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근을 부인한 우크라이나 당 수장, 스탈린의 총에 쓰러지다
1932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번지던 때 코시오르는 스탈린에게 보낸 서한에서 밝혔다: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있다는 온갖 이야기는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굶주리는 마을들이 있기는 하나 이는 현지의 무능 탓일 뿐입니다."
1889년 11월 18일(구력 11월 6일) 러시아 제국 지배하 폴란드 왕국 벵그루프에서 공장 노동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1907년 당에 입당했다. 돈바스와 키예프의 지하운동을 거쳐 우크라이나 공산당 창설에 참여했고, 1928~1938년 우크라이나 당을 이끌며 집단화와 공업화를 밀어붙였다. 1930년 정치국 정위원. 1932~33년 대기근의 존재를 부인하는 보고로 비판받는 동시에 감축과 식량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1938년 5월 체포되어 1939년 2월 26일 사형이 선고·집행되었고, 1956년 3월 14일 복권되었다. 2010년 우크라이나 법원은 그를 1932~33년 기근 조직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19–1920 사회운동·조직 · 소련 · 당 서기국 · 조직인사
경력 연표
- 1907–1917돈바스 지하 볼셰비키 활동, 여러 차례 체포·유형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9–192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26–1928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조직국원
- 1928–193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총서기 → 제1서기
- 1930–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8.5'폴란드 군사조직' 혐의로 체포
- 1939.2.26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당일 집행
소련 정치국
- 후보위원 1927.12–1930.07
- 정위원 1930.07–1938.05
1938.05 체포 · 1939년 처형
관련 역사 사건
- 1905–19071905년 혁명공장 파업 참가자1905년 11월 공장 파업에 참여했다.
- 1917.10–1918.0110월 혁명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7–1921우크라이나 혁명과 전쟁우크라이나 공산당 창설 조직자1918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창설을 조직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28–1937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우크라이나 제1서기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로 집단화와 곡물 조달의 현지 집행을 책임졌으며, 기근이 가장 참혹했던 시기의 공화국 최고 책임자였다.
- 1932–1933홀로도모르와 집단화 기근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기근을 부인하며 공출 집행1928~1938년 우크라이나 당을 이끌며 집단화를 진두지휘했다. 1932년 4월 스탈린에게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있다는 이야기는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라고 보고했다.
- 1937–1938대숙청표적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이자 정치국원이었으나 1939년 체포·처형됐다.
1905~1920년, 돈바스 지하활동에서 우크라이나 공산당 창설까지
스타니스와프 코시오르는 1889년 러시아 제국 지배하 폴란드 왕국 셰들체 현 벵그루프에서 공장 노동자 빈첸티 야노비치 코시오르와 옐레나 프란체프나(필리페크)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스타니스와프를 포함해 다섯(블라디슬라프, 유제프, 카지미에시, 미하일)이었고 누이 소피아가 있었다. 막내 미하일을 뺀 적어도 네 형제가 혁명 지하활동가가 되었다. 1902년 술린 공장 초등학교를 마치고 술린 공장의 자물쇠공으로 일했으며, 1905년 11월 공장 파업에 참여했다. 12월 직장폐쇄 후 가족과 함께 알체프스크로 옮겼고, 1907년 6월 유리예프카 공장 구역 당 조직책으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곧 체포되어 석 달을 감옥에서 보내고 제철소에서 해고되었다. 1908년 8월 새 체포의 위협 아래 술린으로 옮겨 1908~1911년 술린 당 조직을 이끌었고, 1910년에는 지하활동의 위장으로 축구단을 만들었다. 네 차례 단기 체포를 겪고 1911년 예카테리노슬라프 현으로 행정 유형되었다. 1912~1914년 하리코프, 키예프, 폴타바에서 비합법 활동을 했고 1914년 가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키예프 위원회 조직에 참여했다. 위원회가 와해된 뒤 1915년 모스크바로 갔고, 그곳에서 이르쿠츠크 현으로 3년 유형되었다.
1917년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로 가 나르바-페테르고프 구 당 조직에서 일했으며 페테르부르크 볼셰비키 위원회와 그 집행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17년 10월에는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이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시기에는 「좌파 공산주의자」에 속했다.
1918년 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창설에 참여한 한 사람이었다. 1918년 3월부터 우크라이나 재정 인민서기(인민위원)였고 4월부터 제1차 당대회 소집을 위한 조직국원이었다. 1918년 8월 독일군 점령하 우크라이나에서 비합법 당 사업을 지도했고, 1918년 11월부터 1919년 2월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 우안(키예프) 주위원회 서기였다. 중앙위원회 서기 재임 기간은 사료마다 다르게 전한다. 러시아어 자료의 정보상자는 1919년 5월 30일부터 1920년 11월 17일까지로, 영어 자료는 1919~1920년으로 적고 그 정보상자는 1919년 5월 30일~12월 10일과 1920년 3월 25일~10월 17일로 나누어 적는다. 우크라이나어 자료는 1919년 5월~12월과 1920년 3월~11월로 적는다. 1956년 재심 문서에 인용된 공식 서술은 그를 1919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로만 기록한다. 1919년 7월부터 12월까지는 당 중앙위 전선배후국을 이끌었다.
1921년부터 우크라이나 10월혁명·공산당사 위원회(이스파르트) 위원이었고, 1922~1924년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 시베리아국 서기였다. 1923년 후보위원을 거쳐 1924년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전연방 중앙위 서기 재임도 사료가 어긋난다. 영어 자료의 정보상자는 제14·15기 서기국 정식 위원 임기를 1926년 1월 1일부터 1928년 7월 12일까지로 적고, 러시아어 정보상자는 1926~1928년으로, 1956년 재심 문서는 「1925년부터 1928년까지」로 적는다.
가족 기록도 남아 있다. 형제 블라디슬라프, 카지미에시, 미하일은 함께 탄압받았고, 영어 자료는 블라디슬라프가 대숙청기에 처형되었고 유제프가 1937년 병으로 죽었다고 전한다. 어머니 옐레나 프란체프나는 1934년 1월 21일 하리코프에서 사망했다.
1932년, 곡물 조달과 우크라이나의 기근
스타니스와프 코시오르는 폴란드 벵그루프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돈바스의 제철소에서 일하며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고참 지하활동가였다. 내전기 우크라이나에서 당 조직을 이끌었고, 1928년부터 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총서기로서 집단화와 공업화의 최전선에 섰으며, 1930년 전연방 정치국원이 되었다.
문서고 연구가 복원한 1932~33년의 코시오르는 이중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는 모스크바가 내려보낸 곡물 조달 목표를 우크라이나에서 집행한 최고 책임자였고, 1932년 봄까지 기근의 규모를 과소평가하는 보고를 중앙에 올렸다. 동시에 그해 여름부터는 조달 목표의 하향과 종자 대여, 식량 지원을 거듭 요청한 청원자이기도 했다. 조달 위기가 파국으로 치닫자 1932년 말 몰로토프 위원회가 파견되고 블랙리스트와 현물 벌금 같은 가혹한 조치가 시행되었다. 데이비스와 위트크로프트의 연구는 이 기근을 무리한 조달 목표, 연이은 흉작, 위기 대응의 실패가 겹친 파국으로 설명하면서도, 코시오르를 포함한 공화국 지도부가 농촌의 실상을 알면서도 조달을 앞세운 책임을 분명히 기록한다. 1933년 이후 그는 기근 지역에 대한 종자, 식량 지원과 파종 캠페인의 집행 또한 지휘했다.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이 재난에서 코시오르의 이름을 떼어낼 수는 없다. 아카이브에 기초한 역사서술은 그를 학살의 설계자로도, 무력한 방관자로도 그리지 않는다. 그는 강행 공업화라는 국가적 선택의 우크라이나 집행자였고, 그 선택의 대가를 농민이 치렀다는 사실은 이 시기를 다루는 어떤 서술에서도 생략될 수 없다.
1938년 5월 3일, 「폴란드군사조직」이라는 죄목
1938년 1월 코시오르는 우크라이나 당 지도부에서 물러나 모스크바로 옮겨져 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겸 소비에트통제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승진처럼 보였던 이 인사는 몇 달 뒤 체포로 이어졌다. 1937년 8월 NKVD 명령 제00485호로 시작된 「폴란드 작전」은 폴란드 출신자와 폴란드 연고자를 겨냥한 대량 작전으로, 문서고 통계에 따르면 이 작전 하나로 11만 명 이상이 총살되었다. 폴란드 태생의 정치국원 코시오르는 이 광풍의 정점에서 1938년 5월 3일 체포되었다.
그에게 씌워진 죄목은 존재하지도 않는 지하조직 「폴란드군사조직(POW)」의 지도자라는 것이었다. 고문 끝에 자백이 받아내졌고, 1939년 2월 26일 군사법정에서 사형이 선고되어 같은 날 집행되었다. 같은 날 우크라이나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블라스 추바리와 파벨 포스티셰프도 총살되었다. 집단화의 집행자였던 사람이 몇 해 뒤 조작된 죄목으로 같은 기계에 갈려 나간 것이다.
1956년 소련 최고재판소는 코시오르를 복권했고, 흐루쇼프는 제20차 당대회 비밀연설에서 그의 사건을 조작된 탄압의 대표 사례로 직접 거명했다. 포스트소비에트 문서고 연구는 「폴란드군사조직」 사건 전체가 NKVD 내부에서 만들어진 허구였음을 확인했다. 코시오르의 생애는 1930년대의 두 얼굴, 즉 강행 건설의 책임과 조작된 테러의 희생이 한 사람 안에서 겹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