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승리의 순간에, 당이 지배적인 바로 그 순간에 중앙위원회를 떠난다.' 1917년 11월, 리코프는 전 사회주의 정당 연립정부를 요구하며 카메네프·지노비예프 등과 함께 사퇴했다. 9일 후 철회.
레닌 사후 소련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6년간 정부를 이끌며 네프 체제의 행정적 연속성을 대표한 볼셰비키 지도자이다. 내전기에는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으로 전시 경제를 총괄하고 붉은 군대의 병참을 지휘했으며, 총리로서는 부하린·톰스키와 함께 당내 '우파'의 핵심으로서 농민과의 동맹, 시장을 통한 점진적 사회주의 건설, 균형 잡힌 공업화를 주장했다. 1928-29년 곡물 조달 위기 속에서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와 급속 공업화 노선에 맞섰으나 결국 '우파 반대파'로 낙인찍혀 1930년 실각했고,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처형되었다.
경력 연표
- 1924–1930인민위원회의 의장
관련 역사 사건
- 1917.10–1918.0110월 혁명내무 인민위원초대 내무 인민위원이 되었으나, 곧 전 사회주의 정당 연립정부를 요구하며 잠시 사임했다.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최고경제회의 및 정부 지도자
- 1922.12소련의 결성레닌의 그루지야 특사레닌의 지시로 그루지야에 파견되어 오르조니키제의 아파트에서 코바히제 구타 사건을 직접 목격했고, 이 사건은 레닌이 스탈린과 제르진스키에게 정치적 책임을 묻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 1921–1928신경제정책(네프)정부수반레닌 사후 인민위원회 의장으로서 네프 경제의 운영을 책임졌다.
- 1928–1937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정부 수반, 반대자인민위원회 의장으로서 초고속 노선의 무리함을 경고하다 1930년 해임됐다.
- 1937–1938대숙청표적1938년 모스크바 재판 뒤 처형된 전 정부수반이었다.
지하 혁명가에서 내전의 경제 총지휘자로
리코프는 1899년(일부 자료는 1898년) 18세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카잔 대학 법학부 1학년 때 지역 위원회에 들어가 노동자 서클을 지도했다. 1901년 체포된 이후 1917년 2월 혁명까지 합계 5년 반을 감옥과 유형지에서 보냈으며, 그때마다 탈출했다. III·IV차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V차 대회에서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었고, 1905~1907년과 1910~1911년(프랑스 망명) 등 수차례에 걸쳐 당 지도부에 참여했다. 1911년 프라하 당 대회 준비를 위해 러시아로 파견되었으나 모스크바에서 체포되어 아르한겔스크주 피네가로, 이후 나림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석방된 직후 모스크바 소비에트 부의장에 선출되었고, 10월 혁명에서는 첫 소비에트 정부의 내무인민위원이 되어 '노동자 민병대에 관한 포고령'에 서명했다. 그러나 전 사회주의 정당 연립정부를 주장하며 9일 만에 인민위원회의와 중앙위원회에서 사퇴(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과 함께)했다가 곧 사퇴를 철회했다. 내전기에는 최고국민경제회의(VSNKh) 의장(1918~1921), 노농방위회의(S TO)의 적군·함대 보급 특별전권위원(чусоснабарм)을 겸임하며 붉은 군대의 병참을 총괄했고, 1919년에는 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도 지냈다. 1918년 적색 테러에는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1923년 VSNKh 의장으로 재임되어 레닌의 병환 속에서 정부 실무 전체를 지휘하다 1924년 2월 레닌의 후임 총리가 되었다.
레닌 후임 총리 — 네프의 행정적 연속성
리코프는 1924년 레닌 사후 인민위원회의 의장(총리)이 되어 네프 체제의 행정적 연속성을 대표했다. 그는 농민과의 동맹, 시장 메커니즘의 점진적 조정, 균형 잡힌 공업화를 주장한 '우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1928-29년 곡물 조달 위기 속에서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와 급속 공업화 노선에 반대했고, 부하린·톰스키와 함께 '우파 반대파'로 낙인찍혔다. 1930년 총리직에서 해임된 후 점차 정치적으로 소멸되었고,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반소비에트 블록'의 일원으로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