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1921

우크라이나 혁명과 전쟁

키예프의 정권은 왜 거듭 바뀌었는가?

1917년 3월 키예프에 세워진 중앙라다는 연방 러시아 안의 자치에서 출발해 1918년 1월 독립을 선언했지만, 그 뒤 4년 동안 키예프의 주인은 열 번 넘게 바뀌었다. 소비에트군, 독일 점령군과 헤트만 스코로파츠키, 빈니첸코페틀류라의 디렉토리아, 데니킨의 백군, 폴란드군이 차례로 도시를 차지했고, 그 사이에서 흐리호리우마흐노의 농민군은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자기 전쟁을 벌였다. 1,500건 안팎의 포그롬으로 유대인 수만 명이 살해되었다. 1920년 바르샤바 협정과 1921년 리가 조약으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독립전쟁은 끝났고,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형식적 국가 지위와 볼셰비키 중앙의 실질적 통제라는 모순이 남았다.

1917년의 키예프: 중앙라다는 무엇을 원했는가

1917년 3월 17일, 2월 혁명 소식이 닿은 지 열흘 만에 키예프의 우크라이나 정당과 단체들이 중앙라다를 세웠다. 의장은 열 권짜리 『우크라이나-루스의 역사』로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와 별개의 역사 주체로 서술한 역사학자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였다. 4월 전우크라이나 민족대회는 라다를 우크라이나의 대표기구로 승인했고, 6월 23일의 제1차 우니베르살(포고)은 임시정부의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자치를 선언했다. 집행기구인 총서기국을 작가이자 사회민주당원 볼로디미르 빈니첸코가 이끌었고, 시몬 페틀류라가 군사 담당 서기를 맡았다. 처음부터 러시아와 관계를 끊으려던 정부는 아니었다. 라다의 다수인 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과 사회민주당은 민주적 연방 러시아 안의 자치를 원했다. 그러나 7월 임시정부와 맺은 타협은 페트로그라드의 권한 축소 요구로 흔들렸고, 군대 안에서 진행된 부대의 「우크라이나화」는 라다에 무장 기반을 주었다.

10월 혁명은 이 균형을 깨뜨렸다. 라다는 페트로그라드의 봉기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케렌스키를 지지하지 않았고, 11월 20일 제3차 우니베르살로 「러시아 연방 안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토지의 사유를 폐지하고 8시간 노동제와 소수민족의 자치를 약속하는 사회주의적 강령이었다. 볼셰비키에게 라다는 무기를 가진 경쟁자였다. 12월 17일 인민위원회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라다가 돈 카자크의 칼레딘을 향한 적위대의 통과를 막고 우크라이나화된 부대를 전선에서 빼내고 있다는 이유였다. 12월 키예프에서 열린 전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대회에서 볼셰비키는 소수였다. 그들은 회의장을 떠나 하리코프로 옮겨 12월 25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정부를 선포했다. 제헌의회 선거에서 우크라이나 지역의 표는 우크라이나 계열 정당에 다수가 몰렸고 볼셰비키는 1할 안팎을 얻었다. 어느 정부가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가는 선포문이 아니라 무력과 지방의 지지로 결정될 문제였다.

1918년 1~2월: 독립 선언과 첫 상실

1918년 1월 22일 라다는 제4차 우니베르살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다. 브레스트에서 독자 강화를 맺기 위해 필요한 국제법적 지위이기도 했다. 그러나 선언이 나올 무렵 무라비요프가 지휘하는 소비에트군은 이미 키예프로 진격하고 있었다. 1월 29일 크루티 역에서 키예프의 사관생도와 학생 수백 명이 이를 막으려다 수십 명이 죽었다. 같은 날 키예프 아르세날 공장의 노동자들이 봉기해 라다군과 시가전을 벌였고, 2월 4일 시치 소총부대에 진압되었다. 2월 9일 무라비요프의 부대가 도시에 들어왔다. 며칠간의 처형으로 수천 명이 죽었다는 추계가 있으며, 우크라이나어를 쓰는 사람과 장교가 표적이 되었다. 라다는 지토미르로 물러났다.

같은 날 브레스트에서 라다 대표단은 중앙동맹국과 별도의 강화 조약에 서명했다. 곡물 100만 톤을 대가로 승인과 군사 지원을 얻는 거래였다. 2월 18일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우크라이나로 진입했고, 3월 1일 라다는 독일군 뒤를 따라 키예프로 돌아왔다. 하리코프의 소비에트 정부와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공화국을 선포한 아르툠의 세력은 동쪽으로 밀려났다. 이 협상과 점령의 국제적 경위는 브레스트 강화에서 다룬다. 우크라이나에서 그것이 뜻한 것은 정권이 외국 군대의 힘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독일군이 돌려준 수도, 독일군이 지탱한 헤트만

점령군과 라다의 관계는 곧 악화했다. 1월 31일 라다가 공포한 토지법은 대토지를 보상 없이 사회화했지만, 독일군에게 필요한 것은 곡물이었고 곡물은 대농장에서 나왔다. 독일 사령관 아이히호른은 4월 6일 농민에게 지주의 땅에 파종할 것을 명령하고 4월 25일 우크라이나에 독일 군법회의를 도입했다. 라다가 항의하자 4월 28일 독일 병사들이 회의장에 들어와 의원들의 몸을 수색했다. 다음 날 4월 29일 키예프 서커스 건물에서 열린 지주연합 대회는 구 제국군 장군 파울로 스코로파츠키를 「전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으로 추대했다. 17세기 카자크 국가의 칭호를 빌린 정권이었고, 라다의 인민공화국은 「우크라이나국」으로 대체되었다.

헤트만 정부는 관료 기구를 세우고 은행과 철도를 되살렸으며 외교 관계를 넓혔다. 11월 14일 블라디미르 베르나츠키를 초대 원장으로 하는 우크라이나 과학 아카데미가 창립되었고, 카메네츠-포돌스크에 우크라이나어 대학이, 키예프에 국립도서관이 세워졌다. 그러나 정권의 사회 기반은 좁았다. 지주에게 토지를 되돌리고 형벌 원정대가 마을에서 곡물과 배상금을 거두는 동안 농촌은 무장했다. 6월 즈베니호로드카와 타라샤 지역에서 수만 명 규모의 농민 봉기가 일어나 두 달 넘게 진압되지 않았다. 7월 30일 아이히호른이 키예프에서 암살되었다. 점령군이 질서를 보장하는 동안 정권은 버틸 수 있었지만, 국내의 동의와 외국 군대의 보호는 같은 기반이 아니었다. 독일의 11월 패전이 그 차이를 드러냈다. 11월 14일 스코로파츠키는 장래의 비볼셰비키 러시아와 연방을 이루겠다는 헌장을 발표했다. 우크라이나 독립을 버리고 백군과 연합국에 기대려는 선택이었고, 그날 밤 반란이 시작되었다.

디렉토리아: 두 개의 전선과 하나의 정부

1918년 11월 13일 밤 빈니첸코, 페틀류라, 시베츠, 안드리옙스키, 마카렌코 5인의 디렉토리아가 결성되었다. 예브헨 코노발레츠의 시치 소총부대가 빌라체르크바에서 봉기했고, 11월 18일 모토빌리우카에서 헤트만군을 격파했다. 농민 부대들이 사방에서 합류했다. 12월 14일 스코로파츠키는 퇴위 문서에 서명하고 독일군과 함께 도시를 떠났으며, 디렉토리아는 인민공화국의 복구를 선포했다. 그러나 반헤트만 연합은 국가군이 되지 못했다. 봉기에 합류한 지방의 아타만들은 토지와 식량, 자치에 관한 저마다의 이해에 따라 동맹을 바꾸었고, 디렉토리아는 그들에게 급여도 명령도 확실히 전달할 수 없었다.

정부 안에서도 노선이 갈렸다. 빈니첸코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협상하고 노동자·농민 평의회 방식의 국가를 세우려 했고, 페틀류라는 군사적 승리와 연합국의 지원을 우선했다. 12월 오데사에 프랑스군이 상륙해 이듬해 4월까지 남부 항구들을 점령했지만, 프랑스는 디렉토리아를 승인하지 않고 백군을 지지했다. 1919년 1월 22일 키예프의 소피아 광장에서 인민공화국과 갈리치아의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통합을 선언했다. 그러나 두 정부의 군대와 행정은 하나가 되지 않았고, 서쪽에서 폴란드와 싸우는 갈리치아군과 동쪽에서 소비에트군과 싸우는 디렉토리아군은 서로 다른 적을 우선했다.

소비에트군은 이미 다시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1919년 1월 3일 하리코프가, 2월 5일 키예프가 다시 소비에트 손에 들어갔다. 니콜라이 시초르스의 보훈 연대가 도시에 처음 들어왔다. 빈니첸코는 2월 지도부를 떠나 국외로 나갔고 페틀류라가 디렉토리아의 수반이 되었다. 정부는 빈니차, 카메네츠-포돌스크로 옮겨 다니며 「열차 위의 공화국」이라는 조롱을 들었다. 한편 하리코프에 세워진 크리스티안 라콥스키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식 곡물 징발과 국영 농장, 빈농위원회를 그대로 옮겨 왔다. 우크라이나어와 우크라이나 공산주의자의 자리를 인정하지 않는 정책은 몇 달 만에 농촌의 광범한 봉기를 불러왔다. 젤레니, 소콜롭스키, 안헬 같은 아타만들이 키예프 주변에서 소비에트군을 공격했다.

아타만 시대: 흐리호리우와 마흐노

니키포르 흐리호리우는 구 제국군 장교로 헤트만에 맞선 봉기에 참여한 뒤 디렉토리아의 아타만이 되었고, 1919년 2월 부대를 이끌고 소비에트군에 합류했다. 그의 부대는 3월 10일 헤르손을, 이어 니콜라예프를 점령하고 4월 6일 프랑스군과 그리스군이 철수하는 오데사에 입성했다. 남부에서 연합국 개입을 끝낸 것은 사실상 이 농민군이었다. 그러나 5월 7일과 8일 그는 「우니베르살」을 발표하고 소비에트 권력에 반란을 일으켰다. 곡물 징발과 외지인 관료를 겨눈 호소문이었다. 봉기는 며칠 만에 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 체르카시까지 번졌고, 5월 15일부터 17일까지 옐리사베트흐라드에서 그의 부대는 유대인 1,500명 이상을 학살했다. 농민 저항이라는 말만으로 가려서는 안 되는 대규모 폭력이었다. 보로실로프파르호멘코가 지휘한 소비에트군은 5월 말까지 봉기를 진압했고, 7월 27일 흐리호리우는 마흐노와의 회담 자리에서 마흐노 측에 사살되었다.

네스토르 마흐노는 훌랴이폴레의 아나키스트 농민군을 이끌었다. 1918년 여름 오스트리아군과 헤트만의 형벌대에 맞선 유격전에서 시작한 부대는 1919년 초 소비에트군 제3여단으로 편입되어 데니킨군과 싸웠다. 볼린을 비롯한 나바트 연합의 아나키스트들이 이 운동의 정치적 논의를 이끌었다. 그러나 마흐노군은 중앙집권적 당국가와 강제 징발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6월 트로츠키는 마흐노를 법외로 선언했다. 데니킨이 여름 공세로 우크라이나를 휩쓸자 9월 26일 페레호놉카 전투에서 마흐노군은 백군을 격파하고 며칠 만에 백군의 후방 수백 킬로미터를 가로질러 예카테리노슬라프를 점령했다. 모스크바로 향하던 데니킨은 병력을 돌려야 했다. 1920년 1월 소비에트군은 다시 마흐노를 법외로 선언했고, 10월 브란겔에 맞서 세 번째로 동맹을 맺었다. 마흐노 기병은 시바시를 건너 크림 공격에 참여했다. 크림이 떨어진 직후인 11월 26일 소비에트군은 크림에 있던 마흐노 부대를 공격하고 훌랴이폴레를 포위했다. 1921년 8월 28일 마흐노는 부하 수십 명과 함께 루마니아로 탈출했다.

1918년부터 1921년까지 우크라이나에서 1,500건 안팎의 포그롬이 일어났고, 사망자는 5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추산된다. 가해자는 디렉토리아 계열 부대, 독립 아타만, 백군, 그리고 적군 부대에 걸쳐 있었으며, 각 진영의 비중은 달랐다. 1919년 2월 15일 프로스쿠로프에서 디렉토리아의 자포로제 카자크 부대는 몇 시간 동안 유대인 1,500명 이상을 살해했다. 페틀류라는 포그롬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고 사령관 세메센코는 뒤에 처형되었지만, 명령의 존재가 현장의 가해와 처벌의 지연을 지우지는 못한다. 1926년 파리에서 페틀류라를 사살한 숄렘 슈바르츠바르트가 이듬해 무죄 판결을 받은 재판은 이 책임 논쟁을 국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민간인에게 정권 교체는 거듭된 약탈과 징발, 학살과 피란을 뜻했다.

백군의 우크라이나: 데니킨과 「단일 불가분의 러시아」

1919년 여름 데니킨의 남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로 밀고 들어왔다. 6월 25일 하리코프가 떨어졌고, 7월 3일 데니킨은 모스크바 진격 명령을 내렸다. 8월 31일 키예프에는 두 군대가 동시에 들어왔다. 갈리치아군과 디렉토리아군이 서쪽에서, 브레도프의 백군이 동쪽에서 들어왔고, 양측은 시청에 나란히 깃발을 걸었다가 그날 저녁 백군이 우크라이나 깃발을 끌어내렸다. 우크라이나군은 충돌을 피해 도시를 내주었다. 반볼셰비키라는 공통점은 동맹을 만들지 못했다. 데니킨은 우크라이나를 「소러시아」라 부르며 독립을 부정했고, 우크라이나어 학교의 국가 지원을 끊고 우크라이나 기관을 폐쇄했다. 인민공화국은 이제 소비에트군과 백군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고, 가을에는 발진티푸스가 군대를 무너뜨렸다. 11월 6일 갈리치아군 지휘부는 독자적으로 데니킨과 정전을 맺었고, 12월 초 페틀류라는 남은 병력을 오멜랴노비치-파블렌코에게 맡겨 소비에트와 백군의 후방을 가로지르는 「제1차 겨울 원정」에 보낸 뒤 바르샤바로 떠났다.

백군은 도시를 점령했지만 농촌을 얻지 못했다. 지주의 복귀, 징발, 포그롬이 마흐노군의 후방 공격과 결합했다. 백군 부대가 1919년 9월 파스티프와 10월 키예프에서 벌인 포그롬은 이 시기 가장 큰 학살에 속했다. 오룔까지 갔던 데니킨의 공세는 10월 중순 꺾였고, 12월 16일 소비에트군이 키예프를 다시 점령했다. 모스크바 진격과 남부전선의 전체 작전은 러시아 내전에서 연결해 읽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1919년은 한 해 동안 키예프의 주인이 네 번 바뀐 해였다.

바르샤바 협정과 마지막 원정

독자적 군사 기반을 잃은 페틀류라는 1920년 4월 21일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바르샤바 협정을 맺었다. 폴란드는 인민공화국을 승인하고 함께 소비에트군과 싸우기로 했으며, 그 대가로 우크라이나는 즈브루치 강을 경계로 동갈리치아와 서부 볼히니아를 폴란드 영토로 인정했다.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땅을 넘긴 이 선택은 갈리치아 출신들에게 배신으로 받아들여졌고, 우크라이나 진영을 다시 갈랐다. 4월 25일 시작된 합동 공세로 폴란드군과 우크라이나군은 5월 7일 키예프에 들어갔다. 그러나 페틀류라의 이름으로도 농민의 대중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6월 5일 부됸니의 제1기병군이 전선을 돌파하자 폴란드군은 6월 12일 키예프를 떠났다. 이후 바르샤바 전투와 강화 협상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다룬다. 우크라이나군 제6사단은 8월 자모시치 방어전에서 부됸니의 기병을 막아 내는 데 참여했다.

10월 폴란드와 소비에트가 휴전하자 인민공화국군 2만여 명은 홀로 남았다. 11월 10일 시작된 소비에트군의 공세에 밀려 11월 21일 군대는 즈브루치 강을 건너 폴란드에 억류되었다. 칼리시와 알렉산드루프 등의 수용소가 이후 몇 년 동안 망명 군대의 거처가 되었다. 1921년 3월 18일 리가 조약에서 폴란드는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를 승인했고, 인민공화국은 협상 당사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해 11월 티우티우니크가 이끄는 「제2차 겨울 원정」이 볼히니아로 들어가 봉기를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11월 21일 바자르에서 포로 359명이 총살되었다. 홀로드니 야르를 비롯한 농민 저항은 1922년까지 이어졌지만, 우크라이나 독립전쟁의 정규군은 여기서 끝났다.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는 하리코프를 수도로 하여 우크라이나 중부와 동부, 남부를 통치했고,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폴란드에, 부코비나는 루마니아에,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는 체코슬로바키아에 속하게 되었다. 1920년 12월 28일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와 소비에트 러시아는 군사·경제 동맹 조약을 맺었고, 2년 뒤 소련에 들어갔다.

평가: 민족혁명인가, 내전의 한 전선인가

우크라이나의 1917년부터 1921년은 오래 두 개의 이름으로 불렸다. 우크라이나 망명 역사학은 이를 「우크라이나 혁명」 또는 「독립전쟁」이라 불렀고, 소비에트 서술은 「우크라이나의 10월 혁명과 내전」이라 불렀다. 앞의 서술에서 라다와 디렉토리아는 민족국가를 세우려다 러시아의 두 세력에 짓밟힌 주인공이며, 뒤의 서술에서 그들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로 외국 군대를 불러들인 배신자였다. 흐루셰프스키가 1924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로 돌아와 감시 속에서 죽은 것과, 페틀류라가 파리에서 살해된 것은 이 두 서술이 사람의 운명이었음을 보여 준다.

1991년 이후 연구는 두 서술을 모두 흔들었다. 존 레셰타르 이래의 서방 연구가 지적한 것은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의 사회적 기반이 좁았고 농민에게 민족과 토지 가운데 토지가 먼저였다는 사실이다. 안드레아 그라치오시는 이 시기를 「소비에트 농민 대전쟁」의 첫 국면으로 읽으면서, 아타만과 마흐노와 흐리호리우의 봉기가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농민의 독자적 전쟁이었다고 보았다. 포그롬 연구는 헨리 에이브럼슨과 제프리 베이들링거의 작업으로 가해 주체의 비중과 책임 구조를 다시 세웠고, 1919년 우크라이나의 학살이 다음 세대 유럽의 대량 살해를 예고하는 사건이었다고 본다. 마흐노 운동은 아나키즘의 유일한 대규모 실험으로 읽히기도 하고, 농민 지역주의로 읽히기도 한다.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결말 자체도 단순하지 않았다. 형식적 국가 지위는 남았고 1920년대 우크라이나화 정책이 뒤따랐지만, 정치와 군사 권력은 볼셰비키 중앙에 결합되었다. 보로트비스트 같은 우크라이나 좌파가 당에 흡수되고, 슘스키와 스크립니크의 민족 공산주의가 뒤에 숙청된 과정은 1922년 소련 성립의 논쟁으로 이어진다. 이 결말을 처음부터 예정된 민족국가의 실패나 러시아 내전의 지방 전선 하나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국가 독립, 토지혁명, 사회주의의 형태, 외국의 개입이 서로 충돌하며 한 세기 동안 우크라이나 정치의 기억을 만들었다.

결과

인민공화국은 패배했고 우크라이나 영토는 분할되었다. 중부·동부·남부는 하리코프를 수도로 하는 소비에트 우크라이나가,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폴란드가, 부코비나는 루마니아가,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차지했다. 1920년 12월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동맹 조약을 맺고 1922년 소련에 들어갔다. 국가의 형식은 남았고 1920년대 우크라이나화가 뒤따랐지만, 정치와 군사 권력은 볼셰비키 중앙에 결합되었다. 페틀류라의 파리 피살과 슈바르츠바르트 재판, 흐루셰프스키의 귀국과 감시 속의 죽음은 이 시기의 논쟁이 사람의 운명이 된 사례였다.

연표와 지도

키예프 하리코프 프로스쿠로프 카메네츠-포돌스크 옐리사베트흐라드 예카테리노슬라프 훌랴이폴레 오데사 14 바르샤바 3 크루티 16 바자르 1 키예프 4 키예프 5 키예프 6 키예프 7 키예프 11 키예프 13 키예프 2 하리코프 8 프로스쿠로프 10 옐리사베트흐라드 12 페레호놉카 15 훌랴이폴레 9 오데사
  1. 11917.03.17
    중앙라다 수립

    2월 혁명 뒤 키예프의 우크라이나 정당과 단체들이 역사학자 흐루셰프스키를 의장으로 중앙라다를 세웠다. 6월 제1차 우니베르살로 자치를 선언하고 빈니첸코의 총서기국을 구성했다.

  2. 21917.11.20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선포

    제3차 우니베르살이 「러시아 연방 안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토지 사유 폐지와 8시간 노동제를 약속했다. 12월 볼셰비키는 키예프의 소비에트 대회를 떠나 하리코프에서 경쟁하는 소비에트 정부를 세웠다.

  3. 31918.01.22–02.09
    독립 선언과 키예프 상실

    제4차 우니베르살이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다. 1월 29일 크루티에서 학생 부대가 무라비요프의 소비에트군을 막으려다 희생되었고, 아르세날 봉기가 진압된 뒤 2월 9일 소비에트군이 키예프에 들어왔다. 며칠간의 처형으로 수천 명이 죽었다는 추계가 있다.

  4. 41918.03.01
    독일군과 함께 돌아온 라다

    브레스트의 별도 강화에 따라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약 45만 명이 우크라이나에 진입했고, 라다는 3월 1일 키예프로 돌아왔다. 점령군의 곡물 요구와 라다의 토지 사회화 법은 곧 충돌했다.

  5. 51918.04.29
    헤트만 집권

    독일 병사들이 라다 회의장을 수색한 다음 날 지주연합 대회가 스코로파츠키를 헤트만으로 추대했다. 정권은 과학 아카데미와 대학을 세웠지만 지주 토지를 되돌리고 형벌대를 보내 농촌을 무장시켰다. 7월 30일 독일 사령관 아이히호른이 암살되었다.

  6. 61918.12.14
    디렉토리아의 승리

    독일 패전 뒤 헤트만이 러시아와의 연방을 선언하자 빈니첸코와 페틀류라의 디렉토리아가 봉기했다. 코노발레츠의 시치 소총부대가 모토빌리우카에서 헤트만군을 격파했고, 스코로파츠키는 12월 14일 퇴위하고 독일군과 함께 떠났다.

  7. 71919.01.22–02.05
    통합 선언과 두 번째 키예프 상실

    소피아 광장에서 인민공화국과 갈리치아의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통합을 선언했다. 2주 뒤 소비에트군이 키예프를 다시 점령했고, 빈니첸코는 지도부를 떠나 페틀류라가 디렉토리아를 이끌었다. 하리코프에는 라콥스키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가 세워졌다.

  8. 81919.02.15
    프로스쿠로프 포그롬

    디렉토리아의 자포로제 카자크 부대가 몇 시간 동안 유대인 1,500명 이상을 살해했다. 1918년부터 1921년까지 우크라이나에서 1,500건 안팎의 포그롬으로 5만 명에서 1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며, 가해자는 디렉토리아 부대, 아타만, 백군, 적군에 걸쳐 있었다.

  9. 91919.04.06
    흐리호리우의 오데사 입성

    소비에트군에 합류한 아타만 흐리호리우의 부대가 헤르손과 니콜라예프를 거쳐 프랑스군과 그리스군이 철수하는 오데사에 들어왔다. 남부의 연합국 개입을 끝낸 것은 사실상 이 농민군이었다.

  10. 101919.05.07
    흐리호리우 봉기

    흐리호리우가 「우니베르살」을 발표하고 곡물 징발과 외지인 관료를 겨눠 소비에트 권력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부대는 옐리사베트흐라드에서 유대인 1,500명 이상을 학살했다. 봉기는 5월 말 진압되었고, 7월 27일 그는 마흐노 측에 사살되었다.

  11. 111919.08.31
    키예프의 두 군대

    갈리치아군과 디렉토리아군, 그리고 브레도프의 백군이 같은 날 키예프에 들어왔다. 백군이 시청의 우크라이나 깃발을 끌어내렸고, 우크라이나군은 도시를 내주었다. 데니킨은 우크라이나 독립을 부정하고 우크라이나어 학교의 지원을 끊었다.

  12. 121919.09.26
    페레호놉카: 마흐노, 백군의 후방을 끊다

    6월 법외로 선언되었던 마흐노군이 페레호놉카에서 백군을 격파하고 며칠 만에 후방 수백 킬로미터를 가로질러 예카테리노슬라프를 점령했다. 모스크바로 향하던 데니킨은 병력을 돌려야 했다.

  13. 131919.12.16
    소비에트군의 키예프 재점령

    오룔에서 꺾인 데니킨군이 물러나면서 소비에트군이 키예프를 다시 차지했다. 갈리치아군은 11월 데니킨과 정전했고, 페틀류라는 남은 병력을 「제1차 겨울 원정」에 보낸 뒤 바르샤바로 떠났다. 1919년 키예프의 주인은 네 번 바뀌었다.

  14. 141920.04.21
    바르샤바 협정과 키예프 공세

    페틀류라가 피우수트스키와 협정을 맺어 폴란드의 승인을 얻는 대신 동갈리치아와 서부 볼히니아를 넘겼다. 합동 공세로 5월 7일 키예프에 들어갔지만 농민 봉기는 없었고, 6월 부됸니의 기병군이 전선을 돌파하자 폴란드군은 도시를 떠났다.

  15. 151920.11.26
    마흐노군에 대한 공격

    브란겔에 맞선 세 번째 동맹으로 시바시를 건넜던 마흐노 부대를 크림이 함락된 직후 소비에트군이 공격하고 훌랴이폴레를 포위했다. 마흐노는 1921년 8월 루마니아로 탈출했다.

  16. 161921.03.18–11.21
    리가 조약과 바자르

    리가 조약에서 폴란드는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를 승인했고 인민공화국은 당사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11월 티우티우니크의 「제2차 겨울 원정」이 실패해 바자르에서 포로 359명이 총살되었다. 정규군의 독립전쟁은 여기서 끝났다.

관련 인물 14명

지도부12

우크라이나국 헤트만파울로 스코로파츠키1873–1945

1918년 4월 29일부터 12월 14일까지 독일군의 보호 아래 우크라이나국의 헤트만으로 통치했고, 과학 아카데미를 세웠으나 지주 토지 복구로 농민 봉기를 불렀다.

디렉토리아와 인민공화국군 지도자시몬 페틀류라1879–1926

1919년 2월부터 디렉토리아의 수반으로 인민공화국군을 이끌었고, 1920년 4월 피우수트스키와 바르샤바 협정을 맺어 갈리치아를 내주는 대가로 폴란드의 동맹을 얻었다.

아나키스트 혁명반란군 지도자네스토르 마흐노1888–1934

훌랴이폴레의 아나키스트 농민군을 이끌고 소비에트군과 세 차례 동맹하고 세 차례 갈라졌으며, 1919년 9월 페레호놉카에서 데니킨의 후방을 끊었다.

우크라이나 독립을 거부한 백군 사령관안톤 데니킨1872–1947

1919년 여름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 「소러시아」로 부르며 독립을 부정했으며, 우크라이나어 학교 지원을 끊어 인민공화국을 적으로 돌렸다.

우크라이나의 소비에트군 지휘관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1883–1938

1917년 12월과 1919년 초 두 차례 우크라이나 전선의 소비에트군을 총지휘해 키예프를 점령했다.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 수반크리스티안 라콥스키1873–1941

1919년 1월부터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의 수반으로 러시아식 징발과 국영 농장 정책을 시행해 농민 봉기를 불렀고, 1920년대 우크라이나의 권한을 옹호했다.

1920년 페틀류라의 폴란드 동맹자유제프 피우수트스키1867–1935

1920년 4월 페틀류라와 바르샤바 협정을 맺고 합동 공세로 5월 키예프에 들어갔으나 6월 철수했다.

우크라이나 초기 소비에트 정부 지도자예브게니야 보시1879–1925

1917년 12월 하리코프에서 세워진 첫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인민서기국)의 내무 담당으로 라다에 맞선 초기 전쟁을 이끌었다.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 지도자표도르 세르게예프 (아르툠 동지)1883–1921

1918년 2월 하리코프에서 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해 우크라이나와 별개의 노동자 공화국을 세우려 했다.

중앙라다 총서기국과 디렉토리아의 지도자볼로디미르 빈니첸코1880–1951

1917년 총서기국 의장으로 자치와 인민공화국 선포를 이끌었고, 1918년 12월 디렉토리아 초대 의장으로 키예프를 되찾았다가 1919년 2월 페틀류라와 갈라져 사임했다.

우크라이나 중앙라다 의장인 역사학자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1866–1934

1917년 3월부터 중앙라다 의장으로 자치에서 독립으로 이어지는 우니베르살들을 주도했고 1918년 4월 헤트만 쿠데타로 물러났다.

적군과의 동맹을 뒤집은 우크라이나 아타만니키포르 흐리호리우c.1885–1919

1919년 4월 소비에트군 편에서 오데사를 점령한 뒤 5월 반란을 일으켰고, 그의 부대는 옐리사베트흐라드에서 유대인 1,500명 이상을 학살했다. 7월 마흐노 측에 사살되었다.

관련 용어

출처: John S. Reshetar, The Ukrainian Revolution, 1917–1920: A Study in Nationalism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2)Andrea Graziosi, The Great Soviet Peasant War: Bolsheviks and Peasants, 1917–1933 (Harvard Ukrainian Research Institute, 1996)Henry Abramson, A Prayer for the Government: Ukrainians and Jews in Revolutionary Times, 1917–1920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Jeffrey Veidlinger, In the Midst of Civilized Europe: The Pogroms of 1918–1921 and the Onset of the Holocaust (Metropolitan Books, 2021)Michael Malet, Nestor Makhno in the Russian Civil War (Macmillan, 1982)Serhy Yekelchyk, Ukraine: Birth of a Modern N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ch. 4자료 7자료 8자료 9자료 10자료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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