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파주의에서 공공연한 반혁명으로
인물니콜라이 예조프, 레프 트로츠키,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이오시프 스탈린, 게오르기 퍄타코프, 세르게이 키로프, 그리고리 소콜니코프, 카를 라데크, 빅토르 바카예프, 블라디미르 레닌, 이반 스미르노프, 그리고리 예브도키모프, 야코프 드롭니스, 세르게이 므라치콥스키, 니콜라이 무랄로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미하일 톰스키, 레오니트 니콜라예프, 아돌프 히틀러, 니콜라이 부하린, 알렉세이 리코프, 레오니트 세레브랴코프, 블라디미르 루먄체프, 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 니콜라이 우글라노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마르테먄 류틴, 이반 코톨리노프, 안드레이 즈다노프, 스타니스와프 코시오르, 파벨 포스티셰프, 야코프 리프시츠, 니콜라이 우스트랴로프, 바실리 시미트, 드미트리 시미트 (붉은 군대 지휘관), 이바르 스밀가, 이반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 알렉산드르 벨로보로도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파니 카플란, 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 로베르트 에이헤, 미하일 라셰비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페르디난트 라살레, 비사리온 로미나제,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 티모페이 사프로노프,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보리스 수바린, 미하일 프룬제, 안드레이 시쿠로, 루돌프 헤스, 얀 스텐, 알렉산드르 슬렙코프, 레프 소스놉스키, 니콜라이 카레프, 알렉세이 바다예프, 표트르 팔친스키, 카를 코르슈, 조르주 클레망소, 카를 카우츠키, 아우구스트 베벨, 오토 폰 비스마르크, 니콜라이 글레보프-아빌로프 용어내무인민위원부(NKVD), 대숙청, 예조프시나, 모스크바 재판, 좌익반대파, 신반대파, 통합반대파, 우익반대파 사건대숙청
“1935년 2월 말인가 3월에 퍄타코프는 단둘이 나눈 대화에서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조직 안에서 달라진 자신의 역할을 내게 이야기했다. 그는 그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으로 이루어진 궤멸된 본부를 대신하여 새 본부가 들어섰으며, 거기에 그 자신 퍄타코프와 K. 라데크, 소콜니코프가 들어 있다고 내게 알렸다. 그는 자신이 이미 적극적인 테러 활동에 착수했다고 내게 말했다...”
(율린의 진술, 1936년 10월 15일 조서).
병행 본부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떠맡은 의무를 다하려고 애썼다. 본부 구성원은 저마다 테러 그룹들을 조직했고, 그런 다음 자기들의 반혁명 활동 경과를 서로 알렸다. 퍄타코프는 자기 진술에서 소콜니코프가 그에게 알려 준 테러 그룹의 활동을 이야기한다.
“이 대화에서 소콜니코프는 모스크바에 이미 그룹이 하나 있다고 내게 알렸는데, 자크스-글라드네프와 티벨의 이름을 댔던 것 같다. 그 그룹은 스탈린에 대한 테러 행위를 적극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소콜니코프는 또 자신이 K. 라데크와 연계를 맺었으며, 라데크는 트로츠키파 역사가 그룹과 연결되어 있고 트로츠키와 개인적 연계를 갖고 있다고 내게 알렸다. 소콜니코프의 말에 따르면 이 연계는 라데크의 위임으로 베를린에 있는 『이즈베스티야』 특파원 부하르체프가 맡고 있다고 했다.”
(퍄타코프의 진술, 1936년 10월 26~27일).
퍄타코프가 만든 테러 그룹들의 활동 정도와 테러 행위의 실천적 준비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증언한다.
서시베리아에서는 몰로토프, 에이헤 동지에 대한 암살 기도가 준비되었고, 우랄에서는 오르조니키제, 카가노비치 동지를 살해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으며, 아조프-흑해 지방에서는 스탈린 동지를, 레닌그라드에서는 즈다노프 동지를 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테러 그룹들의 가장 적극적인 참가자들의 다음 진술은 예비 본부의 테러 활동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충분히 보여 준다.
아조프-흑해 지방의 테러 분자 도로페예프는 스탈린 동지 살해 준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1935년 초, 키로프 동지 살해 뒤에 벨로보로도프는 두카트가 소치에서 스탈린을 살해할 기회를 놓쳤다고 그를 꾸짖었다. 그는 사람도 충분하고 기회도 있는데 일이 더디게 나아간다고 내게 말했다.
벨로보로도프는 키로프 살해에 큰 의의를 부여하면서, 테러 행위가 성공했다는 사실 자체가 테러 지지자의 수를 늘리고 테러 성향을 지닌 분자들의 적극성을 높일 것이라고 말했다.
1935년에 스탈린 살해 준비는 조직이 매우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여름에 두카트는 스탈린의 경로를 추적하고 필요하면 테러 행위를 저지를 전투원들을 로스토프에서 불러오기 위해 소치로 떠났다.
두카트가 떠나기 전에 나는 벨로보로도프의 집에서 그를 만났는데, 그 자리에는 나와 두카트 말고 야블론스카야도 있었다. 두카트는 소치에 현지 주민 가운데 5~7명으로 된 그룹이 있으며 그들이 스탈린을 감시하고 있다고 내게 이야기했다.”
(1936년 9월 10일 수사 조서).
같은 시기에 트로츠키파는 오르조니키제 동지에 대한 암살 기도를 준비했다. 오르조니키제 동지가 자주 기업소들을 돌아다니는 점을 고려하여, 트로츠키파는 그가 공장을 방문하는 동안 암살 기도를 실행하려 했다. 이 준비는 트로츠키파 반혁명 도당의 대표자 여럿이 동시에 진행했다.
트로츠키파 고로호프는 이 준비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오르조니키제가 우랄마시 공장에 머무는 동안 우리가 감행했으나 실패한 그에 대한 암살 기도를 내가 올홉스키에게 알렸을 때, 올홉스키는 같은 시기에 니즈니타길에서도 자기가 암살 기도를 조직했다고 내게 알렸다. 특히 그는 오르조니키제가 우랄바곤스트로이에 왔을 때 공장 안 막다른 선로 하나에 서 있던 그의 객차를 향해, 오르조니키제 동지의 객차를 부술 목적으로 짐을 실은 화차 몇 량을 흘려보냈다고 이야기했다. 충돌은 일어났다고 하나 오르조니키제의 객차 앞에 입환 기관차가 있어서 달려든 화차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고 오르조니키제의 객차는 멀쩡했기 때문에 기대한 결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올홉스키의 의견으로는 오르조니키제에 대한 암살 기도를 조직한 이 계획은 치밀하게 궁리되었고 매우 훌륭했으므로, 오르조니키제의 객차를 부수는 데 성공했다면 업무상의 사고라고 둘러대어 이 암살 기도에 조직이 가담한 흔적을 쉽게 감출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체포된 고로호프의 진술).
우리는 테러 활동을 펼치라는 트로츠키의 지령이 병행 본부 구성원들과 그들의 수하들에 의해 온갖 파렴치함으로 실행되었음을 본다.
트로츠키파 테러 그룹들의 대표자들은 적극적인 백위파 파시스트 분자들과 연결을 맺었는데, 이는 그들의 도움을 받고 그들의 봉사를 이용하여 테러 행위의 준비와 실행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어 가기 위해서였다.
병행 본부와 그에 연결된 트로츠키파 테러 그룹들의 테러 활동의 양상은 이와 같다.
파시스트 트로츠키, 노동계급 수령들에 대한 테러 행위의 주된 조직자
이상이 파시스트 트로츠키를 주된 고취자이자 조직자로 하는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도당의 비열한 반혁명 활동의 사실들이다.
자신의 폭로에 겁먹은 트로츠키는 이 사실들을 부인하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반박할 수 없는 것을 반박할 결의는 어떻게 해서든 책임을 벗어나려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입장, 아무 근거 없이 사실을 그저 부인하는 입장을 트로츠키는 취했다. 그러나 그는 책임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법정에 선 그의 가장 가까운 벗과 전우들이 트로츠키를 고스란히 까발렸다. 1936년 8월 19~23일에 열린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테러 본부 재판에서 트로츠키의 가장 믿음직한 사람들은 그들이 언제 어디서 그를 만났는지, 그에게서 어떤 지령을 받았는지 이야기했다. 현행범으로 붙잡힌 이 반혁명 분자들은 전 세계 앞에서 자기들의 테러 활동을, 자기들이 트로츠키의 지도 아래 어떻게 S. M. 키로프를 흉악하게 살해했는지, 스탈린 동지와 그의 전우들에 대한 암살 기도를 어떻게 준비했는지 이야기했다.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게슈타포 첩자이자 비열한 살인의 조직자 트로츠키에게 경멸로써 낙인을 찍었다. 그러자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트로츠키는 자기가 국외에 있어 프롤레타리아 법정의 손이 닿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하여, 모두에게 명백한 사실들을 그저 부인하기 시작했다. 트로츠키는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를 공개적으로 반박하겠다고 약속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반박문을 내놓겠다고 약속한 때로부터 이미 ....개월이 지났건만 반박문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그런 반박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거짓임이 완전히 입증된 알맹이 없는 주장뿐이다.
1936년 8월 17일 자 『아르베이데르블라데트』 신문에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밝힌다.
“타스 통신의 보도에는 사건이 체제의 수령들에 대한 테러 음모에 관한 것이며 이 음모를 내가 노르웨이에서 지도하고 있다는 주장이 들어 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이 보도가 나의 사상과, 그리고 지금은 오직 저널리즘의 성격을 띠는 나의 모든 활동과 가장 날카롭게 모순된다고 밝힌다.”
알고 보니 이 게슈타포 첩자는, 그의 주장을 믿는다면, 테러 활동과 아무 관계가 없고 더없이 순진한 저널리즘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프롤레타리아 법정은 트로츠키가 이른바 순진한 저널리즘 활동을 구실로 사회주의 나라의 수령들에 대한 테러를 조직해 왔음을 아무 이론의 여지 없이 입증했다.
그러나 이 어린양의 말을 더 들어 보자. 트로츠키의 성명에서 우리는 이어서 다음을 읽는다.
“완전히 절망한 젊은 관료가 키로프를 살해한 이래 나는 여러 글에서 테러 방법을 경계했고, GPU가 거대한 사법적 사기를, 곧 정치적 반대파와 절망에 빠졌거나 히스테리에 걸린 몇몇 개인 사이의 존재하지 않는 연관을 의식적으로 지어내는 일을 저질렀다는 나의 확고한 확신을 키워 왔다.”
니콜라예프가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테러 본부의 직접 위임으로 S. M. 키로프를 살해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현행범으로 붙잡혀 프롤레타리아 법정에 선 트로츠키의 지지자들 스스로가 이를 확인했다.
그런데 트로츠키는 니콜라예프를 그저 “절망한 젊은 관료”라고 선언하며 이 비적과 온갖 방법으로 선을 긋는다.
트로츠키가 S. M. 키로프의 살해자들과 선을 긋는 것만이, 최근 몇 해 동안 순진한 저널리즘 활동만 하고 있는 척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는 더 나아가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테러 본부 구성원들을 공공연히 변호하고 나선다. 그들 자신의 자백과는 반대로 트로츠키는 소련에 있는 그의 대리인 스미르노프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바카예프와, S. M. 키로프의 살해자 니콜라예프 사이에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밝힌다.
자기들이 직접 레닌그라드 테러 분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는 바카예프와 카메네프의 자백이 트로츠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에게 본부 구성원인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미르노프, 므라치콥스키는 “정치적 반대파”를 체현하는 자들이었고, 본부의 지령을 수행한 테러 분자들은 그저 절망에 빠졌거나 히스테리에 걸린 개인들이다.
법정에서 전 세계 앞에 지노비예프파와 트로츠키파의 테러 활동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보아하니 이 사실들이 자신의 거짓 주장과 맞지 않으면 그만큼 더 나쁜 것은... 사실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하는 모양이다.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테러 본부 구성원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니콜라예프와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는지, 어떻게 그에게 지시를 내리고 그가 S. M. 키로프를 살해하도록 도왔는지 진술했다.
단일한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반혁명 테러 조직에서 지도자들과 실행자들을 떼어 놓으려는 트로츠키의 시도는 쓸모없는 수단을 쓴 시도다.
파시스트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첩자 트로츠키와 그의 변호사들만이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반혁명 도당의 두목들을 “정치적 반대파”라고 부를 만큼 파렴치해질 수 있다.
우리의 잊을 수 없는 S. M. 키로프의 살해자들은 정치적 반대파가 아니라 짐승이 된 비적들이다. 그들 자신의 자백에 따르면 그들은 대중에게서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 카메네프의 자백에 따르면 그들의 손은 파시스트의 손과 뒤엉켰고, 그들의 이데올로기 전부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수령들을 겨눈 권총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 가운데 하나인 이 짐승이 된 정치 비적들을 정치적 반대파의 역할로 내세우는 데 트로츠키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트로츠키가 트로츠키파와 자신의 관계를 부인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우리 수령들을 죽이려고 파견된 첩자·테러 분자들은 테러 분자들과 그의 연계를 온갖 방법으로 숨기라는 트로츠키의 직접 지시를 받았다. 이우두시카 트로츠키[14]에게는 역사적 선례가 있었다. 사회혁명당원 카플란은 V. I. 레닌을 암살하려 했을 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가 파견했는데도 사회혁명당과의 연계를 전면 부인했다. 트로츠키는 이 선례를 따르기로 하고 “일찍이 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가 카플란 여사에 대해 취한 것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어떤 입장을 취하든 그의 손을 물들인 S. M. 키로프의 피를 씻어 내지는 못한다.
그는 S. M. 키로프 살해 뒤에도 벌인 파시즘을 위한 자신의 비열한 활동 전부를 숨기지 못할 것이다. 그의 비열한 계획을 실행해야 했던, 그의 추악한 활동의 직접적 공범들인 퍄타코프, 라데크 등은 폭로되자 자기들이 진행한 자본주의 복고 준비에서 트로츠키가 맡은 참된 역할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1931년에 베를린에 있던 퍄타코프와 스미르노프는 이 투쟁에서 어떤 수단도 가리지 말고 당과 소비에트 권력에 맞선 투쟁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시를 트로츠키에게서 받았다. 퍄타코프는 수사에서 이렇게 인정했다.
“1931년에 나는 업무로 베를린에 가게 되었다. 같은 때에 I. N. 스미르노프도 역시 업무로 베를린에 왔다. 여름에 베를린에서 I. N. 스미르노프는 트로츠키의 아들 L. 세도프와 만났으며 세도프가 트로츠키의 매우 중대한 지령 여럿을 자기에게 전했다고 내게 이야기했다. 스미르노프는 그의 표현대로 ‘트로츠키의 새로운 방침’을 아주 간단히 내게 알렸고, 특히 트로츠키가 어떤 수단으로든 스탈린과 그의 가장 가까운 조력자들을 타도하는 것을, 그리고 정부의 모든 실천적 시책에, 특히 경제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맞서는 것을 주된 과제로 여긴다고 내게 말했다.”
(퍄타코프, 1936년 12월 19~20일 수사 조서).
퍄타코프는 반혁명 활동에 관한 지령을 받으려고 트로츠키의 아들 세도프와도 직접 만났다.
퍄타코프는 이 만남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스미르노프는 세도프가 트로츠키의 임무를 받아 나를 만나 이야기하려 한다고, 내게 아무 이의가 없다면 우리 둘을 만나게 해 주겠다고 전했다. 나는 동의했다. 곧 세도프가 실제로 내게 전화했고 우리는 만날 장소를 정했다...
세도프는 자기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 L. D. 트로츠키의 이름으로 나와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트로츠키는 내가 베를린에 있다는 것을 알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만나 그의, 곧 트로츠키의 지시를 전하라는 더없이 엄중한 임무를 그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이 블록에서 틀림없이 주도적 역할을 차지하려 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우려하면서도 통합 조직의 창설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본다. 이 우려는 물론, 트로츠키 지지자들이 지금 조성되는 정세가 요구하는 능동적 활동 대신 관망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배제되지 않는다...
더없이 격렬한 투쟁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토론도 아니고 원칙 문제의 논의도 아니며, 권력을 위한 투쟁이다.”
(퍄타코프, 1936년 12월 19~20일 수사 조서).
그렇다면 퍄타코프 등이 지침으로 받아들여 수행한, 트로츠키가 권고한 소비에트 권력과의 투쟁 방법은 어떤 것이었는가? 퍄타코프는 세도프의 말을 빌려 그것을 이렇게 서술한다.
“세도프는 그의 표현대로 ‘새로운 투쟁 방법’의 설명으로 넘어갔다. 이제 다음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아야 한다. 1) 당과 정부의 주요 지도자들에 맞서 철저히 비밀을 지키는 그룹들이 벌이는 테러 투쟁, 2) 당과 정부의 모든 실무에 대한 방해, 3) 스탈린의 사업, 특히 경제 전선에서의 사업에 대한 온갖 방식의 신용 실추. 이 점에서는 온갖 편견을 단호히 내던져야 한다.”
(퍄타코프, 1936년 12월 19~20일 수사 조서).
테러, 파괴 행위, 사회주의 체제에 맞선 그 밖의 투쟁 방법에 관한 바로 이 지령을 트로츠키는 이미 1931년 말에 퍄타코프에게 보낸 편지로 직접 전했다.
“내가 소련으로 돌아온 뒤, 아마 1931년 11월이었을 텐데, 최고국민경제회의로 셰스토프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베를린에서 쿠즈바스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세도프가 내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있었다. 편지를 뜯어 보고 나는 몹시 놀랐다. 나는 세도프의 쪽지를 기대했는데 트로츠키 본인의 편지였던 것이다. 편지는 독일어로 쓰였고 ‘L. T.’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나는 트로츠키의 필적을 잘 알며, 이 표시가 없어도 그가 직접 썼음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이 편지에서 트로츠키는 내가 ‘그의 간청을 받아들여’ 내 입장을 정리한 데 만족을 표했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썼다. 1) 핵심 과제는 조직을 위한 조직의 재건이 아니라 스탈린과 그의 가장 가까운 동지들을 제거하기 위한 조직의 재건이다. 2) 체제와의 적극적 협력은 허용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가리지 말고 체제와 투쟁해야 한다.”
(퍄타코프, 1936년 12월 19~20일 수사 조서).
트로츠키는 그 뒤로도 자신의 비열한 첩자들에게 테러 활동과 파괴 활동을 더 빨리 펼치라고 끊임없이 다그쳤다.
“1932년 중반에 나는 다시 베를린에 있었다. 이번에는 세도프가 데마크 회사를 통해 내가 베를린에 있음을 알고는 내게 연락하여, 매우 필요한 일이라며 만나자고 청했다. 세도프는 내게 셰스토프를 통해 트로츠키의 편지를 받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받았다고 대답하고, 트로츠키의 지령을 수행하기로 받아들였으며, 모스크바에서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본부의 재건 협상이 진행되고 있고 테러 그룹들이 조직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세도프는 일이 굼뜨게 진행되고 필요한 속도로 펼쳐지지 않는 데 트로츠키가 극도의 불만을 표한다고 내게 전했다. ‘우리는 시간을 잃고 있으며 이것은 극히 해롭습니다. 일의 전개를 다그쳐야 합니다. 특히 테러 행위 준비를 다그치고, 파괴 공작 행위도 마다하지 말고 파괴 조치들을 실제로 펼쳐야 합니다. 레프 다비도비치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고 세도프가 말했다. ‘그는 조바심으로 타오르고 있으며 끊임없이 활성화를, 특히 테러 방향의 활성화를 요구합니다.’”
(퍄타코프, 1936년 12월 19~20일 수사 조서).
이 사실들은 테러 가담을 부인하고 자기 범죄의 책임에서 빠져나가려 한 트로츠키와 그 수하들의 모든 주장이 어떤 값어치인지를 분명히 말해 준다.
우리는 트로츠키파 스미르노프가 1936년 8월 재판에서 세도프와 만난 적이 없으며 그를 통해 트로츠키의 어떤 지령도 받지 않았다고 장담한 것을 기억한다. 퍄타코프는 자기 진술에서 스미르노프의 이 주장이 얼마나 거짓인지를 모두 드러냈고, 그와 다른 트로츠키 지지자들이 끝까지 프롤레타리아 법정을 어떻게 속였는지를 보여 주었다.
자신이 키로프 살해와 노동계급 지도자들에 대한 추가 테러 행위 준비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트로츠키의 이야기들도 자기 범죄의 흔적을 숨기려는 똑같이 실패한 시도이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지하 첩자들이 우리 사회주의 국가에 적발되어 현행범으로 붙잡히면, 반박할 수 없는 증거의 압박 아래 자기 범죄를 인정해야 하리라고는, 그리고 그 범죄에서 주역이 바로 그, 트로츠키라는 것까지 인정해야 하리라고는 분명 계산하지 못한 모양이다.
세르게이 미로노비치 키로프의 흉악한 살해가 있은 지 1년 뒤인 1935년 12월, 해외 출장 중이던 퍄타코프가 이번에는 트로츠키 본인을 만났으며, 그 만남은 파시스트 게슈타포 대표들이 친절하게 주선해 주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대화에서 트로츠키는 다른 문제들과 함께 테러 활동을 더 힘차게 펼칠 필요성을 다시 거론한다.
퍄타코프는 이 만남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1935년 12월에 업무 때문에 나는 급히 베를린으로 갔다... 거기서 나는 트로츠키를 만나러 노르웨이로 갔다. 나는 오슬로 근교 별장 지대에 있는 그의 거처에서 트로츠키를 만났다. 만남은 두 시간을 넘지 않았다. 트로츠키와의 대화는 소련과 트로츠키파 조직들의 상황에 관한 나의 보고로 시작되었다. 이미 이 대목에서 ‘소심함’, ‘타협주의’, ‘문제의 본질에 대한 몰이해’ 따위를 두고 분개하는 말을 줄줄이 들어야 했다.
준비 중인 테러 행위에 관해 보고할 때에도 트로츠키는 똑같이 극도의 불쾌감을 표했다. ‘준비, 또 준비뿐이군요. 여러분은 이 일을 충분히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있습니다. 되도록 빨리 실행해야 할 일련의 테러 행위 없이는 스탈린 정부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퍄타코프, 1936년 12월 19~20일 수사 조서).
테러 활동을 펼칠 필요성에 관한 트로츠키의 이 직접적 지시에 대해서는 라데크도 자기 진술에서 말한다. 라데크는 이 점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1932년 제네바에 머무는 동안 나는 거기서 롬과 연락이 닿았는데, 나는 그를 1927년부터 트로츠키파로 알고 있었다. 제네바에서 같은 집에 살던 롬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그는 트로츠키에게서 내게 전할 임무를 받았다고 알려 주었다. 롬은 내게 다음과 같이 전했다. 트로츠키의 견해로는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지도부와의 투쟁을 예전의 형태로 재개할 수는 없다. 1927년에 있었던 것과 같은 넓은 층에서의 트로츠키파 견해 선전은 이제 불가능하며 성공할 가능성도 전보다 더 적다.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인 투쟁 수단에서 테러로, 지도부를 제거하기 위한 테러로 넘어가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 지노비예프파와 통합하고,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지도자들, 무엇보다 스탈린에 대한 테러 암살을 수행할 믿을 만한 사람들의 소규모 집단을 조직해야 한다. 롬은 소련에서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가 통합한 조건에서는 테러가 모험이 아니라 현실적 수단이 될 것이라는 트로츠키의 관점을 내게 전했다. 트로츠키가 지노비예프파와의 통합이라는 옛 생각으로, 그러나 새로운 조건에서 새로운 토대 위에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내게 분명해졌다. 이 토대는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과 소비에트 정부 지도자들에 대한 테러였다.”
(라데크, 1936년 12월 4일 수사 조서).
자기의 가장 가까운 조력자들의 이 모든 진술 뒤에, 이 모든 사실이 드러난 뒤에도 트로츠키는 자신이 테러와 무관하며 오로지 무고한 언론 활동에만 종사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파시스트 트로츠키가 이제 트로츠키파의 테러 활동에 대한 자신의 지도를 부인할 수 있다면 어디 해 보라.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미 이 일에서 그가 맡은 추악한 역할을 합당하게 평가하고 그를 치욕의 기둥에 못 박았다.
트로츠키에게는 옹호자들이 나타났다. 제2인터내셔널과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과 부르주아 언론은 S. M. 키로프의 살해자들과 이 살해자들의 조직자, 강도 두목 트로츠키를 비호하고 나섰다. 이는 놀랄 일이 아니다. 소련과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앞에 트로츠키와 그 일당의 범죄가 헤아릴 수 없이 많기에, 바로 그 때문에 부르주아지와 노동계급의 배신자들이 이 테러 분자들을 비호하는 것이다.
일찍이 베벨 노인은, 부르주아지가 나를 욕한다면 그것은 내가 노동계급의 이익에 맞는 올바른 정책을 펴고 있다는 지표라고 말했다.
그리고 부르주아지가 트로츠키를 칭찬한다는 것은 그의 배신 행위를 말해 주는 확실한 지표이다.
실제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적들을 더 단호하게 처단할수록,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일당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범죄가 더 많을수록, 부르주아지와 제2인터내셔널에 있는 그 하수인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희생자들”을 옹호하며 더 크게 울부짖는 것을 본다.
하기야 제2인터내셔널의 이 부르주아지 변호인들이 이런 역할로 나선 것은 처음이 아니다.
내전이 한창이던 때, 노동계급이 자기 성과를 지키기 위해 부르주아지의 백색 테러에 적색 테러로 응답할 수밖에 없었을 때, 카를 카우츠키는 『테러리즘과 공산주의』라는 책을 들고 소련에 맞서 나서서, 이 책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적극적인 적들을 비호했다.
사회혁명당원들, 이 인민의 적들이 자기들의 반혁명 활동으로 프롤레타리아 법정에 섰을 때에도 제2인터내셔널은 이 배신자들을 변호하라고 자기네 변호사들을 보냈다. 지금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비열한 양면분자들의 정체를, 소련의 지도자들과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들에 대한 암살을 준비한 테러 분자들, 게슈타포 첩자들의 진짜 얼굴을 폭로하고 보여 주는 데 성공하자,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은 여기서도 자기답게 테러 분자들을 편들고 소련에 맞서는 광란의 캠페인을 벌였다.
이 신사들은 뻔뻔하게도 자기들의 전보에서 소련 법정에, S. M. 키로프의 살해자들과 스탈린 동지와 그의 동지들에 대한 암살 조직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제2인터내셔널과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의 이 특별한 전보 뒤에 사회민주주의 신문들은 경멸스러운 지노비예프파와 트로츠키파를 옹호하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모든 나라의 선진 노동자들은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살인자 일당을 옹호하려는 제2인터내셔널과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의 비열한 시도를 더없는 분노로 물리쳤다.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때를 같이하여 파시스트 언론과 백위군 언론도 트로츠키와 그 일당을 옹호하고 나섰다. 이는 당연하다. 트로츠키파 테러 분자들에 대한 재판은 파시스트의 지시를 받아 소련에 맞서 일하던 그들의 가장 가까운 첩자망을 폭로했다. 트로츠키가 게슈타포의 첩자가 되어 사회주의 나라에 맞서 반혁명 일당을 조직한 이상, 모든 파시스트·백위군 언론은 트로츠키 옹호에 나섰다. 세계에서 가장 반동적인 신문들이 트로츠키의 전기를 상세히 싣기 시작하며 거기에 그의 초상을 곁들이고 그를 “선진적 혁명가”로 선전했다. 이를테면 독일 파시스트당 중앙 기관지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1936년 8월 26일 자에 트로츠키의 초상을 실었다. 이 초상과 함께 전기가 실렸는데, 거기서 파시스트들은 트로츠키를 젊은 시절부터 혁명에 “봉사”하는 데 자신을 바친 “영원한” 혁명가로 그리면서 트로츠키와 게슈타포의 연계를 어설프게 감추려 애쓴다. 러시아 백위군 기관지인 『최신 소식』은 특별한 사진을 실어 자연 속의 트로츠키를 보여 준다. 동시에 『최신 소식』은 테러 분자 재판과 관련해 트로츠키가 한 인터뷰란 인터뷰는 모두 옮겨 싣는다.
1936년 8월 재판 동안 파시스트 백위군 신문들은 트로츠키에 관해 이렇게 떠벌렸다.
[인용문 없음][15]
제2인터내셔널에 있는 트로츠키의 변호인들은 파시즘의 이 비열한 첩자를 이렇게 옹호했다.
[인용문 없음]
이제 트로츠키가 이끄는 이 범죄 일당의 활동이 더 드러난 뒤로, 트로츠키의 이 변호인들이 누구를 비호했는지는 온 세상이 보고 있다.
범죄적인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일당의 테러 활동과 사회주의 나라 지도자들에 대한 테러의 조직자로서 트로츠키가 맡은 역할은 온 세상 앞에 폭로되었다.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의 권력 장악 계획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는 자기들의 목적, 곧 자본주의 복고를 실현하는 데 쓰려고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트로츠키파는 자기들의 테러 활동을 소비에트 정부를 전복하고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블록이 권력을 장악하는 수단으로 평가했다.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등은 자신들에게 소비에트 권력과 우리 당의 정책에 대한 대중적 불만을 나라에 불러일으킬 힘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국가 전복을 통해, 소비에트 국가와 우리 당의 가장 저명한 지도자들의 물리적 제거를 통해 권력에 오르려고 계산했다. 그들은 이 일에서 나라 안의 공감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자기 지지자 대다수에게까지 자기들의 활동을 더없이 철저히 비밀로 했다.
당과 정부 지도자들의 살해를 조직하면서,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본부, 특히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테러 행위를 저지른 뒤 자기들이 권력을 장악할 계획을 면밀히 준비하고 논의한다.
그들은 스탈린 동지에 대한 테러 행위를 저지르면 당과 나라에 혼란이 일어날 것이며, 이 혼란을 이용해 권력에 올라 당과 나라에서 주도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으리라는 데서 출발한다.
“음모의 정치적 목적은,” 하고 지노비예프는 수사에서 말했다,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를 전복하고, 트로츠키파, 지노비예프파, 우파로 구성될 우리의 중앙위원회와 우리의 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우리는 스탈린(그리고 다른 당·정부 지도자들)의 살해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지도부 대열에 혼란을 불러올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사태가 그렇게 돌아가면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스미르노프, 리코프, 소콜니코프, 톰스키, 예브도키모프, 스밀가, 므라치콥스키 등이 당과 정부의 지도적 직책으로 돌아오리라고 상정했다... 음모 계획에 들어 있던 첫 과제 가운데 하나는 트로츠키가 되도록 더 의기양양하게 소련으로 돌아올 길을 여는 것이었다.”
(지노비예프, 1936년 [날짜 공란] 신문 조서).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본부의 이 같은 권력 장악 계획과 방안에 관해 카메네프는 수사에서 각별히 파렴치하게 이렇게 말했다.
“이 문제를 우리는 여러 차례 논의했다. 우리는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블록 지도자들이 권력에 오를 두 가지 방안을 잡아 미리 정해 두었다. 첫 번째이자 가장 현실적으로 보인 방안은 스탈린에 대한 테러 행위를 저지른 뒤 당과 정부 지도부에 혼란이 일어나고,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블록의 지도자들인 우리, 무엇보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트로츠키와 협상에 들어오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협상에서 나와 지노비예프가 당과 나라에서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리라는 데서 출발했다. 스탈린 치하에서도 우리는 양면주의 정책으로 당이 우리 오류를 용서하고 우리를 대열로 복귀시키는 데까지 이르렀고, 테러 행위에 우리가, 나와 지노비예프와 트로츠키가 가담했다는 것은 당과 나라에 비밀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 장악의 두 번째 방안은 우리에게 덜 믿음직해 보였는데, 스탈린에 대한 테러 행위를 저지른 뒤 당과 나라의 지도부에 불안과 무질서가 생기리라는 것이었다.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블록 지도자들은 혼란을 이용해, 남은 당 지도자들에게 우리를 권력에 들이도록 강요하거나 그들이 우리에게 자리를 내주게 만드는 데 성공할 것이다. 트로츠키의 등장과 권력 장악 투쟁에 대한 그의 적극적 참여는 말할 것도 없는 일로 상정되었다. 그 밖에도 우리는 새 정부 권력을 조직할 때 우파인 부하린, 톰스키, 리코프도 거기에 참여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카메네프, 1936년 7월 23일 신문 조서).
권력 장악 계획을 논의하면서 그들은 벌써 미리 당과 정부 기관의 지도적 직책을 자기들끼리 나누어 가졌다. 이 계획에 따르면 지노비예프는 코민테른 의장으로 내정되었고, 카메네프는 정부 수반 자리를 차지하기로 했으며, 바카예프는 OGPU 의장, 스미르노프와 예브도키모프는 중앙위원회 서기로 내정되었다. 같은 계획에 따라 당과 정부의 지도 전체를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가 자기 손에 집중하기로 했다.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블록은 소련에서 벌어지는 테러 활동에 자기들이 관여한 것을 숨기는 데 각별한 공을 들였다.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당과 정부 지도자들의 살해에서 자기들이 맡은 조직 역할이 당과 나라에 비밀로 남도록 모든 조치를 취했다.
그뿐이 아니다. 그들은 양면주의 정책으로 중앙위원회에 대한 각별한 충성과 헌신, 자기들의 이전 견해의 완전한 포기를 강조하며 중앙위원회의 신뢰를 얻으려고 애썼다.
그들은 당과 정부의 주요 지도자들을 살해한 뒤 권력에 오르는 데 성공하리라고 계산했다. 당과 근로 대중의 눈에 자신들이 완전히 회개하고 자기 오류와 범죄를 깨달은 레닌-스탈린 정책의 지지자로 보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테러 기도를 면밀히 숨기고, 날마다 자기 자신의 견해와 신념에 침을 뱉으면서, 당에 충성을 맹세하고 자신들이 중앙위원회 노선의 지지자임을 인정했다.
미리 면밀히 숙고한 이 양면주의 정책에는 제17차 당대회에서 그들이 한 연설들도 종속되었다. 그때 그들은 자기들의 지난 활동을 비난하고 당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맹세하면서, 동시에 자기들이 치밀하게 구상한 계획에 따라 권력 장악을 목적으로 당과 정부 지도자들에 대한 테러 행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트로츠키파 병행 본부는] 당과 정부 지도자들에 대한 테러의 조직을 통한 권력 장악[을 계속 준비했다].[16] 그러나 이와 나란히 그들은 전쟁에서 소비에트 권력이 패배하는 것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다른 계획도 더욱 준비하기 시작한다.
1935년 12월에 트로츠키는 퍄타코프에게 권력 장악 문제를 이렇게 제기한다.
“문제는 국가 전복입니다. 대중 봉기는 별개의 문제로 지금은 그 토대가 없는 듯합니다만, 국가 전복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퍄타코프, 1936년 12월 19~20일 수사 조서).
그들은 더없이 넓은 대중이 자기들을 얼마나 적대하는지, 자기들의 음흉한 권력 장악 계획을 실현하기가 얼마나 어려울지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국가 전복을 조직하기 위해 그들은 테러와 나란히, 자본주의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소련이 패배하도록 준비할 것을 구상하고 이 전쟁을 도발하려고 온갖 애를 썼다. 전쟁에서 소련의 패배를 보장하기 위해 그들은 붉은 군대 안에 자기들의 반혁명 그룹들을 조직하여 군대를 와해시키려 했다.
트로츠키파 병행 본부의 일원인 소콜니코프는 수사에서 권력 장악 계획과 이를 위한 군부대 내 트로츠키파 그룹의 조직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두 가지 길로 권력 장악에 나아갔다. 한 길은 정부와 정치국 위원들, 무엇보다 스탈린의 살해를 준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우리가 꾀한 음모가 성공할 주된 조건은 현 중앙위원회와 소비에트 정부의 진정한 수장인 인물의 물리적 제거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스탈린 살해는 우리 음모의 계획에서 으뜸가는 과제였다. 우리는 이런 방법으로 당과 나라의 머리를 베어 버리고, 그다음 우리 스스로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과 정부를 이끌려 했다. 모스크바, 로스토프, 스베르들롭스크에 테러 그룹을 만든 것은 이 목적에 이바지했다. 그와 동시에 새 본부의 모든 참가자는 당과 정부 지도자들의 시체를 밟고 지나가더라도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붉은 군대에서 새 본부의 연계를 넓히고, 군부대 안에 새 본부의 신호에 따라 무기를 들고 나서야 할 우리 동조자 그룹을 만드는 과제를 점점 더 중요하게 여겼다.
이 음모 계획 전체는 트로츠키의 특별 지령으로 확인되었다. 이 지령은 라데크가 트로츠키에게서 받은 것으로, 권력 장악에 관한 트로츠키파 조직의 과제를 대체로 내가 방금 진술한 것과 같은 표현으로 정식화했다.”
(소콜니코프, 1936년 12월 [날짜 공란] 수사 조서).
라데크도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블록이 구상한 이 권력 장악 조치의 이중 계획을 확인한다. 그는 이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를 근거로 트로츠키는 블록이 권력에 오르는 두 가지 방안을 내다보았으나, 두 방안 모두에 같은 강령, 곧 블록의 미래 정부 강령인 자본주의 복고 강령을 잡아 두었다.
첫 번째 방안.
1. 가까운 시일 안에, 전쟁 전에 권력에 오르도록 모든 것을 해야 한다.
트로츠키는 자신이 S. M. 키로프 살해로 빚어진 탄압의 영향으로 본부가 갈피를 못 잡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알렸다.
키로프 살해가 기대한 결과를 낳지 못한 것은, 그와 동시에 스탈린,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보로실로프 등에 대한 테러 행위가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중심부 타격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면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대열에 강력한 무질서와 혼란을 가져와, 블록 본부의 가장 뛰어나고 가장 덜 평판이 손상된 성원들이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와 정부에서 지도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트로츠키파 블록이 권력에 오르는 시작이 되어야 하지만, 그러자면 먼저 스탈린에게 가장 충실한 분자들을 없애야 한다.
두 번째 방안.
1.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과 소비에트 권력의 주요 지도자들을 동시에 제거하는 과제는 실행하기 어렵고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를 근거로, 하고 트로츠키는 썼다, 권력 문제는 전쟁에서 소련이 패배한 결과로만 블록 앞에 가장 현실적으로 제기되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블록은 이에 힘차게 대비해야 한다.
블록은 나라 안의 모든 불만 분자의 중심축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멘셰비키는, 하고 트로츠키는 썼다, 이러쿵저러쿵 따질 줄밖에 모르고, 사회혁명당원들에게서는 그림자만 남았다. 이 모든 분자는 동맹자로 쓸모가 있을 수 있으나, 블록에게는 권력을 다툴 독자적 경쟁자가 없다.
그, 트로츠키는 블록이 유일한 현실적 세력이며 독일이 그것(블록)과 협정을 맺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을 독일이 이해하도록 많은 일을 했다. 이런 의미에서 세력은 파괴 행위와 파괴 공작의 규모, 군대 내 트로츠키파의 영향력 정도로 가늠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 트로츠키는 전쟁이 벌어지는 시점에 군대로 소집될 트로츠키파에 특히 기대를 걸었다.”
(라데크, 1936년 12월 [날짜 공란] 수사 조서).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적군 부대의 트로츠키파 그룹들이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본부의 신호에 따라 소비에트 권력에 맞서 무기를 들고 나서리라고 계산했다.
테러 행위의 동시 실행과 붉은 군대 안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조직들의 전복 활동은 트로츠키파의 견해로는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하려는 그들의 반혁명 계획을 실현할 더 믿음직한 수단이었다.
인민의 의지에 맞서 행동하고 더없이 넓은 근로 대중의 이익에 맞서 나서는 모든 음모가들이 그렇듯, 그들은 자기들 범죄 행위의 실제 목적을 어떻게 하면 인민에게 숨길까 궁리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준비하는 테러 행위와 적군 부대 내 트로츠키파의 봉기를 당과 정부 지도자들의 생명에 대한 백위군의 암살 기도이자 10월의 성과에 대한 그들의 공격으로 꾸며 내려고 계산했다. 그들은 자기들, 트로츠키파도 이 봉기에 맞서 싸우려 하는 것처럼 일을 꾸미려 했다.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그룹들은 이른바 백위군의 공격에서 10월 혁명을 지키자는, 이를 위해 당의 모든 세력을 단결하자는, 그리고 자기들이 들어가기로 한 반혁명 투쟁 위원회를 만들자는 구호를 내걸고 나설 예정이었다.
지노비예프는 수사에서 그들이 구상한 이 범죄 행위 위장 계획을 인정했다.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하고 지노비예프는 수사에서 말했다,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통합 본부가 준비하던 범죄의 흔적을 감출 계획이 마련되었다. 당과 정부 지도자들의 폭력적 제거는 백위군의 행위나 ‘개인적 복수’ 행위로 면밀히 위장되어야 했다.”
(지노비예프, 1936년 [날짜 공란] 신문 조서).
병행 본부의 비열한 우두머리 가운데 하나인 소콜니코프도 수사에서 같은 취지로 이에 관해 이야기한다.
[결락: 타자 원고 272쪽이 없어 소콜니코프의 인용과 그 뒤 대목이 빠져 있다.][17]
…일당. 나라에서 더없는 사랑과 헌신을 받는 소비에트 권력 지도자들의 살해를 통한 권력 장악 강령을 구상하면서, 트로츠키파는 인민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이 살해를 애도하는 가면을 어떻게 쓸지를 미리 구상했다.
테러 행위 실행자들에게 지령을 내리면서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조직들과의 어떤 연계도, 특히 자기들, 곧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개인과의 연계를 숨기라고 상세히 지도했다.
이를테면 트로츠키는 자기 첩자 올베르크에게 스탈린 동지에 대한 테러 행위의 조직에 관해 지시하면서, 혐의가 트로츠키파에게 떨어지지 않도록 이 행위를 저지를 필요성을 각별히 강조했다. 테러 행위가 실행될 경우 트로츠키파는 이를 저지른 자들과 선을 긋고 “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가 당시 카플란에 대해 취한 것과 비슷한 입장”을 취해야 했다.
테러 행위 가담자들에게 지노비예프도 똑같은 지령을 내렸다.
이를테면 레인골트는 수사 진술에서 지노비예프의 다음과 같은 지령을 알렸다.
“1933~1934년에 지노비예프는 자기 집에서 나와 단둘이 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실천상의 주된 과제는 테러 작업을 철저히 비밀로 진행해 어떤 식으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수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과의 어떤 연계도 끈질기게 부인하는 것이다. 테러 활동으로 고발되면 테러는 볼셰비키-마르크스주의자의 견해와 양립할 수 없다는 논거를 들어 단호히 부인해야 한다.”
(레인골트, 1936년 [날짜 공란] 신문 조서).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본부는 살아 있는 증인들을 물리적으로 제거해 자기들 범죄의 흔적을 영원히 지우기 위해, 테러 행위의 직접 실행자들을 실제로 몰살할 계획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 테러의 주요 조직자 가운데 하나인 바카예프를 OGPU 의장으로 임명해, 그가 테러의 직접 실행자들뿐 아니라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를 위태롭게 할 자료가 손에 모여 있을 수 있는 OGPU 일꾼들까지 처단하게 할 작정이었다.
이에 관해 바로 그 레인골트는 수사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그들(지노비예프, 카메네프)은 저질러진 범죄의 흔적을 어떤 것이든 없애는 일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 이를 위해 바카예프를 OGPU 의장에 임명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스탈린과 키로프에 대한 테러 행위의 직접 실행자들과, 저질러진 범죄의 실마리를 손에 쥐고 있을 수 있는 OGPU 일꾼들을 모두 물리적으로 없애는 과제가 맡겨졌다.”
(레인골트, 1936년 [날짜 공란] 신문 조서).
이렇게 이 인민의 극악한 적들은 자신들의 검은 속셈을 온 세상에 숨기면서 권력을 얻으려 했다.
이렇게 그들은 우리나라에 자본주의를 되살리기 위해 노동자와 농민의 사회주의 국가를 꺾으려 했다.
전쟁 도발과, 자본주의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소비에트 권력의 패배를 위한 투쟁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하는 일에서 나라 안의 지지를 기대할 수 없음을 트로츠키파는 너무도 잘 알았기에, 사회주의 체제와의 투쟁에서 자본주의 국가들의 원조에 희망을 걸었다.
붉은 군대 안에서 트로츠키파가 벌이는 모든 활동은 우리 군대의 전투력을 떨어뜨리고 군대를 와해시키는 데로 향해야 했으며, 그렇게 하여 파시즘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소비에트 권력의 패배를 확보하려 했다.
“붉은 군대 대열 안에서의 트로츠키파 활동에 트로츠키와 블록 본부는 특별히 중대한 의의를 부여했다. 파시즘 국가들과 소련이 벌일 다가오는 전쟁에서 패전주의를 취한다는 방침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로 전제로 삼았고 기대했던 대로 소련이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 붉은 군대의 트로츠키파 지휘관들은 개별 패전까지도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정책 전반이 이른바 그릇되었다는 것과 이 전쟁이 무의미하고 파멸적이라는 것의 증거로 이용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이런 실패와 붉은 군대 병사들의 피로를 이용해 병사들에게 전선을 버리고 정부를 향해 총부리를 돌리라고 호소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독일군은 전투 없이 무방비가 된 구역들을 점령해 전 전선을 궤멸시킬 실질적 위협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진격하는 독일군이라는 이 조건에서 블록은 이미 트로츠키파 지휘관들이 이끄는 부대들에 의지하여 권력 장악에 승부를 건다.”
(라데크, 1936년 12월 4일자 수사 조서).
비열한 배신자 라데크는 이렇게 자백했다.
트로츠키파 본부의 또 다른 성원 소콜니코프의 진술도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블록의 강령은 본질적으로 소련에서 자본주의를 복고하는 강령이었다. 강령 문제와 관련하여 소련과 부르주아 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블록이 취할 입장 문제도 논의되었다. 이때 우리는 다가올 전쟁에서 소련의 실패와 군사적 패배가 블록의 집권에 유리한 정세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삼았다. 1934년에 나는 이에 관해 카메네프와 이야기했다. 이 대화들에서 카메네프는 블록의 패전주의 방침을 논증했고, 다가오는 전쟁에서 소련의 패배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의 현 지도부와 현 정부의 손에 권력이 남아 있는 것보다 작은 악이며 블록의 집권 조건을 만들어 낼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카메네프는 이 패전주의 입장을 지노비예프와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본부의 나머지 성원들이 지지한다고 지적했다. 카메네프는 블록이 단호한 패전주의 방침을 취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한 발의가 트로츠키에게서 나왔다고 지적했다. 트로츠키의 견해로는 오직 그러한 패전주의 방침만이 현존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블록의 태도에 관해 조직의 모든 성원에게 완전한 정치적 명료성을 가져다주고 조직 전체를 권력 투쟁에 동원할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 중의 패전주의 전술은 블록의 권력 장악을 보장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투쟁 무기가 될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트로츠키는 ‘소련의 군사적 패배를 통해 블록의 승리로’라는 공식을 내세웠다.”
(소콜니코프, 1936년 12월 12일자 수사 조서).
소콜니코프는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등의 말을 근거로, 소련이 전쟁에서 패배해야 한다는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조직의 확고한 방침을 확인한다. 퍄타코프도 자신의 진술에서 같은 이야기를 한다.
“전쟁에 관해서는 트로츠키가 매우 뚜렷하게 알려 왔다. 그의 관점에서 전쟁은 가까운 시일 안에 불가피하다. 이 전쟁에서 ‘스탈린 국가’의 패배는 피할 수 없다. 그, 트로츠키는 이 전쟁에서 뚜렷하게 패전주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긴다. 전쟁에서의 패배는 스탈린 체제의 붕괴를 뜻하며, 바로 그렇기에 트로츠키는 군대 안에 세포를 만들고 지휘 간부들 사이에 연계를 넓히라고 고집했다. 그는 전쟁에서의 패배가 군대 안에서도 그, 트로츠키의 권력 복귀에 유리한 정세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데서 출발했다. 그는 블록의 집권이 군사적 패배로 틀림없이 앞당겨질 수 있다고 여겼다. 이때 트로츠키는 특히 군사 정세를 고려하여 해당 부르주아 정부들과 미리 합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퍄타코프, 1936년 12월 19~20일자 수사 조서).
그리고 이 일의 주된 발의자는 언제나 이 비열한 도당의 두목 트로츠키다. 블록이 단호한 패전주의 방침을 취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한 발의는 그에게서 나왔다.
“다가오는 전쟁을 고려해 전쟁에 대해 무조건 패전주의 입장을 취하고, 자본주의 열강 정부들과의 사전 교섭을 통해 전쟁의 결과로 우리가 집권할 경우에 대비하여 그들의 호의적 태도를 확보해 두어야 한다.”
(퍄타코프, 1936년 12월 19~20일자 수사 조서).
트로츠키는 퍄타코프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는 전쟁에서 패전주의 입장을 취하려고 기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파시즘 국가들과 소련 사이의 이 전쟁을 도발하려고 적극적으로 애썼다. 트로츠키는 소련에 대한 군사 행동의 개시를 앞당기는 문제를 놓고 가장 반동적인 정부들, 독일과 일본 정부의 대표들과 몸소 교섭에 들어갔다.
“카메네프는 또한 트로츠키가 자신의 패전주의 방침을 실현하고자 1933년 말에 일본 정부 측에 블록의 존재와 방침을 알렸다고 내게 전했다. 트로츠키는 일본 정부 측과 연계를 맺어 소련과 일본 사이의 군사 행동 개시를 앞당기는 쪽으로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려 했다. 트로츠키는 일본 정부가 블록의 존재와 패전주의 입장, 전쟁 중에 블록이 현존 정부에 맞서 적극적 투쟁을 벌이리라는 점을 알게 되면 소련에 대한 군사 행동 개시를 더 빨리 결단할 것으로 보았다. 이때 트로츠키는 일본이 소련을 빨리 공격할수록 군사 준비를 끝내지 못한 소련이 패배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트로츠키는 일본인들과의 교섭에서 동청철도에 관한 협상을 중단하고 철도를 무력으로 장악해 소비에트 정부를 기정사실 앞에 세우라고 권했다. 트로츠키는 이 경우 소비에트 정부가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동청철도 점령에 맞서지 못할 것이며, 이것이 국외에서, 그리고 특히 국내에서 소비에트 정부의 권위를 크게 무너뜨릴 것이라고 계산했다. 반대로 소비에트 정부가 아직 전쟁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일본에 맞서 나선다면 불가피하게 패배할 것이었다...
카메네프는 일본 정부 대표가 내게 접근할 경우, 내가 트로츠키의 제안을 알고 있으며 그가 그의 제안에 동조한다고 확인해 주라고 내게 제안했다. 1934년 4월 말이나 5월 초에 한 일본 외교관이 내게 접근했다. 이 무렵 이 외교관은 캄차카 어업 이권 교섭 때문에 외무인민위원부로 나를 자주 찾아왔다. 이 교섭이 끝날 무렵 일본 외교관은 적당한 때를 보아 일본 정부에 대한 트로츠키의 제안을 두고 나와 몇 마디 주고받았다. 이 외교관은 내게 말했다. ‘트로츠키 씨가 우리 정부에 몇 가지 통보를 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나는 답했다. ‘예, 그 일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외교관이 물었다. ‘이 제안들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나는 답했다. ‘이 제안들을 매우 진지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자 이 외교관이 물었다. ‘이것은 당신 개인의 의견일 뿐입니까?’ 나는 답했다. ‘아닙니다. 이것은 내 친구들의 의견이기도 합니다.’”
(소콜니코프, 1936년 12월 12일자 수사 조서).
이 진술들의 행간에서 파시스트·트로츠키파 도당의 야수 같은 낯짝 전체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우리 모두는 전쟁 도발이었던 동청철도 분쟁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에 조성된 긴장된 정세를 기억한다. 우리의 용맹한 붉은 군대와 소련의 모든 근로자가 사회주의 조국의 국경을 가슴으로 지켜 낼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음에도, 우리 정부는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모든 조치를 다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트로츠키와 그의 가장 가까운 추종자들은 자본주의 통치자들의 접견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사회주의 나라에 맞선 투쟁에서 돕겠다고 약속하면서 소련에 대한 전쟁을 앞당겨 달라고 간청한다. 양면주의적 방법으로 그때까지 소비에트 직무에 붙어 있던 소콜니코프, 라데크 같은 부류의 배신자들은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전쟁을 앞당기려는 목적으로 부르주아 정부 대표들과 이런 도발적 대화를 나누었다.
트로츠키는 일본과의 교섭과 같은 방향으로 독일 정부와도 교섭했다. 이 점에서 그는 히틀러의 집권 순간부터 특별한 적극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34년 히틀러 집권 뒤[18], 하고 라데크는 이야기한다, 나는 트로츠키에게서 지시를 받았다. 지시에서 트로츠키는 정세에 관한 자기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히틀러의 집권은 전쟁을 앞당기며, 그, 트로츠키는 독일어로 펴낸 자신의 소책자에서 소련이 히틀러의 집권에 군대 동원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생각할 줄 아는 트로츠키파에게는 이것으로 모든 것이 말해진 셈이다. 즉 트로츠키파가 테러로 집권하지 못할 경우 그들의 집권을 위한 주된 조건은 소련의 패배일 것이므로, 가능한 한 소련과 독일의 충돌을 앞당겨야 한다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이어 이렇게 썼다. 일본과 소련의 관계가 첨예할수록 히틀러의 승리 희망은 커지며, 이 관계의 첨예함은 독일·소련 전쟁을 앞당기는 요소이고, 독일·소련 전쟁은 블록의 집권을 앞당길 것이다.”
(라데크, 1936년 12월 4일자 수사 조서).
이처럼 트로츠키파는 히틀러의 집권과 관련하여 소련과 독일 사이의 전쟁을 앞당길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다. 비적 괴수 트로츠키는 히틀러의 집권과 관련하여 특별한 소책자를 쓴다. 이 소책자에서 그는 도발을 목적으로 소련이 즉각 히틀러에 맞서 전쟁에 나서라고 요구한다. 동시에 이 소책자는 소련 안의 지하 트로츠키파에게 이 전쟁을 앞당기기 위해 투쟁하고 이 전쟁에서 소련의 패배를 이루어 내야 한다는 신호 구실을 해야 했다.
소콜니코프는 라데크가 이 문제에 관해 받은 트로츠키의 지령에 관해 대략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1935년 여름 『이즈베스티야』 편집국의 라데크 집무실에서 나와 만났을 때, 라데크는 히틀러 정부와 그의 연계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트로츠키에게서 받았다고 내게 알렸다. 트로츠키는 일본 정부와 같은 토대 위에서 히틀러 정부와 접촉이 이루어졌다고 썼다. 트로츠키는 1933년에 일본과 소련의 관계가 첨예해졌기 때문에 그때는 무엇보다 먼저 일본과 접촉을 맺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 무렵 독일은 무장 상태로 보아 소련 공격의 주도권을 쥘 수 없었다. 이제 1935년에는 정세가 바뀌었다. 첫째, 독일과 소련의 관계가 크게 첨예해졌다. 둘째, 독일의 군사력이 크게 늘었다. 그러므로, 하고 트로츠키는 결론지었다, ‘독일 쪽에서 소련 공격의 주도권을 쥘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트로츠키는 윤곽이 잡혀 가는 독일·일본 협정의 커다란 긍정적 의의를 지적했다. 트로츠키는 일본 및 독일과 접촉을 맺음으로써 자신이 일본·독일 협정을 앞당기는 데 이바지할 수 있게 되며, 이 협정이 소련에 맞선 전쟁의 승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맞추어 트로츠키는 히틀러 정부에 일련의 제안을 했다. 이 제안들은 한편으로 전쟁 중의 블록 전술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블록 집권 뒤 블록과 히틀러 정부 사이의 협정 기초를 정했다. 트로츠키는 블록이 적극적 패전주의 노선을 펼 것이라고 히틀러 정부에 약속했다. 트로츠키는 블록 조직들이 수중의 모든 수단을 다해 소련의 패배를 도와야 한다고 지적했다.”
(소콜니코프, 1936년 12월 12일자 수사 조서).
이 진술에서 보듯, 트로츠키는 일본과 소련 사이, 또는 독일과 소련 사이의 전쟁을 앞당기기 위해 온갖 조치를 다했다. 그는 자신이 “일본·독일 협정을 앞당기는 데 이바지할 수 있게 되며, 이 협정이 소련에 맞선 전쟁의 승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을 자기 공으로 내세웠다.
소련 안에 있던 트로츠키파는 트로츠키에게서 지령을 받고 이 지령을 수행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다했다. 그들은 트로츠키가 고립된 사람이 아니라 소련 안에 발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알리기 위해 부르주아 정부들의 여러 대표와 교섭에 들어갔다.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부르주아 국가들을 소련과의 전쟁으로 더 빨리 기울게 하여, 이 전쟁의 패배를 통해 사회주의 체제 전복과 자본주의 복고를 이루어 내려 했다.
트로츠키파와 자본주의 국가 정부들의 연계
소련에서 자본주의를 복고하는 일에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는 외국 자본주의 국가들의 원조를 기대했다. 자본주의 복고라는 자신들의 방침에 전적으로 맞게 그들은 자본주의 정부들과 블록을 실현하려 했으며, 소련과의 투쟁에서 목적이 같으니 사회주의와의 투쟁에서 외국 자본주의 국가들의 지지가 보장되리라고 당연히 기대했다.
그들은 이 점에서 틀리지 않았다. 사회주의가 최종적으로 승리한 소련이 전 세계 부르주아지에게, 무엇보다 파시스트 부르주아지에게 가장 증오스러운 나라였고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소련의 절멸은 엄청난 승리의 요인이자 자본주의를 크게 강화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소련에서 자본주의를 되살리겠다는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의 계획에 기쁨과 공감을 품고 귀를 기울였다.
트로츠키파는 대중의 지지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집권을 위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부르주아 세계의 원조뿐임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대가든 치를 각오로 이 원조를 적극적으로 얻어 내려 했다.
트로츠키파는 무엇보다 먼저 가장 반동적인 파시즘 정부들과 협정을 맺으려 애썼다. 트로츠키 자신이 사회주의 나라에 맞선 공동 투쟁을 놓고 독일과 일본의 파시즘 정부들과 교섭하기 시작했다. 그는 부르주아 정부 대표들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소련과의 투쟁에서 접촉을 맺자고 제안하고 이 검은 일에 자신이 봉사하겠다고 제안한다.
소련 안에 있는 그의 가장 가까운 조력자이자 앞잡이 퍄타코프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협정의 기초는 트로츠키가 이야기한 대로, 트로츠키가 히틀러의 대리인 헤스와 만났을 때 최종적으로 작성되고 채택되었다.”
(퍄타코프, 1936년 12월 19~20일자 수사 조서).
트로츠키는 민족사회주의당에서 히틀러의 대리인인 헤스와 직접 교섭한 것으로 드러난다. 트로츠키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동료다. 그런데 1936년 8월 재판 때 트로츠키는 파시즘과 접촉했다는 고발을 두고 얼마나 거짓 분노를 터뜨렸던가. 제2인터내셔널에서 나온 트로츠키의 변호인들은 트로츠키와 파시즘이 연계되었을 가능성을 일체 부정하며 얼마나 악어의 눈물을 흘렸던가. 그런데 이제 가장 가까운 전우들이 트로츠키를 폭로하자, 게슈타포와의 관계에 관한 이전의 사실들이 소련 안의 그의 직접 전권 대리인들이 알린 이 새로운 것 앞에서 빛을 잃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트로츠키는 자본주의 국가 대표들과의 개인적 교섭에 그치지 않고, 독일과 일본 제국주의 대표들과 접촉을 맺으라는 직접 지령을 소련 안의 자기 앞잡이 조직에 내린다. 이 문제에 관해 소콜니코프는 다음과 같이 알렸다.
“트로츠키는 본부에 모스크바에서 독일과 일본 정부 대표들과 접촉을 맺고 유지하라고 제안했다. 트로츠키는 이 접촉의 과제로 다음을 제시했다.
첫째, 트로츠키가 국외에서 한 약속이 블록 전체의 지지를 받고 있지 않다는 의심을 히틀러 정부와 일본 정부에서 일절 없애기 위해 블록 본부의 이름으로 이 약속을 확인하는 것.
둘째, 블록이 커다란 정치 세력이며, 더 나아가 소련 현 정부에 맞서는 유일한 조직된 정치 세력임을 일본과 독일 대표들에게 증명하는 것.
셋째, 장래 블록 정부의 정치적 목적에 대한 일본과 독일의 불신을 없애기 위해 블록의 진짜 강령을 독일과 일본 대표들에게 알리는 것.
넷째, 독일과 일본이 관심을 갖는 영토 및 경제 양보에 관한 예비 논의에 착수하는 것. 그는 트로츠키가 국외 여건에서는 이룰 수 없었던 교섭의 가장 중요한 공통 과제로, 장래 블록 정부에 대한 일본과 독일 대표들의 완전한 신뢰를 얻는 것을 꼽았다.”
(소콜니코프, 1936년 12월 12일자 수사 조서).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는 약속을 아끼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주의를 전복하고 스스로 집권하기만 하면 소련 영토의 일부를 일본과 독일 제국주의자들에게 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들은 소련의 천연자원을 착취할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증오하는 사회주의 체제를 전복하는 데 지지를 얻기만 한다면 어떤 양보에도 응할 태세다.
트로츠키는 히틀러가 파시즘 나라의 내부 어려움을 없앨 수 있게 해 줄 그런 양보를 독일에 약속한다. 트로츠키는 집권하면 자신과 히틀러가 증오하는 사회주의 공업화 정책, 소련의 경제적 독립을 보장하는 정책, 트로츠키와 히틀러 모두에게 그토록 증오스러운 정책을 단호히 포기하겠다고 약속한다. 독일 상품의 수입을 힘껏 늘릴 수 있는데 실로 무엇 하러 소련에서 자기 공업을 발전시키는가, 하고 트로츠키는 동의한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제안한다.
“가능하다면 그, 트로츠키가 관변 인사들과 그렇게 했듯이 모스크바에서 독일 대표들과 접촉을 만들어야 한다. 트로츠키는 블록이 집권한 뒤 막대한 경제 곤란에서 벗어날 길을 찾는 독일에 대해 상당한 희생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독일인들에게 선언했다. 예를 들어 블록은 소련으로의 독일 상품 수입, 독일로 수출되는 소련 생산물의 가격, 소련 착취에 어떤 형태로든 독일 자본의 참여를 허용하는 문제에서 매우 상당한 경제적 양보를 할 것이며, 일부 영토 양보에도 나설 것이다. 트로츠키는 블록에게 소련 안에서 독일 정부 측과 접촉이 이루어질 경우 그들에게 이 조건들을 확인해 주라고 제안했다. 이 교섭들은, 하고 트로츠키는 썼다, 독일이 이미 지금부터 블록을 지지하는 데 이해관계를 갖는 토양을 만들어 냈다.”
(라데크, 1936년 12월 4일자 수사 조서).
또 다른 트로츠키파 앞잡이 라데크는 이렇게 시인한다.
트로츠키의 이 지령은 당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소콜니코프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나는 이 양보 없이는 권력을 손에 쥐고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카메네프는 이 문제에 관해 같은 견해를 지닌 트로츠키와 완전한 합의가 있다고 말했다.”
(소콜니코프, 1936년 12월 4일자 수사 조서).
트로츠키는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블록이 소비에트 국가를 이기게 될 때 소련을 어떻게 나눌지 하는 문제의 상세한 논의에 들어간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소비에트 권력 전복에 더 적극적인 원조를 기대하는 파시즘 독일에 큰 양보를 계획한다.
퍄타코프가 해외 출장 중 트로츠키와 만났을 때, 트로츠키는 이 교섭의 경과를 그에게 상세히 알려 주고 트로츠키파 집권 시 독일에 대한 양보 계획을 이야기한다. 라데크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1935년 12월 말 소련으로 돌아온 퍄타코프는 트로츠키와 나눈 대화에 관해 내게 다음과 같이 전했다.
파시스트 정부 대표들과의 교섭 결과 협정안이 작성되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독일과 소련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블록이 집권하게 되면 독일은 블록 정부를 승인하되, 블록은 소련의 고품위 광석, 망간, 석유 채굴에 독일이 상응하는 몫으로 참여하도록 보장할 의무를 지며, 일정 기간 독일의 공업 생산물을 소련 수입의 35% 이상 비율로 구매할 의무를 진다. 러시아 천연자원 착취에 독일이 참여하는 형태는 해당 트러스트 주식 뭉치를 독일에 넘기는 것부터 장기 이권을 거쳐, 독일 국민경제를 특히 보완해 줄 공장, 탄광, 광산 전부를 독일에 파는 데까지 다양할 수 있다.”
(라데크, 1936년 12월 24일자 수사 조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사회주의 나라에 맞선 투쟁에서의 공동 행동을 놓고 독일 파시즘과 합의한다. 일본 파시즘 정부, 이것이 트로츠키의 두 번째 동맹자다. 트로츠키는 국외에서 일본 정부 대표들과 교섭에 들어가고, 소련 안의 자기 앞잡이들에게 자기 본을 따르라고 지령을 내린다.
“소콜니코프는 일본인들과 대화한 일이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대화로 보아서도 트로츠키가 일본 정부 대표들과 교섭했음이 분명했다.”
(퍄타코프, 1936년 12월 19~20일자 수사 조서).
트로츠키는 집권할 경우 일본 정부의 원조에 값비싼 대가를 치르겠다고 약속했다.
“블록은 극동에서 일본 자본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라데크, 1936년 12월 24일자 수사 조서).
라데크가 이 문제에 관한 트로츠키의 방침을 이야기한다.
일본 자본의 경제적 이익을 충족시켜 주는 일은 대체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 라데크는 이에 관한 트로츠키의 계획을 알린다.
“우리는 일본에 사할린 석유를 내주고 미국과 전쟁이 날 경우 일본에 석유 공급을 보장해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일본이 금을 채굴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라데크, 1936년 12월 24일자 수사 조서).
이렇게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는 소비에트 영토를 파시즘 국가들에 넘기고, 소비에트 나라의 부를, 소련 근로자들의 피와 땀으로 얻어 낸 모든 것을 도매와 소매로 팔아넘기려 했다.
그러나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는 독일 및 일본과의 교섭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주요 자본주의 나라들과도 접촉을 맺으려 애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연계를 통해 영국과 프랑스의 정부 측 인사들과 개별 부르주아 사회 활동가들과 교섭하며 자신들의 복고주의적 속셈을 그들에게 알린다. 그래서 소콜니코프는 자신이 아는 영국 첩보원을 통해 영국 보수 정부 측 대표들과, 트로츠키파가 집권하게 될 경우 소련의 장래 트로츠키파 정부를 영국이 승인하는 문제를 교섭했다. 그는 이 교섭을 처음에는 지노비예프파·트로츠키파 블록 본부의 직접 위임으로, 뒤에는 병행 본부의 위임으로 진행했다.
이 교섭에서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블록 정부의 예정된 구성을 영국 대표에게 알릴 때, 소콜니코프는 곧바로 자신들이 영국에 제공할 커다란 경제적 양보를 설명하는 데로 넘어간다.
“나는 영국 공업에 큰 주문을 줄 것이며, 아울러 블록 정부가 소련에서 영국 자본에 이권을 폭넓게 내줄 것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이 대표에게 소련에서 이권을 폭넓게 발전시키는 데 대한 트로츠키, 카메네프, 리코프의 긍정적 태도가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려져 있다는 점에 주의를 환기했다. 그러자 그는 혁명 전 채무의 인정 전망에 관해 무언가 알려 줄 수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이 문제에서도 블록 정부가 상당한 양보를 하고 영국 정부가 받아들일 만한 제안을 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소콜니코프, 1936년 [날짜 공란] 수사 조서).
- 이우두시카(Иудушка, 「작은 유다」)는 살티코프-셰드린의 소설 『골로블료프가의 사람들』에 나오는 위선자의 별명으로, 레닌이 1911년 글 「이우두시카 트로츠키의 수치의 빛깔에 관하여」에서 트로츠키에게 붙인 욕설이다. ↩
- 두 문장 모두 인용을 예고하지만 원고에 인용문이 없다. 발췌를 붙이려고 비워 둔 자리로 보인다. ↩
- Л.266 끝줄 「트로츠키파 병행 본부는 계속 준비했다」가 줄로 지워졌으나 Л.267의 이어지는 말은 그대로여서 문장 주어가 없다. 지운 말을 대괄호로 살렸다. ↩
- 타자 272쪽이 철에 없다. 소콜니코프의 진술 인용과 그 뒤 대목이 빠져 있고, 다음 장은 낱말 조각(「…스코이 반디」, 도당)으로 시작한다. 그 뒤에 잘못 철해진 Л.273은 Л.275와 같은 면이어서 옮기지 않았다. ↩
- 히틀러의 집권은 1933년 1월이다. 원고대로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