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 페트로비치 포스티셰프

Павел Петрович Постыше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887–1939 ✕ 처형

기근의 특사이자 공포의 집행자, '우크라이나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불린 뒤 1939년 처형되다

1935년 12월 28일 『프라우다』 기고에서 학교·아동원·소년궁전·클럽·극장에 새해 전나무를 세우자고 제안해 금지되었던 욜카가 되살아났고, 첫 공식 소비에트 욜카는 1935년 12월 30일 하르키우에서 열렸다.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나 1904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08년 체포되어 블라디미르 중앙감옥과 이르쿠츠크 유형을 거쳤다. 10월 혁명기에 이르쿠츠크를 볼셰비키 손에 넘기고 극동공화국 수립에 참여했으며, 1923년 우크라이나로 전보되어 1925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1933~34년 약 10만 명의 당원이 제명되어 그는 '우크라이나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불렸고, 1937년 쿠이비셰프 제1서기로 옮겨 대숙청을 확대하다 체포되어 1939년 처형되고 1955년 복권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소련 정치국

1938.01 해임 · 1939년 처형

관련 역사 사건

1933년 1월, 하르키우로 내려온 전권

파벨 포스티셰프는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의 직조공 가정에서 태어나 1904년 당에 들어간 노동자 출신 혁명가였다. 유형과 지하활동, 극동 내전을 거쳐 1920년대에 우크라이나에서 당 사업을 했고, 1930년부터 전연방 중앙위원회 서기로 일했다. 1933년 1월, 조달 위기와 기근이 정점으로 치닫던 시점에 그는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로 파견되었다. 형식상 2인자였으나 전연방 중앙위 서기직을 유지한 채 내려온 그는 사실상 모스크바의 전권대표였다.

포스티셰프의 임무는 두 가지였다. 곡물 조달과 파종 캠페인을 완수하는 것, 그리고 우크라이나 당 기구를 「민족주의적 편향」으로부터 숙청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근이 농촌을 휩쓰는 와중에 조달 압박을 유지했고, 동시에 종자 대여와 구호의 집행을 지휘했다. 우크라이나화 정책의 상징이던 스크리프니크는 그의 주도로 진행된 비판 캠페인 속에서 1933년 7월 자살했다. 데이비스와 위트크로프트, 테리 마틴의 연구는 이 시기 포스티셰프가 위기 수습의 관리자이자 정치적 숙청의 집행자라는 두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음을 문서로 보여준다.

1934년부터 그는 키예프로 옮긴 우크라이나 수도의 재건과 공업화 완수를 지휘하며 공화국의 실질적 지배자로 군림했다. 기근의 해에 우크라이나에 파견된 인물이라는 사실은 그의 이름에서 지워지지 않으며, 이 시기의 책임은 아카이브가 확인하는 그대로 기록되어야 한다.

1934~1937년 키예프, 새 수도의 「사회주의적 재건」과 숙청

1934년 7월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가 하르키우에서 키예프로 옮겨졌다. 포스티셰프는 키예프 주당위원회 제1서기가 되어 새 수도의 당 조직을 맡았고, 1934년 2월에는 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영어 위키백과는 그를 1934~37년 키예프 당위원회 제1서기로 적는다. 『우크라이나 백과사전』은 그가 1934년 7월부터 1937년 1월까지 키예프 주당 조직을 책임졌다고 기록한다. 제2서기로서 그는 제1서기 코시오르를 능가하는 공화국의 실권자였다.

새 수도에서의 과제는 「사회주의적 재건」이었다. 이 과정에서 교회와 기념물, 정교회와 유대인 묘지가 철거되었다. 동시에 그는 우크라이나화에 대한 공세를 이어갔다. 1933년 1월 우크라이나 역사·언어 교과가 폐쇄된 뒤, 포스티셰프는 1933년 6월 교육인민위원 미콜라 스크리프니크를 학교와 대학을 「파괴」하고 「페틀류라 돼지」들에게 통제권을 넘겼다며 비난했고, 스크리프니크는 곧 자살했다.

그가 지휘한 숙청의 규모는 문서로 남아 있다. 「민족주의」 혐의로 1만 5천 명 이상의 관리가 제거되었고, 수천 명의 작가·학자·철학자·예술가·음악가·편집자가 유형·처형·실종되었다. 숙청은 당 기구 자체를 삼켰다. 그는 군당 서기 237명과 군집행위원회 의장 249명의 해임을 강제했고, 우크라이나에서의 첫해에 약 10만 명의 당원이 제명되었으며 1938년까지 추가로 16만 8천 명이 제명되었다. 제명의 대다수가 유형 또는 총살이었다는 것은 그의 보고 자체가 적은 바다.

기근 책임에 관한 문서적 근거도 존재한다. 2010년 키예프 법원 사건은 1932년 9월 18일자 그의 전보를 첫 증거로 채택했다. 그 전보는 대규모 아사 경고에도 불구하고 곡물 수출 할당량을 채우라고 우크라이나 당 지도부에 지시한 것이었다. 법원은 이 근거로 그를 홀로도모르 조직 혐의로 사후 유죄로 인정했고, 피고 사망을 이유로 사건을 종결했다. 이는 확정된 역사적 판정이 아니라 논쟁적인 정치·법적 판단이다.

이 시기는 1937년 1월 키예프 주당위원회 제1서기직 해임으로 끝난다. 러시아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그는 1937년 3월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직에서도 해임되어 쿠이비셰프 주당위원회 서기로 임명되었다. 같은 출처는 권위 없는 자료를 명시적으로 표시한 채 학교 공책과 식료품에서 확대경으로 「파시스트 상징」을 찾는 캠페인과 무역 종사자 200명을 쏘아야 한다는 발언을 그에게 돌리는데, 이는 검증되지 않은 전언이며 문서화된 발언으로 다룰 수 없다.

복권을 둘러싼 날짜도 단일하지 않다. 카드와 다른 출처들은 1955년(6월 1일) 복권을 적고,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1956년에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소가 그를 완전히 복권했다고 적는다. 이 출처는 흐루쇼프의 호의가 작용했다고 전하며, 역사가 옐레브뉴크가 「포스티셰프는 스탈린의 탄압 노선에 반대하다가 고통을 겪었다」는 계열의 평가를 제시했다고 소개한다. 이는 사료적 검증이 필요한 속설적 평가로 다루어야 한다. 대통령 복권문서 수집집(페름 메모리얼)은 추바리·루주타크·코시오르·포스티셰프·카민스키·가마르니크·에이헤를 복권하는 상임위원회 결정들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으나, 탄압의 책임과 진상 공개 문제는 지도부 내에서 격렬한 논쟁으로 남았다고 기록한다.

1935년 12월 28일, 욜카를 되살린 편지

1935년 12월 28일자 『프라우다』에 포스티셰프의 짧은 기고가 실렸다. 종교적 잔재로 몰려 금지되어 있던 새해 전나무(욜카)를 아이들에게 돌려주자는 제안이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욜카를 만들어 주자」는 이 편지가 실린 지 며칠 만에 전국의 학교와 문화궁전에 전나무가 세워졌고, 데드 모로스와 스네구로치카가 함께하는 새해 축제는 이후 소비에트 생활의 가장 사랑받는 풍습으로 자리 잡았다. 수천만의 소련 아이들에게 포스티셰프는 이름 모를 새해의 은인이었다.

그러나 같은 사람의 다른 얼굴이 있다. 1937년 3월 그는 니콜라엔코 사건을 계기로 우크라이나에서 소환되어 쿠이비셰프주 제1서기로 전보되었고, 그곳에서 대공포의 가장 열성적인 집행자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수십 개의 군당위원회를 「적의 소굴」로 규정해 통째로 해산했고, 당원 수천 명을 제명으로 몰아넣었다. 1938년 1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말렌코프가 바로 이 「과잉」을 문제 삼아 그를 공격했고, 포스티셰프는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해임되었다. 한 달 뒤 그는 체포되었고, 1939년 2월 26일 총살되었다. 같은 날 코시오르와 추바리도 처형되었다.

포스티셰프는 1955년 복권되었다. 기근의 해의 전권대표, 욜카를 되살린 편지의 필자, 쿠이비셰프 숙청의 광풍, 그리고 조작된 죄목의 희생자. 이 네 가지는 모두 같은 사람의 사실이며, 아카이브에 기초한 역사는 그중 어느 하나도 지우지 않고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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