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기 레오니도비치 퍄타코프

Георгий Леонидович Пятаков
소련 우크라이나 1890–1937 ✕ 처형

혁명과 산업 계획 사이의 볼셰비키

1937년 1월,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석에서. 독일 작가 리온 포이히트방어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중간 키에 중년, 약간 벗겨진 머리와 붉은빛이 도는 옛날식의 떨리는 뾰족 수염을 한 퍄타코프가 마이크 앞에 서서, 자기가 맡은 산업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조용하고도 공들여 이야기하는 모습을. 마치 대학 강사처럼 손가락을 뻗어 설명하며, 오래전에 죽은 '퍄타코프'라는 인물의 삶과 행적을 상세히 밝히려는 역사학자처럼, 청중이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납득하기를 바라는 한 가지 소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초대 수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민족자결권 문제에서 좌파 공산주의자로서 레닌과 맞섰고, 레닌이 '유언'에서 언급한 단 여섯 명의 볼셰비키 중 한 명이다. 좌익 반대파로 출당되었다가 복당 후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며,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주피고인으로 처형되었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민족 문제 논쟁: 'P. 키옙스키'로서 레닌과 맞서다

1915~1916년 스위스 망명 중 퍄타코프는 'P. 키옙스키'라는 필명으로 민족자결권 문제에서 레닌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의 논문 「프롤레타리아트와 '민족자결권'」에서 퍄타코프는 제국주의 시대에 민족자결권은 실현 불가능한 환상이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민족국가의 틀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결권'이란 구호가 오히려 프롤레타리아트를 민족 부르주아지의 편으로 끌어들일 위험이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 논거였다. 레닌은 이에 대해 「P. 키옙스키에 대한 답변」과 「마르크스주의의 희화화와 '제국주의 경제주의'」 두 편의 반박문을 썼고, 퍄타코프의 입장을 '제국주의 경제주의'(전쟁의 공포에 눌려 민주주의 자체를 경멸하게 된 오류)라고 명명했다. 퍄타코프는 레닌과의 공동 편집 작업에서 물러났고, 이 논쟁은 볼셰비키 내에서 민족 문제에 관한 가장 중요한 이론적 충돌 중 하나로 남았다.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는 실무를 맡으면서도 그는 이 원칙적 입장을 견지했고, 이는 그가 평생 지닌 국제주의적 신념의 중핵이었다.

민족자결권 논쟁: 레닌과의 대립

퍄타코프는 볼셰비키 내에서 민족자결권 문제를 둘러싸고 레닌과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인물이었다. 1915년 그는 예브게니야 보시, 니콜라이 부하린과 함께 「민족자결권에 관한 테제」를 스위스 망명지에서 발표했다. 이 테제는 제국주의 시대에 민족자결권이란 자본주의 틀 안에서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이며,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을 민족적 차원으로 분산시키는 해로운 구호라고 주장했다. 레닌은 이에 대해 P. 키옙스키(퍄타코프의 필명)에 대한 답변에서 제국주의가 민주주의를 부정한다고 해서 민주주의적 요구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반박했고, 이후 「마르크스주의의 희화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에서 퍄타코프의 입장을 '제국주의적 경제주의'로 규정하며 길게 비판했다. 이 논쟁으로 퍄타코프는 레닌과 결별하고 잡지 《코무니스트》 편집부를 떠났다.

퍄타코프는 이 입장을 집권 후에도 견지했다. 1919년 3월 제8차 당대회에서 그는 우크라이나 공산당 서기로서 "민족자결권이라는 구호는 모든 반혁명 세력을 결집시키는 구호임이 실천에서 입증되었다"고 선언하며, 소비에트 공화국들 사이에 국경을 철폐하고 단일한 중앙집권적 당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대회에서 이에 대해 "만약 강령에 그런 내용이 들어간다면 비판할 필요도 없이 스스로 무덤을 팔 것"이라고 응답했다. 퍄타코프가 우크라이나 임시정부 수반으로서 추진한 급진적 집산화와 중앙집권화 정책은 그의 이론적 입장과 일관된 것이었으나, 이는 1919년 1월 그가 해임되고 크리스티안 라콥스키로 교체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토록 반대했던 민족자결권 원칙은 1922년 소련 수립의 공식적 토대가 되었고, 레닌의 유언에서 퍄타코프가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평가된 배경에는 바로 이 논쟁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정부 수립: 초대 수반에서 물러나기까지

1918년 11월 독일 제국 붕괴 직후, 소비에트 지도부는 우크라이나 탈환을 결정했다. 퍄타코프는 스탈린·자톤스키·안토노프-오브세옌코와 함께 우크라이나 혁명군사평의회에 참여해 붉은 군대의 진격을 준비했고, 1918년 11월 28일 임시노농정부 수반으로 임명되어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정권의 첫 지도자가 되었다. 취임 즉시 '대규모 사회주의적 생산' 구호 아래 국영농장과 코뮌의 신속한 설립을 추진했으나, 급진적 집단화 노선과 모스크바 중심의 중앙집권적 접근은 현지 볼셰비키 및 좌파 에스에르와의 격렬한 충돌을 불렀다. 불과 두 달도 안 된 1919년 1월, 정부 내 대립 끝에 퍄타코프는 해임되고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라콥스키가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퍄타코프는 이후 우크라이나 공산당 서기장, 혁명군사재판소장, 그리고 13군·6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크림반도에서 활동하며 우크라이나와 남부 전선에서 소비에트 권력 공고화에 계속 관여했다.

제2차 모스크바 재판 — '평행 중심' (1937)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이른바 '반소비에트 트로츠키주의 평행 중심' 사건)은 1937년 1월 23일부터 모스크바 연합회관 기둥홀에서 열렸다. 퍄타코프는 주피고인으로서 카를 라데크, 그리고리 소콜니코프 등 16명과 함께 기소되었다. 검찰은 퍄타코프가 1935년 12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추방 중인 트로츠키를 비밀리에 만나, 소련 중공업 전반에 걸친 대규모 산업 파괴공작을 지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퍄타코프는 이 혐의를 모두 인정하고, 산업재해·탄광 폭발·철도 사고 등을 의도적으로 유발했다고 법정에서 자백했다. 그러나 퍄타코프가 트로츠키와의 접선 장소로 진술한 오슬로의 브리스톨 호텔은 이미 철거되어 존재하지 않았으며, 당시 기상 악화로 오슬로 공항도 폐쇄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해외 언론을 통해 즉각 폭로되었다. 독일 작가 리온 포이히트방어는 방청 후 퍄타코프가 마치 '대학교수가 오래전 죽은 인물의 생애를 해설하듯' 자신의 죄를 차분히 설명하는 모습을 남기며 경악했다. 1월 30일 사형 선고, 2월 1일 총살되었다. 고르바초프 시기인 1988년 7월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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