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

François Christophe de Kellermann
프랑스 제1공화국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작센계) 1735–1820 ○ 파리에서 사망

발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한 장군, 제국 원수

1792년 9월 20일 발미에서 켈레르만은 뒤무리에의 요청으로 중부군을 이끌고 합류해 서쪽 구릉에 포병을 배치했다. 탄약 마차 폭발로 동요한 보병을 안정시키고 ‘Vive la Nation’을 외쳐 사기를 결집했으며 프로이센군은 철수했다.

1735년 5월 28일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난 프랑스 군인이다. 작센 출신 가문이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했고 조부 대에 귀족이 되었다. 1750년(또는 1752년) 왕립군에 입대해 7년 전쟁에 참전했고, 1788년 준장이 되어 구체제에서 장성이 된 유일한 제국 원수가 되었다. 1789년 혁명에 호의적이었고 1792년 9월 20일 발미 전투에서 중부군을 이끌어 프로이센군을 격퇴한 공로로 ‘발미의 승리자’로 불렸다. 1793년 11월 불충성 혐의로 13개월 수감되었다가 로베스피에르 몰락 후 석방·복직했다. 1804년 제국 원수, 1808년 발미 공작이 되었고 1814년 상원에서 나폴레옹 퇴위에 찬성한 뒤 루이 18세 치하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1820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다른 이름: 프랑수아 에티엔 크리스토프 켈레르만 ·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드 켈레르만 · 발미 공작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리옹 진압과 테러르 시기의 수감

1793년 8월 켈레르만은 알프스군을 이끌고 공회에 반대해 봉기한 리옹으로 향했다. 프랑스어 출처에 따르면 8월 6일 그는 2만 명을 이끌고 리옹으로 진격했고 8월 8일 도시가 폭격되었다. 그러나 그는 폭격을 계속하는 데 회의를 품고 중단을 결정했고, 파견된 임무 대표자들은 곧 그의 파면을 요구했다. 그는 도시가 항복한 뒤 곧바로 체포되어 파리로 압송되었다.

영문 출처들은 이 경위를 조금 다르게 정리한다. 8월에 그는 공화국에 반대하는 리옹을 포위하라는 명을 받아 도시를 탈환했고, 9월에 국민공회가 그의 지휘권을 해제했으나 현지 대표자들이 이를 유지시키다가 10월에 체포 명령이 내려졌다. 별도의 리옹 포위 항목은 이 작전을 1793년 8월 9일부터 10월 9일까지의 일로 잡고, 알프스군이 사보이 전역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참여했다고 서술한다. 어느 쪽이든 그는 리옹 항복 직후 파리의 아베이 감옥에 수감되어 테러르 기간 내내 구금되었다.

그는 약 13개월 동안 수감되었고 단두대를 모면했다. 프랑스어 출처는 그가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적고, 영문 보조 출처는 그의 재판이 다른 사건들에 밀려 계속 연기된 덕분에 처형을 피했다고 설명한다. 1794년 7월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한 뒤 그는 무죄 판결을 받고 복직했다. 이 수감과 복권은 혁명 정부가 공화국을 지킨 장군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이며, 한때 발미의 승리자였던 인물이 1년 남짓 감옥에 갇혀 있던 사실은 테러르 시기 군 지휘부의 불안정한 처지를 드러낸다. 출처들은 수감 기간과 무죄 판결이라는 핵심 사실에서 일치하되, 체포의 발단이 된 처분과 시점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지점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