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파주의에서 공공연한 반혁명으로
인물니콜라이 예조프, 레프 트로츠키,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이오시프 스탈린, 게오르기 퍄타코프, 세르게이 키로프, 그리고리 소콜니코프, 카를 라데크, 빅토르 바카예프, 블라디미르 레닌, 이반 스미르노프, 그리고리 예브도키모프, 야코프 드롭니스, 세르게이 므라치콥스키, 니콜라이 무랄로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미하일 톰스키, 레오니트 니콜라예프, 아돌프 히틀러, 니콜라이 부하린, 알렉세이 리코프, 레오니트 세레브랴코프, 블라디미르 루먄체프, 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 니콜라이 우글라노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마르테먄 류틴, 이반 코톨리노프, 안드레이 즈다노프, 스타니스와프 코시오르, 파벨 포스티셰프, 야코프 리프시츠, 니콜라이 우스트랴로프, 바실리 시미트, 드미트리 시미트 (붉은 군대 지휘관), 이바르 스밀가, 이반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 알렉산드르 벨로보로도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파니 카플란, 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 로베르트 에이헤, 미하일 라셰비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페르디난트 라살레, 비사리온 로미나제,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 티모페이 사프로노프,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보리스 수바린, 미하일 프룬제, 안드레이 시쿠로, 루돌프 헤스, 얀 스텐, 알렉산드르 슬렙코프, 레프 소스놉스키, 니콜라이 카레프, 알렉세이 바다예프, 표트르 팔친스키, 카를 코르슈, 조르주 클레망소, 카를 카우츠키, 아우구스트 베벨, 오토 폰 비스마르크, 니콜라이 글레보프-아빌로프 용어내무인민위원부(NKVD), 대숙청, 예조프시나, 모스크바 재판, 좌익반대파, 신반대파, 통합반대파, 우익반대파 사건대숙청
프랑스 정부와 연계를 조직하는 일은 카메네프에게 맡겨졌으며, 그는 이를 위해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조직의 일부 가담자들을 이용해야 했다. 카메네프는 이 일에 자기 아내 글레보바를 끌어들인다.
소콜니코프와 카메네프에게는 프랑스 및 영국 정부 대표들과 교섭할 때,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블록이 그들의 관심사인 일련의 문제에서 그들과 합의하고 큰 양보를 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그들에게 알리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들은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블록이 정치·경제 관계 분야에서 영국과 프랑스 보수 세력의 온갖 요구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그들에게 넌지시 알렸다.
소콜니코프와 카메네프는 영국 및 프랑스 대표들과의 교섭에 관해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본부와 퍄타코프, 라데크에게 상세히 보고했으며, 이들은 이 교섭을 승인했다. 소콜니코프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대표가 교섭에 아주 만족했으며, 런던에 도착하면 자기 친구인 보수당 의원( )과 연락하여 소콜니코프가 그에게 알린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본부의 제안을 그를 통해 전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이야기했다. 이 외국인은 영국 지도층과의 교섭이 성공하리라는 데 의심이 없다고 소콜니코프에게 장담했다. 소콜니코프는 자신의 진술에서, 소콜니코프가 영국 정부 측과 연계를 맺으려 할 때 통로로 삼은 이 외국 대표가 이 교섭에 매우 우호적이고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이야기한다.
“당신에게 증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고 그는 말했다, 영국 정부 측의 영리한 사람들은 이 경우 우리의 이해관계가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소콜니코프, 1936년 10월 20일자 수사 조서).
그는 소콜니코프에게 이렇게 장담했다.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블록의 이해관계가 부르주아 국가들의 보수적 정부 측의 이해관계와 일치한다는 영국 부르주아지 대표의 말에는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이것을 이해한 것은 그들이 연계를 맺으려 한 자본주의 국가 대표들만이 아니라, 배신자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소콜니코프, 카메네프 등 자신들도 너무나 잘 이해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계 파시즘, 전 세계의 반동적 부르주아 세력과 공동의 일을 하고 있음을 분명히 자각했고, 사회주의와의 투쟁에서 자신들의 이 동맹자들 앞에 공을 세우려고 온갖 애를 썼다.
트로츠키파의 첩보 활동
자본주의 국가들을 위한 첩보 활동은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가 소비에트 권력에 맞선 투쟁에서 받은 도움의 대가로 자본주의 국가들에 치른 값의 한 가지였다.
트로츠키의 요원 올베르크, 콘스탄트 등의 말을 통해 트로츠키가 게슈타포와 연결되어 있었음을 이미 앞에서 보였다. 이는 1936년 8월 재판에서 누구의 눈에도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그 뒤의 폭로는 이 문제에 관해 생각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뛰어넘었다. 우리는 트로츠키가 히틀러의 민족사회주의당 담당 대리인 헤스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는 퍄타코프와 라데크의 발언을 이미 인용했다. 게슈타포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트로츠키는 소련에 있는 자기 지지자들에게 독일 방첩 기관을 위해 첩보를 제공할 의무를 지웠다.
독일과 일본의 파시스트들은 특별히 파견한 첩자들을 통해서는 얻어 내지 못한 소련의 방위 상태에 관한 정보를 소련 내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요원들에게서 얻기 시작했다. 트로츠키파는 의식적으로 부르주아 국가들의 군 정보기관에 복무하기로 나섰고 그들을 위한 첩보 공급자가 되었다.
퍄타코프는 자신의 진술에서, 트로츠키파 아르쿠스가 자기, 곧 퍄타코프의 개인적 지시에 따라 프랑스 정보기관 요원에게 소련에 관한 첩보를 넘겼으며, 이것은 정부와 가까운 유력층이 트로츠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갖게 해 준 데 대한 보상이었다고 이야기한다.
퍄타코프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트로츠키가 국외에서 외국 회사들과 맺은 관계에 관해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 1933년 아르쿠스가 나를 찾아와, 트로츠키의 임무와 관련된 협상을 진행할 만한 사람으로 파리에서 누구를 추천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트로츠키의 어떤 임무를 말하는 것이냐는 내 물음에 아르쿠스는, 프랑스의 유력하고 정부와 가까운 층에서 트로츠키 개인과 소련에 맞선 그의 활동 양쪽에 호의적인 태도를 조성할 가능성을 타진하라는 트로츠키의 위임을 받았다고 알려 주었다. 아르쿠스는 그때 파리로 출장 갈 예정이었다. 나는 그에게 그곳에서 내가 파리 시절부터 알던 백계 망명자 나바신이라는 사람을 찾아가라고 권했다. 나는 아르쿠스에게 내가 아는 바로는 나바신이 프랑스 정보기관 요원이며 그의 정보기관 연줄을 트로츠키의 위임을 수행하는 데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일에 성공했다. 그는 나바신을 만나 그를 통해 프랑스 산업계에 연줄을 맺었다. 아르쿠스는 나바신이 프랑스 정보기관 요원이라는 내 정보가 완전히 확인되었다고 내게 말했다. 나바신은 맡은 일을 떠맡는 조건으로, 그 대가로 소련 내 사정에 관한 정치적·경제적 성격의 정보 여러 건을 받아야 한다고 내걸었다. 아르쿠스는 이 정보를 그에게 주었다. 이런 문제(나바신에게 첩보를 넘기는 일)를 결정하는 데 아르쿠스는 누구의 승인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 본부 성원 모두와 마찬가지로, 트로츠키가 국외 활동에서 무엇보다 외국 정보기관들의 도움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트로츠키의 임무에 따라 소콜니코프는 영국에서 트로츠키의 비슷한 위임을 수행했다. 소콜니코프는 1936년에 나에게 직접, 국외에서만이 아니라 소련 안에서도 트로츠키파가 파시스트들과 공동으로 일하라는 트로츠키의 지령이 있다고 터놓고 말했다.”
(퍄타코프, 1936년 12월 4일자 수사 조서).
그들은 트로츠키와 그의 요원들에게 호의를 보여 주는 것 하나만을 위해 소련 경제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문들의 상태에 관한 첩보로 값을 치렀다. 아르쿠스의 위임에 따라 파리 전권대표부의 법률 고문 츨레노프도 프랑스 정보기관 요원인 귀국 거부자 나바신과 연결되어 그에게 여러 건의 비밀 정보를 넘겼다. 츨레노프 자신이 이에 관해 이야기한다.
“나는 내가 알고 있던 소련의 경제적·정치적 상황에 관한 자료를 나바신에게 두 번 넘겼다. 이 정보는 내가 일하던 파리 주재 소련 전권대표부와 통상대표부의 자료에서 얻었다. 나는 나바신에게 소련의 석유 산업, 수출입 계획, 스페인과의 협상, 독일 은행들과의 차관 협정에 관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츨레노프, 1936년 11월 29일자 수사 조서).
지금은 국외 트로츠키파 본부가 트로츠키의 지시에 따라, 공무 출장으로 국외에 나온 트로츠키파를 파시스트 조직들과 연결해 주고 그들 가운데서 파시스트 방첩 요원을 포섭했다는 것이 정확히 확인되었다.
예컨대 1931년에 퍄타코프와 함께 적극적인 트로츠키파이자 시베리아 트로츠키파 조직 지도자의 한 사람인, 쿠즈바스우골 샤흐트스트로이의 전 책임자 셰스토프가 독일로 공무 출장을 왔다. 그가 세도프를 만났을 때, 세도프는 소련에서의 테러 및 파괴 활동 조직에 관한 트로츠키의 방침과 지령을 셰스토프에게 전하면서 그에게, 그 셰스토프가 업무상 어떤 독일 회사들과 연결되어 있는지, 독일 회사 “프뢸리히-클뤼펠-다일만”과 그 임원 다일만과 코흐를 아는지 물었다.[19] 그렇다는 대답을 듣자 세도프는 셰스토프에게, 트로츠키파 조직이 이 회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이 회사가 트로츠키파에게 상당한 도움과 온갖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이 회사는 임원 다일만과 코흐를 앞세워 지금 트로츠키파에게 “편의에는 편의로” 갚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편의는 한편으로는 쿠즈바스의 석탄·금속·화학 공업의 상태와 발전에 관한 첩보 자료를 수집해 넘기는 것, 다른 한편으로는 전문가로 위장해 소련에 파견되는 회사 대표자들이 방첩 기관의 임무에 따라 파괴 공작 행위를 저지르도록 돕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세도프는 셰스토프에게 이 [회사의] 대표자들과 연락하라고 제안 [결락: 타자 원고 305쪽이 없어 문장이 끊긴다]
“그런 거창한 문구를 내세워 허세를 부려서는 안 되오. 우리가 ‘스탈린 지도부’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을 알아 두시오. 당신도 그 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 같소. 그러니 이 문제에서 유달리 까다롭게 굴 필요가 있겠소?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 현실적인 사람들이고 이상주의 놀음을 할 까닭이 없소. 당신은 투쟁에서는 모든 수단이 좋다는 기본 진리를 깨달아야 하오. 여기에 무서울 것은 아무것도 없소... 지금은 토론할 겨를이 없고 행동해야 하오. 전복 활동이 옛 전문가들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다면, 독일 전문가들의 손으로 하는 것은 더욱 쉬울 것이오.”
(A. A. 셰스토프의 진술에서, 1936년 9월 22일자 수사 조서).
셰스토프는 스미르노프의 “설명”에 동의하고, 세도프와 스미르노프에게서 받은 지령에 근거해 이미 이 만남에 대해 통보받은 다일만과 코흐와 연락을 맺었다. 다일만과 코흐는 셰스토프에게 쿠즈바스의 화학·금속·석탄 공업의 상태와 발전에 관한 첩보 자료를 수집해 자기들에게 넘기고, 또 회사가 자기네 전문가로 위장해 쿠즈바스로 보내는 파괴 공작원들의 파괴 공작 활동에 협력하고 도움을 주라고 제안했다. 그 대가로 다일만과 코흐는 소련의 트로츠키파 조직과 국외 사무국에 앞으로도 온갖 도움을 주고, 트로츠키파의 전복 활동과 파괴 활동에 전면적으로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일만은 셰스토프에게 소련에 돌아가면 쿠즈바스우골 수석 기사 스트로일로프[20]와 연락하라고 제안했다. 다일만의 말에 따르면 그는 파시스트 방첩 기관의 요원이자 대표자이므로, 그와 일에서 공동의 접촉을 맺으라는 것이었다. 셰스토프는 다일만과 코흐의 제안을 모두 받아들이고 동의했다.
“프뢸리히-클뤼펠-다일만” 회사가 트로츠키파의 반혁명 활동에 제공한 “편의”의 성격에 관해 셰스토프는 수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회사는 우리 조직에 무엇으로 보상하느냐는 내 물음에 다일만과 코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자기네 사람들이 우리 조직이 내세우는 것과 똑같은 과제의 실현을 위해 일할 것이다. 우리 조직의 과제에 관해서는 자기들과 절친한 친구인 레프 세도프 씨에게서 들어 알고 있다. 2) 회사는 자기네 사람들이 무슨 일로든 소련을 드나들 때 그들을 통해 일정한 경로로 우리 트로츠키파 조직과 국외 사무국의 연락을 맡을 의무를 진다. 이 자리에서 다일만은, ‘내 주인에게’라는 표시가 붙어 자기 앞으로 오는 편지는 어느 것이든 틀림없이 세도프에게 전달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의견 교환 끝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 필요한 경우 시베리아에서 세도프에게 가는 우편은 ‘내 주인에게 전달할 것’이라는 지시를 붙여 다일만 앞으로 보낸다. 둘째, 모든 파괴 공작 활동과 첩보 활동은 스트로일로프가 자기 손에 집중한다. 그는 독일어를 잘 알고 독일에서 오는 사람들은 그에게 가게 된다. 셋째, 트로츠키파 조직은 파괴 공작 활동에서 독일인들에게 틀림없이 협력한다. 넷째, 트로츠키파 조직이 권력을 잡으면 다일만 회사를 잊지 않고 새 탄광의 설계와 구입에 관해 좋은 주문을 줄 것임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셰스토프의 진술에서, 1936년 10월 14일자 조서).
트로츠키파의 파괴 활동과 파괴 공작 활동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더 자세히 말하겠다. 여기서는 다만, 셰스토프가 파시스트 다일만과 코흐의 임무를 정확히 수행하여 첩보 자료를 수집해 그들에게 넘기는 일을 조직하고, 외국인 전문가로 위장해 쿠즈바스에 파견된 파시스트 방첩 기관 요원들(샤베스토, 플로렌 등)과의 연락을 조직하며, 그들과 공동으로 탄광 파괴, 폭발 조직, 지하 화재 등의 파괴 공작 행위를 실행했음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독일 파시스트 방첩 기관과는 트로츠키파 조직의 또 다른 지도자 라타이차크도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는 독일 방첩 기관의 임무에 따라 화학 공업에서 파괴 공작 행위와 파괴 행위를 실행했다. 화학 공업에서 일하던 트로츠키파와 파시스트 방첩 기관의 관계에 관해 트로츠키파 파괴 공작 조직의 참가자 푸신은 수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독일 정보기관과의 연락은 라타이차크와 내가 맡았다. 나는 린데 회사의 전문가 독일인 렌츠와 개인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탐보프 공장에서 설비공으로 일했고 실제로는 독일 정보기관의 요원으로서 그 임무에 따라 소련에서 일했다. 라타이차크는 1934년 초 내 앞에 화학 공업 참여 문제를 제기하면서 동시에, 렌츠가 독일 정보기관 요원이며 내가 그의 임무 여러 건을 수행해야 한다고 알려 주며 렌츠와 연락하라고 제안했다... 렌츠는 조직과 독일 정보기관을 잇는 고리 역할을 했다. 그를 통해 라타이차크와 나는 화학 공업의 상태를 보여 주는 상세한 정보를 넘겼고, 정보기관이 관심을 갖는 자료의 준비에 관한 지시를 받았다. 그 밖에도 렌츠는 소련 화학 기업들에서 파괴 공작 활동을 조직하라는 임무를 내게 전달했고, 라타이차크와 내가 파괴 공작 대상을 고르는 데 참여했으며, 라타이차크와 나에게서 이 임무들의 수행에 관한 해당 정보를 받았다.”
(G. E. 푸신, 1936년 10월 26일자 수사 조서).
라타이차크는 이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로기노프는 한 번의 대화에서 내게, 자기가 조직의 위임에 따라 이미 1931년 국외 출장 중에 ‘오토’와 ‘바마크’ 회사 직원들을 통해 독일 정보기관과 연락을 맺었다고 알려 주었다. 그때 그는 조직이 이 연락을 나를 통해 맺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으며, 더구나 퍄타코프의 임무에 따라 다른 공업 부문들에서는 이미 그런 연락이 맺어져 있다고 내게 말했다.
이 연락의 의미는 아주 분명했다. 우리는 당과 소비에트 권력에 맞선 투쟁에서 화학 공업 기업에 대한 파괴 공작 실행에 이르는 가장 극단적인 조치까지 나아가면서, 독일 정보기관과의 연락 역시 나라의 방위력을 약화하는 방법의 하나라고 보았고, 그래서 조직은 이 연락을 온갖 방법으로 발전시키고 강화했다.”
(라타이차크, 1936년 [날짜 공란] 수사 조서).
샤흐탄트라치트 트러스트 탄광들의 트로츠키파 조직도 트로츠키파 루파시코를 통해 “샤흐탄트라치트” 트러스트의 수석 기사로 일하던 독일 첩보원 베이텔스파헤르와 연결되어 있었다.
보구라예프 광산관리국장 루파시코는 베이텔스파헤르와의 관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베이텔스파헤르는 내게, 자기가 ‘어떤 독일 조직’의 임무에 따라 일하고 있으며 그 조직의 이름으로 자기와 접촉을 맺고 앞으로의 전복 활동에서도 접촉할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베이텔스파헤르는 이때, 트로츠키파 지도자들과 트로츠키 개인이 그런 접촉을 오래전에 맺었음을 자기가 정확히 알고 있으니 이 일로 내가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알려 주었다. 베이텔스파헤르는 기다리는 표정으로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아 그와의 협력을 굳혔다.”
(루파시코, 1936년 [날짜 공란] 수사 조서).
베이텔스파헤르는 루파시코와 연락을 맺은 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꽤 자주 루파시코를 만났고 그의 집에도 드나들었다. 이 만남에는 우리 사이의 정치적 대화도 따랐다.
루파시코는 내게, 현재 강력한 트로츠키파 조직이 존재하며 이 조직은 스탈린과 그 지지자들을 제거하고 트로츠키파의 집권을 위해 길을 닦는 것을 중심 과제로 삼아 큰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루파시코는 이 점에서 이미 많은 일이 이루어졌고 나라가 큰 사건들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나는 이에 대해, 소비에트 권력에 맞선 트로츠키파의 투쟁이 자본주의 나라들 앞에서 소련을 약화하고 있으며, 그래서 소비에트 체제의 청산에 이해관계가 있는 외국 국가들이 트로츠키파의 투쟁을 기꺼이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루파시코에게 이에 관해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고, 루파시코는 흥분한 어조로, 트로츠키파에게는 누가 스탈린 체제를 무너뜨리도록 돕든 상관없다고 말했다. 이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이면 무엇이든 트로츠키파에게는 받아들일 만하다는 것이었다.”
(베이텔스파헤르, 1936년 [날짜 공란] 수사 조서).
케메로보의 반혁명 파괴 공작 조직 재판에서 확인되었듯이, 쿠즈바스우골의 트로츠키파 조직도 독일 정보기관 요원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그들의 첩보 임무를 수행했다.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본부와 트로츠키 개인의 지시에 따라 쿠즈바스의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조직들은 외국인 전문가로 위장해 소련에서 일하는 방첩 기관 요원들과 연결되고, 그들과 완전히 결합하여 사실상 통합된 트로츠키파·파시스트 조직을 만들고 그들과 공동으로 트로츠키파의 활동을 수행한다.
쿠즈바스에서 일하던 셰스토프는 아직 독일에 있을 때 연락을 맺은 “프뢸리히-클뤼펠-다일만” 회사 임원들에게서 쿠즈바스우골 수석 기사 스트로일로프가 파시스트 방첩 기관의 요원이라는 것을 알고, 스트로일로프와 연락하여 파괴 공작 행위와 파괴 행위를 공동으로 실행하기 위해 그를 자기가 이끄는 파시스트 그룹에 끌어들인다. 그는 스트로일로프에게, 트로츠키파의 과제와 실천 활동이 그, 곧 스트로일로프의 파시스트 파괴 활동과 완전히 일치하며 “당과의 투쟁에서 트로츠키파는 독일인들이 그, 곧 스트로일로프 앞에 내놓은 것과 똑같은 과제를 내걸었다”고 미리 일러 준다.
셰스토프는 또 이 독일 방첩 기관 요원 스트로일로프를 시베리아 트로츠키파 본부 지도자의 한 사람인 무랄로프와도 연결해 주었는데, 무랄로프는 파시스트 조직에서 스트로일로프의 역할과 활동을 이미 알고 있었다. 스트로일로프는 자기 일의 여러 문제로 무랄로프를 찾았고 그에게서 해당 지시를 받았다.
스트로일로프는 무랄로프와의 관계에 관해 수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랄로프와의 연락은 셰스토프의 지시에 따라 1933년 말에 내가 맺었다. 1933년 6월 셰스토프는 병이 나서 오랫동안 남부로 치료를 받으러 가야 했다. 떠나기 전에 셰스토프는 내게, 필요하면 조직 일로 무랄로프를 찾아가도 된다고 말했다. 셰스토프는 내게 말 그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슨 조언이 필요하거나 의문이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무랄로프에게 가시오. 그가 도와줄 것이오.’ 이 시기에 독일인들이 특히 활발히 벌이던 파괴 작업이 폭로될까 봐 걱정이 들고, 독일인들이 보이는 활동이 폭로되어 독일인들 때문에 우리 일 전체가 실패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들었을 때, 나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하러 무랄로프를 찾아갔다. 무랄로프는 독일인들이 독일에서 받은 지시에 따라 행동하고 있으니 자기 영향력을 이용해 독일인들을 설득하여 일을 더 비밀스럽게 하도록 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그들 때문에 정말 우리가 탄로 날 수 있다고 대답했다.”
(M. S. 스트로일로프, 1936년 10월 16일자 수사 조서).
무랄로프는 독일 정보기관 요원들의 일을 이처럼 세심하게 돌보았다. 이렇게 하여 트로츠키파 본부의 지시를 이행하는 가운데 반혁명적 트로츠키파 파괴 조직과 파시스트 파괴 공작 [결락: 타자 원고 315쪽이 없어 문장이 끊긴다]
이 사람은 우리 편이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무랄로프는 이 회사의 대표자들이 소련에서 첩보 활동과 파괴 공작 활동을 벌이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플로렌을 통해 세도프에게 편지를 보내는 데 동의했다. 이틀 뒤 무랄로프는 편지가 암호문이라고 일러 주면서 내게 편지를 넘겼다. 무랄로프는 편지 내용에 관해, 이루어 낸 일에 관한 보고이며 그 무랄로프에게 국외 본부의 활동을 알려 달라는 요청이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이 편지에서 무랄로프는 또 세도프에게 자본주의 나라들, 특히 독일과의 전쟁 시기의 입장에 관한 지시를 내려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플로렌에게 편지를 코흐나 다일만에게 건네면서, 내가 보낸 것이며 내 “주인”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한다고 말하도록 맡겼다. 플로렌은 이 위임을 수행했고, 봄에 돌아오면서 무랄로프에게 보내는 세도프의 답장을 내게 가져왔다. 편지에서 세도프는 쿠즈바스의 활동을 지금 펼쳐진 것과 같은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알렸다. 소련과 독일의 전쟁 시기 트로츠키파 조직의 입장 문제에 관해 세도프는 무랄로프에게, 무조건 패전주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A. A. 셰스토프, 1936년 10월 14일자 수사 조서).
자본주의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소련의 패배를 추구하는 이 노선을 따라 트로츠키파는 붉은 군대에 침투해 그것을 와해시키려 할 뿐만 아니라 방위 산업을 무너뜨려 사회주의 나라의 전투력을 약화하려고 애쓴다.
트로츠키파는 방위 산업에 침투하려고 애썼고, 독일과 일본 군부를 위해 우리나라의 국방 상태에 관한 정보의 공급자가 되었다.
트로츠키파 병행 본부와 트로츠키파 그룹들의 파괴 행위 및 파괴 공작 활동
테러 활동과 첩보 활동과 더불어 병행 본부와 그것이 이끄는 지방의 그룹들은 파괴 행위의 방법도 널리 쓰기에 이르렀다. 노동계급 독재에 맞선 투쟁에서 그들은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았다. 사회주의 건설을 무산시키고 사회주의 공업화를 향한 우리 당의 노선의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해 그들은 우리 기업들에서 파괴 행위 계획을 실행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병행 본부” 성원들, 특히 퍄타코프의 진술에 따르면, 소비에트 권력에 맞선 투쟁에서 파괴 행위를 단호히 쓰라는 이 지령 역시 트로츠키에게서 나왔다. 이 지령은 반혁명적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조직들의 모든 적극적 참가자들에게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다.
지금 밝혀진 바와 같이, 테러 전술과 파괴 행위 전술을 그들은 동시에 받아들였다. 이는 소련에서 자본주의 복고라는 단일한 목적을 향한 그들의 비열한 활동의 두 측면이다.
1936년 8월 프롤레타리아 법정에 선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미르노프와 이 도당의 다른 괴수들은 파괴 행위의 사용을 알고 있었으며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법정에서 이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 법정에 자기들의 진심 어린 참회와 사회주의 나라에 대한 자기 범죄의 인정을 거짓으로 다짐하면서, 재판의 가장 적극적인 참가자들은 모두 의식적으로 법정을 속였다. 이는 그들이 파괴 활동을 숨겼다는 사실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그들은 자기 반혁명 활동의 중요한 측면 하나인 파괴 행위를 법정에 숨겼다.
이미 1931년에 국외 트로츠키파 본부는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지도부와 정부에 맞선 테러 행위를 조직하라고 지시하면서, 동시에 파괴 행위와 파괴 공작의 방법으로 넘어가라는 지령을 전달했다. 이런 방법으로 소련의 힘을 약화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무산시켜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지도부의 신뢰를 떨어뜨리려는 것이었다.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블록의 여러 적극적 참가자들의 진술은, 파괴 행위가 최근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그들의 반혁명 활동의 구성 부분이었고, 이에 관한 지령이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파·트로츠키파 본부에서 나왔음을 확인해 준다.
이 문제에 관해 라데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1931년 퍄타코프와 스미르노프가 베를린에 머물 때 세도프와 만난 자리에서 그들은 트로츠키로부터 테러만이 아니라 스탈린 체제에 맞선 투쟁 방법으로서의 파괴 행위, 곧 파괴 공작에 관한 지령도 받았습니다. 트로츠키의 이 지령을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조직은 최근까지 실행했습니다. 이 투쟁 수단에는 단계마다 다른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파괴 행위가 스탈린의 공업화 정책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수단으로 여겨졌는데, 이는 중심적 테러 행위를 실행한 뒤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를 나라의 지도부로 끌어들일 가능성을 높이려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의 집권과 패전주의를 지향하라는 트로츠키의 직접 지령 뒤로 파괴 행위와 파괴 공작은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조직의 주요 투쟁 수단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최근 몇 해 동안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조직은 갈수록 첨예해지는 국제 정세와 관련하여 파괴 공작 활동을 특히 활발히 벌였습니다.”
(라데크의 진술에서, 1936년 12월 4일자 조서).
트로츠키파 지하 조직의 다른 활동가들도 파괴 행위가 그들의 반혁명 활동의 구성 부분이었다고 진술한다. 시베리아 트로츠키파 파괴 조직의 지도자 Ya. 드롭니스는 이에 관해 수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퍄타코프와 공업에서 파괴 작업을 수행할 필요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 나는 퍄타코프에게 그가 펼치는 이런 노선이 그 자신의 견해인지 아니면 이 문제에 관해 전반적인 지령이 있는지 물었다. 퍄타코프는 이것이 트로츠키의 직접 지령이며, 내가 의심한다면 I. N. 스미르노프가 확인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다시 한번 끈질기게 이 질문을 했고, 그러자 퍄타코프로부터, 1931년 그 퍄타코프와 스미르노프가 독일에 있을 때 그곳에서 세도프가 참석한 회의가 열려 트로츠키의 지령을 논의했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때 그들은 이 지령에 근거해 문서를 작성했으며, 이 문서를 소련 내의 해당 신임자들에게 넘기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퍄타코프가 내게 말한 바에 따르면 이 문서는 테러의 방법과 나라의 국민경제에서 전복 작업과 파괴 작업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권력을 쟁취하는 데 관한 트로츠키의 새 방침을 규정한 것이었다.”
(Ya. N. 드롭니스, 1936년 11월 21일자 수사 조서).
로스트셀마시의 트로츠키파 파괴 조직 지도자 글레보프-아빌로프도 같은 사실을 확인하며 수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미 1935년 초에 퍄타코프는 내게, 개인 테러에 관한 트로츠키파 본부의 지령을 받아들인 트로츠키파 조직은 스탈린에 맞선 다른 형태의 투쟁을 위해 공업과 운수 부문에 있는 자기 참가자들의 지위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퍄타코프가 말한 바로는, 조직은 국민경제에서 일련의 파괴 행위를 벌여 스탈린의 공업화 계획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지도부가 그릇된 정책으로 국민경제를 위기로 몰아넣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퍄타코프에게 반박해 보려 하자 그는 내게, 경제를 교란하라는 트로츠키의 직접 지령이 있으며 이 작업은 여러 공업 중심지(우크라이나, 시베리아,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우랄)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N. P. 글레보프-아빌로프, 1936년 10월 21일자 수사 조서).
쿠즈바스에서 일하던 반혁명적 트로츠키파 조직의 적극적 참가자 셰스토프도, 트로츠키가 지하 트로츠키파 조직에 파괴 행위로, 사회주의 경제의 전복으로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확고한 지령을 내렸음을 확인한다. 그는 자기 진술에서 이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퍄타코프와 스미르노프가 참석한 트로츠키파 국외 본부의) 그 회의에서 트로츠키파가 테러 작업과 파괴 작업의 방법으로 넘어가기로 결정했으며, 이에 관해 전연방 본부 대표자들이 참석한 국외 사무국의 특별 결정이 내려졌다... 이 문서에서는 파괴 작업을 수행할 필요성도 논증되었다.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투르크시브, 우랄-쿠즈네츠크 콤비나트, 소프호스 등 스탈린의 역사 놀음은 어떤 비판도 견뎌 내지 못한다. 조직은 관조적인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되며,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하고, 공업의 건설과 발전을 무산시켜 이로써 스탈린 지도부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대중 속에서 그 권위를 무너뜨려야 한다. 이는 전복 작업과 파괴 작업을 펼침으로써 이룰 수 있다.’”
(A. A. 셰스토프, 1936년 9월 22일자 수사 조서).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블록의 여러 참가자들의 진술은, 소비에트 권력에 맞선 투쟁에서 파괴 행위를 적극적으로 쓰라는 트로츠키의 이 방침을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그 밖의 사람들이 전적으로 공유했음을 반박의 여지 없이 입증한다.
레닌그라드의 즈다노프 동지 명칭 조선소 전 공장장 피추린은 수사에서, 1933년 말 지노비예프와 대화하던 중 그에게서 다음과 같은 방침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전쟁에서 소련의 패배 문제를 제기합니다. 테러를 통한 내부로부터의 타격, 전선에서의 패배, 이것이 지도부의 교체와 나라의 체제 변화를 보장할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직접 제기합니다, 하고 지노비예프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패배를 준비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파괴 활동을 펼쳐야 합니다. 이것은 파괴 행위가 중앙위원회 지도부의 신뢰를 떨어뜨릴 가능성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에도 필요합니다.”
(피추린, 1936년 11월 10일자 수사 조서).
이 파괴 행위 노선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은 사회주의 대의를 저버린 비열한 배신자 라데크였다. 라데크의 가장 가까운 동지 소스놉스키가 라데크의 말을 전해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확인한다.
“라데크와의 이후 대화에서 테러는 스탈린 지도부에 맞선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블록의 투쟁의 주요하고 결정적인 수단이기는 하나 유일한 수단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라데크는 내게, 경제 건설 분야에서는 조직과 파괴 행위를 위해, 당 지도부의 경제적 성공을 약화하기 위해 모든 트로츠키파 간부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능숙한 솜씨로 일정한 어려움을, 경제의 불균형을, 연료·원료·금속 공급의 차질을 만들어 내면, 이는 빠르게 커 가는 스탈린과 그 참모부의 권위를 눈에 띄게 떨어뜨리고, 필요하고도 결정적인 순간에 스탈린 지도부의 완전한 파국을 앞당길 것이다. 라데크의 말에 따르면, 파괴 분자의 반혁명 활동에 대한 지도는 트로츠키파 본부의 제2성원 Yu. L. 퍄타코프가 떠맡았다.”
(소스놉스키, [날짜 공란] 수사 조서).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본부는 소련에서의 파괴 작업과 파괴 공작 활동의 전반적 지도와 조직을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본부 성원인 퍄타코프에게 맡겼다. 퍄타코프는 자기 직책을 이용해 뜻을 같이하는 자들, 곧 트로츠키파 조직 성원들을 공업의 가장 중요한 부문들에 차차 골라 배치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하여 파괴 활동을 수행할 통로가 될 가지가 많은 트로츠키파 파괴 조직을 만들어 냈다.
예컨대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조직의 적극적 참가자 라타이차크는 파괴 활동 조직에 관한 퍄타코프의 지령에 대해 수사에서 다음과 같이 알렸다.
“퍄타코프는 아주 분명하게 내게 화학 공업에서 국방 건설을 무산시키는 작업을 하라는 직접적인 임무를 주었다. 그는 트로츠키파 조직이 공업에서 전복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내가 일련의 파괴 조치를, 무엇보다 화학 공업의 국방 건설을 무산시키는 조치를 실행해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이때 퍄타코프는 공업 분야에서 당과 소비에트 권력의 여러 기본 조치들을 무산시킴으로써 트로츠키파 조직은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와 소비에트 권력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것을 자기 과제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라타이차크, 1936년 10월 14일자 수사 조서).
다른 진술에서 바로 이 라타이차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1934년 초 내가 퍄타코프의 지시에 따라 1934년 건설 계획을 고쳐 짠 뒤, 퍄타코프는 나에게 생산물 출하를, 특히 광물 비료의 출하를 파탄시키기 위해 화학 기업들에서 파괴 작업을 벌이라는 임무를 주었다.
퍄타코프는 나에게 조직의 임무는 신규 건설을 파탄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가동 중인 기업들의 작업도 파탄시키는 것, 즉 기업들의 개별 설비를 가동 불능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곧바로 말했다.”
(라타이차크, 수사 조서 [날짜 공란]).
퍄타코프의 가장 적극적인 지지자 중 또 한 사람 — 우크라이나에서 일하던 로기노프는 1936년 11월 9일자 진술에서 역시 이 사실들을 확인하면서, 트로츠키파가 파괴 행위의 방법으로 넘어갈 때 따른 동기를 다룬다. 그가 하는 말은 이렇다.
“트로츠키에게서 받은 파괴 행위 지시의 본질에 관해 내가 퍄타코프에게 던진 질문에, 퍄타코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온 나라가 모든 분야에서, 즉 공업 분야에서, 농업 분야에서, 문화 분야에서, 아동 교육 등의 분야에서 스탈린 정책의 거대한 성공을 보고 있다. 소비에트 연방의 힘이 커지면서 국제 관계 분야에서도 소련의 지위는 매우 안정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일에 극도로 해를 끼치고 우리가 승리할 가능성을 어렵게 만든다. 모든 길을 동원해 소비에트 연방의 힘을 허물고 소련이 더 강해지는 것을 파탄시켜야 한다. 광범한 파괴 행위 체계를 적용하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다. 이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 방향의 일에서 특히 책임 있는 임무는 우리 — 중공업 일꾼들에게 지워져 있다.’”
(로기노프, 수사 조서 [날짜 공란]).
우크라이나 트로츠키파 본부의 일원 골루벤코도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공업에서 파괴 행위를 조직하라는 지시를 나는 1935년 하반기 하리코프에서 블라디미르 로기노프에게서 받았다. 내가 중공업인민위원부 계통으로 일자리를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공업에서 파괴 행위를 조직하는 임무를 나에게 전하면서 로기노프는 그때, 이 임무들은 유리 퍄타코프에게서 나온 것이며 소련 경제의 힘을 허무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로기노프의 지시에 따르면 파괴 행위는 기업의 노동 조직 분야와 기술 공정 분야 양쪽을 겨누어야 하며, 기사·기술 일꾼층 가운데 충분히 믿을 수 있고 검증된 인력을 이 활동에 끌어들이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N. V. 골루벤코, 1936년 10월 16일 수사 조서).
사회주의 공업에서 파괴 행위를 조직하는 데 퍄타코프가 적극적으로 지도적 역할을 했음을 확인하는 같은 진술을 스레두랄메트스트로이의 전직 일꾼 자리코프도 내놓는다. 그가 수사에서 한 말은 이렇다.
“소련 국민 경제에서 전복적인 파괴 행위 작업에 착수해야 하며, 그 작업은 이제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조직의 전 계통에 걸쳐 펼쳐지고 있다.”
(자리코프, 수사 조서 [날짜 공란]).
퍄타코프 자신도 1936년 11월 14일자 진술에서 같은 사실을 확인한다.
“L. 세도프가 내게 전한 바에 따르면, 트로츠키의 지시, 더 정확히 말해 지령의 내용은, 우리 트로츠키파가 실제 소비에트 업무에서 체제 강화에 협력하지 말고 도리어 맞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이것은 국민 경제에서, 공업에서 파괴 행위의 방법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퍄타코프는 파괴 행위 작업을 펼치는 데 자신의 직위를 널리 이용하려 애쓰면서, 이 더러운 일을 수행할 요원들을 경제 일꾼들 가운데서 골라낸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자리코프는 자기 진술에서 퍄타코프에게서 받은 지령에 관해 다음과 같이 알린다.
“지금까지 — 퍄타코프가 말했다 — 우리는 완전히 터무니없는 상황에 부딪혀 왔다. 우리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간부들 가운데, 그리고 우파 간부들 가운데에도 지도적 경제 직책을 차지한 거물 경제 일꾼이 적지 않은데, 우리 조직의 일에서는 그것이 전혀 충분히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 경제 일꾼들은 순전히 사무적인 경제 과제에 빠져 자신의 기본적인 정치 목표를 잊는 일이 드물지 않다. 터무니없고 참을 수 없는 이중적 상황이 생겨난다. 한편으로 우리는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에 맞선 투쟁을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 바로 우리 사람들의 손으로 소련의 경제 상황이 강화되도록 돕고, 따라서 그럼으로써 기존 체제가 굳건해지도록 돕고 있다. 이것을 끝내야 한다.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조직에 참여하는 우리 경제 일꾼 하나하나가 적극적인 전복 활동을 벌여야 하며, 자기가 맡은 구체적인 일터에서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과 소비에트 권력의 정책이 실패하도록 도와야 한다. 여기서 거창한 말을 두려워할 것 없다. 그렇다, 우리는 전복 활동에 나서고 있다 — 퍄타코프가 강조했다 — 그리고 이것을 완전히 의식적으로 한다. 지도부를 허물고 나아가 타도할 다른 길은 없고 있을 수도 없다. 정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만이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의 정책이 당내 투쟁을 바탕으로 바뀔 것이라는 환상으로 스스로를 달랠 수 있다. 지금은 더 단호하고 빠르고 효과적인 투쟁 방법이 필요하다.
조직에서 내가 앞으로 맡을 역할을 설명하면서, 퍄타코프는 우랄 — 이것이 연방 구리의 70%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서,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와 소련 정부가 전쟁 위협이 커지는 가운데 구리 공업의 뒤처짐을 두고 강력하게 경종을 울리고 있으며 이 문제를 중심으로 당과 소비에트의 여론을 동원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이와 관련해 — 퍄타코프가 덧붙였다 — 나는 나대로 우리 지하 조직의 가장 검증된 참가자들을 구리 공업으로 일하러 보내면서, 가동 중인 기업들의 구리 출하 계획을 파탄시키고 건설을, 또 신규 제련 기업의 가동을 최대한 늦추는 임무를 그들에게 지운다. 이것 — 이것이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지도부에 맞선 가장 효과적인 투쟁 방법이다. ‘구리에 가하는 타격 — 이것은 지도부를 겨눈 가장 날카로운 타격이다.’”
(자리코프, 수사 조서 [날짜 공란]).
그리고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블록의 본부가 파괴 행위 활동을 널리 펼치지 못했다면 “예비 본부”는, 특히 그 지도자 퍄타코프는 파괴 행위 활동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이다.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본부의 구성원들은 맡은 일의 조건상 광범한 파괴 행위를 적용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일터에 있었다. 반면 퍄타코프는 지도적 경제 업무에 임명됨으로써 받은 신임을 범죄적으로 이용했다. 그는 우리 사회주의 공업을 허무는 계획을 적극적으로 실행했고, 반혁명 조직의 지지자들을 공업 기업에 심으려 애썼다.
트로츠키는 해외에서도 테러 활동을 온갖 방법으로 다그쳐야 한다는 지령을 내리며 퍄타코프를 재촉했고, 퍄타코프는 이 지령을 더 빨리 실행하려 애썼다. 퍄타코프 자신이 진술에서 다음을 인정한다.
“1936년에 내가 소콜니코프와 대화할 때, 그는 라데크를 통해 경제에서 파괴 행위 작업을 다그쳐야 한다는 트로츠키의 지령을 받았다고 내게 알려 주었다. 소콜니코프는 트로츠키가 이 목적을 위해 다른 반혁명 단체들을 파괴 행위에 끌어들일 수 있다고 본다고 알려 주었다.”
(퍄타코프, 1936년 11월 14일자 수사 조서).
파괴 행위를 펼치고 여기에 모든 경향의 반혁명적 반동 세력을 끌어들이라는 트로츠키의 이 지령을 트로츠키파는 폭넓게 수행한다.
파괴 행위 작업을 더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본부는 자기 조직들에 지시를 내린다 — 과거 유죄 판결을 받은 파괴 분자, 백위대원, 반혁명적이고 반소비에트적 성향의 전문가들과 연계를 맺고 이들을 이 작업에 끌어들이라는 것이다.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본부는 파괴 행위 작업을 펼치는 데 주로 이런 반혁명 분자들에게 기대를 건다. 이렇게 한 데에는 파괴 행위를 백위대원들이 저지른 행위로 내세우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를테면 퍄타코프는 셰스토프에게 쿠즈바스에서 파괴 행위 작업을 조직하라고 지시하면서, 쿠즈바스에 과거의 파괴 분자들과 파시스트 외국인 전문가들이 많이 일하고 있으며 이 “인적 자재”를 트로츠키파가 벌이는 파괴 행위 작업과 전복 활동에 온 힘을 다해 끌어들여 이용해야 한다는 점에 특별히 주의를 돌린다.
퍄타코프는 다음을 강조했다.
“쿠즈바스에는 전복 활동에 쓸 ‘인적 자재’가 많으니, 그들의 손으로 작업을 진행하도록 그들을 조직해야 한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역시 스탈린에 맞서 일하고 있다. 우리의 이해관계는 일치한다. 흩어진 트로츠키파도 골라내어, 자금을 아끼지 말고 그들을 먹여 살리면서, 조심스럽게, 설득력 있게 ‘최근 노선’을 그들에게 설명해야 한다.”
(A. A. 셰스토프의 진술에서, 1936년 8월 30일자 조서).
시베리아 트로츠키파 본부의 지도자 — 무랄로프도 같은 방침을 고수한다. 그는 그 나름대로 셰스토프에게 지령을 내린다.
“무엇보다도 옛 전문가들을 파괴 작업에 끌어들이는 데 역점을 둘 것. 무랄로프는 그들이 소비에트 권력에 큰 불만을 품고 있고, 몰래 스스로 해를 끼치고 있으며, 그들을 파괴 작업의 도구로 이용하는 일은 쉽고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A. A. 셰스토프의 진술에서, 1936년 9월 7일자 조서).
시베리아 트로츠키파 조직의 또 다른 지도자이자 우리가 이미 언급한 사람 — 드롭니스도 같은 취지로 말한다.
드롭니스는 노스코프에게, 반혁명 분자들, 부르주아 전문가 출신의 파괴 분자들과 연계를 맺고 이들을 파괴 행위와 파괴 공작 작업에 널리 이용하라고 지시한다.
이 일을 두고 노스코프와 나눈 대화를 설명하면서 드롭니스는 이렇게 진술했다.
“...반혁명 성향의 기사들을 우리 일에 끌어들여도 되는가? 노스코프가 물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우리냐 그들이냐 — 하는 문제가 걸려 있을 때 이런 문제에서 점잖게 굴어서는 안 된다. 우리 트로츠키파는 다음과 같은 잘 알려진 정의에서 출발해야 한다 — 투쟁에서는 모든 수단이 좋으며, 목적은 언제나 수단을 정당화한다. 이것은 트로츠키파 본부가 재가한 것이다. 트로츠키 자신도 지금 파시스트 독일의 도움을 받고 있다’.”
드롭니스의 지시에 따라 트로츠키파 노스코프는 페셰호노프의 파시스트 파괴 행위 그룹과 연계를 맺었는데, 여기에는 페셰호노프 외에도 탄광 일꾼 몇 명이 들어 있었다. 노스코프는 그들에게 “첸트랄나야” 탄광에서 함께 파괴 공작을 벌이자고 제안했다. 페셰호노프는 공동 파괴 공작을 벌이자는 노스코프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특징적인 것은, 페셰호노프의 파괴 행위·파시스트 그룹 참가자 중 한 사람 — 안드레예프가 “그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닌가” 하고 말하며 노스코프의 제안에 의심과 놀라움을 나타내자, 페셰호노프가 아주 근거 있게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트로츠키파이고, 공산주의자와 트로츠키파는 낮과 밤처럼 서로 다르다.”
파괴 행위·파괴 공작 작업을 벌이기 위해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는 러시아인 파괴 분자들만이 아니라 외국인 전문가들과도 연계를 맺는다.
트로츠키파 파괴 행위 조직과 파시스트 그룹의 연계에 관해, 그들의 작업상 접촉에 관해 전직 수석 기사 스트로일로프가 수사에서 자세히 이야기한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1932년 9월에 나는 셰스토프를 만났다. 나는 셰스토프에게, 쿠즈바스에서 일련의 파괴 공작을 조직하도록 독일 요원들을 도우라는 임무를 해외에서 받았다고 자세히 이야기했다. 나는 셰스토프에게, 독일인들이 큰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고 있으며 파괴 공작을 무엇보다 먼저 쿠즈네츠크 콤비나트의 열병합발전소와 프로코피옙스크의 5/6 탄광에서 벌일 계획이라고 이야기했다. 셰스토프는 독일 파괴 공작원들과 연계를 맺는 데 동의하고 이렇게 밝혔다. ‘독일 요원들의 파괴 공작 활동이 활발할수록 우리에게 좋다. 우리는 그들이 계획한 파괴 공작을 실행할 수 있게 반드시 보장해 주어야 한다’.”
(스트로일로프의 진술에서, 1936년 10월 16일자 조서).
스트로일로프의 이 진술은 수사에서 셰스토프도 확인했으니, 그는 다음을 인정했다.
“1932년 가을에 스트로일로프가 나에게 해외에서 외국인 전문가 샤베스토가 왔으며 그가 프로코피옙스크에서 일하도록 파견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스트로일로프의 말로는, 샤베스토는 — 사정을 알고 있으니 내가 그와 연계를 맺어야 했다. 나는 샤베스토를 내 집무실로 불렀다. 우리는 샤베스토와 함께 어떤 지점들을 파괴 공작 작업의 대상으로 잡을지 합의했다. 무엇보다 먼저 프로코피옙스크 5/6 탄광을 가동 불능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1933년 여름에 샤베스토의 제안으로 프로코피옙스크 5/6 탄광의 수갱을 폭파해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폭발은 이 수갱 곁에서 쓰레기를 쓸던 노동자들이 막았다. 내가 아는 바로는 샤베스토가 1933년 5월에 쿠즈네츠크 콤비나트의 중앙발전소에 불을 질렀으나, 화재는 진압되었고 중앙발전소는 구조되었다.”
(A. A. 셰스토프의 진술에서, 1936년 9월 22일자 조서).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조직은 독일 파괴 공작원들이 파괴 공작을 벌이는 데 굼뜬 것에 불만이다. 트로츠키파는 이 일로 그들의 활동이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하며 나무란다. 그들은 온갖 방법으로 재촉하며 파괴 공작을 서둘러 벌이라고 고집한다.
모든 경향의 반혁명 분자들을 사회주의 공업의 파괴 행위에 끌어들인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일반적인 원칙적 방침이다. 퍄타코프는 자신이 트로츠키의 지령을 바탕으로 파시스트들을 파괴 행위에 끌어들이라는 일반적 지시를 내렸다고 대놓고 그대로 고백한다.
“파시스트를 포함해 모든 종류의 반혁명 분자들을 파괴 행위 작업에 끌어들이라는 일반적 지시를 나는 내렸다. 이것이 1935년에 소콜니코프가 나에게 전해 준 트로츠키의 방침이었다. 트로츠키의 이 지령에 관해 나는 노르킨과 드롭니스에게 (역시 1935년에 모스크바에서 그들을 만난 어느 자리에서) 말했다.”
(퍄타코프의 진술에서, 1936년 12월 4일자 조서).
그는 이토록 파렴치하게 고백한다.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조직의 개별 구성원들이 파괴 행위와 파괴 공작 작업을 전개하라는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본부의 지령에 다소 당혹스러워할 때, 퍄타코프는 이 파괴 활동의 필요성을 근거 지으려 온 힘을 다한다.
쿠즈바스 탄광업의, 케메로보의 트로츠키파 파괴 분자들에 대한 재판을 모두가 기억한다. 거기서 프롤레타리아 법정 앞에 노동계급의 가장 악랄한 적들이 섰는데, 그들은 탄광의 작업을 혼란에 빠뜨리고 노동자들의 불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노동자들을, 무엇보다 가장 뛰어난 돌격 노동자와 스타하노프 노동자들을 의식적으로 집단 중독시키는 일을 조직했다. 쿠즈바스에서 이 파괴 행위 활동을 지도한 자는 트로츠키파 야코프 드롭니스였다. 퍄타코프가 이 일을 하라고 드롭니스를 어떻게 설득했는지가 특징적이다.
“당 지도부와의 투쟁에서 테러 행동이 우리 무기고의 가장 중요한 무기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네, 야코프. 하지만 대중 속에서 스탈린의 권위를 완전히 허물기 위해 우리는 스탈린의 공업화 노선의 신용을 실제 행동으로 떨어뜨리는 임무를 스스로에게 지웠네. 자네도 보다시피 공업화 노선은 승리하고 있고, 스탈린의 이 승리는 당에서, 노동계급 속에서 그의 권위를 강화하고 있지. 사실 우리가 전복 활동을 말하면 어쩐지 귀에 거슬리기는 하네. 하지만 들어 보게, 야코프, 우리가 테러의 길에 들어선 이상 전복 활동 문제에서 까다롭게 굴 처지인가? 우리가 권력을 잡으면 공업 사정은 바로잡을 것이고, 빠르게 바로잡을 걸세. 지금 우리는 싸울 바에는 끝까지 싸운다는 기본 방침에서 출발해야 하네. ‘투쟁에서는 모든 수단이 좋다’, — 퍄타코프가 말했다.”
(Ya. N. 드롭니스, 1936년 9월 21일자 수사 조서).
파괴 행위 작업을 펼치면서 트로츠키파는 경제의 기본 부문을 허무는 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무엇보다 먼저 그들은 국방을 위해 일하고 국민 경제 전체에 큰 의의를 갖는 공업 부문, 곧 화학, 탄광, 야금 공업과 철도 운수를 허물려고 애썼다.
이 모든 공업 부문에서 파괴 행위를 조직하면서, 그들은 사회주의 경제 전체에 더 뼈아픈 타격을 가하기 위해 이 기본 공업 부문들의 핵심 신경을 건드리려 애썼다.
그리하여 탄광 공업에서 그들은 무엇보다 신규 탄광 건설을 파탄시키고, 덜 알맞은 구역에 탄광을 잘못 착공하도록 만들려고 했다. 그들은 지하 폭발과 화재를 조직해 채탄을 파탄시키려 온 힘을 다했고, 최근에는 알려진 대로 탄광의 환기 장치를 인위적으로 망가뜨려 노동자들을 중독시키는 수법까지 쓰기 시작했다.
화학 공업과 야금 공업에서 그들은 온갖 수단으로 기본 건설을 파탄시키려 애썼고,
국민 경제의 개별 부문에서 트로츠키파가 벌인 파괴 행위 활동을 보여 주는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1. 화학 공업에서의 파괴 행위와 파괴 공작
이 분야에서 파괴 행위를 조직하는 데 트로츠키파, 그중에서도 퍄타코프는 이 공업 부문이 국민 경제 전체와 나라의 국방에 특별히 중요하다는 점 때문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퍄타코프는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일련의 트로츠키파 요원을 이 공업에 자리 잡게 하고, 외국 정보기관 대표 여럿에게 그곳으로 들어갈 길을 열어 주며, 화학 공업에서 파괴 행위와 파괴 공작을 조직하는 일을 직접 지도한다.
이에 관해, 그가 화학 공업에서 파괴 행위를 어떻게 조직했는지에 관해 퍄타코프의 진술에서 꽤 긴 대목을 인용한다. 이 진술에서 퍄타코프는 사회주의 건설을 허물기 위해 그들이 벌인 조치의 사슬 전체를 소름 끼칠 만큼 상세히 묘사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바는 이렇다.
“1931년에 베를린에서 돌아온 뒤 나는 노르킨에게 트로츠키의 지령에 따라 우리가 공업에서 파괴 행위 노선을 펼 것이라고 곧바로 말했다. 그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했고 나는 그를 케메로보로 보냈다. 파괴 행위 작업에서 가장 큰 효과를 낸다는 관점에서 볼 때, 케메로보 화학 콤비나트 건설은 당시(이것은 1933년의 일이었다) 가장 중대한 부문이었고, 국민 경제의 전체 체계에서, 특히 화학 계통에서 여기에 큰 기대가 걸려 있었다. 그러므로 국민 경제를 허물라는 트로츠키의 지령을 갖고 있던 우리가 가장 민감한 곳을 허물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노르킨의 파괴 행위 작업을 쉽게 해 주고 이를 더 넓게 펼칠 수 있게 하려고, 나는 그를 케메로보 건설 책임자 직에 임명되도록 했을 뿐 아니라 중공업인민위원부 전권위원의 권한도 주었다. 이것은 그에게 인접 건설에 개입할 기회를 주어 그곳에서 파괴 행위 조치를 벌일 수 있게 했고, 지방 조직들로부터 그의 파괴 행위 활동을 가려 주는 엄폐물 구실을 했다.
케메로보에서의 파괴 행위에 관해 내가 노르킨에게 내린 지시는 내가 이 대상의 중대성을 강조하며 건설을 파탄시키는 방향으로 최대한 정력을 쏟으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집약되었다. 노르킨은 케메로보에서 꽤 자주 모스크바로 와서 나를 찾아와 자기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했다. 케메로보에 머문 첫해(1933년)에 노르킨이 내게 말한 바로는, 그는 같은 종류의 건설 현장 여러 곳에 자금을 분산시켜 콤비나트의 가장 중요한 설비의 가동을 지연시킬 수 있었다. 노르킨은 내 지시를 활용해 대상 시설의 설계를 여러 차례 고쳐 만들었다. 이것으로도 그는 건설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
노르킨과의 어떤 대화에서 그가 케메로보 화학 콤비나트에서 파괴 행위 작업을 더 넓게 펼칠 수 있으며 그러기에 꽤 좋은 토양이 그곳에 있지만 자기 혼자서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 힘들다고 알려 오자, 그 뒤 나는 드롭니스를 그곳으로 보냈다. 이것은 1934년의 일이었다. 드롭니스를 케메로보로 보내면서 나는 또 하나의 임무를 염두에 두었다. 문제는 노르킨의 모든 파괴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에 아랑곳없이 화학 콤비나트가 그래도 자라고 넓어졌다는 데 있었다. 드롭니스를 그곳으로 보낸 것은 케메로보에서 파괴 행위 조치를 활성화하려는 목적이었다. 드롭니스가 도착하자 케메로보의 파괴 행위 작업은 훨씬 더 넓고 효과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들은 꽤 상당한 규모의 기사·기술 일꾼 그룹을 파괴 행위에 끌어들일 수 있었고, 더 많은 대상 시설(열병합발전소, 자동차 운수, 주택 건설)에 파괴 행위 조치를 미칠 수 있었다.”
(퍄타코프의 진술에서, 1936년 12월 4일자 조서).
퍄타코프가 자기 요원으로서 화학 공업의 지도적 업무에 앉힌 트로츠키파 라타이차크도 그들이 벌인 파괴 행위 작업의 사실들을 이야기한다.
“1933년에 국방적 의의를 갖는 새 화학 공장 건설 계획과 가동 중인 기업의 확장에 관한 정부 결정이 나왔는데, 공장마다 공장의 생산 능력과 공사 완료 기한이 정확히 정해져 있었다. 이 목적을 위해 1933년에 상응하는 자금이 배정되었다. 1933년 4분기부터 퍄타코프는 정부가 이 목적으로 배정한 자금을 깎아 다른 공업 부문에 썼다. 1934년 건설 계획을 정할 때 퍄타코프는 이 결정에 규정된 기본 공사들이 작정하고 파탄 나도록 신규 건설 예산을 정해 계획을 다시 짜라고 나에게 제안했다.”
(라타이차크, 수사 조서 [날짜 공란]).
끌어들여진 이들 중 한 사람인 기프로아조트의 전직 수석 기사 골로바노프는 자기가 쓴 파괴 행위 전술을 더 자세하게, 한층 더 파렴치하게 이야기한다.
“2년 동안 나는 생산 능력을 변경하는 방법으로 설계를 일부러 끌었고, 그 결과 건설 현장에는 지금까지도 작업 도면이 다 갖춰지지 않았으며, 콤비나트 가동은 이미 약 4000만 루블이 지출된 상태에서 정부 기한보다 대략 1년 반 늦게 이루어질 것이다.”
(골로바노프, 1936년 10월 28일자 수사 조서).
파괴 행위 작업과 나란히 트로츠키파 조직의 이 요원들은 파괴 공작도 준비했다.
트로츠키파의 이 전복 활동에 관한 파괴 공작원들의 진술 몇 가지가 여기 있다.
“고를롭카 공장에서 세 차례 파괴 공작이 실행되었다. 1934년 4월에 내 지시로 공장의 한 작업장에서 파괴 공작을 벌였다. 1934년 11월과 1935년에는 일련의 설비와 장치가 가동 불능이 되었다. 1934년에는 보스크레센스크와 네바 화학 콤비나트의 개별 작업장들이 사실상 가동 불능이 되었다. 퍄타코프의 지시에 따라 보스크레센스크와 네바 공장에서는 잘못된 기술 공정을 정해 냉각기 대부분을 부식시켜 가동 불능으로 만들었고, 이로써 생산물 산출량을 크게 떨어뜨렸다... 약 석 달 동안 두 공장은 산출량이 거의 절반으로 준 채 가동했다.”
([출처 공란]).
퍄타코프가 화학 공업의 큰 자리에 앉힌 파괴 분자이자 파괴 공작원 푸신은 10월 22일 신문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1934년 4월에 나는 고를롭카 공장의... 한 작업장에서 파괴 공작을 벌였다. 상당한 파괴와 인명 피해를 낳은 이 작업장의 폭발은 내 임무에 따라 탐 — 공장 기술 책임자가 준비하고 실행했다.
이러한 파괴 공작을 벌일 때 피할 수 없었던 인명 피해 외에도 폭발로 큰 파괴가 일어났다... 이 폭발은 공장 작업을 마비시켰고, 설비 파괴로 말미암아... 생산물 생산이 멈추었다. 1935년 11월에 탐은 내 임무에 따라 다른 작업장에서 폭발을 준비하고 실행했다...
설비 하나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두 번째 설비도 대략 절반이 파괴되었다. 이 파괴 공작으로 우리는 공장 전체를 한 달 넘게, 대략 30~35일 멈추게 하고 150만 — 200만 루블의 물적 손해를 입힐 수 있었다. 폭발 때 인명 피해가 있었다.”
이 공장의 전직 기술 책임자 — 푸신이 여기서 언급하는 파괴 분자 탐 — 은 신문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나는 1934년 4월에 한 작업장의 공정 구획에서 폭발을 준비하고 실행했으며, 이것은 인명 피해를 낳았다. 폭발로 작업장의 구획 하나가 파괴되었다... 이 파괴 공작의 결과 중요한 생산물의 생산이 멈추었다.
1935년 7월에 내가 모스크바에 있을 때 푸신은 한 작업장의 일련의 장치를 없애라는 임무를 주었다. 이때 푸신은 이 파괴 공작이 공장을 오랜 기간 가동 불능으로 만들 수밖에 없으므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할레조프와 아시놉스키는 폭발을 일으키려고 일련의 설비의 정해진 운전 규정을 어길 조건을 만들었고... 이것이 1935년 11월에 폭발을 일으켜 장치 두 대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것은 내가 벌인 파괴 공작 가운데 가장 큰 것이었다. 폭발은 인명 피해를 동반했고, 공장을 오랫동안 멈추게 했으며, 국가에 약 200만 루블에 달하는 큰 물적 손해를 입혔다. 이 파괴 공작에는 교대 기사 크루셸니츠키도 참가했다.”
(탐, 1936년 11월 5일자 수사 조서).
고를롭카에서 트로츠키파 조직이 벌인 파괴 공작 작업에 관해서는 기사였다가 뒷날 질소 비료 콤비나트의 기술 책임자가 된 아시놉스키도 올해 11월 6일에 진술했다.
“고를롭카 질소 비료 공장에서 반혁명 조직은 다음과 같은 파괴 공작을 실행했다. 1. 대략 1934년 4월에 설비 폭발을 조직해 한 작업장의 구획을 가동 불능으로 만들었다... 폭발 때 인명 피해가 있었다. 폭발의 결과 작업장은 7일 동안 멈춰 있었다. 2. 1934년 10월에 조직은 설비 두 대를 폭파했다. 그 결과 공장은 2시간 동안 멈췄다. 탐의 말에 따르면 이 파괴 공작은 할레조프가 자기가 끌어들인 반혁명 조직의 새 성원들을 통해 벌였다. 3. 1934년 11월 말에 반혁명 조직은 붕괴를 일으켰다... 4. 1935년 1월에 폭발을 일으켰고, 폭발의 결과 공장이 3주야 동안 멈췄다. 5. 1935년 11월 11일에 할레조프와 크루셸니츠키가 한 작업장에서 폭발을 조직했다. 폭발의 결과 공장은 3주 동안 멈춰 있었다. 복구 작업에는 대략 150만 — 200만 루블이 들었다. 이 파괴 공작에 관해서도 나는 탐의 말로 알고 있다. 탐은 이미 1935년 9월 말에 내게 직접, 반혁명 본부의 지령을 내세우며 이 파괴 공작을 실행하는 데 참여하라고 제안했다.”
코크스 화학 공업에서 벌어진 파괴 행위에 관해서는 우크라이나 트로츠키파 본부의 일원 로기노프의 다음과 같은 자백이 있다.
“라타이차크는 화학 공업의 파괴 행위 작업에 관해 자기가 퍄타코프에게서 받은 방침을 나에게 전했다. 라타이차크는 퍄타코프가 국방의 관점에서 예외적인 의의를 갖는 질소 공업의 발전을 파탄시키고 이 일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문제를 제기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거기서 코크스 화학 분야의 파괴 행위를 자세히 다루었고, 퍄타코프에게서 받은 모든 지시를 이 분야에서는 아주 쉽게 수행하고 실현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코크스로의 발전을 재촉하고 화학 작업장의 발전을 파탄시키는 노선이 정해졌다. 이 작업은 반혁명 트로츠키파 조직의 일원 G. A. 야놉스키의 도움으로 진행되어, 화학 작업장들은 코크스로보다 1½ — 2년, 늦게 가동되었다. 그 결과 화학 제품은 모두 공중으로 날아갔다.”
(로기노프의 진술에서, 1936년 10월 14일자 조서).
케메로보 화학 공업(케메로보 화학 콤비나트)에서의 파괴 행위 계획은 주로 상당한 정도로 국방적 의의를 갖는 특수 화학 공장들과 질소 비료 공장의 건설을 겨냥한 전복 활동을 규정했다. 계획은 노르킨이 드롭니스와 협의해 작성했고 무랄로프도 승인했다.
트로츠키파 조직 본부가 작성한 계획의 내용에 관해 화학 콤비나트 파괴 행위 작업의 지도자 드롭니스는 수사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계획은 주로 노르킨이 작성했고, 기본 임무들을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이 계획에 합류했다. 노르킨은 이 계획의 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케메로보 발전소는 지역 발전소로서 쿠즈바스 탄광들에 전력을 공급하니, 우리는 전력 공급의 전면 차단을 준비할 것이고, 그러면 곧바로 탄광 침수로 이어질 것이다. 둘째 요소로 — 계획은 코크스 화학 공장에서 미비한 작업을 해 두도록 규정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 노르킨이 내게 말했다 — 우리는 코크스 소성 계획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고, 더욱이 코크스의 품질은 회분과 습도 면에서 소비자를 전혀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코크스 화학 공장에서 우랄의 야금 공업이 공급을 받으므로, 이것이 상당한 효과를 내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계획의 세 번째 요소는 건설 중인 특수 화학 기업들의 가동을 파탄 내는 것이다. 특히 계획은 이 콤비나트의 건설을 늦추기 위해 질소 비료 콤비나트 건설에 배정된 자금을 부차적인 목적으로 빼돌리는 것을 예정했다. 가스 공장 설계의 작성과 질소 비료 공장 건설에 대한 전력 공급을 지연시키는 것이 예정되었다. 계획은 1937년에 쿠즈바스의 전력 공급에 심각한 차질을 빚기 위해 제3터빈의 설치를 파탄 내는 것을 정해 두었다.
이 계획이 퍄타코프가 제기한 과제들을 본질적으로 온전히 보장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대체로 승인했다. 나는 노르킨이 작성한 케메로보 화학 콤비나트 파괴 작업 계획의 내용을 보구슬랍스키에게 전했고, 이 계획을 무랄로프에게 알려 달라고 그에게 부탁했다.”
(드롭니스의 진술에서, 1936년 9월 21일자 조서).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조직은 쿠즈바스에서 쿠즈바스의 여러 크고 결정적인 탄광과 케메로보 화학 콤비나트의 주요 작업장을 망라하는 광범한 파괴 활동과 파괴 공작을 벌였다.
2. 석탄 공업에서의 파괴 행위와 파괴 공작
우리 모두는 케메로보에서 열린 트로츠키파 파괴 분자 재판을 기억한다. 재판에서 드러난 파괴 행위와 파괴 공작의 끔찍한 광경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가장 뛰어난 기계 설비를 망가뜨리고, 가장 뛰어난 스타하노프 노동자들을 독살하고 살해하려고 의식적으로 준비한 것이다.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본부는 우리 연료 경제의 이 중요한 부문인 쿠즈바스에서 파괴 활동을 실행하는 데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트로츠키파는 파괴 행위와 파괴 공작으로 우랄-쿠즈바스의 사회주의 건설의 최대 성과들을 파탄 내고, 그럼으로써 소연방에 제2 야금 기지를 창설한다는 당의 노선을 불신에 빠뜨리려 했다.
트로츠키파가 쿠즈바스에서의 전복 활동에 부여한 특별한 의의에 대하여, - 시베리아 트로츠키파 본부의 일원 드롭니스는 수사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퍄타코프는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본부가 쿠즈바스에서의 트로츠키파 활동에 특별한 의의를 부여한다고 내게 미리 알리고, 무랄로프에게 이 활동 부문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라고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테러 행위 준비와 관련된 지시들 말고도, 나는 퍄타코프에게서 쿠즈바스의 파괴 작업을 이끌고 지도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퍄타코프는 전복 활동 계획을 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활동에서 힘을 분산할 필요가 없으며 경제의 주도 부문들에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석탄, 금속, 화학 공업은 합쳐서 국민경제에 막대한 의의를 지닌다. 이런 견지에서 우리는 쿠즈바스에 타격을 집중해야 한다’, - 퍄타코프는 트로츠키파 본부의 새로운 강령적 방침을 이렇게 맺었다.”
(Ya. N. 드롭니스의 진술에서, 1936년 11월 21일자 조서).
시베리아 반혁명적 트로츠키파 본부의 또 다른 일원 보구슬랍스키도 수사에서 같은 내용을 진술했다.
“퍄타코프는 현재 우리의 과제가 쿠즈바스에서 파괴 작업을 조직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보구슬랍스키의 1936년 9월 23일자 진술에서).
쿠즈바스 파괴 활동의 전반적 지도는 무랄로프가 이끄는 시베리아 트로츠키파 본부에 맡겨졌다. 파괴 활동과 파괴 공작의 실제 수행은, 석탄 공업에서는 트로츠키파 테러 조직의 일원이자 프로코피옙스크·안제로-수젠스크 광업관리소의 전 관리자 셰스토프에게, 화학 공업에서는 화학 콤비나트 소장인 트로츠키파 노르킨과 그의 부소장 드롭니스에게 맡겨졌다.
퍄타코프와 트로츠키파·지노비예프파 본부의 지령과 지시를 이행하여, 쿠즈바스의 석탄 공업에서는 셰스토프가, 화학 공업에서는 노르킨이 드롭니스와 함께 파괴 활동 계획을 작성하고 실제로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