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과 볼셰비키 지도부를 왼쪽에서 비판한 사람들입니다. 좌파 사회혁명당, 당내 분파(좌익공산주의자·민주집중파·노동자 반대파·좌익반대파), 크론시타트 반란, 그리고 뒤 시대의 트로츠키주의와 레닌주의 복귀 요구까지 이어집니다. 조직으로서의 각 분파와 그 구성원은 기능·활동 페이지의 국가·세력 필터에서 따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불행은 책임 있는 자리를 맡았고, 권력이 우리 머리를 돌게 했다는 데 있다」, 1938년 모스크바 재판 최후 진술
불가리아 민족 출신으로 루마니아 시민권을 지닌 범유럽적 혁명가였고, 발칸 사회민주주의 연맹을 창설했다. 1919–1923년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지내며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국가를 세웠고, 주영·주프랑스 소비에트 대사를 지냈다. 스탈린의 민족 정책과 당 관료화를 비판한 좌익 반대파의 이론가로 1927년 제명되었고, 1934년 스탈린에게 오류를 인정하고 1935년 복당했다.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20년형을 선고받고 1941년 9월 11일 오룔에서 총살되었으며, 1988년 2월 4일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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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1896제네바·베를린·몽펠리에에서 의학 수학, 유럽 사회주의 운동 참여
1910루마니아 사회민주당 재건 및 발칸 사회민주주의 연맹 창설 주도, 제1서기
1919–1923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 의장 겸 외무·내무인민위원
1919–1927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 1919–1920년 조직국 위원
1923–1927소비에트 연방 주영·주프랑스 전권대표
1927–1935좌익 반대파 지도자로 당 제명 및 유배 (아스트라한·사라토프·바르나울)
1934–19371934년 스탈린에게 오류 인정, 1935년 11월 복당, 보건인민위원부 학술연구소 관리국장
1937–19411936년 재제명, 1937년 1월 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20년형, 1941년 9월 11일 오룔에서 총살
2월 28일,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들은 카유로프는 병사들 앞에서 "동지들이여, 한 지주를 다른 지주로 바꾸기 위해 사흘 동안 페트로그라드 거리에서 노동자의 피가 흘렀단 말인가?"라고 외쳤다.
1898년 입당한 금속노동자 출신 볼셰비키로, 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 구당에서 활동하며 1917년 2월 23일 여성 방직 노동자들의 국제 여성의 날 파업을 당 위원회의 신중론을 뒤집고 혁명적 총파업으로 전환시켰다. 2월 27일에는 무장분견대를 이끌고 무기고를 습격해 소총을 확보하고 감옥을 열어 수감된 혁명가들을 해방시켰으며 경찰서를 공격했다. 혁명 후 5군 정치부장을 거쳐 경제 행정에서 일했고, 1932년 아들과 함께 류틴의 강령을 받든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을 결성하여 스탈린에 공개적으로 맞섰다가 1936년 카자흐스탄 유형지에서 죽었다.
러시아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러시아어 표기도 이쪽은 Эльцин, 대통령은 Ельцин으로 다르다.
1876년 키예프현 즈베니고로드카에서 태어났다(1875년으로 적은 자료도 있다). 1897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갔고 이듬해 오데사의 노보로시야대학 의학부를 마친 의사였다. 1910년 혁명 활동으로 우파현에 유배되어 벨레베이에서 위생의사로 일하며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혁명 후 지역 소비에트와 여러 위원회에서 일했고, 1923년부터 좌익반대파에 속해 46인 선언에 서명했다. 1927년 당에서 제명되어 이듬해 초 우스티-뷔미로 유배되었고, 1929년에는 수즈달 정치격리소에 수용되었다. 1936년 다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으며, 같은 해 마가단에서 정치범 단식투쟁을 조직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1937년 처형되었고 1956년 11월 23일 복권되었다. 아들 빅토르 보리소비치 엘친도 반대파로 활동했다.
1928년 6월 6일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트로츠키에게 보낸 편지: "고백서를 쓰느니 차라리 사지를 찢기는 편을 택하겠다. 나 홀로 남는다 해도 쓰지 않을 것이다."
농장 그레체스키에 로티에서 태어나 17세에 농업학교로 떠났고, 1903년 포돌스크에서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에 참여한 뒤 초대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고, 내전기에는 동부전선과 제12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을 지냈다. 1923년 46인 성명에 서명해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7년 제15차 당대회에서 옹호 연설을 한 뒤 제명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으며, 1924년에는 레닌 묘역의 1번 초소를 창설했다. 1936년 4월 17일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체포되어 1937년 1월 30일 사형을 선고받고 2월 1일 처형되었으며, 1986년 4월 대법원이 판결을 취소하고 사후 복권했다.
「나를 총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사지를 찢겨야 한다! 11군을 이곳으로 끌어들인 것은 나였다. 나는 내 민족을 배신했고, 스탈린과 베리야라는 이 변종들이 그루지야를 노예로 만들고 레닌의 당을 무릎 꿇리는 것을 도왔다」 — 1937년 NKVD 재판에서
그루지야 귀족 출신으로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캅카스 혁명운동과 내전에서 활동했다. 1922년 그루지야 소비에트 인민위원회 의장으로서 스탈린의 '자치화' 계획에 반대하며 그루지야 공화국의 연방 내 주권을 주장했고, 이 갈등은 레닌이 스탈린과 오르조니키제를 비판하며 므디바니 측을 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3년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8년 출당·유배 후 복당했으나 대숙청 와중인 1937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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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캅카스에서 혁명활동
1918–1919제11군 혁명군사위원회 위원
1920북페르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 임무 수행
1921주터키 RSFSR 전권대표, 그루지야 혁명위원회 의장
1922그루지야 소비에트 인민위원회 의장, 자캅카스 연방 동의회 의장 — '그루지야 사건'에서 스탈린에 반대
레닌은 로스메르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다섯 가지나 여섯 가지 언어로 침묵을 지키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 필리프 로브리외, 『프랑스 공산당 내부사』에서 인용
미국 태생의 프랑스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이자 코민테른 지도부 핵심 인물.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라 비 우브리에르》를 발행하며 반전 국제주의 운동을 조직했고, 모스크바에서 17개월간 체류하며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을 주도했다. 프랑스 공산당 정치국원으로 활약하다 1924년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좌익반대파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투신했으며, 1938년 자신의 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만년에는 알제리 전쟁 반대 선언에 서명했고 회고록 『레닌의 모스크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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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914CGT 기관지 《라 비 우브리에르》 편집 —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혁명적 생디칼리슴 운동 주도
1915–1918반전 국제주의자로 치머발트 회의 프랑스 참가 조직 — 전쟁 내내 반전 활동 지속
1919–1920제3인터내셔널 가맹위원회 활동 — 모스크바 파견, 17개월 체류하며 코민테른 집행위원 선출
1921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대회 주도 — 로조프스키·톰 만과 함께 임시평의회 간부
1922–1924프랑스 공산당(PCF) 정치국원 겸 《뤼마니테》 사무총장 — 당내 좌파 지도부 핵심
1924.10트로츠키 반대 운동에 반발하여 수바린·모나트와 함께 PCF에서 제명
1929–1931프랑스 최초 트로츠키주의 조직 공산주의자동맹 결성 참여 — 전술적 차이로 1931년 탈퇴
1938.9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 개최 — GPU의 암살 위협 속 비밀 진행
1939멕시코 방문 — 트로츠키와의 우정 회복, 듀이위원회 참여, 트로츠키 손자 시에바의 후견인
1917년 10월 25일, 페트로그라드의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멘셰비키와 우파 사회혁명당 대의원들이 볼셰비키의 무장봉기에 항의해 퇴장하자, 트로츠키는 의장석에서 선언했다. 「이제 가야 할 곳으로 가시오,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1879년 11월 7일(구력 10월 26일) 러시아 제국 헤르손 주 야노프카의 유대인 농업가정에서 태어났다. 1917년 2월 혁명 후 볼셰비키에 합류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10월 봉기를 이끌었고, 외무인민위원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를 조인한 뒤 1918~1925년 군사·해군 인민위원으로 적군을 건설해 내전에서 승리했다. 1923년부터 좌익반대파를 이끌었으나 스탈린에게 밀려 1927년 출당, 1928년 알마아타 유형, 1929년 국외 추방, 1932년 시민권 박탈을 겪었다. 망명지에서 《배반당한 혁명》(1936)으로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규정하고 1938년 제4인터내셔널을 결성했다. 1940년 멕시코시티에서 NKVD 요원에게 살해되었다.
짜르 장교에서 붉은 사령관으로: 키예프를 점령하고 브레스트 조약에 반대해 봉기한 좌파 에스에르
키예프 점령 후 레닌에게: "포병대에 고층 건물과 부유한 궁전, 교회와 사제들을 향해 포격하라고 명령했다."
러시아 제국군에서 복무한 농민 출신 장교로, 1917년 좌파 사회혁명당에 합류하여 10월 혁명 당시 페트로그라드 방어를 지휘했다. 1918년 초 키예프를 점령해 우크라이나에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고 루마니아 전선에서 베사라비아 방어 작전을 이끌며 적군의 주요 군사 지휘관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1918년 7월 동부전선 사령관으로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대해 봉기, '독일과의 전쟁 재개'를 선언했다가 심비르스크에서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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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1917러시아 제국군 복무; 러일전쟁·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령까지 진급
1917.10–11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케렌스키-크라스노프 군대 방어 지휘
1917.12–1918.2남부혁명전선 참모장, 키예프 점령 작전 지휘
1918.2–3루마니아 전선 사령관, 베사라비아 방어 및 오데사 소비에트 공화국 지휘
1918.6–7동부전선 사령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반대 봉기 후 심비르스크에서 사살
1927년 인민위원직에서 물러난 스미르노프는 무일푼으로 노동교환소에 실업 등록을 하러 갔다. 서류의 '마지막 직위'란에 '우편·전신 인민위원'이라고 적자, 창구의 하급 관리가 눈앞에 서 있는 이 백발의 고매한 거한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1899년 RSDLP에 입당한 볼셰비키로, 일곱 차례 체포와 유배를 겪으며 혁명운동에 헌신했다. 내전기 우랄·시베리아의 당 조직가이자 시브레프콤 의장으로 콜차크 백군 분쇄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1920년대에는 좌익 반대파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다. 1927년 제명 후에도 1931년부터 비밀 반대파 조직을 이끌며 베를린을 통해 트로츠키와 연락을 재개했고, 1933년 체포되어 1936년 첫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프로샨은 1918년 7월까지 소비에트 권력을 강화하는 데, 1918년 7월 이후 그것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 레닌, 〈프로샨 동지를 기리며〉, 1918년 12월
좌파 사회혁명당의 핵심 지도자이자 소비에트 최초 연립정부의 우편전신인민위원으로, 레닌·트로츠키·스탈린과 함께 인민위원회 임시집행위원회 위원(1918년 2월)을 지냈다. 인민위원 재임(1917.12–1918.3) 중 우편전신 공무원들의 사보타주를 종식시키고 통신 업무를 정상화했으며, 최고군사회의 정치위원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을 겸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에 항의해 사임한 후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봉기의 지도부로 활동했고, 지하 잠복 중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마리야 스피리도노바는 그를 '좌파 사회혁명당의 내적 건설자, 기본 동력, 핵심 축'이라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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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오데사 대학에서 에스에르당 입당, 학생 조직가로 활동
1905오데사 교도소 정치범 탈옥 기도로 체포, 6년 카토르가 선고
1910–1913유형지 탈출 후 체포되어 3년 추가 카토르가; 시베리아 유형 중 해외 탈출
19172월 혁명 후 귀국; 헬싱포르스에서 좌파 에스에르 지도자, 《사회주의-혁명가》 편집장;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선출
사형장으로 향하며 동료들에게 외투와 구두를 벗어 건넸다. 유리 톰스키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안토노프-옵세옌코는 볼셰비키였고 끝까지 볼셰비키로 남았다고 전해 달라」고 말했다. 21년 전 그는 겨울궁전에서 임시정부를 체포했던 사나이였다.
체르니고프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1년 혁명운동에 투신했다. 1917년 10월 군사혁명위원회 비서로서 포드보이스키·추드노프스키와 함께 겨울궁전 접수 작전을 준비하고 임시정부 체포를 집행했다. 내전기 남부·우크라이나 전선을 지휘했고, 1921년 탐보프 농민봉기 진압 전권위원회 의장으로서 유독가스 사용 결정에 서명했다. 1922년 적군 정치총국장을 지내다 트로츠키를 옹호한 끝에 1924년 1월 해임되었고, 외교관으로 전환해 체코슬로바키아·리투아니아·폴란드 전권대표를 지냈다. 1937년 러시아 SFSR 사법인민위원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체포되어 1938년 2월 10일 총살되었다. 1956년 2월 25일 복권되었다.
1917년 10월 24일 저녁, 라셰비치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벨리셰프를 통해 순양함 아브로라 호에 명령을 내려 전날 사관생도들이 끊어 놓은 니콜라예프스키 다리를 복구하게 했고, 이 임무는 완수되었다.
1884년 러시아 제국 오데사의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901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03년부터 볼셰비키였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에서 10월 봉기에 참여했고 내전기에는 제3군 사령관과 동부·남부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을 지냈다. 1925년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전쟁·해군 제1부인민위원에 올랐으나 1926년 통합 반대파 가담 뒤 강등되어 1926~1928년 하얼빈 중동철도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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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5RSDLP 입당, 오데사·니콜라예프·예카테리노슬라프·페테르부르크에서 당 활동, 반복적 체포와 유배
1915–17제1차 세계대전 징집, 두 번 부상, 공로로 상급 하사관 진급
1917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볼셰비키 분파 서기·의장,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봉기 지휘
1918–20제3군 사령관, 동부·남부·서부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제7군 사령관 대행
1922–25시베리아 혁명위원회 의장, 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
1925–26소련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전쟁·해군 제1부인민위원
1926–27통합 반대파 가담, 불법 집회 조직, 중앙위 후보위원 해임, 15차 당대회 출당
"나는 심장이 찢어질 듯한 고통 때문에 이 결행을 맡았다... 루제놉스키 이후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을 들으며 사는 것이 부끄럽고 괴로웠다." — 1906년 재판에서의 진술
러시아 혁명운동의 대표적 여성 지도자. 탐보프의 하급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1902년 체육관을 중퇴했다. 1906년 농민 탄압을 주도한 탐보프 부지사 고문 루제놉스키를 암살해 전국적 민중 영웅이 되었고, 사형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네르친스크 카토르가로 보내졌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석방되어 좌파 사회혁명당의 지도자로 부상, 전러시아 농민대회 의장을 맡았고 볼셰비키의 지지로 제헌의회 의장 후보로 추대되었다. 1918년 볼셰비키와 결별하고 좌파 에스에르 봉기에 가담한 뒤 수십 년간 투옥과 유배를 겪었다. 1937년 우파에서 다시 체포되어 25년형을 선고받았고, 1941년 9월 11일 오룔 교외 메드베데프 숲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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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에스에르 당원, 전투분대 가입
1906탐보프 부지사 고문 루제놉스키 암살; 사형 선고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 네르친스크 카토르가
19172월 혁명으로 석방; 좌파 에스에르 지도자, 전러시아 농민대회 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1918.1볼셰비키 분파가 제헌의회 의장 후보로 추대 (153표, 체르노프 244표)
1918.7좌파 에스에르 봉기 가담, 체포; 1년형 선고 후 사면
1919–1930반복적 체포, 유배, 정신병원 감금; 1923년 해외 탈출 시도 실패
1937우파에서 체포, '에스에르 중앙' 조직 혐의로 25년형
1941오룔 교외 메드베데프 숲에서 총살; 사료는 9월 11일 이곳에서 157명의 정치범이 처형되었다고 기록한다
1937년 9월 10일 군사합의회에서 58조 테러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끝내 자백하지 않았고, 공범으로 누구도 지목하지 않았다. 당일 총살되었다.
모스크바 근교 빈농 가정 출신으로 열셋에 오부호프 공장 선반공이 된 볼셰비키 노동자였다. 1차대전 중 실랴프니코프와 함께 페트로그라드에서 당 중앙위 러시아국을 조직했고, 1917년 아친스크 소비에트를 결성했다. 내전 후 금속노동자조합 중앙위원으로 실랴프니코프와 '노동자 반대파'를 공동 지도하며 노동조합의 경제 통제와 당내 노동자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1922년 '22인 서한'에 서명해 코민테른에 당내 탄압을 호소했고, 1933년 출당 후 1937년 재판에서 끝내 자백을 거부하고 총살되었다.
1937년 9월 2일 군사합의회의 비공개 재판에서 테러 음모 혐의를 끝까지 부인하고 다른 사람도 끌어들이지 않았다. 제10차 당대회 강령이 옳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다른 야권과 달리 과거가 아니라 철저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요구했다고 진술했다.
무롬의 가난한 옛의식파 집안에서 태어난 숙련 선반공이었다. 1901년 RSDLP에 입당해 1903년 분열 뒤 볼셰비키로 섰고, 프랑스·독일·영국 공장을 전전하며 유럽 노동운동을 체득했다. 1917년 2월 혁명 때 수도에 있던 최고위 볼셰비키로서 당 중앙위원회 러시아국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0월혁명 후 초대 노동인민위원으로 8시간 노동제의 기초를 놓았고, 내전 말기 콜론타이와 함께 '노동자 반대파'를 이끌며 노동조합의 경제 통제를 주장했으나 1921년 제10차 당대회에서 패배했다. 외교직으로 밀려난 뒤 1933년 출당, 1935년 징역형을 거쳐 1937년 9월 2일 거짓 기소로 처형되었다. 1963년 사법적 복권, 1988년 당적 복권.
"스탈린과 모세의 차이를 아십니까? 모세는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지만, 스탈린 동지는 유대인들을 정치국에서 데리고 나왔지요." —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가 정치국에서 축출된 뒤 라데크가 바자노프에게 던진 농담.
폴란드계 유대인 출신으로 국제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을 오간 저널리스트·외교가였다. 레닌의 측근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과 코민테른 창립에 참여했고, 볼셰비키 중앙위원·코민테른 서기를 지냈다. 날카로운 논쟁과 비꼬는 유머로 이름난 좌익 반대파 지도자였으나, 1930년 공개 자아비판으로 복당했다. 대숙청 속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중심 피고로 법정에서 연극적 자백을 펼쳐 10년형을 받았고, 1939년 옥중에서 스탈린의 지시로 살해됐다.
빅토르 세르주의 회고: "회의 중에 언제든 쓰러져 잠들 것 같았지만, 두뇌는 여전히 맑고 통계치로 가득 차 있었다."
볼셰비키 경제 이론가이자 부하린과 함께 『공산주의 ABC』(1919)를 집필한 선전가로, 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내며 초기 소비에트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 1923년 '46인 선언'의 발기인이자 좌익 반대파의 핵심 논객으로서, 『새로운 경제학』(1926)에서 농민 부문의 잉여를 공업화 자본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사회주의적 원시축적'론을 정식화해 신경제정책 논쟁을 이끌었다. 1929년 스탈린 노선으로 복귀했으나 곧 집단화 폭력에 반대하며 다시 지하 조직을 결성했고, 1937년 처형됐다.
1920~1921년 노동반대파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산업의 집단적 관리와 노동자 권익을 옹호하다 10차 당대회에서 레닌 노선에 패배했고, 신경제정책과 당 관료화에 환멸하여 1924년 5월 7일 권총으로 자살했다.
1887년 예카테리노슬라프 현 루간스크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루간스크 탄약 공장의 금속 선반공으로 일했다. 1904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아르한겔스크와 야쿠츠크 현으로 유배되어 두 차례 탈출했으며, 1907~1910년 반동 시기에는 사회혁명당에 속했다가 볼셰비키로 돌아왔다. 1917년 3월 루간스크 볼셰비키 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8월 금속노동조합 이사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1월 전러시아 제헌의회 의원이 되었다. 1918년 3월 루간스크 지역 인민위원회를 이끌었고 도네츠-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인민위원회 부의장을 지냈으며, 이후 전러시아 노동조합중앙평의회 간부회 위원과 통신노동조합 의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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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1917루간스크 금속노동조합 의장, 루간스크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위원회 위원
1917.12도네츠-크리보이로크 지역 노동조합위원회 의장
1918.3루간스크 지역 인민위원회 의장
1918.4도네츠-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인민위원회 부의장
1918.7.12–10.17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
1919.1.25–1921.5.17전러시아 노동조합중앙평의회 간부회 위원
1919.12.10–1920.12.31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1921.1.5–12.29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1921–1922독일 주재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사회주의 공화국 통상대표부 차석 대표
1922.9.22–1924.5.7전러시아 노동조합중앙평의회 간부회 위원, 통신 노동자·직원 노동조합 중앙위원회 의장
1918년 2월, 모스크바 지역국 의장으로서 레닌의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 수용 방침에 반대하는 결의를 주도했다.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6년의 감옥 생활과 유형을 겪은 혁명가로, 1918년 모스크바 지역국 의장으로서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에 반대하는 좌파 공산주의자들을 이끌었다. 내전기 제5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과 우파 혁명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이후 민주집중파(데치스트)·46인 성명·통합반대파에 차례로 가담하며 10년 넘게 당내 좌익 노선을 일관했다. 1927년 제명·유배 후 복귀하여 재정인민위원부 경제조사국장으로 일했으나, 1936년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러시아 단독 사회주의는 '유럽 사회주의라는 간선도로에서 갈라져 나온 곁길이며 실패할 운명'이라고 보았다.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모스크바 법대생으로, 니콜라이 부하린·오신스키와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트리오를 이루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중포병을 지휘했고 1918년 초 RSFSR 상업·공업 인민위원을 지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대한 좌파 공산주의자로 물러난 뒤, 민주중앙집권파·46인 선언·통합 야당을 거치며 당내 민주주의를 일관되게 주장했다. 1921~1927년 고스플란 상임위원, 최고경제회의 금융위원회 의장, 노동국방회의 이사로 중앙계획 기구에서 활동했다. 러시아 단독 사회주의를 '유럽 사회주의의 곁길'로 보았고, 제명 후에는 '혁명과 볼셰비즘은 죽었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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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볼셰비키 입당
1909–1914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모스크바위원회 선동가
1914–1917러시아 제국군 포병 준위, 서부전선
1917모스크바 볼셰비키 신문 《소치알-데모크라트》 편집, 10월 봉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중포병 지휘
1918.02–1918.04RSFSR 상업·공업 인민위원
1918–1921좌파 공산주의자, '군사야당' 지도자, 최고경제회의(VSNKh) 근무
1920–1923민주중앙집권파('데치스트') 지도자
1921–1927고스플란 상임위원, 노동국방회의 이사, 최고경제회의 금융위원회 의장, 중앙통계국 이사
「나온 것은 토지의 사회화가 아니라 국유화에 관한 법률이었다」 — 볼셰비키가 수정한 토지법을 두고, 1918년 1월
좌파 사회혁명당 지도자이자 소비에트 최초 연립정부의 농업인민위원(1917.11–1918.3)으로, 이반 마요로프와 함께 토지 사회화 법안을 공동 입안하여 3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통과시켰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항의해 사임했으나 1918년 7월 좌파 에스에르 봉기를 거부하고 혁명적 공산주의자당을 창당했으며, 같은 해 11월 볼셰비키당에 입당했다. 혁명기 농업 개혁의 핵심 설계자로서 에스에르-볼셰비키 연정을 주도하다 내전기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한 독특한 정치 궤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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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사회혁명당 입당; 하리코프 대학에서 정치활동으로 제적
1909–1916해외 추방; 파리에서 수학하며 좌파 에스에르 그룹 참여
1917카잔 좌파 에스에르 지도자, 카잔 현 농민대표 소비에트 의장; 에스에르 중앙위원;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
「이런 경제를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노동계급 앞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공산주의 사상을 실추시키는 일이다」. 「소부르주아 독재의 아고니」, 1931년 12월 집필, 1932년 발표
툴라주 모스타우시카 마을의 러시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15세부터 도장공으로 일했고, 1905년 혁명 운동에 들어가 1912년 볼셰비키가 되었다. 10월 혁명 후 모스크바 주 집행위원회 의장, 하리코프 주 혁명위원회 의장, 최고경제회의 부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소인민위원회 의장 등을 지냈다. 1920년대 초 '민주중앙집권파'를 이끌며 당내 민주화를 요구했으나 1927년 제15차 당 대회에서 제명되어 유배되었고, 이후 좌익 반대파의 주요 이론가로 활동했다. 1931년 12월 「소부르주아 독재의 아고니」를 써서 소련 체제를 '기형적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했으며, 1937년 9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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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16모스크바에서 도장공 노동자 조직, 건설노조 결성
1917–1919모스크바 주 집행위원회 의장
1920하리코프 주 혁명위원회 및 집행위원회 의장
1920–1921'민주중앙집권파' 지도자, 당내 민주화 투쟁
1921–1923최고경제회의(VSNKh) 부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 서기
그의 성은 코가노비치(Коганович)이고 정치국원 라자르 카가노비치의 성은 카가노비치(Каганович)다. 46인 선언 명단의 이니셜 없는 "카가노비치"가 누구인지를 두고 혼동이 생기는 까닭이다.
코스트로마에서 태어나 1905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혁명 전까지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 1917년 코스트로마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에 참여했고, 내전기에는 식량 조달 계통에서 일했다. 1920년 4월부터 시베리아식량위원회 의장을 맡으면서 시베리아혁명위원회에 의결권을 가진 위원으로 참여했다. 1927년 좌익반대파에 가담해 83인 강령에 서명했다. 1937년 6월 20일 체포되어 1938년 3월 17일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처형되었으며, 1958년 7월 10일 복권되었다. 서명자에 주석을 붙인 46인 선언 판본들은 명단의 이니셜 없는 "카가노비치"를 그로 본다. 당시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이었던 라자르 카가노비치와는 다른 인물이다.
1918년 아이히호른 암살을 조직하고 소련 감옥과 유형으로 반평생을 보낸 좌파 사회혁명당원
1918년 키예프에서 보리스 돈스코이와 함께 독일 점령군 사령관 아이히호른 암살을 준비했고, 헤트만 스코로파츠키 암살 시도는 실패했다.
데카브리스트 표트르 카홉스키의 종손녀로, 1905년 이후 사회혁명당 최대강령파에 들어가 1908년 징역형을 받고 네르친스크에서 스피리도노바와 함께 복역했다. 10월 혁명 뒤 좌파 사회혁명당에 합류했다. 1918년 당이 브레스트 강화에 맞선 테러를 재개하자 보리스 돈스코이와 키예프에서 아이히호른 암살을 준비했고, 헤트만 스코로파츠키 암살은 실패했다. 독일 군법회의의 사형 선고 뒤 1919년 1월 풀려났다. 1921년부터 소련의 유형과 1937년 재판, 크라스노야르스크 수용소를 거쳐 1954년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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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14사회혁명당 최대강령파, 1907년 체포, 네르친스크 징역
1917–1918좌파 사회혁명당, 제2차 소비에트 대회 간부회 위원
1918–1919좌파 사회혁명당 전투조직, 아이히호른 암살 조직, 독일 감옥에서 사형 선고 뒤 석방
1926년 지노비예프파가 스탈린과 결별하자 좌익 반대파는 누구와 연합할지 고민했다. 므라치콥스키의 답은 단호했다: '아무와도 안 된다. 지노비예프는 도망치고, 스탈린은 속일 것이다.'
우랄의 볼셰비키 조직가이자 내전 영웅으로, 특수북부원정대를 지휘해 토볼스크를 점령하고 두 차례 적기훈장을 받았다. 이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바이칼-아무르 철도(BAM) 초대 건설 책임자가 되었다. 좌익 반대파의 핵심 인물로, '지노비예프는 도망치고 스탈린은 속일 것이다'라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으며 1936년 첫 모스크바 재판에서 처형되었다.
'열일곱인가. 많군.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다. 혁명은 무도회가 아니다.' — 미하일 로마노프 처형을 계획하며 쓴 회고록에서, 1918.
모토빌리하 금속노동자 출신의 러시아 혁명가. 1905년 볼셰비키에 합류, 1918년 페름 체카 부의장으로 미하일 대공 처형을 조직했다. 내전 후 당내 검열을 정면 비판하며 '군주제파에서 무정부주의자까지' 언론자유를 요구했고, 레닌의 직접 반박을 불러일으켜 '먀스니코프주의'로 불렸다. 1922년 제명 후 '노동자 그룹'을 결성, 프랑스 망명 중 『최근의 사기』에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했다. 1944년 귀국 후 체포돼 이듬해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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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06모토빌리하 병기공장 금속노동자, 사회혁명당 입당 후 RSDLP(볼셰비키)로 전향, 무장투쟁반 활동
1906–1917반복적 체포·탈옥·유형, 오룔 중앙감옥 복역 후 2월혁명으로 석방
1917–1918모토빌리하 소비에트 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 위원, 페름 체카 부의장
1937년 1월,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석에서. 독일 작가 리온 포이히트방어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중간 키에 중년, 약간 벗겨진 머리와 붉은빛이 도는 옛날식의 떨리는 뾰족 수염을 한 퍄타코프가 마이크 앞에 서서, 자기가 맡은 산업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조용하고도 공들여 이야기하는 모습을. 마치 대학 강사처럼 손가락을 뻗어 설명하며, 오래전에 죽은 '퍄타코프'라는 인물의 삶과 행적을 상세히 밝히려는 역사학자처럼, 청중이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납득하기를 바라는 한 가지 소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초대 수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민족자결권 문제에서 좌파 공산주의자로서 레닌과 맞섰고, 레닌이 '유언'에서 언급한 단 여섯 명의 볼셰비키 중 한 명이다. 좌익 반대파로 출당되었다가 복당 후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며,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주피고인으로 처형되었다.
페틀류라 세력에 체포되어 총살형을 선고받았으나, 마지막 순간 부상당한 채 탈출하여 붉은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은신했다.
야코프 드롭니스는 1906년 16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유대인 노동자 출신 혁명가로, 1918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창립에 참여하고 다섯 차례 중앙위원을 지냈다. 내전기에는 페틀류라와 데니킨에 맞서 파르티잔 부대를 조직했으며, 폴타바·오데사에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을 역임하고 1922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하며 좌익반대파에 가담했고 1927년 제명되었으며,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평행 반소비에트 트로츠키주의 중심' 사건의 피고로 사형당했다.
“그들은 자기 당의 심장을 추방한 셈이었다. 트로츠키가 진지한 젊은 활동가들을 모두 자기편으로 만들었고, 빈 껍데기만 남았다.” — 1937년 사회당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축출한 뒤
캔자스 출신의 아일랜드계 노동운동가로, 1919년 미국 공산당 창립에 참여하고 1922년 코민테른 상임간부회에 올랐다. 1928년 모스크바에서 트로츠키의 코민테른 비판문을 접하고 좌익반대파로 전환, 공산당에서 제명된 후 미국 공산주의자동맹을 창립했다. 1934년 미니애폴리스 트럭 운전사 총파업을 성공적으로 지도했고, 1938년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을 창당하여 초대 전국서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반대 활동으로 스미스법에 따라 18개월간 수감되었으며, 제4인터내셔널의 핵심 지도자로서 국제 트로츠키즘 운동을 이끌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한 뒤 제명과 유배, 정치격리소, 수용소를 거쳐 처형될 때까지 십오 년을 반대파로 살았다.
폴란드 벤그로프에서 태어나 1906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스타니스와프 코시오르의 동생으로, 형이 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이자 정치국원으로 올라가는 동안 그는 반대파의 길을 걸었다. 1919년 모스크바 금속노조 지도원, 1920년 제12군 혁명군사위원회 위원과 제14군 정치부 부부장을 지냈고,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전우크라이나 노동조합회의 의장, 1922년부터 1924년까지 노동조합 신문 『트루드』 주필을 맡았다. 1921년 민주중앙집권파에 속했고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한 뒤 좌익반대파로 활동했다. 1928년 5월 제명되어 볼가 독일인 자치공화국의 포크로프스크로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도 활동을 이어가 정치격리소 3년과 미누신스크 유배 5년을 받았다. 1936년 7월 수용소 5년형으로 우흐타-페치라크에 수감되었다가 1937년 12월 다시 체포되어 1938년 3월 30일 보르쿠타에서 처형되었다.
1927년 11월 7일 혁명 10주년, 크렘린 맞은편 자택에서 레닌·트로츠키·지노비예프의 초상화와 '레닌의 유언을 이행하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스탈린 지지자들이 난입해 파괴했고, 거리에서 구타당해 체포되었으나 그날 탈출했다.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 혁명가·경제가. 열네 살에 입당하여 1917년 24세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레닌의 핀란드 은신 시기 핵심 협력자였고, 10월혁명 당시 핀란드 주둔군을 페트로그라드로 수송했다. 내전기에는 동부·남부·서부·캅카스 전선의 혁명군사평의회 위원과 붉은군대 정치총국장을 지냈다. 좌익 반대파의 주요 지도자로 1927년 11월 마지막 공개 시위를 주도했고, 1930년 트로츠키주의 결별 선언 후 복권되었으나 이반 스미르노프의 지하 조직에 계속 가담했다. 1937년 1월 처형되었다.
1921년 3월 크론시타트. 페트리첸코가 이끄는 임시혁명위원회 기관지는 '여기 크론시타트에서 제3의 혁명의 첫 돌이 놓였다. 노동 대중의 마지막 족쇄를 끊고 새로운 길을 여는 혁명이다'라고 선언했다.
스테판 페트리첸코는 발트함대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의 상급 병기병으로, 1917년 12월 에스토니아 나이사르 섬에서 '소비에트 수병 및 요새건설자 공화국'을 선포하고 의장으로 활동했다. 1921년 3월에는 크론시타트 수병들의 볼셰비키 독재에 반대하는 무장봉기를 이끌며 임시혁명위원회 의장이 되어 '공산주의자 독재를 타도하라'는 요구를 내걸었다. 봉기 진압 후 핀란드로 망명했으나 1922년 소비에트 정보기관에 포섭되어 20년 넘게 비밀 요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핀란드에서 소련으로 송환되어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1947년 수용소 이송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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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발트함대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에 배속
1917.12–1918.2나이사르 섬에서 '소비에트 수병 및 요새건설자 공화국' 선포, 의장
1919볼셰비키당에 가입했으나 곧 재등록 과정에서 탈락
1921.3크론시타트 반란 임시혁명위원회 의장; 반란 진압 후 핀란드 망명
1922소비에트 정보기관에 포섭, 핀란드 주재 소련 비밀요원 활동 개시
1927–1937핀란드 케미 제지공장 노동자로 위장하며 첩보 활동 지속
1941핀란드 당국에 체포·구금
1945–1947소련 송환,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0년형 선고, 수용소 이송 중 사망
1918년 키예프에서 독일 원수 아이히호른을 폭탄으로 암살하고 교수형을 당한 좌파 사회혁명당 수병
좌파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원으로 우크라이나 독일 점령에 맞서 활동했고, 1918년 아이히호른 암살 뒤 독일 군사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교수형에 처해졌다.
랴잔현 농민 출신으로 열다섯 살에 페트로그라드로 나가 일했고, 1915년 발트 함대에 징집되었다. 1916년 좌파 사회혁명당에 들어가 수병 단식 투쟁을 조직하다 체포되었다. 2월 혁명으로 풀려나 크론시타트 집행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코르닐로프 반란 때 발트 수병 부대를 이끌었으며 10월 혁명 때는 이노 요새의 코미사르였다. 1918년 봄 이리나 카홉스카야와 함께 우크라이나로 가 독일 점령에 맞선 지하 조직을 꾸렸고 좌파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에 들어갔다. 7월 30일 키예프에서 폭탄을 던져 독일 원수 헤르만 폰 아이히호른을 죽였고, 독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8월 10일 공개 교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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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17발트 함대 수송선 아시아호 수병, 1916년 좌파 사회혁명당 가입
1917크론시타트 집행위원회 위원, 10월 혁명 때 이노 요새 코미사르
1918좌파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원, 7월 30일 키예프에서 아이히호른 암살, 8월 10일 교수형
코민테른 3대 지도기구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비볼셰비키. 그리고 최초의 스탈린 비판 전기 저자.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지 열흘 뒤인 1917년 11월 17일, 스물두 살의 수바린은 이렇게 썼다: "레닌과 그 동지들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볼셰비키와 그 지도자의 독재가 될 것이 두렵다. 이는 러시아 노동계급에게, 그리고 이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재앙이 될 수 있다. […] 우리가 바라는 것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합의로 안정된 권력을 조직하고, 그것이 한 인간의 권력이 아니라 진정한 인민의 권력이 되는 것이다." — 「최대강령파 코뮌」, 『세 푸아 디르』 제78호
코민테른 3대 지도기구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비볼셰비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1935년 최초의 스탈린 비판 전기를 출간, 소비에트학의 선구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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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프랑스군 동원 —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전선 참호전 경험
1916SFIO 입당, 반전 소수파 기관지 《Le Populaire》에서 활동 — '수바린' 필명 채택
1919제3인터내셔널 위원회 활동 — 코민테른 선전물 배포
1920.5'무정부주의 음모' 혐의로 체포 — 산테 교도소 수감 중 《Bulletin Communiste》 집필
1930년 제16차 당대회 연단에서 그는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연설을 마치자 강당은 침묵—박수는 터지지 않았다.
그루지야 출신 볼셰비키로, 코민테른 시절 중국 혁명에 깊이 개입했다. 1927년 8·7 긴급회의를 주재해 천두슈를 경질하고 마오쩌둥을 정치국으로 끌어올렸으며, 광저우 봉기를 승인했다. 중국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근거로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뛸 수 있다는 이론을 폈다. 1930년 시르초프와 함께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에 맞선 첫 당내 반대파를 결성했다가 좌천되었고, 1935년 체포 위협 속에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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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페트로그라드 군사조직에서 활동, 쿠타이시 당비서
1918–20트빌리시·바쿠 위원회, 아제르바이잔 당 중앙위 간부
1921–22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참여, 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구 당 조직자
1922–24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25–29코민테른 청년인터내셔널 서기, 1927년 중국 대표로 8·7 긴급회의 및 광저우 봉기 주도
「제국 대사를 쏜 사내가 군중 속에서 내게 다가와 내 손을 잡고 시에 대한 감사를 전했다」 — 니콜라이 구밀료프, 「나의 독자들」
오데사 출신 유대인 혁명가. 좌파 사회혁명당원으로 1918년 체카 소속일 당시 독일 대사 미르바흐 암살을 주도해 좌파 SR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사면 후 OGPU 해외첩보부(INO) 초기 비밀공작원으로 페르시아·팔레스타인·몽골·중동에서 불법 체류하며 소련 정보망을 구축했다. 모스크바 문학계에서 마야콥스키·예세닌 등과 교류한 논란적 인물로, 1929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트로츠키를 은밀히 만나 서신을 국내 반대파에 전달하려다 체포되어 OGPU에 의해 처형되었다.
중국 이민 노동자의 딸로 브린마에서 철학 박사를 받았으나 인종차별로 학계에 진출하지 못하고 노동자당에 입당했다. C.L.R. 제임스, 라야 두나옙스카야와 존슨-포레스트 경향의 3인 핵심으로서 소련 국가자본주의론과 『국가자본주의와 세계혁명』을 공저했고, 마르크스 『경제학-철학 수고』를 최초로 영역했다. 1953년 흑인 자동차 노동자 제임스 보그스와 결혼 후 디트로이트에 정착해 트로츠키주의와 결별하고 흑인해방 중심의 공동체 혁명 실천으로 전환, 90대까지 『다음 미국 혁명』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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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에서 중국 이민자 식당 주인의 딸로 출생, 중국명 위핑(玉平)
1935바너드 칼리지 졸업
1940브린마 칼리지에서 조지 허버트 미드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 취득
1940–1945시카고 대학 철학 도서관에서 저임금 사서로 근무, 세입자 권리 운동으로 노동자당 입당
1945–1947C.L.R. 제임스·두나옙스카야와 존슨-포레스트 경향 결성, 마르크스 『1844년 수고』 첫 영역
1947SWP에 합류, 필명 '리아 스톤'으로 존슨-포레스트 경향 저술 활동
1950제임스·두나옙스카야와 『국가자본주의와 세계혁명』 공동 저술
1951SWP 탈퇴, 코레스폰던스 출판위원회 결성 참여
1953흑인 자동차 노동자·정치 활동가 제임스 보그스와 결혼, 디트로이트로 이주
1962C.L.R. 제임스와 결별, 부부 독자 노선으로 코레스폰던스 이끌며 디트로이트 공동체 운동 집중
1950년, 한 줌의 지지자와 함께 《소셜리스트 리뷰》를 내면서 클리프 그룹이 내건 구호: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국제 사회주의를.」 냉전의 두 진영을 모두 거부하겠다는 선언이자, 이후 반세기 동안 이 조류를 규정한 문장이었다.
본명 이가엘 글룩슈타인. 팔레스타인의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 십대에 시온주의 좌파를 떠나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었고, 반전 활동으로 영국 위임통치 당국에 1년간 수감된 뒤 1947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1948년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성격」에서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며 제4인터내셔널의 정통과 갈라섰고, 이 분석 위에 서방과 소련의 군비 지출이 전후 호황을 떠받쳤다는 「상시 군비경제」론과, 부르주아지도 노동계급도 아닌 지식인·군부가 혁명을 대행한다는 「빗나간 연속혁명」론을 얹었다. 1950년 《소셜리스트 리뷰》 그룹에서 출발한 그의 조직은 국제사회주의자들(IS)을 거쳐 1977년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네 권짜리 『레닌』, 네 권짜리 『트로츠키』를 남겼고, 영국 시민권을 끝내 얻지 못해 평생 무국적자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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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오스만령 팔레스타인 지크론야코브에서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 가정의 이가엘 글룩슈타인으로 출생
1931–1933마파이 청년조직을 거쳐 포알레 시온으로, 시온주의 좌파 안에서 정치를 시작
1930년대 후반트로츠키주의·반시온주의로 전향, 팔레스타인의 소규모 트로츠키주의 그룹에서 활동
너지가 기록한 10월 31일 결의문에서 노동자평의회는 첫 조항으로 '공장은 노동자의 재산이다'라고 선언했다.
너지 벌라주는 헝가리의 혁명적 사회주의자이자 망명 저술가로, 1956년 혁명에서 노동자평의회가 국가기구와 당 관료제 바깥에서 독자적인 정치·경제 조직을 세운 과정을 기록했다. 그는 11월 4일 이후 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의 결성과 파업, 정부와의 협상을 다룬 당사자 기록을 남겼으며, 이 연구는 1961년 브뤼셀에서 프랑스어로 출판되었다. 그의 저술은 노동계급의 자기조직이 혁명의 패배 속에서도 대안적 정치 형태로 작동한 방식과 그 한계를 함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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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부다페스트 노동자평의회 운동 참여
1956.11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 형성과 저항 기록
1961브뤼셀에서 「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의 형성」 프랑스어판 출판
1964「International Socialism」에 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 기록 게재
피에르 브루에는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 역사가이자 교사운동 활동가로, 공산주의와 20세기 혁명운동의 역사를 연구했다. 에밀 테밈과 함께 쓴 『스페인의 혁명과 전쟁』은 1930년대 스페인에서 혁명 과정이 패배한 원인을 공화국 내부의 계급투쟁과 스탈린주의적 정책의 충돌 속에서 분석했다. 그는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문헌을 발굴하고 편집하며, 혁명적 실천과 역사 서술을 결합하려 했다.
처형 직전 아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강인하게 살아라. 그리고 인생은 아름답다는 것을 믿어라. 긍정적으로 살아라. 그리고 혁명은 언제나 승리한다는 것을 믿어라."
소련 해군 3등 대위이자 정치장교(잠폴리트)로, 1975년 11월 대잠호위함 스토로제보이호에서 반란을 주도했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부패와 정체를 비판하며 레닌주의 원칙으로의 복귀와 새로운 혁명을 촉구하는 방송을 송출하기 위해 함선을 리가에서 레닌그라드로 향하게 했으나, 소련 공군의 공습으로 진압되었다. 반란은 실패했고 사블린은 반역죄로 총살형에 처해졌으나, 훗날 톰 클랜시의 소설 《붉은 10월》에 영감을 준 이 사건은 체제 내부에서 제기된 가장 극적인 레닌주의적 저항 중 하나로 남았다.
사마라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9세부터 일했고, 14세 때 루간스크의 하르트만 기관차 공장에서 금속 세공·선반공으로 일했다.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루간스크 위원회에서 활동했고, 1912년 프라하 당 대회 대표로 레닌을 만난 뒤 체포되어 나림으로 유형되었다. 1917년 2월 혁명 때 코스트로마에서 연대를 이끌고 봉기에 나섰으며, 이후 모스크바 당위원회 서기와 중앙위원(1919–1921), 중앙위 서기(1920–1921)를 지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한 좌익 반대파 지도부의 한 사람으로 1927년 제명되어 세미팔라틴스크로 유배되었다가 1930년 복당했고,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쇼재판의 주요 피고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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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5세에 볼셰비키 입당, 루간스크에서 선동 활동
1908–1916반복된 체포와 유형 (볼로그다·나림), 탈출과 재체포
1912프라하 당 대회 대표
1917코스트로마에서 2월 봉기 주도, 모스크바 당위원회 서기
1919–1921중앙위 서기, 조직국 위원,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1922–1924혁명군사평의회 정치총국장, 교통부 인민위원 대리
1923–1927'46인 선언' 서명, 좌익 반대파 지도부 — 제명
1928–1937세미팔라틴스크 유형, 복당, 도로·자동차운수 중앙관리국장, 제2차 모스크바 재판 피고로 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