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파주의에서 공공연한 반혁명으로
인물니콜라이 예조프, 레프 트로츠키,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이오시프 스탈린, 게오르기 퍄타코프, 세르게이 키로프, 그리고리 소콜니코프, 카를 라데크, 빅토르 바카예프, 블라디미르 레닌, 이반 스미르노프, 그리고리 예브도키모프, 야코프 드롭니스, 세르게이 므라치콥스키, 니콜라이 무랄로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미하일 톰스키, 레오니트 니콜라예프, 아돌프 히틀러, 니콜라이 부하린, 알렉세이 리코프, 레오니트 세레브랴코프, 블라디미르 루먄체프, 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 니콜라이 우글라노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마르테먄 류틴, 이반 코톨리노프, 안드레이 즈다노프, 스타니스와프 코시오르, 파벨 포스티셰프, 야코프 리프시츠, 니콜라이 우스트랴로프, 바실리 시미트, 드미트리 시미트 (붉은 군대 지휘관), 이바르 스밀가, 이반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 알렉산드르 벨로보로도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파니 카플란, 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 로베르트 에이헤, 미하일 라셰비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페르디난트 라살레, 비사리온 로미나제,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 티모페이 사프로노프,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보리스 수바린, 미하일 프룬제, 안드레이 시쿠로, 루돌프 헤스, 얀 스텐, 알렉산드르 슬렙코프, 레프 소스놉스키, 니콜라이 카레프, 알렉세이 바다예프, 표트르 팔친스키, 카를 코르슈, 조르주 클레망소, 카를 카우츠키, 아우구스트 베벨, 오토 폰 비스마르크, 니콜라이 글레보프-아빌로프 용어내무인민위원부(NKVD), 대숙청, 예조프시나, 모스크바 재판, 좌익반대파, 신반대파, 통합반대파, 우익반대파 사건대숙청
서문
1934년 12월 1일 레닌그라드에서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반혁명 도당의 인간 말종 니콜라예프의 흉악한 손에, 당과 우리 나라 노동계급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강철 같은 레닌주의자 볼셰비키, 혁명의 불같은 호민관, 탁월한 인간인 세르게이 미로노비치 키로프가 쓰러졌다.
모든 근로자를 뒤흔든 이 범죄의 끔찍함은, 배신의 총성이 형식상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에 몸담은 자들의 진영에서 울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 뜻밖의 성격으로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이것이 따로 떨어진 고립된 살인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니콜라예프의 총성이 가장 첨예해진 계급투쟁 발현의 한 시기 전체를 뜻한다는 것이 모두에게 분명해졌다. 많은 공산주의자에게 우리 당의 영도자 스탈린 동지가 혁명적 경각심에 관해 한 경고의 말이 새롭게 울렸다.
공산주의자의 혁명적 경각심을 높이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스탈린 동지는 이미 1933년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1월 총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비에트 국가의 힘이 커질수록 죽어 가는 계급들의 마지막 잔재의 저항이 강해지리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바로 그들이 죽어 가며 마지막 나날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공격의 한 형태에서 더 격렬한 다른 형태로 옮겨 가며 주민 가운데 뒤떨어진 층에 호소하고 그들을 소비에트 권력에 맞서 동원할 것입니다. 이 과거의 인간들이 소비에트 권력에 덮어씌우지 않을, 그리고 그것을 구실로 뒤떨어진 분자들을 동원하려 들지 않을 추잡한 짓과 비방이란 없습니다. 이런 토양 위에서 낡은 반혁명 정당들, 곧 사회혁명당, 멘셰비키, 중심부와 변방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궤멸된 그룹들이 되살아나 꿈틀거릴 수 있고, 트로츠키파와 우익 편향파 출신의 반혁명적 반대파 분자들의 파편이 되살아나 꿈틀거릴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분자들을 신속하게, 특별한 희생 없이 끝장내려 한다면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혁명적 경각심이 지금 볼셰비키에게 특히 필요한 바로 그 자질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I. 스탈린, 『레닌주의의 문제들』, 제10판, 510쪽).
니콜라예프의 총성은 파멸이 정해진 계급의 대표자들이 비열한 악행을 실행할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의지하는, 소비에트 권력에 맞선 투쟁의 특히 첨예한 형태들에 관한 스탈린 동지의 분석을 더없이 잔혹하게 확증했다. 당원의 탈과 당원증으로 몸을 가린 계급의 적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들에게 더 쉽게 타격을 가하려고 우리 대열 안으로도 파고든다.
공개 투쟁에서 궤멸되어 이 길로 어떤 성공이든 거둘 희망을 모두 잃은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반혁명 도당은 마침내 백위파 망명자들의 수렁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들은 당과 노동계급에 맞선 투쟁의 무기로 — 테러를 택했다. 국경 너머에서 들여보낸 게슈타포 첩자들과 “로프스”(“러시아 전군연합”)의 데니킨파 “불한당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가 해냈으니, 그들은 레닌의 대오에서 그 가장 뛰어난 대표자 한 사람을 앗아 갔다.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잔당에게는 이 비열한 살해를 실행하기가 더 쉬웠다. 그들은 형식상 당에 적을 두어 우리 당 기관에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에, 반혁명 부르주아지의 가장 편리한 도구임이 드러났다.
S. M. 키로프 살해가 이전의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반대파가 저지른 짓이라는 것, 형식상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대열에 있는 자들이 저지른 짓이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들의 정치적·도덕적 타락이 그토록 깊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들이 혁명 투쟁의 역사에 전례가 없는 그토록 비열한 배신에까지 굴러떨어졌다는 것은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 더없이 비열한 범죄에 견줄 만한 역사적 유례는 없다!
이 유례없는 배신을 규정할 말이 없다!
백위파 반혁명의 전선에 노동계급의 적으로 이루어진 새 부대가 보태졌다. S. M. 키로프 살해의 직접 가담자들도, 그 고취자들도 이미 백위파 언론에 소비에트 권력과 싸우는 요원으로 칭송되었고, 이미 백위파 영웅들의 성인 명부에 올랐다.
온갖 부류의 백위파는 당연하게도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도당을 제 벗들의 명단에 올렸다.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성공에 대한 무력하고 미친 듯한 증오 속에서, 그들은 백위파 망명자 진영의 벗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무기도 마다하지 않는다. 비방, 배신, 기만, 살인, 파괴 행위, 파괴 공작, 간첩 행위 — 이것이 그들의 무기고에 남은 소비에트 국가와의 투쟁 수단이다.
백위파 반혁명의 이 새 부대의 특이성은, 그것이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의 추종자들이 우리 당 안에 만든 분파에서 자라났다는 데 있다.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안의 분파 투쟁에 관한 레닌의 말은 이 분파의 역사에서 더할 나위 없이 잘 확증되었다.
V. I. 레닌은 「당의 위기」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분파 투쟁에는 객관적 논리가 있어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조차 자기가 취한 잘못된 입장을 고집하면 불가피하게 무원칙한 선동과 사실상 조금도 다르지 않은 처지에 이르게 된다. 분파 전쟁의 역사 전체가 이것을 가르쳐 준다(예: ‘전진파’와 멘셰비키의 볼셰비키에 맞선 ‘연합’)... 남은 길은, 라살레의 표현을 쓰자면 ‘지성의 물리적 힘’(과 성격의 힘)을 제 안에서 찾아내어 오류를 인정하고 바로잡고 러시아공산당 역사의 이 쪽을 넘기는 것이거나, 아니면... 아니면 남은 동맹자들이 어떤 자들이든 그들에게 매달리면서 어떤 원칙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다.”
(레닌, 제26권, 93쪽).
레닌의 이 명제는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그룹에게는 일정한 단서를 달아야만 적용할 수 있다.
레닌은 분파 투쟁의 논리가 당의 “가장 뛰어난 사람들조차” 자기 오류를 고집할 경우 어디로 이끌 수 있는지를 말했다.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그룹의 구성원들, 특히 그 “영도자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사실이 보여 주듯 그들은 결코 당의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들이 반대파에서 반혁명으로 넘어간 것은 더욱 자연스러웠다.
레닌주의 당의 가장 초보적인 원칙들을 어기고, 당이 폭로한 자기들의 멘셰비키적 오류를 고집하며, 어떤 동맹자에게든 매달린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그룹은 이미 오래전부터 볼셰비즘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고 국제 백위파 세력의 선봉대로 자라났다. 키로프 동지 살해는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그룹의 이 백위파적 본질을 드러냈을 뿐이다. 우리 당의 이 인간 말종과 배신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백위파 반혁명 조직의 위장된 형태였다.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반혁명 조직의 배신과 변절의 검은 길은 끝났다. 이 길은 1925년 당내 지노비예프파 분파의 결성에서 시작해 1926-27년 제2의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당의 조직을 거쳐, 1934년 12월 혁명 영도자들에 대한 백위파 테러에, 사회주의 건설의 평범한 참여자들인 노동자, 스타하노프 노동자에 대한 테러에, 1936년 케메로보 탄광에서의 의도적인 노동자 질식 살해에 이르렀다.
이 기간에 스탈린 동지가 이끄는 우리 당은 사회주의를 향한 거대한 승리의 길을 걸어왔다.
당의 지도 아래 소비에트 나라의 노동계급과 콜호스 농민은 역사적 규모로 보아 더없이 짧은 이 기간에 유례없는, 세계사적 의의를 지닌 성공을 거두었다. 사회주의는 우리 나라에서 최종적으로, 돌이킬 수 없게 승리했다. 이 몇 해 동안 나라의 면모 전체, 경제 전체를 바꾼 기술적으로 선진적인 공업이 건설되었다. 소련 농업은 가장 뒤떨어지고 가장 잘게 쪼개진 농업에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선진적인 농업으로 바뀌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농민 대중이 해묵은 예속과 “농촌 생활의 백치 상태”에서 벗어나 노동계급과 나란히 사회주의의 가장 적극적인 건설자가 되었다. 소련은 계급 없는 사회주의 사회 건설의 완수에 바짝 다가섰다.
전 세계의 근로자들은 자본주의적 착취와 예속에서 해방되는 길을 보여 준 소련에 한없는 사랑과 희망을 품고 있다.
소련은 착취자들의 진영에서 두려움과 존경과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소련은 이 성공을 계급의 적들과 우리 당 안의 그 앞잡이들, 무엇보다도 — 트로츠키파, 지노비예프파, 우파와의 치열한 투쟁 속에서 거두었다. 이 투쟁에서 당은 스탈린 동지의 지도 아래 더욱 단일하고 굳건해져, 온 인류를 자본주의의 예속에서 해방하기 위한 투쟁을 끝까지 수행할 태세를 갖추고 나왔다.
이 기간에 반혁명적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그룹은 다른 길을 걸었다.
이 길은 믿음 없는 자들의 동요, 어려움 앞에서 떠들어 대는 공황, 분파 그룹의 조직, 비밀 인쇄소의 설치, 반소련 문헌의 발간, 자기들의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당을 조직하려는 시도로 얼룩져 있다. 이 길은 당과 소비에트 권력에 반대하는 가두시위,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의 공격을 부추기기까지 한 소련 방위의 거부, 자본주의 국가를 위한 간첩 행위, 파괴 행위, 파괴 공작, 그리고 마침내 공공연하고 광포한 백위파 세력의 테러 수법으로 얼룩져 있다.
세계 노동운동사에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그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유례없이 배신하여 영원히 자신을 더럽히고, 역사의 치욕의 기둥에 영원히 자신을 못 박은 가장 경멸스럽고 비열한 반혁명 백위파 조직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전의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반대파의 말종들로 이루어진 이 새로운 백위파 조직체의 특이성을 모든 당원은 연구할 의무가 있다. 오직 당의 역사, 특히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의 반대파 그룹들과 벌인 투쟁의 역사를 성실하고 주의 깊게 연구함으로써만, 모든 공산주의자는 계급의 적이 당과 싸우는 새롭고 특수하며 과거에 유례가 없는 방법을 이해하고, 일상의 당·정치 사업에서 필요한 모든 결론을 끌어낼 것이다.
이 책의 과제는 — 혁명의 운명이 결정되던 시기에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안의 반대파적 반혁명 표출과 벌인 투쟁이라는, 우리 당 역사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연구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힘닿는 대로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 저작은 1923년 말부터 1936년까지, 곧 처음에 따로 존재하던 트로츠키파 분파와 지노비예프파 분파가 형성되고 곧이어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블록으로 합쳐져 작은 중단을 거치며 최근까지 존속한 기간에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반혁명 그룹이 당에 맞서 벌인 투쟁을 분석하는 데 바쳐졌다. 그러나 우리는 필요에 따라, 특히 당과의 이견의 사상적 원천을 살필 때, 이 시기에 앞선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의 활동 사실도 함께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세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장은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반혁명 블록이 당과 벌인 투쟁의 조직과 전술 문제를 다룬다. 사실 자료는 모두 이 장에 모았다.
제2장은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블록과 당의 사상적 이견을 분석한다. 이 장에서 우리는 트로츠키주의 비판을 핵심으로 삼았는데,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그룹이 우리 혁명의 기본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서 트로츠키의 멘셰비키적 개념을 통째로 받아들였고, 이 원칙들 위에 우리 당에 맞세운 정치 강령, 곧 자본주의 복고 강령으로 발전한 강령을 세웠기 때문이다.
제3장은 노동계급에게 낯선 이 부르주아 앞잡이들을 우리 당 안에 낳은 사회적 원인을 분석한다.
1.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반혁명 블록의 당에 맞선 투쟁의 가장 중요한 단계들
다음 장에서 말할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반혁명 블록과 당의 사상적 이견은 일단 제쳐 두고, 당에 맞선 그들의 투쟁의 조직과 전술의 사실 면은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계는 — 1923년 말부터 제14차 당대회까지를 포괄한다. 이 단계에서 트로츠키파 그룹과 지노비예프파 그룹은 아직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안에서 서로 떨어진 분파로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며, 우리 당의 역사에 앞의 것은 — “트로츠키파 반대파”라는 이름으로, 뒤의 것은 — “신반대파”라는 이름으로 기록된다.
조직상 떨어져 있었음에도 이미 이 단계에서 지노비예프파와 트로츠키파는 당에 맞선 투쟁에서 사상의 공통성으로 묶여 있고, 블록 결성의 조건이 준비된다.
제14차와 제15차 당대회 사이의 시기는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가 당과 벌인 투쟁의 둘째 단계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단계에서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의 블록이 굳게 형성되어 모든 반당 그룹(실랴프니코프파, 사프로노프파 등)을 당에 맞선 투쟁으로 묶었다. 우리 당의 역사에서 이 단계는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블록” 단계로 알려져 있다. 이 단계에서 반대파는 한 걸음 한 걸음 당과의 연계를 끊고 트로츠키파·멘셰비키적 반당성의 수렁으로 마침내 굴러떨어진다.
제15차 당대회부터 1936년까지의 시기는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블록이 당과 벌인 투쟁의 셋째 단계라고 부를 수 있다.
조직의 관점에서 이 단계의 특징은 반대파 대열의 와해와 제15차 당대회에서의 궤멸이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블록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데 있으며, 지노비예프파 그룹과 트로츠키파 그룹은 1932년까지 따로 존재한다. 1932년부터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블록이 다시 재건되어 1936년까지 존속했다.
이 셋째 단계에서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는 우리 당에 맞선 투쟁을 한순간도 멈추지 않으면서 소련의 가장 철천지원수들의 진영으로 최종적으로 넘어갔고, 소련에서 궤멸된 계급들의 잔당을 조직하는 세력이자 백위파 반혁명의 선봉대로 바뀌었다.
1. 첫째 단계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와 당의 이견은 제14차 당대회에 이르러 가장 첨예해졌다.
당대회에 앞선 소련의 정치·경제 정세, 즉 이미 형성된 트로츠키파 반대파와 조직적으로 꼴을 갖추기 시작한 “신반대파”에 맞서 우리 당의 투쟁이 벌어진 그 정세는 여러 면에서 의미심장했다. 그러므로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가 당에 맞서 벌인 분파 투쟁의 사실 면을 서술하기에 앞서,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반대파와 당의 기본 이견이 자라나 뚜렷해진 배경인 나라 안팎의 정세를 지적해야 한다.
복구기의 종료와 소련 사회주의 건설의 전망
내전 종결 후 첫 5년 동안 당은 자기가 실시한 신경제정책을 토대로 전쟁으로 파괴된 국민경제의 복구에서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공업과 농업은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볼 수 없는 속도로 복구되었다. 공업 생산량은 전쟁 전 수준에 다가갔다. 전쟁으로 가장 크게 파괴된 철도 운수가 복구되었다. 나라의 재정 상태가 튼튼해졌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수가 크게 늘었고 그 물질적 처지가 나아졌다. 근로 농민 대중의 물질적 복리도 굳건해졌다.
이 성공을 바탕으로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중농층 사이에서 더없이 큰 권위를 얻었다. 이미 평화적 경제 건설의 첫 몇 해에 우리 나라의 근로 주민은 소비에트 체제의 거대한 우월성을 실제로 느꼈다. 이를 바탕으로 근로자들의 정치적 활동성이 높아졌고, 당원 수가 늘었으며, 소비에트, 노동조합, 자발적 단체 등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국내의 경제적·정치적 성공을 바탕으로 소련의 국제적 지위가 크게 굳건해졌다.
소련의 국제 정세에서 특징적인 것은 당시 나타나기 시작한,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불황과 침체에서 어느 정도의 상승으로의 이행이었다. 이른바 자본주의의 상대적, 일시적 안정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시작된 자본주의 생산의 상승에 들뜬 세계 부르주아지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조화롭고 계획적인 발전의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되뇌었다. 그들은 이 시기를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강화되고 꽃피는 새 시대로 보았다.
국제 부르주아지의 지배층은 간섭으로는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할 수 없음을 확인하고 소비에트 국가에 대한 행동 노선을 바꾼다. 우리가 실시하는 신경제정책을 제멋대로 이해하여, 그들은 소련 내부의 자본주의 분자들의 성장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변질에 기대를 걸고 소련의 “평화적 정복”이라는 허황한 희망으로 스스로를 달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변질에 대한 국제 부르주아지의 타산은, 소련에 네프 아래 자유 상업이 있고 일정한 원칙에 따라 이권 사업과 사적 자본주의 기업이 허용되어 있다는 사실 위에 세워져 있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소련이 자본주의로 되돌아가는 일종의 회귀로 본다.
국제 부르주아지와 우리 나라 안에서 생겨나던 새로운 네프맨 부르주아지의 이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을 가장 선명하게 표현한 자는 당시 영국의 가장 저명한 정치가 — 로이드 조지였다.
이미 1920년에 그는 간섭 시도의 실패를 확인하면서 무역을 통한 “러시아 구원” 강령을 내놓는다. 그는 노골적인 냉소로 부르주아지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우리는 힘으로 러시아를 건전한 상태로 되돌리지 못했습니다. 나는 우리가 무역으로 그렇게 할 수 있고 러시아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역은 그 작용에서 정신을 차리게 하는 영향을 미칩니다. 덧셈과 뺄셈의 단순한 계산은 황당한 이론에서 금세 벗어나게 해 줍니다.”
(로이드 조지, 1920년 2월 10일 의회 회의 연설. 『타임스』 1920년 2월 11일 자).
한때 소련 국외로 망명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도 더 나은 날이 오리라는 희망에 들뜬다. 신경제정책이 도입되자 러시아 망명자들의 넓은 층에서 이른바 스메노베호프스트보 운동이 싹튼다.
스메노베호프스트보의 가장 저명한 이론가이자 찬미자인 우스트랴로프 교수는 본질상 로이드 조지와 같은 것을 설교했다. 그는 신경제정책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변질하는 길, 공산주의가 사라지는 길을 보았다. 자유 상업과 일정한 조건 아래의 이권 사업 및 사적 자본주의 기업 허용을 토대로 한 국민경제의 상승은 그에게 소련이 자본주의 발전의 길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소비에트 경제의 발전 법칙을 자본주의의 법칙과 동일시하면서, 그는 경제생활의 객관적 흐름이 불가피하게 소련을 자본주의 복고로 이끌 것이므로 소비에트 권력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존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백위파 망명자들을 위로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 권력은 곧 겉모습에 지나지 않게 되고, 점차 새로운 부르주아적 내용으로 채워질 것이라는 말이었다.
신경제정책의 결과를 평가하면서, 우스트랴로프는 유명한 소책자 『혁명의 표지 아래』에서 이렇게 쓴다.
“혁명 권력은 점차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지거나, 아니면 아예 물러나야 할 것이다. 셋째 출구는 주어져 있지 않다.”
(우스트랴로프, 논집 『혁명의 표지 아래』, 제2판, 하얼빈, 1927년, 68쪽).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쓴다.
“혁명 러시아는 그 사회적 본질에서 ‘부르주아적’, 소유자적 나라로 바뀌고 있다.”
(같은 책, 120쪽).
부르주아 복고의 이론가와 평론가의 이 합창에 멘셰비키도 목소리를 보탠다. 적잖이 알려진 멘셰비키 지도자 F. 단은 『사회주의 통보』에 다음과 같이 썼다.
“...실제의 과정은 이미 맹아적 형태로 지방 소비에트에서도 진행되고 있어, 거기서는 부유한 농민이 ‘빈민’을, ‘비당원’이 — 공산주의자를 점차 밀어내고 있으며,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충성’이라는 보호색으로 몸을 가린 새로운 분자들이 서서히 파고드는 볼셰비즘의 행정·경찰·군사 기구에서도, 부르주아 정신이 점점 더 큰 소리로 — 물론 레닌의 복음서에서 인용하면서! — 말하기 시작한 셀 수 없는 위원회, 협의회, 기관 모두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이렇게 말로는 ‘공산주의적’으로 남아 있는 소비에트 권력의 완전한 내부 변질이 준비되고 있으니, — 그 독재적이고 공산주의적인 껍데기가 터질 때까지 그러할 것이다.”
(『사회주의 통보』 105-106호, 13쪽).
이 시기에 형성된 국제 정세는 이러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내부 변질과 소련의 자본주의 발전 경로로의 복귀에 프롤레타리아트에 적대적인 모든 세력이 건 희망과 기대는 이러했다.
소련의 국제적 지위 강화와 우리 나라 안의 경제 건설 성공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당은 그 하나하나를 네프 초기 몇 해에 자라난 — 도시와 농촌의 부르주아 분자들과 벌인 투쟁 속에서 날마다 엄청난 긴장으로 쟁취했다. 당이 실시한 쿨라크 제한과 공업·상업에서의 사적 자본 축출 정책은 나라의 계급투쟁을 극도로 첨예하게 했다. 쿨라크와 네프맨은 소비에트 권력과 싸우는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넘어갔다. 1924년 가을 멘셰비키의 지도 아래 그루지야에서 쿨라크 봉기가 터졌다. 농촌의 책임 일꾼과 농촌 통신원 살해가 잦아졌다. 쿨라크는 중농을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우리 사업의 가장 사소한 실수까지 온갖 방법으로 이용했다. 도시의 네프맨은 소비에트 체제에 낯선 옛 관리, 장교 등의 층을 이용해 경제 기관과 소비에트 기관에서 우리를 해치려 들었다. 자본주의 나라 부르주아지의 도덕적·물질적 지원에 기대어, 계급의 적은 소비에트 권력과의 투쟁에서 제 이익을 지키고 소련을 자본주의 발전의 길로 돌려놓으려 온갖 수단을 다 썼다.
이 단계에서 형성된 소련의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경제 정세는 이러했다.
전체로 보아, 이 정세는 나라 앞에 일련의 새로운 과제를 더없이 첨예하게 제기했다. 당은 그에 대해 곧바르고 분명한 답을 내놓아야 했다.
실제로 그러했다. 경제 건설의 복구기가 끝나 가고 있었다. 나라의 공업과 농업은 전쟁 전 수준에 도달했다. 그것도 더없이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성공 자체는 논란의 여지가 없고 위대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소련의 근본 문제인 “누가 누구를” —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생산력은 소농 경영이 우세한 농업국의 전쟁 전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뒤떨어진 농민 경제가 그 자체로 사회주의 경제의 토대가 될 수 없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사회주의는 대규모 기계 공업을 토대로 해서만 건설할 수 있다. 레닌은 이 논란의 여지 없는 명제가 당과 우리 나라 노동계급에게 굳게 체득되도록 애쓰기라도 하듯 혁명 내내 되풀이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V. I. 레닌은 1921년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전러시아 협의회의 식량세에 관한 보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원을 굳건히 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창조하는 실제적이고 유일한 토대는 단 하나, 오직 하나 — 대공업이다... 높은 수준의 대공업 없이는 사회주의란 도대체 말도 꺼낼 수 없다...”
(레닌, 제26권, 390쪽).
농업의 노동생산성 향상이 대규모 기계 공업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고자, V. I. 레닌은 제8차 전러시아 전기기술 대회 간부회에 보낸 인사말에서 이렇게 되풀이한다.
“대규모 기계 공업과 그것의 농업으로의 이전이야말로 사회주의의 유일한 경제적 토대이며, 자본의 멍에에서 인류를 구출하기 위한 투쟁을 성공으로 이끄는 유일한 토대이다...”
(레닌, 제27권, 21쪽).
레닌의 이 논란의 여지 없는 명제들은 구체적으로 형성된 소련의 정세 속에서 실천적으로 해결되어야 했다. 당은 답해야 했다. 세계 자본주의가 전후의 황폐와 위기에서 회복되어 부분적 안정을 이루고 선진 자본주의 나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에 가까운 전망이 없는 조건에서, 뒤떨어진 농민 경제를 가진 나라에서 우리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는가?
달리 말해, 우리가 나라의 생산력을 사회주의 경제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고 그래야 하며, 그러기 위해 현대 기술의 높이에 선 대규모 기계 공업을 건설하고 따라서 농업의 기계화에도 튼튼한 토대를 놓아야 하는가, 아니면 농업국으로 남아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부속물이 되고 그리하여 노동계급이 엄청난 긴장과 손실과 궁핍을 대가로 얻은 혁명의 모든 성과를 잃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 근본 문제를 해결해야만 앞으로의 건설을 위한 일정한 실천 강령을 세울 수 있었다.
“우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토양에 거름을 주려고 건설하는가, 아니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려고 건설하는가 — 이것이 지금 우리 건설 사업의 근본이다. 지금, 네프의 조건에서, 자본주의의 부분적 안정 아래에서 우리에게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할 가능성이 있는가 — 이것이 지금 우리의 당 사업과 소비에트 사업의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스탈린, 『반대파에 관하여』, 464쪽).
스탈린 동지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제7차 총회 보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혁명의 이 근본 문제를 해결한 일에서 노동계급 앞에 세운 가장 위대한 역사적 공적은 스탈린 동지의 것이다. 그는 제국주의 아래 자본주의 발전의 불균등성과 따로 떨어진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에 관한 레닌의 학설에 의거하여, 소련 사회주의 건설의 이론적·실천적 강령을 더없이 완전하고 명료하게 만들어 냈다.
소련 사회주의 건설 문제는 제14차 당협의회에서 해결되었다. 당은 우리나라의 노동계급과 근로 농민 앞에 뚜렷한 목표를 제시하고 그 달성에 이르는 길을 정했다. 이 결정은 그 뒤 사회주의 건설의 전 과정에 더없이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14차 당대회는 이 결정에 의거하여 나라의 공업화 문제를 중심에 둔 사회주의 건설의 포괄적 강령을 채택했다.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제14차 당대회의 결정들을 실행하면서, 당은 그 뒤 몇 해 동안 사회주의 체제를 기본적으로 창출하고 소련을 국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무너뜨릴 수 없는 보루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강력한 중공업을 건설하고 농업 기계화의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소련은 자본주의 나라들에 대한 기술적·경제적 종속에서 벗어났고, 농촌에서 자본주의 요소가 성장할 토대를 청산했다. 콜호스 체제를 공고히 하고 콜호스원을 소비에트 권력의 믿음직한 버팀목으로 만듦으로써, 소련은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하는 과제의 해결에 바짝 다가섰다.
당에 대한 트로츠키파 반대파의 공격
이 승리들은 당에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거대한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승리는 저항하는 계급의 적과의 투쟁에서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당 안에 있는 적대 계급의 앞잡이들과의 투쟁에서 쟁취되었다.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스탈린 동지의 주장이 트로츠키파에게서 얼마나 광포한 공격을 받았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트로츠키파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창조적 힘을 믿지 않고, 노동계급과 농민의 상호 관계에 관한 레닌의 학설에 반기를 들면서, 이 기본 문제에서 당과 갈라섰다. 우리 혁명의 전망을 평가하면서 그들은 당의 노선과 정반대되는 적대적 입장을 취했고, 자신들의 반레닌주의적·멘셰비키적 강령을 내세웠다.
트로츠키의 지지자들로부터 그 무렵 이미 완전히 형태를 갖춘 분파가 형성되었다. 이 분파는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결정들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분파 내 트로츠키파 규율에 복종했다.
그렇다면 실제 사정은 어떠했는가?
1923년 10월 8일 트로츠키는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성명을 제출하는데, 거기서 소련의 경제 상황을 절망적인 것으로 그리고, 당 지도부가 그 정책으로 나라를 파멸로 이끌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와 동시에 트로츠키의 저명한 지지자들인 프레오브라젠스키, 세레브랴코프, I. N. 스미르노프, 코발렌코 등이 서명한 유명한 “46인” 성명이 중앙위원회에 접수된다. 이 성명은 우리 경제 발전의 상태와 전망에 관한 트로츠키의 공황적 평가를 지지하고, 당 중앙위원회를 겨냥한 그의 모든 비난을 되풀이한다.
그들은 우리 성장의 어려움을 악용하여 당 지도부를 “농민 편향”이라고 비난하며, 경제 건설의 파탄으로 불가피하게 이어질 노선을 우리에게 강요하려 든다. 그들은 당이 추진하던 물가와 공업 제품 원가 인하 정책에 맞서고, 당시 진행 중이던 화폐 개혁에 맞서 — 통화 발행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우리 금융 체계 전체를 급격히 악화시키고 국민경제를 파괴하며 결국에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동맹의 기초를 무너뜨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어려움 앞에 공황에 빠진 트로츠키는 공업의 가장 가혹한 집중을 제안하고 나섰으며, 푸틸로프 공장과 브랸스크 공장 같은 곳을 포함한 일련의 최대 공장들을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폐쇄해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이 공장들의 폐쇄를 주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트로츠키가 우리 소비에트 경제의 본성과 발전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자본주의 경제와 동일시했음을 보여 준다.
당의 경제 정책에 맞서는 것과 동시에, 트로츠키와 그의 그룹은 당 활동가들에게 달려들어 온갖 방법으로 당 지도부와 당 간부들의 신용을 떨어뜨리고 그들을 중상하려 했다.
트로츠키파는 당의 기본 골간에 맞서, 레닌의 옛 볼셰비키 간부들에 맞서 중상을 일삼으며 선동적으로 당의 젊은 층을 그들과 대립시켰다.
그들은 중앙위원회와 지도적 당 간부들을 관료화와 변질로 비난하면서, 이를 우리 당의 총노선과 싸우는 방법으로 이용하려 했다.
트로츠키와 그의 동조자들의 기본 과제는 온갖 수단을 다해 레닌의 중앙위원회와 레닌의 당 간부들을 분쇄하는 데 있었다. 레닌의 당 지도부를 바꾸지 않고서는 자신들의 트로츠키파 정치 노선을 당에 강요할 수 없음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의 서한과 “46인”의 강령은 트로츠키파에게 분파 투쟁의 도구가 되었다. 트로츠키와 그의 지지자들은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 위원들에게만 비밀리에 보낸 그것을, 동시에 모스크바의 여러 구역과 다른 도시들에 당을 중상할 목적으로 널리 퍼뜨린다. 자신들의 중상적 분파 문서를 퍼뜨리고 당 지도부 몰래 그룹 회합을 조직함으로써, 그들은 모든 분파와 그룹의 해산에 관한 제10차 당대회의 결정을 공공연히 위반했다. 그뿐이 아니다. 그들은 잘 알려져 있듯이 레닌 동지의 발의로 채택된 제10차 당대회의 이 결정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그들은 당의 “체제”에 달려들면서, 예컨대 당 중앙위원회에 낸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현재 조성된 상황은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제10차 당대회 이후 객관적으로 형성된, 당 내부의 분파 독재 체제로 설명된다.”
(“46인” 그룹의 성명).
제10차 당대회 이후 형성된 “체제”가 V. I. 레닌의 직접적 참여 아래 만들어졌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 레닌적·볼셰비키적 체제가 트로츠키와 그의 지지자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1923년 10월에 소집된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총회는 10개 최대 조직의 대표들과 함께 트로츠키와 “46인” 그룹의 행동에 단호한 반격을 가하고, 이 행동들을 명백히 분파적인 것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10월 중앙위원회 총회의 경고는 당에 맞선 트로츠키의 투쟁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총회 직후, 중앙위원회 정치국과 중앙통제위원회 간부회가 만장일치로 채택한 당 건설에 관한 결의가 공표된 지 이틀째 되는 날, 트로츠키는 「새 노선에 관하여」라는 글을 들고 언론에 나섰다. 이 글은 사실상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와 그 지도부를 겨냥한 트로츠키의 분파 강령이었다. 이 글의 본질은 당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맞서도록 부추기고, 당의 청년을 당의 기본 핵심과 맞서도록 부추기며, 중앙위원회의 신용을 떨어뜨리려는 시도에 있었다.
트로츠키는 「새 노선에 관하여」에서, 당의 지도 간부들인 시련을 겪은 옛 볼셰비키들이 변질되고 있다는 자신의 이전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지금 당의 “기압계”이자 기본 세력은 학생 청년이라고 주장했다.
트로츠키의 목적은 당의 젊은 층, 무엇보다도 학생 청년을 레닌의 기본 간부들에게 맞서도록 부추기는 데 있었다. 아직 당에 맞선 트로츠키파 투쟁의 구조에 밝지 못하고 우리 당의 역사도 아직 알지 못하는 학생 청년에게 트로츠키는 기대를 걸었다.
이와 동시에 트로츠키파는 당 기구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며, 당 기구를 관료적 변질로 비난한다. 당을 그 기구와 대립시키려 하면서, 일부 트로츠키파는 “결의하는 것은 세포의 일이고, 집행하고 되도록 따지지 않는 것은 중앙위원회의 일이다”라는 말까지 했다.
이 모든 것은, 트로츠키파가 당 지도부에 맞서고 당 기구에 맞서고 당 규율에 맞서고 옛 볼셰비키 간부들에 맞선 공격과 행동으로, 당과 레닌의 중앙위원회에 맞선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분파주의와 그룹의 자유를 인정받는 것을 기본 과제로 삼았음을 조금도 의심할 여지 없이 보여 주었다.
당이 트로츠키파 분파의 이 공공연한 교란 활동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제13차 당협의회는 트로츠키파 반대파를 소부르주아 편향으로 규정하여 규탄하고, 모든 분파 활동을 중지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협의회는 결정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오늘의 ‘반대파’라는 형태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은 볼셰비즘을 수정하려는 시도이자 레닌주의로부터의 직접적 이탈일 뿐 아니라, 뚜렷하게 드러난 소부르주아 편향이기도 하다. 이 ‘반대파’가 프롤레타리아 당의 진지와 그 정책에 대한 소부르주아지의 압력을 객관적으로 반영한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당내 민주주의의 원칙들은 벌써 당 바깥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약화와 신흥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권리 확대라는 뜻으로 확대 해석되기 시작했다.”
(『결의로 본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제1권, 650쪽).
얼마 뒤 제13차 당대회와 코민테른 제5차 대회는 트로츠키주의와의 투쟁 문제에 관한 제13차 당협의회의 결정들을 전적으로 승인했다. 트로츠키파 반대파는 격파되었다. 당은 자신의 레닌적 중앙위원회 주위에 더욱 긴밀히 결속했다. 시련을 겪은 노동자 20만 명 이상을 우리 대열에 더한 레닌 입당 운동은 근로자들이 자신의 당을 신뢰한다는 빛나는 지표였고, 당이 관료화되고 변질되고 대중에게서 떨어져 나갔다는 트로츠키파의 중상적 비난에 대한 가장 좋은 답변이었다.
그러나 제13차 당대회와 코민테른 제5차 대회의 이 모든 경고와 지시도 트로츠키에게는 부족했다. 그는 당에 대한 공격을 그치지 않았다. 레닌 동지가 사망한 직후 트로츠키는 다시 당 지도부에 맞서고 나섰다.
1924년, 트로츠키는 저 악명 높은 『10월의 교훈』에서 10월 혁명의 역사적 사실들을 의식적으로 왜곡하고 당의 역사를 의식적으로 위조한다. 이로써 그는 한편으로 레닌주의를 자신의 그 유명한 연속혁명론으로 바꿔치기하고, 다른 한편으로 당 지도부의 신용을 떨어뜨려 이 길을 통해 당의 정책을 트로츠키주의의 정신에 따라 바꾸려 했다. 『10월의 교훈』에서 트로츠키는 레닌을 중상하여, 10월 혁명 준비기인 1917년 4월에 레닌이 “다시 무장”하고 자신의 옛 견해를 버리고 트로츠키주의의 입장으로 넘어갔다고 입증하려 했다.
이 모든 것은, 트로츠키가 레닌의 중앙위원회에 맞선 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심했으며 자신의 멘셰비키 노선을 당에 강요하려 할 것임을 의심할 여지 없이 보여 주었다.
『10월의 교훈』에 관하여 스탈린 동지는 당시 다음과 같이 썼다.
“트로츠키의 새로운 문필 활동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트로츠키주의로 되돌아가려는 시도, 레닌주의를 ‘극복’하고 트로츠키주의의 모든 특성을 끌어들여 심으려는 시도이다. 새로운 트로츠키주의는 옛 트로츠키주의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꽤나 털이 뽑히고 해어졌으며, 옛 트로츠키주의보다 정신에서 비할 수 없이 부드럽고 형식에서 온건하다. 그러나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사실상 옛 트로츠키주의의 모든 특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어서:
“새로운 트로츠키주의의 위험은 어디에 있는가? 트로츠키주의가 그 내적 내용 전체로 보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약화와 파괴를 추구하는 비프롤레타리아 요소들의 중심적 집결지가 될 온갖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데 있다.”
(스탈린, 『반대파에 관하여』, 121-124쪽).
이렇게 스탈린 동지는 더없이 천재적인 통찰력으로 이미 그때 트로츠키파 분파의 운명을 예언했다. 이 분파는 이제 반혁명 백위군 세력의 선봉대로 변질되어 노동계급의 가장 악에 받친 적들을 자신의 깃발 아래 모으고 있다.
이리하여 소련 사회주의 건설의 전망을 평가하는 데서, 이 단계에 정반대되는 두 노선이 뚜렷해졌다. 스탈린 동지를 선두로 한 당은 “네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러시아가 나올 것이다”[1]라고 레닌이 제시한 과제의 실현으로 확고한 방침을 잡고, 노동계급과 농민 기본 대중을 이 레닌의 구호를 실제로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영웅적 투쟁에 일으켜 세웠다. 트로츠키파는 그와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창조적 힘을 믿지 않고, 농민 기본 대중을 적대적인 프롤레타리아 세력으로 보며, 가장 짧은 기간 안에 서방에서 혁명이 승리하는 것 말고는 현 상황에서 벗어날 길을 보지 못했고, 우리 발전의 앞으로의 전망에 관한 문제들에서 투항주의 노선을 취했다.
이른바 “신반대파”에 관하여
당과 트로츠키주의의 이 투쟁에서 새로운 지노비예프·카메네프 분파는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
“신반대파”는 제14차 당대회에서 자신의 독자적 강령을 들고 공공연히 나섰다. 그러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당과 이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앞선다. 제14차 당협의회 이전에 이미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사실상 트로츠키주의의 입장으로 넘어갔다.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그들은 트로츠키파와 당 사이의 이견의 기본 문제에 관하여 트로츠키와 같은 입장을 취하고, 우리나라의 기술적 후진성 때문에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1925년 4월의 제14차 당협의회에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이견이 있음에도 아직 당에 맞서 공공연히 나서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의 문제에 관하여 그들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다수파와 함께 트로츠키파에 반대하여 투표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당에 맞선 공공연한 행동을 더없이 집중적으로 준비하는 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반당 사업을 지방 조직들, 특히 레닌그라드 조직으로 옮긴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소련 혁명의 앞으로의 전망 문제에서 투항주의적·트로츠키파적 입장을 취했으면서도, “신반대파”는 당을 공격하는 기본 무기로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다수파가 쿨라크 앞에 투항하고 있다, “쿨라크 편향으로 미끄러지고 있다”는 따위의 선동적 비난을 택한다. 달리 말해 신반대파는 트로츠키파의 낡은 날조와 선동을 되풀이한다.
지노비예프·카메네프 그룹은 레닌그라드에 콤소몰 중앙위원회로부터 독립한 콤소몰 분파 본부를 만들어 당 중앙위원회에 맞서 싸우려 한다. 콤소몰 중앙위원회 뷰로의 승인 없이 콤소몰 시 협의회에 일련의 콤소몰 구베르니야 위원회(17개 구베르니야 위원회)의 대표들을 불러, 레닌그라드 콤소몰 상층부를 중앙위원회에 대립하는 전연방 본부로 바꾸려 한 것이다.
1925년 여름 레닌그라드의 콤소몰 활동가들은 지노비예프, 사파로프 등의 지도 아래 지하 서클에 모이기 시작했다. 지노비예프 그룹은 비밀 서클들과 “지노비예프 세미나”에서 날마다 레닌그라드 콤소몰원 상층부를 공작하여, 그들을 당 중앙위원회에 맞선 음모 사업의 조직자로 길러 냈다. 콤소몰의 이 상층부에게는, 바로 그들 지노비예프파가 진정한 레닌주의의 담지자이며 당 중앙위원회는 “쿨라크 정책을 추진한다”는 생각이 주입되었다.
지노비예프·카메네프 그룹은 콤소몰원들에게 당에 맞선 지하 사업의 기술과 비밀 활동 및 음모의 수법을 가르치고, 당 지도부에 맞선 “콤소몰 지도자들”의 반당적·반소비에트적 행동을 온갖 방법으로 장려했다. 예컨대 지금은 총살된 백위군 분자 루먄체프(당시 콤소몰 레닌그라드 구베르니야 위원회 서기)는 중앙위원회의 결정으로 당 레닌그라드 구베르니야 위원회 서기 P. 잘루츠키가 해임되었을 때, 구베르니야 위원회 뷰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레닌의 노선을 추진한다고 해서 중앙위원회가 우리를 때리고 있다.”
구베르니야 위원회 뷰로에서 이 반당적 발언은 아무런 반격도 받지 않았다.
일은 콤소몰원들을 “준비시키는” 데 그치지 않았다. 앞으로 지노비예프파 반대파의 기본 활동가층이 될 사람들이, 중앙위원회에 맞서 투쟁할 태세가 되어 있는지 미리 검증을 거쳐 차츰 강사와 수강자로 “지노비예프 세미나”에 끌려 들어온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이미 부족했다. 지노비예프파에게는 당에 맞서 싸울 공개 연단이 필요했다. 지노비예프는 레닌그라드에서 잡지 『볼셰비크』를 발행하는 문제를 중앙위원회에 제기하면서, 이를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가 발행하는 『볼셰비크』와 대립시킨다. 이 잡지의 분파적 목적은 지노비예프가 자신의 가장 검증된 지지자들로 제안한 편집진의 구성만 보아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지노비예프·카메네프 반대파가 당에 맞서 공공연히 나선 시작은 1925년 10월 중앙위원회 총회로 보아야 한다. 총회에서 반대파는 공개 토론을 요구했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소콜니코프, 크룹스카야가 서명하여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앞으로 보낸 메모에서 당 중앙위원회에 전혀 근거 없는 일련의 비난이 제기되는데, 이것이 토론의 기초가 되어야 했다.
반대파는 술책을 부리며 당 중앙위원회에 제기한 일련의 비난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총회 다수파와 함께 중앙위원회의 제안에 찬성 투표한다. 농촌 빈민의 조직과 빈민 원조에 관한 문제, 당내의 두 편향과 그에 대한 투쟁에 관한 문제가 만장일치로 해결되고, 끝으로 토론을 열지 않는다는 결의가 만장일치로 채택된다.
토론을 열지 않기로 만장일치로 채택된 결정에도 불구하고, 지노비예프 그룹은 바로 이튿날 이를 위반한다.
콤소몰 레닌그라드 구베르니야 위원회는 이른바 “파란 서류철”을 복제하여 구역들에 발송한다. 서류철에는 다음과 같은 표제가 붙어 있다.
“극비”. “수고(手稿) 취급. 제14차 당협의회부터 10월 총회까지 당 언론에 발표된, 농촌에서 당의 계급 노선 문제에 관한 자료들”.
(논문집 『1925년 토론』, 국립출판사, 1929년, 16쪽).
“파란 서류철”은 당시 콤소몰 레닌그라드 구베르니야 위원회 서기였던 루먄체프의 지시로 작성되었다. 서류철에는 중앙위원회 위원들의 글에서 뽑은 대목이 부정직하게 인용되었고, 거기에 무식한 주석이 달렸는데, 이 주석은 지노비예프와 사파로프의 저작이 레닌주의의 참된 해석이며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쿨라크 편향으로 미끄러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파란 서류철”의 발간은 당 레닌그라드 구베르니야 위원회로부터 규탄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22차 레닌그라드 구베르니야 당협의회에서 당시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던 쿠클린이 이 행위를 변호하고 나섰다. 다음은 협의회에서 한 그의 연설의 한 대목이다.
“...저는 문제를 이렇게 봅니다. 제 레닌 책에 어린 아들 녀석이 거위와 소를 그려 놓았습니다. 그게 그리 큰 범죄입니까. 이 책자도 똑같습니다. 이건 오해로, 생각이 모자라서, 젊어서 한 일이니 그것을 죄로 삼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쿠클린, 제22차 레닌그라드 당협의회 연설, 논문집 『1925년 토론』, 20쪽).
이와 같이 지노비예프파는 콤소몰원들을 체계적으로 당 중앙위원회에 맞서도록 부추겼다. 그리고 당이 레닌그라드 콤소몰원들의 반당 활동을 폭로하면, 지노비예프파는 그들을 전적으로 비호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1925년에 레닌그라드 콤소몰 조직을 이끌던 바로 그 레닌그라드 콤소몰 지도자들이 키로프 동지 살해의 적극적 조직자로 드러나 마침내 프롤레타리아 법정에 섰다는 점이다. 루먄체프, 코톨리노프, 톨마조프, Iv. 타라소프, 사파로프, 파이빌로비치, 체이틀린 등 — 이들이 1925년에 당에 맞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우리 당 지도자들을 겨냥한 지노비예프의 테러 임무를 수행하는 활동가였던 지노비예프파의 콤소몰 활동가층이다.
그러므로 1925년에 레닌그라드 콤소몰 조직을 이끌던 콤소몰원들이 S. M. 키로프 살해의 적극적 조직자로 드러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총살된 루먄체프, 코톨리노프, 톨마조프, 여러 기간의 징역을 선고받은 Iv. 타라소프, 파이빌로비치, 체이틀린 등 — 이들이 1925년에 당에 맞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1932-1934년에 우리 당 지도자들을 겨냥한 지노비예프의 테러 임무를 수행한 지노비예프파의 저 콤소몰 활동가층이다.[2]
제14차 당대회 전야에 제22차 레닌그라드 협의회가 열렸는데, 그 대의원들은 구역 당협의회들에서 면밀하게 “선별”되었다.
구역 협의회들이 열리는 동안 이미 지노비예프파는 자신들의 양면주의적 사업을 전면적으로 펼쳤다. 지노비예프파 지도부는 당 활동가들에게, 레닌그라드 당 조직을 협의회들과 제14차 당대회에 대비하여 어떻게 양면적으로 준비시켜야 하는지 특별히 지시했다.
레닌그라드의 한 구역 서기 체르니는 지노비예프파의 전술을 지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우리는 구역 및 구베르니야 협의회들과 제14차 당대회에 대비한 준비 사업을 조심스럽게 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관점을 전당과 중앙위원회 앞에 밝히되, 구역 협의회들에서는 4분의 1 목소리로, 구베르니야 당협의회에서는 절반 목소리로 하고, 제14차 당대회에서는 우리 대표단이 이 관점을 온 목소리로 밝혀야 합니다.”
(『1925년 토론, 자료와 문서』, 국립출판사, 모스크바-레닌그라드, 1929년, 30쪽).
실제로 지노비예프파는 당에 맞선 자신들의 투쟁을 위장하면서, 구역 협의회들에서 자신들이 당 중앙위원회 전체에 반대한다고 공공연히 밝히지 않았다. 구역 협의회들에서, 또 그보다 더 제22차 구베르니야 협의회에서 이 양면분자들은 정치국의 개별 위원들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일에 착수하여, 그들에 관한 갖가지 중상적 소문을 퍼뜨렸다. 그와 동시에 지노비예프파는 위선적으로 자신들이 당 중앙위원회를 지지한다고 밝혔는데, 이로써 중앙위원회에 맞선 자신들의 실제 투쟁을 숨기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노비예프는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사업 보고에 관한 결론 발언을 이렇게 맺었다.
“... 우리 레닌그라드 조직은 한 사람처럼 중앙위원회를, 단일한 레닌의 노선을, 레닌주의를 지지합니다.”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레닌그라드 구베르니야 조직 제22차 협의회 속기록, 1925년 12월 1-10일, 레닌그라드, 노동자 출판사 “프리보이”, 16쪽).
지노비예프는 이렇게 레닌그라드 조직과 전당에 자신이 중앙위원회를 지지한다고 장담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제14차 당대회에서, 즉 이 위선적 성명으로부터 8일 뒤에 지노비예프는 특별 부보고를 들고 중앙위원회에 맞서 나섰다.
제14차 당대회를 앞둔 지노비예프파의 이 양면주의적 준비는 다른 조직들에도 알려졌다. 그래서 레닌그라드 협의회와 동시에 열린 모스크바 구베르니야 당협의회는 결의에서 레닌그라드 당 조직 지도부를 날카롭게 규탄했다.
지노비예프는 모스크바 협의회의 결의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협의회 폐회 연설에서 지노비예프는 이렇게 말했다.
“당대회에서 우리 처지가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거기서는 더없는 자제와 규율, 그리고 우리 대표단 대열에서나 우리 조직 전체의 대열에서나 더없는 강철 같은 단결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틀림없이 이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날 것이며, 레닌그라드 조직이 이런저런 동지, 이런저런 조직과 갈라선 문제들에서 레닌그라드 조직이 옳음을 입증할 수 있으리라고 저는 희망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채택될 어떤 결정에도, 물론 그 결정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채택되는 경우에도 복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레닌그라드 구베르니야 조직 제22차 협의회 속기록, 1925년 12월 1-10일, 레닌그라드, 노동자 출판사 “프리보이”, 12쪽).
보다시피 지노비예프는 양면주의 노선을 끝까지 지켰다. 협의회에서 토론은 전적으로 중앙위원회의 노선을 겨냥했으나, 정치국의 개별 위원들을 비판한다는 구실을 달고 있었다. 모스크바 구베르니야 당협의회의 결의가 나온 뒤에도, 모스크바 볼셰비키들이 레닌그라드 당 조직에 특별 호소문을 보낸 뒤에도, 지노비예프는 자신들의 이견은 개별 동지들과의 이견일 뿐이며 자신들은 당대회의 결의에 복종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다시피 지노비예프파는 협의회 첫 회의부터 레닌의 중앙위원회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그 뒤로는 반대파가 중앙위원회 총회의 결정과 당 규율의 기본 규칙을 위반하고 제14차 당대회에서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맞서 공공연히 나서기로 결심했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로 그러했다. 제14차 당대회에 나간 레닌그라드 대표단은 당에 맞서 분파 투쟁을 벌일 태세가 된 자들로 인위적으로 짜였다. 대표단의 요구에 따라 지노비예프는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보고에 대한 부보고를 했다.
지노비예프는 반대파의 이름으로 한 부보고에서 일련의 반레닌주의적 명제를 내놓았다. 그는 소련 사회주의 건설의 전망에 관한 트로츠키파의 입장에서 출발하여 우리의 국영 공업, 네프 등에 잘못된 반레닌주의적 규정을 내렸다.
그는 네프를 전면적 후퇴로, 우리의 공업을 국가자본주의 공업으로 규정하면서, 눈앞의 어려움 앞에서 공황에 빠져 물러서고 당을 모험과 투항이라는 트로츠키파 정책의 길로 떠밀려 한다. 이 문제들은 아래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다. 여기서는 지노비예프파 반대파가 당에 맞서 싸울 “동맹자”를 찾아 나서면서 이미 제14차 당대회에서 모든 원칙성과 결별했다는 점만 지적해 둔다. 반대파는 당이 쿨라크의 위험을 과소평가한다느니 “테르미도르주의”에 빠졌다느니 하며 선동적으로 비난하면서, 모든 반당 그룹의 합법화와 상설 토론을 요구했다.
지노비예프는 제14차 당대회 맺음말에서 반대파의 이름으로 이렇게 요구했다.
“...우리 당 안의 모든 옛 그룹의 모든 역량을 일에 끌어들이는 임무를 중앙위원회에 맡길 것을...”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제 생각으로는, 당 중앙기관지에 딸린 상설 토론 기관, 곧 동지적인 틀 안에서 제기되는 쟁점을 논의할 참된 자유를 보장하는 주간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문제들이 이토록 복잡하고 지금 우리가 겪는 충돌들이 있는 터에, 그것 없이 우리는 해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노비예프,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제14차 당대회 속기록, 467쪽).
여러 대표단이 제출한 중앙위원회 보고에 관한 결의안은 당 중앙위원회의 정책을 승인하고 반대파의 견해를 비레닌주의적이라고 규탄하는 것으로, 당대회의 압도적 다수로 채택되었다.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진 것은 보잘것없는 소수, 곧 반대파 대의원 65명뿐이었다.
이렇게 제14차 당대회에서 “신반대파”는 당을 겨눈 첫 공공연한 도발에서 궤멸적인 반격을 받았다.
다음과 같은 특징적인 대목도 지적해 두어야 한다. 지노비예프파 반대파는 자기 우두머리들이 레닌그라드에서 일했다는 것을 근거로 스스로를 레닌그라드 반대파라고 불렀다. 그들은 선동의 목적으로 레닌의 도시에 있는 가장 오래된 당 조직의 전투적인 이름을 이용하려 했고, 바로 이 조직이 당에 맞선 투쟁에서 자신들의 버팀목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 레닌그라드 당 조직은 레닌주의 중앙위원회의 충실한 버팀목이었다.
알려져 있듯이 제14차 당대회가 끝나자마자 레닌그라드에서는 당 중앙위원들이 당대회 보고 활동을 벌였다. 토론 결과, 제14차 당대회의 결정에 찬성한 공산주의자는 60,228명으로, 모든 회의 참석자 총수의 96%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반대파의 제안에 찬성한 사람은 모두 2,190명, 곧 3.5%뿐이었다. 보다시피, 지노비예프파의 주장으로는 자신들의 버팀목이라던 레닌그라드 당 조직조차 제14차 당대회 바로 다음 날 압도적 다수로 지노비예프파에 반대하고, 이른바 “레닌그라드 반대파”에 반대하는 뜻을 밝혔다.
이미 지노비예프파 반대파가 발전해 가던 이 단계에서 그 우두머리들이 동조자들 사이에, 특히 청년들 사이에 당의 기본적인 레닌주의 지도 핵심에 대한 증오를 길러 내기 시작했다고 말해야 한다.
이 점에서 예컨대 다음과 같은 사실이 시사적이다.
제14차 당대회 전에, 특히 당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신문 『레닌그라드 프라우다』는 당대회의 결정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제14차 당대회는 특별 결정으로 『레닌그라드 프라우다』의 편집인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검증된 볼셰비키 I. I.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새 편집인은 레닌그라드에서 우리 당의 역사에 전혀 유례가 없는 현상들과 마주쳤다. 지노비예프파가 제14차 당대회 전부터 벌여 온 당에 대한 악의적인 공세는 더없이 용납할 수 없는 형태로 터져 나왔다. 그리하여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 동지는 제14차 당대회와 스탈린 동지 앞으로 보낸 전보에서 다음과 같이 알렸다.
“대표단들이 잇달아 찾아와 5시부터 2시까지 몇 시간씩 머문다. 스크보르초프의 집무실과 다른 방들이 대표단들로 가득 찼고, 그들은 더없이 용납할 수 없는 태도로 협박을 섞어 결의문 게재를 요구한다. 내일도 신문이 모스크바 편향으로 나온다면, 하고 지노비예프파 대표 한 사람은 말한다, 우리가 모두 몰려올 것이고 당신들은 여기 있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직접 신문을 내겠다!
‘노동자 천 명 넘게 데려와 당신들을 여기서 내쫓겠다’, 하고 지노비예프파 대표 또 한 사람이 위협한다.
편집국 기구는 일을 사보타주할 뿐 아니라 더 단호한 행동을 촉구하며 대표단들의 기세를 부채질한다. 일하는 동지들에게 ‘밀정’, ‘도발자’ 같은 모욕적인 말만이 아니라 물리적 폭력의 노골적인 위협까지 던져진다. 콤소몰원들이 특히 호전적인 기세를 보인다. 편집국 책임 비서 마트베예프는 편집국 업무에 가장 큰 혼란을 일으키고 있으며, 업무를 라파일에게 넘기라는 스테파노프의 제안을 수행하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보란 듯이 자기 집무실 문을 잠근 채 다른 책임 일꾼들과 함께 편집국을 떠났다.
일할 여건은 도무지 믿기 어려울 지경이다. 시위자들과 옛 편집국 기구의 조직적인 행동 때문에 내일 시위가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
(논집 『1925년 토론』. 자료와 문서, 323쪽).
이 파시스트적 수법은, 당시 『레닌그라드 프라우다』 편집국의 수장이 지노비예프파 자크스-글라드네프였고 나중에 밝혀진 대로 그가 적극적인 테러리스트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이해가 간다.
그들은 선동과 박해와 중상이라는 더없이 무원칙하고 반당적인 방법을 써서, 동조자들 사이에 스탈린 동지에 대한 특별한 증오를 길러 냈다.
예컨대 지노비예프파 반대파의 참가자 가운데 한 사람인 전 콤소몰 레닌그라드 구베르니야 위원회 서기 루먄체프는 당시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제 정치 생활은 제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에게서 받은 교육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 저는 지노비예프가 레닌의 진정한 제자라고 믿었습니다 ... 저는 제14차 당대회 전에 콤소몰을 당에 맞세웠습니다. 저는 정치국원들의 신망을 떨어뜨리는 일을 조직했습니다. 저는 콤소몰 본부를 조직했고, 당 지도부를 겨냥한 반소비에트 노래를 익히게 했으며, 어떤 결정에 대해서든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당과 정부의 권위를 허물었습니다. 비당원들과 콤소몰원들 사이에 비합법 문헌을 퍼뜨렸는데, 이 모든 일을 ‘안 잡히면 도둑이 아니다’, ‘지도 기구에 거짓말하고 속여라’라는 구호 아래 했습니다.”
(루먄체프, 1934년 12월 28일 최고재판소 순회 재판 회의에서 한 진술).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가 당과 벌인 투쟁의 이 단계를 특징짓는 기본 사실들은 이러하다.
전체적으로 이 단계는 소련 사회주의 건설을 지향하는 당의 총노선에 맞서 공공연한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반레닌주의적 트로츠키파 명제들을 토대로 반대파 간부들을 모으고 결집한 단계다.
이를 위해 지노비예프와 트로츠키는 자기 분파들의 이름으로 모든 반당 그룹의 합법화와 당내 상설 토론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 레닌주의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있지도 않은 오류들을 두고 파렴치한 반혁명적 선동을 부풀린다.
이를 위해 소비에트 권력의 테르미도르적 변질이라는 카우츠키-우스트랴로프의 낡아 빠진 이론을 끄집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