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1921

우크라이나 혁명과 전쟁

키예프의 정권은 왜 거듭 바뀌었는가?

중앙라다·헤트만·디렉토리아·소비에트 정부는 독립과 토지, 국가권력을 놓고 경쟁했다. 독일의 점령, 백군의 진격, 농민군의 동맹과 반란, 폴란드와의 협정이 하나의 전쟁 공간에서 만났다.

라다: 자치에서 독립으로

1917년 2월 혁명 뒤 키예프에 세워진 중앙라다는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대표권을 주장했다.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가 의장을 맡고 볼로디미르 빈니첸코가 총서기국을 이끌었다. 처음부터 모든 러시아와의 관계를 끊으려던 정부는 아니었다. 러시아의 민주적 연방 안에서 자치를 확보하려는 기대가 있었지만, 임시정부와의 권한 다툼과 볼셰비키의 집권은 그 길을 좁혔다.

라다는 1917년 11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1918년 1월에는 독립을 선언했다. 한편 하리코프에는 경쟁하는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됐고 안토노프-옵세옌코무라비요프의 군사작전이 뒤따랐다. 1918년 2월 소비에트군이 키예프를 장악했다. 어느 정부가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가의 문제는 선포문뿐 아니라 무력과 지방의 지지를 통해 결정되고 있었다.

독일군이 돌려준 수도, 독일군이 지탱한 헤트만

중앙라다는 2월 9일 중앙동맹국과 별도의 브레스트 조약을 맺었다.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소비에트군을 몰아내면서 키예프에 복귀했지만, 식량 공급을 요구하는 점령 당국과의 관계는 곧 악화했다. 4월 29일 파울로 스코로파츠키가 헤트만으로 집권했고 라다의 공화국은 우크라이나국으로 대체됐다. 협상과 점령의 국제적 경위는 브레스트 강화에서 다룬다.

헤트만 정권은 관료기구와 교육·학술기관을 세우고 외교 관계를 넓혔다. 그러나 토지 소유 질서의 복구와 곡물 반출은 농민의 토지혁명과 충돌했다. 독일군이 질서를 보장하는 동안에는 정권이 버틸 수 있었지만, 국내의 동의와 외국 군대의 보호는 같은 기반이 아니었다. 독일의 11월 패전이 그 차이를 드러냈다.

디렉토리아가 되찾은 키예프, 다시 잃은 키예프

1918년 11월 빈니첸코와 시몬 페틀류라 등이 디렉토리아를 구성해 헤트만에 맞섰다. 12월 스코로파츠키가 물러나고 인민공화국이 복구됐다. 하지만 반헤트만 연합은 안정된 국가군으로 통합되지 못했다. 지방의 아타만들은 토지와 식량, 자치에 대한 이해에 따라 동맹을 바꾸었다. 프랑스 등 연합국과 협력할지를 둘러싼 갈등도 지도부를 갈랐다.

1919년 1월 인민공화국과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통합을 선언했지만 군대와 행정은 곧바로 하나가 되지 않았다. 동쪽의 소비에트군, 서쪽의 폴란드군에 맞서는 전쟁은 서로 다른 우선순위를 낳았다. 2월 키예프가 다시 소비에트군에 넘어간 뒤 빈니첸코는 지도부를 떠났고 페틀류라의 군사·정치적 비중이 커졌다. 크리스티안 라콥스키의 소비에트 정부 역시 곡물 징발과 지방의 저항이라는 문제를 피하지 못했다.

흐리호리우·마흐노와 농민의 전쟁

니키포르 흐리호리우는 헤트만에 맞선 봉기에서 디렉토리아를 거쳐 적군과 결합했다. 그의 부대는 1919년 봄 남부에서 연합군을 압박했지만 5월 소비에트 권력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부대들이 자행한 반유대인 포그롬은 농민 저항이라는 말만으로 가려서는 안 되는 대규모 폭력이었다. 7월 흐리호리우는 마흐노 측과의 충돌에서 살해됐다.

훌랴이폴레를 기반으로 한 네스토르 마흐노는 아나키스트 농민군을 이끌었다. 볼린과 나바트 연합 등은 그 운동의 정치적 논의를 발전시켰다. 마흐노군은 적군과 협력해 백군에 맞섰지만 중앙집권적 당국가와 강제 징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19년 데니킨의 후방을 공격했고 1920년 브란겔에 맞서 다시 적군과 협력했다. 크림 승리 뒤 볼셰비키는 이 동맹군을 제거하는 작전에 나섰다. 마흐노는 1921년 국외로 탈출했다.

유대인 주민은 인민공화국 계열 부대, 독립 아타만 부대, 백군을 비롯한 여러 군대의 폭력에 노출됐다. 적군 부대의 가해도 있었다. 각 진영의 규모와 지휘 책임을 같게 취급해서는 안 되지만, 중앙정부의 금지 명령이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 현장의 가해와 처벌 실패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민간인에게 정권 교체는 거듭된 약탈·징발·학살과 피란을 뜻할 수 있었다.

데니킨의 점령과 국가 통합의 실패

1919년 여름 데니킨의 남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로 진입했다. 8월 말 인민공화국·갈리치아군과 백군이 키예프에 들어왔지만, 반볼셰비키라는 공통점은 동맹을 보장하지 않았다. 데니킨의 통일 러시아 구상은 우크라이나 국가의 독립을 거부했다. 인민공화국은 붉은 군대뿐 아니라 백군과도 싸워야 했고, 발진티푸스와 보급 붕괴는 군대를 무너뜨렸다.

백군은 도시를 점령해도 농촌의 안정적 지지를 확보하지 못했다. 토지 문제와 민족정책, 포그롬, 마흐노군의 후방 공격이 군사적 과잉 확장과 결합했다. 적군의 반격 속에서 12월 키예프는 다시 소비에트 지배로 넘어갔다. 모스크바 진격과 남부전선의 전체 작전은 러시아 내전에서 연결해 읽을 수 있다.

폴란드 동맹과 1921년의 패배

독자적 군사 기반을 잃은 페틀류라는 1920년 4월 피우수트스키와 바르샤바 협정을 맺었다. 폴란드의 인민공화국 승인을 얻는 대신 동갈리치아와 서부 볼히니아에 대한 폴란드의 지배를 받아들인 선택은 우크라이나 진영 내부에서도 반발을 낳았다. 4월 25일 시작된 합동 공세로 5월 키예프에 들어갔지만, 소비에트군의 반격으로 6월 철수했다. 이후 바르샤바 전투와 강화 협상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자세히 다룬다.

폴란드와 소비에트 측의 휴전 뒤 인민공화국군은 계속 싸웠으나 1920년 11월 패퇴해 폴란드에서 억류되었다. 1921년 3월 리가 조약에서 인민공화국은 협상 당사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해 11월의 마지막 원정도 실패했다.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는 대부분의 중부·동부 영토를 통치했고 서부 우크라이나의 상당 부분은 폴란드에 남았다.

이 결말을 처음부터 예정된 단일 민족국가의 실패나 러시아 내전의 지방 전선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국가 독립, 토지혁명, 사회주의의 형태, 외국의 개입이 서로 충돌했다.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형식적 국가 지위와 실질적 중앙 통제라는 모순은 1922년 소련 성립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결과

인민공화국은 패배하고 우크라이나 영토는 분할됐다.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국가 형식은 남았지만 정치·군사 권력은 볼셰비키 중앙에 결합되었다.

연표와 지도

키예프 하리코프 카메네츠포돌스크 훌랴이폴레 오데사
  1. 1917.03
    중앙라다 수립

    혁명 뒤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대표기구가 등장했다.

  2. 1918.01–02
    독립과 첫 키예프 상실

    독립 선언 뒤 소비에트군이 수도를 점령했다.

  3. 1918.04.29
    헤트만 집권

    스코로파츠키 정권이 라다를 대체했다.

  4. 1918.12
    디렉토리아의 승리

    반헤트만 봉기로 인민공화국이 복구됐다.

  5. 1919.02
    소비에트군의 키예프 재점령

    디렉토리아가 수도에서 철수했다.

  6. 1919.05
    흐리호리우 봉기

    반소비에트 봉기와 반유대인 학살이 벌어졌다.

  7. 1919.08–12
    백군 점령과 적군의 귀환

    데니킨의 진격과 패퇴 속에서 키예프의 권력이 다시 바뀌었다.

  8. 1920.04–06
    폴란드 동맹과 키예프 공세

    합동 공세 뒤 소비에트 반격으로 철수했다.

  9. 1921.03–11
    리가 조약과 마지막 원정의 실패

    인민공화국의 독립전쟁은 군사적 패배로 끝났다.

관련 인물 14명

지도부12

우크라이나국 헤트만파울로 스코로파츠키1873–1945

우크라이나국 헤트만로 이 사건에 관여했다.

디렉토리아와 인민공화국군 지도자시몬 페틀류라1879–1926

디렉토리아와 인민공화국군 지도자로 이 사건에 관여했다.

아나키스트 혁명반란군 지도자네스토르 마흐노1888–1934

아나키스트 혁명반란군 지도자로 이 사건에 관여했다.

우크라이나 독립을 거부한 백군 사령관안톤 데니킨1872–1947

우크라이나 독립을 거부한 백군 사령관로 이 사건에 관여했다.

우크라이나의 소비에트군 지휘관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1883–1938

우크라이나의 소비에트군 지휘관로 이 사건에 관여했다.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 수반크리스티안 라콥스키1873–1941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 수반로 이 사건에 관여했다.

1920년 페틀류라의 폴란드 동맹자유제프 피우수트스키1867–1935

1920년 페틀류라의 폴란드 동맹자로 이 사건에 관여했다.

우크라이나 초기 소비에트 정부 지도자예브게니야 보시1879–1925

우크라이나 초기 소비에트 정부 지도자로 이 사건에 관여했다.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지도자표도르 세르게예프 (아르툠 동지)1883–1921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지도자로 이 사건에 관여했다.

중앙라다 총서기국과 디렉토리아의 지도자볼로디미르 빈니첸코1880–1951

우크라이나 사회주의자이자 작가로 1917년 총서기국을 이끌고 1918년 반헤트만 디렉토리아의 초대 의장을 맡았다. 연합국과의 협력 및 국가 노선을 둘러싼 갈등으로 물러났고 독립 사회주의 우크라이나를 모색했다.

우크라이나 중앙라다 의장인 역사학자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1866–1934

우크라이나 역사를 독자적인 역사로 서술한 학자로 1917~1918년 중앙라다를 이끌었다. 자치에서 독립으로 나아간 공화국의 대표자였으며 망명 뒤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로 돌아왔지만 탄압과 감시를 겪었다.

적군과의 동맹을 뒤집은 우크라이나 아타만니키포르 흐리호리우c.1885–1919

반헤트만 부대에서 디렉토리아와 적군을 거쳐 1919년 5월 반소비에트 봉기를 일으켰다. 그의 부대는 반유대인 학살을 자행했다. 7월 마흐노 측과의 충돌에서 살해됐다. 동명의 사회주의 정치인과 다른 인물이다.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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