합해 프랑스 유격대·의용군(FTP)을 이끌었다. 해방 뒤에는 장관과 의원으로 국가 재건에 참여했지만, 당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1952년 권력에서 밀려났고 1970년 공산당에서 제명됐다.
1934년 4월 그는 코민테른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사회당과의 즉각적 공동행동을 요구했다. 6월에 제명되었고, 7월에 당은 그가 요구한 바로 그 협정에 서명했다
생드니의 금속노동자 출신으로 스물여섯에 하원의원이 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까지 오른 프랑스공산당의 젊은 지도자. 리프 전쟁 반대 선동으로 투옥되었고 1927년에는 코민테른 특사로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1931년부터 생드니 시장을 지냈다. 1934년 2월의 위기 직후 그는 당론에 앞서 사회당과의 즉각적 공동행동을 공개로 요구했고, 모스크바의 소환을 거부해 6월 27일 제명되었다. 한 달 뒤 당은 그가 요구한 것과 같은 통일행동협정에 서명했지만 그는 이미 밖에 있었다. 1936년 프랑스인민당(PPF)을 세워 파시즘 쪽으로 옮겨 갔고, 1941년 반볼셰비키 프랑스의용군단에 참여해 독일군복을 입고 동부전선에서 싸웠으며, 1945년 2월 독일에서 연합군 항공기의 기총소사를 맞고 죽었다.
프랑스 극동원정군의 마지막 사령관으로 디엔비엔푸 요새화를 결정해 1954년 패배를 맞은 장군
1953년 11월 디엔비엔푸에 프랑스군을 투입하고 요새화를 명령한 나바르는 1954년 3월 시작된 포위전에서 철수를 명하지 않았으며, 5월 요새가 함락되어 프랑스의 협상 입지가 무너졌다.
1차·2차 세계대전을 치른 프랑스 육군 장군으로, 1953년 5월 살랑의 뒤를 이어 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부임 직후 본국 정부에 이 전쟁은 이길 수 없고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은 교착이라고 보고했다. 도시와 주요 도로를 지키며 베트민을 협상으로 몰아넣는다는 「나바르 계획」에 따라, 라오스로 가는 베트민의 길목을 막으려 1953년 11월 디엔비엔푸에 낙하산 부대를 내려 요새를 세웠다. 1954년 5월 요새가 함락되면서 프랑스의 패배가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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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1918생시르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제1차 세계대전 전선에서 기병 소대장으로 복무했다.
1942–1945독일에 맞선 활동으로 소환되자 지하로 들어가 프랑스 저항운동에 참여했고, 프랑스 해방전에서 제1군 기갑연대를 지휘했다.
1945–1953준장이 되어 독일에서 복무했으며 제5기갑사단장과 알퐁스 쥐앵 원수 참모장을 지냈다. 1948~1949년에는 알제리에서 사단을 지휘했다.
1953–1954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사령관으로서 디엔비엔푸 전투를 지휘했으며, 요새 함락 뒤 교체되었다.
장 물랭은 프랑스의 고위 관료이자 공화주의자로, 나치 점령에 맞선 국내 레지스탕스를 자유 프랑스와 연결한 조직가였다. 그는 샤를 드골의 위임을 받아 경쟁하던 저항운동들을 조정하고, 정치세력과 노동조합까지 포괄하는 국민저항위원회를 세웠다. 그의 통합 작업은 독립성을 지키려는 여러 세력의 긴장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1943년 체포와 고문으로 중단되었다.
레지스탕스 의장에서 마셜 플랜의 설계자까지, 몰로토프에게 유럽 분열이 소련 탓이라고 응수한 외무장관
1947년 7월 2일 파리 3국 회담 마지막 세션, 몰로토프가 마셜 플랜을 '유럽을 둘로 가르는 음모'라고 비난하자 비도는 '유럽을 분열시키는 것은 바로 소련의 행동'이라고 조용히 응수했고, 이튿날 베빈과 함께 16개국 초청장을 발송했다.
1943년 장 물랭 체포 후 국민저항위원회(CNR) 의장직을 이어받아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해방 후 기독교민주주의 정당 인민공화운동(MRP)을 창당했다. 외무장관으로서 1947년 파리 3국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유럽 분열' 비난에 맞서 소련의 행동이야말로 유럽을 가르고 있다고 정면 반박했고, 소련 이탈 후 영국과 함께 서유럽 16개국을 규합해 마셜 플랜 수용을 주도했다. 1946년과 1949년 두 차례 총리를 지냈으며 디엔비엔푸 포위 당시 미국에 원자폭탄 지원을 요청할 만큼 식민지 전쟁에 매달렸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하며 1962년 비밀리에 '제2의 CNR'을 조직했다가 면책특권을 박탈당하고 브라질로 망명, 1968년 사면으로 귀국했으나 영향력은 회복하지 못했다.
살랑은 1952~1953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한 뒤 알제리 주재 프랑스 정부 대표를 맡았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해 1961년 4월 장군들의 쿠데타에 가담하고, 실패 뒤 지하로 들어가 프랑스령 알제리의 유지를 주장하는 비밀 무장조직 OAS를 창설·지휘했다. OAS는 알제리와 프랑스에서 테러와 폭력을 벌였다. 1962년 체포되어 종신 구금형을 받았으며, 1968년 사면·복권되었다.
「우리의 단순하고 인간적인 목표는 프랑스의 청년 대중이 스포츠에서 기쁨과 건강을 찾게 하고, 노동자들의 여가를 조직해 그들이 되찾은 삶의 기쁨과 존엄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차관 취임 라디오 연설, 1936년 6월 10일
변호사 출신의 사회당 하원의원으로, 블룸 정부가 세계 최초로 만든 여가·스포츠 담당 차관직을 맡았다. 국철 40% 할인 「인민 티켓」과 유스호스텔 확충, 대중 스포츠 자격증으로 1936년 여름 60만 명의 생애 첫 유급휴가를 조직했고, 여가 정책을 노동자에게 존엄을 돌려주는 일로 정의했다. 1939년 동원을 자원해 1940년 6월 9일 엔 강 전선에서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오늘날 프랑스 전역의 수천 개 경기장과 체육관이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1941년 쿠프라에서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프랑스 국기가 휘날릴 때까지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고 서약하게 했다.
필리프 르클레르 드 오트클로크는 1940년 패전 뒤 드골의 자유 프랑스에 합류해 식민지 군대와 망명군을 하나의 전투력으로 묶은 프랑스 장군이다. 그는 쿠프라에서 스트라스부르까지 이어지는 목표를 제시했고, 아프리카 전역에서 단련한 기동전을 제2기갑사단에 이식했다. 1944년 8월에는 연합군의 파리 우회 구상에 맞서 수도로 진격해 프랑스군과 레지스탕스가 주도하는 해방을 실현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는 군사적 승리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했지만, 194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해 그 판단을 끝까지 펼치지 못했다.
뱅상 바디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급진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지방 행정과 의회에서 활동하며 참전군인과 공화국의 권리를 옹호했다. 1940년 7월 그는 헌법 개정 자체에는 열려 있었지만 페탱에게 권력을 넘겨 공화국을 없애는 데는 반대했고, 이를 밝힌 27인 동의안의 발의를 시도한 뒤 전권 부여에 반대표를 던졌다. 비시 당국의 시장직 정지 뒤 레지스탕스에 참여했으며 체포되어 다하우로 deport되었다. 전후에는 다시 의원과 참전군인 담당 장관을 지냈지만 식민 지배와 프랑스의 해외 주둔을 옹호하는 한계도 보였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해 패전 뒤 포로가 되었다. 석방 후 사단장과 기업 경영자를 거쳐 군에서 은퇴했다.
프랑스의 오랜 귀족 가문 출신 기병 장교로,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했다. 1953년 12월 디엔비엔푸 요새의 지휘를 맡았다. 1954년 3월 13일 베트민의 공격이 시작되어 비행장이 포격으로 부서지고 우기로 보급이 끊기자 요새는 3개 거점만 남았다. 5월 7일 하노이의 코니 장군은 백기를 들지 말고 사격을 멈춘 뒤 장비를 파괴하라고 명령했고, 카스트리는 요새 함락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제네바 협정 뒤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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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육군에 입대해 소뮈르 기병학교에서 수학했다.
1926기병 장교로 임관했다가 승마 스포츠를 위해 군을 떠났다.
1940–1945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군에 복귀해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다.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와 독일에서 연합군과 싸웠으며, 전쟁 말기에는 제3 모로코 스파히 기병대를 지휘했다.
1946인도차이나에 파견되어 모로코 구미에르 대대를 지휘했다.
1953–1954부상으로 프랑스에서 1년간 요양한 뒤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대령으로 디엔비엔푸 방어를 맡았고, 포위전 막바지에 준장으로 승진했다. 프랑스군은 1954년 5월 7일 패배했고, 그는 제네바 휴전 협정이 마련되는 동안 4개월간 포로로 억류됐다.
1954–1959귀국 후 서독 주둔 제5기갑사단을 지휘했다. 1959년 교통사고 뒤 군에서 은퇴했다.
앙리 프르네는 프랑스 육군 장교 출신으로, 1940년 패전 뒤 군사적 규율과 애국주의를 지하 저항의 조직 원리로 바꾼 인물이다. 그는 처음에는 페탱과 국민혁명이 프랑스를 구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지만, 비시의 협력과 억압을 겪으며 입장을 바꾸었다. 베르티 알브레히트와 함께 국민해방운동을 세우고 지하 신문을 확장해 콩바를 주요 저항운동으로 발전시켰으며, 전후에는 포로·강제이송자·난민의 귀환을 맡았다.
1946년 3월 6일 호찌민과 협정을 맺어 프랑스군이 하노이에 전투 없이 진입하도록 했다.
본명은 장 로제(Jean Roger)이며, 제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 정보망 ‘알리앙스’의 노르망디 책임자로 활동했다. 해방 후 프랑스 정부를 대표해 통킹·북부 안남의 공화국 위원으로 임명되어 호찌민과 협상했고, 1946년 3월 6일 협정으로 프랑스군의 하노이 진입을 전투 없이 이루게 했다.
디엔비엔푸 패전 뒤 넉 달 안의 휴전을 약속하고 총리가 되어 1954년 제네바 협정을 맺은 프랑스 정치가
1954년 총리가 된 피에르 망데스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제네바에서 베트민과 직접 협상해 7월 휴전 협정을 맺고, 튀니지 자치 협상도 시작했다.
급진당 소속의 유대계 변호사·경제 전문가로, 전쟁 중 자유 프랑스에 가담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찍부터 비판했고, 디엔비엔푸 함락 뒤인 1954년 6월 17일 넉 달 안에 휴전을 이루지 못하면 물러나겠다고 약속하고 총리가 되었다. 7월 21일 제네바 협정으로 약속을 지켰다. 여덟 달 재임하는 동안 튀니지 자치를 인정했고, 그해 11월 알제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과의 군사 협력과 프랑스 핵 개발의 토대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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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급진당 소속으로 유르주 로비에의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1938레옹 블룸 내각에서 재무차관을 지냈다.
1943–1945자유 프랑스에서 재정위원, 이어 국민경제장관을 맡았고, 긴축 정책을 둘러싸고 드골과 대립해 1945년 4월 사임했다.
1954–1955총리로 인도차이나 전쟁 종식을 협상하고 튀니지 자치 협상을 열었다. 유럽방위공동체 구상에 반대했으며 1955년 2월 내각 불신임으로 물러났다.
스탈린 사후에도 그는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1958년 소련 최고재판소는 사건 조작과 수감자 고문의 죄로 그에게 15년형을 선고했고, 그는 형기를 하루도 감형받지 못한 채 다 채우고 나왔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러시아화된 프랑스계 집안에서 태어나 1931년 OGPU에 들어갔다. 대숙청 시기 NKVD 심문관으로 외무인민위원 대리 크레스틴스키, 코민테른의 퍄트니츠키와 크노린, 에스토니아 공산당의 안벨트 등의 사건을 맡아 구타로 자백을 받아 냈다. 전시에는 작전부서를 지휘하며 투바·몽골·신장에 파견됐고 1945년 중장까지 올랐다. 1955년 해임되고 계급을 박탈당한 뒤 1957년 체포되어, 1958년 사건 조작과 수감자 고문의 죄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형기를 다 채우고 1972년 출소해 1990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복권되지 않았다.
앙리 롤탕기는 금속 노동자 출신의 프랑스 공산주의자이자 국제여단 참전자로, 스페인 내전과 반나치 레지스탕스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그는 1944년 8월 파리 지역 프랑스 국내군(FFI) 사령관으로서 동맹군이 입성하기 전에 봉기를 조직하고 지휘했다. 그의 활동은 노동운동의 조직 경험과 무장 저항을 결합해 수도 해방을 내부에서 추진한 사례였다. 전후에는 군과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레지스탕스의 독자적 역할을 공적으로 옹호했다.
1942년 7월 2일, 그는 독일 점령 당국의 유대인 체포에 프랑스 경찰을 투입하겠다고 동의했다.
르네 부스케는 프랑스의 고위 관료로, 비시 정권의 경찰 협력을 국가 주권의 외형과 결합해 추진했다. 그는 독일 보안기관과 협상해 프랑스 경찰을 동원할 자율성을 확보하는 한편, 유대인 박해와 추방을 실행하는 체계에 경찰력을 제공했다. 1942년 7월 벨디브 검거에서 그의 행정적 결정은 대규모 체포와 강제 이송을 가능하게 했으며, 해방 뒤에는 숙청을 피하고 금융·정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복귀했다.
'생산자가 자신의 실존 조건을 통제하려면 전적으로 새로운 사회관계가 발전되어야 한다' — 『경제계산과 소유형태』(1971)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CEMI를 설립해 소련 계획경제 연구를 개척했고, 나세르·네루·벤 벨라 정부의 경제 고문을 지냈다. 1963년 쿠바 '대논쟁'에서 체 게바라의 중앙집중화 노선에 맞서 분권적 시장요소를 옹호했으며, 마오쩌둥 사상에 경도되어 알튀세르와 함께 '경제주의'를 비판했다. 『소련에서의 계급투쟁』(1974-1982)에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했고, 1972년 르몽드는 그를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마르크스주의자'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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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공산청년동맹 가입 후 프랑스 공산당 입당
1936모스크바 5개월 체류, 대숙청 목격, PCF 제명
1944–1948노동부 관료, EPHE 연구주임
1950s이집트·인도·알제리 정부 경제 고문, 유엔 전문가로 인도 제2차 5개년 계획 참여
“이데올로기는 길에서 경찰이 ‘이봐 거기!’ 하고 부르면, 몸을 돌리는 바로 그 순간에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 —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마르크스의 저작에 '인식론적 절단'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SA)와 중층결정 개념을 통해 구조적 마르크스주의를 창시했다. ENS 철학 교수로서 데리다·푸코·부르디외·바디우 등 프랑스 지성계 한 세대를 가르쳤다. 스탈린주의의 이론적 공백을 메우려 했으나, 공산당과의 긴장과 정신질환 속에서도 전후 마르크스주의를 철학의 중심으로 밀어올렸다. 1980년 정신적 발작 속에서 아내를 살해한 비극은 그의 사상적 유산을 오래도록 덮었다.
피에르 조르주는 프랑스 공산주의자이자 레지스탕스 전사로,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으로 싸우며 일찍부터 반파시즘 무장투쟁을 경험했다. 1941년 8월 21일 파리 바르베 지하철역에서 알퐁스 모제르를 사살한 행동은 프랑스 공산당의 무장 저항을 가시화했지만, 독일 점령군의 인질 처형과 저항 세력에 대한 탄압도 격화시켰다. 그는 프레도, 뒤에는 파비앵 대령이라는 이름으로 지하 전투원과 마키를 조직했고, 파리 해방 뒤에는 파비앵 부대를 이끌고 동부 전선으로 향했다. 1944년 지뢰 폭발로 사망하면서, 그의 생애는 점령에 맞선 결단과 그에 뒤따른 가혹한 보복의 긴장을 함께 남겼다.
기 모케는 파리 출신의 프랑스 공산주의 청년 활동가로, 아버지의 투옥 뒤 지하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1940년 열여섯 살에 체포되어 프랑스 당국의 수감과 행정구금을 거쳤고, 1941년 샤토브리앙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독일 점령군은 낭트의 카를 호츠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그를 인질로 선정해 1941년 10월 22일 처형했으며, 그의 죽음은 점령과 협력 체제가 젊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부과한 대가를 상징했다.
피에르 브루에는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 역사가이자 교사운동 활동가로, 공산주의와 20세기 혁명운동의 역사를 연구했다. 에밀 테밈과 함께 쓴 『스페인의 혁명과 전쟁』은 1930년대 스페인에서 혁명 과정이 패배한 원인을 공화국 내부의 계급투쟁과 스탈린주의적 정책의 충돌 속에서 분석했다. 그는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문헌을 발굴하고 편집하며, 혁명적 실천과 역사 서술을 결합하려 했다.
2017년 휴스턴 공항에서, 점령기 기억을 연구해 온 이 역사가는 강연 수당을 문제 삼은 미 국경 당국에 10시간 구금되며 강제송환 직전까지 갔다.
앙리 루소는 제2차 세계대전기 프랑스와 비시 체제, 그리고 그 기억의 변화를 연구한 프랑스 역사가다. 이집트에서 태어난 유대계 가정이 수에즈 위기 뒤 프랑스로 이주한 경험은 그의 역사적 관심과도 맞닿아 있다. 대표작 《비시 증후군》은 해방 이후 프랑스 사회가 협력과 책임을 망각하거나 재구성해 온 과정을 분석했으며, 그는 레지스탕스의 규모와 국민적 단결을 과장하는 기억의 신화를 ‘레지스탕시알리슴’이라 불렀다. 그의 작업은 역사적 사실과 집단기억, 현재의 정치적 사용을 구별하면서도 서로의 관계를 추적하는 현대사 연구의 중요한 흐름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