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불린 스탈린의 공포 특사, 결국 자신도 총살되다
1935년 12월 28일 『프라우다』 기고: "새해를 맞아 아이들에게 좋은 욜카를 만들어 줍시다!" 이 한 줄로 금지된 전나무가 돌아왔고, 데드 모로스와 함께하는 어린이 새해 축제는 소비에트의 가장 사랑받는 전통이 되었다.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직공의 아들로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기 시베리아·극동에서 활동한 후 1932년 말 대기근 와중 곡물징발 특사로 우크라이나에 파견되었다. 1933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가 되어 코시오르를 능가하는 실권으로 집단화 반대파를 숙청하고 지식인층을 탄압, '우크라이나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불렸다. 1935년 프라우다 기고로 새해 트리 전통을 부활시켰다. 1937년 쿠이비셰프 주당 제1서기로 좌천되어 대숙청을 집행했으나 이듬해 체포, 1939년 총살.
경력 연표
- 1904–1917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와 이르쿠츠크에서 지하 볼셰비키 활동; 1905년 이바노보 파업 참가, 여러 차례 체포·유형
- 1917–1922이르쿠츠크 소비에트 부의장, 혁명재판소 의장, 중앙시베리아 위원, 극동공화국 군사위원
- 1924–1930키예프·하리코프 당위원회 서기,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30–1933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조직지도부장
- 1932.11–12대기근 와중 곡물징발 특별전권대표로 볼가하류·우크라이나 파견
- 1933–1937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 ― 코시오르를 능가하는 실권으로 대숙청·러시아화 주도, 당원 10만 명 숙청
- 1934–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
- 1937–1939쿠이비셰프 주당 제1서기로 좌천, 1938년 2월 체포, 1939년 2월 26일 총살
관련 역사 사건
1933년 1월, 하르키우로 내려온 전권
파벨 포스티셰프는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의 직조공 가정에서 태어나 1904년 당에 들어간 노동자 출신 혁명가였다. 유형과 지하활동, 극동 내전을 거쳐 1920년대에 우크라이나에서 당 사업을 했고, 1930년부터 전연방 중앙위원회 서기로 일했다. 1933년 1월, 조달 위기와 기근이 정점으로 치닫던 시점에 그는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2서기로 파견되었다. 형식상 2인자였으나 전연방 중앙위 서기직을 유지한 채 내려온 그는 사실상 모스크바의 전권대표였다.
포스티셰프의 임무는 두 가지였다. 곡물 조달과 파종 캠페인을 완수하는 것, 그리고 우크라이나 당 기구를 「민족주의적 편향」으로부터 숙청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근이 농촌을 휩쓰는 와중에 조달 압박을 유지했고, 동시에 종자 대여와 구호의 집행을 지휘했다. 우크라이나화 정책의 상징이던 스크리프니크는 그의 주도로 진행된 비판 캠페인 속에서 1933년 7월 자살했다. 데이비스와 위트크로프트, 테리 마틴의 연구는 이 시기 포스티셰프가 위기 수습의 관리자이자 정치적 숙청의 집행자라는 두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음을 문서로 보여준다.
1934년부터 그는 키예프로 옮긴 우크라이나 수도의 재건과 공업화 완수를 지휘하며 공화국의 실질적 지배자로 군림했다. 기근의 해에 우크라이나에 파견된 인물이라는 사실은 그의 이름에서 지워지지 않으며, 이 시기의 책임은 아카이브가 확인하는 그대로 기록되어야 한다.
1935년 12월 28일, 욜카를 되살린 편지
1935년 12월 28일자 『프라우다』에 포스티셰프의 짧은 기고가 실렸다. 종교적 잔재로 몰려 금지되어 있던 새해 전나무(욜카)를 아이들에게 돌려주자는 제안이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욜카를 만들어 주자」는 이 편지가 실린 지 며칠 만에 전국의 학교와 문화궁전에 전나무가 세워졌고, 데드 모로스와 스네구로치카가 함께하는 새해 축제는 이후 소비에트 생활의 가장 사랑받는 풍습으로 자리 잡았다. 수천만의 소련 아이들에게 포스티셰프는 이름 모를 새해의 은인이었다.
그러나 같은 사람의 다른 얼굴이 있다. 1937년 3월 그는 니콜라엔코 사건을 계기로 우크라이나에서 소환되어 쿠이비셰프주 제1서기로 전보되었고, 그곳에서 대공포의 가장 열성적인 집행자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수십 개의 군당위원회를 「적의 소굴」로 규정해 통째로 해산했고, 당원 수천 명을 제명으로 몰아넣었다. 1938년 1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말렌코프가 바로 이 「과잉」을 문제 삼아 그를 공격했고, 포스티셰프는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해임되었다. 한 달 뒤 그는 체포되었고, 1939년 2월 26일 총살되었다. 같은 날 코시오르와 추바리도 처형되었다.
포스티셰프는 1955년 복권되었다. 기근의 해의 전권대표, 욜카를 되살린 편지의 필자, 쿠이비셰프 숙청의 광풍, 그리고 조작된 죄목의 희생자. 이 네 가지는 모두 같은 사람의 사실이며, 아카이브에 기초한 역사는 그중 어느 하나도 지우지 않고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