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파주의에서 공공연한 반혁명으로
인물니콜라이 예조프, 레프 트로츠키,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이오시프 스탈린, 게오르기 퍄타코프, 세르게이 키로프, 그리고리 소콜니코프, 카를 라데크, 빅토르 바카예프, 블라디미르 레닌, 이반 스미르노프, 그리고리 예브도키모프, 야코프 드롭니스, 세르게이 므라치콥스키, 니콜라이 무랄로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미하일 톰스키, 레오니트 니콜라예프, 아돌프 히틀러, 니콜라이 부하린, 알렉세이 리코프, 레오니트 세레브랴코프, 블라디미르 루먄체프, 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 니콜라이 우글라노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마르테먄 류틴, 이반 코톨리노프, 안드레이 즈다노프, 스타니스와프 코시오르, 파벨 포스티셰프, 야코프 리프시츠, 니콜라이 우스트랴로프, 바실리 시미트, 드미트리 시미트 (붉은 군대 지휘관), 이바르 스밀가, 이반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 알렉산드르 벨로보로도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파니 카플란, 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 로베르트 에이헤, 미하일 라셰비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페르디난트 라살레, 비사리온 로미나제,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 티모페이 사프로노프,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보리스 수바린, 미하일 프룬제, 안드레이 시쿠로, 루돌프 헤스, 얀 스텐, 알렉산드르 슬렙코프, 레프 소스놉스키, 니콜라이 카레프, 알렉세이 바다예프, 표트르 팔친스키, 카를 코르슈, 조르주 클레망소, 카를 카우츠키, 아우구스트 베벨, 오토 폰 비스마르크, 니콜라이 글레보프-아빌로프 용어내무인민위원부(NKVD), 대숙청, 예조프시나, 모스크바 재판, 좌익반대파, 신반대파, 통합반대파, 우익반대파 사건대숙청
석탄 공업 파괴 계획의 기본 요소는 새 탄광 건설의 파탄, 가동 중인 탄광 운영의 교란, 지하 화재의 조직, 약탈적 채탄을 예정하고 있었다. 계획은 또한 인명 피해를 내는 지하 폭발과 화재를 조직하여, 이로써 탄광 노동자들 사이에 원한을 불러일으키고 석탄 공업의 모든 활동을 교란하려 했다. 셰스토프가 작성한 계획은 시베리아 트로츠키파 본부의 지도자 무랄로프의 찬성과 승인을 받았다.
“나는 내가 작성한 프로코피옙스크 계획을 무랄로프에게 보고했다. 그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무엇보다 생산 효과가 최소가 되도록 탄광 개설을 진행하고, 잘못된 탄광 굴진을 설계하되 우선 콕소바야 탄광부터 그렇게 한다. 이때 방주식 채탄법이 도입되고 있었으므로, 나는 이를 이용하여 채굴 공간을 완전히 충전하지 않은 채 이 방식을 시행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불가피하게 곳곳의 화재를 일으킬 터였는데, 이런 화재와의 싸움은 엄청난 어려움을 안겨 주며, 화재가 있으면 제2층과 하부층의 운영이 극히 어려워지고 거의 불가능해진다. 즉 사실상 탄광 거의 전체가 못 쓰게 된다. 게다가 이 채탄 방식은 본질적으로 약탈적이다. 나는 막대한 자본 투자로 아주 짧은 기간에 새 건설이 광범하게 펼쳐지고 생산 효과가 나는 듯한 겉모습을 만들어 내되, 나중에는 효과가 정반대가 되게 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무랄로프는 내 계획을 긍정적으로 대했고 전적으로 승인했다.”
(A. A. 셰스토프의 1936년 9월 7일자 진술에서).
이 비열한 반혁명분자들은 쿠즈바스 탄광들에서 일련의 파괴 공작 행위를 준비한다. 케메로보 광산에서 트로츠키파 파괴 분자 그룹을 이끈 것은 첸트랄나야 탄광의 전 관리자 노스코프와 광산의 전 기사 페셰호노프였다. 이 페셰호노프는 이미 1928년에 파괴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아 강제수용소 3년형을 선고받은 자였다. 트로츠키파와 과거의 파괴 분자들은 트로츠키파 드롭니스의 직접적인 임무에 따라 하나의 공동 도당을 이루었다.
드롭니스는 진술에서 이 범죄 도당의 조직에 관해 이야기한다.
“...나는 노스코프에게 내가 모스크바의 트로츠키파와 연계가 있으며 그들의 위임으로 케메로보에서 조직 활동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노스코프는 케메로보 광산에 트로츠키파 그룹을 만들어 적극적인 트로츠키파 활동에 나서자는 내 제안에 동의했다.”
1936년 9월 23일에 이 사악한 그룹은 첸트랄나야 탄광 제2구역 케메로보 탄층 북쪽 날개에서 가스 폭발을 일으켰다. 이 폭발로 노동자 9명이 죽고 노동자 15명이 중상을 입었다.
첸트랄나야 탄광에서 폭발과 노동자 가스 중독을 조직하라는 드롭니스의 직접적인 임무에 관해 노스코프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드롭니스는 내게 탄광에서 독살과 폭발로 노동자들을 물리적으로 말살하는 행위를 조직하라고 제안했다. 나는 안드레예프에게, 우리가 노동자에게 스탈린 정책이 그에게 얼마나 파멸적인지를 그 자신의 살가죽으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했고, 이 과제에 비추어 그에게 탄광에 가스가 차게 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요구했다.”
트로츠키파 파괴 그룹의 또 다른 참가자 I. G. 랴셴코는 이 범죄 활동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의 오랜 전복 활동은 불가피하게 탄광 폭발과 노동자들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폭발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환기가 잘 되지 않는 가스 막다른 갱도를 일부러 만들었고, 채탄 작업을 잘못 진행하여 막장에 체계적으로 가스가 차게 했으며, 강력한 시로코-5 환풍기를 치우고 막장의 가스를 빼내지 못하는 덜 강력한 시로코-3 환풍기를 설치했다.”
(I. G. 랴셴코의 진술에서, 1936년 9월 1일자 조서).
석탄 공업에서의 파괴 행위는 돈바스의 샤흐탄트라치트에서도 수행되었다.
반혁명적 트로츠키파 조직의 일원 중 하나인 샤예프는 양면주의적인 방법으로 당 기구에 숨어들어 당 도네츠크 주위원회 석탄부장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돈바스 트로츠키파 조직의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다. 공개적으로 나서서 우리 당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이 역겨운 양면분자는 국민경제의 이 가장 중요한 부문에서 파괴 활동을 지도했다. 샤예프가 양면분자이자 반혁명분자로 폭로되자, 그는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돈바스 석탄 공업에서의 전복 활동은 내가 우크라이나 트로츠키파 본부의 일원 - 로기노프의 지령에 따라 수행했다. 나와의 대화에서 그는 모든 수단을 다해 공업화의 성과를 파탄 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경제 계획을 파탄 냄으로써, 파괴 행위를 조직함으로써 이를 이룰 수 있다...”
(S. Ya. 샤예프의 진술에서, 1936년 11월 2일자 조서).
샤예프는 로기노프의 방침을 받아들여 이행하기로 하고, 돈바스 석탄 공업의 파괴 행위에 트로츠키파 안톤체프 - 치스탸코부골 관리자와 주브코프 - 돈바스안트라치트 트러스트 관리자를 끌어들였다. 그들과 함께 파괴 활동 계획을 작성하고 수행했다. 돈바스 석탄 공업에서의 전복 활동 조치에 관해 샤예프는 수사에서 이렇게 알렸다.
“안톤체프는 전복 활동을 주로 트러스트의 주요 탄광들, 즉 제18호 - 아메리칸카, 크라스나야 즈베즈다, 제33비스 호에 집중했다...
안톤체프가 채탄을 교란한 방법은 파괴적인 채굴 작업 진행과 준비 작업의 파탄이었으며, 그 결과 첫째로 탄광들은 사고와 붕락에 휩싸였고, 둘째로 석탄을 끊임없이 얻을 수 있게 해 줄 효과적인 막장선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제18호 아메리칸카 탄광의 파괴 작업으로 석탄 생산은 1935년 말의 2,000톤에서 9월에는 1,400톤으로 떨어졌는데, 1936년에 이 탄광은 3,000톤을 내야 했다.”
(S. Ya. 샤예프의 진술에서, 1936년 11월 21일자 조서).
반혁명분자 샤예프는 자신이 수행하려 한 돈바스 석탄 공업 파괴 계획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파괴 활동의 기본 계획은 주로 준비 작업의 축소, 이로써 막장선의 축소로 귀결되었으며, 중공업인민위원부 명령 제840호로 정해진 채굴 작업 규칙을 무시하고, 특히 안전 규칙을 무시하여 탄광에 불가피하게 사고가 빈발하는 상황을 만들어 냈다.”
“...이미 1936년 1분기에 안톤체프 그룹이 치스탸코프안트라치트에서 예정한 파괴 행위를 수행한 결과 채탄 계획이 파탄 났다. 석탄 약 20만 톤이 덜 공급되었다. 준비 작업 계획이 파탄 나 막장선이 크게 줄었으며, 따라서 1936년 이후 몇 달 동안 채탄을 확대할 가능성도 크게 줄었다.
탄광의 사고가 크게 늘어, 기계 고장, 갱도 붕락, 매몰 등으로 나타났다.”
(샤예프, 1936년 [날짜 공란] 수사 조서).
아조프-흑해 지방에서도 안트라치트 트러스트 탄광들에서 파괴 공작이 드러났다. 제4호 탄광 전 부관리자 보가초프는 샤흐탄트라치트 트러스트 제4호 탄광에서의 파괴 공작 준비와 실행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나는 제4호 탄광에서 두 건의 파괴 공작 행위를 저질렀다. 하나는 6월에, 다른 하나는 1936년 12월에.
6월 초 나는 며칠 동안 서부 구역 책임자 솔로도브니코프를 대리했다. 비코프는 부토프가 있는 자리에서 내게 이 상황과 구역의 작업 상태를 이용하여 그 구역을 침수시키라고 제안했다. 말해 두어야 할 것은, 이 무렵 제211 수평갱도의 굴착이 침수된 옛 제2호 탄광에서 2미터 거리까지 다가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남아 있는 탄주를 통해 물이 스며들고 있었다. 제211호 수평갱도 굴착에서 일하던 채탄부 돌고퍄토프는 탄주로 물이 스며드는 것을 알아채고 구멍을 뚫어 보았으며, 탄주가 침수된 제2호 탄광에 가깝다는 것을 확인하자 더 이상의 채탄을 멈추고 구역 침수를 막기 위해 구멍에 나무 마개를 박았다. 내가 비코프의 파괴 공작 임무를 수행할 때 이용한 것이 바로 이 상황이었다. 나는 반혁명 조직의 참가자 세미글라조프에게 돌고퍄토프가 박아 놓은 마개를 빼내고 구멍을 더 넓히라고 맡겼고, 그는 그렇게 했다. 구멍을 넓힌 결과 물은 곧바로 탄주 전체를 무너뜨리고 서부 구역을 완전히 침수시켰다. 탄광에 물을 푼 뒤 세미글라조프는 제10층 수평갱도를 통해 지상으로 나갔다. 그러나 본 수평갱도에 있던, 경고를 받지 못한 십장 예고로프는 느닷없이 물에 휩쓸려 죽었다”... “올해 9월 말이나 10월 초에 비코프는 내게 제4호 탄광의 매몰을 조직하라고 맡겼고, 이를 위해 나를 체르니흐와 연결해 주었으며 그가 있는 자리에서 이 임무를 내게 주었다. 나중에 파괴 공작 행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체르니흐는 비코프가 매몰 조직을 재촉한다고 내게 몇 번이나 말했는데, 탄광의 이 파괴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총살에 대한 일종의 항의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파괴 공작 행위는 우크라이나에서도[21] 준비되고 수행되었다. 키젤우골의 동지 스탈린 명칭 탄광 전 수석 기사 바벤코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탄광의 수석 기사로 일하면서 나는 탄광의 화재 위험이 각별히 크다는 것을 알았고, 또한 그것이 반혁명 조직의 참가자 크리보노스와 바르콥스키가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도 알았다... 이 모든 일의 결과 탄광은 1936년 2월에 화재로 파괴되었다.”
(바벤코의 진술에서, 1936년 [날짜 공란] 수사 조서).
3. 운수에서의 트로츠키파의 파괴 활동과 파괴 공작
트로츠키파는 철도 운수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파괴 활동과 파괴 공작을 벌이려 했다. 이 반혁명분자들은 철도 운수가 나라의 국민경제에서 얼마나 막대한 의의를 지니는지 알고 있었다.
운수의 파괴 분자들은 어떤 과제를 스스로 세웠는가? 이는 트로츠키파 조직의 일원들이 내린 지령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반혁명 조직의 참가자 크냐제프는 철도 운수에서 파괴 행위를 펼치는 일에 관해 다음과 같은 지시를 받았다.
“나와 조직의 과제를 이야기하면서 리프시츠는 국민경제에서의 전복·파괴 활동에 주된 역점을 두었고, 전복·파괴 활동에서 운수가 지니는 각별한 역할을 지적했다. 운수에서의 파괴 활동 분야의 실천 과제로 리프시츠는 내게 다음과 같은 과제를 제시했다. 1. 온갖 조치와 수단으로 공업의 가장 중요한 화물, 특히 광석, 석탄, 금속과 군용 화물의 수송을 파탄 낸다. 2. 기관차를 최대한 못 쓰게 만들고 기관차 부대의 작업을 교란한다. 3. 철도의 선로 시설을 운행 안전을 위협하는 상태로 만들고, 대규모 사고와 열차 탈선·충돌을 일으키도록 계산하여 철도의 가장 중요한 부서들의 작업을 교란한다. 파괴 활동을 펼치는 데 대한 동의를 내게서 받아 낸 뒤 리프시츠는 내게 또 하나의 과제를 제시했다 - 많은 인명 피해를 낼 일련의 파괴 공작 행위(폭발, 탈선·충돌 등)를 준비하고 수행하는 것이다.
나는 리프시츠에게 노동계급을 직접 겨냥한 이런 조치가 무슨 목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하냐고 물었다. 내 물음에 리프시츠는 답했다. ‘주민, 특히 노동자들과 붉은 군대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과 정부에 원한을 품도록 직접 애써야 하며, 모든 것이 나쁘고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고 모든 것이 스탈린과 소비에트 권력 탓이라는 인상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를 위해 주민과 노동자들과 붉은 군대를 직접 타격해야 하며, “나쁠수록 좋다”는 원칙을 굳게 명심해야 한다.’”
(크냐제프, 1936년 [날짜 공란] 수사 조서).
교통인민위원부 기구에 반혁명분자 부얀스키가 숨어들었다. 그는 교통인민위원부 차량 부문 중앙관리국의 기본 건설 부문 책임자였다. 자신의 직책을 이용하여 부얀스키는 차량 부문에서의 파괴 활동 조치를 여럿 세웠다.
“교통인민위원부 차량국에서 우리의 반혁명적 트로츠키파 조직의 실천 활동은 다음과 같은 기본 노선을 따라 수행되었다. a) 믿을 만한 트로츠키파 지도 간부들을 이 대상들에 배치하여 우리 조직이 소연방 철도의 차량 수리 공장과 차량 부서들을 장악하는 것, b) 우리 조직의 참가자들과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 차량 수리 공장과 철도 차량 부문에서 전복 활동을 수행하는 것.
우리의 반혁명적 트로츠키파 조직이 철도 운수에서 전복 활동을 수행할 때, 우리는 소연방 철도의 차량 수리소 건설에 주된 타격을 가했다.”
(크냐제프, 1936년 .........자 수사 조서.)[22]
운수의 트로츠키파 파괴 조직의 적극적인 참가자 - 스베르들롭스크역 제9차량구의 전 소장은 카가노비치 명칭 철도에서의 자기 파괴 활동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운수에서의 파괴 행위와 관련하여 조직은 다음과 같은 과제를 세웠다. 1. 철도의 가장 중요한 방면에서 선로 수리를 고의로 파탄 내어 선로 시설을 파괴한다. 2. 차량 무분리 수리를 고의로 파탄 내고 차축함 윤활 부문을 교란하여 차량 부문을 와해시킨다. 3. 기관차의 일상 수리와 중간 수리를 고의로 파탄 내어 기관차 부문[23]을 교란한다.”
(I. I. 부를라코프의 진술에서, 1936년 10월 15일자 조서).
이 지령은 이 반혁명적 파괴 조직의 일원들이 철도의 개별 구간에서 이행했다. 반혁명 조직의 참가자 시초프, 페름역 차량구의 전 기장은 이렇게 진술했다.
“나는 차축함, 판스프링, 충격·주행 부품이 고장 나고 윤축이 고장 난 불량 차량을 일부러 열차에 통과시켰으며, 이는 불가피하게 철도에서 탈선·충돌을 초래했다.
그 밖에도 나는 탈선·충돌을 일으킬 목적으로, 바퀴 테가 심하게 닳고 판스프링이 고장 났으며 운행 안전을 위협하는 다른 결함이 있는 고장 난 객차를 제79/80호 여객 열차에 거듭 편성했다.”
반혁명 조직의 또 다른 참가자 스테파노프 - 타이가역 기관차 분구의 전 부구장은 이렇게 진술했다.
“타이가역 차고에서 우리 트로츠키파는 수리가 끝나지 않았거나 조잡하게 수리된 기관차를 내보냈다. 이는 운행 중 잦은 고장을 일으켰다. 그 밖에도 우리는 계획된 기관차 수리 입고를 파탄 냈다.
우리는 기관차 수리 입고 순서를 교란하여, 기관차가 무더기로 못 쓰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 냈다. 1936년 1월에 볼로티노 차고에서는 기관차의 50%가 수리에 들어갔다.”
트로츠키파는 진짜 비적처럼 어떤 수단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이를테면 톰스크 철도 검열단의 전 검열관 오를로프는 이렇게 진술했다.[24]
“조직의 참가자 지트코프의 직접적인 방침에 따라 톰스크 철도의 기관차 부문에서 다음과 같은 전복 활동을 수행했다. 1. 바르나울 차고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차고에서 이 철도의 기관차 차고로 들어오는 피스톤 링과 슬라이드 밸브 링용 주철 드럼을 조잡하게 만들어졌음을 알면서도 가공 전에 시험하지 않았다. 2. 전복 방법의 하나로, 수리 때 앞쪽 피스톤 안내 부싱을 교체하지도 돌려 끼우지도 않는 것을 관행으로 만들었다. 루브촙카 차고에서 트로츠키파 조직의 참가자들은 이런 방법으로 1935~36년 겨울 동안 기관차 8대를 못 쓰게 만들었다. 3. 교통인민위원부가 금지한, 화기가 있는 기관차의 보일러 수리를 파괴적으로 시행했다. 루브촙카 차고에서 조직의 참가자인 트로츠키파 바를레토프는 나를 통해 그에게 전해진 지트코프의 지시에 따라 화기가 있는 기관차에서 새는 용접 관을 다짐 공구로 코킹했다. - 이로써 관은 더욱 망가졌고 관판을 휘게 하여 기관차를 못 쓰게 만들었다.”
벨고로드 구역의 전 책임자 제지옙스키는 이 비적들이 열차 운행을 교란할 목적으로 벌인 조치들을 이야기했다.
“운전 부서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전복 활동을 수행했다. 조절 명령의 이행을 사보타주했고, 차량 교환을 파탄 냈고, 가장 중요한 화물의 적재를 파탄 내면서 사실은 적재되지 않은 차량을 적재된 것으로 표시했다. 가장 중요한 구간들, 특히 쿠퍈스크 구간은 운행을 교란할 목적으로 일부러 열차로 틀어막혔다. 이렇게 열차로 틀어막는 일은 수송이 긴박한 가을·겨울 시기와 폭설 때 특히 악랄하게 행해졌다. 기관차를 준비되지 않은 열차에 불러내어 기관차 운용 회전을 파탄 냈다. 파괴적인 방식으로 직통 열차를 편성하여 가까운 배차역에서 불가피하게 다시 편성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트로츠키파는 소비에트 국가의 모든 가장 중요한 부문, 경제 건설의 모든 가장 중요한 부문에 자기 간부들을 보존하려고 애썼다. 철도에서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트로츠키파 자신들이 이야기한다.
교통인민위원부 중앙관리국의 전 국장 시메르고른은 새 철도 건설 부문 반혁명적 트로츠키파 조직의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는데,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처음에는 키브길로의, 그다음에는 나와 알렉세이 이바노프의, 므라치콥스키의 지시에 따라 수행된 적극적인 반혁명 활동은 새 철도 건설의 주요 지휘 자리를 우리 조직의 일원들이 장악하도록 보장했다. 여러 해에 걸쳐 나는 교통인민위원부 중앙철도건설국 체계 안에 트로츠키파 간부들을 보존했고, 그들을 지도적 직책에 임명했으며, 그들에게 권위를 세워 주었고, 철도 건설 비용으로 금전적 도움을 주었으며, 반혁명 활동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도록 온갖 방법으로 도왔다.”
“우리 반혁명 조직의 활동 결과 새 철도 건설은 철도 운수 활동에서 가장 실패한 부문이 되었다. 대체로 어떤 신규 건설도 정부가 정한 기한 안에 끝나지 않았고, 새로 건설된 철도는 미완성 부분이 많은 채로 운영에 넘겨졌다. 브랸스크-뱌즈마, 페트로파블롭스크-카라간다, 노보시비르스크-레닌스크, 모스크바-돈바스 제1단계 노선 등이 그러했다. 새로 건설된 철도의 공사 품질은 파괴 행위였다.”
트로츠키파는 가장 중요한 구간에서 철도 건설을 파탄 내는 데 큰 의의를 부여했다. 에이헤-소쿠르 철도 노선 건설의 전 소장으로 노보시비르스크 반혁명적 트로츠키파 조직의 참가자였던 오베르탈레르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보구슬랍스키는 시베리아 본부가 이 건설에서의 파괴 행위에 각별한 의의를 부여한다고 설명했다. 레프 다비도비치는, 보구슬랍스키가 지적하기를, 우리가 무엇을 어디서 하는지 정보를 꼬박꼬박 받고 있으며 우리 활동의 결과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구슬랍스키는 내게 다음과 같은 과제를 제시했다. 1) 교통인민위원부가 정한 건설 일정을 파탄 낸다. 2) 작업을 조잡하게 수행한다.
3) 건설 현장 일꾼들 가운데서 트로츠키파를 찾아내어 적극적인 활동에 끌어들인다. 4) 노동자들의 대중적 불만을 만들어 낸다. 5) 소비에트 권력에 적대적인 전문가들을 공동 활동에 끌어들인다. 건설 현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전복 활동을 수행했다. 노동자 기숙사 건설을 파탄 냈고, 굴착기 작업을 위한 준비 전체를 파탄 냈다. 인공 구조물 건설과 토공은 질질 끌어 겨울철로 넘겼다.”
L. M. 카가노비치 명칭 철도에서 반혁명적 트로츠키파 조직이 폭로되었다. 이 조직은 철도 부국장 투로크가 이끌었다. 투로크는 동시에 적극적인 일본 첩보원이었으며 일본 정보기관의 간첩·파괴 공작 조직을 이끌었다. 스베르들롭스크역 차량구의 전 구장 부를라코프는 투로크의 파괴 공작 방침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구체적으로 투로크는 조직이 전쟁 때 수행해야 할 다음과 같은 과제를 내세웠다. 1. 불량 차량임을 알면서 군용 편성에 넣고, 쓸모없는 윤축을 넣고, 선로를 훼손하고, 레일을 부러뜨리고, 바퀴 테가 파인 차량을 내보내고, 시베리아 간선의 작은 철도 교량들을 폭파하는 방법으로, 군대와 장비를 싣고 극동으로 가는 군용 열차의 대규모 탈선·충돌을 조직한다. 2. 기관차와 차량 부대를 못 쓰게 만든다. 3. 식량과 군용 화물이 있는 철도 창고에 대한 방화를 조직하고, 곡물 엘리베이터에 대한 방화를 조직한다. 4. 군부대 급식소의 물과 식료품을 급성 전염성 세균(페스트, 탄저, 콜레라)으로 오염시킨다.”
부를라코프의 이 진술은 같은 반혁명 조직의 또 다른 참가자 페름역 차량구의 전 기장 시초프의 진술로 뒷받침된다.
“사르가-포스투즈니 구간에서 제701호 열차의 탈선·충돌은 조직의 참가자가 차량 아래에 쓸모없는 윤축을 끼워 넣은 결과 차축 목이 부러져 일어났다.”
같은 트로츠키파 조직의 참가자로 예고르시노역 전 차량 기장인 코지레프는 이와 같은 파괴 방침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사고와 탈선·충돌을 일으킬 목적으로 나는 반혁명 조직의 참가자 리스코프에게 방침을 주었다. 차량 수리 때 고장 난 윤축을 일부러 끼워 넣어 통과시키라는 것이었다.
고장 난 윤축을 끼워 넣으면 불가피하게 열차 탈선·충돌이 일어나므로, 나는 탈선·충돌이 일어났을 때 책임자를 밝혀낼 수 없게 하여 발각을 피하도록 리스코프에게 임무를 주었다 - 윤축 검사 각인을 찍지 말고, 고장 난 윤축을 대장에 기록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무르만스크 공장의 전 선임 차장 코르닐로프는 공장 기술 책임자 그루즈뎁스키가 자기에게 공장 동력소 폭파를 준비하라고 제안했으며 파괴 공작 행위를 저지르는 방법에 관해 기술적 지시를 주었다고 이야기했다.
“폭약을 사용한 동력소 폭파 준비와 함께, 그루즈뎁스키는 동력소에 물을 대는 펌프를 멈추어 동력소를 폭파하려고 시도했다.”
남부 철도의 기관차 차고에서 1935년 말에, 기관차 부대의 파괴와 사고 조직을 목표로 삼은 트로츠키파 파괴 조직이 드러나고 폭로되었다. 이 그룹에는 속임수로 당 대열에 들어온 트로츠키파 약 20명이 속해 있었다. 조직은 엄격한 비밀 유지 원칙에 따라 구성되었다.
폭로된 그룹의 참가자들 - 트로츠키파 보그다노프, 하르첸코, 사프첸코 등의 진술에 따르면 그들은 “현존 체제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키고 이런 방법으로 나라의 지도부를 교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말에 따르면 “운수의 힘을 허물었고, 동요하는 공산당원과 차고 노동자들, 그리고 당에게 불이익을 받은 전 공산당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으며, 그들의 분위기를 현존 질서에 맞서게 하고, 정부 인사들을 태우는 특수 임무 기관차로 고장 난 기관차를 내주는 등의 방법으로 파괴 공작 행위와 테러 행위를 저지르려 했다.”
그룹은 체계적으로 보일러 부문을 망가뜨렸고, 일부러 연관에서 누수가 나게 했으며, 기관차를 조잡하게 수리하도록 조직했다. 이는 운행 중 기관차가 자주 멈추는 결과를 낳았고 기관차 공급 일정을 파탄 냈다.
이 그룹은 또한 돌격대원들의 체계적인 신용 실추를 조직했고, 일부러 작업 단가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이로써 노동자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보다시피 운수에서의 파괴 활동은 철도 운수의 지휘 자리를 차지하고 파괴 조직의 가지 많은 망을 조직한 적극적인 트로츠키파가 수행했다. 파괴 행위와 파괴 공작은 선로 시설의 파괴, 차량 부문의 와해와 기관차 부문의 교란, 적재 계획의 파탄, 탈선·충돌과 사고의 조직 등의 방향으로 수행되었다.
운수에서의 트로츠키파의 파괴 활동과 파괴 공작의 사실은 이러하다.
4. 기계 제작 공업에서의 파괴 행위와 파괴 공작
로스트셀마시 공장의 전 공장장으로 이름난 트로츠키파 글레보프-아빌로프는 자신의 파괴 활동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1935년 말에 퍄타코프는 내게 로스트셀마시의 군수 주문 이행을 파탄 내고, 이를 위해 스비르스키를 이용하라고 맡겼다. 나는 퍄타코프에게 군수 주문에는 특별한 감시가 따르며 이 일에서는 쉽게 걸려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퍄타코프는 어떤 불쾌한 일이 생기면 자기가 직접 그에 맞는 유리한 증명서를 내주겠다고 내게 답했다.”
(N. P. 글레보프-아빌로프의 진술에서, 1936년 10월 21일자 조서).
퍄타코프의 직접적인 임무에 따라 트로츠키파 조직의 참가자이자 파괴 분자인 트로츠키파 스비르스키 - 로스트셀마시 특별부장은 글레보프-아빌로프에게서, 공장에서 제작하는 콤바인을 손상된 베어링을 달아 작업에 전혀 쓸 수 없는 상태로 출고하라는 직접적인 지시를 받았다. 이 지시의 결과 그런 베어링을 단 콤바인 700대가 출고되었고, 이들은 작업에 쓸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트로츠키파의 파괴 활동의 또 다른 특징적인 예가 있다. 오데사에서 1935년 말에 당 서류 점검 때, 대부분 책임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숨은 트로츠키파 그룹이 드러났다. 이 그룹은 이미 1928년에 담배 공장에서 만들어졌다.
이 반혁명 그룹의 참가자들은 서로 책임 있는 자리에 오르도록 도왔고, 서로를 옛 붉은 빨치산이자 혁명 지하운동 참가자로 추천했다.
적발된 그룹은 직접적인 파괴 행위를 벌였다. 예를 들어 그룹 참가자인 트로츠키파 레빈은 영화 장비 공장의 작업장 책임자로서 주위를 백위군 출신으로 채우고(레빈은 반혁명 전력이 있는 12명을 작업장에 채용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이동식 발성 영사기에 안전망을 달지 않도록 밀어붙였다. 안전망이 없으면, 지금 감정으로 확인된 바와 같이, 필름이 끊어져 발광 램프에 닿을 때 필름 전체의 발화와 폭발을 피할 수 없고, 이는 영화 상영 중에 화재를 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트로츠키파의 테러·간첩 활동과 파괴 행위에서 이와 같은 예와 사실은 얼마든지 더 들 수 있다.
사회주의 건설의 평범한 참가자들에 대한 테러. 스타하노프 노동자 살해
말할 것도 없이, 트로츠키파가 저지른 파괴 행위는 생산을 무너뜨리는 데만 그칠 수 없었다. 이런저런 작업장이나 탄광 등의 폭파는 필연적으로 인명 희생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것이 트로츠키파가 비열한 계획을 실행하는 것을 막았을까? 정반대다! 사회주의 경제에 대한 파괴 행위의 길에 들어선 트로츠키파는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물리적 절멸까지 의식적으로 감행했다. 이는 곧바로 그들의 계획에 들어 있었다. 그들의 계획에 따르면 인명 희생을 동반한 파괴 행위와 파괴 공작은 노동자의 불만을 더 빨리 불러일으킬 터였기 때문이다.
노동자를 절멸시키는 자신들의 피비린내 나는 일을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는 소비에트 권력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데에도 이용하려 했다. 트로츠키파 조직의 참가자들은 일련의 파괴 행위와 전복 조치로 노동 대중의 당과 당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려 했다. 트로츠키파는 파괴 행위와 파괴 공작을 수행하라는 임무를 내릴 때 소비에트 노동자의 물리적 절멸, 살해, 질식사를 의식적으로 자기 계획에 집어넣었다.
케메로보 화학 콤비나트의 전 책임자 노르킨은 이 문제에 관한 퍄타코프의 파렴치한 발언을 이야기했다. 노르킨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1936년 7월 퍄타코프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퍄타코프는 필요할 때 화학 콤비나트의 국방 시설에 방화를 조직할 궁리를 해 두라는 임무를 내게 주었다. 나는 이 일이 폭발물과 유독 물질에 관련되어 있으므로 노동자들이 죽을 수 있다고 말했고, 그는 내게 답했다. ‘가엾어할 사람을 잘도 찾았군. 이들은 양 떼다. 우리 노동계급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퇴화했고, 케메로보에는 더군다나 없다. 게다가 욕을 먹는 건 너와 내가 아니라 스탈린이다.’”
조직의 다른 많은 참가자들도 같은 내용을 진술한다.
안제르 광산 관리자 셰스토프는 시베리아 트로츠키파 조직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드롭니스에게서 이 방향으로 받은 지령을 이야기했다.
“드롭니스는 케메로보의 트로츠키파가 환기 설비의 파괴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폭파와 탄광 구역 전체의 가동 중단이 준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작업은 특히 ‘첸트랄나야’ 탄광에서 폭넓게 진행되었는데, 드롭니스의 말에 따르면 그곳에는 전복 활동을 벌이는 트로츠키파 조직 참가자들의 가장 탄탄한 핵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드롭니스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직접적인 파괴 공작을 벌이는 것이군요? 그런데 폭파가 일어나면 어떻게 합니까, 노동자들의 죽음을 피할 수 없을 텐데요?’
드롭니스는 내가 노골적으로 곧바로 던진 질문에 잠깐 머뭇거린 뒤 내게 답했다. ‘이상한 질문이군, 자네도 스탈린 지도부와의 투쟁에서 조직의 노선을 모르지 않잖나, 자네 자신도 내게 쿠즈바스에서 자네들이 온갖 수단으로 당의 신용을 떨어뜨리고 당 지도자들에 대한 대중의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고 이야기했지.
우리도 같은 길을 가고 있고, 노동자의 죽음만큼 당에 맞서 잘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본다. 일은 노동자들의 분노가 모두 당으로 쏟아지도록 짜여 있다. 이런 행위로 최대의 효과를 거둔다. 폭파로 인한 죽음은 말할 것도 없고, 나쁜 환기로 인한 끊임없는 질병, 일산화탄소 중독과 유독 가스 중독만큼 노동자들을 격분시키는 것은 없다. 우리는 이것을 노동자들에게 스탈린의 인간에 대한 배려를 보여 주는 데,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여 주는 데 이용한다.’
드롭니스는 덧붙였다. ‘폭파는 불쾌한 일이지만, 그것으로 무엇보다 막대한 물질적 손실이 생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우리는 사실상 여기서 토끼 두 마리를 잡는 셈이다.’”
(1936년 10월 31일 셰스토프의 진술에서).
트로츠키와 그 앞잡이들이 스탈린 동지와 그의 전우들, 노동계급의 지도자들,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품은 모든 증오를, 그들, 부르주아지의 이 사자(使者)들은 노동자들에게 퍼부었다.
케메로보 탄광의 반혁명 파괴 그룹 재판은 모두의 기억에 남아 있다. 재판 자료를 통해 우리는 트로츠키파가 감행한 의식적인 노동자 중독이라는 끔찍한 사실들을 알고 있다.
1935년 한 해 동안 케메로보의 트로츠키파 조직 참가자들은 “첸트랄나야” 탄광의 환기를 망가뜨려 노동자 77명을 중독시켰다. 1936년 1분기에만 93명이 중독되었다.
드롭니스는 인명 희생을 낸 폭파와 노동자 중독이 자기 지시에 따라 조직되었다고 진술했다.
“나는 수사 당국에 분명히 밝혀 두어야 하겠다. 나는 이 비열한 일을 승인했을 뿐 아니라 노스코프를 격려하기까지 했으며, 그에게 흰 장갑을 끼고 권력을 향해 달려드는 것은 우리 트로츠키파의 정신이 아니라고 설득했다. 나는 노스코프에게 ‘노동계급은 이것이 우리 손으로 한 일임을 알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가 승리했을 때 언젠가 알게 되더라도 그때는 우리 나름대로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일러 주었다.”
트로츠키파·파시스트 소굴은 파괴 공작과 파괴 행위로 체계적으로 노동자를 중독시켰으며, 탄광에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에 가장 위험하고 가장 해로운 작업 조건을 고의로 만들어 냈다. 노동자들이 반혁명 트로츠키파·파시스트 조직원들이 범죄적으로 만들어 낸 조건을 바꾸려 하면, 반혁명 조직의 괴수들은 노동자들의 이 정당한 요구에 대해 탄광의 정상 작업을 방해한다는 온갖 “객관적 사정”을 간교하게 내세웠으며, 이로써 노동자들의 불만을 더욱 불러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야수가 된 범죄자와 살인자의 도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트로츠키파 본부는 파괴 행위와 파괴 공작의 “더 큰 효율”을 요구한다. 트로츠키파 그룹은 큰 인명 희생을 낳는 일련의 파괴 공작을 조직하여 이로써 노동자들의 증오와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퍄타코프의 지시에 따라 시베리아 트로츠키파 파괴·테러 본부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드롭니스는 케메로보 “첸트랄나야” 탄광의, 탄광 관리자인 트로츠키파 노스코프가 이끄는 트로츠키파 파괴 그룹에 탄광 폭파를 지시한다. 이 탄광이 파괴 공작 대상으로 선택된 것은 케메로보 광산 관리국의 모든 탄광 가운데 가스 위험이 가장 크다는 점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탄광을 파괴하면 인명 희생 없이는 끝나지 않을 텐데요”라는 노스코프의 물음에 — 드롭니스는 파렴치하고 뻔뻔하게 이렇게 답했다.
“인명 희생 없는 투쟁이란 없다. 오히려 탄광에서 이런 희생이 나면 더 좋다. 틀림없이 노동자들 사이에 큰 증오를 불러일으킬 것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드롭니스의 진술에서, 1936년 10월 30일 조서).
드롭니스는 그에게 이 사정에 주눅 들지 말고 과감하게 일을 벌이라고 제안했다. “노동자들을 중독시켜야 한다, ‘이제 살기가 더 좋아지고 더 즐거워졌다’[25]는 게 어떤 것인지 그들이 알게 하라”고 그들은 사나운 짐승 같은 증오를 품고 말한다.
이 악당들은 이런저런 노동자 집단을 죽이는 데 성공했을 뿐 노동자들의 당과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데는 끝내 성공하지 못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는 트로츠키파를 한층 더 광분하게 한다.
트로츠키파는 노동계급 전체를, 그들이 벌이는 온갖 방해에도 헌신적으로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하는 소련의 모든 근로자를, 이들이 공산당에 충성하고 그 둘레에 결집해 있다는 이유로 짐승처럼 증오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증오의 모든 힘을 사회주의 건설의 선봉대, 스타하노프 노동자에게로 돌린다. 노동계급과 그 당이 스타하노프 운동을 모든 방법으로 더욱 전개하는 데 얼마나 큰 의의를 두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트로츠키파 조직은 이 운동의 파탄에 특별한 주의를 집중한다.
트로츠키파는 스타하노프 운동의 전개와 그에 따른 노동계급 활동성의 고양이 비열한 트로츠키파의 파괴·파괴 공작 활동에 반드시 방해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스타하노프 운동은 노동 생산성의 향상과 사회주의 건설 전선의 새로운 성과로 이어진다. 그래서 트로츠키파는 가장 선진적인 스타하노프 노동자의 물리적 절멸에 이르기까지 스타하노프 운동을 파탄 내고 그 신용을 떨어뜨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한다.
이에 대해 시베리아 트로츠키파 본부의 일원 — 트로츠키파 파괴 분자 셰스토프가 수사에서 진술한 내용은 이렇다.
“무랄로프는 스타하노프 운동에 대한 조직의 노선을 내게 알려 주었다. 무랄로프의 말로 보아 스타하노프 운동을 무시할 수 없으며 조직이 이 운동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했다. 무랄로프는 스탈린의 기구 전체가 이 운동을 움켜쥘 것이고 일시적이나마 틀림없이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것을 우리 트로츠키파는 그냥 넘길 수 없다, 이것은 우리의 계산에 들어 있지 않다’고 — 무랄로프는 말했다. 무랄로프는 무엇보다 먼저 기술 인력이 이 운동에 참여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스타하노프 운동은 고도의 기술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이 기술을 타격해야 하고, 탄광업의 특수성을 구실로 삼아 탄광업의 분업 조치를 파탄 내야 하며, 작업장 조직을 방해하고, 노동자들에게 자재를 공급하지 말고, 특히 공구와 기계화를 타격해야 한다. 노동자가 스타하노프 방식뿐 아니라 가장 평범한 방식으로도 일할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A. A. 셰스토프의 진술에서, 1936년 10월 16일 조서).
트로츠키파는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고 이로써 스타하노프 운동을 무너뜨리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돈바스에서 파괴 분자들이 벌인 이 조치들에 관해 당 도네츠크 주위원회 탄광부의 전 부장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안톤체프는 이른바 예비 원가를 시행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이 파괴 조치의 뜻은 탄광들이 낮춰 잡은 원가를 받게 하는 데 있었고, 이는 결국 지휘 인원의 임금 삭감과 기술 인력(ИТР)의 누진 성과급제의 신용 실추로, 따라서 모든 지휘자가 앞장서야 했던 스타하노프 운동의 파괴로 이어졌다.
안톤체프가 시행한 낮춰 잡은 원가의 결과, ‘치스탸코프안트라치트’ 탄광 지휘 인원의 약 절반은 아무런 부수입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인위적으로 기본급의 80퍼센트만 받게 되었다.”
(샤예프, 1936년 [날짜 공란] 수사 조서).
세계 부르주아지의 명령을 이행하면서 트로츠키파는 스타하노프 노동자에 대한 박해를 벌인다. 이 반혁명분자들은 자신들이 경제 활동을 맡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자기들의 파괴 조치, — 중독, 폭파 등을 벌이는 동안 먼저 선진 노동자, 스타하노프 노동자를 위험에 빠뜨린다. 노동자들이 이 사고들의 원인을 캐기 시작하면 트로츠키파는 이런 현상을 객관적 원인으로 설명했다.
이를테면 남부 철도 벨고로드 구역의 전 책임자 제지옙스키는 이렇게 진술했다.
“무엇보다도 전복 활동을 은폐하기 위해 나는 철도 분기역에 일종의 ‘연막’ 구실을 할 조건을 만들기로 했다. 그런 ‘연막’이 바로 노동 규율의 붕괴였다. 우리의 전복 활동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 열차 충돌, 점유된 선로로의 열차 진입, 운행 중 기관차 고장, 불량 수리 등 — 이 모든 것을 노동 규율 붕괴 탓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규율 강화를 위해 투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규율을 무너뜨리는 모든 것을 온갖 방법으로 장려했다. 나는 뇌물 수수, 눈속임, 음주, 무단결근 등을 장려했다. 노동 규율을 가장 악의적으로 어긴 자들조차 대부분 처벌받지 않았다.
노동 규율의 붕괴는 인명 희생을 낸 대형 열차 충돌이 드문 일이 아닐 정도에 이르렀는데, 전철기를 잘못 전환하고 여객 열차를 화물 열차 쪽으로, 화물 열차를 작업 열차 꽁무니로 들여보내는 등의 일 때문이었다.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당의 구호에 맞서 우리는 돌격 노동자 박해를 조직했고, 돌격 노동자 포상 때 이들을 빼놓아 그들 사이에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기억하건대 운수 분소장 보좌로 성실하게 일하던 푸골롭킨을 특히 심하게 박해했다. 노동자들에게 작업복 지급을 거칠게 거부했고, 우리 그룹 참가자 블라소프를 통해 공공 급식을 무너뜨렸는데, — 이 모든 일은 노동자들의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불만을 불러일으키려는 목적으로 벌어졌다. 그 대신 게으름뱅이, 사고꾼, 꾀병꾼을 온갖 방법으로 장려했다. 이들에게는 파괴하라고 가장 좋은 기관차가 배정되었고, 물질적으로도 더 잘 보장되었다.”
이것이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의 추악한 파괴 행위와 파괴 공작 활동의 사실들이다. 이것이 트로츠키파가 노동자를, 무엇보다 사회주의 건설에 가장 헌신적인 선진 노동자를 비열하게 살해한 사실들이다.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는 테러 투쟁의 폭넓은 계획과 나란히, 부르주아 반혁명의 가장 나쁜 대표자들이 소비에트 권력, 사회주의 건설과 싸우는 데 써 온 검증된 무기인 파괴 행위와 파괴 공작에 기대려 했다.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반혁명 내부의 파괴 분자와 파괴 공작원, 그리고 람진·팔친스키 유형의 반혁명분자 — 파괴 분자 사이에 차이를 그을 수 있다면, 그 차이는 물론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퍄타코프, 카메네프와 그 비슷한 자들에게 유리하지 않다.
람진들과 팔친스키들은 나름대로 자기 자본가 계급에 정직하게 봉사했고, 사회주의와의 투쟁에서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이익을 지켰다. 그러나 파시즘에 봉사하게 된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는 자본주의 복고를 위해 소비에트 권력과의 투쟁에 가장 추악한 온갖 방법을 썼으며, 처음에는 이를 노동계급 이익 수호의 깃발 아래 벌였다. 그들은 노동계급의 이익을 추악하게 배신했고, 겉으로는 사회주의에 대한 공감이라는 가면을 쓰려 하면서 승리한 사회주의에 맞서 적극적으로 투쟁했다. 오직 자기들의 추악한 무리 속에서만 그들은 가면을 벗었으며, 그때 그 가면 밑으로 사회주의의 광포한 적들의 탐욕스러운 아가리가 드러났다. 노동자에게 “살기가 더 좋아졌다, 살기가 더 즐거워졌다”[25]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 주어야 한다는, — 그러기 위해 노동자들을 중독시켜야 하더라도 그래야 한다는 그들의 악의에 찬 파렴치한 발언에서, 파시즘의 짐승 같은 얼굴이 드러나고, 그들의 정치 강령의 본질 전체, 자본주의 복고 강령이 드러난다.
이 모든 사실은 트로츠키파가 패퇴한 계급들의 잔재를 조직하는 세력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이 자본주의적 파시스트 부르주아지의 가장 충실한 하인으로 변질했음을 보여 준다. 이 부르주아지를 먹여 살리는 유일한 환경은 소련을 둘러싼 자본주의 포위망이다.
이 사실들은 트로츠키파가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짐승 같은 증오 속에서, 노동자의 불만을 불러일으키려는 시도 속에서, 내전기의 시쿠로 같은 백위군 “영웅”들의 만행에나 견줄 수 있는, 노동자를 학대하는 가장 비열하고 잔혹한 방법까지 감행했음을 보여 준다.
사회주의의 교살과 자본주의 복고 강령 — 이것이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가 서 있던 강령이요, 그들이 비열한 범죄 활동을 벌인 입장이었다.
주석
- [원주] 레닌, 제27권, 366쪽. ↩
- 바로 앞 문단과 거의 같은 문단이다(Л.46~47). 원고대로 둘 다 옮겼다. 뒤 문단은 사파로프를 빼고 형량과 「1932-1934년」을 더했다. ↩
- 원고에는 「1936년」으로 타자되어 있으나 앞뒤 문맥(1926년 7월 총회와 10월 16일 성명 사이)으로 보아 1926년의 오타로 읽었다. 2021년 출간본도 1926년으로 실었다. ↩
- 외화 기금 단락 앞에 나온 문단과 같은 문단이다(Л.96~98). 원고대로 둘 다 옮겼다. ↩
- 원고는 수신처를 「ВЦИК」(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로 적었으나, 이 글은 1932년 3월 1일 자로 소련 중앙집행위원회(ЦИК СССР) 간부회에 보낸 공개서한이다. 해당 대목은 「마침내 레닌의 마지막 간곡한 권고를 실행해야 한다. 스탈린을 제거하라」로, 스탈린을 총서기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라는 레닌의 유언을 끌어온 정치적 요구다. 예조프는 1936년 재판의 논리대로 이를 테러 지령으로 해석한다. ↩
- 앞의 예브도키모프 진술은 바카예프가 이 그룹들과 연계를 맺으러 레닌그라드로 간 때를 1934년 가을로 적는데, 여기서는 준비가 끝났다는 보고가 1934년 8월이다. 원고대로 옮겼다. ↩
- 소제목과 뒤따르는 문단은 1934년의 기도라고 하지만, 이 진술이 말하는 것은 1932년 가을부터 1933년 말까지의 일이다. 원고대로 옮겼다. ↩
- 힘러는 돌격대(SA)가 아니라 1929년부터 친위대(SS)의 전국지도자였다. 저자의 착오로 보이며 원고대로 옮겼다. ↩
- 바로 앞 올베르크 진술은 같은 돈을 13,000체코슬로바키아크로네라고 한다. 원고대로 옮겼다. ↩
- N. Ye.는 예조프 자신의 머리글자(Н. Е.)로, 괄호 안의 말은 저자가 넣은 것이다. 원고에 이 인용의 출처 줄이 없다. ↩
- 같은 뜻의 문장이 잇달아 나오고(본부가 같은 구성으로 최근까지 유지되었다), 끝 문장은 1인칭 진술에 3인칭이 섞여 있다. 조서의 문체로 보아 원고대로 옮겼다. ↩
- 이 만남은 앞에 서술된 적이 없고 뒤에 나온다. 원고를 고쳐 엮은 흔적으로 보이며 원고대로 옮겼다. 만남 자체에 대한 반박은 해제를 보라. ↩
- Л.237~238에서 드레이체르와 피켈의 그룹을 다룬 대목과 소콜니코프 진술 인용(1936년 8월 30일 조서)이 잉크 사선으로 지워져 있다. 수정 뒤의 문구로 옮겼고, 지운 글은 러시아어 원문판에 남겼다. ↩
- 이우두시카(Иудушка, 「작은 유다」)는 살티코프-셰드린의 소설 『골로블료프가의 사람들』에 나오는 위선자의 별명으로, 레닌이 1911년 글 「이우두시카 트로츠키의 수치의 빛깔에 관하여」에서 트로츠키에게 붙인 욕설이다. ↩
- 두 문장 모두 인용을 예고하지만 원고에 인용문이 없다. 발췌를 붙이려고 비워 둔 자리로 보인다. ↩
- Л.266 끝줄 「트로츠키파 병행 본부는 계속 준비했다」가 줄로 지워졌으나 Л.267의 이어지는 말은 그대로여서 문장 주어가 없다. 지운 말을 대괄호로 살렸다. ↩
- 타자 272쪽이 철에 없다. 소콜니코프의 진술 인용과 그 뒤 대목이 빠져 있고, 다음 장은 낱말 조각(「…스코이 반디」, 도당)으로 시작한다. 그 뒤에 잘못 철해진 Л.273은 Л.275와 같은 면이어서 옮기지 않았다. ↩
- 히틀러의 집권은 1933년 1월이다. 원고대로 옮겼다. ↩
- [원주] “프뢸리히-클뤼펠-다일만” 회사는 쿠즈바스우골에 장비를 납품했다. 이 회사의 전문가들은 쿠즈바스우골과 맺은 계약에 따라 탄광의 설비 조립과 굴진 작업을 했다. ↩
- 원고의 이 자리에는 「쿠즈바스스트로이 수석 기사」로 타자되어 있으나, 뒤에 나오는 「쿠즈바스우골 수석 기사」로 맞췄다. ↩
- 원고대로 옮겼다. 키젤우골은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우랄 키젤 탄전의 석탄 트러스트이므로 저자의 착오로 보인다. ↩
- 원고의 출처 줄은 「크냐제프」로 타자되어 있으나, 앞 문단은 이 진술을 부얀스키의 것으로 소개한다. 앞 인용의 출처 줄을 옮겨 친 것으로 보이며, 원고대로 옮겼다. ↩
- 원고에는 「당 살림」(партийного хозяйства)으로 타자되어 있으나, 기관차 수리를 말하는 문맥과 이 절을 맺는 Л.374의 「기관차 부문」(паровозного хозяйства)으로 보아 오타로 읽었다. ↩
- 원고에는 「…이렇게 이야기했다」와 「…이렇게 진술했다」가 같은 말로 잇달아 타자되어 있어 한 번만 옮겼다. ↩
- 1935년 11월 제1차 전연방 스타하노프 노동자 회의 연설에서 스탈린이 한 말 「살기가 더 좋아졌습니다, 동지들. 살기가 더 즐거워졌습니다」(Жить стало лучше, товарищи. Жить стало веселее)를 비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