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프의 화폐 안정화를 이끈 재무인민위원
1925년 12월 제14차 당 대회(대의원 1,306명)에서 소콜니코프는 연단에 올라 스탈린의 총서기직 사퇴를 공개 요구하고 네프의 계속을 주장했다. 연단에서 이를 요구한 발언자는 그가 유일했다. 제안은 다수를 얻지 못했다.
스탈린 시대에 옥중에서 살해된 볼셰비키 지도자. 본명은 그리고리 브릴리안트로, 소르본에서 법학 학위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여섯 개 언어에 능통했다. 10월 혁명 뒤 은행 국유화를 주도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서명했으며, 내전 시기 제8군을 지휘해 데니킨군을 격파했다. 재무인민위원으로서 1922~1924년 화폐 개혁을 이끌어 금 태환 체르보네츠로 루블을 안정시켰고, 긴축 재정과 점진적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하며 급속 공업화와 강제 집단화에 반대했다. 1925년 제14차 당 대회에서 총서기 사퇴를 요구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22–1926 경제·재정·계획 · 소련 · 경제 운영
경력 연표
- 1905–1917볼셰비키 활동과 망명, 혁명기 당 실무에 참여
- 1918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대표단에서 활동
- 1920–1921투르케스탄 전선과 중앙아시아 소비에트화에 관여
- 1922–1926재무인민위원, 체르보네츠와 네프 화폐 안정 추진
- 1926–1936반대파와 연루되어 외교·경제직을 거쳐 점차 실각
- 1936–1939모스크바 재판 뒤 수감, 수용소에서 살해
소련 정치국
- 1917.10 봉기 정치국
- 후보위원 1924.06–1926.01
1926.01 미재선 · 1939년 옥사
관련 역사 사건
- 1905–19071905년 혁명볼셰비키 활동
- 1914–19181차 세계대전국제주의적 반전 볼셰비키제1차 세계대전을 국제주의적 입장에서 반대했다.
- 1917.10–1918.0110월 혁명무장 봉기 준비 정치국 위원무장 봉기를 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당 정치국의 위원이었다.
- 1917.12–1918.11브레스트 강화와 독일의 동방 점령3월 조약 서명 대표트로츠키와 이오페가 사양한 서명 대표단을 이끌고 1918년 3월 3일 조약 내용을 「토론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뒤 서명했다.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브레스트-리토프스크 대표 및 투르케스탄 전선 참여
- 1921–1928신경제정책(네프)재정인민위원체르보네츠 통화개혁을 이끌어 네프의 화폐 안정을 만들어 냈다.
- 1937–1938대숙청표적네프 화폐 안정화를 이끈 재무인민위원으로 재판 뒤 1939년 옥중에서 살해됐다.
1917년, 밀봉 열차와 페트로그라드와 최초의 정치국
1917년 4월 소콜니코프는 독일을 가로질러 레닌 일행을 태운 '밀봉 열차' 편으로 러시아에 돌아왔다. 그는 모스크바 당 위원회에 선출되어 레닌의 제2차 혁명 주장을 지지했고, 7월 레닌이 잠적하자 페트로그라드로 옮겨 스탈린과 함께 볼셰비키 신문들을 공동으로 맡았다.
이 시기 그의 위치는 망명기부터 이어진 흐름 위에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국제주의적 입장에서 반대했고, 스위스에서 당파적 볼셰비키 해외 조직들의 뷰로를 조직하는 데 참여했으며, 전쟁 중 트로츠키가 편집한 신문 《나셰 슬로보》에 기고했다. 러시아어 자료에 따르면 그는 레닌이 '화해파'라고 부른 당파적·비파벌적 볼셰비키 그룹에 속해 레닌을 자주 만났고 레닌의 신임을 받았다. 이 표현과 레닌의 평가는 러시아어 자료의 서술이라는 점을 밝혀 둔다.
1917년 8월 제6차 당 대회에서 소콜니코프는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와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무장 봉기를 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당 정치국 위원이었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은 뒤에는 새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이자 《프라우다》 편집인이었다.
1917년 10월 그는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트로츠키, 스탈린, 부브노프와 함께 7인 '정치국'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이 기구는 훗날 정치국(폴리트뷰로)의 전신이었으나 한 번도 회의를 열지 못했다. 레닌과 지노비예프가 잠적 중이었고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예정된 봉기에 반대했기 때문에, 트로츠키는 이를 두고 '완전히 실행 불가능한 것'이라고 평했다. 이것이 소콜니코프 경력에서 가장 이른 직책 단계이며,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와 1922~1924년 체르보네츠를 다룬 기존 두 절은 이 시기를 다루지 않는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 굴욕적 평화에 서명하다
1918년 3월 3일 오후 5시 50분, 그리고리 소콜니코프는 소비에트 러시아를 대표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서명했다. 이는 볼셰비키 정권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외교 문서였다. 러시아는 옛 제국 영토의 34%에 달하는 인구, 공업 지대의 54%, 탄전의 89%를 포기해야 했다.
소콜니코프는 당초 아돌프 요페가 이끄는 협상 대표단의 일원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 도착했다. 이후 트로츠키가 대표단을 지휘하며 '전쟁도 평화도 없다'는 기조로 협상을 지연시켰으나, 1918년 2월 독일군의 전면 공세 재개로 전략은 붕괴했다. 레닌은 '세계 혁명을 구하기 위해 이 수치스러운 평화에 서명해야 한다'며 중앙위원회를 설득했고, 트로츠키는 외무인민위원직에서 물러났다.
새 대표단장으로 지명된 소콜니코프는 협상장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최후통첩으로 제시된 조약을 즉시 서명할 것이며, 그 조건에 대한 어떤 논의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독일 측은 충격을 받았다. 소비에트 대표단은 협상도, 항의도 없이 문서에 서명했다. 이 짧고 냉정한 의식으로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완전히 이탈했고, 볼셰비키는 숨 돌릴 시간을 벌었다. 1918년 11월 독일이 항복하면서 조약은 무효화되었으나, 소콜니코프의 이름은 이 굴욕적이면서도 냉철한 결정과 영원히 연결되었다.
체르보네츠 — 네프의 화폐 안정화
1922년, 내전으로 붕괴된 소비에트 화폐 체계 속에서 재무인민위원 소콜니코프는 과감한 조치를 단행했다. 금으로 뒷받침된 새로운 통화 '체르보네츠'를 도입하고, 재정 균형과 중앙은행 독립을 통해 초인플레이션을 진압한 것이다. 1924년 말까지 소련 루블은 안정되었고, 네프 시장경제가 작동할 수 있는 통화 기반이 마련되었다. 소콜니코프의 개혁은 소비에트 권력이 자본주의적 도구(금본위, 긴축, 균형예산)를 전유하여 사회주의 건설에 복무시킨 대표적 사례였다. 그러나 1926년 이후 스탈린의 급속한 공업화 노선과 충돌하며 실각했고, 1936년 모스크바 재판에서 유죄 판결 후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